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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44호
단기 4343. 5. 6 (음력 3. 2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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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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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춘추>2010년 여름호 신인문학상 작품공모
본지는 명실 공히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원로. 중진. 신예. 신인을 골고루 참여토록 안배하는 권위 있는 종합문예지로서 21세기문학세계화를 도모함에 따른 참신하고 유능한 신인작품을 공모합니다. 아울러 세계최초 최대의 개화육필문예공원(개화육필문예공원 185천여평방킬로미터)과 항일민족시인추모공원(시와 숲길), 한국현대문학100주년기념탑건립 등 한국문단의 역사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문예지입니다.
신인등단대상 장르; 시. 시조. 문학평론. 아동문학. 희곡. 수필 소설 번역문학 작품공모
*시상구분 당선작
가)당선경우 1회로서 3편 게재하여 등단확정(당선자는 당연 <한국문예춘추문인회> 회원이 되고, 1년 작품 활동 경과 후에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국제펜클럽회원>의 자격이 주어진다.)
1종류 : 시 시조 (5편). 소설. 시 평론. 아동문학. 희곡. 번역문학 각 3편(20매-50매 이내 /컴퓨터 디스켓 작성 제출환영)원고 말미에는 반드시 상세한 연락처. 주소. 전화번호. 응모 해당분야 직업 등을 기입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메일로도 접수함seeywoo@chol.com seeywoo@naver.com seeywoo@hanmail.net (신인문학상 응모작 표시요망)
3.보낼 곳
우편번호152-051* 제 1주소: 서울시.구로구구로1동642-46우방(A)관리사무소 옆 *사단법인 : 한국육필문예보존회, 한국문예춘추문인협회 사무국(계간: 문예춘추 편집실)
*문의전화: 02-855-9117(011-9766-5337)
4.마감: 6월 말일까지 도착요망(6월 12일(일)소인 유호) 한국문예춘추문인회 (www.yookpilsi.co.kr 또는 cafe.daum.net/plfltl)에 공식 발표 또는 개별통보
6.당선자는 기성시인으로 인정함. 당선자에게는 당선 패를 전달하며 문예춘추에 당선작품을 게재하고 본 보존회 발행 대사전판형 「한국육필문예연감」에 당선작과 당선인의 인적사항을 등재합니다.
*본지고문: 황금찬. 김남조. 김지향. 이근배 *심의위원: 김양식.김용재.윤강로.이상범.이수화.이양우.채규판.채수영.임계순.엄기원,유현종, 도창회, 김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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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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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잡초로 가득 찬 정원과 같다.(하우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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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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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씨 하나 잘못 쓰면
글을 쓸 때 토씨(조사)나 어미를 잘못 쓰면 주장하고자 하는 뜻과 다른 뜻의 문장이 되어버릴 수 있다. 심하면 정반대의 뜻이 될 수도 있다. 우리말은 조사와 어미가 문장의 맥을 이어가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미디어법은 정부의 주장대로 일자리 창출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언론미디어 규제를 완화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정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의 신문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미디어법이 시행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정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뒤 내린 마지막 결론이 아주 우스운 말이 되고 말았다. 정부는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주장했는데, 정부 역시 일자리 창출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부의 주장대로’라는 부사구에 문제가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라는 부사구가 ‘전혀 별개의 것이다’라는 술부를 꾸미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가 정부의 주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정부의 주장대로’라는 부사구를 ‘정부가 주장하는’이라는 관형절 또는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라는 부사구로 바꿔야 제 뜻이 살아난다. 그렇게 하면 ‘정부가 주장하는’이라는 관형절은 ‘일자리 창출’까지만 꾸미기 때문에 뒤따르는 “일자리 창출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는 정부의 주장이 아닌 글쓴이의 주장이 된다. 토씨 하나 잘못 쓰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우재욱/시인
어미 ‘ㄹ게’
‘-ㄹ게’는 어떤 것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뜻을 나타낸다.‘다시 연락할게.’ 소리는 (-ㄹ께)로 난다. 그래서 ‘-ㄹ께’로 적기 쉽지만 ‘-ㄹ게’로 표기한다. 이유는 한글 맞춤법에서 ‘ㄹ’ 뒤에서 된소리로 발음되는 것은 된소리로 적지 않는다고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으)ㄹ거나’ ‘-(으)ㄹ걸’ ‘-(으)ㄹ세’ 등도 소리대로 적지 않는다.
식혜와 식해
찹쌀을 쪄서 엿기름물을 부어 삭힌 다음 밥알을 냉수에 헹궈 건져 놓는다. 엿기름물에 생강과 설탕을 넣고 끓여 식힌 뒤 밥알을 띄운다. 이렇게 만든 것이 식혜다. 식해는 생선과 소금·조밥·고춧가루·마늘·파·무 등을 넣고 버무려 숙성시킨 음식이다. 생선젓 혹은 생선이 주재료가 되므로 어해라고도 한다. 가자미식해, 도루묵식해, 명태식해 등이 있다.
겸손해 하다
2001년 이수현씨가 취객을 구하고 숨진 바로 그 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신현구씨가 또다시 일본 여성의 생명을 구했다. 신씨의 어머니는 취재 온 일본기자에게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 했다.
위의 예처럼 '겸손해 하다'라고 쓰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색한 표현이다. '-어하다'는 형용사에 붙어 동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든 형용사에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쁘다'에 붙으면 '기뻐하다' '싫다'에 붙으면 '싫어하다'처럼 자연스럽게 동사가 된다. 그러나 같은 형용사라도 '우아하다''정직하다'등에 붙이면 "그 모델의 의상을 보고 사람들은 우아해 했다" "그는 항상 정직해 한다"처럼 매우 어색하다. 일반적으로 '-어하다'는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심리를 나타내는 형용사인 미안하다, 죄송하다, 즐겁다, 슬프다 등과 결합하면 잘 어울리지만 겸손하다와 같이 대상의 속성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낱말 다음에 붙으면 자연스럽지 않다.
처음 예문의 경우는 인용한 말에서 느낌을 알 수 있으므로 '겸손하다'를 생략하거나 '겸손하게 말했다'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정도로 쓰면 무난하다.
행랑, 행낭
"북한은 외교 행랑을 이용해 자국 외교관이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는 여러 나라로 마약을 비롯한 불법 물질을 운반하면서 외교 행랑 사용에 관한 규칙을 습관적.반복적으로 무시해 왔다."
위의 예문처럼 본국 정부와 재외공관 사이에 문서를 주고받기 위해 사용되는 문서 발송 가방, 혹은 주머니를 '외교 행랑'이라고 표현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외교 행낭'의 잘못이다. 주머니를 뜻하는 한자 '囊'의 음은 '랑'이 아니고 '낭'이기 때문이다. 행낭(行囊)은 무엇을 넣어서 보내는 큰 주머니를 의미한다. "연말이 되면 우편집배원의 행낭이 더 무거워진다" "비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으므로 외교 행낭을 운영할 때 보안 대책 마련에 신경을 써야 한다"와 같이 사용된다.
행랑(行廊)은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을 뜻한다. 옛날 대가(大家)에서는 대문 안에 행랑을 길게 벌여 짓고 그곳에 노비나 하인들을 거처하게 했다. 대갓집에서 심부름이나 궂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행랑아범' '행랑어멈'이라는 말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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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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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붉은 거울 -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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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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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風磬) - 정혜숙
쓰리고 아린 世事 끝끝내 못 저버려
이 산 저 산 다 깨우고 메아리로 우는 풍경
천년의 깊은 매듭을 청솔밭에 헹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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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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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3
3. 배움을 위하여
노인과 소년
키 작은 소년이 말했다. "전 이따금 숫가락을 떨어뜨려요." 키 작은 노인이 말했다. "나도 그렇단다." 소년이 속삭이듯 말했다. "전 이따금 바지에 오줌을 싸요."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랑 똑같구나." 소년이 말했다. "전 자주 울어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종종 운단다."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어른들이 나한테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자 그 키 작은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소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당신이 잃은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은 그만큼 어떤 다른 것을 얻은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레바 맥켄타이어가 <내가 만일 그걸 알았더라면>이라는 노래를 불러 히트 시켰을 때 사람들은 그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 졌는지 궁금해 했다. 그 노래는 만일 내가 다른 모든 친구들과 똑같은 날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더라면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성장한 뉴멕시코 주의 클로비스에서는 열여섯살이 되면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다. 단 운전자 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면 될 뿐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우리반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여섯살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 날, 운전자 교육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날의 흥분과 기대는 우리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의 선생님들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비록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야 열여섯살이 되긴 했지만 친구들이 차를 운전하게되었다는사실만으로도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제 다시는 우리가 엄마들 두에 병아리떼처럼 졸졸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리라. 마침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아버지들이 흔히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는 그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셨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더없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더없이 보호하는 분이셨다. 그날 내가 데나, 로리, 데비, 크리스티, 조나 등과 함께 신나는 방학 계획을 떠들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나를 앞에 불러 놓고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절대로 안 된다. 네가 상처를 입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더 많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이 아직 믿을 만한 운전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가을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절대로 친구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놀러 가선 안 된다고 못박으셨다.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아버진 단순하게 딸의 안전만을 생각하실 뿐 그 밖의 것은 보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볼 수 있었다. 그 길고 소중한 여름날들을 혼자서 집 안에 처박혀 외롭게 보내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서러움이 목까지 차 올랐다. 나는 십대의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 이를테면 "아빠, 그건 공정치 못해요." 라든가 "하지만 아빠, 다른 아이들은 다 가잖아요." 같은 주장들을 동원해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해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법안이 통과시킨 뒤였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엄마가 우리를 차에 태우고 갈 경우에만 허락이 떨어졌다. 열여섯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한다면, 새 운전면허증을 가진 십대 소녀들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려고 할 것인가도 잘 알 것이다. 그것도 단지 아랫 동네에 사는 엄격한 집안의 소녀와 함께 가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단 한명도 없었다. 나는 그저 친구들의 얼굴이라도 불 양으로 뙤약볕 아래 집 앞 잔디밭에 나와 앉아서 <세븐틴> 잡지를 읽는 척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가를 눈치챈다면 친구들이 엄마 차를 빌려 타고 휭 하니 지나가기 전에 잠시 멈춰서서 한 마디 말이라도 걸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있었다.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친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 여름날을 나는 실망과 실의에 차서, 친구가 전부를 의미하는 나이에 친구들로부터 부자연스럽게 떨어진 채로 홀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고난의 세월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난 그 여름에 배웠다. 때로 천사는 용감하고 슬픈 얼굴에 감동받는다.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천사는 바로 도로시 고모였다. 그 여름의 어느날 고모에게서 걸러온 전화 한 통화가 나의 모든 걸 바꿔 놓았다. 도로시 고모는 시보레 자동차 대리점의 경리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큰 고모 도로시와 작은 고모 캐더린은 젊었을 때 뉴멕시코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들로 손꼽혔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고모들의 아름다움은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것이 뚜렸해졌다. 도로시 고모는 둥근 갈색 안경을 쓰고 물결치는 금발머리에다 늘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다니셨다. 그녀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그녀 옆에 있으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는 전에는 내게 전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고모는 내게 전화를 걸어 여름 방학 동안 자동차 대리점 일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해 여름, 교사이신 엄마가 아침마다 나를 차에 태우고 고모의 회사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시 고모와 그녀의 비서들인 크레올라, 소냐, 린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 여성들 모두 내게 너무도 잘해 주었다. 아침마다 그들은 내 옷을 칭찬해 주었고, 내가 아침으로 초콜릿 도너츠를 세 개나 먹으면서도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미워 죽겠다고 눈을 흘기곤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크레올라는 내가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노래를 부르는 걸 멈췄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라고 성화였다. 대부분의 많은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노래 부르는 걸 두려워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또한 그들은 운명이라든가 종교, 정치와 같은 무거운 주제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싶어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크레올라, 소냐, 린은 내가 운전면허증도 갖고 있지 않은 어린 나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내게 맡겨지는 어떤 일이라도 해냈다. 그 결과 그들은 나를 신뢰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무거운 서류 상자를 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 다녔으며, 온갖 정리 안 된 서류들로 가득한 먼지 낀 캐비닛을 청소했다. 나는 또 어른들이 일하는 방식을 배웠다. 서류를 넘길 때 호치키스에 손톱이 부러지지 않도록 교묘히 손가락을 구부리는 법, 물품 구입서 용지를 흡입관에 집어넣어 다른 부서로 보내는 방법을 배웠으며, 또 어떤 판매사원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있는가를 놓고 수다 떠는 법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나는 일은 일과를 마친 뒤 타자기를 갖고 놀면서 혼자서 타자 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나는 장차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게 타이프 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멋지게 디자인된 시보레 자동차 회사의 서류용지를 타자기에 끼우고 서투른 솜씨로 이런저런 문장들을 타이핑하곤 했다.
<나의 이름은 자나 리 스탠필드입니다.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나는 다시는 아침식사로 닭다리를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로시 고모는 종종 나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쌍둥이 크로니였다. 쌍둥이 크로니가 무엇인지 내게 묻지 말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곳이 차를 탄 채로 주문을 하는 식당이고, 커다란 간판에 먹음직스런 핫도그 두 개가 춤을 추며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자 튀김과 텍사스 토스트와 함께 큰 상자에 담긴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했다. 고모의 차에 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중요한 대화들을 나눴다. 이를테면 1943년에는 고등학교가 어떠했는지, 죠 고모부가 전쟁에서 어떻게 폐 한 쪽을 잃었는지, 그리고 고모의 딸인 내 사촌 주디는 왜 그토록 일찍 결혼해야만 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따금 내 친구들이 잔득 차에 올라타고 그곳에 들르곤 했다. 나 역시 그들과 어울리고 싶긴 했지만 나는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또 도로시 고모가 내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교에 입고 갈 옷들을 살만틈 충분한 돈을 모았다. 나는 작은 꽃이 수놓인 티셔츠, 세 가지 색상의 헐렁한 바지, 가느다란 허리띠 등을 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며칠 전에 나는 머리를 <세븐틴> 잡지에 나오는 여학생들처럼 짧게 잘랐다. 우리 여학생들에게 있어서 헤어 스타일의 갑작스런 변화는 곧 인생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나는 정말 좋은 의미에서 다른 느낌을 갖고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전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강해졌으며, 더 자신감이 생겼다. 가장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 생애에서 최초로 나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다. 가까스로 운전면허증도 땄으며, 동창회 임원과 학생회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 다음에는 반에서 설문조사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로 뽑혔다. 내가 보낸 그 고독한 날들 이후에 찾아온 너무도 뜻깊은 영광이었다. 십대 여학생의 생활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알 것이다. 그 여름 이후에 나는 도로시 고모를 별로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고작 일 년에 한두 번씩 고모의 사무실에 들러 고모와 함께 쌍둥이 크로니로 프라이드 치킨을 사먹으로 갔을 정도였다. 크레올라와 소냐와 린은 그 초콜릿 도너츠들이 마침내 내 몸매를 망쳐 놓기 시작했음을 알고 만족해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도로시 고모와 죠 고모부가 나를 축하해 주러 졸업식장에 오셨다. 도로시 고모는 휴가 여행에서 산 아름다운 금팔찌를 내게 선물했다.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 안에 는 팔찌보다 훨씬 더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조그맣게 접혀 있는 그것은 낡고 때묻은 시보레 자동차 회사의 서류 용지였다.
<나의 이름은 자나 리 스탠필드입니다.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나는 다시는 아침식사로 닭다리를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6년 뒤 나는 내슈빌(컨트리 음악의 본고장)에서 살고 있었다. 싱어송 라이터로 일하고 있었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도로시 고모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모는 암과 용감하게 싸웠으며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잃는 것을 혐오했다. 하지만 뻣뻣한 금발 가발을 쓰고서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고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크리스마스 때였다. 그 얼마전에 나는 사촌 주디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도로시 고모가 곧 돌아가실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전화를 받을 기운이 있으니 나더러 작별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디는 내게 도로시 고모가 입원한 뉴멕시코에 있는 병원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서 나는 누군가 사랑을 갖고 해 주는 아주 작은 일이 우리의 삶에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날 도로시 고모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나로서는 가장 고통스런 일이었다. 나는 고모에게 내가 얼마나 고모를 사랑하는가를 말했다. 내가 누군가 필요했을 때 내게 손길을 내밀어 준 것에 대해 언제가 좋은 점만을 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나는 바랬다. 아예 시간이 멈춰 서서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 고모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도로시 고모와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 인사를 했다. 고모는 내게 말했다.
"난 널 사랑한다. 그걸 알고 있니?" 나도 말했다. "저도 고모를 사랑해요."
그리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텅 빈 아파트 안에 내 흐느낌만이 채워졌다. 친절한 마음씨로 우리의 삶을 채워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를 말해 주기도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는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이삼 주일이 지난 어느 외로운 일요일.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의 기사들이 눈물이 펑펑 흐르는 가운데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노래 가사의 멜로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인 그 가사를 내가 아는 가장 재능이 뛰어난 작사가인 크레이스 모리스에게 가져가서 그것들을 다듬어 멋진 가사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열다섯살이었을 때 도로시 고모는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으로 내 삶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것이 비를 맞으며 걷는 우리의 마지막임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폭풍 속에서도 몇 시간이나 당신을 지켰으리. 내 가슴에 연결된 생명줄처럼 당신의 손을 잡았으리. 그리고 폭풍 아래서 우린 따뜻했으리. 그것이 비 속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만남임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다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걸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난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전부 기억했으리. 그래서 이 고독한 밤에 그것들을 다시 한번 추억할 수 있으리. 당신의 말들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 있게 했으리. 다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걸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당신은 내 가슴의 보석이었네.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서 있던 사람이었네. 그것으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어리석게도 당신이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으로 믿었네. 그러나 어느날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당신은 내 곁은 떠나갔네.
그것이 당신 곁에서 보낸 나의 마지막 밤이었음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기적이 일어나 새벽을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리. 그리고 당신이 내게 미소지었을 때 당신의 두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으리. 당신에게 알게 했으리.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내 사랑을 보여 주었으리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레바 멕켄타이어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자신의 뮤직 그룹 동료들을 추모하며 이 노래를 취입했다. 그 이후 이 노래는 세인트 주드 아동 병원의 자선 모금 운동, 십대 청소년들에게 음주의 위험성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기금 마련 운동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에이즈 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불러모으는 데에도 이 노래가 불리워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례식에서 이 노래가 불리워졌다. 또한 영화 <8초간>의 삽입곡으로 쓰여져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순회 콘서트를 미국 전역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 지나 스탠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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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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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일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퇴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걸은 계속해서 반복되어 일어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했다. 갑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언제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을이라는 의사에게 침을 뱉았고, 그러면 을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손수건을 꺼내어 침 묻은 곳을 닦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을이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혼자서 킥킥거리며 웃는 일도 있었다. 엘리베이터 걸은 날이 갈수록 호기심이 더해 갔다. 마침내 그 궁금증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가 을에게 물었다.
"박사님, 박사님과 같은 일을 하시는 저 박사님은 왜 계속해서 박사님께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을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나도 그가 왜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오. 그건 그 사람의 문제니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리고 또 내가 왜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겠소?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오"
- 어떤 사람이 그대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그것을 그 사람의 문제다. 그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 그리고는 기분 나빠하고 걱정을 한다. 심지어는 복수할 생각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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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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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와는 무관한 정치의 계절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란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고 물어도 한마디로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글쎄, 어째서일까요" 하고 어물어물 넘기고 마는데, 좌우지간 투표는 안 한다. "그건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표는 안 한다.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표는 안 한다. 얘기에 따르면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는 선거 때 투표하는 것을 국민의 의무로서 법률로 정해 놓았고, 명백한 이유도 없이 기권을 하면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한다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니까 투표를 하지 않아도 일단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어느쪽이 제도로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방식이 좋다고 생각한다. 투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까. 내 주변에도 선거 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째서 선거 때 투표를 하지 않는가에 대한 그들(나를 포함해서)의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첫째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 둘째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선거의 내용 자체가 매우 수상쩍은 데다 신뢰감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세대에는 '가두 시위'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많고, 시종일관 "선거 따윈 기만이다"라는 선동을 믿어 왔으므로, 나이를 먹고 제법 안정이 되었어도 고분고분하게 투표소에 가질 않는 것이다. 정당의 선거 운동과는 무관하게 한결같은 신념으로 지내 왔다는 생각도 든다. 넌 그때 뭘 했는데 하고 물으면, 무얼 했는지를 거의 기억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선거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니므로, 뭔가 명확한 쟁점이 있고, 현재의 정당들이 하고 있는 선거 운동의 도식 같은 게 없어진다면 우리는 투표를 하러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기권이 많은 것은 민주주의의 쇠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제공할 수 없었던 사회 시스템 그 자체 속에 민주주의 쇠퇴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원칙론을 앞세워 기권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려 하는 건 잘못일 것이다. 마이너스 4와 마이너스 3 중 한 쪽을 선택하기 위해 투표소까지 가라고 해봤자, 난 안 간다, 그런 데는. 지바에서 살았을 때 지방 선거가 있었다. 내가 마당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는데 동네 반장 격인 아줌마가 밭에서 갓 뽑은 시금치를 들고 와서는, "저기 말이죠, 이 근처 사람들은 모두들 아무개 씨한테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어요"라고 했다. 내가 잘 이해를 못하고 "네에, 그렇습니까?" 하자 그 아줌마는 "아무개 씨한테 표를 던지면 도로 정비라든가 하수구 청소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준대요"라고 말하며 시금치를 두고 돌아갔다. 내가 그것이 투표 의뢰라는 걸 안 것은 얼마 지나서였다. 그때는 허참, 과연 지바로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나는 여러 지방에서 살아 봤지만 시금치로 투표 의뢰를 받은 곳은 지바말고는 없었다. 물론 시금치는 맛있게 먹고, 투표를 하러 가지는 않았다. 나야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으니까 하수구 청소 같은 건 해주는 게 당연하다. 경험상으로도 아무개 씨에게 투표를 하기보다는 매일 시청에 전화를 걸어 불편을 호소하는 게 빠르고, 올바른 절차다. 이런 일이 있으면 투표를 하러 가기가 더더욱 싫어진다. 지바에서 사는 것 자체는 무척 즐거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대로 투표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치고 말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나의 직감에 지나지 않지만, 금세기 중에 반드시 다시 한 번 중대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싫어도 스스로 입장을 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들이 철저하게 전환되어, '무엇이든 적당히'로는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영화 <빅 웬즈데이>의 라스트 신처럼 투표 용지를 손에 들고 투표소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 뭐 이건 단순한 예측일 뿐이고, 내가 하는 예측의 대부분은 빗나가니까 대수롭지 않은 얘기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이 머지않아 닥쳐올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다. 이것은 1920년대의 미국과 그에 뒤따른 대공황에 관한 역사서를 읽어 보면 오싹할 만큼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다. 미증유의 번영과, 화려하고 호화로운 문화를 구가하던 1920년대의 미국은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그 후로는 어둡고 무거운 나날과 전쟁이 찾아온다. 물론 서로 다른 두 시대와 사회를 포개어 놓고 보려는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지만, 경제적 번영의 밑바탕이 얄팍한 점이나 흥청망청대는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세계적인 부의 편중 상황을 보고 있으면 1920년대의 미국과 현시대 사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수많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저 대공황에 필적하는 크래시(붕괴)가 닥친다면, 당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방만한 문화 주변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사들 대부분은-어쩌면 나도 그중 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날려 가버릴 것이 눈에 훤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해봤자 별설득력이 없겠지만, 우리는 이제 슬슬 그러한 크래시-가치 붕괴에 대비하여 스스로를 재확인해야만 할 시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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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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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규항 에세이
교회
술자리에서 내가 기독교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하는 것이고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을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에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인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에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는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을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98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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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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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무능에 철저하라 - 열어구
열어구가 제나라로 가다가 중도에서 돌아오던 중 백혼무인을 만났다. 백혼무인이 물었다. "어찌하여 벌써 돌아오느냐?" "저는 놀랐습니다." "무엇에 놀랐느냐?" "제가 열 군데의 주말에서 밥을 먹었는데, 다섯 주막에서 남보다 저에게 먼저 밥을 주었습니다." 백혼무인이 물었다. "그것이 왜 너를 놀라게 했느냐?" 열어구가 대답했다. "마을이 진실고 풀리지 않으면 얼굴도 따라서 빛을 이루어 밖으로 남의 마음을 누릅니다. 남들이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볍게 하여, 그 걱정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 것입니다. 주막하는 사람은 다만 밥과 국을 장사로 할 뿐, 다른 이익이 없습니다. 이익됨이 작고 권세가 그처럼 가벼운데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만승의 임금이겠습니까? 몸은 나라에 시달리고 지혜는 일에 다한다면 그는 장차 저에게 일을 맡겨 공을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웠습니다." 백혼무인이 말했다. "잘 보았다. 그러나 네가 이렇게 처신하면 남들이 장차 너를 붙들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가보니 문 밖에 신발이 가득했다. 백혼무인은 북쪽을 보고 서서 지팡이에 턱을 괴고 잠시 있다가 말없이 나갔다. 빈자*가 열자에게 알리자 열자는 신을 들고 맨발로 달려와 대문에 이르러 말했다. "선생님께서 오셨으면서 어째서 약*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만두어라. 내가 전에 너에게 사람들이 장차 너를 붙들 거라고 했더니 과연 너를 붙들었구나. 남들이 너를 잡게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너를 잡지 않도록 하지는 못한 것이다.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너의 본성을 어지럽게 할 것이니 또한 말할 것이 없다. 너와 함께 노는 사람은 또 네게 말할 것이 없으며, 저들의 작은 말은 모두 사람을 해친다. 깨치게 함도 없고 깨달음도 없이 어찌 서로 친숙해지겠느냐? 공교로운 자는 수고롭고, 지혜로운 자는 근심한다. 무능한 자는 구하는 것 없이 배불리 먹고 마음대로 논다. 묶여 있지 않은 배와 같이 떠다니면서 텅 빈 채 마음대로 노는 것이다."
* 빈자 : 손님의 출입을 담당하는 사람. 문지기. * 약 : 원문은 약으로서, '약이 될 만한 좋은 가르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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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는 제나라 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중간에 되돌아오던 중 스승인 백혼무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이냐? 어째서 되돌아왔느냐?" "네, 실은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열자는 사정을 설명했다. "계기는 밥을 먹는 데서부터였습니다. 여행 도중 저는 몇 번인가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다른 손님을 밀쳐놓고 저의 주문부터 받으려고 했습니다. 두 번에 한 번 꼴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아마 제가 아직도 자부심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남이 보기에 달리 보였던 모양입니다. 먼저 온 손님들 중에는 노인도 있었는데, 제 풍채가 주인을 위압해서 노인을 보살펴주려는 마음을 잊게 했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주막이란 보잘것없는 장사로서, 재산도 없고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런 밥집의 주인에게까지 저를 특별히 대우하려는 기분을 일으켰는데, 한 나라의 임금쯤 되면 어떤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그가 내정과 외교에 골몰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엉뚱한 기대를 걸고 나를 맞아들여 국정을 맡긴 다음, 그 성과를 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백혼무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다. 잘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한, 어디를 가든지 세상 사람은 너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 얼마 후 백혼무인은 열자의 집을 찾아갔다. 방문 밖에는 찾아 온 손님들의 신발이 넘칠 지경이었다. 백혼무인은 지팡이에 기대고 잠시 서 있더니 그대로 가버리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열자는 황급히 방에서 뛰어나와 맨발로 대문 밖으로 달려나가 백혼무인을 붙들고 사정했다.
"선생님, 모처럼 저의 집까지 오셨으니 한 말씀이라도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십시오." "듣기 싫다. 새삼 무슨 소리를 하겠느냐? 내가 분명히 말해주지 않았더냐? 네가 네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한, 세상 사람들이 너를 가만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네가 자진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네게는 남에게 신뢰받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부족한 것이다. 사람들이 너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것은 네게 남의 눈데 잘 보이려는 틈이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과 태도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해칠 뿐, 아첨하여 너를 병들게 할뿐이다.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의 마음까지 어둡게 하고 만다. 이리하여 서로가 밑바닥 없는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지혜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할 뿐,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무능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일체의 욕구에서 벗어나 배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며, 마음 편한 생활을 즐기고 산다. 물결 따라 나부끼는 작은 배처럼 자신을 버리고 자유의 경지를 거닐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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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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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농담
한 저명 인사가 아프리카의 아주 오래되고 원시적인 원주민 부락을 방문했다. 그는 약 30분에 걸쳐 연설을 하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통역자가 통역을 했는데 그는 단지 네 마디만을 했다. 그러자 그 원주민들은 크게 웃었다. 그 저명 인사는 당황했다. 그는 30분 동안이나 이야길 했는데 어떻게 단 네 마디로 통역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해한 듯 크게 웃고 있다. 당황한 그는 통역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대단하다. 그대는 단지 네 마디만을 했다. 어떻게 그 긴 이야기를 네 마디로 옮길 수가 있는가?" 통역자가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으니 웃어라.'라고 말했지요."
- 사람들의 웃음을 보라. 그것은 의도적이며 노력이다. 그들의 웃음은 잘못되어 있다. 그것에는 색깔이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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