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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27호
단기 4343. 3. 26 (음력 2.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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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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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 공모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회장 이훈상)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 한마당의 행사를 전개함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장애라는 이유로 차별되지 않는 아름다운 사회구현을 위하여 전국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대회를 개최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모바랍니다.
∥ 주 제 ∥ □ 장애인을 위한 바람직한 선거 이야기 □ 장애인과 함께한 가족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 장애인과 함께하는 학교생활 이야기 □ 장애극복 체험기 □ 우리가 바라보는 남북통일의 길
∥ 분 야 ∥ □ 초 • 중등부 □ 고등부 □ 대학 • 일반부
∥ 시상등급 ∥ □ 대통령상, 국회의장상,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상, 행정안정부장관상, 보건복지가족부장관상.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통일부 장관상, 서울시장상, 서울시교육감상, 서울복지재단이사장상, 한국장애인 유권자연맹회장상
∥ 공모기간 ∥ □ 2010년 3월 2일~2010년 5월 20일
∥ 원고분량 ∥ □ A4용지 3매 이상 또는 200자 원고지 15매 이상
∥ 공모방법 ∥ □ E-mail : kldv@naver.com □ 우 편 :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2가 1-32 고당빌딩 302호 ※ 당일 우체국 소인에 한함
∥ 수상작 발표 ∥ □ 2010년 6월 25일 이전 수상대상자에게 개별 통지 □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홈페이지(http://www.kdlv.or.kr)
∥ 시상식 ∥ □ 일 시 : 2010년 7월 16일 □ 장 소 :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 □ 주 최 : (사)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 □ 후 원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행정안전부, 보건가족복지부, 통일부
∥ 제출서류 ∥ □ 신청서(다운로드 : http://www.kdlv.or.kr) □ 원고용지(작품내용 수록)
∥ 기 타 ∥ □ 시상식 일시 및 장소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제출된 서류와 작품은 일체 반환하지 않습니다. □ 당선작의 저작권은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에 귀속됩니다. □ 기타 문의사항
• 전화 : 02) 712-7796 • 팩스 : 02)703-6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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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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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의 걸작품이다.(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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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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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말에도 경제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 구개음화나 자음동화 등의 음운현상도 어려운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준말을 많이 만들어 쓰는 것도 그런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준말은 주로 한자어에서 만들어졌지만, 근래에 와서는 ‘디카, 몰카’ 등에서 보듯이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준말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조금 걸어 내려가면 엄청 큰 집 옆에 엄청 큰 나무가 있습니다.” 신문에 실린 에세이의 도입부다. ‘엄청’이 부사로 쓰이고 있다. 오래된 사전들을 찾아보면 ‘엄청나다’는 형용사로 올라 있지만 ‘엄청’은 올라 있지 않다. 이것은 ‘엄청’이 말밑이 되어 ‘엄청나다’ 또는 ‘엄청스럽다’라는 형용사로 파생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형용사가 줄어들어 부사로 쓰이고 있음을 일러준다.
이렇게 줄어든 부사들이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다. ‘엄청, 무지, 완전, 본격, 강력, 훨’ 등은 사전이 어떻게 풀이하든 실생활에서는 부사로 쓰이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중 ‘엄청’, ‘무지’만 부사로 올려놓았다. 대중의 말살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 본격, 강력’은 명사로만 올려놓았고 ‘훨씬’의 준말인 ‘훨’은 아예 올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사전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완전, 본격, 강력, 훨’ 등도 머지않아 부사로 사전에 오를 것 같은 추세다.
우재욱/시인
‘직하다’와 ‘-ㅁ/음직하다’
‘직하다’는 형용사다. 앞에 명사형 어미 ‘-ㅁ/음’이 온다. 즉 ‘-ㅁ/음 직하다’의 구성으로 쓰인다. 앞말이 뜻하는 내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음을 나타낸다.‘보였음 직하다’는 보일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바람직하다, 믿음직하다’의 ‘-ㅁ/음직하다’는 하나의 접미사다. 그래서 다 붙여 쓴다.‘바랄 만한,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결제와 결재
‘애’와 ‘에’의 발음 구분은 어렵다. 일상에서 이 둘을 구별해 사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결제(決濟)와 결재(決裁)의 표기에 혼동을 일으킨 예도 드물지 않다. 결제는 대금을 주고받아 거래 관계를 마치는 일을 가리킨다.‘카드로 결제’‘결제 자금’. 결재는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이 승인하는 것이다.‘사장 결재’.
조그만한, 자그만한
톡, 톡, 꽃잎 터지는 소리 정겨운 4월이다. 개나리는 꽃그늘을 만들고, 진달래는 산을 물들이고, 민들레는 바람을 간질인다. 조그마한 꽃씨 하나 입 벌려 보여 주는 세상은 언제나 경이롭다. "조그만 꽃에 앉은 조그마한 나비, 나비를 쫓는 조그만한 아이"처럼 사람마다 조금 작거나 적다는 뜻의 '조그마하다'를 표현하는 방법이 '조그만' '조그마한' '조그만한' 등 제각각이다.
'조그마하다'는 어근 '조그마' 뒤에 접사 '-하다'가 붙어 이뤄진 말로 '조그마한 화분'과 같이 쓰인다. 이를 '조그마하다'의 준말 '조그맣다'의 활용형을 써서 '조그만 화분'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조그만한 화분'이라고는 사용할 수 없다. '조그만'은 '조그마한'이 줄어든 말로 '-하다'란 접사가 붙을 수 없다. '조그만'을 어근으로 착각해 '조그만하다'와 같이 사용하는 예가 있으나 이는 틀린 표현이다. "한 알의 조그만(조그마한) 씨앗이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가 된다"와 같이 써야 한다.
조금 작다는 뜻의 '자그마하다'도 마찬가지다. '자그마한' 또는 '자그맣다'('자그마하다'의 준말)의 활용형 '자그만'은 사용할 수 있지만 '자그만한'은 쓸 수 없다.
내려쬐다, 내리쬐다
4월의 산은 어디를 봐도 온통 꽃 잔치다. 실바람이라도 불면 하늘에선 꽃비가 내린다. 꽃향기의 유혹에 못 이겨 선남선녀들이 산으로, 들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내려쬐는' 따가운 햇볕은 조심해야 한다. '볕 따위가 세차게 아래로 비치다'는 뜻으로 '내려쬐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내리쬐다' 또는 '내리쪼이다'로 써야 한다.
'내리쬐다'는 부사 '내리'와 동사 '쬐다'가 합쳐진 말이다. '내리'는 "내리 짓밟다/내리 짓누르다/내리 닥쳤다"처럼 '위에서 아래로, 잇따라 계속, 사정없이 마구'라는 뜻이다. '쬐다'는 "햇볕이 잘 쬐는 남향집이다/햇볕을 쬐다, 모닥불을 쬐다"같이 '볕이 들어 비치다, 볕이나 불기운 따위를 몸에 받다'는 의미다. 따라서 '내려쬐다'가 아닌 '내리쬐다' 형태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봄볕이 꽤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다" 처럼 쓰면 된다. '내리깔다, 내리꽂다, 내리까다, 내리갈기다, 내리긋다' 등도 마찬가지 형태다.
속담에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봄볕에 그을리면 보던 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다. 봄에 내리쬐는 햇볕은 가을볕보다 자외선이 강해 피부를 상하게 하니 주의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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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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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무의 장례 - 김경윤
양지쪽보다는 그늘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부터 그녀를 오래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후덕한 잎사귀와 속 깊은 그늘을 가진 후박 아침저녁으로 그녀 곁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인가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침묵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나무 그늘 아래서 깔깔대던 여학생들처럼 그녀는 얼굴 가득 노란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무들도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섰던 자리에 그늘이 사라지고 빛방석 같은 그루터기만 둥그렇게 남았다 그늘보다 빛을 쫓는 누군가가 그녀를 참수해버렸다 이 지상에서 그녀가 거느렸던 그늘과 정들었던 눈빛들 문신처럼 나이테로 새겨두고 순명하던 날, 그늘이 사라진 교정에서 나는 보았느니 쟁쟁한 햇살 아래서 키 작은 단풍나무가 눈물처럼 붉은 이파리 몇 잎 떨구고 서 있는 것을, 서녘 하늘에 노을빛 만장이 걸리고 어둠 속으로 구름의 장례객들이 떠나갈 즈음 유언처럼 개밥바라기 별빛이 오롯이 빛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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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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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숲길을 지나며 - 이영주
꽃잎이 지나분데, 여름이 왔나분데, 삽짝에 서성여도 엽서는 안 오는데, 휘어진 등성이 길이 땀방울에 젖고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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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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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인훈의 `광장
역사의 폐허 위로 비가 내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쟁의 종결과 함께 용도폐기된, 그리하여 이제는 다만 아픈 기억의 처소로서만 남아 있는 이 시멘트 구조물의 잔해들은 5월의 비에 속절없이 젖고 있다. 비는 내려서, 지붕 없는 경비대장 막사의 채색 벽화를 적시고, 무도장의 시멘트 바닥을 흐르다가 틈새를 만나서는 슬쩍 스며들기도 하고, 채 스미지 못한 것들은 경비중대본부의 바닥에 처연히 고여 있기도 하다. 비는 내린다. 40년 저쪽의 먹빛 구름으로부터 막막한 세월의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시멘트로 굳어버린 기억의 땅을 두드린다. 비는 내린다. 땅은 젖는다. 풀은 자란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전쟁은 끝났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 의해 시작된 한국전쟁은 북조선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1953년 7월27일을 기해 무기한 휴지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남북 양쪽은 전쟁기간 동안 잡아두고 있던 포로들을 교환했다. 교환하되 포로들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이 아니면 북, 북이 아니면 남이라는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나라를 택한 이들이 있었다. 최인훈(60)씨의 소설 <광장>에서 인용한 위의 대목은 판문점에서 있었 던 송환심사에 나간 주인공 이명준이 공산군 장교와 나눈, 그리고 국군 장교와 나누는 것으로 상상하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명준은 왜 중립국을 택했나? 그에게 중립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꿔 말해서 그에게 남과 북은 무엇이었나를 묻는 일이며, 문제적 소설 <광장>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해방된 조국의 남쪽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 방송 시간에 나온 일로 해서 경찰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한 뒤 떠밀리듯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그곳에서 정작 인민들은 가슴 편 주인이기는커녕 주눅든 양떼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적 존엄성을 짓밟는 남한과 인민대중에게서 역사의 주체 자리를 빼앗은 북조선. 20세기 중반 한반도의 남과 북에 나타난 이 못난이 형제들에 관한 작가의 비판적 사유는 밀실과 광장이라는 독특한 비유에 얹혀 전개된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은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한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은혜가 모스크바 공연을 떠난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명준은 전세가 기울어가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 스스로 명분을 찾지 못하는 전쟁에 회의하던 명준은 그곳에서 우연히 간호병으로 나온 은혜와 재회하며 두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 절망적인 사랑을 불태운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라던 명준은, 그 은혜마저 뱃속에 새 생명을 품은 채 전사하고 말자 더이상 버틸 힘을 잃는다. 그가 인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남지나해의 검은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다. 명준이 탄 배를 좇아온 두 마리 갈매기에 촉발된 그 투신은 그러나 죽음에의 투항이 아니라 사랑에의 귀의로 승화된다.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4·19가 일어난 지 6개월 뒤인 1960년 10월에 발표된 <광장>은 4월혁명의 문학적 적자라 이를 만했다. 동리 류의 무시간적 토속성이 아니면 장용학의 관념과잉, 또는 손창섭의 자연주의적 현실비판의 지배 아래 있던 당시 소설 풍토에서 지적 깊이와 세련된 감각을 아울러 갖춘 <광장>의 출현은 문학에서의 4월혁명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북진통일론만을 인정하던 지배 이데올로기의 틀을 벗어나 남과 북의 체제를 비교적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은 `혁명'이 열어놓은 자유의 숨구멍으로 해서 가능했었다. 물론, 작가가 밀실과 광장이라는 개념을 먼저 상정한 다음 남과 북의 현실을 그에 꿰어맞추었다는 식의 비판으로부터 무한정 자유롭지는 않지만, <광장>이 거둔 성과는 그같은 비판의 날을 한결 무디게 한다. 전쟁이 끝난 지 43년. 거제도에는 포로들의 경비를 맡았던 국군과 미군의 경비막사와 보급창고, 탄약고 따위의 흔적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 애초에 천막으로 지어졌던 수용소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주민들이 살던 집과 논밭을 징발해 수천개의 천막을 세웠던 자리에는 전보다 더 많은 주택과 건물이 논밭을 거느리고 들어서 있다.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의 경비막사 등 유적 옆에 지난 93년 콘센트로 세워진 `거제포로수용소유적관'이 당시의 유물과 사진 등을 보여주지만, 하루 평균 8백여명에 이른다는 관람객의 숫자를 생각하면 초라하기만 한 규모다.
자욱한 비안개에 감싸인 고현항을 부산행 쾌속선 엔젤호에 실려 떠나온다. 이명준의 천사는 말할 것도 없이 은혜와 그의 딸이었다. 두 마리의 갈매기로 환생한 그 천사들이 인도행 타고르호의 선상에서 명준의 몸뚱이를, 그의 파산한 관념을, 역사와 민족에 대한 가없는 절망을, 한반도적 실존의 버거움을 저 남지나해의 아득깜깜한 심연 속으로 끌어내렸으리라. 역사의 미아 이명준. 그는 그 깊은 바닷속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발견했을까. 밀실을 허락하는 광장, 그리고 광장을 향해 열려 있는 밀실을 찾았을까. 아니, 그는 그렇다 치고 정작 뒤에 남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밀실인가 광장인가. 그것은 혹 성욕뿐의 밀실과 싸구려 쇼의 무대만도 못한 광장으로 양극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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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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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시간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엠마뉴엘 칸트에게 어떤 여인이 청혼을 했다. 우선 여자가 청혼을 했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 시대엔 청혼하는 사람은 항상 남자였다. 틀림없이 그 여자도 칸트가 먼저 청혼해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청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었고, 가슴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인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느끼고 먼저 청혼한 것이다. 칸트는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사랑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반응해야 할 상황이다. 가슴이 그렇다라고 하든, 아니다라고하든 둘 중의 하나이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사업상의 제안이 아니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그것이 사업상의 제안이었다. 생각이 너무 머리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모든 일을 사업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그는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사랑, 결혼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모두 적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충분히 따져보고 결혼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찬성 쪽이 반대 쪽보다 몇 점 더 많았기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논리적인 결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여인에게 청혼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했소.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라오. 당신이 좀 늦게 왔구려>
마음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늦으며 상황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문을 두드릴 때 여인은 이미 가버린 뒤다. 그녀는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다. 이런 일이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 기억하라.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상각하지 말고 행동하라. 그대가 생각하기를 마칠 때까지 그 상황이 그대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반응할 준비가 되었을 때 반응할 대상은 이미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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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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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그러나 자유업은 즐겁다
대도시에서 자유업을 공연히 화려한 직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성인 남자가 대낮부터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처럼 대도시를 벗어나-도심지의 집세가 너무 비싼 데 질려서-교외의 중소 도시를 전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 직업이 자유업이다.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들이 '자유업'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보너스 시즌의 은행이다. 정말 싫다싫다 해도 이것처럼 싫은 건 없을 것이다. 창구의 업무가 끝나기를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은행 직원이 다가와선 "보너스를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런 걸 결정할 턱이 없으니까 "정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러시면 우선 이 정기 예금을 드시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 보너스가 없는데요"라고 하면 상대방은 하나같이 '네에?' 하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비로 인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폐가를 바라보는 눈초리다. 그 선에서 "그럼, 실례했습니다"하고 물러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것으로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반 정도는 물러나지 않는다. 대개 내가 은행에 가는 것은 아침 아홉 시나 열 시쯤으로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이라서 상대방 역시 한가한 것이다. 대체로 "저,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말을 걸어 온다. 내가 "자유업입니다"하고 말하면 은행 직원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목수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야 뭐 조깅 팬츠에 고무 샌들, 선글라스 차림으로 은행에 가는 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업->목수라는 극단적인 발상을 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애당초 목수가 자유업이란 말인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 문필업인데요" 하면, "아아, 그렇습니까. 토지를 분필하는 일을 하시는군요" 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것도 잘 이해가 안 간다. 확실히 은행원다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분필업'이란 직종 자체가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직종별 전화 번호부를 찾아봤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분필업'도 없고, '문궤업(역주:분필업과 함께 일본어의 음은 '분피스교'로 같다)'도 없다. '분피스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문필업'이다.
그리고 귀찮아서 "저술업입니다"라고 고쳐 말하면, 그제야 상대방도 대충 알아듣는다. "나오키 상이라도 타시게 되면 우리 은행에 몽땅 예금해 주십시오, 하하하" 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일까? 아마 친절하게 격려를 하려는 뜻이겠지만, 이쪽으로선 누가 예금 따윌 한대? 하는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이 정도도 아직은 나은 편이다. 심한 경우에는 "저술업입니다"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아, 그러십니까? 저술업이십니까?"라고 하기에 겨우 뜻이 통했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럼 졸업한 다음에 보너스를 타시면 그때는 꼭 저희 은행에..."라고 말해서 사람을 이만저만 실망시키는 게 아니다. 서른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를 붙잡아 놓고 졸업이니 뭐니 할말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하지만, 뭐 은행에는 은행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고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나 보다. 난 잘 모르겠다. 어쨌건 보너스 시즌에는 되도록 은행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기분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은행에 2~3년이나 다니다 보면 얼굴이 익혀서 보너스 시즌이 되어도 '저 작자는 별볼일 없으니까' 하고 아무도 접근해 오지 않게 된다. 참고 견디면 복이 온다더니, 반복이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작년까지 3년 동안 다녔던 교와 은행 기타 나라시노 지점 사람이 내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사내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은행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나는 이사광이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각지의 은행에서 "저, 실례지만 직업은?" 하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어야 한다. 정말이지 피곤한 노릇이다.
교외의 전원 도시란 사실 샐러리맨의 소굴 같은 곳이다. 아침 아홉 시가 지나면 성인 남자라고는 집배원 아저씨나 채소 가게 아저씨말고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이곳에는 아줌마들과 어린아이들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교외의 전원 도시 같은) 곳을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다 오락실에 들어가거나 냄비를 들고 두부를 사러 가거나 하니, 이웃에서도 별로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다 보면 바겐 세일을 하는 생리 용품을 대형 상자로 잔뜩 사고 카운터에 서 있는 아줌마들 틈에 끼여, '이건 또 뭐야, 싫다 싫어. 대낮부터 왜 이런 데 남자가 있는 거야' 하는 느낌의 눈흘김을 당하기가 일쑤다. 자유업이란 것도 여러 가지로 괴로운 점이 많은 직업이다. 그래도 꼭 자유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쿄의 미나토구 근처에서 살면, 아무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내 멋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즐겁기 그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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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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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2) 풍수지리사상과 산
(1)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라는 개념에는 다소 미신적이고 고루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풍수지리’라는 어휘에서 막연히 느껴지는, 실생활과 무관할 것 같은 분위기와도 관련이 없지 않은 듯하다. 글쓴이도 그러한 느낌에서 ‘풍수지리’와 같은 개념으로 ‘지리체계’라는 말을 선택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은 그 실체를 올바로 알아보는 일이라 생각된다. ‘풍수’라는 말은 장풍득수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 개념을 간략히 요약하며, 바람과 물에서 생산되는 신비한 힘과 땅의 생기, 즉 지덕의 힘을 입어 인간이 자연의 신비한 힘을 감응받고자 하는 사상이다. 대전제는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두고서 자연을 대우주로,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자연의 생성원리가 같다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생기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내맥에 더욱 많고, 이것은 청룡과 백호가 감싸고 있는 혈점에 가장 왕성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왕성한 생기를 보호하여 향수하려면 외부로 흩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선결조건이 된다. 생기는 바람에 흩어지기 쉬우므로 바람으로부터 깊숙히 감추어져야 하고, 물을 얻어야만 더욱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풍득수, 풍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고래로 주거지역의 풍토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지리적 사고를 성숙시키고 왔을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사고는 일정한 형태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고, 그 형태는 풍토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지역적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수지리설 역시 이러한 지리적 사고의 성숙, 발전된 논리체계의 하나로서, 우리 민족 역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지기의 감지능력, 즉 자생적 풍수지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국으로부터 확립된 이론체계의 풍수지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민족 특유의 독립된 풍수지리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풍수지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간단히 말하면 명당을 찾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풍수의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지세가 왕성한 곳에 나라의 도읍이나 궁궐, 마을, 절, 집터 등을 잡아서 번성을 누리고자 하는 양택풍수이며,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명당에 모셔서 그 후손으로 하여금 발복케 하는 음택풍수를 들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허황된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풍수지리 사상에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 순응하고자 하는 동양 전통사상의 기본 맥락과 함께 상당한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임동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풍수의 조화는 산과 하천과 방위 세 가지가 일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생활에 있어 절대적인 요소이다. 산이란 옛날에는 수렵의 장소이며, 또 연료를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장풍에 있어서도 절대로 필요하다. 만일 산이 없다면 장풍은 불가능하며 산이 있음으로 해서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물은 음료수로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농경생활이나 동식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된다. 또 방위는 양지와 음지를 결정하고 주택이나 농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므로 생활하는 데 있어 등한히 할 수 없다. 풍수설이란 산, 물, 방위의 세 가지 요소의 조화에 의해서, 인류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적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풍수지리에는 상당한 과학성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로 짐승이 살기를 꺼려 하는 땅은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살기 싫어하는 짐승이므로, 고양이가 도망가는 집의 땅 속에는 반드시 지하수의 맥이 흐르고 있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쥐나 개미가 파고 다닌 땅도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도 땅 속에 수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개미나 쥐는 땅 속에서 살 때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 하고 용이 뻗어오는 내맥을 용절이라 한다. 용절의 모습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요가 지상에 반영되어 산출기를 이루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산줄기에는 신비한 생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용절에도 생기가 다해 버린 사룡이 있다. 그러므로 지덕을 많이 받아 누리려면 생룡을 잘 판별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간룡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용절 중 지덕의 생기가 가장 왕성하고 산수의 정기가 응집된 곳을 ‘혈’이라 한다. 이 혈을 중심으로 아래를 향했을 때 혈을 감싸고 있는 왼쪽 산줄기를 좌청룡이라 하고, 오른쪽 산줄기를 우백호라 한다. 그런데 이 점혈은 매우 정밀한 것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그 효과를 바랄 수 없다고 한다.
(2) 풍수지리의 실제
풍수지리의 가장 기본적인 취락입지는 배산임수이다. 산을 등지고 물 가까이에 형성된 취락 형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난방적인 효과는 물론 강이 있음으로 해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고 식수 및 교통 등에 매우 편리한 주거지역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모든 읍취락의 산촌조에 반드시 진산을 명기하고 있다. 취락의 후면에 위치한 진산은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그 취락을 보호하고 상징하며, 멀리서도 취락을 대표할 수 있는 수려장엄한 산세의 산으로 이루어진다. 그밖에도 진산은 나그네나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본 맥락에 따라, 여기에서는 역사상 또는 전설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풍수지리의 적용 실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다. 이는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었다고 전해지는 신라말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므로,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삼국시대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중국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자생적인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지상에서의 생활상의 요구로부터 적하한 토지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가정을 해 본다면, 자생적인 풍수의 개념이 충분히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조간 등 신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한산의 부아산악에 올라 지세를 관망하고서, 강남의 땅이 북은 한산을 끼고, 동안 고악에 웅거하고, 남은 여택을 바라고, 서는 대해를 막아 천험지리하므로 국도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유리왕은 위라성이 산수가 험하고 땅이 기름져서 그 곳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삼국유사」에는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가 등극하기 전에 풍수상으로 대길지인 호공의 집을 빼앗아 살았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석탈해가 임금이 되기 전 어느날 토함산에 올라가 굽어보니, 호공의 집터가 초승달 모양의 길지였다. 이에 남몰래 그 집 뜰에다 숫돌과 숯을 파묻고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조상이 이 곳에서 대장간을 하며 살았으나 중년에 집을 빼앗겼다고 거짓 송사하였다. 관가에서 나와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므로 마침내 집터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일월인 초승달은 날이 지남에 따라 점점 켜져 가게 마련이므로 이 터에 사는 사람도 그 기운을 받아 장차 크게 되리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결국 석탈해가 후일 왕이 된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려왕조는 왕조의 창업이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에 따라 태조 왕건의 풍수지리에 입각한 도참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말년에는 후손들을 경계하는「훈요십조」를 제정하였다. 그 제2조에는 “새로 개창한 모든 사원은 도선이 점쳐 놓은 산수순역설에 의거한 것이니, 절을 함부로 지어서 왕업은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으며, 제8조는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쪽의 지세와 산형은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 곳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면 정사를 어지럽히거나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터이니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수도를 이전하기 위한 천도논의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수도 송도(개성)는 철저한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선정되었다. 송도는 전형적인 장풍국의 땅으로, 주산과 좌우의 청룡과 백호 그리고 남쪽의 주작사라는 산에 의하여 빈틈없이 둘러싸인 일종의 산간분지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방어에는 어느 정도 유리하지만 명당의 규모가 적고 물과 연료가 부족하며 더이상의 발전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그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최대의 국사로 신중히 검토되었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무산되기도 하였다. 도선의 비기에 의하면, 한양은 이씨의 왕도라고 이미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 왕조는 이씨가 한양에 왕도를 창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양 땅에다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베고 심었다가 베고 하여, 풍수적으로 이씨의 왕도 자리임을 인정하고 인위적으로 이씨 성을 견제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고 한다. 이태조는 조선왕조를 창업하고, 태조 3년(1394년) 10월에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에 대한 이중환의 설명이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의 한 맥이 남으로 5,6백 리를 달려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북동쪽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된다. 여기에서 또 남서쪽으로 향해 달려가면서 조금 끊어지는 듯하다가 도 우뚝하게 일어나서 삼각산의 백운대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만경대가 되며, 한 지맥은 서남으로 달리고 한 지맥은 남으로 내려와 백악(오늘의 북한산)이 되는데, 이 산이 풍수가가 말하는 소위 충천목성이며 궁성의 주산이 된다. 동, 남, 북, 삼방이 모두 큰 강이고, 서쪽은 바다의 조수를 통한다. 백악은 여러 강이 모여 서로 얽힌 사이에 위치하여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인 것이다."
이처럼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이상적인 풍수지리를 갖추었다는 한양도 결함이 있다고 한다. 한양의 풍수적인 결함은 동방의 청룡에 허점이 있는 것과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로 보아 화기가 왕성한 점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동대문을 세울 때 문 밖에 반월형의 석축을 쌓아서 외풍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은 바 있다고 한다. 또한 관악산의 화기에 대해서도 해신을 상징하는 해태 석상 2기를 설치함으로써 화귀를 막고자 하였으며,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이라 칭하여 화귀를 견제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군 소개면 소륜산에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이, 산세가 좋아서 장치 큰 인물이 나와 중국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산의 지맥을 잘라 아직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김해의 구지봉은 이름 그대로 산의 모양이 기어가는 거북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영구하산형이어서, 이 산세대로라면 거북처럼 저력이 있고 오래 버틸 힘이 있어 조선이 언젠가는 또다시 득세하여 왕업을 이룰 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일본은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거북의 모리 부분인 구지봉의 맥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산에는 왕권의 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퍼뜨린 옛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비봉산은 원래 대봉산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중엽 이후 진주에서 출중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오게 되면 나라에 반영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진주의 봉황새를 날려보내기로 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보아 대봉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상이니 이 산의 혈을 파 없애고 산세를 억누르게 절을 지을 것이며, 대봉산이란 이름 대신 봉황이 날아가 버린 산이라는 뜻의 비봉산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지리설은 미신적인 여러 가지 요소를 함께 지닌 채 우리 민족의 사상체계 중의 하나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사상의 기본적인 맥락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산을 숭배하고 신성시하며 자연과 합일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민간신앙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의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살며 쌓아 온 문화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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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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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달팽이 뿔 위의 싸움-측양
위영*이 전후모*와 화약을 맺었으나 전후모가 이를 배반했다. 위영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 하자 서수*가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임금은 만승의 임금*이십니다. 어찌 필부같이 원수를 갚으려 하십니까? 청컨대 저에게 20만을 주신다면 임금을 위해 공격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고, 그 마소를 끌어오고, 그 임금으로 하여금 내열이 등 밖으로까지 나오게 한 다음 그 나라를 뽑아 버리겠습니다. 전기가 달아난다면 그 등을 치고 등뼈를 꺾어 버리겠습니다." 계자가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열 길 성을 쌓아가는 중 이미 일곱 길을 쌓았는데, 그것을 곧 허물어버린다면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할 것입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키지 않은 지도 어언 일곱 해로서, 이는 왕업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연은 난인이니 그 말을 들어선 안 됩니다." 화자가 다시 이 말을 듣고 추하게 여겨 말했다. "제를 치자고 말하는 사람은 난인입니다. 그러나 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난인입니다. 치자고 하는 자와 치지 말자고 하는 자를 난인이라고 하는 사람 또한 난인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오?" "임금은 도를 구할 뿐입니다." 혜자가 이말을 듣고 대진인을 만나게 했다. 대진인이 말했다. "임금께서는 달팽이란 것을 아십니까?" "아오." "그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를 가진 사람을 촉씨라 하고, 오른쪽 뿔에 나라를 가진 사람을 만씨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가끔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쓰러진 시체가 수만이었는데, 도망치는 것을 보름 동안이나 쫓고 나서야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허어, 거짓말이겠지...." 대진인이 말했다. "신은 임금을 위해 이를 증명하겠습니다. 임금께선 상하 사방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궁하오." "마음이 무궁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 나라에 생각이 미치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 같은 것이 됩니다." "과연 그렇겠소." "그 생각이 미치는 곳에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양이 있고, 양 안에 다시 왕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왕과 만씨가 구별이 있겠습니까?" "다름이 없겠구려." 대진인이 나가자 임금은 창연히 넋을 잃고 있었다. 혜자가 들어오자 임금이 말했다. "그는 과연 큰 사람이오. 성인도 아마 그를 당하지 못할 것이오." 혜자가 말했다. "피리를 불면 큰 소리가 나나 칼구멍을 불면 휙 하는 소리가 날 뿐입니다. 사람들이 요순을 칭송하나 대진인 앞에서 요순을 말하는 것은 한 번 휙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위영 : 위나라의 혜왕. 여은 그의 이름이다. * 전후모 : 제나라의 위왕. 모는 그의 이름이며, 전기라고도 한다. * 서수 : 벼슬 이름으로, 여기서는 공손연이 서수의 직을 맡고 있다. * 만승의 임금 : 만승지국의 임금, 곧 천자나 황제. 만승은 1만 채의 수레, 또는 그것을 가진 천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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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이 전후모와 서로 화친을 맺었으나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이를 깨뜨렸다. 격노한 혜왕은 제나라에 자객을 보내 위왕을 암살하여 했다. 그때 장군 공손연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대국의 임금은 그런 야비한 보복 수단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보다는 신에게 군사 20만을 빌려주십시오. 신이 임금을 대신해서 제나라로 쳐들어가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고 재산을 약탈하여, 제나라 왕이 분을 못 이겨 항복을 하면 모르되 만일 도망치는 일이 있으면 끝까지 추격하여 여지없이 쳐부수고 말겠습니다."
어진 신하로 알려진 계자가 이 말을 듣고 반대했다.
"높이 열 길이 되는 성을 쌓는데, 일곱 길을 쌓고 허물어버린다면 인부들의 고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금 우리 나라는 전쟁을 그친지 일곱 해나 되는데, 이야말로 왕업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무력에 호소하려는 공손연은 질서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덕이 높기로 이름이 있는 화자가 다시 이를 비판했다.
"전쟁을 주장하는 공손연과 같은 사람은 원래부터 질서를 파괴하는 무리임에 틀림없지만, 부전의 이를 주장하는 계자와 같은 사람 역시 이해에 사로잡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실은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저 자신부터가 시비에 사로잡혀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임금의 질문에 화자는 대답했다. "도를 닦는 사람 하나면 족합니다." 임금의 질문에 화자는 대답했다. "도를 닦는 사람 하나면 족합니다."
임금이 잘 이해하지 못하자 혜자는 대진인을 추천했다. 임금을 만나게 된 대진인이 물었다.
"달팽이란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촉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만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어서 계속 영토 분쟁을 되풀이했습니다. 한번은 보름 동안이나 격전을 벌인 끝에 쌍방 모두 전사자를 수만 명씩이나 내고서야 겨우 군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농담도 이만저만이 아니구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그 증거를 말씀드리겠으니 잘 들어주십시오. 대왕께서는 이 우주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끝이 없겠지." "그러면 마음이 그 무궁한 세계에 놀고 있는 사람이 땅 위의 나라들을 내려다본다면 거의 있는 듯한 작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나라들 속에 위나라가 있으며, 위나라 속에 양이란 도읍이 있고, 또 그 도읍 안에 대왕이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대왕과 만씨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으음, 별차이가 없겠군."
대진인은 물러갔다. 임금이 멍청히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데, 혜자가 들어왔다.
"정말 큰 인물이오. 성인도 그에 미치지 못하겠소." "피리를 불면 높은 소리가 울려퍼지지만, 칼자루의 구멍을 불면 휙 하고 입김 소리만 날 뿐입니다. 요순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 소리도 대진인 앞에서는 휙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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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뷔린토스의 미궁
미궁 속에 한번 들어가 보면 당신은 몹시 놀랄 것이다. 용맹한 테세우스가 그 미궁 속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두렵고 가슴이 섬뜩하였을까? 기원전 1500년에,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실패를 주지 않았다면 테세우스는 라뷔린토스의 미궁에서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네세우스가 라뷔린토스의 미궁에서 겪은 모험담을 들어보기로 하자.
라뷔린토스는 아름다운 크레테 섬에 있는 신비스러운 궁전이었다. 이 궁 안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길과 낭하가 많아서 한번 들어간 사람은 다시 되돌아 나오는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 궁의 주인인 미노스 왕은 미노타(미노스의 황소)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매년마다 미노스 왕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일곱 명의 젊은이와 일곱 명의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였다. 불행한 이청춘 남녀들이 크레테에 닿으면 미노스 왕은 그들을 라뷔린토스의 미궁에다 집어넣었다. 그들은 이 미궁 속을 헤매다가 미노타에게 잡혀 먹히곤 하였다. 결국 테세우스 왕자가 나타나 그 일곱 명의 젊은이들 속에 자기가 끼겠다고 나서기까지 그리스 사람들은 크나큰 근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테세우스 왕자는 미노타를 제거하든지 자기가 죽든지 양자 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레테의 수도인 크노소스에 다다랐을 때, 테세우스 왕자는 미노스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 공주를 만나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졌다. 테세우스 왕자가 라뷔린토스의 미궁으로 들어가기 직전 공주는 실패와 한 자루의 검을 그에게 몰래 갖다주었다. 그는 실패에서 실을 풀면서 미궁 속으로 들어가 미노타와 맞부딪히게 되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그는 괴물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실을 좇아 미궁 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하여 아리아드네를 신부로 맞아 아테네로 데리고 갔다. 이 이야기의 끝은 그렇게 아름답지가 않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에 닿기도 전에 아리아드네에게 싫증이 나서 그녀를 에게 해에 있는 섬에다 버리고 만다. 이것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이 듣기에는 무척 환상적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고증으로 밝혀졌다. 1900년에 에반스 경의 지휘 아래 크노소스에 탐사대가 보내졌다. 다른 여려 가지 흥미 있는 물건들 가운데 일꾼들은 땅속에서 복잡하게 설계된 방과 낭하가 있는 궁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고대 라뷔린토스 궁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사실은 그때까지도 선명한 색깔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여러 점의 그림들이었다. 이 그림들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황소와 싸우는 그림이었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와의 유명한 싸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렸다는 것을 짐작해볼 만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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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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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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