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726호
단기 4343. 3. 24 (음력 2.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 」 로 표시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어떤 한자인지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어린아이와 함께 있으면 영혼이 치료된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구리무와 포마드
북녘에서 나와 남쪽에 정착한 여성들이 여기의 화장품을 고르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북녘에서는 화장품 종류도 단순하거니와 이름도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매우 많은 종류에다가 영어 이름 일색이기 때문이다. 실은 남쪽 사람에게도 ‘베이스’, ‘파운데이션’, ‘에센스’ 등 우리의 화장품 이름은 화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거의 알 수 없는 전문용어처럼 여겨진다.
서양식 화장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백분, 크림, 향수, 비누 따위가 이때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유명 제품으로는 ‘동동구리무’가 있었는데, 이는 러시아 행상들이 북을 ‘동동’ 울리며 ‘크림’(cream)의 일본말 발음인 ‘구리무’를 외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요즘처럼 포장된 물건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덜어서 살 수 있어서 여성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는 남성 치장용품도 등장하였는데 1940년대에 처음 등장한 ‘포마드’(pomade)가 그것이다. 이는 사과라는 뜻의 프랑스말 ‘폼’(pomme)과 어원이 같은 말로서, 사과향이 나는 머릿기름을 이른다. 원래는 광물성 포마드가 들어와 있었는데, 어떤 국내 기업이 식물성 포마드를 개발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이를 발라서 뒤로 빗은 머리가 일류 멋쟁이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포마드는 1970년대에 인기를 잃었으나 헤어젤(hair gel), 무스(mousse), 헤어왁스(hair wax) 같은 제품들이 나와서 뒤를 잇고 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저버리기(자포자기)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면 그걸 ‘저버린다’고 한다. 그 ‘저버린다’의 ‘저’는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저’에 ‘자기’라는 뜻을 매기면 ‘저’를 ‘버린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저버리는 짓’은 ‘저버리기’다. 이 ‘저버리기’에 알맞은 한자말이 있을 법하다. ‘자포자기’는 어떨까.
‘이루’는 중국 황제 때의 전설적 사람인데, 볼심(시력)이 뛰어나 백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털끝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맹자>의 그 ‘이루편’에 있는 말씀. “‘자포’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이가 없다. ‘자기’하는 자는 더불어 일할 이가 없다. 예의를 헐뜯음을 ‘자포’라고 한다. 내 몸이 의리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가 없음을 ‘자기’라고 한다.”
입을 열기만 하면 예의를 업신여기는 것을 ‘자포’라 하고, 자기의 몸이 의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의리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바른 길을 버리고 다니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일반적으로 약간의 뜻맛이 달라져 실망, 실의 따위로 ‘자포자기’함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천하게 여기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어쨌거나 ‘저버리기’와 ‘자포자기’의 궁합은 흥미롭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안절부절못하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 어찌 할 줄 모르는 때가 있다.‘안절부절’은 이런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다.‘안절부절’에 ‘하다’가 붙으면 동사가 된다. 의미는 ‘불안하고 초조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그러나 국어사전에는 틀린 말이라고 돼 있다. 대신 ‘안절부절못하다’를 바른말로 올려놓았다.‘안절부절못하다’가 같은 의미로 널리 쓰인다는 게 이유다.
쟁이와 장이
‘-쟁이’는 접미사로 ‘-장이’에서 왔다. 뒤에 있는 ‘이’의 영향을 받아 ‘쟁이’가 됐는데 쓰이는 의미가 다른 말이 돼 버렸다.‘안경쟁이’라고 하면 안경 쓴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 된다.‘거짓말쟁이, 겁쟁이, 점쟁이’ 등도 대상을 낮춘다.
‘-장이’는 장인으로서 수공업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란 뜻을 더한다.‘옹기장이, 대장장이, 미장이.’
버스 값, 버스비, 버스 요금
다음 중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내는 돈을 일컫는 말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버스 값 ㉡버스 삯 ㉢버스 요금 ㉣버스비
답은 ㉠버스 값이다. "버스 값이 얼마예요" "택시 값이 얼마 나왔나요"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버스나 택시를 탄 요금을 묻는 게 아니라 버스와 택시를 사는 데 드는 돈이 얼마인지를 묻는 것이다. '값'은 물건에 일정하게 정해진 액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값'은 "값이 비싸다" "값을 치르다"처럼 물건을 사고팔 때 주고받는 돈을 의미한다. "애쓴 값도 없이 수포로 돌아갔다"와 같이 노력.희생에 따른 보람이나 대가 등을 뜻하기도 한다.
'삯'은 "왕복 삯만 10만원이 들었다" "삯을 받고 일하다"처럼 어떤 물건이나 시설을 이용하고 주는 돈, 또는 일한 데 대한 품값으로 주는 돈이나 물건을 의미한다. 따라서 '버스 삯' '택시 삯'으로 쓸 수 있다.
'-비(費)'는 교통비.생활비 등처럼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비용의 뜻을 더하는 말이므로 '버스비' '택시비'도 문제가 없다. '값'이 물건을 사고팔 때 주고받는 돈을 의미하므로 이용 요금을 가리킬 때는 '버스 값' '택시 값'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 두면 된다.
뇌살, 뇌쇄 / 다례, 차례 / 금슬, 금술, 금실 / 귀절, 구절
여자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매혹시켜 못 견디게 애가 타도록 할 정도라면 뭐라 불러야 할까. 뇌를 마비시킨다는 의미에서 '뇌살적'이라고 하면 될까. 실제로 '뇌살(적인) 미소[눈빛]' 등 '뇌살'이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뇌살'은 없는 말이다. '뇌쇄'가 맞다. 한자 표기가 '惱殺'이어서 '뇌살'로 발음하기 십상이지만 '뇌쇄'로 읽어야 한다. 한자 '殺'은 뜻에 따라 달리 읽힌다. '죽이다' '없애다'는 뜻으론 '살'(살균.살생)로 읽히지만 '몹시, 매우'(쇄도) 또는 '감하다, 빠르다'(상쇄.쇄도)는 뜻으로는 '쇄'로 읽힌다.
'뇌쇄'의 '뇌'도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두뇌를 의미하는 '腦'가 아니라'번뇌하다, 괴로워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惱(번뇌할 뇌)'자다. 따라서 '뇌쇄'는 몹시 애가 타게 만든다는 뜻이다. '살인 미소'라는 말을 연상해 '뇌살(적인) 미소' 등 '뇌살'이란 말이 더욱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 어휘를 정확하게 구사할 수 없다. '뇌살'이란 말도 결국은 한자나 한자어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귀절→구절(句節), 다례→차례(茶禮), 금슬→금실(琴瑟) 등도 이와 같은 현상이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
|
|
빗방울에 대하여 - 나희덕
1 빗방울이 구름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디언 마을에 가서 알았다 빗방울이 풀줄기를 타고 땅에 스며들어 죽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2 인디언의 무덤은 동물이나 새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멀리서도 빗방울이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3 새 형상의 무덤은 흙에서 날고 사슴 형상의 무덤은 아직 풀을 뜯고 있다 이 비에 풀이 다시 돋아날 것이다
4 나무들은 빗방울에게 냄새로 이야기한다 숲은 향기로 소란스럽고 오래된 나무들은 빗방울의 기억을 털고 있다
5 쓰러진 나무들은 비로소 쓰러진 나무들이다 오랜 직립의 삶으로부터 벗어난 나무들의 맨발을 빗방울이 천천히 씻기고 있다
6 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왔다 그러나 누운 뼈를 적시고 다시 구름과 천둥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7 구름이 강물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죽은 영혼을 어루만진 강물이 햇빛을 따라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이사 - 이영주
윤나게 넘나들던 안방과 거실들이 떠나는 발등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욕의 눈물 자락도 벽지 위에 묻어난다.
더러는 잊어 가며, 더러는 묻어 두며 지나온 나날들이 빗줄기로 내리는 밤 내일은 새로우리라 그렇게도 살았거니.
켜켜이 쌓인 눈물 씻어낸 손길 위엔 일어서 무너지던 일상의 어질머리 세월이 잊혀지듯이 떠나가고 싶었다.
|
|
|
|
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
|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이문구의 `관촌수필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룩―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 나고 있었다.”
이문구(55)씨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우리네 마음자리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것은 사실 유토피아니 무릉도원이니 하는 외국에서 들어온 언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민족의 정서로써만 표현과 이해가 가능한 정복(淨福)의 두레공동체일 터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른의 코골음과 부엉이의 울음과 강아지의 꿈꾸기가 서로 넘나들며 뒤섞인다.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원융과 합일의 시공간이 그곳이다. <관촌수필>이 추억하는 풍요와 화평의 세계는 작가의 토속적인 문체에 얹혀 광휘와 윤기를 더한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보호하고 번식시키는 환경운동가처럼 작가는 겨레의 말글살이에서 잊히고 묻히게 된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적극 살려내고 있다. 게다가 토종 된장국과 같은 능청과 해학, 그리고 씀바귀나물처럼 싸름한 비애와 아픔은 한국적 감성의 현을 섬세하게 건드린다. <관촌수필>이 그리고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의 원형은 그러나 6·25라는 미증유의 비극으로 처참하게 찢긴다. 특히 작가의 분신인 민구 일가는 아마도 전쟁의 발톱에 가장 혹독하게할퀴인 집안일 것이다. 남로당 충남 보령군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인근 청양과 서천의 지하당을 조직, 관할하던 민구의 아버지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며, 겹의 참척을 본 조부마저 자식들의 뒤를 따르자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작가는 그러나 사태난 죽음들의 구체적 사연을 시시콜콜 주워섬기지는 않는다. 소설의 초점은 그것들을 보듬고 흐르는 일상에 맞추어져 있다.
“숭헌… 뉘라 양력슬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歷)을 아는 벱여….” 혀를 끌끌 차는 마지막 이조인(李朝人) 할아버지에게서 아침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고, 낮이면 펄밭을 뒤져 꽃게를 잡고 고둥을 주우며, 아이다운 장난기와 심술로 장에 온 촌사람들을 놀려 먹기도 하고, 밤이면 개펄 위를 몰려다니는 도깨비불에 마음 졸이다가도,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여우울음에 홀린 듯 어슴새벽 바닷가로 나가 보는 것이 그 일상이었거니와, 전쟁은 그 가난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고 만다. 가령, 읍내 여관의 종업원으로 취직한 월남 피난민 솔이엄마는 장돌뱅이 서울 사내와 눈이 맞아 핏덩이를 데리고 밤도망을 놓는다. 그 충격으로 솔이아버지가 목 매달아 자살하고, 두 노인네는 며느리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을 손주를 찾을 겸하여 떠돌이 장수로 나선 것은 전쟁이 부린 도깨비 심술의 전형적인 사례로 된다. 전쟁이 바꾸어버린 팔자의 주인으로 민구네 집 부엌데기 옹점이를 빼놓을 수 없다. 덜렁대기는 하지만 당차고 속이 깊은 데다 인정 많고 쾌활했던 옹점이는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나간 남편이 죽자 시집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장터의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신세로 영락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결혼하기 전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 부를 때 옹점이는 자신의 운명이 노랫말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게 되리라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1972년에서 77년까지 발표된 <관촌수필> 연작의 첫편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한 대목에서 작가는 이렇게 탄식한다. 소설의 배경인 작가의 유년기에서 20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거기서 다시 20여 성상이 흘러가버린 90년대 중반의 관촌마을은 앞서의 탄식조차도 사치가 아니면 엄살로 들릴 정도로 변화의 거센 바람에 하릴없이 노출된 모습이다. 95년부터 보령군과 합쳐져 보령시로 불리는 옛 대천시 중심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관촌부락은 이름마저 대관동으로 바뀌어 있다. 작가의 생가 터에는 오래 전에 2층 양옥이 올라갔고, 주변의 논과 밭 자리에도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다. 돌과 흙을 이겨 쌓은 생가 터의 축담 일부, 그 너머의 낮게 휘어진 소나무와 문전옥답 옆의 은행나무가 유년기의 기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을 닮았다 해서 이름붙은 집 뒤의 칠성바위는 소설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근처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던 어느 땐가 사라져 없어졌다. 작가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바위들은 고인돌이었던 듯하다”며 “아마도 깨뜨려져 건축 자재로 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가 무엇보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수령 4백년 된 팽나무가 베어진 것이다. 작가의 유년기에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매달아 구르곤 했던 팽나무는 그 자리에 한창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에 밀려 쓰러졌다. 95년 가을 마을 입구에 세워진<관촌수필> 안내비의“서쪽 언덕 위의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는 아직 남아 있다”는 명문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마을 뒷편의 부엉재와 그 아래의 솔수펑은 여전하지만,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은 드넓은 개펄은 바둑판 모양의 농토로 바뀌었고 그중 일부는 다시 운전연습장이니 식당이니로 야금야금 변신하는 중이다.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초·중반에 남로당 아버지의 얘기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 지난 93년에는 <관촌수필>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있는 대천·보령 지역에서 드라마가 일대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화제와 소란 속에서 작가 역시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품어보았다. 소설 속 민구의 첫사랑이었던 옹점이가 드라마를 보고 혹 연락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숱한 방랑과 고생 끝에 일찍 죽은거나 아닌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작가의 눈에 얼핏 물기가 서렸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5장 나 하나 행복 둘
부지런(근면)
부지런하라. 부지런으로 승부를 걸어서 승리하지 못할 인생은 없다. 인간이 가진 장점(능력) 중에서 부지런보다 더 좋은 장점은 없다.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뛰어난 능력도 없다면 부지런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인생을 광명으로 이끄는 데 부지런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부지런은 인생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인 동시에 부족한 능력을 채워 줄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이고, 물질적 빈곤을 윤택함으로 돌려놓는 좋은 삶의 수단이다. 산야를 개척하는 데는 삽 한 자루만으로도 충분하고, 인생을 개척하는 데는 부지런만으로도 충분하다. 출발할 때 차이가 나서 불공평했던 각자의 삶은 부지런에 의해서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고, 나아가 승리까지도 뒤바꿔 놓을 수 있다. 가난하게 출발한 인생이 부지런에 의해서 부유로 뒤바뀌는 현상은 부지런이 승리를 안겨 준 좋은 본보기다. 가난하기 때문에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뒤쳐진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예외없이 변명이다. 그것들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수 성가한 이들의 뒤에는 눈물겹게 부지런한 생활 태도가 있었다.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지도 못한 그들은 오로지 부지런으로 승부를 걸어서 남들 못지않게 성공도 하고 부도 생긴 것이다. |
|
|
문학나눔 → 수필 |
|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에 관한 헛소문 사태
소문이란 그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라서-정확하게 말하면 좁다-소문에 말려드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에는 고맙게도 그리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무라카미가 BMW를 산 것 같아"라든가(살리가 없다), "무라카미는 매일 두부를 세 모나 부쳐 먹는대"라든가(한 모밖에 안 먹는다), 그 정도의 것들이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어째서 내가 하루에 두부를 세 모씩 부쳐 먹어야만 한답니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면, "아니, 잡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는다. 잘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게 대답을 한 기억이 있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질문이 거의 비슷해서 따분해지기 때문에 때때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대답해 버리게 된다. "좋아하는 거요? 두부부침이에요, 하루에 세 모는 먹는 것 같네요" 하는 식이다. BMW도 어딘가에서 농담으로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깔보며 살다가는 언젠가 안 좋은 꼴을 당하지 싶다. 하여튼 내 인터뷰 기사는 너무 믿지 말고 적당히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내가 다시 읽어 봐도 아연 실색하는 일이 있을 정도니까. 하기야 "연수입은?" 따위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그렇다손 치고, 해독이 없는 소문이란 즐겁다. 문단에도 여러 가지 소문이 있어서, 가끔 편집자를 만나 "사실은요, 무라키미 씨. 요전에 말이죠" 하고 하나 둘 문단의 소문을 들으면 "그런가, 그런 일도 있었나?" 하고 어느 정도 사회에 참여를 하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그런 건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으로, 신주쿠 골든 가에 어떤 얼음 기둥이 치솟았는지를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펭귄 북스에서 나온 <루머>라는 책이 있다. 미국에 퍼져 있는 다양한 소문이 진짜인지 헛소문인지를 가려낸 퍽 재미있는 책인데, 이것을 읽고 있으면 세상에는 실로 갖가지 소문이 있구나 하고 정말 감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존 딜리저의 페니스는 너무 커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라는 것은 헛소문이고, "아인슈타인의 뇌는 위치타의 의사가 병에 담아 보존하고 있다"라는 건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사후에 자신의 뇌를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위치타까지 흘러 들어가 병에 담긴 채 사이다 상자 속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1943년에 주조된 1센트짜리 동전을 포드 사에 가져 가면 새 차를 한 대 준다"라는 소문도 있는데, 이것은 유언비어다. 그러나 1943년의 1센트짜리 동전은 희귀해서 실제로 새 차 한 대 정도의 값으로 흥정을 한다고 하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 판 <플레이보이>지 표지 타이틀의 P자에 별이 몇 개 붙어 있는가가(1978년 이전의 <플레이보이>지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체크해 보십시오), 바로 편집장인 휴 헤프너가 그의 파트너와 그 달에 몇 번 섹스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헛소문이다. <플레이보이>지는 지역별,용도별로 달리 편집되고 있었고, 별의 갯수는 그 표시였던 것이다. 문학에 관계된 것으로는 "토머스 핀천은 J.D.샐린저의 필명"이라는 굉장한 소문이 있다. 이것은 진짜 완벽한 헛소문이다. 샐린저가 자택에 틀어박혀 있었고, 핀천이 사진을 발표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탓에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됐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남들이 모르는 필명을 두 개 정도 갖고 있지만 말이다.
"프랑스에서 제리 루이스는 채플린과 쌍벽을 이룰 만큼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라는 소문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필시 프랑스 인들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일 거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그리고 구리코 모리나가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식품 관련 회사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를 들면 맥도날드 햄버거에 들어 있다고 소문이 났던 것만 해도, 고양이 고기, 캥거루 고기, 거미 알, 지렁이...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맥도날드 사는 광고를 할 때 항상 '100퍼센트 쇠고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담배 회사인 체스터필드 회사는 한때 "공장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견됐다"라는 소문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회사는 탐정 몇 명을 고용해서 그 소문의 발생지에 가장 가까운 스물 다섯 명 중 범인을 밝혀 내는 데 1,000달러를 걸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1,000달러를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이 어느 정도 소문의 전파 경로를 거슬러 올라갔지만, 좀처럼 발생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남에게 해가 되는 거짓말이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며칠 전 어떤 여성 편집자에게서 "무라카미 씨도 꽤 짖궂더군요. 너무해요"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 소문의 발생지를 캐어 보니, 아니나다를까 안자이 미즈마루 씨였다. 곤란하다구요, 그런 짓은. |
|
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
|
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3. 지리체계로서의 산
산은 인간세상을 둘러싼,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자연환경이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산은 그 입지나 지세 등에 따라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작게는 가옥의 배치에서부터 한 부락의 형성,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도읍을 정할 때에도 산과의 조화를 가장 큰 요건으로 여겨왔다. 또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침을 물리친 사례는 역사상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형태나 주민들의 기질 형성에도 산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산이나 대지에 자연의 생동하는 힘인 정기나 생기가 있다는 믿음에 따라, 산을 신비하고 기묘한 힘을 가진 실체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상호 병존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의 민간신앙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풍수지리사상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지리관 내지는 토지관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 산과 삶의 조화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다. 국토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 간에 산맥이 놓여 있어서 남.북, 동.서의 지역간에 기온의 차이가 큰 편이다. 특히 산이 우리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산이 취락 단위의 경계가 되고 지역과 지역 간을 격리시키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계들은 지역 간의 특수성 내지 이질성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산맥을 경계로 지역 구분의 기본 틀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산지의 격리 기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크게는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3대 지방과, 그 지방에서 산맥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는 각 지역들은 각기 산업, 일상생할, 사회, 문화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민가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보면, 가옥의 경우 북쪽으로부터 폐쇄적인 전자형의 북부형(함경도), 대청이 있는 ㄱ자형의 중부형(경기, 충청도 북부), 흔히 툇마루가 있는 개방성이 큰 일자형의 남부형(전라, 경상도), 그리고 특수형으로서의 제주도형 등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거주형태 외에도 김치와 여러 가지 계절 음식을 포함한 식생활, 의복, 교통수단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지역에 따라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산맥들에는 영, 재, 고개 등이 있어 지역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통로들이 이들을 통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계림령로가 개통되었고 158년에는 죽령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로는 교통로의 기능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방비와 안전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령의 관문, 철령의 관문, 삼방관 등과 같이 관문이나 관방이 중요 고개마다 설치되어 성책과 산성문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찰방과 역승을 연결하는 산로가 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높은 산정부는 통신수단으로서 봉화대의 설치장소로 이용되었다. 봉화가 제도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고려 예정 3년(1149년) 봉화식을 사용한 때부터였으며, 주로 국방상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변경의 비상사태를 중앙 또는 기지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봉화대의 설치방법은 매 30리마다 제일 높은 곳에 봉화대를 두되, 만약 산이 서로 막혀 불편할 때에는 이수에 제한 없이 조망이 가능한 곳에 두었다. 전국의 봉화계통을 보면 직봉이라는 5개 주요선이 있고, 이들 5직봉은 모두 목멱산(서울 남산)의 봉화대로 집중되도록 되어 있다.
산은 또한 그 지세와 위치에 따라 요새로 이용된다. 역사적으로 외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산천의 지세를 천연의 이점으로 삼아 겨레와 나라를 지키며 국난을 극복한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지형을 이용하여 산성을 축성함으로써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산성의 축성은 국경의 설정이 되기도 하였고, 취락 근방에 설치하여 도시국가나 성읍국가의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최초의 산성은 기원전 2세기의 평양성으로, 산을 이용한 취락보호의 성책이었다. 산성은 산마루와 정상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대체로 배후와 좌우에 험한 능선이 둘러싸고 안에 시내나 샘이 있는 산지를 골라 성루를 쌓고 골짜기의 좁은 출구에 성문을 세운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건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능한 한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고자 한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민가는 자연지리와 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먼저 높지 않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산과 조화를 이루도록 높지 않은 집을 지었다. 알프스 등과 같은 높은 산지의 산악국가들이 그 산을 배경으로 높고 지붕이 뾰족한 집을 지어 조화를 이루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높지 않고 완만한 둥근 모양의 산이 많으므로, 낮고 완만한 곡선의 가옥들, 특히 초가들은 한국 민가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산사의 배치는 축을 여러 개 두어야 하였고, 높은 지영일수록 축의 수가 늘어나는 경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해인사나 부석사 등의가람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주택은 주변의 자연 그대로가 정원이 되어, 건축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자연은 인공의 건축을 포용하고 건축은 자연을 인공 속으로 끌여들여 서로 공존하며 자생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건축에서의 입지선택은 곧 자연으로 귀환하는 것이며, 귀속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조형미 자체도 깊이와 은은함을 지향하여, 자연계의 질서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촐하고 넉넉하게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산을 숭배하고 자연을 동경해 온 선조들은 서민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산수화를 곁에 두고 감상하기를 즐겨 하였다. 특히 궁궐의 정전 어좌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오봉산일월도 또는 일월곤륜도는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송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오봉산일월도에서의 오봉산은 오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하늘의 은덕 아래 왕권 존속 및 왕실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 달, 물, 소나무와 함께 오악이 설정되어 있는 이 그림은 전통의 오악신앙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왕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칭송과 왕족의 무궁번창을 기원함과 동시에 조정의 최고 지위를 상징하는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산에 대한 강력한 의미부여는, 실제생활의 여러 방면에서도 산의 조형을 본떠 권위와 길상을 상징하고자 하였다. 즉 산의 모양을 닮은 대감모자를 쓰고 산수가 넓게 펼쳐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서안을 앞에 두고 십장생이 수놓아진 보료에 기대어 않은 양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산세의 새김은 명당과 취락을 만드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기질과 성격 형성에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고남저형으로, 북쪽에서 강렬한 산세가 일어나 서남으로 흘러오면서 점차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산세가 약한 곳은 양기가 성한 곳이요, 산세가 강한 곳은 음기가 성한 곳으로, 남양북음이 그대로 적용되어 남쪽은 남자가 준수하고 북쪽은 여자가 인물이 아름다워 남남북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방 산세와 관련하여 각 지방민의 성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장백산맥의 줄기찬 영향을 받은 함경도의 주민들은 어떤 일이나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끈질기고 참을성이 많은 기질을 지녔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백두산의 영향을 받은 평안도 사람들은 고고한 기질 때문에 타협이나 양보를 모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힘이 없다고 한다. 높은 준령의 지맥이 순하게 서남으로 뻗어서 개활지를 형성한 황해도는 인정 많고 온화하며 정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팔을 내밀 듯 일자로 뻗은 태백산은 강원도민의 정직한 성품을 길러 속을 줄은 알아도 속이지 못하는 선하고 우직한 바탕을 이루었다. 500년의 수도로 전국의 문물이 집결하는 서울을 비롯한 기호지방은, 도읍지로서의 양명한 기운으로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잔산천록의 영향을 받은 충청도는 완만하면서도 호인형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양반기질을 형성하였고, 동해안을 끼고 뻗은 태백산맥과 중간에서 서쪽으로 흘러간 소백산백의 영향을 받은 경상도 사람은 강인한 투혼으로 일기당천의 호한들이 많고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 총명하고 영리하며 예능에 뛰어난 전라도민은 산세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단결력이 강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것도 산세와 큰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오봉산일월도] |
|
|
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
|
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벼슬길을 구하는 법 - 측양
측양*이 초에 머물렀다. 이절*이 왕에게 말했으나. 왕이 보려 하지 않으므로 이절은 돌아왔다. 팽양*은 왕과를 보고 말했다. "선생께서 저를 왕에게 천거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왕과가 대답했다. "나는 공열휴*에 미치지 못하오." 팽양이 물었다. "공열휴란 어떤 사람입니까?" "겨울에는 강에서 자라를 잡고, 여름에는 산속에서 쉬오. 지나가던 자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이 내 집이다.'라고 했소. 이절이 못한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나는 이절을 당할 수 없소. 무릇 이절의 사람됨은 덕은 없지만 지혜는 있소.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으며, 그 교제를 귀신처럼 해치우고 있소. 원래 부귀에 눈이 멀어버린 자라 서로 도와서 덕을 키우지는 못하고, 서로 도와서 덕을 없앨 인물이오. 무릇 언 사람은 봄이 되어도 옷을 빌리고, 더위를 먹은 자는 겨울에도 찬바람을 쐬려 하오. 저 초와의 사람됨은 엄하고 존대하여 범죄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용서가 없소. 아주 간사한 사람이거나 올바른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를 굴복시킬 수 있겠소? 성인은 빈궁해도 가족이 그 가난함을 잊게 하고, 영달해서는 왕공으로 하여금 그 작록을 잊고 비천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오. 사물에 있어서는 함께 즐기게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통하여 즐기지만 자기를 보존하오. 그래서 혹 말이 없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화평을 만끽하게 하고,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을 화하게 한다오. 아비는 아비, 자식은 자식으로서 있어야 할 모습을 갖게 하고, 그것을 베푸는 데 있어서도 숨어서 나오지 않소. 성인의 마음은 이처럼 고매하기에 나는 공열휴를 좇으라는 것이오."
* 측양 : 성은 팽, 이름이 측양이다. * 이절 : 초나라 대신의 이름. * 팽양 : 측양을 가리킨다. * 공열휴 : 초나라 은자의 이름.
************************************************************************************
측양이라는 자가 벼슬을 얻기 위해 초나라에 왔다. 우선 왕의 측근인 이절을 통해보았으나 왕이 만나주지를 않자 이번에는 왕과를 찾아가 부탁했다. 그러나 왕과는 한마디로 거절하며, 공열휴에게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측양이 그의 사람됨에 대해 묻자 왕과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겨울이면 강에서 자라를 잡고, 여름이면 산속에서 일월을 벗삼아 놀고 있소. 누군가 그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강가와 산속이라고 대답했다더군요. 아무튼 나로서는 저 지혜로운 이절이 못하는 일을 떠맡아 해낼 수가 없소. 이절은 비록 덕은 없지만 굉장히 지혜로워서 늘 겸손한 척, 남과의 교제를 귀신처럼 해나가는 사람이오. 하지만 부귀에 눈이 먼 사람이라 서로 돕고 지낼수록 덕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덕을 손상시키기 일쑤인 인물이오. 이런 속담을 들은 적 있소? '몸이 언 사람은 봄이 되어도 옷을 빌리며, 더위를 먹은 사람은 겨울이 되어도 찬바람을 쐬고자 한다.' 초나라 임금은 그 사람됨이 존대하고 엄격하며, 범죄자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조금도 용서가 없소. 간사한 악당이 달라붙어 그의 마음을 녹이든가, 고상한 인격자가 그 미친 것 같은 마음을 식혀주지 않는 한 방법이 없소. 반면에 성인은 가난하여도 가족이 가난함을 잊고 도를 즐기게 하며, 영달하면 왕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귀함을 잊고 백성들과 동화하도록 만드는 사람이오. 어떤 사물이나 적응해 즐기고, 어떤 인물과도 교제해 즐기지만 결코 자기를 잊는 일이 없소. 그러기에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을 평화롭게 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감화시켜나가오. 아버지와 자식이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덕을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니 마치 천지의 덕과 같소. 그러기에 공열휴를 찾아가서 부탁하라는 거요." |
|
|
문학나눔 → 이글저글 |
|
|
가혹한 판사
베네딕트 카르프조우는 1620년부터 1666년까지 독일의 라이프지그 지방의 판사장을 역임하던 인물로서 그는 이 긴 역임 기간 동안 주로 좀도둑이나 마녀의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30,000건의 사형 언도를 내렸다. 20,000건 이상이 되는 사형 언도는 주로 마법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여인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또한 죄수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직접 보기를 즐겼던 그는 반드시 죽은 개나 쥐들을 죄수들의 시체와 함께 파묻도록 지시하였다. 하루에 5건의 사형 언도쯤은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던 이 판사는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있었으며 일생을 통하여 성경을 50번 통독하였다는 사실을 매우 큰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아끼던 애견이 죽은 지 몇 분 후에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다.
노래하는 멤논의 거상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왕 아멘호텝 3세는 테베 시 근처에 자신의 신전 무덤을 만들면서 그 입구를 지키는 2개의 거상을 세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집트인들은 항상 동이 틀 무렵이 되면 이 2개의 거상에서 신비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이 현상을 신비스럽게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은 이 거상을 전설 속의 반신반인인 멤논이라고 부르며 하루에 한번씩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그 멤논이 '새벽의 여신'인 그의 어머니 이오스에게 올리는 문안 인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지진에 의하여 2개의 거상 중 하나가 파괴되어 셉티무스 황제가 그것을 복구하였으나 그 신비스러운 노랫소리는 영영 중단되고 말았다(요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거상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그 신전 무덤까지 사라진 사막의 폐허에는 2개의 거상만이 쓸쓸한 침묵을 지키고 서 있지만 아직도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가 떠오르면서 사막의 기후는 급격한 변화와 함께 거센 기류 현상을 일으킨다. 이 공기의 흐름이 거상의 헐거운 접속 부분을 지나면서 신비스러운 마찰음을 만드는 것이며 복구된 후에 이러한 소리가 영영 사라진 이유는 복구 작업 때 거상들의 헐거운 접속 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곧 신비스러운 소리의 정체가 오르간 파이프의 원리로서 설명될 수 있다면 이 거상들은 괴상하게 조각된 역사상 유일한 작품이 될 것이다.
|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