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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장돌뱅이의 애환 - 유필조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정책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상업의 발전을 억제하는 근본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생활의 필요에 따라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농민들은 자급자족할 수 없는 수공업제품이나 소금, 생선, 건어물 등 각종 물품을 상인을 통해 구입하였다. 이러한 농촌 상업은 정부의 정책뿐 아니라 농민의 상품 생산이나 구매력 수준 향상, 유통기구 발달과 관련해서 장시라는 농촌시장의 탄생과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통 상인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장돌뱅이나 객주여각의 출현과 변화에는 이러한 사정이 배어 있다. 상업이 발전한 조선 후기에 이들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김주영의 <객주>에 등장하는 각 지방으로 난장을 트러 돌아다니는 개성상인과 쇠전꾼, 그들을 따라 다니는 광대패사당패, 그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무뢰배 등은 단지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니라, 조선 후기를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5일마다 열리는 시골 장터는 이들이 물건과 놀이를 파는 생활터전이자 그 애환이 녹아 있는 마당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객주여각으로 통칭되는 숙박업과 위탁판매거래알선금융업 등을 겸업하던 주인이나 보부상과 같이 권력층과 결탁하거나 정부의 공인을 받아 포구나 장시의 유통을 독점하던 상인도 있었다. 그러나 장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대다수의 사람은 이러한 특권과 무관하였다. 예들 들어 우리는 보부상을 장터를 순회하는 상인의 대표 격으로 알고 있지만, '보부상=장돌뱅이'는 아니었다. 보부상은 장돌뱅이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군현이나 비변사 등에 공인 받고 독점권을 행사하였던 일부 사람들이었다. 장터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정부나 저들 특권상인의 수탈을 받기도 하고 그에 저항도 하면서 삶을 지켜나가던 상인과 농민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인이 성장한 토양이 되었던 시골 장터는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했으며, 여기에 자기 생계를 의지했던 이들, 즉 상인의 삶은 어떻게 변화해 갔을까?
장돌뱅이의 선배들
조선시대 서울이나 개성, 나주, 경주, 전주 등 도시에는 정부에서 설치한 상설점포인 시전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지방 농촌에는 시전과 같은 설점포가 없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장돌뱅이의 생활터전이라고 이야기했던 시골 장터, 즉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일정한 장소에서 열리는 장시도 조선이 건국될 당시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 농촌시장의 공백을 메우고 있던 이들은 후에 장돌뱅이, 장돌림 등으로 불리던 사람들의 선배였다. 아직 장터가 없었으므로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장돌뱅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각 지방의 마을을 돌아다녔으므로 당시의 표현대로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 즉 행상이었다. 행상의 활동은 그 연원이 매우 깊었다. '달아 높이 떠서 행상 나간 우리임이 가시는 길을 비추어 주렴' 하는 아낙의 바람을 노래한 정읍사를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도 이러한 상인은 존재하였다. 행상은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교환을 통해 구했던 시기 이후부터는 늘 존재하였고, 시기가 내려와 잉여생산물이 증가하고 사회 분업의 폭이 확대될수록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행상의 활동이 농촌사회에 폐단을 끼치는 요인으로 간간이 지적되고 있었다. 그들은 빗유기목기의관류농기구 등의 수공업제품이나 소금생선과 같은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농촌을 돌아다녔고, 정부에서는 이를 불필요한 사치품을 가지고 쌀이나 다른 곡물을 사들이는 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취급하는 물품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농촌사회에 일용품과 생활필수품생산도구를 공급해 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행상 가운데는 육로를 이용하는 육상과 수로를 이용하는 수상 즉 선상이 있었다. 정부는 선상에게서 훨씬 많은 세금을 걷었다. 선상은 등짐이나 봇짐, 소말 등을 이용하는 육상보다 많은 상품을 신속하게 운송할 수 있는 대상인 이었기 때문이다. 행상은 나라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인 행장을 지니고, 조직을 갖추어 활동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직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이후의 보부상과 같이 특정 물건을 독점하거나 장시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부상단이 꾸려지는 기본요인인 험준한 도로 사정이나 도적의 위협이 조선 전기에도 마찬가지였음을 생각해 보면 행상조직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 정부가 행장을 발부하는 단위도 행상단이었다. 이들은 물건을 값싸게 사들여서 비싸게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지역 특산물을 파는 전업상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유통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상인들이었다. 상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고 유통기구도 덜 갖추어진 까닭에 모험적 상업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달리 생각해보면 해상활동에 한계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장이 서고 포구 상업이 발달하는 등 지역 내 유통중심지와 유통기구가 형성되면서 이들의 상업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장이 서다
농촌시장인 장시가 처음 등장하였던 것은 15세기말이었다. 그 이전에도 지방에 시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도 부정기적으로 주현시가 열리고 있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한낮에 상하 모든 계층이 관아 주변에 모여 물건을 교역하였다고 한다. 15세기말에 등장한 장시는 이로부터 발달하여 한 단계 진전된 유통기구였다. 이는 장시 출현 당시의 사정이나 장시의 특징을 살펴보면 분명하다. 15세기 말 전라도 무안나주 등지의 사람들은 큰 흉년을 맞아 스스로 한 달에 두 번 읍내 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교역하면서 이를 장문이라고 불렀다. 교환을 통해 흉년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임천에 피난하였던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포목으로 쌀과 보리를 바꾸거나 떡을 찌고 술을 빚어 장시에 내다 팔아서 생계에 보태려 했던 것을 보면 애초에 흉년을 당해 장시를 열었던 사람들의 활동도 이러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수준에서 출발한 시장이었다. 하지만 흉년에 이러한 활동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다양한 물산이 풍부히 생산되고 생산자들이 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찍하게 펼쳐진 나주평야를 끼고 서해안도 인접하여 곡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던 전라도 나주무안 지역에서 제일 먼저 장이 섰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15세기 후반은 왜구의 침입으로 황폐해졌던 해안지역의 농토 개간이 완료되고,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발달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장시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민과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였다. 이들은 원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통하는 것보다, 장시에서 낮은 가격에 구매하고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장시는 몇 개 촌락의 주민이 하루에 왕복하여 교역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30-40리의 거리를 두고 확산되었다. 사용되는 교환수단 역시 소규모 거래에 알맞은 '사용할 수 없는 거친 면포'나 곡물이었고, 뒤에 가서는 소액 화폐인 동전이었다. 이런 까닭에 장시는 상설시장화하지 않고 정기시장으로 존속되었다. 장시의 주된 이용자가 직접생산자였고 여기에서 매매되는 주요 상품이 곡물과 직물 및 각종 수공업제품이었기 때문에 생산자에게는 제품을 만들 시간이 필요하였고, 수요자도 이를 매일 구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장시는 설치장소, 교환수단, 개장일시 등 모든 면에서 농민, 수공업자등 직접생산자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시장기구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농촌현실과 직접생산자층의 이해에 깊이 관련되어 장이 서게 되자, 그 이전부터 농촌을 돌아다니던 행상들의 활동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가가호호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점차 장시의 순회에 생계를 의지하게 되었고, 종전처럼 유통과정에서 큰 이익을 노릴 수는 없었지만, 정기적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구매자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행상의 수도 상업 이익을 노리는 자들과 정부의 조세 징수, 지주층의 토지 겸병 때문에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의 합류로 더욱 늘어갔다.
장은 5일에 한 번 섰지만, 하루도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없었다.
15세기 후반 처음 모습을 보인 장시는 점차 삼남 전지역과 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었고, 애초 출현할 당시 15일이나 10일 간격이던 개시일도 점차 5일 간격으로 조정되었다. 16세기 중엽 명종대에는 지방 군현에서 날짜를 달리하여 번갈아 장시가 서는 경우가 있어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장시 금지 지역인 경기도에 장시가 많이 설치되어서 서울로 물건이 유입되지 않는다고 과장하는 관료도 있었다. 정부에서도 장시 확산과 상업 발달에 따른 사회 문제의 발생과 기존 유통망의 동요를 우려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시 확산 추세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즉 종래에는 관아나 군사적 요지를 중심으로 시장이 개설되었던 반면, 이제는 산간지역에도 장이 서게 되었다. 당초 장시를 금지했던 정부도 점차 장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확산을 억제하다가, 결국은 백성을 모으는 방편으로 장시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화전민이 산간지역을 개발하여 산촌이 발달하는 등 인구 확산이 두드러졌던 것도 장시가 확산되는 한 배경이었다. 이 결과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전국의 장시 수효가 1,000여 곳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장시 상호간의 관계도 변화하였다. 우선 인접한 장시들의 개시일자가 조정되고 있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모시 산지로 유명하였던 충청도 홍산, 임천, 한산, 비인, 남포의 장시는 27일, 5.10일, 16일, 38일, 49일에 열리고 있었다. 각 고을만 보면 여전히 5일 간격의 정기시만이 열렸지만 이들 지역 전체로 보면 매일 장시가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은 바쁜 농사철에도 짧은 거리만 가면 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이익을 본 사람은 장시를 돌아다니던 행상이었다. 이들은 하루 왕복거리를 두고 날짜를 달리하여 열리는 장시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인접 장시 사이에 열리는 날짜가 조정됨으로써 시장권이 형성되어 갔다.
장시마다의 교통사정이나 수요의 크기에 따라 변동 양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예를 들어 장시들이 조밀하게 분포하였던 영호남지방의 경우 18세기 말 이후에도 벽지나 중소읍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장시가 등장하여 장시망이 확대되었다.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였던 큰 읍에서는 대규모 장시가 서서 인접 장시들이 폐지되거나 서는 날짜를 바꾸게 되었다. 대규모 장시는 소규모 장시에 나오는 산물을 모으고 외부의 상품을 배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장시의 숫자는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까지 1,000여곳 안팎으로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나 실상은 이렇듯 대규모 장시를 중심으로 시장권이 조정되는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금강 어귀에서 부여 등 배후 평야지대의 곡물을 모으고 해산물을 공급하였던 은진 강경포나, 동해안의 어물, 목재와 삼남의 곡물이 모여들었던 덕원 원산포를 비롯한 경기도 광주 사평장, 송파장, 안성 읍내장, 교하 공릉장, 충청도 직산 덕평장, 전라도 전주 읍내장, 평안도 박천 진두장 등은 이런 상황 속에서 발전한 대규모 장시였다.
장돌뱅이의 애환
이러한 체계적인 시장권의 형성은 교통로의 발전과 이를 돌아다니며 각의 장시를 연결해주는 행상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음의 민요는 이렇게 장시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짚신에 감발 치고 패랭이 쓰고/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이장 저장 뛰어가서/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목소리 높이 고래고래 지르며/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쳐가며/돌도부장사하고 해질 무렵/손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다음 날 저 장에서 다시 보세
꽁무니에 짚신 켤레를 메고 이장 저장 돌아다니고 장이 파한 후에는 다음 날 다른 장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이들 행상은 이제 말 그대로 '장돌림', '장돌뱅이'였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애초에는 행정과 군사 목적을 위한 간선도로가 6대로, 7대로, 10대로 등으로 증가하고 통상로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도로가 개척되기도 하였다. 영남의 경우 조령죽령을 통하는 대로 외에도 청주와 상주를 연결하는 고갯길과 괴산과 문경 사이의 이화령길이 생겨났고, 함경도의 경우에는 서울로 이어지는 철령을 넘어가는 대로 외에 새로이 평강을 통하는 삼방길 설운령길이라는 지름길이 트이고, 이와 연결된 지선도로를 통해 황해도평안도강원도로도 함경도 명태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도로변에는 주막이 들어서 주막촌이 형성되었고, 상인들은 주막촌에서 허기를 채우고 헤진 짚신도 갈아 신으면서 다음날의 활동을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선상의 활발한 활동으로 해로도 크게 발전하였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험로인 태안반도의 안흥량이나 장연의 장산곶을 뱃사람들이 제 집 뜨락 거닐 듯이 하였던 것이다.
이들 장돌뱅이가 취급하는 물건은 곡물을 비롯하여 면포모시지물금속세공품피물 등 값이 나가는 물건에서 어물소금무쇠그릇나무제품죽제품 등 부피는 크지만 값이 헐한 생활필수품까지 다양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외국 물건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이러한 물건을 배와 마소 등에 싣거나, 봇짐이나 지게에 짊어진 채 장사를 돌아다녔다. 이런 속에서 이들은 그 지방 사람들과 부대끼고 친숙해졌던 것이다. 이들 장돌뱅이 가운데는 대규모의 자본과 관계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상인도 있었다. 개성상인의 차인이나 서울상인과의 관계 속에 바닷길을 통해 상업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이 그 대표적 예였다. 개성상인 중에는 개성 부근의 촌락을 돌며 5일 만에 집에 돌아오는 자들도 있지만 정월에 한 번 집을 떠나면 아예 세밑에 돌아오는 자가 많아, 같은 달에 태어난 아기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장돌뱅이의 상업규모는 영세한 경우가 많았다. 직물지물피물을 취급하는 이들에 비해 어물소금무쇠그릇나무제품죽제품 등 값싼 제품을 지고 팔러 돌아다니는 이들은 더욱 처지가 열악하였다. 장돌뱅이 가운데는 일정한 집이 없어 처자를 이끌고 장삿길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남녀가 같은 방에 묵게 될 경우 그 사이에 발을 내리고 숙박하였다 한다. 이들 사이에서 '남자 부상은 여자 부상의 신발을 넘지도 못한다'는 말이 전해 오는 것은 이러한 팍팍한 생활의 한 면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노래처럼 등짐을 메고 동서를 떠돌아다니던 이들은 병이 나면 간호할 사람도 없었고, 죽으면 땅에 편안히 묻히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무거운 등짐 지고 이곳 저곳 떠돌면서/아침에는 동녘 하늘 저녁에는 서녘 땅/어쩌다 병이 나면 구완할 이 전혀 없네/사람에게 짓밟히고 탓세한테 괄세받고/언제나 숨겨 두면 까마귀의 밥이 되고/슬프도다 우리 인생 이럴 수가 어찌 있소 (고령 지신밟기 노래의 일부)
장돌뱅이들은 농업을 위주로 한 조선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상업에서 많은 이득을 거두지는 못했다. 개성이나 서울의 대규모 행상은 몰라도 대부분의 영세상인은 왕실, 권세가, 관아, 그리고 이들과 결탁하여 유통과정을 장악한 객주여각 등에게 이익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봉건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결정판인 갑오농민전쟁에서 보부상과 잡상포구 선주인과 도매상인의 폐단을 금지하고 장시에서 걷는 세금을 철폐할 것을 요구했던 것은 이러한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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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2장
2. 벽사의 색
동소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은 사되고 나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일을 알 수 없고, 가진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삶의 과정 자체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고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생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크고 강력한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바람이 각종원시신앙과 주술적인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도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이나 무의식적인 생각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과 연관된 어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든가 아침에 만나는 작은 곤충에게서도 그 날의 운세와 연관시켜 보고자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능력을 설정해 놓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된 것을 물리치고 행복과 안락함, 즉 복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사된 것을 물리치는 힘, 그것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색과 관련된 측면에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을 물리치는 양의 색
귀신이나 악하고 나쁜 것은 어둡고 드러나지 않은 깊숙한 곳에 있다. 밝음이나 개방된 곳은 이들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밝고 원기와 생명력이 충만한 것을 양, 무겁고 어두우며 숨어 있는 것을 음이라고 본 음양사상에 따라 동양에서는 귀신을 음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필원잡기〉에 따르면, 귀신은 음성인 까닭에 양성인 남자보다는 여자에 부착되는 수가 많고 빛이 드는 양지나 튀어나온 곳보다는 음습한 동굴, 오래된 우물, 깊은 계곡 등의 들어간 곳과 고사찰, 폐옥, 고목 등에 운집하여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음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강자, 즉 양이 요구된다. 음양오행사상에 의하면, 우주생성의 근본원리에 해당하는 기본색으로 백색, 청색, 적색, 흑색, 황색의 5색이 있으며, 이 중 청색과 적색이 양에 해당된다. 청색은 방위로 볼 때 태양이 솟는 동방에 해당하여 창조, 신생, 생식 등을 상징하는 양기가 강한 곳이다. 적색은 남방에 해당하여 온난하고 만물이 무성하므로 또한 양기가 왕성한 곳이다. 이에 반하여 서방의 백색과 북방의 흑색은 음에 해당된다. 음양사상에 따르지 않더라도 백색과 흑색은 생명력이나 왕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고체계를 규격화시키는 제도적인 것의 일종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에 있어서 음양오행은 우주의 이치를 지켜본 다음에 이를 종합하여 정리한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양오행사상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고대사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사고와 믿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원시사회에서 가장 큰 숭배의 대상인 태양과 불의 적색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상징'을 느낄 수 있었고, 왕성한 식물과 경배의 대상인 하늘의 푸른색에서 생명력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적색과 청색은 힘과 생명의 상징색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사되고 악한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할 때 적색 또는 청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관습은 현재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적색과 청색은 모두 생명력과 힘이 충만한 양의 색이지만, 실제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것은 적색이 압도적이다. 이는 적색이 태양, 불, 피와 같은 원시신앙의 주요한 대상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주술적인 위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이 사용한 벽사(사된 기운을 물리침)의 색으로 대표적인 적색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적색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대인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숭배한 태양과 불의 색이 붉은 색임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속에서 고동치며 흐르는 붉은 피는 곧 생명과 직결되는 생명력의 상징임을 알았다. 이처럼 태양, 불, 피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생존이 가능하고 강력한 힘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태양, 불, 피가 가지고 있는 붉은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고 이를 숭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귀신과 질병, 재앙 등과 같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사자로서 강력한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원시적 사고체계가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재앙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에서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면을 중요시하여, 홍, 주, 황 등과 같은 유사한 색을 적색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언급하게 될 이러한 유사 적색은, 그 색 자체로서가 아니라 붉은색에 준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1) 부적
벽사진경의 가장 강력한 의지표현의 하나인 부적에는 적색으로 글씨와 그림을 그려 악귀를 쫓는다. 문헌상 최초로 부적이 사용된 기록은〈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문왕 6년 2월의 기록과〈삼국유사〉의 처용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색의 명칭을 명확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길흉요찰(길흉을 조정하는 나무조각)과 벽사진경의 처용상이 모두 붉은 글씨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통설이다. 조선시대 때 임금이 위독하면 액정서에서 보의를 설치하였는데, 보의란 붉은 비단에 도끼를 그려 넣은 병풍을 말한다. 또한〈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관상감에서는 주사로 쓴 부적을 만들어 단오에 대궐 안으로 올리며, 대궐에서는 이를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았다고 하였다. 이 때 부적에 쓴 벽사문은 귀신 귀자를 가운데에 두고 붉은 적자 12자로 주위를 두른 것도 있고, '적구절석사백사병일시소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관습은 대궐뿐만 아니라 일반 민가에서도 널리 행하여 집집마다 붉은 부적이 붙어 있지 않은 집이 드물 정도였다.
(2) 복식
복식에 있어서 이러한 예는 더욱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흉귀를 쫓는 의식인 계동난의때에는 동자 48명이 가면을 쓰고 적색 의상을 입었고, 공인 20명이 적건과 적색 의상을 착용하였다. 정월 대보름은 귀신과 재액을 물리치는 갖가지 벽사행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날이다. 따라서 붉은 색이 가장 많이 동원되기 때문에 이 날을 단일이라고도 한다. 이 날 궁중의 내시원에서는 옥추단이라는 붉은 선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며, 이를 오색실에 꿰어 임금을 비롯한 시종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민간에서는 부녀자들이 아궁이에 불을 떼다가 불똥이 튀어 치마에 구멍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 붉은 헝겊으로 구멍을 꿰매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음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전염병이나 괴질이 유행할 때 이를 쫓기 위하여 붉은 옷을 입었으며, 부락 입구에는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붉은 두루마기를 걸어놓았다. 시체를 넣는 관에도 옻칠을 하고 붉은 비단을 관 속의 사방에 붙여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부의 얼굴에 바르는 연지 곤지도 시집가는 여인을 투정하는 음귀에 대한 축출의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부락제의 신주들은 대개 남자인데도 빨간 연지를 칠했으며, 궁중에서 베푸는 기우제 등의 천제때 주가를 부르는 천동들도 빨간 연지칠을 하였다. 상날에 직업적으로 울음을 파는 곡비의 손톱에는 빨간 물을 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니, 여름날 백반을 섞어 예쁘게 들인 빨간 봉숭아물도 귀신에게는 두렵고 근접할 수 없는 징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3) 음식
벽사의 의미로 사용된 붉은색의 매개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붉은 고추를 들 수 있다. 아들을 낳았을 때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이 고추의 생김새가 사내 아이들의 성기를 닮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된 기운의 근접을 막고자 하는 붉은빛의 벽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 하면 귀신의 장난이 심한 것으로 여겼던 간장 항아리에도 붉은 고추를 끼운 금줄을 두르고, 집을 상량할 때나 샘을 새로 팠을 때 치는 금줄에도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생명의 탄생과 집의 신축, 샘의 신설 등과 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사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붉은색'으로 이를 막은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분야는 식생활에서이다. 이사를 하거나 굿을 할 때 팥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데, 이는 팥의 붉은색을 이용하여 부정한 것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연말의 동짓날에도 팥죽을 끓여 먹는다.〈동국세시기〉에도 동짓날 팥죽을 끓여 먹는 풍속을 적고, 팥죽을 대문이나 문설주 등에 뿌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아 버리는 민속을 소개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팥, 수수, 대추 등의 붉은 곡식이 주를 이루고 있고 또한 붉은 약식을 해 먹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에도 팥죽으로 열병을 예방하고자 하였고, 고춧가루를 넣은 개장국과 육개장을 뻘겋게 끓여 이열치열의 원리와 함께 더위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한편, 유둣날 민간에서는 밀의 누룩을 구슬처럼 만들어 붉은 물을 들인 다음 허리에 차고 다니거나 문설주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식생활에서 붉은색을 이용한 벽사의 풍습은 절식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 주생활
주생활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건축재료로써 붉은빛이 나는 황토를 즐겨 사용하였다. 흙에도 갖가지 색깔로 된 여러 종류의 흙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붉은빛에 가까운 색을 골라 벽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서울 종로의 흙이 붉은빛의 황토였는데, 이 종로의 황토를 파다가 집 문 앞에 깔면 병귀가 들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파가는 바람에 이를 막는 '금토방'을 붙여야만 하였다. 동신을 모신 사당과 그 동신제의 제주가 사는 집 사이에는 붉은 황토를 깔아 사귀를 막았다. 또한 각 고을에 수령이 새로 부임하는 날에는 마을 밖 오리정에서부터 관가에 이르는 길까지 붉은 황토를 깔았다고 한다. 이에 동원되는 부역을 '황토부역'이라 하였다. 정약용은〈다산필담〉에서 이러한 황토를 까는 풍습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전제한 뒤, 태양이 가는 길인 황도를 흉내내어 귀하게 받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붉은 황토의 살포 풍습 역시 새로운 사람에게 잘 붙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벽사색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적색은, 직접 붉은색을 칠하는 적극적인 행위에서부터 시작하여 붉은 옷, 연지, 봉숭아물, 고추, 팥, 대추, 붉은 황토 등 생활주변의 다양한 매개체를 통하여 그 의미를 전달하여 왔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에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험보러 가는 아들·딸의 옷 속과 환자의 이불, 베갯잇 속에 붉은색의 부적을 넣어놓는다든가, 이사를 했을 때 팥죽, 시루떡 등을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는 등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독특한 적색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일상생활에서의 불행이나 질병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악귀의 소치로 여겨 그 악귀가 두려워하는 붉은색을 상징적인 힘으로 사용함으로써 방대한 '붉은 기속'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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