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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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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서울의 장사꾼들 - 이욱
전방과 가게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소비도시다. 조선시대에 서울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관료나 서리와 같은 행정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토지를 잃고 몸을 팔아 생활하는 빈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땅을 잃고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러므로 서울사람들은 곡식이나 생필품 등을 시장 등지에서 구입해야했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상업활동은 상당히 제한되었다. 서울에서특정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었다. 시전이라고 하는 상인조합이 있어, 이들만이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입전이라는 시전은비단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싸전은 쌀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갖는 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전 상인만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쌀 한 되를 사기 위해 시전까지 걸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물건을 팔러오는 상인이나, 골목을 누비며 생선이나 빗 등을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현(배오개-지금의 광장시장 근처), 칠패(지금의 서울역 뒤) 등에 활발하게 장이 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반드시 시전에서 구입한 것이라야 했다. 누구나 상품을 서울에 들여오면 시전에 넘겨야 했고, 서울에서 행상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전에서 구입한 물건을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즉 집에 행사가 있어 비단 옷이 필요한데 집에 있는 거라곤 쌀밖에 없으면, 먼저 싸전에 가서 쌀을 넘긴 다음 그 돈으로 의전에 가서 옷을 사야만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특정 물건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시전 상인이 가졌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이들 시전에 속한 상인은 세칭 우대사람 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 직업을 대대로 물려받았으며, 각각 방이라고 하는 개별 점포에서 장사를 했다. 즉 입전에 속한 상인들은 입전 일방, 입전 이방 등으로 부르는 점포에서 각각 장사를 했다. 우리가 상점을 보통 전방이라고 하는데, 바로 시전의 전과 점포의 방을 합쳐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애초에 시전은 정식 건물을 지어 입주하였으나, 시전 상인의 수가 늘면서 정식 상가 옆에 임시 건물을 지어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임시 전포를 가게라고 한다. 오늘날 가게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에누리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
시전은 주로 지금의 종로에 있었다. 종로에는 수많은 전방이 즐비하였다. 전방에는 문 바로 안쪽에 퇴청이라고 하는 작은 방이 있었고, 시전상인들은 이 퇴청 안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 손님을 맞았다.거리에 나가 손님을 끌어오는 것은 시전 상인 중 가난해서 자신의 점포를 갖지 못한 자들이 맡았다. 이들은 여리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여리는 그들이 점포 상인이 먹는 이익에 더 이익을 붙여 팔려고 하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값을 깍으려고 한다. 이 때 원가에 더 붙인 이문을 에누리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 에누리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고 하면서, 에누리라는 말이 값을 깍아준다는 뜻인 줄로 안다. 그러나 원래 에누리란 상인이 원가에 더 붙이는 값이었다. 그런데 시전에서 물건을 팔 때는 에누리에 여리꾼이 먹는 이문을 더 붙인 값으로 팔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상품이 매매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김씨는 딸 결혼에 쓸 비단을 사려고 온 사람이다. 박거간은 여리꾼이요. 이장사는 비단을 파는 시전 주인이다. 김씨가 종로통을 배회하자 박거간이 다가가 묻는다.
박거간 : (김씨에게) 무엇을 사려고 하시오? 김씨 : 딸 결혼 때 쓸 혼수 비단을 사려고 하오. 박거간 : 잘 되었네. 내가 잘 아는 비단 가게가 있으니 따라오시오. (김씨를 데리고 비단 가게로 들어간다. 이장사를 향해) 탈차(20냥)면 되겠나? 이장사 : 응. 김씨 :비단 한 필에 얼마나 해요? 박거간 : 삼십 냥입니다. 김씨 : 너무 비싸다. 열 냥만 깍아주세요. 박거간 : 그렇게 팔면 우리가 밑집니다. 그 값에는 팔 수 없어요. 김씨 :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딴 가게로 가야겠다. 박거간 : (나가려는 김씨를 붙잡으며) 아따 성질도 급하시기는. 좀 기다려봐요. 우리도 비단 한 필에 스무 냥에 들여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쓰세요. 김씨 : 그럼 스물 한 냥에 합시다. 박거간 : (이장사에게 눈짓을 하자 이장사가 된다고 눈짓을 함.) 에이 그럽시다. 스물 한 냥 내시오. 김씨가 돈을 내고 비단을 받아 가지고 가자, 이장사가 박거간에게 한냥을 준다.
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원래 비단의 원가는 17냥이었다. 시전 주인은 여기에 3냥을 에누리로 붙여 21냥에 비단을 판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1냥은 더 남은 이익, 즉 여리였고, 이는 자신이 먹지 않고흥정을 붙인 상인이 먹는 몫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상인을 여리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리꾼은 특정 가게에 전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엇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꾀어 상점으로 데려갈 뿐이었다. 따라서 여리꾼이 자기 몫을 챙기려면 주인이 팔려고 하는 가격을 먼저 알아내서, 그보다 비싼 값에 팔아야 했다. 그러므로 손님이 못 알아듣도록 암호를 사용해 가격을 알아냈는데, 이 암호를 변어라고 한다. 변어는 주로 파자의 원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 2, 3, 4, 5, 6, 7, 8, 9를 각각 잡, 사, 여, 강, 오, 교, 조, 태, 욱자의 파자로 표현한다. 위에 나온 탈차는 사라는 글자에서 차를 빼라는 것이니 이만 남는다. 따라서 탈차는 2를 뜻하고, 위에서는 20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탈정하면 강자에서 정자를 뺀다는 것이니 사만 남는다. 그래서 4를 의미하는 식이었다.
누가 감히 난전을 벌려 - 금난전권
시전 상인들은 이처럼 사기꾼 같은 수법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울에 들어오는 상품을 자신들이 아닌 딴 상인들에게 넘기는 사람이나 혹은 자기한테 사지 않은 상품을 파는 행상이 있으면 그들을 난전이라 하여 물건을 빼앗거나 관리에게 고발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전의 이러한 권리를 금난전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시전은 이러한 금난전권을 빌미로 온갖 행패를 부렸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김효자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 갑자기 인삼을 사야 했다. 집에 남아 있는 거라곤 마누라가 짠 삼베 2필밖에 없었다. 그는 급한 김에 그 삼베를 들고 나가 팔아서 인삼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포전(삼베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가진 시전) 상인이 나타나 난전이라며 두들겨 패고 삼베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서울에 들어가는 길목인 동대문이나 남대문 근처에서는 매일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계란 몇 꾸러미, 생선젓 한 단지라도 팔아 양식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이 동대문이나 남대문 근처에서 지키고 있던 시전 상인들에게 물건을 뺏기고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소리였다. 시전 상인들은 그들에게 싯가에 반도 안 되는 돈을 주며 팔라고 하고 그것을 거절하면 번번이 난전을 한다고 뒤집어씌우고는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시전 상인은 금난전권을 빌미로 온갖 행패를 부렸다. 정부에서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해 파는 소규모 물건에 대해서는 난전으로 단속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서울이나 서울 주변의 가난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했고, 점점 시전에 대한 원망이 커져갔다. 정부가 이대로 시전의 행패를 방치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육의전이라고 하는 큰 시전을 제외하고는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아무나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단행했다. 이때가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이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송파 산대놀이
정부가 신해통공을 시행한 것은 전술한 것처럼 소상인이나 도시빈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상인들의 반발과 원망이 통공정책을 시행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시전상인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상인들의 성장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사상도고'라고 부르는 새로운 상인들이었다. 정부가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주었던 것은 시전상인이 정부에 상당한 돈을 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시전을 통하지 않고도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상인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이들 사상들은 주로 서울에 상품이 들어오는 길목을 거점으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함경도나 강원도 등지에서 상품이 들어오는 길목인 다락원(누원:지금의 의정부 호원동), 포천의 송우점이나,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송파, 한강 연안의 마포, 용산, 뚝섬,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등이 대표적인 사상의 거점이었다. 사상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서울 안에 있는 중요한 장시인 이현, 칠패 등의 소상인, 그리고 지방의 대표적인 상인이었던 개성상인들과 연계되면서 서울의 시전상인을 압박하였다. 그들은 뛰어난 자금력과 우수한 조직망을 토대로 시전상인의 집요한 방해를 물리치고 점차 서울의 상품유통을 장악하여 갔다. 그들은 금난전권과 같은 특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시전상인처럼 안이하게 사람들이 상품을 사거나 팔러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서울에 상품이 반입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직접 생산지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와서 판매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손님을 끌기 위해 스스로 돈을 내서 쇼도 벌였다. 예를 들어 송파장은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상품이 집결하여 번창하였지만 송파상인들은 장터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자 놀이판을 벌이기도 했다. 상인들이 얼마씩 기부금을 거둬 놀이패를 고용, 장터의 흥을 돋우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파 산대놀이였다. 양주의 다락원 상인들도 이에 질세라 재미있는 쇼를 벌였으니 양주 별산대놀이가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사상들은 상업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특권에 안주해서 행패나 일삼던 시전 상인을 제압하고 서울의 상품유통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도 시전을 파트너로 하던 상업정책을 폐기하고 이들 사상을 새로운 파트너로 선정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신해통공이었다.
성난 군중, "쌀을 달라"
그런데 정부가 자유로운 상업을 공인하자 이제는 사상들의 독점행위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그 문제가 일시에 터진 것이 바로 1833년에 일어난 서울의 쌀폭동이다. 1833년 음력 3월, 바야흐로 그토록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가 한창인 때였다. 그런데 마포 여객주인 김재순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보릿고개를 대목 삼아 한 건 올리려고 쌀을 잔뜩 사다 놓았는데, 그것이 탈이 났다. 쌀값이 오를 줄 알고 사다 놓았는데, 그만 너무 많이 사서 유통시킨 탓에 도리어 쌀값이 떨어져 버린 때문이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싸전 주인 정종근 등을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각자 순번을 정해 하루에 한 집만 문을 열고 나머지는 문을 닫아 영업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3월 6일에는 쌀값이 곱절이 되었다. 김재순은 더 욕심을 부려, 8일에는 서울 시내의 모든 싸전을 닫도록 해버렸다. 호위군관 김광헌은 어제 당직 서느라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며칠을 굶고 있는 처자식 때문에 쌀 한 됫박이라도 사려고 터벅터벅 쌀집으로 가고 있었다. 도중에 얼마 전에 전라도에서 이사온 이웃사람 고억철을 만났는데, 뭣에 잔뜩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김광헌이 다가가 묻자, 고억철이 말했다. "워메 상녀리 새끼들! 인자 아예 쌀집문을 닫아브럿소이. 곱절 장사도 양에 안찬 갑서라우." "아니 뭐야? 쌀을 안 팔아? 내 요놈의 새끼들을 그냥." 김광헌은 쌀집들이 쌀값을 곱절로 올려 받는 것도 모자라 아예 가게문을 닫아버렸다는 소리에 가슴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는 것을 느꼈다. 어제 밤을 새운데다 이틀을 굶은 다리인데, 자기도 모르게 쌀집 앞에 서 있었다. 거기에는 보기에도 며칠을 굶은 성싶은 사람들이 쌀집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가엾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 번 불길이 치솟았다. 화를 식히기 위해 담뱃대에 담배를 채워 넣는데, 눈에 마른 장작이 들어왔다. 김광헌은 순간 확 쌀집을 불태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자식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참자, 참아야지 하면서 침을 길가에 뱉고는 맥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고억철이 언제 왔는지 옆에 있었다. "워메 성님 나 그냥 집에 못 가것소예. 내 저놈의 쌀집을 태워브러야 쓰것소." "그게 무슨 소리야? 참아." "참아라우? 뭐덜라고 참아라우? 나는 때레죽여도 못 참겄소. 아니 저 돈에 환장한 놈덜 인자 더 이상 못 보겄소" 광헌은 흥분한 억철을 말리느라 잠시 화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억철은 말리는 광헌이를 밀치고 길에서 나뭇가지를 집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문 닫힌 쌀집을 향해 달리면서 쌀집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비키쇼! 쌀 안 파는 쌀집이 먼 소양있다요. 차라리 태와븝시다." 하고는 장작을 쌀집 지붕 위로 던졌다. 초가지붕이라 불길은 대번에 치솟았다. 불을 보자 김광헌도 흥분이 됐다. 쌀집 앞에서 웅성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순간 광헌은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쌀값이 오른 것은 싸전 놈들 농간이니 모든 싸전을 태워버립시다." 하니, 군중들 속에서 "옳소"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광헌이와 억철이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싸전에 모두 불을 질렀다. 도중에 포졸 몇 놈이 막으려고 했지만, 성난 기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김광헌은 내친 김에 한강변으로 달려가서 상인들이 쌀을 쌓아놓은 창고에도 불을 질러버렸다. 창고에 불이 붙는 것을 보자 아깝다는 생각과 후련한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숨도 돌릴 겸 바위에 걸터앉아 서로 담배를 권하며 쉬고 있는데, 눈앞에 뽀얀 먼지가 일어나며 포도청 포졸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김광헌은 담배를 비벼 끄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광헌은 반항할까 생각했지만, 애꿎은 사람들이 다칠까봐 순순히 잡히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김광헌의 머리는 한강 백사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상은 순조 33년(1833년) 사상의 독점에 서울의 빈민들이 반발해 일어난 '쌀폭동'을 약간의 픽션을 첨가해 그려본 것이다. 여기서 폭동의 내용이나 김광헌과 고억철이 주동이었던 점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고억철을 전라도 사람으로 설정한 것과 김광헌과 함께 폭동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과정은 픽션이다. 신해통공 이후 시전의 행패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서울의 상품유통권을 사상이 장악하자 다시 이들에 의한 매점 매석이 문제가 되었다. 전국이 모두 사상의 독점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세도정권은 사상을 비호할 뿐이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들은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사상의 독점과 이들과 결탁한 세도정권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고, 사상의 독점을 철폐하기 위해 60년을 더기다려야 했다. 이처럼 서울의 상업은 특정상인이 상품을 독점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였다. 18세기 중엽까지는 시전상인의 독점에, 그 이후는 사상의 독점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마침내 법적으로는 사상의 독점까지도 철폐되었다. (고려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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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2장
색
색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색을 볼 수가 없다. 모든 물체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감각으로는 어둠과 함께 색도 잃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에서도 '색'을 형태가 있는 것, 대상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색증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색을 공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궁극의 본질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색은 감각적인 것으로, 시각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색은 관습보다는 색채감각으로 파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색채를 사용할 때, 그 색체가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감정이나 감각에 순수하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지식화되고 관념화된 색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머리에 하얀 리본을 달았다고 하자. 이 때 아무런 선입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만을 본다면 사람에 따라서 '깨끗하다', '청순하다' 등의 느낌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습과 사회규범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상을 당한 모양이다' 또는 '머리에 흰 것을 꽂다니 청승맞고 불길하다'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순수한 감각, 즉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시작된 색감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사회를 이루어 감에 따라 이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색에 대한 연상적 가치가 발전하여 어떤 통념을 형성하게 되면 특정한 빛깔에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부여는 개인적인 색감이나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에서, 그 사회에서, 그리고 그 민족 속에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영위되고 인식되는 색감과 의식이다. 즉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관념화된 보편성'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색채감정은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는 독특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색'에 대한 관련자료를 찾아보다가, 우리 민족의 색채 사용에 있어서 모든 결론이 음양오행으로 귀결되어지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물론 음양오행사상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사상,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의 밑바탕을 이루어 왔으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음양오행의 설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문의 출발은, 색이야말로 원시사회에서부터 인간이 태양, 하늘, 나무, 꽃 등의 자연을 접하면서 가장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사고체계가 정립되기 훨씬 이전에도, 인간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여 왔다. 색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태양숭배사상과 영혼불멸사상에서 새를 신성시하였듯이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의 색깔에 대하여 무심할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붉은색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느낌과 생각이 음양오행사상을 형성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의식주 전반에 걸친 생활과 의식 및 제도적인 측면에서 음양오행에 따라 색채가 다루어진 부분이 매우 많으나, 그것을 반드시 음양오행이라는 틀에 맞추어진 시각으로 일축해 버린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민족 특유의 정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의 색채 전체를 가두고 있는 음양오행이라는 틀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민속적인 차원에서 대다수의 옛 선조들이, 그리고 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이 (음양오행과의 관련을 포함하여) 각각의 색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떻게 사용하기를 즐겨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민족의 색 : 흰색
최근에 어느 방송단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색채의식 조사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성을 상징할 만한 색과 우리 선조들의 민족성을 잘 나타내는 색으로 단연 흰색을 꼽았다고 한다. 흰색에 대한 느낌은 민족에 관계없이 순결, 깨끗함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며, 종교적인 복장이나 천사의 상징, 혼례 때의 신부복 등과 같이 성스럽고 순결한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만큼 흰색을 숭상하고 생활화한 민족은 드물 것이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위지〉동이전 등의 고대 중국문헌에 보면 부여나 변한, 진한 때부터 한민족이 흰옷을 일상복으로 입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백의 풍습은 유사 이전으로 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흰옷의 비경제성 때문에 고려 건국 초 우리나라는 동방에 속하니 오행에 따라 동방색인 청색옷을 입어야 한다고 금령을 내렸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국법 개혁에 가장 과감하였던 조선의 태종도 '흰옷에만는 내가 졌다'고 손을 들었다. 이와 같이 흰옷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민족의 사상적 밑바탕을 이루어 온 오행사상에서도 동방은 청이며 서방은 백이라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방인 우리나라의 민족은 청색 옷을 입어야 하는데, 오행사상을 역행하면서까지 흰옷을 고집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이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 온 우리의 흰옷은 일제 강점기때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언의 항거,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백의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골 장터의 입구마다 검정물을 담은 커다란 가마솥을 설치해 놓고, 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흰옷에 검정물을 끼얹었다.
떡팔러 장에 갔다 베옷에 먹물탕이라. 옷이야 검었지만 배알까지 검길쏘냐.
일제 때 번진 남도아리랑 가운데 한 대목이다. 검정물 세례를 받은 한 떡장수가 배알, 곧 심지나 정조까지야 검게 할 수는 없다고 민족감정을 토로한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백의에의 집념은 억세고 끈질기게 계속되어 왔다. 우리 민족이 흰색, 특히 흰옷을 선호하고 상용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되어 왔다. 흰색을 숭상하고 선호하였던 이면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부분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그 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밝사상에 근거한 것
우리 민족은 고대인의 특성 중 하나인 태양숭배와 경천사상에 따라, 고유한 밝사상을 형성하였다. 부여, 예맥 등 고대의 부족국가는 자신들의 부족이 밝족 또는 씨족이라 자처하였다. '부여'라는 말은 밝음을 뜻하며, 예맥족은 본래부터 동쪽과 밝음의 부족으로 자칭하였다. 이는 하늘의 태양으로 인하여 밝음과 광명이 생겨나며, 그 태양은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쪽에서 떠오르므로 '동-명', 즉 동방의 밝은 곳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밝은 곧 백을 뜻하며, 흰색을 신성한 색으로 다루게 되었다. 흰빛은 모든 빛깔 가운데 가장 밝은 색으로, 흰빛을 백이라 함은 밝다는 뜻이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형성된 음양오행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동방은 청색'이 되지만, 이밝사상은 어느 한 순간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 되어 수천 년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상에 있는 동물 가운데 가장 빠르고 활달한 말을 움직이는 태양과 관련지웠다. 특히 흰색 말인 백마를 태양, 천제의 사자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늘에 맹세를 할 때는 백마를 희생시켜 그 피를 나누어 마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렸을 때 신라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의 왕족이며 웅진도독인 부여융, 이 세 명은 지금의 공주 북쪽에 있는 취리산에 올라가 신단 앞에서 백마를 죽여 강화의 맹세를 하였다. 신 앞에서 신의 천사인 백마를 희생시켜 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그 약속을 절대화시킨 것이다.
2)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과 관련된 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청렴결백한 선비상을 꼽고 있다. 권력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 없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자신을 닦고 수련하는 선비상, 이들의 이미지는 흰색과 청색이다. 흔히 선비는 학에 비유되며 그들이 입은 도포를 학창의라 하였다. 또한 선비들의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백과 청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즉 탈감각으로써 높은 인격에 이른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감각이나 감정을 멀리 하고 인격과 규범 등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색은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관직에 있는 문무관리들도 대궐에서는 품계에 따라 그에 맞는 색의 옷을 입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흰옷을 입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는 감정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백자와 청자에 나타나고 있는 우아함과 신비로움도, 이러한 오랜 민족의 정신과 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금욕적인 인격완성의 의미 외에,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심성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흰색은 물감을 들인 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원색이다. 이런 의미에서 흰색은 곧 무색이며,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간직한 색이다. 무색, 있는 그대로의 색은 곧 자연 그 자체이다.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동화하며 순리대로 사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 믿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무색에 굳이 염색을 하거나 칠을 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궐이나 사찰 등을 제외한 일반 민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기둥이며 벽이며 마루며, 방안의 가구에 이르기까지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는 데에 예외가 없다. 국기를 보아도 그렇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 중 흰 바탕의 여백을 남기고 있는 국기로는 태극기와 일본국기 등 몇 나라에 불과하다. 이규태 선생은 태극기가 백지를 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색채감각의 표현으로, 색에 물들지 않은 태초의 천진 그대로를 숭상하는 정서의 표현이라 보았다.
영어권에서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다. 구미 문화권에서는 흰색을 미개하고 미속한 것으로 비가치화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우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흰 것을 오염시키는 빛깔을 악덕시 하고 비가치화한 것이다. 민속에서 쓰는 길조어에서도 흰색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흰 사슴이 나타나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 .흰 꿩이 나타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아침에 흰 말을 보면 그 날 돈이 생긴다. .꿈에 백발이 되면 그 해에 근심없이 생활한다. .흰 옷을 입으면 남의 초대를 받는다. .손톱에 흰 점이 생기면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을 그대로 투영하여 담고 있는 색이 바로 흰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상복의 영향
김동욱 교수는 백의를 숭상한 것이 애초에는 거의가 경제적 요건에 지배되었겠으나 나중에는 의식복장으로서 상복의 영향으로 습성화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상복을 백색으로 하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복은 상중에 입는 예복이다. 상복이 반드시 흰색이어야 하는 데 담겨진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주로서의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상주가 색채 있는 옷을 입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슬픈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사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상사는 가장 슬픈 일이므로 우리 민족은 상주를 죄인이라 간주하였고, 상주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여 부끄럽게 여겼다. 따라서 사자와 친분이 깊을수록 거친 천에 바느질이 험하고 투박한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밝은 색인 흰색으로 사자의 저승길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상주가 흰색의 상복을 입음으로써 사자의 영혼이 좋은 세계에서 영생하기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믿음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복의 흰색에는 상중에 채색된 옷을 입지 않는다는 예로서의 의미가 선행된 다음, 저승길을 밝혀 좋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기원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관혼상제의 예를 중요시하였고, 특히 상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국상과 친족의 범위가 넓어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기간이 길었다. 상복을 입을 기회가 많았다는 것은 흰옷을 입을 기회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며, 이는 한민족의 백의상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4) 금색으로 인한 영향
동서고급을 막론하고 유채색은 화려, 장엄, 사치, 권위의 상징으로 권력층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오행사상에 따라 권력이나 품계를 표시하는 특별한 색의 옷은 일반인이 입지 못하였다. 즉 신분이 낮은 천민(예를 들면, 무당, 기생 등)의 표시로서 사용하게 한 것과 같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극도로 채색된 옷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고려 때 회색 옷 때문에 왕씨가 망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대로 맞았다 하여 회색을 상서롭지 못한 색으로 여겨 회색 옷을 금하였다. 세종은 명나라 천자가 입은 복색이라 하여 노랑색, 보라색, 회색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금색으로 인하여 색채 옷의 선택 폭이 줄어든 데다가 복색으로 존비를 나타냈기 때문에 백성들은 흰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5) 물감이 희귀하고 염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
지초나 잇꽃, 남과 같은 염료가 우리나라에는 희귀하여 주로 외제품을 써야 했다. 따라서 베 한 필을 물들이는 데 물감값이 베 한 필 값만큼 들었다고 한다. 자연히 서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색으로 옷을 해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백의습속으로 이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흰색 및 흰옷 선호에 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논자마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밝사상과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상복으로 인한 영향은 상중에 흰옷을 입는 두 가지 이유 자체가 밝사상과 우리 민족의 기질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채색된 옷을 입는 것은 상주로서의 예가 아니라는 생각은 우리 민족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흰색의 저승길을 밝혀 준다는 생각은 '하늘과 밝음'이라는 의미로 밝사상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금색과 염료부족의 영향은 실제로 무색인 흰옷을 입게 하는 데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색'이라는 제도 자체가 세계적으로 공통됨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흰색과 깊이 관련된 백의민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 타민족과는 다른 문화적, 사상적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염료 부족 역시 일부분의 요인은 될 수 있으나 전체적인 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 우리들의 선조, 또 그들 선조들이 지닌 마음, 심성과 기질, 그것과 깊이 연관된 밝사상 .....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면 누구든 공감하고 더 많은 비중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20세기의 후반을 사는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 민족과 민족성의 상징색으로 서슴없이 흰색을 꼽았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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