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 이해준(공주대 교수)
'두레' 조직의 성격
마을은 생업에 종사하는 민중들이 살아가는 최소단위의 공동체 문화기반이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일상의례, 공동행사, 공동노역을 통해 결속된 자신들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마을의 조직은 시대와 사회구조에 따라 명칭과 성격은 달리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왔고 그 중에서도 '두레' 조직은 우리 역사에 나타났던 다른 수많은 조직들과 비교하여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모습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두레는 생산주체인 피지배 농민들이 구성한 노동조직이라는 점, 대상의 범위가 전통적인 생활문화 공간이었던 마을을 단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이에 따라 두레는 단순한 노동조직이라기보다 마을문화의 총체적인 모습과 관련되면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 점은 두레조직이 그 자체의 성격상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문화 변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두레'라는 이름의 민중조직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에는 두레 이외에도 여러 형태의 조직들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양반신분의 동계나 문중계, 마을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대동계나 향약계, 촌계, 그런가 하면 상부계나 유산계(놀이계), 서당계 같은 특정 목적만을 위한 것도 있었다. 두레조직도 크게 보면 농업과 관련된 특정 목적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구성원이 차지하는 마을에서의 지위 때문에 다른 조직과 비교하면 독보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들은 청장년으로서 마을의 실질적인 노동력을 가진 집단이었고, 공동체 운영의 각 방면에 동원될 실질적인 연령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제나 마을 농악, 공동부역 같은 생활문화와 관련되는 방면에서는 이들의 협조와 참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민중조직들은 생활문화공동체로서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두레와 같은 민중조직의 선행형태로는 고려-조선시기의 향도나 각종의 동린계들을 떠올릴 수 있다. 성현(1439-1584)의 <용재총화>에서는 향도연회를 "대체로 이웃의 천민들끼리 모여 회합을 갖는데 적으면 7~9인이요, 많으면 혹 100여 인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준비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혹은 상여줄을 잡아 주거나 무덤을 만들어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라고 묘사하였다.조선 후기의 허목(1595-1682)도 그의 저서인 <기언>에서 "제를 지내는 날에는 새해의 풍흉과 가뭄 홍수 질병을 점치며 기도하였다"고 하여, 사족 중심의 유교적 이념과 의식이 덧씌워지기 이전 마을 주민들이자체적으로 행해왔던 생활공동체적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이념보다 앞선 지연적 공동체문화
이 같은 전통적인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조직이었던 향도는 조직범위를 대부분 자연마을로 하였고, 구성원도 하층민들이었으며, 인원수는 적으며 7~9인에서 많으면 100인 정도였다.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행했던 행사들도 공동노역이나 혼례와 상례, 민속, 무속적 신앙과 관련된 마을제사(동제나 당제) 등 공동체적 생활에 직결된 것이었다. 여기서 보이는 산천 수목신에 대한 제의는 농경을 위주로 하는 기층 사회의 신앙 민속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는 것들이었다. 또한 조선 사회가 기본적으로는 농업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이들 신앙체계가 잠재적으로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우리는 오늘날까지 전승된 당제나 동제, 농악, 두레 등을 통하여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이들 조직은 각 시대가 요구하는 재배이념이나 체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변모를 겪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의 민중조직은전통사회가 공유했던 생활문화공동체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을공동체적 민중조직의 모습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지방의 방방곡곡에 모두 계를 만들어 서로 규검한다"고 한 것처럼 일반화된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마을 조직들은 훗일 성리학적인 지배이념이 확산되면서 덧씌워지는 사족중심의 향약이나 동계조직에서도 그 잔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나막신으로 벼를 수합하여 상부상조의 자산을 삼았다"는 영암 구림의 동계 집회소인 회사정의 유래는 이 같은 사족중심의 동계조직 저변에 조선 전기 향도 이래의 촌락공동체적 유대가 배경이 되었음을 일러준다. 이러한 기층농민들의 공동체 조직은 사족중심의 지배질서가 확립되면서 지주제적 강제와 신분제적 제약,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향약질서의 강요로 말미암아 사족들의 통제구조에 점차 예속되게 된다. 즉 향약 실시논의와 함께 이들 촌락민 조직들은 고려 말 이래의 자연촌적 모습을 잃고 점차 사족들의 동계나 향약의 하부단위로 예속되어 갔다. 그런 과정에서 이들 마을민의 조직들은 하회의 동계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립적인 모습으로 창설 운영되던 것이 사족들의 동계에 의해 전통을 규제 받으면서 편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 동계를 다시 만들면서 기존의 촌락과 그 조직들은 거의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결합된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조직아래 수렴되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직은 본질적으로 상하층 주민 사이에 목적과 이해가 다른 상태에서 상층민의 조직인 상계에 의해 주도되기 마련이었고, 따라서 지도력의 한계를 드러낸 사족들이 기존의 특권과 영향력만을 강요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자체 성장과정을 겪고있던 마을 하층민들은 동계 운영에서 자신들의 참여폭을 전에 비해 훨씬 확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마을 하층민들은 그들대로 당시의 제한된 사회구조 속에서나마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방향을 일정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두레조직인 것이다.
조선 후기에 두레가 뜨는 이유
두레는 일부 지역의 노동조직에서 출발하여 농업기술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확산되어간 측면도 있지만, 크게 보면 이같이 사회구조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자작 소작농민을 구성원으로 했던 까닭에 신분제적 강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것은 자명하다. 여기에 더하여 생산력의 향상으로 농민의 자율성이 높아졌을 때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명실상부하게 기층 촌락민의 입장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기능 하였을 것임은 쉽게 추측된다. 한편 두레의 확산은 조선 후기 촌락사회의 변화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촌락의 분화는 촌락의 증가와 더불어 각기 그들이 지녔던 공동체적 기반 및 촌락 내 주도세력의 변모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 후기의 촌락은 인구의 자연증가, 농지의 확대 및 분포상의 변화, 동족마을의 형성과정과 짝하여 변화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정부의 향촌 통제방식이 변화된 것도 주요 변수의 하나였다. 즉 사족지배체계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중앙정부가 추진했던 면리제나 공동납체제와 같은 통치방식, 부세 정책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족들의 지배력이 강고 하던 시기에 광역의 리 밑에 존재하던 자연촌들은 18세기 후반 이후 독자적인 조직과 규모를 지닌 독립된 마을로 분화 발전되었다. 촌락들은 종래의 고유명칭을 사용하면서 분화 독립하기도 하지만, 본 마을과의 연계가 강하면 상, 하, 내, 외, 원, 구, 신, 본 등의 방식으로 지명 앞에 그 관계를 나타내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분화 독립해 간 흔적을 보이고 있다. 촌락의 분화과정에서 사족들의 동계 동약조직은 관념적인 형태로 남게 되었고, 그 영향력의 범위는 사족들의 본동에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대부분 분리된 마을단위의 조직을 통하여 운영되어 가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소규모 생활문화공동체가 새롭게 기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마을 조직의 분화 모습은 동제(당제)를 지내는 대상인 '당'이 큰 당, 작은 당으로 분화되거나 아예 다른 당산을 새로 마련하여 독립하는 사례, 농악대 구성의 선후와 위세 차이, 두레의 분화, 나아가 상여 혼례도구나 동답의 분리 운영 같은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촌락이 사족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공동체조직의 기능이 활성화되고 또한 이앙법이 발달하자, 농민의 노동조직인 두레의 기능도 활성화되었다.
농투산이들의 '두레' 구성
흔히 두레는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으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대표적인 조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레'는 마을 단위 농업 생산조직의 대표일 뿐 실제 생산형태와 지역에 따라서는 밭농사 지역의 '황두'라든가 제주도의 '수눌음', 영남지역의 '풋굿' 등의 다양한 조직들을 모두 그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또한 두레의 경우만 보더라도 동두레(대두레), 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호미씻이 등등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였다. 대체로 두레의 조직 범위는 하나의 자연마을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아주 큰 마을은 몇 개의 두레가 결성된 경우도 있고 작은 마을에는 아예 없거나 몇 개의 이웃 마을이 합두레를 짜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적절한 규모의 인구와 농지가 있는 마을에서는 두레꾼이 확보되면 언제든지 조직이 가능하였다. 마을에 거주하는 청장년 중 일정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인 받으면, 간략한 신입절차만으로 두레에 참여할 수 있었다. 10~50명이 가장 일반적인 두레 규모였고, 마을 내의 주민들로 구성되므로 신분보다는 나이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었다. 또한 두레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통솔하기 위하여 임원과 유사를 두었다. 즉 영상과 좌상으로 불리는 노령의 감독 및 지도 고문이 있고, 그를 보좌하거나 각종의 보조역을 하는 우상, 문서잽이, 공원(유사), 그리고 실제적인 두레패의 지휘자인 총각대장(총각대방:수머슴)이 있었다. 우상은 좌상을 보좌하며, 공원은 대개 밥 공원과 논 공원으로 구분하는데, 논 공원은 두레패가 동원되는 대상농지의 조건을 구분하여 노역가를 산출하고 밥 공원은 식사를 조달하였다. 한편 두레의 꽃인 총각대장은 두레조직의 효율적 운영과 통솔을 맡은 사람으로 힘이 세고 영리하며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어 군기를 잡거나 체벌도 가할 수 있는 정도의 권위가 있어야 했다. 지역에 따라 총각, 수머슴, 총각대장, 총각좌상 등으로도 불리었다. 총각대장에게는 소동패가 소속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아직 두레에 가입하지 않은 아이들로 뒷일, 보조 일을 맡는 두레의 예비대라고 할 수 있었다. 특별히 소임(총각소임)이라고 하여 군기단속과 체벌을 책임진 사람을 별도로 두기도 하였고, 식화주라고 하여 밥 나르는 일을 맡은 사람도 있었다.
들돌들기와 진세턱
두레는 매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마을 단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동력을 단위로 결성되는 공동체조직이었던 관계로 가입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준을 점검하는 재미있는 심사 절차가 있었다. 흔히 주먹다듬이로 통칭되는 가입례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것이 들돌들기와 진세턱이다. 마을의 미성년자가 16,17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받아 두레에 가입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심사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들돌(전라도는 들독, 제주도는 뜽돌)이다. 둥그런 돌이면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며 보통 사람이 들기에는 약간 힘에 겨운 무게이다. 들돌은 대개 당산나무나 동각의 밑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중소로 무게가 다른 둥근 돌을 모셔 신앙대상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 들돌을 들거나 들어서 어깨 위로 넘기면 당당히 가입 자격을 얻는 셈인데, 이는 노동 담당자로서 생산활동에 참가할 자격을 인정받는 의미를 지닌다. 마을에 따라서는 7월 백중에 청장년들이 모여 힘을 겨루고 장사(수머슴)를 뽑는 과정에 이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장사는 두레의 대표가 되거나 임금을 곱절로 받는 특혜를 부상으로 받는다. 이들 신입자들은 주로 술과 가벼운 안주로 대접하여 신입례를 치루는데, 이를 진세턱이라 한다. 이 신입례는 두레에서 1인의 동등한 노동력으로 인정받는 절차이자 성년식 통과의례라고도 할 수 있다. 들돌들기와 신입례는 두레조직의 세대교체와 생산력 제고, 구성원 사이의 유대 강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호미씻이와 두레기
호미는 다용도로 활용된 가장 기본적 농기구였다. 두레가 노동조직이었던 탓으로 이 같은 호미를 상징적 행사에 동원한 것이 바로 호미모듬과 호미걸이, 호미씻이였다. 호미모듬은 두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두레꾼들이 농청에 모여 역원을 선출하고 공동의 조직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작업을 준비하는 날, 각각 자기의 호미를 한 개씩 농청에 모아 걸어 두는 의식이다. 대개 이 호미는 첫 두레일까지 걸어 두는 것이 관례였고, 그 시기는 대개 2월 하래아드렛날(2월 초하루), 혹은 2월의 머슴날이었다. 호미걸이는 두레 최고의 축제로서 1년 농사의 실제적 마무리가 되는 7월 15일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행사이다. 호남지역은 호미씻이라고 하는데, 이는 농사가 끝나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이다. 경기지역에서는 두레기의 버릿줄에 호미를 걸어 두기 때문에 이를 호미걸이라고 한다. 한편 두레기는 마을의 자긍심이자 두레의 표상이다. 따라서 두레와 관련된 의례도 우선적으로 이 기를 모시는 일에 집중된다. 두레기는 흔히 농기라고도 부르지만, 지역에 따라 용당기, 용덕기, 덕석기, 용술기, 서낭기, 대장기, 농상기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며, '농자천하지대본', '신농유업'등의 글과 용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수신을 나타내며, 용을 그리는 것은 논농사지역의 관행이다. 두레기는 마을에서 가장 힘센 장정만이 들 수 있을 만큼 큰 기로 일터에도 세워 두고 옮길 때도 기를 앞세워서 길군악을 치며, 두레군이 움직일 때에는 그에 앞서 항상 풍물을 울려 고사를 지낸다. 두레기는 큰 대나무 장대에 달며, 꼭대기에는 꿩장모기라 해서 꿩털로 만든 깃봉을 꽂고 그 밑에 총을치(칡껍질)를 달고 3개의 버릿줄을 달아 말둑으로 고정시켜 세워 둔다. 두레기는 매우 존엄한 것이어서 '말을 탄 양반들도 두레기 앞을 지날 때는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야 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조선 후기 두레의 위세와 반 신분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두레기가 두레의 상징이자 권위였던 탓으로 마을간에 두레기 뺏기싸음이 벌어지면 혈전이 일어나기도 했고, 사당패가 마을에 놀이판을 만들 때도 먼저 두레기에 인사를 드려야 했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으로 두레의 형성과 분화를 반영하는 형두레와 아우두레의 기세배 놀이라든가, 이웃마을의 두레를 보면 북을 둥둥 쳐서 상호 인사를 하는 관행도 있었다.
두레의 대동회의
두레의 1차 적인 목적은 공동노동과 생산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 구성원들이 바로 전근대시기 피지배 농민층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과연 풋풋한 이들 민중들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내용이 어떠했었는지 매우 궁금하기만 하다. 두레의 회의는 두레굿의 제의와 결부된 대동회의로서 제의가 끝난 뒤 음복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레가 농업생산조직이었기 때문에 농신에 대한 제의도 중요했지만, 농업생산과 관련해서는 두레의 임원선출과 회계가 한층 중요하였다. 그리고 두레군들이 바로 마을의 공동체적인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청장년집단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을일 전반이 회의의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회의는 후대에는 주로 유사집(도가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지만, 원래는 두레꾼의 집회소인 농청에서 이루어졌었다. 두레 회의는 농번기를 중심으로 전후로 구분할 수 있다. 전회의는 농사준비회의로서 2월경에 이루어져, 1년 농사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다. 즉 두레의 재조직 및 역원선출, 신입례와 신참례, 농사순서 결정, 두레셈의 기본원칙 확인, 농악기의 보수나 구입, 품앗이와 품삯 결정, 호미모듬 준비 등이 이루어졌다. 농사 후의 회의에서는 한해의 결산, 상호부조, 농악기 보수, 마을 살림과 마을의 대소 공사(길닦기, 풀베기)해결 등이 의논 결정되었다. 의사 결정은 완전히 민주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의례적으로 균분적인 사족들의 부조와는 달리 현실적인 상부상조를 이룰 수 있는 결정들을 내렸던 점이 주목된다. 예컨대 두레가 과부, 노인, 환자가 있거나 어린아이만 있는 집의 농사를 거들어 주고 마을 전체의 이해가 걸린 노역에 우선적으로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봉건 말기에 두레가 택했던 길
이처럼 조선 후기 사회에서 농민조직으로 급부상한 두레를 단지 흥미로운 민속으로만 본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것이다. 두레를 다른 시기의 노동조직, 농민조직과 비교하면 매우 괄목할 여러 모습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두레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노동조직은 이전의 공동노동 조직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촌락사회 내에서의 위상이 강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변화와 17-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상민천인의 마을단위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활동하던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봉건지배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분제적 강제를 벗어나려는 의식이 강했을 두레의 지향이 지배권력의 의도와 상충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기에 더하여 다른 시기보다 농민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져 갔음을 염두에 두면, 조선 후기 농민조직들이 봉건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주체로 등장할 개연성은 충분하였다고 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않지만 그 개연성은 충분히 예상되고 남는다. 즉 이들 두레 조직이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질서와 느슨한 연관관계를 지니면서 다른 마을의 두레와 연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면 과연 그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였을까? 주지하듯이 조선 후기는 상품의 활발한 유통 및 시장경제의 발달 속에 의식(정보)의 확산이 크게 진전되었던 시기였다. 앞에서 소개한 호미씻이나 대동두레의 모습을 통해서 보면, 보다 광범한 지역적 연대나 의식의 공유도 예견되는 바가 있다. 이들이 그러한 연대와 의식의 공유를 바탕으로 농민세력으로 부상하였다면, 그 동안 논의되어 온 두레 초군배의 19세기 농민항쟁 참여도 분명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