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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659호
단기 4342. 10. 1 (음력 8.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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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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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바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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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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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게 가더라고!
‘싸게’는 표준어 ‘빨리’에 대응하는 말이다. ‘싸게’는 ‘동작이 재빠르다’, ‘물살이 세다’와 같은 뜻을 갖는 ‘싸다’의 어간 ‘싸-’와 어미 ‘-게’가 결합된 ‘싸게’가 부사로 굳어진 것이다. 고장말 ‘싸게’는 경기와 제주, 북녘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두루 쓰이는데, 경상도에서는 쌍시옷(ㅆ) 발음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그 쓰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북녘 사전이나 <제주어사전>에는 ‘빠르다’라는 뜻을 갖는 ‘싸다’가 실려 있지 않다. “싸게 말히여 봐아. 뜸딜이지 말고.”(<혼불> 최명희) “요번에는 왜 그래 싸게 가시능교?”(<한국구비문학대계> 경북편)
‘싸게’의 또다른 형태는 ‘싸기, 쌔기, 씨기’인데, 이들의 분포 지역은 ‘싸게’와 같으나 다만 강원 지역에서는 그 쓰임을 찾아볼 수 없다. ‘싸기/쌔기’는 ‘싸게>싸기>쌔기>쎄기>씨기’와 같은 소리의 변화를 겪은 고장말이다. 마치 ‘세상’이 ‘시상’, ‘학교’가 ‘핵교’로 변한 것과 같다. “씨기 가바라. 늦다. 비락겉이 쌔기 가거라.”(위 책 경남 거제편) “싸기 갖다가, 죽운 눔 아가리다 퍼 너으라니께….”(위 책 충남편)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싸게’가 중첩된 말 ‘싸게싸게’가 쓰이는데, 표준어 ‘빨리빨리’와 대응하는 말이다. “싸게싸게 누라니께.”(<잔월> 김성동) “야덜아, 싸게싸게 인나 선상님헌티 인사디리고, 각단지게 느그덜 이름 말씸디려.”(<태백산맥> 조정래)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절거리
내수사의 주거이(注巨伊)가 죄를 짓고 회령 관아로 가게 되었다. 어미가 임금께 글을 올렸다. ‘외아들로 형제가 없습니다. 그 고을에 곡식을 바칠 테니 풀어주셔서 이 늙은 여인을 봉양케 해주소서’ 하니 중종 임금이 허락했다.
‘주거이’는 중세 말 표기에서 ‘주게’에 해당한다. 비슷한 이름에 ‘주거·주거쇠’가 있고 ‘주거리’(注居里·住去里)도 있다. 밥 푸는 주걱은 15세기에 ‘’이었고 17세기에 ‘쥬게’, 18세기 들어서 ‘쥬걱’이 보인다. 요즘 말에서 ‘주걱턱·주게턱’이 함께 쓰이는 것은 이런 내림이다. ‘주거리’는 여자 이름으로, 경상권 호구단자에 나온다. 경상도 말에서 ‘주거리’는 ‘저고리’를 이르는 말이다.
‘저고리’는 고장말에서 ‘뎌구리·저거리·저구리·져구리·조거리·조고리·조구리·주구리’로도 말해진다. <성종실록>에 迪古里(적고리)라는 사람이 있다. 迪은 뒷시대에 돌쩌귀(乭迪耳)를 적을 때 쓰이나 중국 음을 고려하면 조선 전기에는 ‘뎍’으로, 迪古里는 ‘뎌고리’를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뎌고리는 중세말로 ‘딱따구리’이다.
포항 냉수리 삼면비는 신라 때 임금을 비롯한 대신들이 ‘절거리’(節居利)의 재산권에 대해 내린 판결문을 새긴 것이다. ‘절거리’의 내림에 ‘주거리’가 있는 듯하다. 야인 여인 이름에 ‘절구리’(節仇里)도 보인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싸다와 누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뛰놀다 급해져 길가에 시원하게 쉬를 하고 일어난 아침. 어머니는 축축하게 젖은 이불에 주눅 든 나에게 키와 바가지를 주시며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셨다. 하릴없이 찾아간 이웃집에서 아주머니는 키 쓴 머리 위에 부지깽이 세례를 내리셨고 혼비백산해 도망친 이후 내 야뇨증이 사라졌다던가.
요즘 들어 오줌을 '누다'와 오줌을 '싸다' 두 표현을 구별하지 않고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 차가 있다. '누다'는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다라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싸다'는 바지에 배변을 한 경우처럼 참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거나, 잠자다가 이불에 실례하는 것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한 행위를 뜻한다. 오줌이 마려운 아이더러 '빨리 화장실에 가서 오줌 싸고 와'하는 것처럼 '누다'를 써야 할 자리에 '싸다'를 쓰면 속된 느낌을 준다. '싸다'라는 표현은 개구쟁이들의 이불 지도에 돌려주고 평상시 배변에는 '누다'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 띄어쓰기
'지을 작(作)'은 '사람 인(人)부'와 '사(乍)'가 합쳐진 글자다. 여기서 사는 도구를 의미한다. 즉 '작'은 글자 형태상 사람이 도구를 잡고 어떠한 동작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일이 일어나다' '만들다' '(농사를) 짓는다' '말하다'라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작'은 '박찬욱 감독의 2004년 작인 '올드보이'는 한국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손색없다'와 같이 문장에서 띄어쓰기를 달리한다. '작'은 작자의 이름 뒤에, 붙어 작품·지음·제작·저자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로 쓰일 때는 띄어 써야 한다. '황석영 작 『장길산』' '이육사 작인 청포도'처럼 사용된다. 또한 예문에서 든 것처럼 작자의 이름 뒤에, 해당 작품을 만든 연도 다음에 쓸 때도 띄어 써야 한다. 반면 '한국 영화의 대표작'의 '작'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작품·제작을 의미하는 접미사로서 붙여 써야 한다. '그는 데뷔작이 대표작이다'처럼 외래어 뒤에도 붙여 쓴다. 또한 '이모작, 평년작, 풍년작'과 같이 농업 등과 관련된 단어 뒤에 붙어 '농사, 작황'을 뜻하기도 한다.
까발리다, 까발기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는 온통 의문투성이다. 의혹만 많고 진실은 실종된 느낌이다.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진상을 낱낱이 '까발겨' 모든 의혹을 털어내야 한다.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널리 쓰는 '까발기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까발리다'라고 써야 한다. '까발리다'는 '까다+발리다'의 구성으로 '껍데기를 벌려 젖히고 속의 것을 드러나게 하다, 비밀 따위를 속속들이 들추어내다'의 뜻이다. '밤송이를 까발렸더니 고작 쌍동밤 두 쪽이 들어 있었다/ 그 진상을 낱낱이 까발려서 옳음과 그름을 바로잡아야 한다'처럼 쓸 수 있다.
'발기다'(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도록 헤쳐 발리다)가 '발리다'(껍질 따위를 벗겨 속의 것을 드러내다)와 비슷한 뜻으로 사전에 올라 있는데, '까다+발기다' 구성의 '까발기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까발리다의 잘못'이라고 돼 있다. 널리 쓰이고 있고, 조어법상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까발기다'가 왜 표준어가 될 수 없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까발기다'가 '까발리다'의 동의어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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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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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론 - 배한봉
삐죽히 머리를 내민 연둣빛 새싹에게는 말 못할 그리움이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다면 씨앗을 누르고 있던 저 돌 틈을 어떻게 비집고 나왔겠어 떡잎 손가락의 상처를 좀 봐 세상은 본래 이렇게 거친 곳이라고 여기겠지 그러면서 바람이 묻어둔 비밀 조금씩 알아가겠지 코를 킁킁대며 검은 흙 냄새를 맡겠지 돌 틈 헤집고 나오느라 시퍼렇게 멍든 이마 새싹에게는 그 그리움이 희망이며 노래였던 거야 악착같이 꽃 피운 그 설움의 힘이 어느 순간 씨앗 움켜쥔 손을 탁! 펴겠지 비밀한 시간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거친 세상도 지치도록 초록꿈 꿀 수 있게 말이야
배한봉 시집"악기점"[세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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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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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에서 - 자경 전선구
법열로 가득 채운 닿지 않는 산초 등잔 적막도 잠든 산 속에 혼불로 밝혀 두고 영겁을 가슴에 품어 오고 감도 잊었던가.
고뇌도 삭고 삭으면 기쁨으로 변하는가 희열도 서러움도 본래에는 한 몸이었나 초연을 가슴에 품고 생도 멸도 잊었던가.
침묵은 뜨거운 설법 울려오는 저 소리를 침묵은 심연이다 그치지 않는 저 음성들 침묵은 화엄이로다 철을 넘어 피는 꽃들.
산천도 귀를 열고 빛 밝히는 말씀 듣고 석 장승 눈을 뜨고 장엄함을 바라볼 때 영혼의 닻을 드리우면 진리 한 폭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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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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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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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
2. 배움과 가르침에 대하여
눈 위에 쓰여진 암호
그것은 얼어붙을 듯 추운 이월 아침에 일어난 어떤 비극적인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밀포드 코너스 스쿨 버스 뒤를 따라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눈 오는 아침이면 나는 늘 그렇게 스쿨 버스 뒤를 따라 학교에 출근하곤 했다. 어스가 갑자기 오른쪽 깜박이를 켜더니 길가에 있는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내가 보기에 스쿨 버스가 호텔에 볼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예기치 않은 정지를 하게 된 것에 약간 화가 났다. 그때 한 소년이 비틀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더니 무너지듯 눈길 위에 쓰러졌다. 버스 운전사와 내가 거의 같은 순간에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소년의 창백하고 텅 빈 얼굴은 주위에 쌓인 눈보다도 더 하얗게 보였다. 운전사가 속삭였다.
"죽었어요."
한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버스 안에서는 겁먹은 표정의 학생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나는 소리쳤다.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빨리! 내가 호텔에 가서 전화를 하겠소." "소용없습니다. 이 애는 죽었습니다." 운전사가 소년의 정지된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애는 자신이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냥 내 어깨를 건드리더니 아주 작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저 미안하지만 전 호텔 앞에서 내려야겠어요.' 그것이 전부였어요. 공손하고 미안해 하는 표정이었지요."
우리가 학교에 도착하자 소문이 복도를 타고 물결처럼 전해졌다. 와글거리던 아침의 소음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한 떼의 소녀들 곁을 지나갔다. 그들 중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누가 죽었다구? 학교 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서 죽은 애가 누구야?" 다른 학생이 대답했다. "그 애 이름은 몰라 밀포드 코너스 쪽에서 온 애래."
교무실과 교장실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교장이 내게 말했다.
"선생께서 그 학생의 부모에게 소식을 전해 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소. 그 아이네 집에는 전화가 없어요. 어쨌든 학교측에서 누군가 아이의 집을 방문해야겠지요. 그동안 내가 선생님의 수업을 대신 맡겠소."
내가 물었다.
"왜 제가 가야만 하죠?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가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교장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 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지난 2학년 때의 생활기록부를 들쳐 보니 그 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교사로 선생께서 지목되어 있더군요."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얼어붙는 날씨였다. 도로 사정이 형편없는 골짜기를 달려 에반스 씨네 집으로 가면서 나는 클리프 에반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애가 가장 좋아한 교사가 나였다니! 왜였을까? 그 애는 지난2년 동안 나한테 단 두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클리프는 내가 가르치는 오후의 문학 수업 시간에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혼자서 교실에 들어와 혼자서 교실을 나갔다.
"클리프 에반스...... "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결코 웃지 않는 아이였어. 그 애가 웃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지"
목장의 넓직한 부엌은 깨끗하고 따뜻했다. 나는 클리프의 부모에게 내가 갖고 간 소식을 전했다. 내 얘기를 듣더니 에반스부인은 잠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 애는 한번도 아프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어요." 플리프의 의붓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놈은 내가 이 집에 온 다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에반스 부인은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냄비를 스토브 위에 올려놓더니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서둘러요. 시내에 나가기 전에 난 아침을 먹어야 하니까. 어쨌든 우린 이제 어떻게도 할 수 없잖아, 녀석이 그토록 벙어리 짓만 하지 않았어도 몸이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했을 거라구."
방과후에 나는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클리프에반스에 대한 기록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쓸쓸한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클리프의 죽음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기록이 내가 하려는 일을 비웃고 있었다.
클리프 에반스 - 백인. 의붓아버지와 다섯 명의 배다른 형제 및 자매들과 살고 있음. 법률적으로 아직 의붓아버지의 호적에 올려진 상태가 아님.
이 불충분한 정보와 D등급이 매겨진 행동 발달 사항 목록들이 내가 가진 자료의 전부였다. 클리프 에반스는 아침에 조용히 교문을 들어와서 저녁에 조용히 교문을 나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어떤 동아리에도 소속된 적이 없었다. 어떤 운동부에도 가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번도 교무실에 불려 온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애는 한번도 아이들이 하는 놀이와 행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학생도 아니었다. 어떻게 한 소년을 그토록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까? 생활기록부의 기록들이 그 대답을 내게 말해 주었다. 초등 학교 1학년과 2학년 때의 담임 교사가 적어 놓은 것은 이랬다.
'착하고 부끄럼을 타는 아이. 수줍어하지만 열성적임' 그러다가 3학년이 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떤 교사는 단호하게 이렇게 적었다.
"클리프는 말이 없다. 비협조적이고, 학습 속도가 느리다." 다른 학문적인 교사는 이렇게 적었다. "둔하고, 재치가 없다. 아이큐가 낮다."
결국 그들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클리프의 아이큐는 83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초등 학교 . 3학년 때의 아이큐는 106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클리프의 아이큐는 100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수줍고 부끄럼 타는 아이라고 해도 쾌활한 면을 갖고 있다. 단지 그것을 깨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나는 타자기 앞에 앉아, '교육이 클리프 에반스에게 어떤 짓을 했는가' 를 지적하는 분노에 찬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교장의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다른 한 장은 그 슬프고 낡은 생활기록부 속에 첨부시켰다. 나는 생활기록부를 집어던진 다음 교무실 문을 꽝 닫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금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 어린 소년이 계속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조그만 얼굴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마른 소년이, 오랫동안 의지할 곳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떠나가 버린 큼지막한 눈의 슬픈 소년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애가 얼마나 자주 운동부에서 제외됐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귓속말이 그를 따돌렸는가를 끝없이 그 아이의 귀에 대고 말하는 그 목소리들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넌 벙어리야. 넌 벙어리야. 넌 아무 존재도 아냐, 클리프 에반스."
어린아이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클리프는 의심 없이 그 말들을 믿은 것이다. 갑자기 사건의 전말이 내게 분명해졌다. 마침내 클리프 에반스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아이는 눈 쌓인 길 위에 무너져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의사는 아마도 죽음의 원인을 심장마비로 적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생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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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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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3장 사랑하는 나에게
평가
상대의 나쁜 점을 나의 좋은 점과 비교하지 마라. 그렇게 비교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상대는 항상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틀에 박힌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기준에 맞추어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사람도 되고 부정적인 사람도 된다.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사람이 리더쉽이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착하고 온순하다는 칭찬을 듣는 사람이 줏대없고 소갈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나를 기준으로 한 판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섣불리 말했다가는 쓸데없는 봉변을 당하고 만다. 내가 기준이 된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구부러진 자로 금을 그으면 구부러진 금이 나오듯이 내 기준이 바르지 못하다면 아무리 바른 사람이라도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 평가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는 비교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일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일은 개성을 존중해 주는 일이다. 개성은 사람마다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개성을 빼내는 것은 계란에서 노른자를 빼내는 것과 같은 무의미한 일이다.
변덕
사람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지나치게 싫어하지 마라. 좋아하면 그도 좋다고 하겠지만 싫어하면 그도 내가 싫어한 이상으로 나를 싫어한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은 좋지 않다. 좋을 때는 지나칠 정도로 좋고 싫을 때는 지나칠 정도로 싫어하는 성격은 스스로를 고립 시키는 아주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런 성격은 곧잘 인간 관계를 극과 극으로 몰고 간다. 좋을 때는 간 쓸개까지 빼 줄 듯 좋아하다가도 싫을 때는 섬뜩하리만큼 얼굴색을 바꿔 인간 관계를 곤경에 빠뜨린다.
모든 것은 은은한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향기도 너무 짙게 풍기면 싫증이 나고, 아무리 예쁜 꽃도 너무 오래 피어 있으면 싫증이 난다. 난초의 향기가 환영을 받는 것은 은은한 향기를 풍겨주기 때문이고, 화초가 싫증나지 않는 것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늘 푸르름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도 지나치게 빨리 뜨거워지거나 지나치게 빨리 식는 변덕 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은근한 것이 좋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한 성격보다는 좋을 때나 싫을 때나 변함이 없는 성격이 좋다. 비록 좋다는 내색은 하지 않아도 항상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고, 비록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박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이 정말로 가치있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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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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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4장 서양문학
성(Das Schloss) -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문호의 한 사람인 카프카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차별받는 유태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하고 있다. 즉, 측량사로서 채용되기 위한 K의 노력은 오직 제자리를 맴돌 뿐 아무런 진전이 없다. 현대사회의 소외외 부조리를 통해서 인간존재의 참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대표적 현대소설이다.
* 생애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이자 20 세기 최고의 문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독일계 유태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럽의 진주 또는 황금의 도시 라고 불리어지는 프라하에도 유태인의 거주지인 게토라는 어두운 뒷골목은 있었다. 거기서 카프카는 태었났다. 그의 부친은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얼굴이 못생기고 괴팍한 카프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모친인 유리에는 유태교 목사집안의 경건한 부인이었다. 동생 둘은 요절했고 세 명의 누이동생은 그보다 오래 생존했으나,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개처럼 학살되었다. 카프카는 서구화한 유태인이 흔히 그러하듯이 독일어로 교육을 받았고, 프라하 대학에 법률공부를 하며 후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카프카 전집의 편집자가 된 막스 브로트와 친교를 맺게 된다. 졸업 후 노동재해보험회사에 취직하여 창작과 근무의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1908~1916년까지 여기에 근무하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쓸 수 있었는데, (성)을 낳은 12페이지의 스케치인 (마을에서의 시련), 그리고 (성)과 함께 미완성의 3부작으로 되어버린 (심판) (아메리카), 또는 단편소설 (사형선고) (관찰) (소송) (변신) (유형지) (시골의사) 등이다.
1912~17년 사이에 그는 베를린 출신의 M. J라는 여자와 두번이나 약혼했다가 두 번 다 취소했다. 그후에 있었던 다른 소녀와의 약혼도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취소되었다. 그는 또 다른 여성과 일시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그 여성들은 아무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베를린 시절에 그는 도라 디맨트라는 유대교의 네덜란드 여자와 행복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인 목사가 카프카가 정통적인 유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금했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 후의 가난으로 점점 심해진 폐결핵 때문에 1917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지요양을 했으나, 병세가 회복되기 어렵게 되자 1923년에 나머지 짧은 여생을 창작에 전념하고자 베를린으로 갔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비엔나 교외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작품세계
단테나 스위프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곧 그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나 괴테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작가론에서는 오히려 그의 생애에 대한 고찰이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 작가가 처해 있던 개인적사회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외모가 추하고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부친으로부터 받은 그에 대한 몰이해는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고, 가장 가까운 것이 오히려 단절을 심각하게 할 뿐인 상황 이라고 말한 마르트 로베트 부인의 말마따나 그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숙명적인 이방인 같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정신병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고독감, 불만감, 억압감 같은 악감정에 시달리며 조숙 또는 민감해졌고, 드디어는 폐병에 걸려 고향과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전지요양에 들어간다. 흔히 키에르케고르와 카프카를 정신적 쌍둥이라 하는데, 그들의 운명, 성격, 고독, 불운 그리고 인생이나 문학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중환자였다. 그는 막다른 상황에서의 돌파구로 결혼과 유부녀, 어린 소녀와의 연애를 시도해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거기다가 사회적으로 유태인에 대한 심각한 차별대우는 그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 당시 체코 거주 유태인들은 타고난 근면성으로 부를 축적, 프라하의 상류사회로 진출하지만, 체코 인들은 그들이 체코 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를 쓰는 데 비해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 로 늘 적대시했고, 또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의 문화와 사회에 기생하는 부류라고 생각해 업신여겨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고독은 아예 그의 일부였다. 성자들이 신앙 속에서 살듯이 그는 고독 속에서 살았고 드디어는 자기 작품만을 위해 자기 작품만을 먹고 살아가는 설화적인 동물의 생태를 가지게 되었고, 프루스트처럼 산 채로 그 속에 묻혔다. 단테가 14세기에 그랬듯이 카프카는 20세기를 철저히 체험한 작가였다.
* 작품의 주요내용
어느 겨울 흰눈이 내리는 날 밤에 K로 불리는 주인공은 한마을에 도착한다. 측량사로서 성에 초빙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성에서도, 그리고 성의 지배를 받는 마을에서도 측량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K가 성에 도전한 투쟁이 받아들여진 것만은 확실하고 K는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다음날부터 성에 도달하려는 K의 온갖 노력이 시작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예를 들면 성으로 가는 길이 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K에게 성으로부터 두 사람의 조수가 파견된다. 그러나 조수란 이름뿐이고 어리석은 수작을 부리는 감시원에 지나지 않는다. K가 호의를 갖고 희망을 걸어보는 성의 사자 바르나바스는 사실인즉 마을사람들로부터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K는 성의 관리 클람이 있는 술집 신사장에서 프리다를 애인으로 삼지만, 직속상관인 면장으로부터 이상스런 성의 지배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결국 국민학교의 사환직을 얻는다. 신사장의 앞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클람과 담판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다른 조수들과 함께 프리다를 데리고 학교 건물로 이사온 K가 교원들과 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수와 프리다의 관계에 의심쩍은 점이 있어서 무능한 조수 두 사람을 해고해버린다. K는 바라나바스의 집에 가서 자매인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로부터 사랑을 강요당해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 집안이 몰락의 비운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자 그 사이에 프리다가 K를 배신하고조수 한 사람과 신사장으로 거처를 옮겨 버린다. 그날 밤 K는 성의 어느 관리로부터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잘못해서 비서 뷔르거의 방으로 들어갔을 뿐더러 피로한 나머지 이 비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까지도 놓쳐버린다. 이처첨 미완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브로트가 말하는 바에 의하여 주인공 K가 기진맥진하여 죽는 그 순간, 성으로부터 정식으로 마을에 거주하는 것은 안되지만 이 마을에서 잠정적으로 일하며 사는 것만은 허가해주겠다는 결정서를 전달받게 되었다고 한다.
*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의 무대가 된 프라하의 오세크 성(현재는 정신병원으로 쓰이고 있음)은 카프카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으로 어린 시절 카프카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찾아왔던 곳이며, 훗날 유태인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슬픈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성)인 듯싶다. 여기에서 카프카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유태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와 같은 집단의 억압과 횡포에 대해 항거하면서 인간성 회복 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발표시킨 브로트에 의하면 주인공 K가 임종할 때에야 비로소 성 에서는 비록 그에게 정식으로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저 마을에서 살고 일해도 좋다는 정도의 허락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막스 브로트는 성 을 신의 은총 내지 고귀한 지혜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에 도달하려던 K의 노력을 곧 인간계(마을) 밖을, 절대의 세계를 구하려는 노력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그의 편력은 (지옥계) (연옥계) (천국계)를 거친 단테의 편력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 K의 숙명적인 좌절상태는 실제로 괴로움을 참을 수 밖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조건에 해당되면서, 단테의 (신곡)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그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카프카 자신이면서 (성)의 주인공인 K의 존재상태는 카프카가 약혼자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몇 마디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저는 저의 가족 속에서 이방인처럼 아주 낯설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 인사말 외의 다른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누이들과는 절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도널드 피어스가 말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하나의 탐구서였다면 카프카의 (성)도 하나의 탐구서다. 단테가 (신곡)에서 그의 시대와 인간조건을 요약해놓았다면, 카프카는 (성)에서 20세기와 20세기의 인간조건을 요약해놓고 있다. (성)은 곧 카프카의 (신곡)이다. 사실 카프카는 생존시 무명의 작가였다. (성)도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우선 프랑스에서 그 진가가 인정되고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로 세계 각국의 문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그의 사후 20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의 유고도 카프카의 유언에 따라 불태워질 운명이었으나, 막스 브로트의 극성스런 노력으로 오늘날 카프카의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또는 순수 문학적으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점점 브로트와 같은 종교적인 해석보다는 개별적비유적인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적 해석이 유력해지고 있다. 따라서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작품의 영향을 말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인 듯한 감이 있으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단테와 비유되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실존주의로 해석되며 방법론상의 비유의 문제는 특이하고도 완벽한 상징주의로 해석되고 있다. (이방인)을 쓴 카뮈가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실제로 카프카 내지 (성)에 대한 해석이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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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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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칭찬하는 사람, 헐뜯는 사람 -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2. 남을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3/4)
남을 끌어주지 않는 사람
항상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오로지 자기 자신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예들을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면 과학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의 물리학자,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음-옮긴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요라나, 세그레, 아말디(페르미의 제자이자 협력자들, 역시 물리학자로 이름이 높음-옮긴이)같은 (로마 그룹의 젊은이들)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예술적으로 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의 가치를 전혀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만 자신의 성공과 그 성공을 축하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공연에 관객으로 가서는 무대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연 배우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 중 일부는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끌어 모으는 능력도 있어서 하나의 학파 또는 효율적인 조직을 세울 줄도 안다. 하지만 협력자들 중의 그 누구도 그들의 개성이나 생각을 나타낼 수 없고 성공할 수 없게 만든다. 제자들을 선택할 때 그들은 너무 똑똑하고 독창적이고 창으적인 제자를 고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은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바로 그들 자신이 재능 있는 제자들의 그늘에 가릴 것을 두려워 했던 선생들의 범상한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렇게 이런 사람들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제일 중요한 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군가 자신보다 더 크게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들은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잠재적인 경쟁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유능한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그들 앞에 장애물들을 놓든다. 만약 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려고 애쓰고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그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시장이 제 기능을 하는 곳에서 이런 메카니즘은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는 예를 들면 연극계라면 경쟁 상대가 될 젊은이들을 깡그리 짓밞아버리는 능력을 통해 족점 권력을 손에 넣는 신성한 괴물들이 있다. 대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질투심에 중독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가 된 채 숨어있는 질투심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또 용기가 별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감출 줄 안다. 큰 소리로 의견을 발표하고 분개하고 격렬하게 비난을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고 다른 사람들을 앞세운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사라져 버린다. 만약 일이 잘 되면 그 공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겁이 많은 사람이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비겁한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을 방패로 삼아 그들을 희생시키고, 그 뒤 관계를 끊어 버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그저 다음에 할 말, 재치있는 대사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중단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때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희망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개인, 자신의 능력, 자신의 공적들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을 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알던 사람 하나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뒤에 그의 친구와 제자들에게 깊은 굴욕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이상 내게 관심을 갖지 말게. 자네들은 과거의 사람들이야> 이런사람들은 대게 변장을 하고 자신을 숨기고 있다. 그런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번 해 보도록 하라.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이 걸려야 5분이 지나기가 무섭게 주제를 바꾸어 자신에게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얘기를 돌릴 것이다. 아니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아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병에 대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놀라운 모험들로 당신의 이야기를 뒤덮어 버릴 것이다. 여행, 시험, 재난,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겁한 사람
용기는 시작의 미덕이다. 용기의 반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신을 숨기는 것이다. 용기의 반대가 결코 두려움은 아니다. 용기있는 사람들도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의 불확실함에 맞서 앞으로 자기 몸을 던진다. 도약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공포 때문에 이를 벌벌떠는 사람은 경멸이 아니라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파올로 빌라치오가 만들어낸 놀라운 인물인 판토치는 애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현실 때문에 무너지며, 어린아이처럼 그 현실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기 때문이다. 또 용기의 반대로 신중함도 있다. 신중함은 위험을 최소화시키고 싶어 한다. 신중한 사람은 현실을 다 탐색할 때까지, 세세하게 현실을 다 파악할 때까지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친 신중함 앞에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중함덕택에 실패를 피했을 때 우리는 신중함을 미덕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용기 부족, 즉 비겁함이 있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긴다. 두려움을 숨기고 이득과 권력을 얻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이득을 얻기 위해 그것을 이용한다.
비겁한 사람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자세히 실펴보면 이런 사람들은 공통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데 그 첫번째가 연극적인 성격이다. 위험이 없을 때,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비겁한 사람은 자신감을 과시한다. 자신의 성공을 자랑한다. 성공을 과장하고 부풀린다. 자신의 힘과 위대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대게 아주 영리한 사람들도 속일 수가 있다. 그러나 용기를 필요로하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닥치면 그들은 도망을 가고 몸을 숨기며 문제들을 과장하기 시작한다. 넘을 수 없는 장애물, 음모, 정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주의해야 할 술책들에 대해 늘어 놓기 시작한다. 그들은 현실을 바꾸어버리고, 당신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꾸며낸다. 만약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야먼 할 경우, 절대 그 일의 완전한 모습을 당신에게 전해주는 법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거둔 성공과 공적들만을 나열하다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칭찬을 받고 비난을 피하는 것 같다.그는 언제든 자기 아버지, 아들, 친구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 자신의 알리바이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일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자신의 공적을 증명할 일만 생각한다.
비겁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 아주 쉽게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당신에게 셀 수도 없는 장애물들과 무서운 장애물들만을 열거할 것이다. <이봐, 난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당신이 그에게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는 죄책감을 느낄 때까지 이런 말은 계속된다. 그와 함께 있으면 당신은 언제나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가 된다. 그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아랫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고 그들의 품의를 떨어트린다. 아랫사람을 도와줄 목적이 아니라 짖밟을 목적으로 그들의 실수를 강조한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한다. 무대위에서 배우들에게 특히 아니든 배우들과 반항을 할 수 없는 배우들에게 모욕을 주던 연출자가 생각난다. 그의 주변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낸는 아첨꾼이 모여있었다. 그 연출자는 그 갈채를 즐겼고 점점더 잔인해졌다. 비겁한 사람은 박수 갈채를 필요로 하며 칭찬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자기 아랫사람을 짓밟는다. 아랫사람이 반항을 하고 그에게 대항하고 그를 비난하고 그의 가면을 벗겨낼까 두려워서이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는 겁쟁이이다. 권력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비굴해지며 스스로를 낮춘다. 실제로 그는 강한척하고 가치있는 사람인척하는 역을 해서 사람들을 웃기는 코메디언과 똑같은 식으로 행동한다. 이탈리아 배우 알베르토 소르디는 약자에게는 거만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이런 비겁한 인간을 가장 뛰어나게 연기해 보였다. 하지만 비겁한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면이 벗겨지는 것이다. 그는 끊입없이 노력하여 만들어 냈고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속임수를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폭로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강한 성격의 사람, 정말 용기있는 사람, 외면이 아니라 결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겁을 낸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겁한 사람이 겁내는 또다른 사람은 아내나 남편, 그러니까 자기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 앞에서 그는 새끼양처럼 순하다.
무질서한 사람
시작한 일을 절대 끝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을 시작했다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앞의 일을 중단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일을 시작한다. 결국에는 해애할 일들을 모듀 눈앞에 손 닿는 곳에 고스란히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공간을 모두 차지하고 다른사람이 그일에 손도 못대게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조리 흐트려 놓을 수 있고 그러면 다시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과 사무실은 미완성품과 미결제서류들의 창고가 되어간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미궁 같은 곳이 된다.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치 불법 침입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무엇인가를 건드리기만 해도 항의를 한다. 우리는 무질서한 사람이 대게 조용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무질서하게, 흥분해서, 열성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끊임없이 할 일이 너무 많고 일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인상을 준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이 아닌 그 활동력에 충격을 받으며 가끔은 강한 체력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를 방해하고 그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면 사람들은 뒤로 후퇴해서 간섭하지 않으며 좁은 공간으로 물러서고 만다.
일을 절대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주변에 대혼란을 만들어 내는데 이 혼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모있고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람만이 재앙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움직일 줄 안다. 아무리 사소한 결정이라도 결정을 내릴수 있는 사람은 그 혼자 뿐이다. 일을 절대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이런일은 모든 단계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가정에서 비밀스러우며 잠정적인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그녀가 계속 물건들을 옮기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다.남편, 자식들, 가정부는 야단을 맞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가정에서 존재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독재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사무실에서도 벌어진다. 서류들을 다른 사랍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특히 고용주가 이해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여비서의 경우이다. 이런 미궁속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그녀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식으로 그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자신이 진행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없는 사장들이 있다. 그들은 한번도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일이 없으며 예고없이, 이상한 시간에 종종 한밤중에 회의를 소집한다.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정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사실 정식절차를 밟아 통보를 한 것은 아니다. 사장이 친절하게 대해주고 우호적으로 행동해도 모든 사람들은 불안한 상태에서 생활한다. 이런 사장들은 사실 독점력이 강한 폭군들이다. 무질서를 통해 자신들의 직원들 모두를 결정에서 배제시키고 단순히 결정된 일을 집행하게만 만든다. <정돈>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맡아도 일이 완성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남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똑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잡성은 아무 관계가 없다. 복잡한 무엇인가가 있다해도 방법만 정돈되어 있다면 언제나 해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분명한 순서, 모두가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마도 가장 뛰어난 결정 방법은 일본인들의 방법인 것같다.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사람들이 모두 회의에 참석한다. 사장이 이미 어떤 방침을 정했다 하더라도 모두 함께 그 결정을 나누고 만장일치로 결정되기를 원한다. 마침내 모두가 그 일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모두가 동의를 하게 되면 일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이 된다. 게다가 누구나 서로 위치를 바꾸어 일을 할 수도 있다. 이와 정반대되는 것이 이탈리아의 관료세계이다. 여기서는 중심부서에서만 어떤 일을 결정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거대한 집행기구로 기능한다. 하지만 결정에서 제외된 관료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미궁에서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경우에도 완결되지 않은 일들 때문에 발생하는 성가신 문제들, 결제되지 않아 뒤죽박죽 미궁을 이룬 서류들, 일이 늦어지는 데서 기인하는 무질서는 조직망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권력이 된다. 이것이 이런 행정당국에 연채료가 싸여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일을 절대 완결짖지 않는 개인의 경우 연체료의 밀림과 퇴적된 과거의 무질서가 혼자만의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연습장이 되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을 절대로 끝내지 않는 개인들, 지도자들, 사무실, 행정당국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런 상태를 이용해 자신은 이득을 보고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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