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56. 불태워진 아편 2만 상자 - 중국, 아편전쟁 발발(184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39년/기해박해로 프랑스 신부 등 처형됨, 1840년/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시작, 1845년/영국 군함, 전라도 해안 측량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인에게 신비와 꿈의 세계 동방을 알려주었다. 유럽 인들은 앞을 다투어 동방진출을 꾀했다. 향료, 금, 은, 비단, 차 등 각종 특산물이 유럽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런데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한 영국은 동방을 단순한 중개무역지가 아니라 원료공급 및 자국 상품을 수출하는 시장으로 삼고자 했다. 아편전쟁은 그 같은 영국의 야심이 불러일으킨 근세 동서양간 최초의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아편밀수였다. 다시 영국에서는 차 마시는 습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차와 비단은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언제나 수입초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결재해주어야 했다. 한편 청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중국은 영국이 바라는대로 호락호락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데다가 철저한 중화사상에 의거, 외국을 오랑캐로 여기며 조공국 정도로 대접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영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상품을 인도로, 인도의 아편을 중국으로, 중국의 차와비단을 영국으로 수송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행한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하루아침에 수입초과국이 되고 다량의 은이 국외로 흘러나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여 국민건강을 좀먹어들어갔다.
1839년 중국 정부는 임칙서를 황제의 특명을 받은 흠차대신으로 임명, 군사, 행정상의 전권을 주어 아편밀수의 본거지인 광동으로 파견했다. 호광총독이었던 임칙서는 매우 단호하고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3월 10일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첫째, 현재 갖고 있는 아편을 모두 제출할 것. 둘째, 이후에 아편을 밀거래하다 발각되면 아편은관에서 몰수하고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곧이어 3월 19일부터는 외국상인들을 한 발자국도 광동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군사를 동원, 상관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인들이 임칙서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아편 실은 배를 멀리 항구 밖으로 도피시켰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며칠 동안 감금당하다시피한 영국상인들은 아편 1,037상자를 내놓았다. 그러나 임칙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광동에 들어온 배가 20여 척, 한 척 당 아편 1천 상자를실을 수 있으므로 총 2만 상자 가량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상무감독 엘리엇은 마카오에서 황급히 돌아와 갖고 있는 아편을 모조리 내놓도록 했다. 그리하여 도합 2만 283상자의 아편이 임칙서 앞에 쌓이게 되었다. 꼬박 두 달이 걸려 회수된 아편을 임칙서는 바닷물과 생석회로 처리, 모조리 마다로 흘려보내버렸다. 엘리엇은 영국상인들에게 마카오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전쟁발발의 기폭제가 된 '임유회 사건'이 터졌다. 임유회는 홍콩 근처 첨사촌의 주민인데, 영국 수병들이 이 마을에서 술을 사려다 사지 못하자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해 그만 임유회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7월 7일의 일이었다. 임칙서는 범인을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엘리엇은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화가 난 임칙서는 마카오의 영국인들을 모두 추방, 엘리엇의 가족을 포함한 57가구의 가족들이 바다를 표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11월 3일 엘리엇은 군함 수척을 이끌고 항구에 진입,. 양국간에 전투가 벌어져 중국배 3척이 침몰당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0년 1월 5일, 황제는 영국과의 통상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이 시종 우세했다. 군함 20척, 대포668문, 무장기선 14척, 포 56문, 수송선 30척, 병원선 9척, 보병 만여 명, 포병, 기타 측량선을 거느린 영국함대는 광동, 하문, 영파를 공격하고 양자강으로 진출, 상해 진강을 함락한 다음 남경으로 쳐들어왔다. 남경은 중국경제의 심장부일뿐더러 이곳을 빼앗기면 중국은 남북간 교통이 끊겨 반신불수가 되는 꼴이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청조는 굴복을 하고 강화를 청했다. 남경을 눈앞에 둔 양자강 상의 콘월리스 호에서 1842년 8월 29일 조약이 맺어졌다. 이를 남경조약이라 한다. 그 주요 내용은 '중국은 영국에게 군사배상금 및 아편 배상금조로 2,100만원을 지불할 것, 홍콩을 영구히 영국에 할양할 것, 중국은 광동,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의 5개 항을 열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는 양국 협의에 따라 결정할 것'등이었다. 영국은 5개 항을 개방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데다 홍콩과 관세협정권까지 얻어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중국으로선 정작 문제가 된 아편에 대해서 책임을 묻기는커녕 거꾸로 배상금을 물어주고 치외법권을 인정, 향후 밀수를 해도 어떤 제재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경조약은 일방적으로 영국측에 유리하게 맺어진 조약이었다. 중국이 잠자는 호랑이가 아니라 허울만 좋은 호랑이임을 알아차린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 원칙을 내세워 조약 체결을 요구해왔다. 그리하여 1842년 각각 망하조약, 황포조약이 맺어졌으며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이리저리 잠식당하는 반식민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57.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한 홍수전 - 중국, 태평천국의 난 발발(185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46년/김대건 신부 순교, 1848년/이양선 함경도 해안에 출몰, 아편 흡입 금지
홍수전은 1813년 1월 10일 광동성 화현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이복형이 둘 있었는데, 그는 형들과 달리 농사를 짓지 않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을 쳤다. 1833년 그의 나이 21살 때 광주로 시험을 치러 갔다 오다가 양아발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홍수전에게 (권세양언)이란 책을 주었다. 그 책은 기독교 전도서였다. 하지만 홍수전은 그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4년 후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또 낙방한 그는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근 40여 일을 열병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큰 집에 이르니, 금발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속세의 마귀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형제자매들을 구제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키가 장승처럼 큰 선비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맏형이라면서 역시 속세로 가서 마귀를 쫓아버리라 하며 자기가 도와주겠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43년, 홍수전은 우연히 전에 받았던(권세양언)이란 책을 발견하고, 자신의 꿈이 분명 하나님의 계시이며 키큰 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1844년 그는 친구 풍운산과 광서성 계평현 자형산으로 가서(상제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상제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다음 홍콩에 로버츠라는 유명한 미국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2개월 후 광서로 돌아와 교세를 늘리고 지도자가 되었다. 1850년 11월, 홍수전은 드디어 거병을 했다. 각지에서 농민들과 비밀결사들이 속속 가담해와 홍수전의 세력은 단박에 커져, 이듬해 여름 광서성 영안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의 건국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태평천국이란 이름은 홍수전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 보여준다. '무릇 천하의 토지는 천하인들이 다 같이 경작할 있다. ...천하 백성들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대복을 모두 받도록 하되, 밥이 있으며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사용하여 어디나 고르고 또 의식이 넉넉치 않은 자가 없도록 한다.'
'천국이란 천상천하를 총괄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도 천국이 있고 지상에도 천국이 있으며 천상 지상은 다 같이 하나님의 천국이니 오직 천상의 천국만을 가리킨 것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그가 세우고자 한 나라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의식이 유족한 이상사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린 지상천국이었다. 홍수전은 또한 멸만흥한의 기치를 높이 들어 이민족인 청조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공공연히 내 뱉었다. 그래서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금지하고 복식을 바꾸었다. 태평군은 가는 곳마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한족 출신 지식인 중에도 이들을 지지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태평군 1852년 12월 한양과 무창을 점령하고, 양자강 연안의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 1853년 3월 드디어 남경에 입성했다. 이들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천경이라 이름했다. 거병한 지 2년 3개월 만에 2백만의 대군을 거느린 태평천국은 중국 동남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게 되었다.
태평천국은 천조전무제도라는 법률을 반포하고 토지의 공유, 엄정한 기율, 일부일처제 실시, 창기 근절, 여성의 전족 금지, 여성의 참정권 인정, 아편 금지 도박 금지 등을 시행했다. 이들의 정책은 청 왕조는 물론 귀족, 관료, 지주, 상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냈으며, 유교교육을 받은 식자들은 이들이 숭배하는 기독교에 심한 반감을 품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청조의 탄압과 혁명군의 내분으로 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1864년 중국 번, 이홍장이 이끄는 토벌군과 영국인 고든이 이끄는 외인부대 상승군이 남경을 포위해들어왔다. 위기에 몰린 홍수전은 4월 음독자살하고 태평천국은 무너졌다. 태평천국은 빈농들의 혁명운동이었다. 또한 기독교를 숭상하긴 했으나 서양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민족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훗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은 태평천국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외국에서는 다만 이론뿐이고 완전한 실행은 아직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홍수전 시대에 이미 실행한 바가 있다. 그가 실행한 경제제도는 공산주의의 실천이지 이론이 아니다.'
58. 소기름과 돼지기름 - 인도, 세포이 항쟁 발발(185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54년/러시아 배 함경도 영흥에서 주민 살상, 1856년/프랑스 군함, 충청도에서 소 약탈
1857년 5월 인도 북부의 델리 지방에서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을 일컫는 이름이다. 세포이들은 전에도 종종 고용주에 대항하는 집단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이 해의 반란은 대규모였고,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도시 빈민들과 농민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민족항쟁으로 발전했다.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날 세포이들이 사용하는 소총의 탄약통에 영국군이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발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탄약통에 소기름과 돼지기름은 발랐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세포이들은 거의 대부분 힌두 교도이거나 이슬람 교도였기 때문이다. 힌두 교도는 소를 신성한 동물로 숭상하여 절대 해치거나 잡아먹지 않으며, 이슬람 교도는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따라서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이들에겐 대단한 모욕인 셈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세포이들이반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 이유는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대한 인도인으로서의 불만이었다.
인도는 17세기 말 무굴 제국이 약화되면서 토후들이 각각 나라를 세워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는데다가 이슬람 교와 힌두 교의 대립이 한창이었다. 1757년 동인도회사 서기 클라이브가 거느린 영국군은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 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게 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처음엔 인도 고유의 풍속을 존중하는 체했으나 곧 정책을 바꾸어 철저한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19세기에 이르자 동인도회사는 명실공히 인도의 통치자가 되었다. 벵골지방의 통치권을 얻어내고 마이소르 왕국, 마라타 동맹, 시크 교국 등 인도 전역이 동인도회사의지배하에 들어갔다. 인도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이지 상품시장으로 변했다. 이전까지는 면직물 수출국이었으나, 산업혁명을 치른 영국은 값싼 면직물을 대량으로 만들어 인도에 파는 한편 인도산 면직물에 높은 관세를 붙였다. 그러자 인도의 면직물 공업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실업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영국은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간의 대립을 은밀히 조장했다. 이는 영국의 교묘한 식민지 통치방법의 일환이었다.
세포이 항쟁이 전 인도인들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영국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1859년 세포이 항쟁은 진압되었다. 영국은 항쟁에 무굴 황제가 가담했다. 하여 황제를 버마로 추방하고 무굴 제국을 멸망시켜버렸다. 그런 다음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인도를 영국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인도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 총독이 총치하게 되었고 1877년부터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함으로써 인도제국이 되었다. 영국의 진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차에 걸친 전쟁을 벌여 버마를 침략, 알라웅파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버마를 인도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싱가포르, 말라카, 말레이 반도 남부를 손에 넣어 말레이 연방에 만들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를 속령으로 만들어 죄수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뉴질랜드, 피지섬, 보르네오, 북부, 뉴기니아 남주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영국은 온 세계에 식민지를 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으스대기 시작했다.
59. 세계관을 뒤바꾼 이론, 진화론 - 다윈, (종의 기원)간행(185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59년/서원 사설 금지, 1860년/최제우, 동학 창시
19세기는 과학의 세기였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당대에 가장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왕립과학자협회 회원을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의사였다. 다윈도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에 빠지는 날이 출석하는 날보다 더 많았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에 들여보냈다. 의사가 아니면 성직의 길로 나가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의 3년간은 정말로 무의미했다.' 다윈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식물학자 한슬러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다윈은 그의 권유에 따라 비글 호를 타고 탐험여행을 떠나게되었다. 다윈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다.
해군 측량선 비글 호는 영국을 출발,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오스트레일리아를 항해했는 데, 다윈은 무보수 박물학자로서 동식물과 지질을 조사, 훗날 진화론의 기초가 된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갈라파고스 섬의 동물에 대한 관찰은 진화론을 세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다윈은 1839년 '비글호항해기'를 써냈다. 그리고 20년 뒤인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 진회론을 주장했다. 그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도채 원칙에 의거, 다음과 같이 종의 진화를 설명했다.
'모든 어린 생명이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며, 늙어 죽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연도태 원칙에 의해 생존에 적합한 종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예를 들면 기린은 살아남기 위해 목이 그처럼 길게 발달되었으며,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조직을 개발한 것이다. 아주 작은 생체조직의 변화로 인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계속 그 생체조직을 발전시켜, 수세대에 걸쳐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지구가 처음 생성되었을 때 존재한 종이 현재까지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종들은 원형에서 형질이 변화하여 현재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바뀐 것들이다. 인간도 이 같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즉,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환경에 맞게 서서히 진화 발달하여 인간이 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엄청난 충격파를 각계각층에 던졌다. 가장 발끈한 것은 종교계였다. 다윈의 주장이 옳다면, 신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성경말씀은 거짓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사회의 최고 권위로 군림하고 있던 교회는 자신의 지위를 뿌리째 뒤흔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교회는 진리 수호를 다짐하며 진화론을 배척, 다윈의 책을 읽거나 가르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종의 기원'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초판 1,250부가 단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 그 뿐 아니라 진화론은 여러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의 절대적 권위를 믿지 않게끔 되었다. 인간은 신의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의 진화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은 불안과 상실감을 안겨다주기도 했다. 진화 그 자체가 신의 창조 행위에 포함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전처럼 사람들을 교회에 절대적으로 복종케 하진 못했다.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래 또한번 사람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이다. 때문에 진화론을 모르고서는 19세기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의 발달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중, 다윈의 이론을 사회분야로 확대 적용한 이른바 사회적 다윈이즘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회적 다윈이즘은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사회적 다윈이즘에 의하면, 치열한 생존경쟁과 그를 뚫고 이룬 성공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또 진화가 단기간에 급속히 이루어지지 않듯, 사회의 진화도 급격하게 진행되어선 안되었다. 사회적 다윈이즘은 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의 버팀목이었다. 그뿐 아니라 인종차별, 서구 중심 민족주의를 정당화해주었다.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만이 생존할 자격이 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은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착취하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한 생명의 번성을 위해 다른 생명이 말살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리하여 앵글로 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 튜튼 계통의 독일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슬라브 족에 대해 인종적 우월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한 예로, 진화론의 동조자 월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 인들은 신체적 자질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 도덕적 자질에서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 유럽 인을 오늘의 문화와 진보로 이끈 그 힘으로 유럽 인은 야만인을 정복하고 그 숫자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60.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 남북전쟁 - 미국, 남북전쟁 발발(186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1년/김정호, 대동여지도 만듦, 1862년/지주민란 발발, 전국적으로 농민반란 일어남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자 공화당을 반대하는 남부 11개 주는 합중국 탈퇴를 선언, 새로 아메리카 연방을 결성하고 민주당의 데이비드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메리카 연방의 수도로는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가 정해졌다. 남부의 독립선언은 북부와의 오랜 대립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토지가 넓고 기름진 남부에서는 일찍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다. 남부인들은 흑인노예를 고용, 대농장에서 면화, 담배를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했다. 따라서 남부의 경제는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영국과의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와 달리 북부는 철,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달,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으며 임금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남부는 지방분권 및 자치를 원했다. 19세기 전반에는 남부 농장지대에 기반을 둔 민주당에서 대통령을 많이 내었으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북부의 공화당이 강해졌다. 남북 대립의 주요 쟁점 중에 하나는 흑인노예 문제였다. 본래 노예문제는 각 주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다. 때문에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서부개척으로 새로 주가 된 지역에 노예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1820년 남북은 미주리 협정을 맺어 북위 36도 30분을 경졔로 그 이남에만 노예제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협정도 1850년 무렵엔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이미 있는 것까지 없앨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 생긴 주에 노예제를 인정치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부는 이에 반발, 합중국탈퇴와 남부 자치를 선언한 것이다. 사실 노예제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은 신흥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의 산업자분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자본간의 대립이었다. 1861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했다. 영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부를 지원했다. 리 장군을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을 가진 남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인구나 물자 면에서 북부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1863년 1월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써 남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4백만 명에 달하는 흑인노예가 해방되었으며 전세는 북부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1865년 4월 남부 연방의 수도 리치먼드가 그랜트 장군이 거느린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4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 것이다. 쌍방의 사상자는 무려 60만, 소모된 전비는 100억 달러였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합중국의 단결과 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워싱턴의 한 극장에서 남부 출신의 청년에게 저격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후 남부의 대농장은 해체되었다. 흑인들은 백인과 똑같은 시민으로서 자유와 선거권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그렇지만 흑인들이 얻은 자유는 실제로는 굶주림의 자유였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몸뚱어리뿐인 흑인들은 북부로 이주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시 옛주인들 밑으로 들어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노예해방과 함께 노예에 기반을 둔 남부 '면화 왕국'이 무너지자, 그에 기초를 둔 정치세력도 쇠퇴했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을 전개, 자본주의를 꽃피우게 되었다. 북부의 승리는 곧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