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51. 노예무역은 국력의 보고 - 흑인노예무역의 절정기(18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701년/장희빈 처형, 1712년/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년/여오, 탕평책 실시, 1750년/균역법 실시
아프리카 서해안의 기니 만 연안의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지명들이 나온다. 호초해안, 황금해안, 곡물해안, 상아해안, 노예해안 등등. 이곳들은 이름 그대로 호초(후추), 황금, 상아, 곡물, 노예들이 배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던 장소들이다. 선진 유럽국에 의해 일찍부터 유린당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흑인노예무역이 맨처음 시작된 것은 1530년경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실려간 흑인노예 수는 16세기에 90만, 17세기 275만, 18세기 4백만, 19세기 7백만, 총 1,465만인데 항해 도중 여섯 명 가운데 다섯 명 꼴로 죽었으므로 실제 끌려간 총수는 무려 6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좀디 좁은 갑판에 갇혀서 몇 주일 혹은 몇 달씨 걸리는 항해 끝에 신대륙 아메리카로 실려갔다. 쇠사슬에 묶여 누워 있는 노예 한 사람당 허용된 공간은 겨우 길이 180센치미터, 폭 40센치미터였다. 노예무역은 주로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예상인들은 대부분 국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의 드레이크 선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공격하는 한편 흑인노예를 신대륙에 팔아 영국 왕실을 살찌워주었다. 노예무역은 매우 수지맞는 장사였다. 유럽 인들은 노예무역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흑인은 농장의 활력이다. 밀짚 없이 벽돌을 만들 수 없듯이 노예 없이는 설탕을 생산할 수 없다' 1764년 브리스틀의 설탕 상인 존 피니가 한 말이다.
노예무역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국가적 이익이 큰 사업'이었으며, '국력과 해군력의 무진장한 보고'로 간주되었다. 유럽 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노예제가 '아프리카 야만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며 그들은 노예제 덕분에 훨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조차 했다. 노예무역이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이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에게서 노예무역권을 빼앗은 영국은 이 무렵부터 노예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으로 번창한 대표적 도시로서, 1730년에 16척이던 노예무역선이 18세기 말엔 132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면직물 공업이 크게 발달, 원면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그 원면은 거의 대부분 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면화농장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면화 재배에 동원된 흑인 노예 수는 1790년에 69만 7천 명, 1861년에는 4백만 명이었다. 19세기 초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금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계속되었다. 감시를 피하느라고 흑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어 운반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운반된 흑인노예들은 면화농장, 사탕수수농장, 담배농장, 광산 등지로 팔려나갔다. 당시의 한 광고문을 보자.
'5월 6일 화요일 애슐리 페리 항 밴스 아일랜드 호에서 250명 가량의 건강한 니그로를 판매합니다. 곡물해안과 와인드워드에서 막도착한 이들은 마마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도고 있습니다. 찰스 타운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일절 금지됨은 물로 오가는 배도 없어 질병에 전염될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해변가에 유행하고 있던 마마를 피해 배 위에서 니그로를 판다는 광고이다. 흑인노예들은 힘겨운 노동과 노예주의 잔인한 학대 밑에서 쓰러질때까지 일을 했다. 그들은 어머니와 아내, 딸들이 백인 소유주에게 겁탈당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제대로 가족을 이룰 수도 없었으면 이루었다 해도 뿔뿔이 흩어져 팔려가야 했다. 글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조그마한 반항에도 가혹한 처벌과 죽음이 뒤다랐다. 불구가 되어 거리에 버려진 흑인노예, 그들이 있었기에 유럽 인은 편안히 설탕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18세기 유럽의 번영 뒤에는 바로 이 흑인노예들의 참담한 희생이 가려져 있었다.
52. 보스턴 차 사건 - 아메리카, 독립을 선언(177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763년/쓰시마 섬에서 고구마 전래, 1776년/규장각 설치
1773년 12월 16일 밤, 북아메리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 회사 소속의 배 2척이 인디언 차림을 한 일단의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그들은 배에 가득 실려있던 차 상자를 몽땅 바닷속에 처넣고 도망을 쳤다. 물에 빠진 상자는 모두 342짝,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500파운드에 달했다. 이 사건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정부의 식민지정책에 반대하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벌인 해프닝이자 독립전쟁의 발단이었다. 본래 영국의 아메리카 정책은 너그러운 편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다른 식민지와 달리 본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간 사람, 정치적 자유를 찾아간 사람, 죄를 짓고 유형당한 사람, 큰 돈을 벌어보려는 모험가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급차별 없이 소신껏 일하며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아메리카는 유럽 인에겐 여비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가고픈 매력의 나라이기도 했다. 이주자들은 '개척정신'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인디언과 광활한 대자연이 이들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은 무자비한 살륙으로, 대자연은 끈질긴 도전으로 극복해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이 되자 지금까지 호의적이던 영국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영국은 당면한 재정난을 식민지에 대한 과세로 풀어보려 했던 것이다.
영국왕 조지 3세는 식민지 아메리카에 다종다양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이 인지세였다. 인지세란 신문이나 책, 공문서, 트럼프, 학위증명서 등 온갖 것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법으로서 1765년 제정되었다. 분개한 식민지 대표들은 뉴욕에 모여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결의를 천명했다. 본토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는 한 한푼도 세금을 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각지에서 본토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때문에 영국의 항구와 도시에 실업자가 급증하자 인지법은 시행 3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그후에도 아메리카에 대한 과세는 번번히 실패하고 오직 차에 대한 세금만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773년 영국정부가 동인도회사에게 차 무역 독점권을 주고 면세조치를 취하자 격분한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영국정부는 이 사건을 난동으로 간주하고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 보스턴 항이 봉쇄되고 군대가 외곽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식민지인들도 대처방안을 마련하기시작했다.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본국과의 통상중지, 상품 배척을 결의했다. 최초의 무력충돌은 이듬해 4월 발생했다. 보스턴 서쪽 콘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일전을 벌인 것이다. 이 전투를 시발로 하여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는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조지 워싱턴은 경험 많은 군인으로서 영국을 위해 프랑스와 용감히 싸웠던 인물이다. 이제 그는 식민지 아메리카를 위해 영국과 싸우게 된 것이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이 '독립선언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 내용을 잠깐 보기로 하자.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리 가운데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은 정부를 만들었다.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가 이런 목적을 파괴했을 경우엔 그 정부를 변혁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민주주의의 참뜻을 명쾌히 밝힌 이 선언은 후일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는 충성파, 독립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때 식민지인들을 감동시켜 독립전쟁이 나서게 한 한 권의 책이 있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 그것이다.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한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무려 50만 부가 팔려나갔다. 당시 아메리카 인구가 300만이었으니, 그 중의 6분의 1이 이 책을 사본 셈이다. 이 전쟁은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는 식민지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영국을 고립시켰다. 식민지군은 처음에 열세로 악전고투했지만 1777년 10월의 사라토가 전투, 1781년 10월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대세를 쥐었다. 마침내 영국은 1783년 아메리카 식민지 13개주의 독립을 인정했다. 8년 여에 걸친 독립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나라 아메리카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7월 4일은 아메리카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53. 파리 시민, 바스티유 감옥 습격 - 프랑스 혁명 발발(17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784년/이승훈, 천주교 전도 시작, 1786년/서학을 금함, 1787년/프랑스 배 내항
세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을 든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세계사를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혁명은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자!'는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에 고무된 파리시민들은 파리 시내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갔다. 그들의 목표는 감옥 내에 있는 다량의 화약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악명은 실로 대단했으며, 왕을 비판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파리 시민이 점령했을 때, 감옥에는 7명의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한편 바스티유가 점령당하는 순간, 루이 16세는 화려한 베르사유궁에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7월 14일 : 없음'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이라고 불리는 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었다. 낡은 제도란 신분제도를 말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람을 세 가지 신분으로 나누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로서 이들은 총 2,600만 프랑스 인구 중 0.4%에 불과한 10만 정도였으나 전국토의 10%를 소유하고 세금을 변제받았다. 제2신분인 귀족은 10만 내지 25만으로 전국토의 20%를 소유했으며, 세금면제는 물론 고위관리직을 독점했다. 제3신분인 평민은 시민, 농민, 도시노동자로서, 그중 상인, 수공업자, 변호사, 문필가, 하급관리 들로 이루어진 시민은 생활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으나, 농민과 노동자들은 간신히 생존할 정도였는데다가 각종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신분제 의회가 존재했는데 이를 삼부회라고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1614년 이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왕실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삼부회에는 1신분 대표 300명, 2신분 대표 291명, 3신분 대표 610명이 모였다.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제1,제2신분과 제3신분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에 제3신분은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3신분의 강경한 태도에 화가 난 왕은 의사당을 막아버렸고, 이들은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테니스 코트의 맹약'이라 한다. 격분한 루이 16세는 군대를 부르는 한편, 민중에게 인기 있던 재무상 네케르를 전격 파면시켰다. 왕이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리란 소문이 나돌자 파리 시민은 분개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미국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이 문서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천명한 것으로서 전문 17조로 되어 있으며, 진보적 군인 라파예트가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 파리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해는 지독한 흉년이었다. 한데 그때 베르사유 궁에서 대연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게다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민중은 분노로 들끓었다. 한 젊은 여성이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가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행진하기 시작했다. 끼니 걱정에 애를 태우던 여성들이 맨 앞장을 섰다. 목적지는 베르사유 궁이었다. 루이 16세는 당황한 나머지 여태껏 미루던 '인권선언'의 재가를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성난 민중들은 왕에게 파리로 갈 것을 요구했다. 왕은 할 수 없이 왕비와 아들을 데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쥔 여성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파리로 와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왕비와 함께 왕비의 친정 오스트리아로 몰래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민중의 적으로서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역시 그해 10월 16일, 38살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 각국이 프랑스 동맹을 결성,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자기나라로 혁명의 불길이 파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 이들을 막아냈다. 젊은이들은 혁명을 지키려는 뜨거운 의지로 속속 자원을 했다. 그중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이 불렀던 진군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의 놀로 민중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다.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잠깐 그 노랫말을 보기로 하자.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무리들의 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은 '상퀼로트' 즉, 시민, 농민, 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민중'이었다. 상퀼로트란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란 뜻인데, 당시 민중들이 통바지를 입은 반면 귀족은 반바지인 퀼로트를 입고 긴 양말을 신은 데서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혁명으로 부상한 세력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 즉 부르주아지였다.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 부르주아 혁명이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절대왕정과 봉건 잔재는 스러지고 근대 시민사회가 막을 올렸다.
54. 도구에서 기계로 - 영국, 산업혁명 시작(18세기 후반)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797년/영국 군함 내항
프랑스와 신대륙 아메리카가 정치 사회적 변혁을 겪고 있는 동안 섬나라 영국에서는 또하나의 거대한 혁명의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산업혁명이란 한마디로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소규모 수공업적 생산반식에서 거대한 기계를 사용하는 대규모 공장제 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당시의 공업생산은 기술자가 자기 집에서 몇 가지 도구를 갖고 물건을 만들어내거나, 얼마 안되는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함께 일하는 공장제 수공업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방식은 급증하는 수요를 따를 수 없었으므로, 좀더 빨리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기울어졌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기계'이다. 최초의 기계는 1733년 존 케이가 만든 자동 베틀이다. 랭커셔의 직포공인 그는 지금까지 한 손에 북을 들고 세로로 맨 날실 사이를 일일이 통과하며 면포를 짜야 했던 것을, 북에다 줄을 달아 자동으로 왕복하게 했다. 그 결과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자 이번엔 실의 공급이 크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하그리브스이다. 역시 랭커셔 지방의 방적공인 그는 1764년 한꺼번에 8개의 추를 움직여 단번에 보다 많은 실을 뽑을 수 있는 방적기를 고안해냈다. 그는 이 다축 방적기에다 아내의 이름을 붙여 '제니 방적기'라고 명명했다. 제니 방적기는 아크라이트에 의해 더욱 개량되었는데, 그는 제니 방적기에 수력을 이용해서 움직이게 하는 수력방적기를 고안해냈다. 그는 본래 이발사였지만 기계에 흥미를 갖고 여러 발명품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수력방적기의 등장으로 면직물 공업이 크게발전하기 시작, 2,3백 명의 노동자가 모인 공장이 생겼다. 뒤를 이어 1779년에는 크롬프턴이 제니 방적기와 수력방저기의 장점을 살려 뮬 방적기를 만들었다. 1787년에는 목사 출신인 카트라이트가 말이 끄는 동력 직조기를 발명, 면직물 공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수력을 이용한 이런 기계들은 곧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물가에 공장을 세워야 했으므로 자연 교통이 불편하고, 물의 증감에 따라 기계조작이 불규칙 했을 뿐 아니라 마음대로 공장을 확장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은 제임스 와트이다. 기계기구상의 직공인 그는 1769년 증기기관을 발명, 기계의 새로운 동력으로 쓰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발명은방직공업뿐 아니라 제철, 석탄공업에 널리 사용되어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의 출현 덕택이었다. 한편 공장제 기계공업의 발달은 교통의 발달을 불러일으켰다. 원료와 생산품을 나르려면 교통수단과 도로, 철도, 운하, 다리 등의 건설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1814년 기관공 스티븐슨은 기관차를 발명했다. 그는 자신의 기관차를 거듭 개량한 끝에 1829년 90톤 이사의 열차를 끌고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시속 16-24km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그 기관차의 이름은 로켓 호였다. 이보다 먼저 미국 사람 풀턴은 1807년 기선을 발명, 허드슨 강을 시속 4노트로 달렸으며, 1819년에는 대서양을 29일 만에 횡단했다. 바야흐로 '증기기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기선은 영국에선 별반 환영받지 못했다. 폭이 넓고 긴 미국의 강에서는 기선이 매우 효과적인 교통수단이었지만, 영국의 강은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지금까지의 사회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자본을 갖고 공장을 세운 공장주, 즉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대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규모 기계생산에 밀려 파산한 가내수공업자나 농촌에서 하루 아침에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의 공급원이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임금을 최대한 낮추는 데 혈안이 되었으므로 노동자들의 생활상태는 극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임금을 낮추는 한 방편으로서 숙련된 남자 대신 여자와 어린이들이 대거 공장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숨막히는 비위생적인 공장에서 '말하는 기계'로서 혹사당하다가 과로와 병으로 쓰러져갔다. 1840년 리버풀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불과 15살이었다 하니 그 노동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곧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유럽 각국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이며 산업혁명을 치렀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해갔다.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주의 역시 산업혁명이 낳은 결과 중의 하나였다. 산업혁명기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고, 이것이 인간 본연의 행복한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지옥임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55.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가 되다 - 프랑스, 제1제정 시작(18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01년/신유박해로 천주교인 다수 체포, 황사영 백서사건, 1804년/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작, 평양, 대화재 발생, 1811년/홍경래의 봉기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지도한 카미유 데 물랭, 혁명시인 파브르 데글랑틴, 의사 출신으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던 마라, 웅변가 당통, 자코뱅 당의 영수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 등등,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서릿발 같은 혁명의 제물이 되어 암살당하거나 길로틴 아래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혁명의 와중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마침내는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이탈리아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육균사관학교에 지원, 포병장교가 되었다. 기병이나 보병장교는 귀족가문 출신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나학교 졸업성적은 58명 중 42번째로 썩 좋지 않았으나, 역사와 수학만큼은 뛰어났다. 1791년 22살이 된 그는 자코뱅 당에 가입,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정부의 포병 연대장이 되었으며, 2년 후인 1793년 툴롱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795년 세칭 테르미도르 반동, 즉 자코뱅 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2주일간 감옥생활을 했다. 풀려난 그는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재기의기회를 얻고, 이어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를 원정키로하고 군대를 파견했는데, 나폴레옹이 그중 이탈리아 방면의 제3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제1, 제2군은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패했으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제3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육박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굴복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넘겨주었다. 이제 프랑스의 적은 영국만 남은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번엔 이집트 원정을 강행했다. 이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악화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3만 5천의 군대와 3백 명의 과학자들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대동한 학자들은 이집트의 동식물, 풍속 등을 조사하는 한편, 귀중한 문화재와 고대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유명한 로제타 돌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무렵 프랑스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했으며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 당이 이끄는 총재정부는 지도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몰래 이집트에서 돌아와 동생 루시앙의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년 11월, 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한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다. 새 헌법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통과되었고, 나폴레옹은 수석 통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민중은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의 자존심을 드높여준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은 이같은 바람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또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1802년에는 숙적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평화를 맞은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종신통령에 임명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가 불과 10년 만에 다시 황제를 허락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이 낳은 개혁을 일정 정도 받아들여 '나폴레옹 법전'을 만드는 한편, 정복지에 혁명의 대의를 전파시켜 '정복자'아닌 '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힘을 썼다. 유럽 전체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으나, 유독 영국만이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과 영국과의 교역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러나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는 러시아는 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12년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곳은 유령의 도시처럼 텅비어 있었다. 게다가 화재로 식량은커녕 잠잘 곳도 제대로 얻지 못한 나폴레옹 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처참한 후퇴였다. 몰아치는 눈보라, 시시때때로 습격해오는 카자흐 병, 살을 에이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프랑스 군은 쓰러져갔다. 나폴레옹도 말을 버리고 걸어서 간신히 러시아 국경을 넘어섰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의 군대들이었다. 이들은 1814년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체포,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시켰다. 새 황제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허둥지둥 도망을 쳤고, 전 유럽은 다시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 지 꼭 백일 만의 일이었다. 백일 천하는 끝나고 나폴레옹은 이번엔 대성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영국군의 감시하에서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낸 그는 1820년 5월 마침내 그곳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