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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20 호
단기 4342. 7. 10 (음력 5.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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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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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콘텐츠진흥재단 주최 제2회 드라마극본 공모전
『사막의 별똥별 찾기』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드라마극본 공모에 도전하십시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삶의 활력과 감동을 줄 드라마와 작가를 찾습니다. 두 번째 별똥별의 주인이 되십시오!!
1. 작품공모 및 시상 1) 공모분야 8부작 이상 미니시리즈(순수 창작물) -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소재, 탄탄한 이야기 구조로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으로 지상파방송 및 케이블방송에 적합한 순수 창작 극본
2) 응모 대상 : 기성 및 신인작가 ① 타인명의에 응모는 불가하며, 필명을 쓸 경우 반드시 본명을 밝혀야 함. ② 집단창작의 경우 참여자 모두의 이름을 기재하거나 대표집필자만 기재할 경우 다른 참여자와 합의된 상황이어야 함 3) 시상 내역
시상부분 |
상금 |
8부작 이상 미니시리즈
(순수 창작물) |
대 상 2,000만원(1편) |
우수상 1,000만원(1편) |
2. 응모방법 1) 극본 제출 분량 - 8부작 이상 미니시리즈에 대한 시놉시스 및 1, 2회차 극본(각 70분 분량) 2) 제출 양식 ① 신청서 작성(첨부파일 참조) ② 작성규격 : A4용지, 한글파일, 글자크기 11, 글자체는 굴림체 ③ 주요 등장인물의 간단한 캐릭터 설명이 포함된 시놉시스 2부(A4용지 20매 내외) ④ 극본은 반드시 출력하여 묶음(제본) 형태로 2부 제출(디스켓형태로 접수 불가) ※ 시놉시스와 극본은 반드시 함께 철하여 2부 제출 ※ 시놉시스 미첨부 및 원고지 접수 불가(제출 양식 필히 준수) ※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음. 3) 접수 방법 : 우편접수(팩스, 이메일 및 방문접수는 받지 않음) 우)121-784,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559번지 마포트라팰리스 B동 1811호 방송콘텐츠진흥재단 드라마 극본 공모 담당자 앞 4) 접수 기간 - 접수 : 2009년 9월 10일 ~ 9월 30일까지(마감 당일 소인까지 유효함) - 심사 : 2009년 10월 ~ 11월 - 발표 : 2009년 12월(당선작은 개별 통보 후 재단 홈페이지에 공고)
3. 심사 1) 예비 심사 - 심사진행 후 20여 편 내외의 추천작 선정 - 심사위원 구성 : 드라마작가, 드라마PD, 방송사, 제작사 책임자 중심으로 10인 내외 선정(응모편수에 따라 조정) ※ 응모편수에 따라 2차 심사를 실시할 수 있음 2) 본선 심사 : 1차 심사에 통과된 작품 중 최종 당선작 선정 - 심사위원회 구성 : 드라마작가 및 PD, 방송사, 제작사 책임자 등으로 5내외 ※ 20여 편의 작품을 심사위원 개별 심사, 그 결과 5편을 놓고 토론회의를 통해 최종 당선작 결정 4. 유의사항 1) 출품제한 ① 타인의 작품을 표절하였거나 표절로 인정되는 작품 ② 타 공모전 등에서의 수상경력이 있는 작품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작품 ③ 다른 법인이나 개인에게 저작권이 매도되었거나 진행 중인 작품 ※ 위에 해당하는 작품은 출품에 제한이 있으며, 당선 후에도 위의 사항에 해당할 경우 당선을 취소할 수 있음. 2) 당선작 ① 당선작에 대한 저작재산권(2차 저작물 작성권 포함) 등 일체의 지적재산권은 5년간 (재)방송콘텐츠진흥재단에 양도, 귀속됨(시상금에는 저작권 양도대금 및 제세공과금이 포함되어 있음) ② 당선작을 제작할 시 추가 집필된 대본에 대해선 제작사 또는 방송사와 협의하여 회당 고료를 지급하며, 저작인격권(동일성유지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당선작가와 협의하여 개작 가능함. ③ 제작사 또는 방송사와 제작과 관련된 계약 체결 시 재단과 사전 협의하여야 함. ④ 표절로 판명 날 경우 당선 무효 처리 및 당선금을 환수되며, 표절로 인한 법 적 문제 발생 시 모든 책임은 작가에게 있음. ⑤ 당선작에 한해 추후 신청서에 기재한 사항에 대한 증빙자료 제출을 요함. ※ 응모작 중 적합한 작품이 없는 경우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을 수 있음. ※ 문의 : TEL)02)716-7401(사업팀) http://bcp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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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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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럴때에 당신의 인격이 향상된다.(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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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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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언어예절
사내 중심 사회 때 성하던 말들도 빛이 바랬다. 남아·장정·재사·수재·장자·대인 …들에, 거사·처사·생원·유사·학생·선생을 비롯해 왕조시대의 숱한 벼슬이름과 지칭·호칭들이 그렇다. 추려 쓸 만한 말은 없는가?
학생·선생은 쓰임새가 많이 번졌고, 사내·선비·머슴 가운데 머슴은 가끔 ‘공복·공무원’의 비유로 살아난다. 오래된 말 선비는 태학·국학·성균관·향교 따위에서 배워 글과 활에 통한 두뇌집단 또는 개인을 일컬으며 시대 따라 표상이 바뀐다. 선비를 500년이나 길렀던 조선 말에는 유학에 사무친 쪽으로 졸아들며 식민지를 맞았다.
통상, 글 읽은 사람 배운 사람이 선비란다면 요즘 이땅 거의 모든 사람이 선비 반열에 든다. 사내·계집 가를 것도 없다. 다만 많이 배우고 높은 학교에 다녀 넘치는 게 탈이다. 전인 교육을 지나 글로벌 인재를 들먹이는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죄 고위직이나 선량·군인·학자·전문가·경영인에 국제기관 종사자가 되기는 어렵다.
선비든 배운이든 궂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게 문제다.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지만 좋고 궂은 일 안 가리면 일거리는 많다. 떳떳이 생업에 애쓰면서 집안·나라 사랑에 더하여 널리 인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선비라면 더할나위 없겠다. 험한 일이라고 마냥 이민노동자, 기계·로봇이 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그렇다. 어차피 그렇게 다양한 선비들의 나라로 가게 돼 있는 것 같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먹고 잪다
고장말
‘잪다’는 표준어 ‘싶다’에 대응하는 말로, 주로 경상·전라 쪽 고장말이다. “너 이년 별당마님이 되고 잪은 모양이구나?”(<완장> 윤흥길) ‘싶다’는 ‘먹고 싶다/ 죽고 싶다’와 같이 바람을 나타내기도 하고, ‘비가 오는가 싶어’처럼 추측을 나타내기도 한다. ‘잪다’는 바람 뜻으로만 쓰이며, 추측은 ‘싶다’가 쓰인다. “외줄타기 목숨은 한 가닥인디 외나무다리 건너가다 뒤퉁그러져 그 잘난 뼉다구 박살나까 싶응게.”(<혼불> 최명희)
‘잪다’의 또다른 형태는 ‘젚다, 짚다’와 ‘잡다’다. “오늘은 눈도 설설 오고 우짠지 오매가 보고 젚다.”(<한국구비문학대계> 경남편) “밤마다 목매달아 죽고 짚은 맘이야 열두 고개를 더 넘지마는 차마 죽지 몬하고 ….”(<불의 제전> 김원일) ‘젚다’는 충청에서도 쓰이는데, 바람·추측 두루 쓰인다는 점이 다르다. “배가 고프구 이렇게 잘 자시덜 못할 텐디 젚운 생각이 있어서 ….”(<한국구비문학대계> 충남편)
‘젚다’와 ‘짚다’는 경상·전라에서 두루 쓰이고, ‘잡다’는 전라에서만 나타난다. “여봇시요, 내가 먹고 잡어서 먹소. 애기 젖 많이 난당께 먹제.”(위 책, 전남편) 또한 ‘잡다’는 ‘먹고 자와서, 먹고 자워서’와 같이 활용하기도 한다. “즈그 여자가 보고 자워서 어짤 중을 몰라.”(위 책, 전남편) “아 여그 오실 적으 머 작은아씨가 오시고 자와서 지 발로 걸어오셌능가요?”(<혼불> 최명희)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그녀
'그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일찍이 서양 문학을 접한 일본 문인들은 영어의 'she'를 옮기는 말로 '피녀(彼女)'란 단어를 만들어 낸다. '그 남자'에 해당하는 '피(彼)'에 '여자'를 뜻하는 '녀(女)'를 붙인 것이다. 일본에 유학하던 김동인은 우리말에도 영어 'she'에 해당하는 여성 대명사가 없음을 아쉬워하다 '彼女'를 본떠 '그녀'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1920년대 자신의 소설에서 '그녀'를 즐겨 사용하고, 다른 문인들도 따라 쓰게 된다. 50년대에는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이후 논란이 인다. '그녀'는 '우리말(그)+한자어(女)'로, '그'가 이렇게 결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남(그男)'을 가정해 보면 '그녀'가 얼마나 어설픈지 알 수 있다. '그'(남녀 모두 지칭) 또는 '그 여자', '소녀, 처녀, 아주머니, 여인, 부인, 여사, 노파'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말할 때 '그녀'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을 발음하면 '그년은'으로 들린다. '그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아무리 예쁜 그녀라 해도 글에서 '그녀'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어줍잖다, 어쭙잖다 / 어줍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일하는 모습이 어줍기만 한데, 쉽게 해낼 수 있다고 '어줍잖게' 큰소리치다가는 망신만 당한다.' 인터넷상에서나 많은 글에서 '어줍잖은, 어줍잖게'라는 단어를 종종 본다. 그러나 '어줍잖다'는 '어쭙잖다'의 잘못이다. 앞 문장의 '어줍잖게'도 '어쭙잖게'로 고쳐야 옳다. 우리말에서 앞말이 뜻하는 상태를 부정할 때 보조용언 '않다'를 넣어 '-지 않다'처럼 쓰는 경우가 많다. '간단치 않다, 심상치 않다' 등이 그 예다. 보조용언은 앞말과 붙여 써도 되고, 줄어든 형태도 인정하므로 '간단찮다, 심상찮다'처럼 쓸 수도 있다. 이런 규칙에 이끌려 '어쭙잖다'를 '어줍잖다'로 잘못 쓰는 것 같다.
그러나 '같잖다, 괜찮다, 대단찮다, 되잖다, 오죽잖다, 하찮다'처럼 줄어든 뒤 본래의 뜻과 달라진 경우는 별개의 단어가 된다. 대부분 앞말에 표기 변화가 없는데 '어줍잖다'는 '어쭙잖다'로 앞말의 표기까지 달라졌다. '어줍다'는 말이나 행동이 익숙지 않아 서투르고 어설프다는 뜻이고, '어쭙잖다'는 비웃음을 살 만큼 언행이 분수에 넘친다는 뜻이다.
날으는, 시들은, 찌들은, 녹슬은
흑백사진처럼 사라져 간 추억의 대중문화가 뜨고 있다. 1970~8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상품 중에 '원더우먼'을 빼놓을 수 없다. 시리즈물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공백이 생기자 '원더우먼이 바캉스를 떠납니다'라는 광고로 시청자를 달랠 정도였다. 당시 '날으는 원더우먼'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이 외화 시리즈의 인기는 대단했다. 덕분에(?) 우리의 머릿속엔 '날으는'이라는 말도 함께 각인됐지만 이는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날다'는 ㄹ불규칙 동사로, 어간의 끝소리 'ㄹ'이 '-ㄴ, -ㅂ-, -시-, -오' 앞에서는 탈락해 '나는, 납니다, 나시오, 나오'와 같이 활용된다. 따라서 '나는'이라고 해야 맞다. '날으는'이란 표현은 '운동장에서 놀으는 아이들'처럼 어색한데도 TV의 영향 탓인지 무심코 쓰는 이가 많다. 마찬가지로 '시들은, 찌들은, 녹슬은' 등도 '시든, 찌든, 녹슨'으로 써야 한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원더우먼이 제2의 린다 카터를 찾아 2006년 극장판으로 새롭게 선보인다고 한다. 그때는 '날으는' 원더우먼이 아니라 '나는' 원더우먼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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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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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경찰서에서 - 송경동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나는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이었다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톰앤톰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시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엄포 놓는다 함께 잡혔던 촛불시민은 가택수색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이메일을 압수수색하겠다고는 않는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하모니카나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1년치 통화기록으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나의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고비사막 모래무지에 새겨져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의 몇천미터는 채증해 와 대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야지, 이게 뭐냐고.
* 송경동 시인은 그동안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왔으며 특히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더불어 농성장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용산참사가 발생하자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꿀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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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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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 이경자
하늘이 닿은 청산 새털구름 피어나고
팔차선 고속도로 주차장 방불해도
고향의 부모님 찾는 그 효심이 애틋구려.
때때옷 차려 입고 선물 든 고사리 손
싸리문 밖 할미 품에 덥석 안긴 천륜인데
참사랑 따사론 정이 집안 가득 채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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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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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江石(제강석 : 강가의 돌에 적다) -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13)~1529(중종24)
濯足淸江臥白沙 心神潛寂入無何
맑은 강에 발 담그고 흰 모래에 누우니 심신은 고요히 잠겨들어 무아지경일세
天敎風浪長喧耳 不聞人間萬事多
귓가에는 오직 바람소리 물결소리 번잡한 인간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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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국문학/우리말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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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 금강(錦江), 그 영원한 어머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물밀어 들어오는 외세에 대항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마지막 덜미를 잡힌 곳이 바로 금강이 북서로 휘돌아 가는 공주의 우금치 고개. 다만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지는 노을에 외로울 뿐이다. 금강가에 살면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신동엽 시인도 곰의 전설과 함께 강물 소리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물굽이이듯 우리의 땅을 안아 돈다. 금강의 본 이름은 웅천하(熊川河)였다. 공주의 동북 5리 쯤에서 흐르며 그 근원은 전라도 장수(長水)의 물갈래 고개에서 갈라져 북으로 흘러 진안의 용담, 무주, 금산, 영동, 옥천, 회덕을 거쳐 공주에 이른다. 공주의 북쪽을 고리 모양으로 안고 흘러 정산, 부여에 이르매 여기서는 그 이름을 백마강(白馬江)이라 한다. 다시 석성, 은진, 임천, 한산, 서천을 지나 진포(鎭浦)로 가서 바다로 든다. 그러니까 전체 모습이 낚시 갈고리처럼 흐른다. 해서 고려조의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공주 금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의 모양처럼 마음이 갈고리져 있으니까 인재 등용을 삼가하라는 말씀. 아니 강이 뻐드렁니이면 어떻고 용의 모양이듯 뒤틀렸으면 어떤가. 별 수 없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역 감정을 말뚝 박은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러고서도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랐던가. 한심한 일이다. '금강 - 웅천 - 곰내'로 그 걸림을 생각하면 '곰'에서 그 이름들이 지어졌으며 공주의 공(公)도 곰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본디 곰(고마 구무(굼))은 말끝에 기역(ㄱ)이 붙는 말이었으니 자음접변을 따라 공이 되었을 것이요, 짐승으로서의 곰보다는 귀공(公)을 쓰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좋아서 공주로 고쳤을 것으로 보인다. 곰이 무슨 까닭으로 땅이름에 끼어 들었을까. 지금은 아득한 옛 일로 우리의 정서에서 멀어졌으나 본디 곰은 사람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졌던 경배의 대상이었던 까닭에서이리라.
곰에 대한 믿음은 역사 이전의 때로 거슬러 오른다. 믿음의 분포는, 한반도는 물론이요, 동북아시아, 시베리아를 비롯해서 북미에까지 걸쳐 있다. 동북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경우, 곰신앙은 대략 신석기 시대로 미루어 잡는다. 시베리아에서는 곰신앙을 보여 주는 곰의 상(熊像)들이 여기저기에서 출토된 일이 있다. 지금도 흑룡강 둘레의 아무르 강가에서는 나무로 만든 곰상을 숭배한다고 한다. 금강에 얽힌 곰전설은 말할 것 없고, 그 뿌리라고 할 삼국유사 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곰계집(熊女)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가 곰신앙의 한 거리로 보아 좋을 것이다. 공주의 웅진동에서 나온 돌곰은 무녕왕릉 주위에서 길목의 밭주인 이씨가 처음으로 보아 갈무리 하던 것을 1972년 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 돌곰이 나온 곳은 왕릉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부근에 백제의 옛 무덤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곰상은 백제 때 만들어 제사 드리는 숭배의 상징으로 썼을 것이다. 마치 절에서 불상을 놓고 예배하듯이 말이다. 곰나루에 가면 지금도 솔숲에는 곰을 제사하며 모시던 웅진단(웅진사熊津祠) 터가 있다. 공주군지를 따르자면 여기서 웅진의 물신 제사를 제사하였으니 향교에서 제사 비용으로 매년 베 54자를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사당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 지금은 다시 지어져 외로운 영혼을 달래고 있다.
곰을 '고마'라고도 한다. 한데 신증유합을 보면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해야 할 보람을 풀이하였으니 곰신앙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하나의 흐름을 이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강은 곧 고마강 또는 곰강이랄 수가 있다. 하면 고마(곰)의 소리상징은 무엇인가. 뒤의 '어머니와 곰신앙'에서 살펴 보았듯이 고마(곰)는 곰신앙을 드러내며 마침내 소리의 바뀜을 따라서 어머니가 되었다.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곰의 상징은 다름 아닌 땅과 물 - 지모신으로 떠 오른다. 결국 곰(고마)의 동물상징이 곰에서 거북(검水神)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신과 고마(곰 검)
삶의 원초적인 가능성은 물에서 비롯된다. 물이 없는 곳에 생명 현상은 없다. 농업생산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던 때는 실로 강물이나 샘이란 신의 축복이요, 그런 물신이나 땅신은 우러러서 마땅하다. 마침내 물의 신은 임금이 받들어 모시는가 하면 지방의 벼슬하는 이들도 농사 때에 비를 오게 하는 등의 제사를 모셨다. 해서 임금은 용이 그려진 옷이나 그릇을 쓰는데 여기 용은 바로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용과 함께 북방 또는 물을 다스리는 신을 가리키는 짐승이 거북이다. '거북'이란 말은 '거미(거무)'에서 왔다. 이는 이미 앞서 캐어 본 살핌을 따르기로 한다(박지홍(1952) 구지가연구). 경남 양산지방의 왕거미 노래에서 '거미'가 그러하고 땅이름에서도 그렇다.왕거미는 거북을 뜻하며 곰(고마)의 또 다른 변이형이다. 한반도의 땅이름 가운데 곰(고마)계와 검(거미龜)계의 이름이 널리 분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들이 물신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곰(고마)'의 이야기) ㉮. 암콤은 고기잡는 어부를 데려 가서 굴 속에서 함께 살았다. 새끼곰 두마리를 낳고서 별 일 없겠지 하고는 바위문을 열어 놓고 사냥을 갔다 와 보니 어부는 도망치고 새끼들만 있었다. 어미곰은 새끼를 데리고 물 속에 빠져 죽었다는 것. 해서 사람들은 이 나루를 곰나루(고마나루)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로 까닭없는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어 강가에 제단을 모셔 곰을 제사하였다(충남 공주) ㉯. 섬진강의 동방천에 곰소라는 곳에 물 위로 바위가 솟아 징검다리마냥 놓여 있어 곰의 다리로 불리워 진다(전남 구례). ㉰.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사람의 부녀자를 빼앗은 죄 막심하다. 너 만일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널 잡아다가 구워 먹겠다(수로부인(水路夫人)). ㉱. 왕핑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산으로 겨우 피했다. 이어 암콤에게 붙잡혀 굴속에서 함께 살게 되어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암콤이 마음 놓고 나간 사이에 왕핑은 배를 타고 굴을 벗어나게 되었으나 곰은 필사적으로 따라 왔다. 왕핑은 바다의 신에게 기도를 드려 무사히 돌아왔으며 그 뒤로 물신의 사당을 지어 경배하였다(중국 후민 마을).
중국의 후민 마을의 후민도 '고마(고모)'에서 비롯하였음을 고려하면 보기로 들은 땅이름은 모두가 곰과 걸림을 둔 이름이다(koma(komo) - homa(homo) - oma(omo)). 생각해 보면 곰신앙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농경생활로 접어 드는 사회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소리는 비슷한 고마(곰) - 거미(검)이지만 동물상징이 벌써 거북으로 혹은 용으로 바뀐 것이다. 물이나 곰이 여성으로 드러남은 선사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낯 익은 모습이다. 만씨족들은 곰을 '숲의 여인 산의 여인'으로, 돌칸족들은 곰이 본디 여성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에게서도 널리 퍼져 있다. 물이 생명의 어머니임은 여성이 갖는 속성과 다를 바가 없다. 바슐라르를 따르자면 물은 재생이며 영원한 사랑이요, 죽음의 상징이란 것. 하긴 물과 불(태양)이 어울려 너울대는 삶의 말미암음을 빚지 않는가. 앞서 왕건 태조의 풀이처럼 금강이 갈고리처럼 생겨서 사람들의 마음이 잘못 되었다고 함은 되돌아 볼 아무런 그 무엇도 없다. 오히려 어미닭이 새끼를 품에 안듯 우리의 뭇 가람들은 어머니이듯 우리를 감싸 돌아 흐른다. 그 푸르른 몸짓으로, 목소리로. 하여 금강은 곰신앙을 드러낸 한국인의 고향이요, 정서적인 샘줄기인 셈이다.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공주에서 피란을 하였다. 이 때 지은 글을 소개하고 마무리를 하면 어떨까.
일찍이 남쪽에 공주가 있음을 들었노라 신선의 지경이 예나 지금도 영원히 아름다운 것을 여기 당도하니 푸근한 마음이어라 뭇 사람들이 온갖 시름을 놓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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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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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그 정도 사람은 되느니라
조선조 중엽에 구봉 송익필이라는 분이 있었다. 인명사전에는 서출이라 하고 본관은 여산, 사련이라고 나와 있다. 사련이라는 이는 1496년 (연산군 2년)에서 1675년(선조 8년)까지 살았는데, 이분 역시 안돈후의 서녀 감정의 소생이라고 되어 있다. 미천한 출신으로 간신 심정에게 아부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안처겸, 안당, 권전 등이 남곤, 심정 등의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하여, 신사무옥을 일으켜서 안씨 일문 등에 화를 입히고, 그 공으로 당상에까지 올라 30여 년간 거드럭거리다가 죽고, 선조 19년에 이르러 사건 전모가 밝혀지며 관직을 삭탈 당했는데 그런 이의 서자, 그것도 계집종 막덕의 몸에서 났으니, 그야말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체가 낮아 벼슬길은 단념했으나, 율곡, 우계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논하여 통달했고, 예학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미 당상으로 대감 지위에 오른 율곡 선생과도 대등하게 친구로 사귀었는데, 여기 문제가 있다. 서로 자네니 내니 하고 사귀는 것을 `벗을 한다`고 하여 약간 까다로왔다. 지벌이 상적하고 학식이 비슷하며, 연령 또한 과히 차이나지 않아야 허교한다고 하여 서로 말을 놓아 하는데, 십년이장 즉협사지 한다고 하여 9년까지는 허교하여도 그 이상 차이날 때는 노형으로 대하는 것이 도리였다. 또 노인 자체라고 하여 그 사람 아버지가 자기 할아버지와 친구간이면, 서로 거북한 사이로 쳐서 경대하며 지내고, 나이차는 얼마 안 나더라도 장형하고 트고 지내는 분에게는 까불지 못하는데, 이것은 장형부모라 하여, 맞형도 형님 중에서도 각별히 여기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율곡의 계씨가 형님 처신에 불평이다.
“그래 형님도? 무위무관의 그것도 남의 집 종의 새끼-종 신분일 때는 아기니 아들이니 하는 말을 안 썼다-하고 너나들이를 하신단 말씀입니까? 형님 안 계실 때 찾아오면, 뜰에도 못오르게 하고 혼내서 쫓아 보내겠습니다.” “그래? 며칠 뒤 그를 오라고 해놓고 내 피해 줄테니, 네 마음대로 해 보려무나.”
약조된 날, 계씨는 정자관을 높다랗게 쓰고 큰사랑 아랫목 보료 위에 점잔을 빼고 앉았다. 속으로는 “이놈이 오면, 그냥...” 하고 벼르고 앉았는 것이다. 대문께서 자기집 하인이 외운다.
“구봉 송선생 듭시요.”
그 소리를 듣자 율곡의 계씨는 자신도 모르게 관을 벗어놓고 일변 갓을 떼어서 쓰면서 대청으로 나와 버선발로 대뜰에 내려섰다. 관은 평교간에는 같이 쓰지만, 점잖은 어른을 뵐 적에는 갓으로 바꿔 써서 정장을 하는 것이 당시 예절이었다.
“선생님! 어서 오십쇼.” “어! 그래. 중씨는 아니 계신가?” “잠깐 출타했습니다.” “온! 사람을 만나자 해 놓고 비우다니?”
스스럼없이 아랫목 보료에 가 털썩 앉는데, 계씨는 자신도 모르게 날아갈 듯이 절을 한 번 하고 한 무릎을 세우고 모셔 앉았다. 무슨 분부라도 떨어지면 금방 일어나 거행할 수 있는 자세다. 한참 만에야 구봉이 입을 열었다.
“요새 쌀값은 얼마나 하누? 나무는 짐에 어떻게 하고...” “쌀은 섬에 암만냥이고, 나무는 드리없으나, 좋은 건 짐에 암만한다고 들었습니다.”
또 한동안 덤덤히 앉았다가 자리를 뜨며 이른다.
“중씨 들어오시거든, 다녀갔다고 여쭙게.” “예! 그럼 안녕히 행차하십쇼.” 대문간까지 나아가 배송하고 돌쳐서며 “아차차! 이런 제에기...”
갓을 벗어 팽개치고 관은 집어 쓸 생각도 않고, 후우푸우 화가 나서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분을 삭였다. 저녁상을 물리고 율곡이 물었다.
“너 오늘 구봉 혼 좀 내줬니?” “혼내 주는게 뭡니까? 얼떨결에 뜰에 내려가 모셔 올리고 절을 하고....” “아암, 그 양반이야 네가 그렇게 대접할 만한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지. 그래 무얼 묻데?” “쌀값은 어떻고 나무금은 얼마하느냐고 묻습디다.” “호! 너는 그런 얘기나 할 상대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
구봉은 문자에도 능하여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었다. 나라에서는 구봉이 죽은 뒤에 지평을 증직하였고 시호를 문경이라 내리었다. 이렇게 옮기면서 한숨이 절로 난다. 문벌 지벌이 무엇이기에 이런 인재를 초야에 썩혀 두더란 말인가? 전하는 말에는, 구봉이 자신의 아들에게 율곡의 서녀를 맞았으면 하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혼잣말 처럼 뇌까렸다는 것이다.
“율곡까지 그렇게 소견이 좁을 줄은 몰랐네.”
이런 적서 구분 때문에, 앞서 구봉의 아버지도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하여 소인 소리를 들어야 했고, 저 유명한 유자광도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라더니, 그가 가는 곳마다 풍파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살육하지 않았든가? 중국 사기를 보더라도, 명사 아무개는 아버지 죽은 뒤 개가하는 어머니를 따라가 의부의 성을 따랐다가, 성년한 뒤에 자기 성을 되찾았다는 기사가 곧잘 나오고, 미국의 명사 중에도 우리나라 같으면 낯을 들고 나오지 못할 가문의 출신이 있으며, 고아출신의 금메달리스트 기사를 읽고는 가슴이 다 뭉클하였다. 사람이란 활활 부담감 없이 피어나야 하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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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싱/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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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9장 자화상 입산 50년들 돌아보며
글방의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아, 무엇을 보고 있니? 엉큼한 눈으로..)라고 그가 글방의 마당에서, 짚더미 옆에서,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또 강 언덕에서, 알지 못할 상녕에 잠겨 걷고 있을 때, 생각하고 있을 때, 동무들은 뒤따르고 그를 놀려댔다. 어떤 때에는 옆구리를 찌르고 어떤 때에는 돌멩이질을 했다. 그러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소년이었던 그는 그 놀림이 귀찮고 굴욕스럽기는 했으나 그들과 어울려 싸운다거나 대항하여 이기고 싶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런 동무들로부터 떨어져 언제나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고 싶었다. 부모들의 권유로 그는 진주 남강가의 봉연제라는 한문서숙에서(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이라는 어음만이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눈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기를 즐겨하였다. 그때마다 스승의 진 담뱃대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이놈아,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으니 성적이 떨어지지)이런 꾸중이 들려왔다. 그는 담뱃대가 머리에 닿는 아픔보다도 (정신을 팔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정신을 팔 수도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생각은 언제나 배우는 그것에 보다도 그 주변에 그 둘레에 더 많이 머물러 있었고, 그랬으므로 성적은 더욱더 떨어져갔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결과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난 담뱃대와 퀴퀴한 냄새가 들아차 있는 서숙의 분위기보다는 쉬는 시간이면 나와 노는 마당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것들을 사랑하였다. 햇빛이 내려 비추면 백색으로 반짝이는 마당, 그 둘레에 심여져 있는 사철나무의 흔들리는 잎사귀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일체를 흔들고 가는 바람을. 그는 마당가의 볏짚에 작은 몸들 기대고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지붕위로 흘러내리는 햇빛도 보고 하늘도 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어머니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 모양으로, 물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만 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사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한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의 모든 장점을 우리가 오늘 들추어 추겨세워준다고 할지라도 그 무렵의 그는 분영히 훌륭한 소년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으로서의 자질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스승은 종종 공부는 못해도 순량한 놈이라고 했고 동무들은 부엉이 부엉이 하고 놀리면서도 좋은 놈이라고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조용한 그늘이 아들의 얼굴에 흐르는 것을 보고 그는 틀림없이 장차 현자가 될 것이라고 내심으로 기뻐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걸음걸이에서, 말씨에서, 행동거지에서 예절 바르며 친절한 성미를 찾아내고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사랑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부모들의 사랑은 그 누구나 맛보고 자라나는 성질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늘 벗어나려고 반항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이 꽉 얽매어 있었던 그 때의 아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켤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가는 당장 불효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는 몹시도 기민했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켤코 반항하지 않았다. 불편한 대로 부모들의 사랑과 기대를 등에 지고 매일 매일 아무런 재미도 없는 몽련제로 가는 것이었다. 하늘천 따지를 읽기 위해서. 그날도 그렇게 책을 읽고 쉬는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었다. 볏집에 기대어 구름을 보고 있었다. 이백의 초산진산계 백운백운 처처장수군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17세라는 성숙기에 이르렀던 그에게 그 때 임이라는 영상은 이미 깃들어 있었고, 임이라는 영상의 깃들었다면 구름에서 그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무엇인가를 열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 친구가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이)하고 너무나도 큰 소리로 그의 고막을 울리면서 그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쓰러졌고 일어섰을 때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노가 전신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대들었다. 몃번이고 넘어졌다가 일어섰다. 나중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돌을, 부지깽이를, 삽자루를 집어던졌다. 싸움이 끝났을 때는 장독대의 항아리를 부서지고 창문이 깨어져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생은 노발대발했다. (이놈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설사 서우가 잘못했다선지어라도 깨우쳐 이해시켜 쥐야지 그렇게 원수처럼 대드는 법이 어디 있는냐. 우리 서숙에서는 너 같은 독종은 필요없으니 나가러가) 그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로 책보를 싸들고 나왔다. 걸음이 덜덜 떨렸다. 어버지와 어머니가 몇번이고 그에게 (그것은 선생의 잠시로 화풀이니 다시 나가)고 사정했으니 완강히 거절하였다. 어버지는 할 수 없이 그렇다면 하고 그를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소년기에는 엉뚱한 변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민한 소년들에게 일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나에게도 그 변모가 왔었다. 보통학교 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어리석은 아이의 틀에서 벗어나 무엇에나 앞장서려고 했고 그 무엇에나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그렇게 서너 달을 하고 나니 나의 성적은 빼어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학년에는 1,2등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언제나 우쭐거리는 법이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어수룩한 아이들을 놀려 먹기 시작하였고 겨울이면 그런 애들을 찾아가 눈덩이를 옷속에 집어넣고 도망갔다.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왔고 그 대열은 그리하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달음질 경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남강에는 뱀들이 득실거렸다. 그래서 아이들은 헤엄질이나 고기잡이를 그들끼리 가지 못하고 언제나 나를 앞장 세웠다. 나는 뱀들을 숭숭 붙잡아 뚝 너머로 집어던졌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와아 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물발울이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때 누구나 없이 일인 교사의 말씨와 동작을 사랑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담배만 피우고 앉아 맹자왈을 가르치는 서숙의 늙은 선생보다 그일인 교사에게서는 신선하고 향긋한 무어라고 했으면 좋을까 사람을 달게 끌어들이는 일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나 새겨들었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모방하려고 애썼다. 선생은 나를 좋아했었던 듯하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그것을 대답해 내지 못하면, (이순성,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하고 그의 목을 나에게로 향하여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일어나, (겨울에 독이 깨어지는 것은 독에 물이 얼어 그 부피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이 푸른 것은 나뭇잎 속에 있는 엽록소가 푸르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생은 (좋아 좋아)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모든 급우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면거 한편으로는 무심한 듯이 눈길을 창밖으로 돌리었다. 창밖은 언제나 햇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들이 무한한 꿈처럼 운동장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고 우리들의 꿈은 무한하게 그 밖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붙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창창하게 타고 있을 때, 우리들에게는 그 꿈의 실체인 사실이라는 것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때 나에게도 그 꿈의 형체일 수 있는 사랑이하는 것이 찾아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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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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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1장 아름다운 세상
새사람
새사람을 신중히 들여라. 새 며느리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쓰러지고 새 사원이 잘못 들어오면 회사가 쓰러진다. 새사람을 잘 들여야 한다. 가정에서는 새 며느리를 잘 들여야하고 직장에서는 새 사원을 잘들여야 한다. 가정의 운명도 직장의 운명도 어떤 새사람이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크게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새사람이 잘 들어오면 그들의 운명은 큰 탈없이 순조롭게 풀려나가지만 새사람이 잘못 들어오면 그 때부터 그들의 운명은 심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 잘못 들어오는게 뭐 그리 대수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리듯 한 사람이 잘못 들어오면 그 고통은 구성원 전체에게로 미친다. 특히나 혈연 중심의 가족 공동체는 그 관계가 유별난 만큼 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고통으로 돌아간다.
새사람 들이는 것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듯이 경솔하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결정은 순간이지만 그 고통은 너무나 길고 지루하다. 사람이란 보기 싫으면 갖다 버릴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잘못 들여놓으면 죽도록 보기 싫어도 집안에다 두고 봐야 하는 고통이 따르고, 날마다 쫒아내고 싶어도 직장에 두고 부려 먹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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