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12. 울림과 진실 (2/3)
12-4. 어이구의 변모
몹시 아플 때, 힘이 들거나 놀라고 원통할 때, 또는 기가 막힐 때 내는 감탄사로서 '아이고(아이구/아이쿠)'가 있다. 부모가 돌아가셔서 상을 당했을 때 호곡하는 소리이기도 한데 지방에 따라서는 어이구(어이)라고 하는 수도 있다. 필자는 슬픔과 같은 감정이나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 감탄사를 불교적 배경을 가지고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이미 천 년이 넘었다. 신라 법흥왕(514-539) 때부터 호국불교의 국교로서 14세기말까지 이어 왔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 왔다. 지배층의 문화는 피지배층의 문화 형성에 동화주(同化主)로서 깊은 영향을 준다고 생자할 때, 블교적인 예식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장례를 모실 적에 승려들이 흔히 (금강반야경) 을 읽음으로써 죽은 자의 명복을 빈다. 49제를 올릴 때도 (금강반야경),을 독송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중간중간에 '하이고, 하이고'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 매우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된다. 불경을 읽다 보면 어느 불경에서나 이 '하이고(何以故)' 란 말이 자주 나옴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금강반야경), 만 살펴보아도 전편에 걸쳐 약 30여회나 나타난다. 하이고(何以故)는 주로 세존(世尊)이나 수보리와 같은 고덕한 선사와 신도들간의 질의와응답, 또는 스스로의 감탄을 드러내는 구실을한다.
(금강경언해,, 를 보면 '하이고(何以故)' 를 '엇데어뇨' 로 뒤치고 있으니, 다시 말하자면 '어찌 합니까, 어찌된 까닭입니까`의 속뜻을 드러내어 입버릇처럼 상이고 있는 것이다. '엇데어뇨'의 '-어뇨'는 '하다(허다)'의 히웅이 떨어져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머리에서 히뭏(i)이 떨어지는 예는 어떠한가. 그런 가능성을 방언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오얄머니 (외할머니의 층남 논산 방언), 엉가(형의 경남 하동 방언), 오마씨 (할머니의 경남 진주. 사천 방언), 언가(형의 경남 김해 방언)' 등익 예가 있다. 결국 '하이고>아이고~아이구~아이쿠~어이쿠'와 같이 그 모양이 바뀌었다고 하겠다. '아이쿠(어이쿠)'의 '-쿠`는 '-고(故)'의 소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니 지금도 중국어에서 '-고(故)` 는 '-쿠' 로 읽힌다. '아이고'는 다시 음절이 축약되는 경우와 음절이 첨가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니, '아이 (아이고의 줄임)'와 '아이고나' 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아이' 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조를 때에 쓰이는 감탄사요, '아이고나'는 어린 아이들의 재롱이나 착한 일을 보고 기특해서 내는 감탄사이다.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감탄의 어미 '-고나了-구나' 도 '아이고[何以故]' 에서 비롯하여 어말어미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간혹 '아이고머니' 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아이고보다 더 간절하게 부르짖는 감탄의 뜻을 드러낸다. 이상의 풀이처럼 어찌된 까닭입니까'의 '아이고[何以故]' 가 감탄사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예는 많지는 많으나 확인 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에라 만수'에서의 '에라'는 실망이나 금지의 뜻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기원적으로 '에라`는 지배자(임금)' 의 뜻으로 쓰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감탄사로서 쓰이게 되었다. (주서 (周書))의 이역전 백제조(異域傳百濟條)에 '왕족의 성은 부여의 계통이었는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으며 백성들은 건길지라 하였다 '하(夏)에서는 왕으로 통용된다(王姓夫餘氏號於羅理民呼爲鎖놈룽夏言竝王也)'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어라하'는 왕을 뜻하는 말이었다 민요 성주풀이에서 '에라 만수'하는데 이 뜻은 '임금님 만수무강하소서'의 의미를 갖는다. 방언에서 그 변이형을 살펴 보면 '에라, 어라, 얼래 (월래)' 등이 있고 일본어에서도 '에라이' 란 말이 있으니 '하이고>아이고'의 개연성을 더해 준다고 하겠다(도수회, <백제어 지명 연구>, 1977). 이처럼 하나의 문화적인 관습이 관습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언어에 투영되면 언어변화의 질서를 따라 음운 및 형태적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으니까.
12-5. 쑬개와 쓸림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을바르게 판단을 못하고 이성을 잃은 채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비유해 '쓸개 빠진 놈'이라고 한다. 원래 쓸개는 담낭이라고도 이르는바, 간장에서 나오는 담즙을 일시적이나마 담아 두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담에서 나오는 즙은, 간에서 만들어져 주머니 같은 담낭에 갈무리되었다가 수담관을 거쳐서 십이지장으로 흐르는 일종의 소화액아다. 지방 효소의 소화를 도움으로써 음식물에서 얻어 낼 것은 얻어 내고 가릴 것은 가려낸다. 말 그대로 마당의 쓰레기를 쏠어 내는 빗자루와 같다고나 할수 있을까. 담낭의 기능을 잘 풀이한 말이 '쓸개'다. 동사어간'쓸-' 에 접미사 -개'가 더하여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동작을 나타내는 '쓸개'는 중세어에서는 쓸다((석보) 6-6)' 로도 드러난다. 중심이 되는 뜻으로는 '비로 쓰레기를 쓸다[掃]'가 있고, 주변적인 듯으로는 '제 일만 깨끗이 해 치우다, 돌림병 따위가 널리 퍼지다, 일정한 처소에 있는 물건을 모두 그러모아서 독차지하다' 등이 있다. 흑은 낟알의 껍질을 벗기어 깨끗하게 하는 동작도 쏠어 낸다고 한다. 쓰레기가 없어야 할 장소에 자꾸만 쓰레기가 쌓인다든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큰 불펀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정화(淨化)란 말을 하거니와 그 핵심은 '쓸어 깨끗하게 함'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기능을 독자들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로 풀이한 바 있다. 본래 카타르시스란 설사를 촉진시키기 위한 약제로 사용하여 왔다.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란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배가 아픈 사람에게 설사약을 먹이어서 배설을 지킴으로써 소화기능의 안정을 꾀하는 일과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음식을 먹음에 불필요한 독소들이 더러 끼여 들어온다. 이를테면 중금속처럼 받아들이면 배출할 수도 없는 것이 섞여 들어오기도 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어쨌거나 불필요한 물질(쓰레기)을 '쓸개'에서, '간'에서 쓸어 내고 가려 냄으로써만 생활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살아 가게 되는 것이다. 신진대사라고 할까? 하여간 벼의 껍질을 벗겨 내고 알쌀을 만들어 내듯이 쓸개는 우리 몸이소화해 낼 수 있도록 깍아 내고 삭여서 반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원적으로 보아 '쓸다' 는 중세어 '슬다((능엄), ((원각)) 에서 비롯한 것으로, 그 표기적인 변이형으로서 '쓸다(증두해), 쓸다(왜해))' 가 있는데, 이들은 좀더 후대의 표기형태이다. '-슬다'는 원래 '사라지다. 스러지다'의 뜻으로 쓰이었다. '쓸다'는 있던 형체가 없어져 버리거나 블필요한 것을 없애 버림을 뜻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쓸개'가 소화작용과 관계가 있음을 생각할 때 음식물이 소화되어 곧 사그라져서 몸의 일부가 되어 가는 작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하여 크게 잘못됨은 없을 듯하다. 원천적으로 소화는 느린 산화, 다시 말하자면 연소작용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으니 본래의 모습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슬다'와 방점표기는 다르지만 같은 꼴에 '슬다(슬퍼하다 ; ((용가), (두해))' 가 있음도 어느 정도의 상관성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바라고 믿던 것이 무너져 내 리거나, 의지하여 따르며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돌아갔을 때 우리는 '슬프다'란 표현을 하는데, 결국 사라져 감'의 뜻이 그 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슬다'는 '실다사르다[燒]'의 교체형으로 보인다. '쏠다'를 중심으로하는 낱말겨레에는 '쏠개, 쏠개머리 (소의 쏠개에 붙은 고기), 쏠개진 (담즙), 쓸리다, 쏠어들이다, 쏠어 버리다, 쏠음질(물건을 줄로 쓰는 짓), 쓿다(곡식의 껍질을 벗겨 깨끗하게 하다)'와 같은 꼴 들이 있다. 대표적인 민속 경기인 씨름의 열기가 대단한데, '씨름'도 '쏠다'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의 문헌자료인 ((박통사언해),증간본에 '시름'이 씨 름'의 뜻으로 실린 예가 보인다. 짐작하건대 '시름'은 '슬다'가 모음의 빠짐에 따라 '실다'가 되어, '실-十으十-ㅁ'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말로 보인다 이후 'ㅅ>ㅆ' 의 변화에 따라 오늘날의 씨름'이 되 었으리라. 방언에서는 지금도 '쓸개'를 '씰개 (경기, 강원, 충남 경남 경북, 제주 일원)' 혹은 '씨레(경기, 강원 층북, 전북, 전남, 경북, 경남의 일부 지역)'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스(쓰, 즈,츠,쯔)>시 (씨,지, 치,찌)'의 과정을 층분히 짐작할 수 았다. 이른바 모음 '으(-)' 의 전설음화라고 부르는데, 이 밖에도 우리말의 발전과정에서 많은 보기를 찾을 수있다.
그런즉 '씨름'은 '쓸다'에서 비롯한 형태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의 맞수가 붙어 힘을 겨루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면 이기는 것이 씨름이다. 힘과 꾀의 대결에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공격하여 이기는 자연의 섭리를 승화시킨 경기라고 하겠다. 언제나 힘이 약한 편은 강한 편의 지매를 받게 되어 있으니 다시 어떤 설명이 필요없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쓸개의 쓸어 내는 힘을 길러 주고 북돋울 일이다. 지나친 허욕과 낭비나 향락은 건강에 그리 도울이 되지 않을 것이니 삼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12-6 삶과 사름
보통 때에는 서로 잘 모르지만 노름을 함께 해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여 '사람은 잡기를 해 보아야 그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특수한 한계상황에 부딪뜨려 보면 사람의 마음을 바로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목숨이 있는 사물이 그 목숨을 이어 나아가려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살다'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신의 생명과 종족보존에 있다고 한다. 생명현상은 어떤 면에서 에너지의 이행과정으로 볼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에너지 없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바라는 바 번영을 약속할 길이 없다. 에너지는 태양에서 비롯되는바, 태양은 예로부터 불의 상징으로, 삶의 바탕인 대지를 생성시키는 '화생토(火生土)' 의 본거지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대지 (땅)는 용암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부딪혀 쪼개지고 다시 갈라진 부드러운 흙, 모래와, 식어서 굳은 바위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화산작용을 따라 용암이 끓어오르다가 물이 흐르듯 엄청난 흐름을 이루고, 거기서 피어 오르는 구름과 같은 수증기가 공기중에 방울져 엄청난 비가 되어 그 위에 내 림으로써 삶의 고향 곧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땅에 윤기를 더하고 끝없는 생명을 너울거리게 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불이 타오르는 화산을 살아 있는 화산(활화산 ; 活火山)이라고 하거니와, 언어적인 상상력의 밑바탕은 연소작용 곧 불을 사르는 현상이라고 본다. 불사름의 현상을 유추하여 살아 있는 생명현상도 그렇게 설명한 것 이다.
꽃이나 얼굴이나 형편이 '핀다'고 표현하는 것도 불이 타올라 환해지는 현상을 유추한 데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라는 말은 원초적으로 보아 불이 타고 에너지가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옮아간다는 뜻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젊음을 불사른다' 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살다((원각), 상 2-1 :48)' 가 확인되는데 '살아가다'의 뜻을 드러내는 '살다(生, ((석보) 10-3)' 와 같은 낱말겨레에 넣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사람`도 '살다/살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표기적 인 변 이형태로 보이는 말은 '사 람 (석보, 6-5), 싸람 ((석보, 19-5), 사름((정속), l)'등이 있는데, '사람 `이 그 중심을 이룬다_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인데, 어찌 사람만이 살아가는 존재이겠는가. 인간은 만물 중에 가장 보배로운 존재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어찌 보면 이는 철저한 인간중심의 이기주의적 사물인식이며 독선적인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만이 냉 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데에서 그러한 인식의 출발점을 찾아 본다. 거친 음식을 먹고 거친 입성을 걸치더라도 자유로이 살것인가, 아니면 정신적 고통과 억압을 받을지라도 물질적,풍요를 누리며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냉각하는 갈대' 라고 하여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표현한 것일까. 일면 정신적으로, 일면 물질적으로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과제라고 하겠다.
사람의 속성을 잘 드러낸 몇 가지 전래되는 속언 또는 성구를 찾아 보면 들쭉날쭉하다. '사람 살 곳은 골골이 있다'는 착한 사람을 알아주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음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 모두는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짐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데에 삶의 목적을 두었음을, '사람은 키 큰 덕을 입어도 나무는 키 큰 덕을 못 입는다' 는 큰 인물이 줌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자주 변함을 일러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이라 하며, 환경의 중요성을 일컬어서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시골로 보내라'고도 한다. 고등어는 고등어 냄새가 있고 꽁치는 꽁치대로의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 참다운 마음과 행실에서 비롯하는 인격의 향기. 그것은 사람의 내음으로서 가장 찬사를 받아 마땅한 냄새일 것이다.
어원으로 보아 '살다' 는 연소현상을 뜻한다고 하였거니와 '사르다'에서 음절 사이의 모음이 떨어지고 리을(ㄹ)이 앞음절 받침으로 붙어 '살-' 이 된 것이라 하겠다. 중세어에서 '살다[生]' 는 '사로다(<동문> 상 63)' 인데, 이 말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에 드는 말로는 'ㅅ다((석보) 11-43), ㅅ다(生 ; (계초) 26), 삶다(<능엄> 1-81), 살(ㅎ)(<능엄> 8-7)' 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땅은 화산작용에 따른 과정에서 만들어겼다고 하였는바, '살/할(흙)'은 같은 말이었다고 본다. 시옷(ㅅ) ~히읗(ㅎ)의 넘나듦은 혼히 볼 수 있는 예이기 패문이다. 의미상으로 보아도 지구의 살은 흙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살~살'은 표기적인 변이형태로, 점차 다른 뜻으로 분화되어 쓰이기는 했지만 이들 모두는 '불사름'이라는 같은 속성을 드러내는 말들이다. 한마디로 '살' 은 연소현상 곧 음식을 먹고 마신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이요 '사르다/살다'는 그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 죽었던 블이 다시 타오르는 것도 '살아난다'고 하며 시들어 메마르던 풀이 단비를 머금고 소생하는 것도 '살아난다' 고 한다. 반대로 꺼져 가는 것을 '사라진다'고 일컫는다. 물론 보이던 모습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음도 '사라진다'고 한다. 이러한 뜻의 전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이나 글 등이 효과적인 인상을 줄 때에도 그 글이나 그림이 살아 있다고 말하게 된다.
'살다'에 연상되는 속담이나 성구들이 있으니, '산 닭 주고 죽은 닭 바꾸기도 어렵다(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에 참다운 가치가 드러난다)라든가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랴',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쉽사리 죽지 않는다)' 또는 '산 호랑이 눈썹(도저히 얻을 수 었는 것)'과 같은 조상 전래의 말들이 있다..살다'와 같은 뜻으로 이루어지는 말의 무리로는 '살려 내다, 살려 주다, 살맛, 살아가다, 살아나다, 살아 생전, 살아 오다, 사로잡다, 살잡다(삽러져 가는 집 등을 바로 잡는 것)'와 같은 꼴들이 있다. 혼탁해 가는 우리의 영흔 속에서 살아 오르는 듯한 모습과 목소리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 보아야 하겠다.
12-7. 사랑과 연소(燃燒)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의 신은 살 수 없다' 고 하며, '아모레는 프시케를 버린다'는 서양의 신화가 있다.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가장 값진 인간의 가치는 사랑에 있다고까지 힘주어 말하는 종교가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의 사랑이 있다. 부모와 형제간의 사랑, 이웃과 민족에 대한 사랑, 친구간의 사랑,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 절대자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등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말의 사랑이란 말은 그 밑바탕이 무엇일까? 필자는 '사랑'이란 말이 한자어가 아닌 우리 고유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첫째 '사랑 애(愛) ((유합),하 3)',사랑할 ㅌ((훈몽), 하 33)' 에서와 같이 훈과 음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좀더 자세하게 풀어보자. 한자에 대해 풀이말(훈)과 한자음(음)을 밝척 적을 때 '하늘 천(天), 돌 석(石), 고마경 (敬)'등에서와 같이 풀이말과 한자음의 표기가 서로 다르면 풀이말은 대체도 우리 고유어 계통이며, '군사 군(軍), 공경 경 (敬)'에서와 같이 풀이말에 한자음이 포함되어 있으면 풀이말은 대체로 한자어 계통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경우는 고유어 계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말의 조어법을 보면 용언의 어간에'-앙/-엉'이 붙어 명사를 이루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니랑 고랑, 노린, 거멍'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생각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우리 조상들은 '사르다' 란 말을 써 왔다. 불태워 없앰을 이르는 말이다. 혼히 젊음을 불태운다든가 블사른다고 한다. 근원적으로 생명현상은 그 무엇을 불태움으로써 생겨나는 에너지를 통해 가능해진다. 사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도 일종의 불사르개를 우리 몸에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밥통은 변형된 불아궁이라고나 할까. 소화작용은 느린 산화로서, 갑작스런 파열음이나 순간적인 고열과 및을 내지 않을 뿐 연소와 매한가지다. 불사름이 끝나는 날,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어두운 영계로 돌아간다.
필자는 생명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 '살다[燒]' 에서 '사랑'이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살-+-앙>살앙>사랑'의 과정을 거쳐'사랑' 이 된 것이다. 즉 사랑이란, '불을 사르는 것' 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애틋이 여기어 위하는 마음'의 뜻으로 승화된 것이다.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말미암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랑은 참으로 숭고한 마음이 아닌가. 또한 불사름은 생명현상의 본질이니, 사랑은 삶의 가장 큰 명제라 할 것이다 누가 사랑을 일러 차갑다, 어둡다, 고깝다 할 수 있으리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