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12. 울림과 진실 (1/3)
12-1. 아리랑과 한(恨)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처럼 많은 설화와 변이형을 갖고 있는 노래는 드물 것이다. 흔히 민요는 어느 민족에서든지 그 민족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사람들의 정한(情恨)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혹인 영가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라고 하겠거니와, 우리나라에서 남존여비, 관존민비 혹은 삼강오륜의 제약으로 빚어지는 한이나 푸념 등이 각 지역의 내방가사를 포함한 민요에서 애창되고 있음은 널리 얄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는 임진왜란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마음속에 빚어진 응어리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문학이나 노래로 남아 예술이란 옷을 입기도 한다.
한 개인이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한의 응어리가 있겠거늘, 힘이 없고 가진 게 없는 무산대중의 한, 성의 차별에서오는 여성의 한,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나는 한, 남녀 간의 애정에서 말미암은 응어리진 감정 둥 실로 우리네 삶에는 응어리진 것이 너무도 많은 듯하다. 어느 누가 처음으로 아리랑을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월이 갈수록 공감대는 더하여 여러 지방에서 즐겨 불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른바 우리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민요 아리랑에서 '아리 랑'이란 말은 어떻게 쓰인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열 사람이 열 소리 격으로 참으로 많은 풀이가 있어 그 열기를 쉽게 알게 된다. 김지연의 '알영설 (顯英說)', 김재도의 '아랑설 (阿娘說)' 이병도의 '낙랑설 (樂浪說)', 양주동의 '아라리설', 이규태의 '아린설', 국어국문학 사전의 '얄리 얄리설' 등이 있으며, 주창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가설로서는 '아리랑(我離娘-처와의 이별을 슬퍼한다), 아이롱(料耳聲- '나는 귀가 먹었다'에서 유래), 아난리 (我難離-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 아미일영 (-澤, 美, 日, 英을 경계하자는 데에서 유래)'의 주장이 있다. 이 문제는 다시 정동화에 와서 간추려져 동아리를 짓게 되었는데, 조율성과 흥을 돋우기 위한 '무의미한 나머지 후렴의 소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1977). 물론 아리랑은 한자어가 아니고 고유어의 계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그 기능으로 보아 고유어 계통의 말로서 음악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여음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과연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문자의 표기에서, 모든 소리에는, 그 소리가 어휘적이든 문법적이든 간에, 거기에 걸맞은 뜻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리랑의 경우, 특히 밀양 아리랑의 경우에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은 어떤 아픔과 정한이 담긴 실제 어휘 곧 실사의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후렴구로 보인다. 이때 음운의 모음은, 입을 벌리는 개구도가 제일 큰 아(ㅏ)와 제일 입벌림이 작은 이(ㅣ)로 구성된다. 자음은 목청떨림 곧 가청도가 제일 큰 리을(ㄹ)과 이응(ㅇ)으로 짜인다. 그럼 '아이랑, 쓰리랑'의 어휘 또는 문법의미는 무엇인지 ? 문법 의미는 찾아 보기가 어려우며 어휘의미가 그 중심을 이룬다. 비교언어학적으로 보아 여진어의 '아린'이란 말에서 왔을 가능성보다는 고유한 우리말 '아리다'와 '쓰리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옛말에서 보면 아리고 쓰리다는 말로서 '알슬히다((경민) 23)' 라는 형태가 있다. 이 말은 '알히다((법화) 2-162) 十슬히다((구급간)1-12)' 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알히다'는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맞거나 베였을 때 오는 아픔을 이름이요, '슬히다'는 너무도 추워서 몸이 얼어붙을 때의 괴로움을 이른다. 이렇게 보면 '아리랑'과 '쓰리랑'은 그 어휘의미로 보아 님을 향한, 이별과 꾸관심에 대한 마음의 아픔, 낙심하고 한심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소리로 보아서는 모음과 자음의 조화를 통해 음악적인 효과를 살리는 기능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랑'은 접속의 구실과 함께 음악성을 살리는 보람을 드러내고 있다.
삶의 길에 있어 아픔과 낙망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검은 구름같이 몰려오는 시련을 딛고, 다시 그 뒤에 푸른 하늘과 빛나는 해를 바라서 얼마만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가 이것이 바로 큰 문제요, 풀어 내야 할 명제가 되는 것이다. 아프고 시린 계절에 피는 수선화는 자연의 부름을 좇아 이냥 피어 타는 것을. 아리랑 뒤에 서린 아픔과 시린 정한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사랑의 열병을 앓더라도, 우린 소담스러운 의지의 날개로 거룩한 조물주의 영지에 몇 이랑의 밭을 갈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 유명한 예이츠의 이니스프리는 아닐지라도. 아리랑 고개 곧 아픔과 시림의 고개를 넘으면 우리가 바라는 겨레의 뜨락에 봄이 올지도 모르니까.
12-2. 아픔과 통과제의
자신의 팔과 다리, 열 손가락을 깨물어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을 뿐더러, 아프기도 마찬가지여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나' 하는 속담이 생긴 듯하다 여러 형제가 있을 적에 부모의 근심은 어느 아들이나 딸에 대하여도 한가지임을 드러내고 있다. 몸이나 마음에 직접 흑은 간점으로 와닿는 괴로움을 일러 '아프다'고 한다. 몸에 열이 나고 쑤셔서 참기 어려운 생리적인 아픔이 있는가 하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나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일어나는 문제, 신앙상의 이유로 일어나는 문제 등으로 인한 심리적인 아픔이 있다. 때에 따라서는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경우가 더욱 힘드는 때가 많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곤 한다. 아픔에는 개인 또는 민족, 더 나아가서 인류의 정황에 매임 없이 뒤범벅이 되는 전쟁, 질병, 천재지변과 같은 극한 상황의 아픔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등의 여러 문제로 굉장한 시련에 부닥뜨려, 이 아픔을 슬기롭게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은 살아 남고, 무릎을 끓고 마는 경우에는 생존의 의미를 잃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사람들의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풀이한 바의 정신적인 아픔(고통)을 교육의 한 덕목으로 과하여서 수도자들을 특별하게 훈련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에도 드러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국가의 비상시에 성을 쌓게 하면서 나이 젊은 사람들을 뽑아 모두 등가죽에 노끈을 궤어 긴 나무에 매고 날마다 소리지르며 잡아당겨도 아플 줄을 모르게 단련한다. 이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이외에 몸을 튼튼하게 하는데 필요하다(其國中有所爲及官家捨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쁠흠皮以大鄕貫之以丈許木鑛之通順呼作力不爲以痛旣以勸作且以爲健)'고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극기훈련으로써 인재를 기르는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니 아픔의 통과제의랄까. 필자도 육이오 전쟁 때 어른을 잃었다. 어렸을때는 그 아픔이 나 흔자만의 시련인가 싶어,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병드신 어머니한테 아버지를 사 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한다. 자라 어른이 된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시련이요 아픔이었다. 다시 그 의미를 생산적으로 플이하건대, 그 아픔의 세월은 오히려 오늘과 내일, 나와 겨레의 삶올 보다 밝게 함에 더욱 값진 토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중세어에 '아프다'는 '알파다((월인) 119)' 였는데, 오늘날의 '아리다'가 옛말에 '알히다(법화) 2-162)' 로 확인되는 걸로 미루어 아프다는 '알(ㅎ)+바다>알파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파다'의 어근 '알(ㅎ)' 은 조류의 알[卵] ((석보) 13-10)을 뜻하는 말이다. 알에 대한 방언의 분화형을 보면, 히웅(ㅎ)종성이 다음 말에 이어져 거센소리로 나는 경우로 보아, 증세어 '알(ㅎ)의 분포와 같음을 알게 된다. 알타(경북 영주, 영천, 안동, 봉화, 영양, 울진, 청송, 대구, 군위, 의성/경남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진주, 층무 거제 하동/충남 서천 예산 홍성/층북 제천, 청주, 영동, 연퐁) 등. 따져 보면 알의 상태로 있다가 그 생명이 자라 더 큰 개체로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생물은 아주 드물다. 생물학에서 이르는 수정란(씨받이 알)도 알의 상태로 있는 생명이 아니겠는가? 알을 낳는 어미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하나의 알에서 나오는 새끼도 일정한 과정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 중에는 어미가 알을 바로 자신의 몸 속에다 낳고 그 속에서 까서 기르는 것도 있고, 밖으로 낳은 뒤 자신의 몸으로 품어서 부화시키는 것도 있다. 일정한 온도와 일정한 영양의 공급, 그리고 일정한 방어의 상태가 이루어져야 그 새끼가 태어나는 것이니, 실로 어미의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돌보아 준 경우에라도 알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개체의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이럴 경우 그 어미가 감정이 있는 주체일 때, 자식을 잃어 버린 그 고통, 그 쓰라림은 참으로 작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동물도 있다고 하거니와 자식(새끼) 올 낳아서 기르는 것, 이 모든 과정은 힘들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일이다. 어미 닭이 알을 품거나 병아리를 기를 때 가장 사나워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있는 노릇이다.
생물체의 기초적인 본능이 바로 종족보전과 자기의 생명보전에 있음을 생각하면 알을 낳기 위하여, 알을 까기 위하여, 새끼를 기르기 위하여 아픔과 자기희생을 감수함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 많은 동물의 알과 고기 그 많은 새끼를 잡아 먹고 살아야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이며, 우리 또한 죽어 땅에 묻힘으로 뭇 플과 나무의 밥이 되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인고로 아픔이 전제되는 삶의 과정을 운명이듯 사랑해야 한다.
12-3. 울림과 진실
이제 막 울려고 하는 아이를 잘 달래지는 않고 오히려 뺨을 쳐서 더욱 울게 만드는 것을 일러 '울려는 아이 뺨치기' 라고 한다. 문제를 쉽게 플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크게 만들어 잘못되거나 어려운 상황을 더 나쁘게 하는 경우를 비유하고 있다. 본디 울음이라고 하는 현상은 함께 울리는 '공명 (共鳴)' 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다. 교향악의 소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리는 함께 울림으로써 귀로 층분히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들의 감각에 와 닿는다. 실험음성학적 인 보고에 따르면 한국인의 성대는 약 2센티 전후가 된다고 한다. 부아(폐)로 들어간 들숨이 호흡기를 통하여 나오는 날숨의 바람이 성대를 울린다. 그 소리는 다시 입 안이나 코 안에서 자음, 모음으로 갈라져서 무수한 떨림을 수반함으로써 함께 울게 하며, 언어학적으로 의미 있는 변별적인 소리 곧 음성을 내게 된다. 여기서 얻어진 일정한 수의 땋소리와 홀소리가 결합하여 음절을 구성하고 다시 형태소로 인식되어 필요한 정보가 말하는 이에게서 듣는 이에게 전달되어 간다.
입으로 피리를 불면 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성대도 나오는 날숨을따라 피리와 같은 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언어활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건대 '울다'는 '불다'싸서 비롯하여 쓰이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불다>울다'와 같이 말머리에서 비읍이 떨어져 만들어진 형태 다..울긋불긋/울며불며'에서 앞머리의 '울-' 이 '불-' 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전제한다면 비읍의 탈락은 인정하기 어렵지 않다. 서재극은 중세어에 나타난 '울다'의 단어족을 '우르다((초두해)8-56), 울다((월석 10-3)' 로 보고 있다(l980) 이와 함께 '불다'와 관계되는 형태로는 '불다((석보) 11-16), 부르다(자세한 설명을 하다 ; ((법화) 3-121), 불이다((법화) 7-50)' 가 확인된다. 이어 현대어로 눈을 돌리면 부들부들(>우들우들 ; 몸을 크게 떠는 모양). 부르르(>우르르 ; 갑자기 끓는소리)'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명작용에는 그 바탕으로서 공감(共惑)이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공감과 공명의 관계는 어떻게 풀이되는 것인지 살펴 보기로 한다.
사람을 가리켜 흔히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 곧 마음은 인간행위의 밑바닥이 되며 구심점에 해당하는 것. 이 감정 (마음)은 손짓, 몸짓 또는 말소리 등의 여러 가지 움직임으로 드러나게 된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느낌도 뭔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돼 있다. 우리가 어떠한 자극을 받았을 때 함께 느끼어 형성하게 되는 공감대에서 비롯되는 공명이 그것이다. 지극한 기쁨이나 슬픔, 노여움을 만날 때 사람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기도 하며 때로는 울음으로써 그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주체와 객체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감의 밑바닥을 흐르는 굽이에 닿아 함께 우는 공명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겠다. 우는 아이의 경우, 만져 볼 수도 없지만 정감의 내면에서 어떤 특정한 자극에 대하여 공감을 하였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입에서 피어나는 말소리나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렇고 언어의 예술로 불리는 문학의 경우도 그러하다. 목소리는 말하는 이의 입을 떠나 듣는 이의 고막을 울림으로써 말하는 이의 생각과 느낌을 듣는 이에게 전달한다. 바이올린도 공명실을 울게 하여 어울린 소리로 승화되어 우리들의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면 언어예술 곧 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필연적으로 싱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느낌 곧 충동을 바탕으로 하여 값진 체험을 예술적으로 처리 보존함으로써, 진실과 아름다움이 어울려 작품을 대하는 사람을 감동시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힘의 문학이란 용어를 쓰거니와, 여기서 힘이란 바로 앞에서 이른바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는 공명의 또 다른 표현일 뿐 결코 그 밑바탕에 있어 앞의 두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사회를 계약사회로 규정한다. 계약은 서로가 공감하는바로써 서로의 행위에 대해 공명에 해 당하는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실로 공감은 공명의 속알맹이가 되며, 공명은 공감의 겉모습(외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다운 삶을 누리기 위하여 공감과 공명은 더욱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야 할 명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혀 공감대를 갖지 못한 채 살아 가기도 하며, 공감은 하지만 공명이 없는 부조리한 삶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은 공감과 공명이 있는 삶의 형태를 그리워한다.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는 사람이 모여 사는 모둠살이에서 고립과 독존의 관계로 나타나며 때로는 사나운 이기주의로 치닫기도 한다. 거기에는 제 스스로를 무너져 버리게 할 수밖에 없는 파멸과 증오의 늪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공명이 없으면서 공감은 하는 상황이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인 수가 많다. 충분히 알면서도 함께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한 속성이 아닐까. 참으로 공감이 있으면서 함께 공명도 하는 값있고 보람찬 한 생애를 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롯한 믿음을 향하여 함께 울고 웃으며 아끼고 바치며 애틋하게 그 길로 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진실에 대하여 공감하면서 기꺼이 함께 울리는 자세로써 인간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그 길에는 그다지 아름다운 꽃이나 풀도 없다. 그러나 사람이 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여로이기에 그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지어 '울다' 와 걸리는 말겨레로는 '울남(울기를 잘 하는 사내아이), 울녀 (잘 우는 여자 아이), 울대 (조류의 발성기관), 울보, 울부짖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가장 순수한 감정은 슬픔이라고 하거니와 공감과 공명이 있는 '울음'이 있는 곳이야말로 정녕 화평으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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