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5장 마음의 밭을 갈 때
마음을 깨끗이
지상의 도는 곧 마음이다. 이미 이 마음이거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밥먹고 옷 입을 줄 알았으면 그만이다. 새삼스러이 깨치려고 하므로 곧 그러한 생각이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망상만 버리면 도는 저절로 훤히 드러나는 것이다. 털끝만한 생각만 일으켜도 벌써 이 마음의 천진면목과는 하늘과 땅만큼 틈 아닌 틈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마음의 본래 면목이 드러나려면 좋다 싫다 생각을 곧 버리면 되는 것이다. 맞다 안맞다 하고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도를 닦는데 제일 큰 장애가 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드러난 허물인 줄 알지 못하며, 또한 탐욕심과 살해심이 곧 무상대도인 것을 살피지 못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망상을 끊고자하면 할수록 더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음은 동굴에서 저 허공과 같이 두루하여 모자라는 데도 없으며 또한 넘쳐 남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밉고 가까움 때문에 이 마음의 본래 면목을 잃고 만 것처럼 되어 있다. 모든 것을 따르지 말며 텅 비어 공한 경계도 여의고, 오직 그렇게만 지내면 망상번뇌는 저절로 없어지고 마느니라. 망상을 끊고 마음을 쉬고 앉았으면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더 큰 화근이 나는 법이라, 밤낮 그러다가 말게 되는 것이니 언제 한번 이렇게 지낼 수 있으랴. 이렇게 제데로 지낼 줄을 모르면 밤낮 앞뒤로 넘어지다가 말 것이다. 망상은 버리려고 할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며, 텅 빈 지경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은 내가 빈 것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니 거기에 팔려 있는 것이다. 말이 수다하고 생각이 많을수록 점점 더 어긋나는 것이며, 말이 없고 생각을 쉬고 나면 어느 곳 어느 때나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것이니라. 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서면 곧 이렇게 제대로이지마는, 객관 사물에 팔리면 제 마음은 제 마음 뒤로 숨어버리나니, 곧 돌이키면 보다 더 싱싱하여져서 먼젓번에 텅 비었던 경계보다 훨씬 수승하다. 앞에서의 망상을 끊고 따라 나타났던 빈 경계가 돌변하여 복잡한 번뇌로 되는 것은, 한쪽은 끊고 한쪽은 구하는 망견이다. 이 마음밖에 따로 진리가 없는 것이니 새로이 진리를 구하지도 말 것이며, 오직 자기의 마음에 있는 일체소견을 다 버리면 된다. 진이니 망이니 하는 소견을 버리고 또한 무엇을 따지며 알아보려고도 하지 말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비심이 남아 있으면 제 정신을 잃어버리느니라. 만물이 다 한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한마음도 또한 간직하지 말 것이다. 한마음까지도 간직하지 말면 세상 만법이 다 한마음이라서 짝의 허물이 없다. 짝의 허물이 없어지면 일체법도 없고 한 생각도 남음이 없으면 그때는 한마음도 아니다. 온갖 생각은 저 경계가 없어짐에 따라 없어지고, 또한 모든 경계는 이 생각이 없어짐에 따라 없어진다. 그러므로 온갖 경계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생각은 경계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저 경계와 이 생각이 그 어느 것이 먼저였고 나중의 것이냐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들이 본래부터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 자리가 주관 객관으로 나타나서 도리어 이 한마음이 저 온갖 것을 그 안에 있게 하였다. 다만 좋고 궂고 하는 생각만 내지 아니한다면, 어찌하여 주객이 갈라져서 한쪽 편이 되리오. 이 마음자리가 원래부터 대도인 것이라 본래 넉넉하고 휼륭한 것이다. 이미 이 마음인 이상 쉽거나 어려울 수가 없다. 좁은 소견으로 따지기만 하다가 따질수록 점전 어긋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나 숭고한 이념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그 이념과 맞서는 것이 되어서 상대연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반쪽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진 자연한 이 마음자리를 호호탕탕 제대로 살면 이 마음 자세는 오나가나 머물지도 아니한다. 천진한 이 마음을 조작없이 제대로 가지면 이 마음 이대로가 큰 도이다. 만사에 욕심이 없이 제대로 걸어가면 산도 절도 물도 절로, 꽃피고 새가 우니 만물이 자유롭다. 태평천지이니 세월, 생사밖에 한 가락은 날날이 닐닐이 제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인생에는 회계가 맞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족은 이 마음에 있는 것이요, 저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 찾는다. 이 짧은 인생으로서 무한대로 일어나는 이 무지한 이 욕심을 무엇으로서 다 메울 것이가. 다만 애가 탈 뿐이다. 애가 타면 이 마음만 괴로울 뿐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네니 내니 하는고? 천지만물로 더불어 이 마음이 본래부터 한덩어리인데, 절대한 자유만능의 본래 면목을 알고자 하거든 다만 저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말 것이니라.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아니하면 이 세상이 도리어 곧 부처님 세상이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저지르지 않는데 여여부동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제 발들을 밟고 넘어지게 마련이다. 저 만물이 곧 마음이요 이 마음이 곧 저 만물이다. 전체가 통틀어서 오직 다름없는 이 마음은 하나뿐인데 저 범부들은 어리석게 자기는 주관인 양 하여 저것들을 남이라고 여기고 불같은 탐욕을 낸다. 어찌 그것이 큰 착오가 아니랴. 깨끗한 이 마음자리를 한번 그르쳐놓으면 치우쳐서 고요하거나 산란하거나 하지마는, 깨닫고 나면 좋고 싫은 것이 없다. 좋거니 싫거니 하는 것은 모두 두 조각의 모순된 살림살이로서 영겁으로 생사고해에서 골몰하는 공연한 궁금증 때문이다. 이 세상만사는 이 마음에 저지른 꿈결이요. 눈병 때문에 공연히 보이는 공중 꽃이다. 무엇을 애써 알아보려고 할 것인가? 얻었거나 잃었거나 옳으니 그르니 여러 말 말고서 한꺼번에 탕탕 놓아버려라.
눈에 잠이 없어지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부를 힘써 하면 천당이니 지옥이니, 인간, 짐승, 남자, 여자 하는 모든 꿈들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니, 다 이 마음이 항상 이러하여 변쳔하지 않으면 저 천지만물과 더불어 이 마음과 한가지로 항상 이러하다. 이러한 이 마음자리는 만법과 둘이 아니면서 항상 이러하여 우주의 궁극체이며 고독이며 고귀독존이므로 여기에는 맞서는 짝이 끊어진 것이어서 말과 글월과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만물을 밉다 곱다로 차별하지 아니하고 무아, 무심으로 평등하게 보면 이 마음이 제대로 돌아선다. 이 마음은 그것을 무엇이라도 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무엇으로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까딱도 않고 움직이니 그것은 곧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또한 움직이면서 까딱도 아니하니 그것은 곧 까딱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 마음자리는 움직인다, 아니 움직인다 하는 양쪽을 다 초월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머엇인 그 하나인들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으랴. 이 마음자리에는 끝내 아무 법칙이 없으며, 따라서 이 마음은 깨닫는 법조차도 일정한 법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이 본래부터 평등하여지면 모든 망동이 다 쉬는 것이다. 이 마음밖에 부처나 조물주와 진리가 따로 있는가 하고 따지는 번뇌망상을 깨끗이 정히하면 본래의 정신이 바로잡히는 것이다. 좋고 싫고간에 무슨 일이든지 도무지 마음 가운데 남기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기억이 남지 아니한다. 텅 비고 밝아서 분명히 이러하니 애를 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간다. 이 마음자리는 말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따지고 연구하는 법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로서 변함없는 마음에는 남도 나도 없다. 누구나 이 마음자리의 본래 면목을 꼭 알고자 한다. 오직 만법과 이 마음이 둘이 아닐 뿐이다. 둘이 없으면 온 우주 전체가 다 이 마음 하나로 되는 것이요, 이 하나는 도리어 그 전체를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지혜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마음을 깨치는 선종으로 들어오느니라. 이 법에 들어서는 법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며 또한 얼른 빨리 들어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시간을 흘리기 전에 부동일념의 순간에 곧 만년이 흘러갔으니 만년이 곧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자리는 두루 가득하여 있고 없는 곳이 없어서 온 우주의 현재 일이나 억만겁의 과거 일이나 미래 일이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가장 적은 것이 제일 큰 것이기 때문에 저 우주만유와 이 마음이 서로 맞서는 상대가 아닌 것이며, 가장 큰 것이 제일 작은 것이기 때문에 변두리를 볼 수가 없느니라. 저 만물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은 도리가 아니면 그것은 간직할 것이 못되는 법이다. 한 가지가 곧 오만 가지요. 오만 가지가 곧 한 가지이다. 다만 넉넉히 이와 같은 도리를 간직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불하지 못할까 걱정하랴. 똑바른 신심은 우주만법과 둘이 아닌 이 마음이니라. 둘이 아닌 신심은 말할 도리가 없으며 또한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나의 길, 나의 노래
길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걸어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내가 다시 태어난대도 기꺼이 이 길을 걷겠노라. 설령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모든 중생을 건지리라.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영원히 살아 있다. 맑고 깨끗한 마음만이 나와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나는 밤의 산길을 좋아한다. 길들은 끝이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냇물도 끝없이 흘러간다. 왜 흘러가는 것일까. 냇물은 지면이 낮기 때문에 흘러내리고 길들은 사람들의 발자국의 때가 묻어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자체의 의지로써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달빛 아래 보고 있으면 그것은 한 의지처럼 보인다. 마치도 도라든가 보리라는 말이 그 자체로서도 품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되면서……. 나는 승려이므로 많은 길을 걷는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들길을 걷는다. 문명이 발달되고 나이가 더해 가고 도시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내발로 땅을 딛고 걷기보다는 승용차를 타고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으나 그 탄다는 사실도 여전히 나에게는 걷는다라는 말로써 번역되고 있다. 젊은 날에 너무나도 많이 그 걷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40년의 수도생활, 춘하추동이 1백60여를 넘기도 또 산천의 수색과 형경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난 또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미묘 법문의 광장설이 40여 년이니 또한 내 한평생 수행과 같건만… 돌이켜보니 숱한 사연과 밀어들이 이 고뇌를 잊고 무상증득의 나를 찾고자 애쓰는 노승의 심정이 조급해질 뿐, 또 어쩔 수 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는 생각뿐이다. 아침 5시가 되면 승려들은 눈을 뜨고 일어나 대빗자루를 들고 절 뜰을 한 바퀴 쓸고 구석 구석에서 진회색의 냄새가 풍기는 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아침 염불을 왼다. 법당문을 열고 나올 때는 벌써 건너산 위로 붉고 미숙한 햇빛이 트고, 나오던 승려들의 손은 합장하여 지고 허리는 겸손하게 구부러진다. 절간을 둘러싼 대숲에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이 아침의 소리들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신경질적이다. 마치 신라인들의 귀금속품과 같다. 그렇게 긴 아침이 서서히 사라지고 난 뒤, 산으로 빼곡이 둘러싸인 산간에는 저녁이 줄달음치듯이 뒤따라온다. 더욱이 가을과 겨울에는 아침과 저녁이 거의 일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만산은 종일 붉은 놀에 잠겨 있는 듯하다. 낯 씻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다. 욕심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의 해탈이 목적인 것이었다. 모든 나로부터 벗어날 때, 모든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최후의 것, 가장 본질적인 것, 이미 나는 내가 아니라는 큰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는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한숟갈의 밥, 하나의 정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아아, 승려들은 놀의 시간을 사랑한다. 더욱이나 그런 시간의 벼랑에서 또는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토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윽고 그 달빛과 놀과 일출 위로 떠올라온다. 그런 다음 그들의 허적허적한 발길은 토굴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향하여진다. 저녁은 아름답다. 나뭇가지에 닫는 바람소리, 골짜기의 물소리, 그리고 일대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놀……. 산사람들에게 놀처럼 정겹고 속세를 그립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정진의 길에서의 그 어떤 의지라기보다는 그 어떤 분위기였고 인간적인 것의 정경이었다. 그러므로 놀이 내릴 때 산사람들은 가장 많이 동요된다고 한다. 달빛 속에는 사해대중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밀도로서 들어차 있다. 그래서 대승들은 그 달빛 속으로 나아가 정진하는 것이리라. 승 일연의 기록에도 광덕은 밤마다 달빛 위에 떠올라 정진하였고 현수도 달빛 속에서 그의 선을 맞아들였었다. 기록만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도 달빛은 승려들의 정진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선사들의 모든 게송 속에는 한두 마디 달빛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아니 달빛만이 아니다. 저녁놀이라든가 새벽의 써득써득한 빛깔은 승려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색채이다. 숲속을 거닐 때 인생은 마음의 폭이 한없이 넓어지고, 또 한층더 아름다워진다. 고요한 속에서 생각이 되는 일은 모두 소화되고 승화되는 법이다. 대자연을 찾아라. 비록 중이 되지 않더라도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리다.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어두운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한 게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다가, 통곡으로 아버지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백부님이 오셔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승려가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술에 바른 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천하였지만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에 가득찬 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아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노여움에 찬 어조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 성 있어야 했어다. 그 다음날 어버님은 별세하셨다. 그리고 갓난 이기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세계를 떠나려고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대지의 숨결이 흰 구름에 엉겨 아스라이 지평선 위에 둥실 떠 흘러간다. 양광에 구멍 뚫린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도도히 소리치며 흐른다. 후미진 웅덩이에서 송사리 한 마리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도약을 시도한다. 태초로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약동이다. 검은 잿빛으로 시들어 오그라진 쑥대 밑에서 파란 연두빛 어린 싹들이 짓눌리는 고갈을 제치며 앞 다투어 올라온다. 오늘이 경칩! 지하의 온갖 벌레들이 지루한 동면에서 깨어나 새봄의 생기를 들어마시며 새로운 태동의 기지개를 켜는 웅성거림을 듣는 듯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모양으로, 물 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만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상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하는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 눈이 며칠이고 계속 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이 흔적도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운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나면, 산엔 바람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람소리는 쓸쓸하다. 더욱이 황혼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로 밤으로 몰리는 초저녁의 바람소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런 날의 승려들의 모습은 웬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 속에서 그 많은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우중충 얼어붙은 하늘 폭을 쪼개고 사라져가는 제트기의 방향을 쫓아 저 멀리 남쪽 산 너머 위, 두둥실 흰 구름 한 점, 창공에 걸려 있는 저 너머에서 희미한 양광을 타고 봄의 숨결이 대기 속에 스며든다. 흰 눈 덮인 산비탈을 죽작으로 헤쳐오느라면 대가락 굴러가는 고엽의 행방-거기, 말라붙은 잔디를 헤쳐 대지의 맥박이 파아랗게 솟구쳤다.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에 꽉 얽매여 있었던 그때의 아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결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가는 당장 불효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뚜렷이 만법을 성취한 마음의 (여)가 따지는 망상의 바다에 빠져서뜬 갈대와 같이 표류하면서 항상 입으로는 나는 알았다고 떠들며, 배웠다고 하며, 깨달았다고 하며, 해탈했다고 하며 무슨 도리가 있는 체하면서 우세할 때에는 의기양양하다가 모자라는 입장에서 숨도 못 쉬고 비굴해지니 이러한 작은 알음알음이의 소견은 위 없는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며 저 고해에 허덕이는 무변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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