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I.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
1-4. 가정 (假定)파 언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고작해야 일백 년을 헤아리는 세월을 살고,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삶의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들을 헤매며 산다. (명심보감),의 이야기처럼, 한 사람이 하루 쌀 석 되, 사방 여섯 자 방이면 족한 것을 가지고 끝없는 욕망의 언덕에서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자신에게 굴레를 씌우고 만다. 하지만 생활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간접 체험을 통하여, 특히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설을 만들어 가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의 가정이나 상상을 할 수 있고, 단체도 그러하다. 그 가설이 어떤 방법으로 증명되어 누구에게나 보편성 있는 설득력을 지닌다면, 다시 말해 거듭 검증해 봐도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재현성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이요,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 반대인 경우에는 그저 상상일 뿐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헛된 생각에 그치고 말게 된다. 학문이나 예술이나 모두 하나의 가정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기호는 본디 하나의 약속이며 체계적인 가정인 것 이다. 인간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소리 자체는 같은 소리일지라도 같은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발음을 했더라도 그 발음의 세기나 색깔은 다르게 마련이다 하물며 인종이 다르고 시대와 공간이 다른 사람끼리의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과'라고 말을 하면 우리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먹는 과일로서 동일하게 이해한다. 물리적인 실제의 소리는 추상화되어 심리적으로 같은 소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그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으로 이어져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때는 마치 음운들이 끊어져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따라서 머리의 자음을 바꾸어 '자랑'으로 발음하면 금세 다른 말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를테면 연속으로 발음되는 소리들을 연속하지 않은 소리로, 즉 동적인 소리를 정적인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사람은 그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산다. 어디 그뿐인가. '사과'란 구체적으로 과일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고 실은 한 덩어리의 소리에 불과하지만, 언어적 상상력은 곧바로 생리적인 조건으로 전이되어 마치 사과가 앞에 있는 것처럼 듣는 이는 먹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한마디로 계속하여 이어 나는 음성의 연결체인 음절을, 심리적으로 분리하여 뗐다 붙일 수 있는 소리의 조각, 곧 음운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가정을 대전제로 하여 언어 인식이 비 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언어적 상상력은 한 언어공동체의 약속을 바탕으로 '가정' 을 전제하여 이 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이 이러한 약속과 가정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언어생활을 해 나아간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는 음성형식과 그 내용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큰 언어공동체 속에서 유기체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패문이다.
언중이 말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일단 만들어진 말은 언중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 치고, 인식의 도구로서 작용하며, 개인의 사회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언어라는 무형의 끈은 민족의 경계를 만들고,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민족의 큰 유산이면서 중요한 재화가 된다 언어에는 그 민족이 누렸던 역사와 철학, 종교와 정치, 경제적 인 혼적들이 투영되어 나뭇가지처럼 벋어 나아간다. 이러한 언어의 투영현상은 상황에 의존하는 특성을 지녀, 언중의 문화와 함수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면 언어로 드러나는 상황의 바탕은 어떠한 것 인가.
철학에서도 흔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언어적인 상황은 우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 상황이 중심을 이룬다. 어떤 언어에도 가정의 상황을,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이른바 가정법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말에서는 접속법의 동사나 형용사의 활용어미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어를 포함하는 인도-유럽어의 경우 시제별로 많은 가정법의 유형이 있다.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 사실에 대한 가정이 다양하게 갈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시간의 상황은 원천적으로 공간을 그 밑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적어도 인간이 구분하고 있는, 언어 표현으로서의 시간은 공간적 표현에서 옮아 온 경우가 많다. 우리말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때'도 역사적으로 보아 후기 중세어 자료에서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공간인식을 근거로 하여 언어적인 시간관념이 발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더 많은 시간적 상항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반드시 칸트나 사르트르를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상상은 의식현상의 하나이며, 철저하게 우리 사람들의 인식에 기초한 인간중심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약속이자 가정으로서의 언어기호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영상은 현상 그 자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의 지도가 대한민국의 영토 그 자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인식의 활동은 인간의 의식 위에서 재 구성되어 사물이나 사실들을 판단하며, 이것이 다시 언어적인 모방과 사고를 형성하여 마침내 언어활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인식의 기초가 공간과 시간 에 대한 형식이므로 언어적인 사고 또한 이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식과 언어기호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감각적인 기능을 하는 대뇌부는 언어적인 기능을 하는 대뇌부에 심리적인 반사현상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실물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약속과 가정으로서의 언어기호에 익숙한 언증은 언어기호가 불러일으키는 공간과 시간 인식을 바로 떠올리게 됨으로써 마치 실물대상이 있는 것처럼 느끼며 그러한 생각들을 말하게 되고, 말을 듣는 이는 아무 이상 없이 그 말의 내용을 알아차리며 그에 걸맞은 정서를 느끼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앞으로 다가을 미래, 곧 죽은 뒤를 가정하니 설정해 놓은 공간과 시간에의 확고한 신념은 하나의 종교로서 표출되며 이른바 이데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비록 그것이 의식상의 공간과 시간이라 할지리도, 그것이 삶의 토대가 되고 삶을 구원해 주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실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이며 참된 빛이 흐르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 위에서 일어난 문화를 역사란 관점에서 살펴보면 굳건한 하나의 맥으로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문제, 즉 삶과 죽음의 구도에 대한 문제를 풀이함에 있어 의식 속에 설정되는 시간과 공간의 상황은 분명한 삶에의청사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낱말 하나하나는 소리가 드러내는 그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기억 소자(柰子)가 된다고 하겠다. 실제로는 연속해 있는 자연의 세계를 수심만에 달하는 낱말과 이 낱말들을 이루고 있는 몇 개의 자음과 모음으로써 분리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가정의 공간과 시간상에서 사물과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도 잘 모르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언덕에시 헤매이며 삶의 조건을 풀기 위하여 방황한다. 자음과 모음이 컴퓨터의 글자판이라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음절 단위토 이루어지는 단어들은 기억의 소자들이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우리들의 의식은 모니터와 같은 반영의 공간이 되고, 여기에 비치는 다양한 언어형식 (단어와 문장과 단락)을 통하여 일정한 생각을 전달하게 된다. 자음과 모음이 분절되고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이루어 내는 것은 이른바 이합과 집산이라는 컴퓨터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정은 언어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큰 원리요, 인간정신의 중요한 작용이라고 하겠다. 이른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건과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언어기호는 추상화된 대용자극이며, 대용반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실물이 없는 언어적인 내용은, 가정의 약속인 언어기호에 저장된 언어적인 사고의 장을 자극함으로써 기억소자에 갈무리된 여러가지 정보들을 떠올려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거울의 화면에 원하는 참된 뜻을 비추게 된다. 이른바 거울영상과 같은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문화 반사체로서의 언어기호의 성격과 인간의 상상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5. 문화의 투영
인간 사회의 변천이나 발전의 과정을 기록하여 놓은 것을 '역사'라고 정의한다. 같은 뜻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정신 활동으로 말미암은 모든 결과를 '문화' 라고 풀 수 있다.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되비치듯이 역사에는 특정한 민족이 살아온 여러 가지 모습들이 반영되어 있다. 일정한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이해하려고 할 때 역사는 세대를 달리하는 일정한 시기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각 시대의 사회 변천이 역사에 드러나게 된다. 각 시대는 그 시대를 살다 간 겨레들의 문화가 모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역사는 문화의 반영체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는가. 인간정신이 만들어 낸 문자에 의하여 기록.보존된다. 물론 언어도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문화의 범주 안에 드는 주요한 것이다. 무엇을 기록하거나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문화의 내용이나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투사시켜 듣는 사람에게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원천적으로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의 의식에 대상의 모습이나 속성이 반영되어 인지됨을 뜻한다. 언어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은 의식에 반영된 대상을 말로써 전달하여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주고 받는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에 의해 한 시기의 문화는 이루어진다. 문화의 형태가 분화되지 않은 고대로 을라 갈수록 문화의 투사체로서의 언어기호에는 문화반영의 모습이 뚜렷해진다. 절대적으로 혼자서 사는 사람에게 언어의 필요성은 반으로 줄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자기표현의 욕구가 있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자기의 말을 들어 줄 대상이 없다면 그 표현은 의미를 잃고 만다. 적어도 자신의 말을 들을 대상이 있을 때 의미가 살아나게 되며, 언어를 사회적이라고 함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언어공동체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 바, 진정 하나의 겨레는 그 겨레만이 쓰는 언어를 함께 씀으로써 그 언어로 기록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각과 느낌을 더불어 누리고 살게 된다.
말은 소리를 본질로 하는 공동의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개인에게 상당한 강제성을 행사한다. 이를테면 '보리쌀'을 '좁쌀'로 말한다면 고의든 아니든 그것은 약속 위반이 되어 오해를 일으킨다. 약속으로서의 말 속에는,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공감대를 갖고 있는 문화의 화석과도 같은 특질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더러는 가지를 쳐 더욱 많은 낱말의 겨레가 생 겨나고, 더러는 쓰이지 않게 되어 죽은 말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언어를 문화의 투사체로 보는 관점에서 언어의 원형성을 특정한 겨레의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 이름하여 '문화 투영 이론'이라 해 둔다. 문화의 반사체인 언어에 되비친 말은 그 나름의 질서에 따라서 굴절한다 그래서 복합어라든지 파생어, 또는 문법형태소로까지 번져 나아가게 된다. 문화의 반사체로서의 언어의 원형성은 종합문화의 시기로 거슬러 갈수록 뚜렷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고맙다`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이 형태소를 쪼개 보면 '고마+-ㅂ다가 되는데 '당신은 고마와 같이 은혜로운 사람이다' 라는 역사적인 뜻으로 되풀 수 있다. 여기서 '고마' 는 무엇인가. ((삼국유사1,의 기록에 나오는바, 단군의 어머니 신인 곰을 뜻한다. 동물 상징으로는 곰이요, 용이요, 거 북이지만, 본디는 물과 땅의 신이요 생산을 맡고 있는 여성신, 곧 지모신 (地母神)이다. 그러니까 단군이 제사를 모셔 배달겨레의 번영과 넉넉한 생산을 빌던 대상신이 곧 고마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을 드러내는 원형적인 의미와 형태로서의 '고마'가 오늘날 '고맙다'와 같은 형용사나 '꼬마'와 같은 명사에 화석처럼 남아 쓰이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단군만 해도 그렇다. 제사장이자 행정의 우두머리였던 '단군'은 지금에 와서는 방언에 따라 다르지만 전라도 지 역어에서는 '당골' 혹은 '단골레'라고 하여 무당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어쨌든 제천시대의 종합문화를 대표할 만한 대상들이 변천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의 기본을 이루고 있음은 언어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문화의 반사체로서의 말은 잠재 의식이나 개념을 언어에게 옮겨 줌으로써 낱말겨레의 분절, 언어적 사고의 유추, 가정에 대한 주요한 실마리를 마련해 준다. 이를테면 땅 이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신라가 경주 중심의 문화를 이루고 한반도를 통일한 뒤 경덕왕 때 땅 이름을 -주. -군 ' -현의 틀로 바꾼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서라벌에 담긴 새롭다는 뜻을 나타내려는 정치사회의 의지가 상당한 지명에 투사된다. 예를들어 '草. 東. 金. 新. 鳥. 鐵. 牛. 理'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바, 고쳐진 지명은 거의가 새 롭다의 의미를 투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소리와 소리의 관계에서 목청의 울림이 큰 소리가 작은 소리에 영향을 주어 소리의 변동을 일으키듯이, 문화와 문화의 관계에 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화의 유형이나 세력이 그렇지 못한 쪽에 영향을 주어 투사되는 경우가 많다
언어기호를 문화의 투사체로 보는 입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문화는 곧 인간정신이 가져온 결파로서 당연히 인간의 언어적 상상력의 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종족의 보존과 번영을 꾀하는 데 직간접으로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 곧 인간의 현실 그 자체는 아니어도 현실에 바탕을 둘 때에만 개연성을 지닐 수 있는 만큼 언어에 반영되는 상상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언 어기호가 환기하는 인간의 상상력은 크게 정서적인 것과 지시적인 것 (상징)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경우는 주로 문학적인 표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뒤의 경우는 실용적이거나 논리적인 표현에서 흔히 만나게 된다. 언어의 정서적인 기능은 낱말 하나하나로서도 드러나지만 하나의 문장 안에서 연상작용을 통하여도 나타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서 규정하였거니와 인간이 생각한 바는 거의 언어로 드러난다. 언어의 내용은 사람들의 생각이요 느낌이기 때문에 언어와 상상은 서로 데어 놓을 수 없다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어느 지역이나 특정한 시기에 보편성을 얻었을 때, 반대로 특정한 집단의 보편성이 개개인의 특수성과 서로 어울릴 싸 이른바 문화의 싹이 트게 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내용으로 하고, 언어는 인간의 사고작용(정신활동)과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니, 언어는 문화를 반명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문화란 말은 쓰지 않는다. 흔히 어느 집단이 이룬 정신활동의 집합을 문화라고 하는 만큼, 사회 구성원의 약속인 언어기호를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은 당연히 문화를 뿌리로 하여 덛어 나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