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 - 로우라 젭슨 / 이영순 역
1장 비극 속의 에토스 (Ethos in Tragedy)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매우 행운의 시기에 등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등장했던 5세기경은 그리스 극작가들의 거의 모든 작품이 완성되어 그리스 극이라는 방대한 보물 창고를 아리스토텔레스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었던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많은 보물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스 극작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면밀히 연구한 끝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극 연구에 있어서 "악명이 높기도 하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다시피" 중요해져 버린 그의 비극론을 세울 수 있었고 아울러 하나의 전통적 양식, 혹은 하나의 장르로서의 비극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etics)이 일련의 강의 노트를 모아 놓은 것 같은 형태로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비평가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그렇지만 이렇듯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들만 가지고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확실하게 설명할만한 몇 가지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지금부터 논하게 될 비극 속의 '에토스 Ethos'에 관한 논의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 비극이 점점 쇠퇴해 가느냐, 아니면 그것의 잠재적인 이상적 모델로 완성되어 가느냐 하는 비극의 발달 과정에 관심이 있었다. 비극의 발달 과정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많은 변화를 거치는 동안 비극은 그 본연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제 비극은 그 발달을 멈추었다"는 (시학)의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었다.(Aristotle, Poetics, 1449a14-15.)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Sophocles)와 유리피데스(Euripides)의 비극에서 이상적인 비극의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개념을 설명할 때 그 이상적인 모델의 기준을 대부분 그 두 작가의 작품에서 빌어 왔다. 이를 두고 드라이든(Dryden)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했었다는 주장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의 작품에서만 비극의 모범을 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현대의 비극들을 보았더라면 아마도 생각이 바뀌었을는지 모른다."(John Dryden, Works, ed. George Saintsbury and sir Walter Scott (London: William Paterson & Co., 1892), XV, 390.)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드라이든의 이러한 주장은 잘못일 듯 싶다. 설사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 시대의 비극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비극에 관한 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뛰어 넘는 이상적인 비극은 없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는 에토스를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 버렸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과 (수사과 Rhetoric)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게될 에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의에 의거하여, 선한 의도를 가진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지칭하는데 사용될 것이다. 요컨대 어떤 선택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선하냐 악하냐하는 도덕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도덕적 선택을 한 그 사람의 행위로부터 미루어 유추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성격을 에토스라고 부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에토스의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물론이고, 이를 보다 폭넓은 의미로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고전 비극 및 셰익스피어 비극들에 비추어 검토하려고 한다.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이 비극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고통을 겪는 주인공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에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여섯 가지 요소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 관객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 고유의 즐거움'이라고 부른 상태에 도달하려면 이러한 상태를 이끌어 내는 '공포와 연민 pity and fear'의 감정을 유발시켜야 하는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윤리적으로 타당한 행동을 한 주인공의 에토스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뷰처(Butcher)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논하는 자리에서, 관객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그 비극적인 고통에서 승화의 역설적인 기쁨을 맛보려면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비극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연민과 공포심의 '카타라시스 katharsis'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비극적 주인공의 필수적 자질을 결정한다. 왜냐면 연민의 감정은 전적으로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에 비해서 너무나 과중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고, 공포심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본성을 가진 인간일때 유발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성격은 반드시 플롯이라는 수단을 통해 제시되어져야 하며, 플롯은 이러한 두 가지 정서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도록 짜여져야 한다. 따라서 어떤 유형의 인물이나 사건이 이러한 비극적 효과를 전체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만족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즉시 그 인물이나 사건은 빼버려야 한다.(S.H.Butcher, Aristotle's Theory of Poetry and Fine Art, 4th ed.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1951), p.302.)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과 행위의 상호관계, 즉 성격이 빚어내는 행위와 그 행위에서 파생되는 성격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비극적 인물의 에토스는 그들의 행위를 근거로 추정되기 때문에, "플롯이야말로 제 1의 원리, 말하자면 비극의 영혼이다. 고로 인물은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Poetics, 1450a37-38)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심지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유형적 에토스만을 제시하는 아가톤(Agathon)의 안테우스(아가톤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의 계승자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원전 416년에 레나이아 제전에서 처음으로 승리했는데, 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가 플라톤의 향연의 배경이 되었다. 아가톤은 비극사상 처음으로 크러스로 하여금 막간가를 부르게 하였고, 최초로 가상적인 사건과 가상적인 인물로 꾸며진 비극을 소개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아가톤의 작품은 40행이 채 못된다. 안테우스에 관해서는 이 작품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모두 시인의 창작이라는 점만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품은 후기 아테네의 비극가 중기 및 신희극 사이에 교량 역활을 했던것으로 여겨진다.)조차도(S.M.Pitcher "The Anthus of Agathon",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LX(1939), 159) 해위를 제시한다는 이유만으로 비극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성격의 의미를 논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요즘 시인들의 비극은 대부분 성격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는 비극 시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시인들에게 해당된다."(Poetics, 1450a23-24.)고 단언한다. 시학의 저자는, "성격의 첫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본질은 선량해야 한다. 등장 인물의 말이나 행위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도덕적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면 모두 성격의 표현일 수 있다. 고로 목적이 선하면 그 성격도 선하다."(Ibid., 1454a16-19.)고 정의한다.
19세기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행위대신 "성격"을 너무 강조하였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많은 비난을 받아 왔다. 성격을 강조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극을 가지고 도덕 여부를 따졌던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러한 비평 태도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왜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이론을 이해하자면 윤리적 원칙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윤리적의미는 비극의 미학적 힘이 기초로서 단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는, 나중에 호레이스(Horace)가 찾아낸 '유익함과 감미로움 util dulci(호레이스(Horace)와 '유익함과 감미로움'(untile dulci)은 시는 유익하면서도(utile) 감미로운 것(dulci)이라는 변증법적 문학론으로 각각 시의 두 가지 기능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즉 시는 독자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기능과 교훈을 주는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과 같은 이분법적 구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적으로 주동 인물이 우주의 도덕법(moral law)을 준수하는 선량한 인물(E.E. Stoll, from Shakespeare to Joyce (Garden City, N.Y.: Doubleday, Doran & Co., 1944), p. 288. 스톤은 이 책에서 "헬레니즘 시인들(Hellenic Poets)"과 셰익스피어는 둘다 비극의 주인공의 선한 요소를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피쳐(S.M. Pitcher), "Aristotle's Good and Just Heroes," Philological Quarterly, XXIV(1945), pp.1-11도 참조해 불만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영웅(hero)"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Lane Cooper, Aristotelian Papers (Ithaca, N.Y.: Comell University Press, 1939), p.82를 참조할것.)인가에 관심을 둔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리 이상적인 영웅이라 하더라도 비극의 주인공은 완전무결할 정도로 선해서는 안되고, 실수나 혹은 결함이라고 일컬을 정도만큼의 '하마르티아hamartia'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에게 결함이나 실수는 흔히 "중용"의 원칙을 어기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에는 영어의 "죄(sin)"에 함축되어 있는 것, 즉 신의 성스러운 명령을 위반한다거나, 신의 말씀보다 악마의 태도를 따르는 것과 같은 악(Evil)의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균형 잡힌 우주의 비율을 깨뜨린다거나, 혹은 미덕(Virtue)이라고 표시된 정확한 지점을 맞추지 못한 경우를 악덕(Vice)으로 간주하였다. 중용의 원리에는 미덕에 정반대 되는 악덕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미덕(moral virtue)을 "두개의 악덕, 즉 과도함이라는 악덕과 부족함이라는 악덕사이에 놓인 중간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중용은 양쪽의 극단적인 것들과 비교했을 때 선으로 간주되는 상대적인 선일 뿐이다. 도덕적 신인 중용 역시 하나의 극(an extreame)에 해당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미덕은 여러 유형의 행동과 감정들 사이에 한가지 선택할 때 전해지는 정신적 기질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본질적으로 각자에게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용은, 이를테면 신중한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결정하곤 했다는 식의 원칙에 따라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Aristotle, Nichmachean Ethics, 1106b7-1107a7.) 심지어 복수의 여신들인 네메시스(Nemesis)의 벌을 받아 몰락하도록 되어 있는 오만함의 죄, 즉 '히브리스 Hybris'.의 죄조차도 자나침의 개념(the notion of excess)을 근거로 하여 중용에서 일탈되는 죄를 의미하는데, 이 중용으로부터의 일탈은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리스토테레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인간이 "중용의 과녁을 맞출 수 있는" 가장 좋은 몇몇 예방책들을 제시한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다. "중용의 준수가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우리가 화를 내야만 할 때, 어 떤 태도로, 어떤 사람들에게, 또 무엇을 근거로 얼마나 오랫동안 화를 낼 것인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우리는 종종 화를 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좀 부족한 쪽으로 정도를 벗어난 사람을 신사답다고 칭찬한다. 또 어떤 때는 금방 화를 내버리는 사람을 남자다운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친 쪽이건 부족한 쪽이건 이렇게 정도에서 약간만 벗어난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반면에, 그 벗어난 정도가 눈에 확 띄어 실수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람만이 비난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에 띄는 인식(perception)의 정도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을 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벗어남을 비난해야 하는지의 정도상의 문제도 특정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결국은 그 벗어난 정도가 눈에 띄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인식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결정되기 마련이다.(Ibid, 1109b14-23)
기독교 교리에 들어 있는 죄(sinfulness)와 성스러움(sainthood)이라는 극단적 개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어쨌든 극단적인 것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그리스인들에게는 비극의 영웅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자질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에 없어서는 안될 정서 중의 하나인 공포심(fear)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을 목격했을 때 유발되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즐거움에 꼭 수반되어야 할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비극의 주인공은 반드시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있는 안간이어야 한다. 아무도 성인이나 사악한 죄인을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용의 논리를 만들어 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다고 모든 행위나 감정이 중용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은 될 수 없다. 실제로 몇몇 명사(noun)는 그 차체가 노골적으로 악을 뜻한다. 예를 들어 원한, 파렴치, 시기심, 과 같은 감정들이나, 간음, 도둑질, 살인 같은 행위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명사나 혹은 이 명사가 시사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 및 감정들은 모두 그 자체가 악(Evil)으로 치부되는 것이지 그 과도함이나 부족함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이나 셰익스피어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우주 속에는 어떤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마르티아나 혹은 미덕의 표식에서 어긋날만한 원칙들이 개입된 여지가 너무나 많은 것이 우주인데도 말이다. 비극이라는 호치 에 가장 적합한 그리스 극작가나 셰익스피어는 그들의 비극 속에서 극작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어휘를 선택할 때도 거의 모호함을 발견할 수 가 없다. 그들은 악은 악으로 선은 선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극에서는 때로는 코러스가, 때로는 주동 인물이나 혹은 소인물(minor character) 중의 누군가가 ("그리스 극의 코러스"처럼 행동하는)작가 자신의 윤리적 의도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 역할이 누구에게 주어지든 그들은 추호도 작가의 의도를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에스킬러스(Aeschylus)의 클류템네스트라(clytemnestra)나 셰익스피어의 이아고(Iago)는 악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선다. 선 또한 착한 인물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선한 인물이 스스로를 변론하는 브루투스(Brutus), 원로원들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오셀로(Othello), 아버지 면전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힙폴리튜스(Hippolytus), 테레시아스(Teiresias)에게 자신의 무죄를 당당하게 외치는 오이디푸스(Oedipus), 그리고 고통 가운데 다음과 같이 울부 짖는 리어(Lear) 등이 모두 이러한 유형의 인물이다.
나는 죄를 지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I am a man More sinn'd againt than sinning. 그래서 작가의 생각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비극들에서는 사건의 토대가 되는 도덕적 근거 역시 명확할 수밖에 없다. 극적 사건의 토대가 되는 도덕은 흔히 극 전체를 통해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배우들이 윤리적 논평을 하는 사이에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이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반드시 주인공의 고귀함이 강조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에드거(Edgar)는 리어에게 조의를 표하고, 호레이쇼(Horatio)는 죽어 가는 햄릿(Hamlet)에게, 안토니(Anthony)는 부푸투수에게, 캐시오(Cassio)는 오셀로에게, 아르테미스(Artemis)는 힙홀리튜스에게,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게는 코러스가 찬사를 바친다. 멕베스의 맬콤(Malcolm)이 사악한 인물들을 "이 죽은 인간 백정과 악마 같은 왕비"라고 탄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마찬가지 관점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눈에 띄게 선량한 인물은 무죄한 것으로, 두드러지게 악한 인물은 죄인으로 명백하게 선포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 같은 탁월한 비극은 모든 등장 인물들의 행위를 책임(accountablillity)의 원clr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책임의 원칙이란 고대 그리스 법정의 근거가 되었던 사상으로서 개개인의 행동을 도덕적 근거에 비추어 무죄와 유죄를 선고하게 일단 선고된 결과에 의거해서 법적 정의를 집행하는 원칙을 말한다.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비극의 주동 인물은 영웅이면서 동시에 악한이 될 수 없다.
그리스 극작가들이나 세네카(Seneca),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비극의 싹은 삶의 본질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믿고, 그러한 삶의 본질적인 고통을 승화시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비극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에토스의 함축적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비극 작품들에서 유사한 형태로 그려진 인간의 행위들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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