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 황필호(전 동국대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미국 오클리호마대학 철학과 졸업. 세인트존스대 교육학과 졸업. 덕성여대, 동국대 교수 역임. 현재 한국철학회 회장, '어느 철학자의 편지'발행인. 저서에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질투가 아니다', '생각하는 여성을 위한 명상록',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 '맹자철학에 대한 칸트적인 비판', '분석철학과 종교', '종교란 무엇인가', '길 위에서'외 다수가 있음.
육체와 영혼의 괴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육체가 빵을 필요로 한 물질 문명을 필요로 한다면, 영혼은 윤리, 철학,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 문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개인은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작용하는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경제와 정체에 나타난 물질적인 확대와 사랑, 정, 의리, 자비로 나타난 정신적인 양식이 잘 조화되어 있어야 한다. 물질 문명만을 앞세우는 사회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할 것이며, 정신 문화만을 앞세우는 사회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아무런 개혁 의지가 없는 '체년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플라톤은 그의 영혼 삼분설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이성적인 영혼과 명예를 추구하는 기개적인 영혼과 물질을 추구하는 욕정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의 영혼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 개인은 바로 덕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나 국가도 이성적인 영혼에 해당하는 철학자가 통치 계급을 이루고, 기개적인 영혼에 해당하는 농공상인들의 영양 계급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이상국가가 된다. 그렇지 않고 한 가지 영혼만이 우세한 개인이나 한 가지 계급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 개인과 사회일 뿐인 것이다. 물론 오늘날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은 폐쇄된 사회의 패러다임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겉으로는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인간 고유의 창조력을 무시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그가 제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살찌우는 삶을 영위해야 되며, 사회도 이와 같이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를 조화있게 실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양자의 괴리에서 초래되는 구체적인 병폐를 진단하고, 이 병폐를 막기 위한 또 하나의 물질 문명적인 대안이 무엇이며, 이 대한이 가지고 오는 악순환의 결과가 무엇이며, 끝으로 이러한 물질 제일주의적인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겠다. 그러기 위하여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대한 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지나간 과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현재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으로부터 출발해야 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현세주의
현세주의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사상이다. 사람이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행복은 제쳐놓고 육체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더 나아가서 우정, 사랑, 의리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금전이나 권력으로 계산해 버리는 사상이다. 현재 우리의 현세주의는 크게 금전만능주의, 권력지향주의, 결과제일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과거의 한국인들은 금전이나 물질에 대하여 극히 비타산적이었다. 특히 선비에게 있어서 재물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요인이었다. 그리고 일반 부녀자의 경우에도 걸인에게 보리쌀 한줌 집어준 것까지 헤아리는 아낙네는 박복하다고 말했고, 아^36^예 '계집은 그릇 한 죽 헤아릴 줄 몰라야 복받고 산다'고 믿었었다. 이것은 타산이라는 단위조차 몰라야 복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완전히 돈을 버는 기계의 역할에 만족해 있다. 옛날에는 그래도 출세나 권력을 잡기 위하여 재물을 원했지만, 요즈음에는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하여 출세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표현은 이제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나도 돈을 벌어서 남과 같이 흥청망청 쓸 수 있다는 개념으로 타락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금전만능 사상은 차근차근 노력해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끝장을 보려는 한탕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다.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르는 대신에 몇 개단씩 한 번 뛰어오르려고 하고, 가능하면 단 한 번의 '쇼부'로써 끝장을 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금당 사건이었다. 단 한 번의 모험으로 넝쿨째로 떨어지는 호박을 기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현금만능주의, 현찰주의, 한탕주의로 표현된 현세주의는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하며, 내일보다는 오늘을 중요시하고, '나중에 보자는 놈'보다는 '지금 당장 보자는 놈'을 무서워한다.
둘째, 현금만을 숭배하는 현세주의는 권력지향주의로 나타난다. 우리는 권력의 허무함을 10.26 사태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려면 우선 출세를 해야 되고, '뭐니뭐니 해도 끗발이 세야 된다'고 믿는다. 셋째, 현금만을 숭배하고 그 수단으로 권력을 지향하는 현세주의는 결과제일주의를 신봉한다. 모든 것은 결과에 달려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할 일이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고등학생과 취직을 하지 못한 대학생은 낙제생일 뿐이다. 그리고 당장 결과를 생산하지 못하는 학문도 눈에 보이는 생산품을 제조하지 못하는 생산 공장과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을 숭상하는 현세주의는 극단적인 공리주의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현세주의는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하고 내세까지도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샤머니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을 천시하면서 금전만을 추구하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현세만을 추구하고, 이상을 도외시하면서 결과만을 신봉하는 이런 사상은 아무래도 최근에 생긴것 같다. 귀하신 몸 사건, 금당 사건, 하형사 사건, 주교사 사건, 장여인 사건, 은행 대형 사고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물론 현세주의에 나타난 성취 의식이나 상향 의식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보릿고개'를 넘기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의식에 정신적인 성취, 인간의 내면성, 인간적인 대화의 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그리하여 조나단 시걸은 "삶이란 먹는 것 이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미래가 가져다 주는 예측 불가능성 질병
파스칼은 인간을 불확정성과 권태라는 두 가지로 특징지었다. 인간의 미래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불확정적인 미래를 자신의 설계에 맞도록 확정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그의 미래를 어느 정도 확정시켜 놓은 다음에는 곧바로 불확정성이 결여된 미래에 대하여 권태를 느낀다. 그는 다시 '모험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악순환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불확정성과 권태의 쳇바퀴를 왔다갔다하면서 살게 마련이다. 파스칼이 인간의 외로움을 철저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측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예측이 불가능할 때 그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무런 행동 방향을 설정할 수 없다. 그저 물결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면서 사는 로봇이 될 뿐이다.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의 괴리는 인간에게 지독한 예측 불가능성의 질병을 가져온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추구라는 목적 아래 모든 수단이 그대로 용인된다. 그리하여 사회는 순수하려는 마음, 성실하게 살려는 의지, 우정과 사랑을 심는 자세를 팽개치고 오직 금력과 권력에 대한 의지만이 칭찬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돈을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느냐가 문제이며, '어떤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높이'올라가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더욱 높이, 더욱 빨리, 더욱 굳세게'라는 올림픽의 구호는 현대인의 삶의 모토가 된다. 오늘날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전혀 불가능하며, 또한 예측할 필요도 없다. '안개 정국'과 '불투명 사회'를 헤엄쳐 나가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공격 정신과 무조건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만이 필요하게 된다. 도대체 내일을 점칠 수 없으며, "간밤에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해야 되는 상황에서 무슨 예측이 필요할 것인가. 오직 어림짐작과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무모한 행동만이 절실히 요구되며, 또한 그런 사람만이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지독한 예측 불가능성의 질병을 어떻게 치료 하려고 하는가?
오늘만을 위한 삶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의 괴리가 심화되고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는, 그 질병에 대한 유일한 대한으로 쾌락주의를 채택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부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른바 스포츠, 섹스, 쇼라는 3S 문화로 대표되고 있다. 일간 신문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스포츠가 되며, 말로는 국민 순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매일 방영되는 TV의 화면은 우리를 섹스와 쇼로 몰고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섹스와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는 새로운 신화를 믿고 있다. 옛날에는 시합에 이긴 프로 권투 선수가 대통령으로부터 금일봉을 하사받게 되면 이 하사금은 다시 그날 9시 저녁뉴스에 방영되며, 고속 버스라도 타면 4시간씩 프로 야구 중계를 들어야 한다. 물론 감각적 쾌락, 돈, 명예를 추구하는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은 바로 빵이 사람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주의는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 사회를 불신 풍조로 몰고 간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 모든 쾌락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직적인 쾌락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기보다는 이기적인 개인이나 이기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쉽다. 어떤 사람은 남녀간의 섹스와 같은 쾌락은 배타적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성한 휴머니즘이 결여된 섹스는 공유된 쾌락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성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방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남녀간의 관계는 사랑과 성의 오묘한 변증법적인 관계로 승화되지 못하고, 모든 여성을 소유하려는 돈 후안의 경지로 치달을 뿐이다. 그리하여 에리히 프롬은 동성간의 사랑은 포괄적이지만 이성간의 사랑은 한 명의 남성이나 한 명의 여성만을 사랑해야 된다는 뜻에서^36,3^배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사랑하는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발전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방된 결혼'의 저자인 오닐 부부는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랑에 관한 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랑의 성장은 바로 사랑의 성장 자체를 돕는다"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말을 통해 볼 때, 사랑과 성은 변증법적인 승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모든 육체적.물질적 쾌락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돈을 벌 수 있는 액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버는 돈에 비례하여 더욱 커다란 욕심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목이 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고, 선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피를 닦으려고 피를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더욱 커다란 쾌락을 계속 소유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불만을 품게 마련이다.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폭력 장면이 더욱 잔인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셋째, 또한 쾌락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서로 상반되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 비슷하고 상부상조적인 여러 가지의 쾌락이 아니라, 다른 쾌락을 무효화 시키는 상반되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역설적인 본성이다. 그리하여 중년의 남성은 충실한 가장이 되어야겠다는 결심과 동시에 가정을 떠나서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이렇게 상반되는 쾌락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쾌락이란 언제나 그 반대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자기 무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넷째, 모든 쾌락은 인간 전체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인간은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 이상의 것을 동시에 추구하고픈 본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쾌락이 만연한 역사 속에서도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초개와 같이 희생하는 고상한 영혼들이 언제나 존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육체와 더불어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중세 철학의 표현을 빌리면,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넘나들면서 살 수밖에 없는 중간적인 존재다.
다섯째, 모든 쾌락은 일시적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타는 삶의 상변성을 역설했으며, 예수는 우리들에게 먼저 하늘의 나라를 추구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쾌락은 죽음을 초월할 수 없다.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가 인간은 미적인 단계에서 윤리적인 단계로 승화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윤리적인 단계로부터 종교적인 단계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대화의 철학자인 부버는 인간을 관계의 존재 혹은 사이의 존재라고 말했으며, 실존철학자들은 안간은 "세계 내의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즐거운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움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인간 관계는 상대방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불신 풍조다.
쾌락의 배타성과 충족 불가능성은 인간에게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른바 '개명된 이기주의자'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봉쇄함으로써만 자신의 쾌락이 충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진실된 충고까지도 '양의 탈을 쓴 이리'로 간주해 버린다. 불신 풍조가 극도로 만연된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는 모든 것을 인간의 중심으로부터 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뿐이다. 대학 교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훌륭한 지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아름답고 비싼 옷을 입고 있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모든 것은 통계와 겉치레로 판단되고, 양심이나 지성과 같은 단어들은 전근대적인 개념으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서, 불신 풍조만이 득세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설계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 쾌락뿐이다. 지나간 과거의 유산을 재검토한다거나 미래를 차분히 계획한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고 '오늘만을 위한 삶'을 찬미한다. 그리하여 이상은 사라니고 미래에 대한 비전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정신 문화의 필요성
의심은 의심을 해결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 문명의 부정적인 결과들은 물질 문명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 문명이 가져온 현세주의, 예측 불가능성, 쾌락주의, 불신 풍조는 정신문화의 고양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 정신문화라는 하층 구조가 다시 개선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물질 문명이라는 상층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의 단계를 벗어나서 정신 문화의 개발이라는 구체적인 처방의 단계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는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신 문화의 개발을 외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것을 물질 문명적인 발상에서 하나의 슬로건으로 목청을 돋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현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당장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없는 윤리, 철학, 종교는 마치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공장과 다름이 없게 된다. 모든 것은 결과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발상은 정신 문화의 창달이라는 대명제를 바로 물질 문명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정신 문화 빈곤이라는 병폐에 대한 조치는 오히려 그 병폐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인문과학자들을 매도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이 또다시 하나의 통계적인 숫자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것은 바로 인문과학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 문화는 어떻게 개발될 수 있는가? 이것을 윤리, 철학, 종교의 분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람이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동물이 아니다.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해야 된다고 믿는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당위성을 의식하고 사는 동물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먼저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을 꼭 해야 되겠다고 작정해야 된다"고 말했으며, 프랑스의 베이컨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으며, 킹박사는 1964 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인간의 현재 상태가 인간의 당위성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윤리성을 망각한 인간은 동물과 다름이 없다. 둘째, 인간은 철학을 버리고 살 수 없다. 만족한 돼지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민하는 소크라테스로 살아야 하며, 사회와 역사를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면서 살고,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반성'을 계속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이 살이 있는 사회는 비판을 더욱 커다란 비판으로 봉쇄하는 대신에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회'이다. 비판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국민은 국민총화를 이룬 백성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발상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로봇에 불과한 것이다. 반성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반성하지 않는 삶이란 살 가치조차도 없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반성은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이성적인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반성하면서 발전하는 사회가 되려면 먼저 비판적인 기능으로 대표되는 철학이 소생해야 된다.
셋째, 인간은 당위성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 자신이외의 존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함을 믿으며, 허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존재를 희구한다. 인간은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을 갈망하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를 찾는다. "밤이 되면 무신론자까지도 절반은 하느님을 찾는다"는 에드워드 영의 말과 "곤경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는 윌리엄 커밍스의 말도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보편성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가져야 한다거나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극히 비종교적인 발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경험했다. 불교의 부패와 고려의 망함, 그리고 유교의 부패와 조선의 망함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고려의 패망이 오로지 당시 불교의 패망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나라의 패망과 종교의 부패는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이 서로 때어놓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종교는 사람의 사람됨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 보루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참된 사람으로서의 삶을 잃게 되고 그것은 곧장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 권력자들이 잘못할 때 그것을 바로잡아 주고, 그래도 자꾸만 잘못할 때는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가로막아 서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그들과 손발을 맞추어 가며 부정과 부패를 조장한다면 그 나라가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가 정신문화의 빈곤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롭게 개발, 발전, 성취시키는 일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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