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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72 호
단기 4342. 3. 4 (음력 2.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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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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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물의 부족은 개선할 수 있으나 영혼의 가난은 해결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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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짐승이름
“천 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난다./ 천 년을 보던 눈이/ 천 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노나.”(학·서정주)
고구려 옛무덤에는 신선들이 학을 타고 다니는 벽화가 있다. 천 년을 살면 흰빛이 푸른빛으로 바뀌어 청학이 되고, 다시 천 년을 살면 검은빛으로 바뀌어 현학(玄鶴)이라 한다. 지리산에 가면 청학동이 있다는데, 그 청학이 산다는 곳이다. 상투를 틀고 전통적인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교육의 터전으로 알려진 현재의 청학동과 세상을 버린 이들의 보금자리이자 예부터 전해오는 이상향으로서의 청학동이 같은 곳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두루미의 옛말은 ‘두로미’(사성통해)였다. 두로미가 두루미로 바뀌어 쓰인다. 일본말로는 ‘쓰루’(鶴)이니 ‘두루-쓰루’가 대응됨을 알겠다. 우리말 ‘두루’가 건너가 ‘쓰루’(turu)로 굳어진 형태일 수 있다. 뚜루루 운다고 또는 두루 멀리 다닌다고 두루미라는 풀이도 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매우 날카롭고 위엄 있게 들릴뿐더러 흰 날개가 두루마기를 걸친 선비 모습과 같아 보인다. 머리는 붉고 검은 벼슬을 한 듯 고고하다. 먼 하늘을 소리와 품새를 두루 갖추고 유유히 날아가니 이를 뭉뚱그린 데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오늘도 두루미들은 하늘 어디쯤서 가을을 비끼어 날고 있을 텐데.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방짜 유기
기상이변으로 예년에 비해 비 피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무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요즘 식중독 사고도 증가하고 있다. 여름철 불청객인 식중독과 대비돼 떠오르는 말이 '방짜 유기'다. '방자 유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방짜 유기란 구리 78%와 주석 22% 비율로 합금한 우리나라 특유의 금속 제조 기법이다. 주물 유기와 달리 정확한 비율로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궈 망치질을 되풀이해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방짜 유기에 음식을 담으면 O-157 식중독균이 죽고, 음식에 있는 농약 성분이 빠진다는 놀라운 실험 결과도 있다.
방짜 유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놋그릇이 안성 유기다. 안성 유기는 장에 내다 파는 '장내기'와 주문을 받아 만드는 '맞춤'이 있었다. 장내기도 좋았지만 맞춤 그릇의 질이 더욱 훌륭했기에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다. 지금은 '혼자 살기에 안성맞춤인 아파트'처럼 조건이나 상황이 어떤 일에 딱 맞다, 잘 맞아떨어진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고 있다. 전에는 '마추다'(옷을 마추다)와 '맞추다'(돌 등으로 맞게 하다)를 구분해 사용했으나 한글맞춤법을 개정하면서 '맞추다'로 통일했다. 하지만 안성시에서는 이 지역 농특산물에 '안성마춤'이란 상표를 등록해 대표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주말에는 식구들과 함께 집 근처 놋그릇을 쓰는 보리밥집에라도 가서 우리 조상의 혜안을 생각하며 그 은은한 광택에 한번 취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눈살, 등쌀
다음 글에서 틀린 말을 고쳐 보세요.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 오는 일요일 새벽. 나못가씨 뒹굴뒹굴 돌꼇잠에 빠졌는데. 일어나라는 딸아이의 닦달에 눈을 비빈다. '아니 쟤가 웬일이래. 평소답지 않게 가리마 곱게 타 두 갈래로 땋아 늘이고.' 어쨌거나 한숨 더. '안 일어나요.' 아내마저 눈을 가라뜨고 채근한다. 가족 등살에 못 이긴 나못가씨 상황 파악에 나선다. '낫살보다 뱃살이 많다며, 내 건강이 가족의 행복이라며, 장마 끝나면 산에 가자'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나. 그날이 오늘이란다. 뾰두락지 송송한 아들은 옆에, 새침데기 딸과 아내는 뒤에 태우고 북한산으로 간다. 구렛나룻 덥수룩한 젊은 산악인들이 앞서 힘차게 오른다. '한때 나도 저리 헌칠했다'는 말에 아내는 눈쌀을 찌푸리고, 아이들은 외면한다. 오늘 코스는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위문 거쳐 백운대까지. 위문 오르는 너덜겅이 고빗사위다. 넙적다리는 뻑적지근, 가슴노리는 벌렁벌렁. 몰래 비지땀을 훔친다. '아빠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래요.' 쇠줄 잡고 앙가조촘 올라 정상에 선다. 이제는 하산 길. 장단지는 땅기지만 시원한 바람 맞으며 계곡에 발 담그니 이게 행복일세. 옆 식당가에선 동동주가 유혹한다. 배꾸레가 헛헛하니 한잔만 하자는 말에 모두 쏜살같이 내달린다. 주차장에 먼저 온 아이들이 음료수로 하산주를 대신하잔다. '아빠, 뱃살을 위하여.' '아이고 고맙다.' '근데, 차 열쇠는?' '배낭에.' '그럼 배낭은.' 배낭은 동동주를 못 잊었나보다. '나못가.''
정답 : 가르마·등쌀·뾰두라지·구레나룻·눈살·넓적다리·가슴놀이·장딴지·뱃구레
삼복더위
'삼복더위'가 한창이다. 삼복더위란 삼복(초복·중복·말복) 기간의 몹시 심한 더위를 말한다. 삼복은 음력 6~7월에 들어 있으며, 올해는 양력으로 7월 20일, 30일, 8월 9일(열흘 간격)이 복날이다. 복날에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전해져 복날이 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복날과 개는 직접 관련이 없다. 한자 '복(伏)'은 '사람인(人)+ 개견(犬)' 구조로 사람 옆에서 개가 엎드린 모양새이며, '엎드릴 복' '굴복할 복'으로 읽힌다.
절기로서의 복날도 '더위를 굴복시키는 날'이란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에 따르면 '복(伏)'은 서기제복(暑氣制伏), 즉 여름의 더운 기운을 제압 또는 굴복시킨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개고기를 여러 가지 양념·채소와 함께 고아 끓인 국이 개장국으로, 복날에 개장국을 먹는 풍속은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도 나온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옛날 주변에서 보양식으로 쓸 만한 것을 구하기에는 개고기가 손쉬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되지만, 지금도 개고기가 몸에 좋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나 지방·종교에 따라서는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하거나 금기시해 개장국 대신 삼계탕을 즐기며 더위를 쫓기도 했다. 요즘은 삼계탕을 먹는 것이 일반화돼 복날이면 삼계탕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흔히 볼 수 있다. 삼복더위를 줄여 복더위라고 하며, 복달더위·삼복염천·삼복증염 등으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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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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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꽃 - 고은
강물이라면 어느 구비 두런거리며 감돌아오느라고 강물 위 산이라면 그 산그림자라면 어느 마루 넘어오느라고 어느 가녁 떠돌이였다가 고개 수그려 돌아오느라고 이다지도 늦게 와 몇 송이 꽃으로 피어 있는가
슬픔의 절반이 그리움이라면 더 슬퍼하여라
우르르 몰려와 여기저기 환히 깔깔대던 그 숨막히는 꽃시절 지나 다 흩날려 꽃비 내리던 어수선히 멍든 가슴 며칠이나 통으로 지나서 정녕 꽃으로는 벙어리일밖에 없는 이 적적한 시각에 이다지 뒤늦게 와 그렇다고 웃음도 아닌 서러운 울음도 아닌 맨 얼굴로 가만히 피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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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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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 유준호
저만치서 바라보면
어둠을 살라먹고
홀로 필 꽃잎의 아름다운 춤인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눈물이 그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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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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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夢參, <偶吟> 1648(인조26) ~ 1711(숙종37)
心有是非知己反 口無長短及人家
내 자신 옳고 그름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남의 장단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말아야지.
消除惡念霜前葉 培養善端雨後茅
서리 앞에 잎 지듯이 나쁜 생각 떨어내고 비온 뒤에 띠 자라듯 착한 마음 길러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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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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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安秉煜, 1920년~) - 고독과 사색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 괴테
제일의 탄생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나의 몸뚱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탄생이요 신체의 탄생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 1의 탄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 2의 탄생이 있다. 자아가 탄생하고 나의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 시대에 이것을 경험한다. 사람은 제 2의 탄생과 더불어 참된 자기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에는 제 1의 탄생밖에 없다. 동물은 정신 탄생과 자아의 탄생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제 2의 탄생을 갖는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인 동시에 신체를 넘어서는 정신적 존재다. 인간은 육을 가진 영이다. 우리는 육체의 차원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아와 인격과 정신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영광과 존엄성이 있는 동시에 고민과 불안이 또한 따른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에밀"의 저자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어머니로부터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하고, 한 번은 인간으로서 사회에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의 2중 탄생을 간결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탄생에는 언제나 심한 고통이 따른다. 어머니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자식을 낳는다. 제 1의 탄생에서는 한없는 신체의 고통이 동반한다. 제 2의 탄생에서는 신체적 고통 대신에 정신적 고뇌가 따른다. 우리의 정신은 불안의 골짜기를 헤매야 하고, 회의의 안개에 휩쓸려야 하고, 허무의 어두운 밤을 방황하고, 절망의 절벽에 부딪쳐야 한다. 자신 만만한 생의 충실감을 느끼는가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의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즉 빛과 어둠의 교차를 체험한다. 그것은 제 2의 탄생을 위한 인간 자아의 악전 고투요 정신적 몸부림의 현상이다.
인생의 의미와 자기의 운명의 부조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생의 목적과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젊은이들은 인생의 이러한 근본적인 위문 앞에 엄숙히 서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한 해결과 대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그는 회의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해야 하고 자기의 생을 저주하고 싶은 우울한 심정을 느낀다. '나를 이 세상에 이끌어 온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만일 그러한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항의하고 싶다.' 이 말은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존재의 우연성에 관해서 항의한 말이다. 이것은 비단 키에르케고르만의 항의가 아닐 것이다. 제 2의 탄생을 경험하는 젊은 혼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반드시 한 번은 던지게 되는 생의 항의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린다면 피투성의 존재다. 게보르펜하이트의 자각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 내던졌는가?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린다. 불교는 인연이요, 업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운명에 돌리기도 하고 우연에 돌리기도 한다. 실존 철학자들은 이것을 인생의 부조리라고 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데 대해서 아무도 합리적인 해석과 이유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그의 명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의 짧은 기간이 내 앞과 뒤에 연결된 영원 속에 매몰되며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공간이 나를 알지도 못하고, 또 나도 알지 못하는 무한의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한다.' 이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데 대한 파스칼의 철학적 회의의 말이다. 분명히 인생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부조리요, 아포리아다. 젊은 생명들이 이러한 문제에 회의와 사색의 눈초리를 돌릴 때 그는 정신의 제 2의 탄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을 맞이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보람 있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왜냐하면, 제 2의 탄생이야말로 새로운 자아, 참된 자기, '나'다운 내가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의 차원에서 생활의 차원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고독에의 향수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갖는다. 첫째는 밖으로 향하는 눈이요, 둘째는 위로 향하는 눈이요, 셋째는 안으로 향하는 눈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은 자연과 객관적 대상의 세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눈은 신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로 향한다. 안으로 향하는 눈은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특색은 내향성과 내면성이 있다. 그는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남에게서 자기에게로 돌린다. 청년은 주로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자기 발견, 자기 탐구, 자기 성찰, 자기 응시의 눈이다. 내가 나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눈이다.
사색에는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색하기 위해서 주위의 접촉에서 격리되어 조용한 장소를 구한다. 더구나 자기 성찰에는 그러한 환경이 요구된다. 고독은 사색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응시하고 조용히 인생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청년은 고독에의 향수를 느끼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과 같다. 고독의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시간이다. 젊은 혼은 고독 속에서 마음껏 꿈을 꿀 수 있고 감상에 젖을 수 있고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낭만의 세계를 달릴 수 있다. 내가 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젊은이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고 시인 괴테는 노래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젊은 생명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애지자의 정신만이 날개를 가진다'고 플라톤은 말하지 않았던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향해서, 미를 찾아서,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여 한없이 위로 높이 날개를 펴며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결코 현실은 아니다. 이데아에 대한 꿈과 이상에 대한 도취는 현실의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꿈은 깨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여러 사상가들이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한 애찬하였다. 고독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지한 사색을 위한 정신의 터전이었다. 니체는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라고 하였으며, '진리는 호의에서 착상된다'라고 하였다. 니체는 고독한 산보 속에서 사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도 또한 그러했다. 그의 줄기찬 철학적 사색은 케니하스베르크의 고적한 숲 속을 조용히 산보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철인 스피노자는 홀로 렌즈를 닦으면서 사색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인품은 타인과의 접촉에서 연마되고 원만해진다. 모가 진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둥그런 자갈이 되듯이 규각을 가진 인간은 상호 접촉하는 가운데서 원만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사색에는 고독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고독 속에서 벗어나 현실의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남과 교통하는 사회적 실존이다. 우리는 사색을 위해서 가끔 고독의 세계를 갖는 것은 좋으나 고독 속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나와 너와의 생명적 공감의 따뜻한 인간적 대화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고독은 정신의 산책처지 영원한 안식처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와 같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야수나 신뿐이다.'
'네 영혼은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라고 독일의 시인은 노래했다. 우리는 사색과 자기 성찰을 위해서 고독한 환경을 가끔 택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고독은 우리의 안식처는 아니다.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는 '고독 속에서 살아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말 고독 속에 혼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거인이요, 정신력이 비상하게 강한 인간이다. 문호 입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한 인간이다.' 산에 가면 거리가 그립고 거리에 있으면 산이 그리워진다. 자연 속에 있으면 문명이 그립고 문명 속에 있으면 자연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이다. 고독도 그와 비슷하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 속에 있으면 고독이 그리워진다. 청년들은 고독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의 고독은 흔히 감상주의로 미화된 고독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독에 대한 향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니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정신적 거인만이 진정한 고독에 견딜 수 있었다. 청년의 고독은 애상과 낭만이 짝짓는 세티멘털리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고독할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군중 속에 섞일 때 더 한층 고독을 느낀다. 서로 따뜻한 대화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낯선 군중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낄 때 우리는 고독의 비애를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고독이 더욱 심해진다.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들 속에서 대화할 벗이 없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고독 속의 고독보다도 군중 속의 고독이 더욱 외로운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의 근대 합리론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낸 명언이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자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간다. '먹고 자고 생식하고 죽는다.' 동물의 생은 이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러나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요, 양식의 기능이다. 이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의 빛이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되어 있다.' 데카르트 철학의 명저 "방법 서설"의 제일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말하는 양식, 즉 봉상스란 곧 이성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이성이라는 자연의 빛이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성이란 '사물을 바로 판단하고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해서 옳고 그른 판단을 똑똑히 가져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머리는 머리가 아니다. 바로 사색하고 옳게 판단할 줄 모르는 이성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의 이성다운 속성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 진리와 허위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이성의 생명이다. 사색하는 능력과 이성의 빛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호모사피엔스의 인간관은 분명히 인간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코키토 에르고 숨'은 인간이 인간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우리는 파스칼에서 본다. 파스칼은 데카르트보다 27년 후에 출생해서 12년 후에 별세하였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간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지극히 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생각하는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인간의 품위는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게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사색에 관한 유명한 단장을 몇 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사색이 인간의 위대성을 이룬다.'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돌멩이나 짐승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품위는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기로 힘쓰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다.'
분명히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성과 위대성은 인간이 이성을 갖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파스칼이나 데카르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강조하고 선언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인의 사색에 관해서 하나의 위기를 지적하고 싶다. 현대인은 매스컴의 위력에 눌려서 자기 머리로 끈기 있게 생각하는 자주적 사고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스컴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어 보아야 하고 라디오를 들어야 하고, 또 TV와 마주 앉고 영화를 보게 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는다. 사물에 의해서 나의 사색을 정리하고 나의 판단을 갖기 전에 남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남의 의견을 읽게 된다. 우리의 머리는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기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전략하기 쉽다. 생각하는 갈대에서 감각하고 수용하는 갈대로 변질한다.
현대인은 자기의 머리로 줄기차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의식의 과잉'과 '예지의 빈곤'이것이 현대의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결합이다. 남의 판단과 의견을 비판과 사고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의 노예요 사상의 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가져야 한다. 옛날의 철학자들처럼 스스로의 머리로 줄기차고 끈기있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에 철인 칸트는 청년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자기 발로 서라.' 이것은 사색에 관한 귀중한 헌장이요, 계명이 아닐 수 없다.
생을 위한 사색
우리는 사색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색은 언제나 무엇에 관한 사색이다. 무를 사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용이 없는 사색은 공허하다. 젊은 생명은 무엇을 위해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의 시절이다. 청년의 눈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남에게서 나에게로 향하고 외적 대상에서 내적 자아로 향해야 한다. 청년의 사색의 초점은 주체적 자아의 자각과 확립에 있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하는 것이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충실은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중심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22세의 젊은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이가 주위에서 자기를 구별하여 자아에 각성하게 되려면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거니와 높은 정신 생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야말로 참된 의미에 있어서 자아에 각성하고 깊은 의미에서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신은 바라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내가 죽고, 또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야말로 자아의 눈이 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행동하련다.'
고독과 성실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사색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어린아이가 '이것은 나의 집이다. 나의 손이다'하고 '나'라는 말을 쓰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와 타아의 구별은 어린애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신적 사건이다. 높은 정신 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자각에서부터 '나는 나다'하고 자아에 각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탄생은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의 탄생이다. 그것은 나다운 '나'가 태어나는 것이요, 본래적 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옮기어 '그노티 세아우톤'이라고 일기에 썼다. 영어로 옮기면 'Knowtheself'다.
옛날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대리석 벽에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생의 금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청년들의 사색의 목표는 자각에 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의지해서 설명하면 내가 그 때문에 살고 또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인생의 이념을 발견하는 일이요, 신 또는 하늘이 나에게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인간은 사명을 느끼는 존재요, 사명을 위해서 사는 존재다. 인간은 사명을 자각할 때 위대해진다. 일간은 사명적 존재다.
우리는 이 역사적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내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 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야 하고, 또 던질 수 있는 존재다. 인생은 가치를 창조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저마다 자기다운 천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고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아를 실현하고자 자기의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헌신 몰두할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곧 창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상 사회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 나의 피땀과 노력으로 인해서 사회의 한구석이 밝아지고 역사의 한 모퉁이가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인생을 성실한 창조의 일터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할 때가 곧 청년 시절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다운 방식으로 천분을 갖고 있다. 둥근 돌멩이는 둥글어서 쓸데가 있고 모난 돌멩이는 모가 나서 쓸데가 있듯이 사람은 각자 개성적 천분을 지닌다. 우리의 할 일은 그것을 올바로 발견하고 꾸준히 키우고 보람 있게 발휘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보낸 명령이요 목숨이다. 그것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인간은 높은 사명을 자각할 때 생활에 일관한 목표가 생기고 정신의 확고한 자세가 선다. 행동의 뚜렷한 원칙이 생기고 튼튼한 신념이 박힌다. 인간은 높은 사명에 살 때 비로소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불의의 타락 속에 전락되지 않는다. 진실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인생에 보람을 주는 것은 높은 사명의 자각과 실천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너 자신의 사명을 알라'는 뜻이다. 자아의 자각은 자기의 사명의 자각이다. 젊은이의 사색은 오로지 여기에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간은 사색한다. 그러나 사색은 사색을 위해서 사색하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행동을 위한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한다. 옳게 행동하려면 옳게 사색해야 한다.
사색이 없는 행동은 혼돈과 방향 상실의 행동이 되기 쉽고 행동이 없는 사색은 공허와 현실 유리의 사색이 되기 쉽다. 모두가 불완전함을 면치 못한다. 중국의 저명한 유가 사상가 왕양명이 이미 갈파한 바와 같이 지는 행의 시초요, 행은 지의 이루어진 것으로서 지행은 합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색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고 행동은 사색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 옳은 사색에서 옳은 행동이 나오고, 옳은 행동은 사색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저마다 옳게 살기 위해서 옳게 사색하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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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살아가는 길의 선택 - 박동규(문학평론가)
1939 년 경북 월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월간'심상'편집고문. 저서에 에세이집 '별을 밟고 오는 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등과 논문집 '한국 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현대 한국소설의 성격 연구', '전후 대표작품 분석'외 다수가 있음.
살아 보면 알 수 있는 삶이기에
어린 날에는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삶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 막연하게 추상적 개념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 빨간 판에 별을 달고 지나가는 지프차를 보게 되는 날이면 내가 군인이 되어 별을 달고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되기고 하고, 선생님이 위대한 과학자의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날에는 과학자가 되어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는 꿈을 꾸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어린 시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꿈꾸며 겪었던 꿈의 솔직한 고백이다. 뿐만 아니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환상의 그림도 이와 같이 형태가 잡히지 않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의 여성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피난처 대구에서 살고 있었다. 이때 나는 아침이면 학교로 가는 길에 담요를 감아서 둥글게 만들어 어깨에 마치 캠페인을 벌이는 여성들이 띠를 감듯이 하고 시가를 서글픈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미군의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팔소매나 옷의 길이가 맞는 군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이 이렇게 행진을 하고 난 다음 곧 기차를 타고 일선으로 달려간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역 앞을 지나게 되어 있어서 나는 역 안에 가끔 들어가 화물 열차에 빽빽이 앉아 있는 군인들이 북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역 개찰구 근처에서 흰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나 젊은 아낙네들이 플랫폼 안에 있는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울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역에 들러 이들을 보고 오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오라고 일러 주셨지만, 나는 이 비참한 광경이 내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어떤 충동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자주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역에서 본 광경은 나로 하여금 전쟁의 비참함이나 헤어짐의 서러움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보다도 더 내 삶의 길에 영향을 미친 것은 생명을 지니고 사는 일이 결코 자신이 우선하는 방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이 막연한 느낌의 종착역은 결국 추상적인 개념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마치 하나의 탑을 세워 가듯이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이를 깨닫게 된 것은 물론 대구역 앞에서 펼쳐지는 이별이 자신의 생명 의지와는 관계가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겪어 나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날의 이 체험을 통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살아 있다는 것에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삶을 스스로 소유하자고 하는 일의 첫걸음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에 대한 겸허한 자아 각성은 살아 보면 안다는 옛 어른의 술회적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다 커서 아들 낳고 살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아들을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를 말해 주는 뜻이 담겨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새로 생명을 유지해 가는 일이 우선이라는 감추어진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 삶이기에
이 하루의 삶을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끈으로 묶어 가면서 이를 보다 바르고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실제로 한밤중 캄캄한 산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가 변하지 않는 별자리를 보고 가야 할 곳을 알아내듯이, 인간의 삶에도 이러한 방향을 금세 알게 해 주는 지표가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젊은 날 내가 어느 여성과 사귀고 있을 때였다. 이 여성은 성격이 섬세해서 내가 아무렇게나 던지는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다음에 만나면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어요."하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잊어버린 아무런 의미도 없이 한 말을 자꾸 물어 오니까 점점 서로 만나 대화하는 것이 거북해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말로 "오늘 바람이 시원하지요"하고 이야기를 하면, "시원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지요"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여성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 말도 그대로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여성과의 만남이 뒤틀리고 나서 나는 어느 날 문득 '어떻게 해야 여성과의 대화에서 내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전하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화의 방식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분위기에 따라 다르고 교육의 수준에 따라 다르고 살아온 과거에 따라 다르고 교육의 수준에 따라 다르고 살아온 과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인간끼리의 대화에는 방식은 있지만 그 방식에 알맞는 이해의 폭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체험에서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인간과 세계와의 교섭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바르게 그려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바라보며 이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는 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위대한 사랑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는 위대한 사랑에 대한 전망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인가' 하고 묻게 되지만, 이 물음은 별자리를 보고 깊을 찾아가듯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전망을 지니고 이를 향해서 지향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그 방향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혼자 방안에 앉아 어떻게 살아 볼까 하고 궁리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제거해 놓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물어 보는 것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지향점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지난 봄날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문을 밀고 나오다가 앞집 담장에 눈길이 갔다. 앞집은 이십 년 전에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퇴근을 하다 보니까 담장 곁에 라일락나무를 다섯 그루나 심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저 사람이 라일락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십 년이 지난 이날 아침, 앞집의 라일락나무는 엄청나게 자라서 담장을 넘어 하얀 벽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술을 조금 마셨는데 여간 어지럽지가 않아서 택시에 올라타고는 창 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그냥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운전기사가 "다 왔어요" 해서 돈을 치르고는 가방을 들고 내렸다. 캄캄한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코 끝에 향긋한 라일락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집은 골목 안에 있는데 라일락 향기가 큰길까지 흘러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리 동네에 온 것에 안도의 마음이 생기고 그 향기를 따라 올라가 우리집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니 온 동네에 밤안개가 깔리고 있었고, 그 안개와 함께 라일락 향기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뿌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라일락꽃처럼 누구에게나 향기를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이 라일락나무처럼 누구에게나 향기를 나누어줄 수 있는 삶이 되는 것, 이런 것이 하나의 지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벌어 큰 집을 가지고자 할 때는 경제 운용의 상식을 배워야 하듯이, 총체적인 자아의 삶의 가치를 어떻게 세워야겠다는 질량을 지닐 때 비로소 가야 할 방법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의 목표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목표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무거운 삶의 짐을 대신 져주지 않듯이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외롭고 쓸쓸함을 느낄 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외로움의 무게를 가늠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지향을 느낄 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외로움의 무게를 가늠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지향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명철한 자성이 있어야 하고, 이 자성은 보다 나은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느냐는 자아 욕구의 근거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삶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어떤 고행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젊은이가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신부감이 괜찮은 여성인가를 물어 온 적이 있다. 나는 부모에게 물어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부모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젊은이는 받는 입장에서만 부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주는 입장의 부모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없어서 자식에게 주지 못하지, 있으면서도 주지 않는 부모는 드물다. 더욱이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없는 것은 부모의 무능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남들은 다 잘 받는데 자신만 받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부모와 자식은 줄 것과 받을 것들 사이에 두고 맺어진 인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잊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인 것이다. 주고받기 이전에 존재하는, 나를 있게 한 사람과 나를 이어가는 사람이라는 혈연의 생명적 동일성을 의식한다면 이러한 관계의 설정이 보다 정직하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은 자칫 자신의 편견적 동굴에 갇혀서 남의 훌륭한 삶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서만 삶의 설계를 하려고 하는 일이 있다. 훌륭하고 가치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한 삶을 그려보는 일이야말로 바쁜 길을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갇힌 세계를 벗어나서 자신을 둘러보고 진실한 삶이 어떤 것인가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
입시철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을 때 친구를 만나면 "자식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어"하고 무척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 대학에 들어갔어?"하고 내가 물으면, "대학은 좋은 데 나와야 취직도 제대로 하지 않는가"하고 도리어 묻는 나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는 경우가 있다. 친구의 말이 옳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취직도 잘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취직을 하여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일을 하다가 보면 곧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기계적으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일을 하다가 보면 곧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기계적으로 월급을 보고 살아가는 자신의 초라함에 실망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살아가는 일에 대한 자신의 명확한 삶의 지표, 즉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은 이에게는 소방관이 되든, 경찰관이 되든, 혹은 공무원이 되든 자신의 삶이 보람있게 마련이고, 더욱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직업의 귀천이나 직업이 주는 옹색한 열등감이 생길 수 없는 법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싶은 의욕을 가진 이가 교수를 하고, 정의로운 삶을 세상에 구현하고 싶은 이가 검사나 변호사를 해야 바른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을 기계화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이는 누구나 이 생명으로 해서 이 세계에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생명의 가치를 높이거나 허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이 생명의 의미를 어떻게 세워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정직한 삶이 가치있다는 점을 믿고 있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고 자문을 하는 일이야말로 의미있는 생애를 만드는 첫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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