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용(1919~1988)
가을의 여정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그리고 여름은 여름, 겨울은 겨울대로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그대로 다 새로운 즐거움을 가슴 속에 안겨다 주는 청신제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농촌은 농촌대로 전원의 유장한 목가적인 맛을,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것만이 지니는 독특한 자연의 시정을 선물하는가 하면, 새롭고 낯선 도시의 가로는 그것대로 흙 속에 파묻혔던 사람들에게 산뜻한 미지의 감각에 경이에 찬 눈동자를 뒹굴리게 한다.
그러기에 천하 명산 금강산도 계절에 따라 봉래, 풍악, 개골, 금강 등 그 때마다의 승경의 아치를 상징하는 이명들을 가지고 있다. 새 움 트는 봄의 정경이 산책이나 소풍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리듬이라면, 여름의 무르익은 녹음과 작열하는 태양은 그대로 바다의 유혹을 자극하는 정열 발산의 표정임에 틀림없는 성싶다.
앙상한 가지에 설경어린 겨울 시계가 남성적인 장엄미를 과시하는 것이라면, 사색이 곁들인 여정의 풍일은 아무래도 가을만이 간직한 자연의 격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가을! 그 음향의 여운 속에는, 그 너머의 첩첩한 시각과 굽이굽이 상념의 계속을 함께 함축하여 주는 낭만이 깃들여 있는 것만 같게 여겨짐을 어찌하랴. 티없이 맑게 트인 드높은 하늘을 끝없이 훨훨 날고만 싶은 충동은 가을만이 지니는 독점물인 것만 같다. 먼지 속에 복닥거리는 도시의 소음을 잠시 외면하고, 놀진 저물녘 차창에 기대어 시골 초가집 지붕에 널어 말리는 빨간 고추와 싸리 울타리에 늘어진 노오란 호박에 눈을 주며 엑조틱한 정감에 잠기는 것은 비단 소녀의 값싼 감상쯤으로만 돌릴 것인가...
가을이라면 으레 곁붙는 푸른 하늘, 귀뚜라미, 기러기, 그리고 단풍과 낙엽, 이것들은 시인 묵객의 입에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작문 구절에까지도 예사로 오르내려 이젠 좀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씌어질 나름으로, 그 맛은 또 그 맛대로 전연 가셔진 것은 아닌 것만 같다.
가을 나그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첨단의 하나인 제트기의 여로에서도 맛보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그러나,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다음날 점심을 파리에서 먹어야 하는 기계 문명을 현기증 나는 메커니즘 속에서는, 계절의 신비로운 순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자못 의심이 가시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죽장 망혜 단표자의 옛 풍류는 아직도 산정의 진미 속에 천고여하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 하면 '나그네'와 더불어 떠오르는 추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부전 고원의 아침 해돋이, 자작나무 수풀을 건너 보이는 호반의 정회와 금강산 상팔담의 사파이어같이 맑고도 푸른 물에 비낀 석양 무렵의 다감한 회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휴전선 너머 먼 이방 마냥, 흘러가는 구름에 착잡한 회상만 얽힐 뿐이다. 운악산도 금강산과 같은 산맥 줄기여서 그에 비견할 수 있는 승경이라고들 하지만, 백보를 양보해도 금강의 절승에 견주면 해갈의 경지에도 닿지 못하는 끝없는 아쉬움이 감돌 뿐이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자꾸만 가고만 싶어지니, 이도 또한 병이런가...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없다. 설악도, 지리도, 속리도, 한라도 다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또 가고 싶은 그 이상의 구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그저 그만 정도의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가을을, 이 상량한 계절을 도심에서 새기며 그대로야 보낼쏜가?
유혹이 거듭되는 여정, 단풍이 좀더 짙어지면 가야산 유곡의 해인사라도 찾아야만이 가을의 병은 치유될 것만 같다. 가을은 소녀처럼 가슴 부푸는 계절, 더욱이 온 누리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다는 이 땅의 가을 하늘! 인공이 미비하니 천부에라도 기대볼까? 그 가을은 여수를 지겹게 안겨다 주기에 더울 매력을 느끼는 것이나 아닐지...
나의 고향
1
나의 고향은 함경도 북청이다. 북청이란 지명이 사람들의 귀에 익게 된 것은 아마도 '북청 물장수' 때문인 것 같다. 수도 시설이 아직 변변하지 않았던 8.15 전의 서울에는 물장수가 많았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북청 사람이었던 까닭으로 '물장수' 하면 북청, '북청 사람' 하면 물장수를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청 사람이 물장수를 시작한 것은 개화 이후, 신학문 공부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북청 물장수치고 치부를 하기 위해서 장사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머리 좋은 조카나 사촌을 위해서까지도 그들은 서슴지 않고, 희망과 기대 속에 물장수의 고역을 감내했던 것이다.
여기에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삼청동 일대에다 물을 공급하는 사람 중에, 중늙은이 북청 물장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중 무휴로,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물지게를 지고는 물 쓰는 집에서 돌아가며 해 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그들의 합숙소인 '물방'에서 잤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물지게를 지고 어느 부잣집엘 들어갔더니, 그 집 마나님이 방금 배달된 등기 우편물을 받아들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건지를 몰라 어찌할 바랄 모르고 있었다. 마나님의 하도 안타까워하는 양을 보다못해, 그는 그 편지를 비스듬히 넘겨보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일러 주었다. 판무식쟁이로만 알았던 물장수의 식견에 감탄한 마나님은, 그 후부터 그 물장수를 대하는 품이 달라졌다. 다음해 3월 상순, 어느 해질 무렵이었다. 그제야 겨우 물지게를 지고 그 부잣집 대문 안에 들어선 그 물장수는 이미 얼근히 취해서, 물통에는 물이 반도 안 남았고 바지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아들의 경성 제대 예과 수석 합격의 보도가 실린... 문득 파인의 시, "북청 물장수"가 입 속에 맴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2
우리집에는 어른의 생일을 차리는 법이 없다. 부모의 생사도 모르고 사는 불효 자식이 저 먹자고 제 손으로 생일을 차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고향 생각이 가장 절실한 것은 추석을 맞을 때다. 이 날 우리는, 차례를 지낼 대상이 없으므로 일찌감치 등산복 차림을 하고 우이동이나 도봉산으로 간다. 거기서 달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들국화의 향기를 맡는다. 개울의 돌을 들추고 가재를 잡는다 하며 신명나게 놀지만,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북녘 하늘 한끝에 시선을 막은 채 끝없는 추억과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뭉쳐진 덩어리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날 밤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아이들은 흥겹게 합창을 하지만, 나와 아내는 어느새 착잡한 심정에 잠기고야 마는 것이다. 이럴 땐 사진첩이라도 펼쳐 보면 좀 나으련만, 고향의 사진은 한 장도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결혼 사진만이라도..."하고 아쉬운 푸념을 되뇐다. 그러니, 차라리 눈이라도 감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명멸하는 것이다.
8.15 직후 서울에 온 나는, 고향이 그립고 궁금하여 그 해 겨울 방학과 이듬해 여름 방학, 두 번을 고향에 다녀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집에 닿아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보안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당일로 60리가 넘는 군청소재지의 보안서에 연행되어 1개월 간의 교화소 신세를 졌다. 그 때의 죄명은 우습게도 '하경자'라는 것이었다. 서울서 내려왔다고 해서 그런 해괴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출감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나의 절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이며 그 쪽에서 열성적으로 깃발을 날리던 Y가, "너를 감옥에 집어 넣은 것도 나고, 나오게 한 것도 나다." 하고 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등골을 스쳐 내리는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 서울로 돌아온 후 얼마 동안은, 고향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고향 꿈을 꾸면 꼭 붙잡혀 가서 욕을 보는 장면만 나타나고, 빨리 서울에 가야겠는데 하고 신음하다가 깨는 것이다. 그 그리운 고향이 왜 무서운 꿈으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어머니가 그립다. 나는 어릴 때, 수양버들이 서 있는 우리집 앞 높직한 돌각담에 올라가 아득히 먼 수평선가를 스쳐 가는 기선을 바라보면서, 외국으로 유학간 아씨들을 그려 보곤 했었다. 이젠 80이 넘으셨을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면, 지금쯤 그 돌각담 위에 홀로 서시어, 터널 속으로 사라지는 남행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시며, 흩어져 가는 기차 연기 저 너머로 안타깝게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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