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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59 호
단기 4342. 2. 7 (음력 1.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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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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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샘터상 작품 공모
삶에서 건져 올린 진솔하고 따뜻한 글들을 기다립니다. 샘터가족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바랍니다.
●응모 부문
생활수기 부문(제30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체험담, 합격, 저축 수기, 감동의 투병기 등 많은 이에게 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인간 승리기.
동화 부문(제31회) 다른 매체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 동화.
시조 부문(제34회) 매년 ‘샘터상 시조 부문’ 입상작 발표 후 이듬해 4월호까지 매월 <샘터 시조>란에 실린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됨
● 작품 분량 : 200자 원고지 20매 안팎(생활 수기, 동화 부문) ● 응모 마감 : 2009년 2월 29일 ●접수 방법 -우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5 샘터 편집부 샘터상 담당자 앞 (우)110-809 (겉봉투에 응모 부문 기재) -홈페이지 : 월간샘터> 샘터상 게시판(바로가기)
●각 부문 당선자 및 입선자에게는 4월에 열리는 샘터상 시상식에서 상패와 상금을 드립니다. ●응모 부문,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반드시 기재하여 주십시오. ●보내신 원고는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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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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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바보나 죽은 자만이 절대로 자기의 의견을 변화시키지 않는다.(제임스 럿셀 로우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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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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믜운이
사람이름
사람이름에 ‘禿’(대머리 독)이 자주 쓰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을 보면 한자로 禿終(독종)이라 적고 한글로 ‘믠죵이’라 하였다. ‘믜다’(禿)는 머리가 벗어졌다는 말이다. ‘믜-’가 든 이름에 ‘믜/므이(해삼)·믜놈이·믜돌이·믜심이·믜장이·믠덕이·믠동이·믠두이·믠즁이·믤돌이’가 있다. ‘민둥산’은 ‘믠동이(대머리) 산’이며 겸연쩍고 어색할 때 ‘민둥하다’고 한다.
왕숙천 동쪽 남양주시 한강 나루는 예로부터 독음진(禿音津)이라 불렀다. 현재 이곳 수석동에 ‘내미움·외미움’이란 땅이름이 있음을 볼 때 禿音은 ‘믬’이 아닌 ‘믜움’을 적었던 것 같다. 渼音津(미음진)이란 다른 표기에서 보듯 이 나루는 ‘믜움나루/믜음나루’로 불린 모양이다.
‘밉다’는 말을 적을 때도 禿이 쓰였다. ‘밉다’는 옛말로 ‘믭다’다. ‘믜운이(禿云)·믭동이·믭쇠’는 그런 뜻으로 쓰인다. ‘믜·믠·믤’ 자리에 ‘미·민·밀’로 적은 이름도 있으며, ‘미금이·미달이·미동이·미심이·민이·민동이·밀금이·밀동이’는 그런 보기다.
미운 얼굴이나 행동, 미운 짓을 하거나 밉게 생긴 사람을 ‘밉상’이라고 하며, 이름에도 ‘밉상이’가 있다. ‘밉’(未邑)이 든 이름에 ‘밉돌이·밉사리·밉쇠’가 있다. 이름은 ‘미우나 고우나’ 부모에겐 ‘금쪽같은 내 새끼’였으리라.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재(齋)/제(祭)
1980년 5월 군홧발에 짓밟힌 광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국립5ㆍ18묘지 안장이 검토되고 있다. 그는 "필름의 마지막 1cm까지 버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다짐했다"는 말로 당시의 치열함을 회상하기도 했다. 5월 18일엔 민주항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불교계에선 해마다 '천도재'를 올린다. '천도재(薦度齋)'란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 의식이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사람이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천도재의 하나다. 그러나 이들 단어를 제사와 연관지어 천도제ㆍ사십구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조계종은 부처님 오신 날인 26일까지 전국 사찰에서 희생자를 위한 천도제를 올리도록 했다" "어머니의 사십구제엔 카네이션 한 다발을 안고 가야겠다" 등은 잘못 쓰인 예다. 부처에게 드리는 공양, 명복을 비는 불공을 뜻할 때는 '재(齋)'라고 써야 한다. 맡은 일엔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서 잇속에만 마음을 둘 때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무심코 '젯밥'이라고 쓰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러나 잿밥은 불공할 때 부처 앞에 놓는 밥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차려놓는 젯밥과 다르다. 젯밥으로 쓰고 싶다면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 있다"라고 해야 한다.
즉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으로 쓸 때는 재(영산재ㆍ백일재), 죽은 사람의 넋이나 신령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인 제사(祭祀)의 의미일 때는 제(위령제ㆍ추모제ㆍ사직대제ㆍ석전대제)로 쓴다.
가겠소 / 가겠오
인터넷을 항해하다 보면 재미로 '하오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카메라는 가격 대비 성능은 좋은 것 같소' 식이다. 외계어와 속어·비어가 난무하는 가상공간에서 이런 예스럽고 점잖은 어투를 만나니 생뚱맞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갑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가겠오'라고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겠소'로 쓰는 사람도 있고, '같소'라고 쓰는가 하면 '같으오'라고 쓰기도 한다. 어떻게 쓰는 게 바른 것일까?
'-소'는 용언의 어간이나, 어미 '-었-' '-겠-' 뒤에 붙어서 쓰인다. 앞의 말이 받침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다. 예를 들면 '먹다-먹소' '가다-가소' '살다-사소' '낫겠다-낫겠소' '접었다-접었소'처럼 쓸 수 있다.
'-으오'는 받침 있는 용언의 어간 뒤에 쓰인다(ㄹ은 제외). 예를 들면 '먹다-먹으오' '낫다-나으오' '깨닫다-깨달으오' '읽다-읽으오' '깊다-깊으오'처럼 쓸 수 있다. '살다-살으오'처럼 쓰지는 않는다.
'-오'는 '이다' '아니다', 받침 없는 용언, ㄹ받침인 용언의 어간, '-(으)시-' 뒤에 붙는다. 예를 들면 '이다-이오' '아니다-아니오' '예쁘다-예쁘오' '가다-가오' '살다-사오' '웃으시다-웃으시오'처럼 쓸 수 있다.
'가겠다'의 경우 어미인 '-겠-' 다음에는 '-소'를 쓰므로 '가겠소'로 쓰는 게 바르다. '같다'는 어간 '같'에 받침이 있으므로 '-으오'를 쓸 수도 있고 '-소'를 붙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같소/같으오'가 모두 가능하다.
알은척 / 아는 척
사람을 보면 관심을 갖고 서로 인사하며 지내자는 뜻으로 흔히 '아는 척(=체) 좀 해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때에는 '알은척(=알은체) 좀 해라'로 말해야 옳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알은척하다'보다 '아는 척하다'가 더 널리 쓰인다. '알은척하다'와 '아는 척하다'는 서로 의미가 다른 말이다.
'알은척하다'는 '얼굴이 익은 사람 하나가 알은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다음에 만나면 알은척하지 않겠다'처럼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는 듯한 태도를 보이거나 사람을 보고 인사하는 표정을 지을 때 쓴다. 반면 '아는 척하다'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하니?'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가 망신만 당했다'와 같이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는 듯한 것처럼 꾸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아는 척 좀 해라'라고 말을 하면 '잘난 척 좀 해라'라는 전혀 다른 뜻이 되고 만다.
한 가지 더 기억해 둘 것은 '알은척(알은체)하다'는 한 단어이고, '아는 척(체)하다'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알은척하다'는 '알은척'이라는 명사에 '-하다'가 붙어서 된 동사다. 보통의 경우 '알다'에 관형형 어미 '은'이 결합하면 '안'이 되는 것과 달리 '알은'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은척(알은체)하다'가 한 단어로 굳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알은 척하다'처럼 띄어 쓰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사람을 만나면 '알은척하는' 습관을 기르고, '아는 척하는' 태도는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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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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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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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연가 - 전선구
국화향 뜨락 가득 퍼져서 눈 시린 날 그리운 얼굴들은 철새따라 떠나가고 초로에 우리 부부는 이 가을을 앓고 있다
호박 가지 토란 고추 볕 골라 말리면서 따사한 갈 빛 안고 황국화 곁에 서면 청자빛 이 깊은 철이 어이 저리 고울까
걷던 길 만난 사연 모두가 그리움인데 사슴 꼬리 가을 볕에 젖은 맘 말리면서 동공에 가득한 사랑을 마주 보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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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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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다 하고 - 주의식
하늘이 높다 하고 발저겨 서지 말며 따이 두텁다고 마이 밟지 말을 것이 하늘 따 높고 두터워도 내 조심하리라
발저겨 : 발꿈치를 돋우고. 따 : 땅.<훈몽자회>에서 '따디(地)'라고 나온 바 있다. 마이 : 매우. 함부로. 마구.
하늘이 높다고 해서 발꿈치를 돋우고 서지 말며, 아무리 두꺼운 땅이지만 함부로 힘주어 마구 밟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염려할 것이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역시 조심조심해야 한다.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군자의 몸가짐임을 강조한 것이다. 분수를지켜 알맞게 살 것이며, 만족함을 알고 스스로 머무를 곳을 알아야 한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뜻과 중용(中庸)의 도 등을 통틀어서 내포시켰다. 이런 교훈적인 면이 이 시조의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글 뒤에 미묘한 인간 심리의 일면을 감추고 있음을 발견한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최고봉이다. 정상에 오르면, 펀펀한 땅위에 큰 바위 두서너 개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과히 크지도 않은 바위여서 올라서 보았자 한 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바위 위에 올라서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도 맨 위에 있는 바위의 위태위태한 끝까지 올라서서, 발꿈치를 들어 뒤뚝 거리면서 사방을 한번 둘러본다.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고 금강산 정상 정복의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 보았자 하늘은 여전히 높기만 하고, 동해 바다의 검푸른 물결은 아득하기만 한데......, 이 하찮은 발돋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런 짓 다 하지 않고, 삼가고 조심하겠다는 것이 지은이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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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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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제지현해 - 양생주
노담*이 죽자 진실은 세 번 우는 것으로 조상을 끝냈다. 노담의 제자가 물었다.
"선생께선 선생님의 벗이 아닙니까?" 진실이 대답했다. "그렇지." "그런데 조상을 이렇게 하셔도 괜찮습니까?" "괜찮다. 나는 그 사람을 달리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아까 내가 조상을 할 때 보니 늙은 사람은 그 아들이 죽은 듯이, 내 젊은 사람은 그 어미를 여읜 듯 울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조상꾼이 몰려든 것은, 선생이 평소에 그렇게 하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말하지 않은 가운데 은연중 조문하고 울게끔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고, 인간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옛사람은 이것을 일러 천리를 피하려 하는 죄라고 했다. 선생이 태어나게 된 것은 그때가 되어서라고, 돌아가시게 된 것은 그 운명에 따르는 것이다. 때를 편안히 생각하고 그것에 따르면 슬프고 즐거운 것이 감히 개입하지 못한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제지현해'*라고 하였다. 장작이 모자란 곳에 장작을 밀어 넣어주면 불이 옮겨져 그것이 꺼지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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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노담(노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을 갔으나 영전에서 세 번 곡하고 그대로 나와버렸다. 그것을 본 노담의 제자가 진실을 힐책했다.
"선생께서는 우리 선생님과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니십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친구인 선생님께서 그런 식으로 조상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괜찮다. 평소에 나는 선생을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이제 그 생각이 달라졌다. 아까 안방에서 조상을 하면서 보니,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육친이라도 잃은 것처럼 울고 있었다. 이렇게 조상꾼이 몰려든 것은 죽은 이가 평소 그렇게 하게끔 자네들에게 말과 행동을 해왔기 때문이 아니겠나? 물론 선생은 슬퍼해 달라거나 울어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말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고 있었던 거겠지. 선생은 하늘의 이치에서 벗어나고, 인간 본래의 진실을 외면한 것이다. 즉 하늘에서 받은 인간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인, 옛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는 죄라고 했다.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준 때를 편히 여겨 운명에 순응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여들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경지를 가리켜 옛사람들은 천제가 준 생사의 고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하나하나의 장작개비는 타서 없어져 버리지만 불은 영원히 타고 있는 것이다."
* 노담: 성은 이, 이름은 이. 노는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초나라 사람으로, 철학자이며 도가의 시조이다. * 제지현해: 제는 '하늘'을, 현은 '속박'을 뜻한다. 즉 하늘로부터 받은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 장작이.... 없다: 흔히 후세에 첨가된 문장으로 해석할 만큼 애매한 구절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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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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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1910~2007)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 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읽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띄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룻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유순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암만 되불러도 나오지를 않으니 전신줄이 끊어졌나 보다. 나는 어두운 강가로 나왔다.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 온다. 이따금 기관총의 이를 가는 소리도 들린다. 잡북 쪽을 바라다보니 볼케이노 터지는 남양의 하늘보다 더 붉다. 그리고 쉬일새없이 번개 같은 불이 퍼졌다 스러진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겨울 방학이므로 학생들은 다 집에 돌아가고, 나하고 남양에서 온 사람 몇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이불을 쓰고 드러누웠다. 여전히 대포 소리,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온다. 여러 번 몸을 뒤채도 잠은 들어지지 않았다. 아까 전화로 들은 그의 음성이 나를 괴롭게 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총에 맞아서 쓰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불붙은 병원에서 어쩔 줄 몰라 애통하는 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나는 서가회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리 심한 병은 아니었으나 기숙사에는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입원을 하였던 것이다. 요양원이 있는 곳은 한적한 시외였다. 주위에는 과수원들이 있었고 멀리 성당이 보였다. 병실이 많지 않은 아담한 이 요양원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별장이나 작은 호텔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흑단 화장대 거울에 정원의 고목들이 비치는 것이었다. 간호부들이 아침 찬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들 얼마나 고적하였었을까.
내가 입원한 그 이튿날 아침 노크 소리와 함께 깨끗하게 생긴 간호부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그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그 때의 나의 놀람과 기쁨은 지금 뭐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 때 그가 가지고 들어온 오렌지 주스와 삼각형으로 자른 얇은 토스트를 맛있게 먹은 것이 가끔 생각난다. 마멀레이드도 맛이 있었다. 나는 그 후 어느 레스토랑에서도 그런 오렌지 주스와 토스트를 먹어 본 일이 없다. 그는 틈만 있으면 내 방을 찾아왔다. 황해도 자기 고향 이야기도 하고 선물로 받았다는 예쁜 성경도 빌려 주었다. 자기는 '누가 복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타고르의 "기탄자리"를 나에게 읽어 준 때도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동이 터 갔다. 교문을 나서니 찬바람이 뺨을 에인다. 시외요 때가 새벽이므로 한적도 하겠지마는, 길에 공장 가는 노동자 하나 보이지 아니한다. 싸움을 중지하였는지 대포 소리도 아니 들리고 사면이 모두 고요하였다. 나의 마음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연상할 만치 고요하다. 별안간 어디서인지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쳐다보니 비행기들이 열을 지어서 잡북 방면을 향하고 날아간다. 용기를 내느라고 두 주먹을 쥐고 걸레 같은 보따리 진 사람, 누더기 같은 이불 멘 사람, 한 아이는 앞세우고 한 아이는 안고 또 한 아이는 끌고 가는 여인-피난민들이다. 그때 본 산 아이의 둔한 눈들이, 여인네의 해쓱한 눈들이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길에는 차차로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이 황포강 물결 같이 흐른다. 푸른 옷 입은 사람들의 푸른 물결! 나는 그들 속에 섞여서 가는 동안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만약 불행히 그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를 잘못 일본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아무거라도 얼른 잡아 타려고 하였으나 전차도 버스도 불통이었다. 가든 브리지에 다다르니 다릿목에 철망으로 만든 방색이 두 겹으로 막혀 있고, 그 뒤에는 흙을 담은 전대를 쌓아 놓았다. 그리고 공공 조계 미국 군인들이 총창을 낀 총대를 겨누고 있다. 기관총도 갖다 놓았다. 나는 어떻든 북사천로로 갈 작정이므로 빠둔조를 건너지 않고 사천로교로 갔다. 그 다리에도 역시 견고한 방색을 시설하여 놓았다. 북사천로를 내려다보니 그 곳이야말로 수라장이다.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몰려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그 길을 내려다보며 나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었다. 밀물같이 밀려오는 그 군중과 정면 충돌을 하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하고 걷기 시작하였다. 벌써 숨이 막힐 지경이요 정신이 아뜩아뜩하여진다. 빼--ㅇ 소리가 났다. 발을 주춤하니 바로 내 앞으로 오는 노동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진다. 이어서 총 소리가 났다. 나는 얼떨결에 사람들의 줄기를 옆으로 뚫고 가로터진 샛길로 빠져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상점 속에 숨어 있던 편의대 하나가 나를 일본인으로 보고 쏜 것이 빗나가서 그 노동자를 죽였는지 모른다. 골목으로 뛰어들어온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달아났다. 육증한 바퀴 소리가 들려 온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리로 쏠렸다. 탱크 두 대가 시멘트 바닥 위로 궁굴어 왔다. 잡북 전선으로 가는 것이다.
'비행기다!' 사람들은 일제히 담모퉁이로 가서 달라붙었다. 궁굴어가던 철갑차도 땅에 붙어 버렸다. 소란하던 거리가 고요하여졌다. 비행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모양으로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아니 걸렸다. 간신히 소방서 앞을 지나서 인적 그친 거리를 걸어서 북사천로로 돌아 나가려 할 때, 일본 병정 하나가 총대를 내밀며 달려든다. 나는 일본말은 알아도 입술만 떨리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퍼져 오른다. 불자동차 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ㅇ 하고 탄자 소리가 나더니 재각재각 다시 총 재는 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5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를 어떻게 오셨어요."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 소리 대포 소리가 연달아 들려 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았다. 상해 사변 때문에 귀국한 지 얼마 후였다. 춘원이 "흙"의 여주인공 이름을 얼른 작정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를 생각하고 '유순'이라고 지어 드렸다. 지금 살아 있는지 가끔 그를 생각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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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 / 문화 / 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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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나라를 건진 조선의 의기남아
조선조 중기, 서울에 홍순언이라는 역관이 살았는데 중국을 드나들며 사신들 외교활동에 통역 일을 맡았다. 당시 법으로 이런 실무직은 상류층에선 하기를 꺼려해서, 특수계층에서나 맡아 했는데, 서울 복판 청계천을 중심으로 많이 살아서 흔이 중인라고들 불렀다. 말이 역관이지, 직접 외국인을 상대하여 교섭하는 직책이었던 때문에, 혀끝하나 놀리기에 따라 하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무역에 관여해 욕 안먹고도 상당한 재산을 이룰 수 있었던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누구나 윤기가 돌았다. 그 홍역관이 한번은 사신을 모시고 중국엘 갔는데, 공식적인 임무를 마치고 시간이 나자 객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래 요새로 치면 나이트클럽을 찾아나섰는데, 그곳 홍등가의 풍습대로, 매파들이 나와서 손님을 끌었다.
“따아런!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냥 예사로 들었더니, 뒤따르는 말이 솔깃하다. “하루저녁 모시는데 xx금인데, 그 길로 일생을 바치겠다는 군입쇼.”
호기심에 따라 들어갔더니 그야말로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같은 처녀인데, 그냥 양갓집 규수라기보다 사뭇 고상하게 귀티가 난다. 물론 말이야 유창하게 통하는 사이라, 조용히 사정을 물었더니 딱하기 이를 데 없다. 벼슬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북경 와 살았는데, 갑자기 자리를 잃고 이내 돌아가셔서, 고향인 강남으로 운구해 모시고 싶으나, 워낙 청백하게 지내셔서 그럴 여축도 없고... 생각다 못해 이곳에 나와서 자기 몸을 팔아 그것으로 경비를 충당하려고 터무니 없는 고가를 불렀으니 들어만 주신다면 그길로 일생을 모시겠노라는 얘기였다. 홍순언은 의기남아다. 이 정경을 보고 어떻게 돌아서겠는가?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던져 아가씨를 구렁에서 건져 주었다. 그리곤 손목 한번 안 쥐어 보고, 그냥 돌아서려 하는데 처녀가 붙들고 매달린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어디 계신 누구이신 줄이나 일러 주시면, 일생동안 은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딸로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이~.”
그 순정에 감동해, 나는 조선인 아무개노라 하고 휘적휘적 대문을 나섰다. 그것이 사재였는지 공금이었는지 그 많은 금액을 보충하려면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일설에는 공금을 유용해 쓴 죄로 옥에 갇혔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로, 중국 들어갔다 나온 동료 역관들의 말이 국경을 들어서며부터 이번 행보에 홍대인은 안왔느냐고 자꾸만 묻더라는 것이다. `이상한 일도 있다` 했었는데, 다음 번 자기 차례가 돼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산해관을 들어서자 관원 하나가 다가와서 묻는다.
“이번 행보에 홍대인이 오셨는지요?”
내가 그라고 했더니, 그러냐고 무척 좋아하며 돌아갔는데, 북경에 도착해 급한 공사를 마치고 나자, 또 한사람이 객관으로 찾아와 전한다.
“석노야께서 대인을 기다린지 오래시외다.”
노야라면 저들이 말하는 극존칭으로, 우리말로 하면 `대감`에나 해당할 그런 호칭이다. 준비해 갖고 온 가마를 타고 따라 나섰더니, 얼마를 가다가 어떤 고대광실 크나큰 집 대문을 썩 들어서더니 몇겹 대문을 또 거쳐서 내려놓는다. 그곳 풍습에 익숙해서 잘 알지만 여기는 주인의 서재 아닌가? 점잖은 분이 나서며 손을 턱 잡더니
“내 아내가 대인을 뵙겠다는구려.” “?” “띠에띠에!” “아니, 아버지라니?”
주렴 안으로부터 구르듯이 달려나와 맞는 귀부인을 보니, 아니 이거 홍등가에서 구해 준 그 아가씨 아닌가?
“내 아내에게 아버지면 당신은 내게 장인이오. 그리고 조선은 나의 처가이고.”
주인은 귀 알았으리, 요새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 석성이요, 아가씨는 홍역관의 도움으로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연줄이 닿아 그의 후취부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물론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 중에도 귀한 선물은 부인이 그동안 무늬를 놓아서 손수 짠 비단, 바로 보은단 여러필이다. 재생의 아버지 은혜를 보답코자 시간만 나면 짜서 모은 것이다. 국무위원을 사위로 두고 보니 그동안 정체됐던 양국간의 어려웠던 문제도 순화롭게 풀려서 국가의 체면도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도 안된다. 예고도 없이 왜군이 쳐들어와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200년 평화에 젖어온 조선 정부에서는 어쩔 방도가 없다. 물론 각처에서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지만, 나라의 운명이 달린 큰일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물은 요청된다. 중국관계는 물론 홍순언이 나서야 했고, 그는 수양딸 치마폭에 엎어져 울음으로 호소하였고, 병부상서의 설명으로 조선은 의기있는 사람이 사는 우방임을 생각해, 드디어 이여송이 10만 명의 원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며, 정세는 급전환을 보았다.
그 뒤의 임란 사정은 얘기 않는다. 다만 석성 그 자신은 일본과의 강화문제로 책임을 물어 옥에 갇히고 그 안에서 생을 마쳤으니, 처갓집 신세갚음치고는 너무나 애처로운 최후였다. 얘기는 바뀌어 그 홍순언이 살던 곳이 서울 복판 삼각동이었고, 담을 화초담으로 곱게 꾸몄대서 고운담골이라고 하였었는데, 광복 직후 정객들이 흔히 찾던 미장그릴은, 그 동네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일설에는 보은단골이라는 것이 원래 이름이라고 하나, 아무튼 설화치고는 가슴 흐뭇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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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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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다섯째 묶음 :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오빠에게
'따가운 햇볕이 차츰 숨을 죽여 가고 '가을바람'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이른 미풍이불고, 가끔씩 성난 하늘의 눈물 같은 소나가기 내리는 여름이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너무도 분명히 존재하는 이 계절, 그러므로 일년은 다섯 개의 계절로 나누어져야 옳다'
이것은 제가 사랑하는 조카이며 오빠의 사랑스런 맏딸이기도 한 향이의 표현인데 저는 바로 이러한 계절의 길목에서 오빠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간도 안녕하신지요? 만 2년 간의 서울생활을 끝내고 다시 부산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본원에 와서 살게 된 것이 저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달래다 호통도 곧잘 치시는 오라버니 산.'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 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네.'
저의 시에도 종종 '오빠'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오빠는 제게 늘 정답고 가까운 존재입니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생각하면 늘 든든하고 미더운 사람, 많은 말로 표현을 하진 않지만 은근한 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러한 오빠께 저는 지난날 참으로 많은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오빠가 군에 계셨던 저의 중학교 시절엔 맑고 고운 꿈이야기를 적어 보냈고, 제가 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는 사랑을 앓는 사춘기 소녀의 독백을 써 보냈고, 수녀원에 와서 얼마 동안 외국에 나가 있을 때는 아예 일기식의 편지를 노트에 적어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저로부터 '오빠'라고 불림을 받고 싶어하던 이들이 몇 명 있었으나 왠지 쑥스러워 응할 수가 없었고, 고종사촌인 종률 오빠 외에는 오직 친오빠인 인구 오빠가 있을 뿐입니다.
저의 방에는 40여 년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빛 바랜 가족사진이 있는데 보는 이마다 "여기에 수녀님은 없는데 왜 이걸 세워두었지요?"라고 묻습니다. 우리 4남매 중에 막내인 여동생과 저는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에 만주에서 찍었다는 이 사진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 삼촌, 고모들 사이에 귀엽게 앉아 있는 너댓 살짜리 어린 소년을 보고 "얘가 누구지?"라고 저의 동료들이 물으면 "응. 우리 오빠야.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네 아이의 아버지이고..."라고 대답하곤 하지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고 어머니가 자랑하시곤 했던 오빠의 옛 모습을 들여다보며 저는 세월이 물 흐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북에 납치되신 아버지가 어느날 문득 우리 앞에 웃으며 나타나시는 꿈을 꾸어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울 청파동에 살던 시절, 제가 대여섯 살 때라고 기억되는데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저는 꼭 집 밖에서 기다리곤 했지요. 그 무렵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오빠의 그 모습을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8년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인지 그때만 해도 오빠는 저를 별로 상대해 주지 않는 느낌이어서 오빠와 저 사이에 작은 언니나 작은 오빠가 한 명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길에서 종종 "쟤가 인구 동생이야. 인구하고 닮았지?" 하는 오빠 친구들의 말을 들었었고, 저는 그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달아나곤 했지요. 한번은 제가 동화에 가까운 단편소설 초안을 노트에 끄적거려 놓은 것을 오빠가 읽어 보고, 제가 잠자리에 든 사이 어머니께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아직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걸 쓸 수 있는지 정말 놀랍다니까요"라고 칭찬 반 꾸중 반으로 하는 얘길 죄다 듣고도 그냥 자는 척했던 일도 있습니다. 고운 헝겊, 고운 종이들을 즐겨 모으거나 오리는 것을 좋아하는 저를 보고 오빠는, "쟤는 이담에 커서 시집을 가면 혼수이불 꽃무늬까지 예쁘다고 오리겠지? 신랑 코는 예쁘다고 안 오릴지 모르겠네"라고 해서 그게 농담인 줄 알면서도 울어버리고 말았지요. 오빠의 이런 저런 익살과 유머는 끝이 없어서 우리 가족은 웃는 일이 많았고, 집안은 마치 노래, 웅변, 연극, 시낭송을 잘하는 오빠의 독무대 같기도 했습니다. 오빠의 시낭송을 듣고, 시 노트를 훔쳐 보며 저는 이미 오빠를 흠모하고 흉내 내는 어린 시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활달하고 용기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마음에 둔 여학생에겐 좀더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끙끙 앓던 오빠의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누구를 정말 좋아하면 소심하고 수줍어지는가 보다라고 처음으로 느꼈답니다.
우리집의 맏이인 언니가 어느 날 가르멜수녀원에 간다고 짐을 꾸릴 때 오빠는 오빠를 극진히 아꼈던 하나뿐인 누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두고두고 서운해 하며 눈물을 흘렸었지요. 저는 그때만 해도 수녀원이란 곳이 어떤 곳이지 잘 몰랐으므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언니가 원망스럽기조차 했습니다. 그후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저 역시 수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오빠는 "이제 겨우 대화 상대가 될 만하니 너마저 떠나는구나" 하며 아쉬워하셨지요. 혹시라도 제가 마지못해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수련시절에 일부러 부산까지 찾아와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마음을 바꾸려면 일찍 바꾸는 게 좋다고 하면서 '네 동생을 취직시키든지, 좋은 사람 있으면 혼인을 시키든지...' 수도생활을 반대하는 오빠 친구의 편지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끝가지 할 수 있겠느냐는 최종적 물음을 던지고 가셨습니다.
제가 수도자로서의 마지막 공적 약속인 종신서원을 하던 1976년 2월 2일, 성당 가족석에 앉아 있던 오빠는 제가 서원장을 옆에 끼고 흰 초를 들고 입당하는 모습이 마치 아득한 저 세상 어딘가로부터 걸어들어오는 것처럼 보여서 예기치도 않던 큰 울음이 터졌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느낌을 오빠는 저의 세 번째 시집 끝에 써 놓았는데 그 글을 보고 울었다는 독자들이 꽤나 많았답니다.
오빠와 많은 분들의 근심과 노파심 속에서 시작했던 저의 수도생활도 이제는 연륜이 꽤 깊어졌고, 저는 아직 덕이 부족한 채로지만 무척 만족스럽고 안정된 한 사람의 수녀가 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오빠의 충실한 애독자였던 제가 어쩌다 보니 오빠보다 먼저 책을 내게 된 것도 새삼 송구하고, 그 옛날처럼 '인구 동생인 해인이'보다 해인 수녀의 오빠인 인구'로서 오빠가 표현될 때는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늘 웃으시며 오빠로서의 따스한 격려와 충고를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책을 낼 때마다 바쁜 중에도 큰 힘이 되어주시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엔 선뜻 의논 상대가 되어주시는 오빠가 가까이 계시기에 저는 늘 든든합니다.
전공인 바이올린은 비켜두고 오로지 살림에만 몰두하는 아내의 수수한 옷차림과 은은한 미소를 사랑하고, 오빠를 닮은 1남 3녀들을 끔찍히 아끼며, 아이들의 성적이 잘 나오면 하루에도 몇번씩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겨 아내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하는 오빠, 우이동 이웃들과의 친교로 언제나 친구가 많고, 화제가 풍부하고 그래서 일이 많은 오빠의 바쁜 삶은 보기가 좋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한 말씀으로 우리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신분, 순결하고 여리신 수녀님들의 사생활을 탤런트적 '끼'가 다분하신 연극배우의 모션으로, 감동을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력으로 보여주시며 먹는 것은 아름답다. '불곰이라 불려지기를 꺼리지 않으시는 분'으로오빠의 서울예전의 광고창작과 학생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으시는 오빠, 돌밭에서 힘들여 채집해 온 수석들을 들기름으로 닦으며 흐뭇해 하시던 오빠, 제가 서울 수녀원에 있을 때 동네에서 만든 무공해식품이라며 제가 좋아하는 두부 한 판을 새벽같이 주문해서 날라다 준 오빠의 그 모습은 특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빠는 어느새 50대 중반이 되고, 저는 40대 중반이 되어 우리가 살아온 날들보다는 살아갈 날이 더 적은 사람들이 되었군요. 어쩌다 오빠가 저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때는 "내 동생과 얘기해 보세요. 생각보다는 재미있어요"라고 했고, 또 때로는 저를 '명랑이'라고 부르기도 했음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앞으로도 기쁘고, 고맙고, 재미있게 지내면서 날마다 새롭게 행복의 조각보를 깁는 사람을 꾸려갈 테니, 오빠는 오빠대로 더욱 열심히 사시길 바랍니다. 평소의 오빠의 신념대로 양심의 소리를 어기지 않는 깨끗하고 정직한 삶, 가족과 이웃에게 책임과 성실을 다하는 매일을 꾸려감으로써 오빠의 집에 가득한 수석과 난처럼 무게 있고 향기로운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팔순이 가까운 연세에도 거뜬히 성지순례 다녀오신 어머니도 평안하시겠지요? 언니와 저는 수도원에서, 오빠와 동생은 가정에서 각각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사랑은 기도 안에 더 빛나고 아름답게 결속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수녀원 솔숲의 소나무 같은 오빠에게 소나무빛 사랑과 존경을 드리며 이 글을 접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0. 8.
부산 광안리 수녀원에서 아우 수녀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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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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