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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44 호
단기 4341. 12. 7 (음력 11.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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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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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역동신인문학상 시조 공모
시 조 춘 추 제1회 역동신인문학상
(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와 단양우씨대종회는 시조문학사에 빛나는 역동 우 탁선생의 문학적 업적과 그 얼을 계승하고, 나아가 한국시조문단에 새 바람을 일으킬 신진 시조시인을 발굴하기 위해 2009년도 시조춘추 제 1회 역동신인문학상을 공모합니다. 새로운 감수성과 치열한 시정신으로 한국시조의 새 지평을 열 예비 시인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 당선작 상금
구분 대상인원 총상금 수석 1명 300만원 차석 2명 200만원
-당선자는 「시조춘추」지로 등단한 기성시인으로 대우받으며 (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 회원으로 입회하여 본 단체로부터 문학 활동을 지원받게 됩니다.
◈ 응모요령 -원고분량 : 시조 5편 이상 -원고작성 : A4용지, 워드프로세서 12호 글씨. -원고 표지에 주소, 성명, 생년월일, 연락처를 반듯이 명기할 것. ◈ 원고접수(우편으로만 접수) -2009년2월 15일 ~ 2009년 3월 15일(당일도착 분까지만 유효) -보내실 곳 : 395-822 충북 단양군 가곡면 대대리 404번지 도서출판 C-1<역동우탁선생기념사업회> ◈ 입상자 발표 -2009년 4월1일 본회 홈페이지(www.sijomunhak.com) 및 「시조춘추」2009년 하반기호 ◈ 유의사항 -응모작품은 다른 신문·잡지 등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함. -같은 작품을 다른 공모전에 중복투고하거나 표절된 작품으로 확인될 경우 입상결정 후에도 당선을 취소함. -우편봉투에 “역동신인문학상 응모작”이라고 명기할 것. -응모원고 일체는 반환하지 않음. ◈문의 -「시조춘추」 역동신인문학상 담당자 : 011-714-1533.
사 단 법 인 한 국 시 조 문 학 진 흥 회 이 사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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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는 자는 실망하지도 않을 것이다.(울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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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짐승이름
짐승들이 겨울 준비를 다 끝냈는데, 너구리만 느긋하게 놀고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는 추워지고 얼어붙기 시작했다. 너구리는 오소리를 찾아가 같이 지내자고 사정했다. 오소리가 조건을 내걸었다. “같이 살고 싶으면, 굴에 있는 오물을 모두 깨끗이 치울 수 있겠느냐.” 그 뒤로 너구리는 게으른 이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다.(연변 전설)
천 년 묵은 너구리와 감찰 선생과의 사연이다. 너구리가 사람으로 둔갑한다. 둔갑한 너구리는 서울로 올라가 어떤 정승의 사위가 된다.(거창 전설)
너구리의 옛말은 ‘러울’(獺·훈민정음 해례)이었다. 달리 소학언해에서는 ‘너구리’가 나온다. 러울과 너구리는 모음 사이에서 자음의 특이한 변화를 보여준다.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만주말로 니오헤(niohe·이리), 에벤키말로 네게(neke·담비)와 비교된다. ‘러울’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는 ‘너울’과 관계가 있는데, 너울은 바다의 큰 물결, 얼굴에 쓰는 물건을 뜻한다. 동시에 너구리는 ‘너굴’에 뒷가지 ‘-이’가 붙은 말로 보인다. 여기서 ‘너굴-너울-러울’의 걸림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개과에 들어 여우보다는 작으나 살지고 낮에는 굴속에 느긋하게 있다가 밤에 돌아다니며 들쥐·뱀·개구리·과일 등을 먹으며 산다. 사람의 너울을 쓰고 그렇게 엉큼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너구리를 떠올릴 법하겠다.
정호완/대구대 교수·국어학
강짜
'막내 서현이는 세 살이고요. 요즘 강짜가 심해졌어요. 무엇이든 '내 거'라는 소리만 하지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는 꼴이 아닌가.'
위 예문은 실제 사용된 글을 인용한 것이다. 아무런 문제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강짜'라는 단어가 문제다.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 한쪽이 또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그것을 지나치게 시기하는 것을 '강샘을 부린다'고 한다. 이 '강샘'과 동일한 뜻을 지닌 말이 '강짜'다. 따라서 '강짜'는 심하게 질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 두 예문은 모두 질투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강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질투와 관련된 내용일지라도 세 살짜리 어린애인 서현이에게는 '강짜'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어른들의 애정과 관련된 낱말이기 때문이다. 위 예문은 '억지를 부린다'라든가 '떼를 쓴다' 등으로 고쳐야 제대로 뜻이 통한다. 다음은 '강짜'를 제대로 쓴 예다.
'몽둥이를 들어 메고 네 이놈 강도 놈. 좁은 골 벼락 치듯, 강짜 싸움에 기집 치듯, 담에 걸친 구렁이 치듯'('흥부가' 중) '그가 사무실 여직원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았을 때 아내는 강짜를 부리지 않았다. 남자 후배와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묵인해 준 대가인 셈이었다.'
일회용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이다 보니 이젠 질투할 일이 없어져 '강짜'를 엉뚱한 의미로 쓰게 되는 것일까?
맨 처음, 맨손
'겨우내 방 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산으로, 공원으로 몰려든다. 운동의 계절이 됐다. 등산·조깅 등 봄철 운동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러나 운동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따라서 운동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맨처음' 위험 요인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맞는 운동과 강도, 운동 시간과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침·저녁과 한낮의 기온 변화가 심한 봄철에는 특히 운동을 하기 전에 준비운동 시간을 늘려 경직된 몸을 풀어줘야 한다. 이때는 '맨손'체조나 스트레칭 정도가 적당하다.'
위 글에 나오는 '맨처음'은 띄어쓰기를 잘못한 경우고, '맨손'은 바르게 쓴 것이다. 둘 다 '맨-'으로 시작하는데 왜 띄어쓰기는 달리할까 궁금할 것이다. '맨'이 일부 명사 앞에 붙어 '다른 것이 없는'의 뜻(맨손, 맨몸, 맨입, 맨밥, 맨바닥, 맨눈, 맨다리, 맨땅, 맨발, 맨주먹 등)일 때는 접두사다. 접두사는 홀로 단어가 될 수 없으므로 단어 앞에 붙여 써야 한다. 반면 '맨'이 '더 할 수 없을 정도나 경지에 있음'을 나타낼 때(맨 꼭대기, 맨 먼저, 맨 처음, 맨 끝, 맨 앞, 맨 위, 맨 구석 자리, 맨 가장자리)는 관형사이고, '다른 것은 섞이지 아니하고 온통'(아이는 맨 흙투성이로 집에 들어왔다)의 뜻일 때는 부사이므로 뒤 단어와 띄어 써야 한다.
간단히 말해 '맨'이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다'는 뜻일 때는 붙여 쓰고, '제일(第一)'이나 '온통'으로 바꿀 수 있으면 띄어 쓴다고 생각하면 쉽다.
차로, 차선
'서울시는 현재 한강을 가로지르는 천호대로와 하정로에서 운용하고 있는 '중앙버스전용차선제'를 시내 간선도로 전역으로 확대키로 하고, 우선 올 상반기 중으로 6개 노선에 도입하기로 했다.' '탱크로리 운전사가 '1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해' 진입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인다.'
앞의 두 글은 '차로'를 '차선'으로 잘못 쓴 예다. '중앙버스전용차로제'와 '1차로로 차로를 변경해'로 고쳐 써야 한다. 이처럼 '차로'와 '차선'을 혼동해 쓰는 경우가 많다.
차로(車路)는 '사람이 다니는 길과 구분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조속히 예산을 지원해 준다는 조건 아래 버스전용차로제를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다' '좌측 차로로 트럭이 무리하게 끼어들다 사고가 났다' '출퇴근 시간에 버스전용차로로 다른 차들이 진입하면 안 된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반면 차선(車線)은 '자동차 도로에 주행 방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 놓은 선'을 말한다. '차선 긋는 작업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하다' '차선을 침범하다' '차선을 지키다'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등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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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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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책(雨中散策) - 천서봉
누이야, 빗소리가 내 귀를 파먹는 밤이네. 이런 밤엔 머리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꽂아보고 싶어. 온몸에 미친년 치맛자락 같은 실밥 두르고 나도 한번쯤 흐드러지고 싶어. 꽉 찬 지푸라기 업고, 더욱 꽉 찬 결핍의 사타구니로 앙앙 울어대는 베개를 낳고 싶어. 누이야, 오랜 건조주의보는 빗살의 완곡한 철창 안에 갇혀 난처한 얼굴이네. 빗물이 안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어. 활활 타올라 보지도 못한 채 가로수들은 잎과 가지를 뒤섞으며 둥글게 일그러지고 있어. 매직아이처럼 어느 순간 떠올라 둥둥 흘러가는 산책이여, 조난 당한 우중의 외도여. 눈 어두운 길 위의 애무는 배꼽 같은 가등 밑에서 아득한 피안의 표정으로 서로를 적셨지만,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는 미친 여자 라는 상징은 아직 유효한가. 머리엔 처녀치마꽃, 안테나 높이 올리고 빗소리가 파먹은 상처의 둥근 귓바퀴 따라 걸어보고 싶어. 도저한 빗물 받아먹고 돌멩이 맞아 죽은 아들 하나 잉태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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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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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묵화 - 김태은
9월의 등줄기 타고 틍 파인 계절이 갔다 무서리에 단물 올라 향긋한 포도 익으면 항아리 달빛에 헹궈 포도주를 담근다
서둘어 산빛이 활활 타며 올라오면 창문에 단풍잎 국화잎 무늬도 놓고 구럭에 붉은 감 따며 가을 묵화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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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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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풋나물을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럴 줄이 있으랴
<지은이> 윤선도 <말뜻> 풋나물 : 풀과 나뭇잎의 연한 싹을 뜯어서 만든 나물. 글카지 : 실컷. 노니노라 : '노닐다'는 '놀다'와 '니다'의 복합동사로, '~노라' 에서 노는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뜻한다. 그남은 : 그 밖의 여남은 : 그 밖의 다른. 부럴 줄이 : 부러워할 것이.
<감상>
보리밥을 풋나물 반찬으로 알맞게 먹은 뒤에 시냇가로 나가서 큰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는 것이 나의 하루의 생활의 전부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부러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귀영화도 호의호식도 다 관심 밖의 일이라는 뜻이다. 벼슬에도 별로 뜻이 없고, 강호에 숨어서 자연을 벗삼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보리밥을 풋나물에 알맞추 먹고(고량진미를 포식하지 않는다),바위 끝 물가에서 노닐기를 실컷한다.' 그 밖의 다른 일은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고산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실천하였다. 현대인 중에서 고량진미를 포식하고, 노닐기(운동이나 활동)는 적게 하며, 마음은 언제나 욕구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틀림없이 비만이다 혈압이다 당뇨다 하고 성인병에 시달린다.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공해 속에서 동물적인 본능 충족에여념이 없는 현대인, 보약이라면 별의별 것을 다 먹어치우는 현대의 일부 부유층의 생활 태도와 옛사람의 이 생활 태도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일부에서 '자연식'을 강조하는 일도 결국은 옛사람의이 방법을 따라 보자는 것이 아닐까?이래서 문명과 원시는 함수관계에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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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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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일러두기
1. 본서는 <장자> 3편 33장을 완역하되, 종래 위작이라고 지적되어온 <외편>, <잡편>에서 부분적으로 무잡한 구절을 골라 제외함으로써 장자 사상의 적확한 이해를 꾀했다. 2. 각 편과 장을 다시 의미에 따라 분절하여 평이한 현대문으로 역출했으며, 원문 및 해의를 달아 원의를 밝혔다. 3. 저본으로는 왕선겸의 <장자집해>를 썼고, 기타 제본을 참조했다.
해제
1. 장자의 생애와 시대 배경
장자는 장주를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장주의 저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 '자'는 '선생'이자 '선생의 말씀'을 뜻했기 때문이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노장이라 불리기도 하고, 남화진인이라 존칭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노자와 함께 고대 중국의 3대 학파 중 하나로 꼽히는 도가의 중심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특히 비실천적, 도피적, 방관자적 사상가라는 혹평 아래 경원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즉 얕은 지혜와 눈앞의 욕망, 입신 출세 따위를 조소하는 그 점 때문에 숭앙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단순히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에 의하면 위혜왕(기원전 370-317년 재위) 및 제선왕과 동시대인이라 한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369-286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많은 연구가들이 <장자>에 나오는 역사상의 실존 인물과 전국 시대의 문헌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생존 기간에 대한 고증 작업을 하고 있으나 앞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그의 생존시기는 이른바 전국 시대 중기로서, 춘추 시대 이래 약육 강식을 거듭하여 전국 칠웅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시대다. <장자>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이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위왕은 무단히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니, 그 시체가 나라 안에 넘칠 지경이다.'(인간세)
춘추 전국 시대는 급격한 변혁기였다. 후대의 한유가 말했듯이 천하를 혼란 속에서 건지려는 사상가들 탓에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질 겨를이 없고, 묵자의 굴뚝은 검어질 수가 없는' 다망한 시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상을 받은 것은 새로운 지배 계급이고, 하층민들은 다시금 조여드는 속박 속에서 노예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었다. 혼란이 휩쓸고 간 그 황폐한 땅은 장자에게 누적된 반성과 실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염세적인 경향을 띠게 하였던 것이다. 장자의 출생지는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부근인 몽 땅으로서, 당시엔 송나라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는 주나라에게 멸망한 은나라 주왕의 서형, 미자를 시조로 오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나, 당시엔 한낱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임금 자리를 둘러싼 골육 상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물론 송나라에도 제환공의 뒤를 이어 천하의 패자가 되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양공(기원전 649-636년 재위) 같은 임금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국력은 점점 쇠약해져서 장자의 생존 시기에는 마침내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즉 송왕 척성은 아우인 언에게 쫓겨 망명을 했고, 왕이 된 언은 제, 초, 위와의 싸움에서 거둔 일시적 승리 탓에 걷잡을 수 없이 오만해져서 더욱더 미치광이 같은 짓을 할뿐이었다. 피를 담은 가죽 부대를 공중 높이 달아매 놓고 활을 쏘아 피가 쏟아지게 하고는, '내가 하늘을 쏘아 이겼다.'면서 사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다. 또한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고, 이를 간하는 신하가 있으면 활로 쏘아 죽이는 짓거리를 자행했다. 그 포악 무도함 때문에 그는 '송걸왕'이란 별명까지 얻게 되고, 마침내 기원전 286년, 제, 초, 위 3국 연합군에 패하여 죽음을 당했으며, 나라는 이 3국에 의해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장자는 이런 사실을 직접 보았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라도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장자의 경력에 대해서는 <사기>에 '일찍이 몽의 칠원 지방에서 관리 노릇을 했다.'고만 간단히 전해올 뿐,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는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것(지락)과 제자가 있었던 것(산목, 열어구)이 전해온다. 또 그의 가난함을 나타내주는 것으로는 감하후에게 돈을 빌리러 갔던 이야기(외물)와 다 떨어진 누더기 차림으로 위혜왕을 만나러 갔던 이야기(산목)가 있을 뿐이다. 전국 시대는 유능한 인재를 널리 필요로 하는 시대였다. 자신을 인재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제후를 찾아가 자기의 사상을 토로했고, 제후들은 이런 인재들을 다투어 맞아들여 국력을 배양하려 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시대적인 움직임에 대해 어디까지나 초연했다. <사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초위왕이 장자의 높은 명성을 전해듣고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초왕의 사자가 후한 폐백을 가지고 찾아오자 장자는 웃으며 말했다.
"과연 금이란 돈은 대단한 것이며, 재상이란 벼슬은 가장 높은 자리일 수 있소. 그러나 교제에 바쳐지는 소를 보시오. 여러 해 동안 맛있는 먹이를 먹고 비단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제단으로 끌려가고 마오. 그때 가서 들판을 생각해보아도 이미 때는 늦지 않겠소? 모처럼 편히 살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나는 자유를 속박당하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놀고 싶소. 관리 따위는 질색이니 내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시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어쨌든 간에 그가 명리를 하찮게 보았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제후들 밑에서 벼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당시 제위왕이 천하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학술연구원을 만들었던 직하의 학원에도 나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민본주의 사상을 내세우며 천하의 제후들을 살인자라고 비난했던 맹자도 이 직하 학원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데 반하여 장자가 직하 학원을 찾아간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천하의 학자들과 전혀 무관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직하에서 넉넉한 생활을 보장받고 있던 학자들은 종래의 실용과 실천을 목표로 한 학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꾀하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송연, 윤문, 전병, 신도 등은 직하에서 자라난 학자들로서 뒤에 도가라 불리었는데, 이들의 사상이 장자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장자와 직접 교류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혜자(혜시)뿐이며, 그의 이름은 <장자>속에 자주 나온다. 전국 시대 변론술의 발달은 마침내 일종의 논리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혜자는 그 대표적 인물로서 명가라 불리는 논리학파에 속해 있었다. 혜자는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장자>에 그가 내세운 명제가 실려 있다. 가령 '해는 한낮이 되면 곧 기울고, 만물은 생겨나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혜자의 말은,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제물론)는 장자의 말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장자>에는 장자가 혜자의 무덤 앞에서 좋은 의론 상대를 잃은 것을 탄식하는 이야기(서무귀)가 나온다. 그러나 장자는 혜자가 혜왕 밑에서 재상 노릇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다. <장자>속에 나오는 혜자가 장자와 의론을 교환할 때마다 항상 곤경에 몰리고 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장자는 시류에 초연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나갔다. 따라서 그의 처세 방식과 사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2. <장자>의 구성 및 성립 과정
<장자>는 의론문과 우화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 6만 5천여 자, 33장에 이르는데, 이것은 <내편> 7장과 <외편> 15장, <잡편> 11장으로 되어 있다. <내편>의 각 장 제목은 그 주제에 따라 붙여져서 장의 제목 자체에 뜻이 담겨져 있으나 <외편>과 <잡편>은 별의미 없이 첫머리에 나오는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런 점이 내용, 문장과 더불어 각 장의 성립 연대를 밝혀내는 근거가 되고 있다. 각 장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
<내편>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외편> 변무, 마제, 거협, 재유, 천지, 천도, 천운, 각의, 선성, 추수, 지락, 달생, 산목, 전자방, 지북유 <잡편> 경상초, 서무귀, 측양, 외물, 우언, 양왕, 도척, 설검, 어보, 열어구, 천하
지금의 <장자>는 진나라 곽상이 주석을 가하면서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4세기). 이보다 앞서 기원 1세기에 간행된 <사기>에는 '장자 10여만 글자'라고 씌어 있으므로, 전해지는 것보다 4만 자나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기>보다 2세기 뒤에 간행된 <한서예문지>에는 52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지금은 다만 곽상이 간추려놓은 33만장만이 현존할 뿐이다.
위진 시대에는 <장자>가 널리 읽혔다. 곽상 이외에도 27장으로 된 최선의 책과 26장으로 된 향수의 책 등 여러 개의 산정본이 있었음이 <경전석문서록>이라는 책에 전해지지만 이것 역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튼 원본 <장자>의 내용이나 그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달리 상고할 길이 없다. 다른 많은 선진 시대의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원저서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첨가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다가, 다시 간추려 편집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장자>중 장자 자신의 손으로 씌어진 부분은 어느 곳일까? 여기에 대해서 송나라의 소식(동파)을 비롯한 많은 연구가들이 여러 가지 의론을 전개했는데, <내편>중에서도 '소요유'와 '제물론'뿐일 것이라는 가정이 통설로 되어 있다. <내편>은 일관된 사상 체계와 문장의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논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외편>과 <잡편>의 장 제목이 본문 첫머리에 나온 글자를 따서 붙여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내편>이 오히려 <외편>이나 <잡편>보다 후대에 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또 같은 <외편>과 <잡편>도 전부가 후세 사람에 의해서 고쳐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과 일부만을 의심하는 설이 있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외편>과 <잡편>에는 분명히 잡다한 사상들이 뒤섞여 있으며, <내편>과 모순되는 것도 많다. 가령 <잡편> 중 '도척'에는 장자 본래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쾌락주의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또한 <내편>의 어떤 한 장을 풀이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도 있는데, 예를 들면 '제물론'과 '추수'의 두 장은 내용 면에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외편>과 <내편>의 상당 부분은 후세 사람의 가탁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잡편>의 끝장인 '천하'는 당시의 온갖 학설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선진의 여러 학술을 개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한대 초기에 장자 학파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성행하던 각 학파의 진수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어 선진 사상 연구에 중요한 문헌 자료가 되고 있다.
3. 장자의 사상
장자는 꿈 이야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눈을 돌려 꿈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꿈 이야기 속에는 잠을 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냉철한 통찰이 담겨져 있어 인간의 지와 사물과의 관계를 추론하고 있다.
'지적인 인식은 대상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확정되는 것이나, 대상이 되는 사물 자체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대종사)
장자는 현상계의 본질을 변화 가운데서 추구한다. 만물은 한순간도 그칠 사이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변화한다. 장자는 모든 변화의 근원인 동시에 일체의 변화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상정하여 '도'라고 이름 붙였다. '도는.... 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마음으로 느껴 얻을 수는 있어도 감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으로, 천지 개벽에 앞서 존재했다. 귀신도 상제도 하늘도 땅도 그 연원은 모두 도이다.'(대종사) 도는 사물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사물을 보면 일체의 사물에 구별이 없어진다. 도는 원래 무한정한 것이므로 사물의 구별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는 무한정한 자연을 한정지으려 한다. 사물을 대비하고 분별하여 질서를 세우려 하는 것이 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사물을 분별해야 할까?
'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되나, 저것 쪽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 된다. 즉 저것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라는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되며, 이것이란 개념은 저것이란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된다.....'(제물론)
인간의 판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지에 의지해 자기의 판단만이 옳다고 서로 맞서 싸운다. 이것이 지적 동물인 인간의 비극의 뿌리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를 버리지 않는 한 이 비극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지의 한계를 자각하고 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사물의 차별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진인은.... 만사를 있는 그대로 내맡길 뿐, 작위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죽음으로 인해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지에 의해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써 자연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이란 바로 이것이다.'(대종사)
자연 그대로의 인간인 진인은 장자가 그린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상이다. 사물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성 변화하는 외계의 사상에 무한으로 순응해가는 자유로운 정신이 바로 진지인 것이다. 지에 구속되어 자연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인간이 진인의 자재로운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기 자신의 자연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도와 일체화한다.'는 말은 완전한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에게 자유란 인간이 자기의 속박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도를 체득함으로써 현상계의 차별과 대립의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 즉 '주어진 현실 속에 살면서도 그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자재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쓸모없는 것일수록 인위와의 관계는 멀어져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다. 인간이 그 어떤 것의 도구도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어야만 천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육체가 쓸모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편안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 하물며 재덕이 쓸모없는 인간이 천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인간세)
<사기>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장자의 학문은 노자에 기초를 두고, 공자의 무리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사마천 당시부터 '유가를 조롱하고 인간의 노력을 부정한 사상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세속적인 권위나 가치관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달리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여, 공자가 죽은 뒤 형식화해버린 유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장자가 유가의 시조인 공자 그 개인을 부정한 것일까? 공자는 <장자>속에 가장 빈번히 오르내리는 인물이지만 정면으로 통렬한 비판을 받은 것은 겨우 몇 군데 뿐으로, 대부분의 경우 '아직 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문장 가운데는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명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인간으로서의 노력을 버리지 못하는 공자에 대한 깊은 공감이 엿보인다.
장자를 유가 출신으로 보는 견해는 바로 이런 점에서 연유한다. 장자의 사상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제물론'에 양행이라는 말이 있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이 모순한 채 긍정되고 대립된 채 의존한다는 무한히 자유로운 경지를 의미하는 말인데, <장자>는 바로 이를 바탕으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자>에는 견실한 사변과 분방한 공상, 신중한 몸의 보호와 함께 몸을 내던지는 자기적인 도약 등 온갖 대립적인 요소가 한자의 오묘한 뉘앙스 속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이처럼 독특하고도 양의적인 필체가 <장자>의 구성에 시적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이래 도가의 모든 학파들은 한 때 세력을 잃고 회남왕 유안 밑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들이 지은 <회남자>란 책은 내용 또한 <장자>와 흡사하다. <장자>가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게 된 것은 위진 시대(3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고, 노자와 장자를 합쳐 '노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후로 <장자>는 유가의 경전이 공식적인 학문으로 인정받는 이면에서 많은 독자들을 얻게 되었다. <장자>는 여러 방향으로 이미지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문장상의 특징 이외에도 다방면에 걸쳐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을 정치와 종교, 문학 예술 측면으로 나누어 조명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정치
평자에 따라서는 장자 사상을 단순하게 약자를 위한 철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현세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약자가 <장자>를 통하여 고민과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정신적인 위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일반 대중의 눈을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변혁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하는 마약이라고 비난하며, 장자에게 봉사하는 것을 노예 근성이라고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양쪽이 다 <장자>가 미치는 영향을 잘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장자는 약자에게 구원이 되는 동시에, 그 정신을 잠들게 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약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세상의 강자인 지배 계급들에게까지 골고루 읽혀졌다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 사회를 지배해온 표면상의 이념은 유교의 도덕론과 명분론이었다. 그리고 그 완고한 멍에와 굴레는 지배층에게도 숨쉴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답답함을 <장자>를 통해 해소했고, 잠시나마 우주와 일체가 된 경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노장을 대표로 하는 도가 사상은 유가 사상과 표리 관계를 맺으면서, 그 내부로부터 봉건적인 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사상은 하나의 가치가 되어 반역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근대 초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노장'이 말하는 무위 자연의 다스림 속에서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찾았던 것이다.
* 종교
한대에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는 장자의 인식론을 매개로 하여 순식간에 중국인의 정신 세계를 잠식해 들어갔다. 특히 중국에서 번성한 선종은 장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장자의 사상은 또 후대 도교에도 이용되었다. 후대 도교란 한위 육조 시대에 재래의 신선 사상이 세속적인 이익을 염원하는 토속 신앙과 결합해서 생겨난 것이므로 장자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장자>에서 볼 수 있는 천수를 온전히 하겠다는 염원이며, 즐겨 신선을 등장시키는 점 등이 이용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당대에는 <장자>를 <남화진경>이라 하여 도교의 경전에 포함시켰으며, 장자 역시 남화진인으로 불리면서 열선으로 추앙받기에까지 이르렀다.
* 문학 예술
<장자>는 그 문장이 오묘하고 발상이 자유분방하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학서이다. 예부터 중국의 문장가들은 대부분 장자를 통해 문장력을 길러왔으니, 도연명과 이백, 소식 등 그 이름을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또 문학이 정치나 도덕과 분리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한다는 근대적인 문학관을 확립시키는 데에도 장자의 '무용의 용' 사상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장자의 사상 중 가장 뛰어나고 후세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결국 내적인 정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유유 자적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소요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고, 사생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서 소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인생은 모두 천명이라는 숙명론을 취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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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중상과 비방
시골 마을 사람들이 방 안에 모여 어떤 사람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기는 하지. 그런데 두 가지의 결점이 있어. 그것만 고친다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맞는 말이야. 정말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너무 화를 잘 내는 게 그 사람의 커다란 결점이지.” “또 하나의 결점이란 성질이 급하다보니 너무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 이 두 가지만 고치면 그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동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얘기 속의 주인공이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말한 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런 나쁜 사람 같으니! 자네 지금 나더러 뭐라고 했는가, 왜 함부로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건가, 엉?”
분을 참지 못한 그 사람은 주먹으로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왜 이리도 흥분하는 겐가! 참게나!” “뭐? 내가 화를 잘 내고 경솔한 사람이라고? 이런 못된 사람 같으니!”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뜯어말리면서 말했다.
“여보게, 지금 자네 행동이야말로 경솔한 게 아니고 뭔가. 화를 내면서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자네의 허물은 바로 이것이네.”
‘백유경’에 나오는 우화이다.
누구든 남이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우선 불쾌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달리 생각하면, 자신의 허물을 얘기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상대방이 지적한 잘못에 대해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며, 그처럼 남을 비난하는 사람 역시 더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인 것이다.
자비사 신도 중에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항상 드러나지 않게 내 일을 묵묵히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그분이 내게 오시더니, “스님, 하시는 일이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라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는 것이었다. “...?” “일전에 제 사위가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장모님, 스님을 뭣하러 도우십니까. 그 사람 남을 돕는 척하며 자기 재산만 축재하는 사람이예요.’라고요. 전 가까이에서 스님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남들에게서 칭찬은 못들을망정 이처럼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들마저 있으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분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사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바꾸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란 모두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자이신 예수님도 유다의 배신으로 은 열 냥에 팔려갔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도 사촌인 조달로부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지요. 위대한 성자들도 이렇듯 세인의 오해와 시달림 속에 세상을 살다 가셨거늘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야 그런 비난쯤 받는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또 한 번은 모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프로듀서가 내게 오더니,
“어떤 스님이 오셨었는데 스님에 대해 심한 비난을 하시더군요. 일부러 찾아와 그렇게 심하게 험담을 하고 가다니.... 저도 불쾌해서 혼났습니다.”라며 내게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말했다. “허허, 그 사람이 내 허물을 아직 다 모르는 모양이군요. 나는 그 사람이 말한 허물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약점과 허물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써 찾아와 지적을 해주시니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그렇다. 사실 나는 허물이 많으며 약점 또한 많은 사람이다. 허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반성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요, 앞으로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살다보면 남들에게 칭찬보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상대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다 내 허물이니 어쩌겠는가. 그럴수록 내 자신을 한번 더 뒤돌아보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무엇이든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러다보니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일도 있고 때론 이처럼 본의 아닌 오해를 받게 된다. 육조 혜능 대사는, ‘지나간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으면 진정 참다운 불자라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수행자로서 허물이 많다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잘못된 점은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혹 사람들 중에는 남의 허물을 들춰내 비난할 뿐만 아니라 재미삼아 중상하거나 모략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가 장난삼아 무심히 돌팔매질을 한다 치자. 이럴 경우 돌을 던지는 아이야 재미로 한다 하겠지만 지나가던 개구리가 그 돌에 맞아 죽는다면 어찌될 것인가. 남을 중상한다는 것은 돌을 던져 무고한 개구리를 죽게 만드는 아이의 행동과 다름이 없다. 때론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을 헐뜯는 것은 살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즉 험담을 하는 사람과, 그 험담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또 그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을 중상하는 것은 흉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더 죄가 크다. 흉기는 상대방의 가까이가 아니면 해치지 못하지만, 중상은 멀리서도 사람을 해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이 붙은 장작은 물을 끼얹으면 속까지 꺼져 식게 되나 중상을 받아 화난 사람의 마음 속은 끄지 못한다. 마음이 선량하더라도 입이 험한 사람은, 마치 훌륭한 궁전 앞에서 악취를 풍기는 제혁공장과 같다. 사람에게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는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남의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험담을 듣게 될 때는 급히 귀를 틀어막아라.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 사람도 역시 입으로 걸려든다.
이처럼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큰 악을 초래한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이로 인해 다치게 되니 이보다 더 무서운 흉기가 어디 있겠는가. 본래, 흐르는 탁한 물에는 형상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고여 있는 잔잔한 맑은 물만이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준다. 오래도록 앉아서 맑은 물 속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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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2. 광해군과 인조반정 :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17세기초 사회 변화와 정치 동향
16세기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대변동을 겪게 되었다. 현재 양난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어 아직은 전체적인 조망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확인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조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얻어낸 것이었다. 전쟁에서 아무리 승리한다 해도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쟁이 끝난 후 흉년과 질병으로 농촌경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고 귀중한 문화재는 물론이고 서울의 궁궐은 거의 소각되어 국왕은 개인의 사저를 집무실로 써야할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은 지배계급의 허구성을 여실히 체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미 전쟁 전에 이이 등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역설하였지만 지배계급의 역량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이에 대응할 만한 정규군대는 매우 허술했다. 왜적을 막은 것은 농민들이나 천민이 주축이 된 의병들이었고, 도망가기 바쁜 계층은 양반들이었다. 물론 중앙 관직을 갖고 있던 관료들 중에는 자진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지방 사족들 중에서 왜적과 맞써 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속출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겪은 전쟁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신할 정도로 왜병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각종 공신을 내리고 전후 복구 사업에 착수하려 했으나 전화로 인한 피해가 깊은 데다가 흉년까지 들어 별로 진척이 없었다. 선조는 말년에 몸이 쇠약해져 국정을 쇄신할 역량이 점차 감소하였다. 결국 선조는 전후 복구사업을 별로 이루지도 못한 채 1608년에 급사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할 즈음 붕당간의 파쟁 조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불씨는 선조가 죽기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원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정비 소생의 적자를 얻지 못하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의 몸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얻었다.(적자는 '대군'이라고 불렀지만 서자는 그냥 '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둘다 품계는 없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병이 빠른 속도로 북상한다는 보고를 듣고 정부는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국가의 위급이 초를 다투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둘째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였다. 첫째인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고 학문적인 소양도 없으므로 왕이 될 재목이 안된다는 여론에 따른 조치였다. 사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 늘 선조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었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어깨가 무거워졌음을 인식하고 일단 눈앞에 닥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우선 광해군은 평양을 떠나 다시 의주로 피난을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분조 (세자의 자격으로 임시로 임금의 일을 대행케 한 제도)를 위한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때부터 광해군의 발길은 바빠졌다. 전쟁에 휘말린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그는 약 7개월 동안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돌며 의병 모집을 하는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선조가 있는 행재소에 다시 복귀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광해군은 세자로서 신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후 광해군은 방위체계를 위해 만들어진 군무사를 관장하였고, 1597년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자(정유재란) 전라도로 내려가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당시 왜적에 대비하여 부산에 수군함대를 집결시켜 놓았는데, 선조는 이를 보고 만일 호남으로 적이 들어오면 막을 길이 없으니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아마 광해군은 이러한 선조의 명을 받아 전라도 방어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광해군은 전쟁의 와중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현군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을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전쟁 중에 세운 공로로 말미암아 광해군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안정된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594년 명나라에게 세자 책봉을 보고하였을 때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지만 왕위 계승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반대하는 무리들에게는 이러한 관례적인 문제도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권에 대한 도전 : 왕권 약화에 따른 붕당의 득세
그런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최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선조의 적자, 즉 영창대군이 탄생한 것이다. 선조는 1602년 18세의 어린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죽기 2년 전인 1606년에 영창대군을 품에 안았던 것이다. 인생 말년에 얻은 아들이다 보니 극진한 정을 갖게 된 면도 있지만 우선 서얼이 아닌 적자라는 점에서도 더 정이 갔다. 선조는 광해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들 시대에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척끼리 유혈 싸움을 벌인 일이 허다했다는 것을 선조가 모를 리 없었다. 추측하건대 선조가 만일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아들의 재롱을 다 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선조는 죽기 전 자신의 병이 위독해짐을 알고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린다는 전교를 내렸다. 또한 유영경 등 충신 7인(유교칠신이라고 부른다.)을 따로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여운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한마디의 유언이 광해군 즉위 초기부터 국정이 당쟁에 휘말리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에 붕당은 다시 세포 분열을 일으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있었다. 흔히 역사에서 표현하기를, '전쟁의 와중에서도 당파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치루고 명나라 군대와 사신들을 대하느라 중앙의 관료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당시 정황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당쟁이 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경위를 {택리지}에서 들어보자.
그 무렵에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경전이 유생 때부터 남의 나무람이 많았으니 전조에 끌어들임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산해와,산해에게 아부하던 자들이 크게 노하였다. 그때에 이덕형이 정승이었는데 사람을 시켜 이준을 청하여서, "자네가 경임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조에 추천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조정을 편케 하는 도리가 아니다. 내가 사정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준은 경세와 같은 고을 사람이고, 경전은 덕형의 아내의 아우인 까닭에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에 남이공이 대간이 되어 수상 유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하였다. 대개 경세는 본디 유정승의 제자였으므로, 산해는 경세가 유정승의 지시를 받았는가 의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공을 시켜 말한 것이나, 성룡의 허물은 아니었다. 이에 성룡을 편드는 사람으로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한준겸은 모두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상룡이 영남 사람인 관계이며, 산해를 편드는 사람으로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노, 이이첨은 모두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산해의 집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인이 비록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으나 남인은 아주 적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대립 양상에 불과하다. 당시 분당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정철의 탄핵을 둘러싸고 서인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일파와 온건 대응을 주장하는 일파가 생겨 갈라졌던 것이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며 공을 세운 정철은 사태 수습 후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591년에 정철은 적자, 즉 왕위를 계승할 원자가 없음을 지적하고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등과 같이 상의한 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에게도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여 '건저 주청'(쉽게 말해서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와 허락을 말함)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자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산해 등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그런데 동인이었던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곤량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 선조가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아끼고 있음을 알고 있던 이산해는,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김씨는 선조에게 달려가 울면서 호소하자 선조는 격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철은 경연에 나가 건저 문제를 거론하니 선조는 크게 화를 내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정철은 이산해, 유성룡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은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또한 같은 서인인 이성중, 이해수 등은 외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봤을 때 이산해의 계략은 2년 전인 1589년에 있었던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 때 동인들이 정철의 손에 엄청나게 숙청당하자 이를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건저 문제를 빌미로 그를 중앙에서 밀어냈던 것이다. 이때 세자 문제로 거론된 왕자는 신성군과 광해군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신성군을 더 총애하였다고 한다. 단지 광해군이 둘째이고 신성군이 네째라는 서열상의 문제 때문에 왕조차도 자신의 뜻을 쉽게 거론할 수 없었다. 신성군은 임진왜란이 터진 이듬해인 1592년 전쟁에 참여했다가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서 다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심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북인은 다시 분열되어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졌다. 1599년의 일이었다.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의 위치에 있었던 남이공이 이를 반대하였다. 이때 홍여순, 기자헌, 이이첨, 정인홍, 허균 등은 대북이 되었고, 남이공을 중심으로 유영경, 이효원, 이유효 등은 소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붕당의 분화 현상은 집권층 내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대북은 소북을 몰아내고 광해군 즉위 후 세력을 잡게 되었지만 다시 세 파로 나누어지는데,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과 홍여순, 이이첨의 육북, 그리고 영창대군, 인복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이 생겨났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대북은 여러 사건 때마다 강경과 온건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며 이것 역시 사건 처리를 놓고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뚜렷한 이념에서 야기된 분열은 아니었다.
어쨌든 거시적으로 봤을 때 선조 말년부터 국정은 주로 북인들이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서인이나 남인들은 중앙에서 점차 멀어졌다. (이것은 당쟁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지 나머지 세력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파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서얼 출신도 과감하게 기용하였다.) 다시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로 돌아가 보자.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죽기 전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영경은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막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선조의 죽음이 임박하자 광해군 즉위 문제를 둘러싸고 당파간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필해온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유영경의 음모는 탄로나고 말았다. 이때의 인물들을 역사에서 분류하기를, 유영경은 소북, 정인홍은 대북이라고 부른다. 소북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정인홍 등은 유영경을 엄히 다스릴 것을 선조에게 요청하였지만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조는 죽었다. 이런 음모를 극복하고 광해군은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 광해군은 자기의 뜻에 따라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는 유영경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그를 교동도에 유배보냈다. 그런데 계속 유영경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영창대군을 추종하는 세력이 다시 커지자 부득불 그에게 사약을 내려야 했다. 또한 더큰 문제는 임해군과의 관계였다. 우선 여기서 그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세자로 책봉되지 않았는지 잠시 알아보자. 성격이 난폭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임해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왕명에 따라 김귀영, 윤탁연 등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가 1592년 9월에 반적 국경인에게 체포되어 왜장 가토에게 넘겨진 후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아무리 세자 책봉이 안됐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장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양국간에 여러 차례 교섭을 하여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포로 생활을 하면서 상당히 피해 의식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군은 자기의 분을 못이겨 거리를 나돌아 다니기 일쑤였고 성격이 더 포악해져 아무 민가나 들어가서 약탈을 하거나 폭력을 휘둘러 더욱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임해군은 포로 당시 가토의 회유에 넘어가 그에게 조선의 내정을 알리는 서신을 몇 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마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임해군임에도 불구하고 장자라는 위치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계속 문제 삼았다. 1608년 선조가 죽은 후 명나라는 마침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역시 임해군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의 조작이었다. 이런 것을알고 있던 임해군은 더 기세가 등등해졌고 그를 이용하여 왕위 찬탈을 꾸미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의 집에 무기가 반입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상소도 보이지만 결국 이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해군이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시비를 건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를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났던 것도 당시 상황이었다. 특히 임해군 자신은 광해군을 헐뜯고 다니면서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임해군 문제를 놓고 당파간에 혈전이 오갔다. 그런데 정인홍은 왕권이 안정되어야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다고 하면서 형제라도 반역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광해군에게 단호하게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친형을 처벌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임해군을 유배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609년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은 반대하였다. 임해군은 진도에 있다가 교동도로 이배되어 있었는데 당시 현감이 이현영이었다. 그는 이이첨과 인척 관계였는데, 이이첨이 임해군을 죽이라는 암시를 주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이첨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어 "현영은 죄인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였다"고 탄핵한 뒤 그 후임으로 이직을 앉혔다. 결국 임해군은 이직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임해군의 죽음은 광해군 때문이라기 보다는 광해군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북인 과격파들이 꾸민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같은 북인이라고 하더라도 정인홍의 경우에는 광해군의 왕권 강화와 국가 기강에 초점을 맞추어 관직을 내려도 중앙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스승이 산림에 처해 있었던 것을 본받아 일이 생길 때마다 광해군의 자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정권이나 자기의 영욕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선비였다. 그래서 그를 산림정승이라고 불렀다. 유영경 사건이 터졌을 때도 처사로 있으면서 과감하게 유영경을 처벌할 것을 선조에게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모함을 당하여 노구를 이끌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도중에 선조가 죽는 바람에 풀려났다. 반면에 이이첨 등은 광해군을 부추켜 여러 실정을 저지르게 하였다. 이렇게 같은 파벌에서도 처세술이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당시 정치가 상당한 분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내용만 살펴봐도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부터 시작하여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험난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축옥사와 인목대비 폐모 사건 : 인조반정의 원인
선조 즉위 전후로 시작된 대북과 소북 사이의 알력은 결국 1613년(광해군 5년)에 일대 숙청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른바 계축옥사가 그것이다. <연려실기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 옥사에 대해 무려 세 가지 시각이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실제로 강변칠우들이 강도짓을 일삼다가 체포되어 이이첨의 협박과 회유로 거짓으로 반역을 꾀했다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강변칠우들이 서얼 출신들이므로 중앙 진출을 할 수 없자 오랜 시간을 두고 스스로 모반을 꾀하다가 이들을 정탐하러 뒤쫓아온 상인을 죽였다고 하는 것이다. 또는 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도 한다. 세째는, 강도짓을 한 박응서가 체포되었을 때 다른 동지들이 중앙에 뇌물을 주어 풀려고 하였지만 박응서가 미리 겁을 먹고 모반을 꾀했다고 자백했다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갑도 체포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까지 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하자 정부의 타락을 욕하면서 "제(광해군)가 나의 어머니를 죽이니 나도 제 어머니(인목대비)를 죽여야 되겠다" 하면서 자기들의 모반을 인목대비와 그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주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1)박응서의 행위가 단순 강도였는데 이이첨의 계략으로 거짓 자백한 것인가, 아니면 2)강변칠우들이 실제로 모반을 계획하던중 자금 조달을 위해 상인을 해치다가 걸려들어 이들의 모반을 알게 된 이이첨이 고문하여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김제남을 괴수로 끌어들였느냐 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즉 이이첨 등 북인 과격파가 단순 강도를 모반으로 조작한 것이냐, 아니면 실제로 강변칠우들이 반란을 계획했는가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일단 양쪽 의견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사건 전모를 밝혀보기로 한다.(일반적으로 이이첨이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므로 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강변칠우란 박응서(그는 박순의 서자였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김평손 등 서얼 출신의 7인을 뜻한다. 이들은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함을 불만을 느낀 나머지 서로 의기투합하여 모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강변칠우는 중국의 죽림 칠현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니 이들의 도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생과 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를 하고 여주 북한강변에 무륜이라는 정자를 짓고는 여기에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서양갑, 심우영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서자도 등용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강도 행각을 일삼는 한편 모반을 꿈꾸었던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던중 박응서 등이 문경 새재에서 서울 상인(또는 동래 상인이라고도 한다.)을 죽이고 수백냥을 약탈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관련자들이 포도청에 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이첨은 포도대장을 찾아가 그와 협작하여 이들을 이용하여 반대파 축출은 물론 영창대군과 그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이첨은 직접 박응서 등을 국문하면서, "네가 이러이러하기만 한다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이룰 수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다시 진술하라"고 종용하였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박응서 등은 이이첨의 계략에 넘어가, 자신들은 모반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목적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사주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상인을 죽인 것은 모반을 위한 자금 마련 때문이라고 자백하였다. 영락없이 어린 영창대군은 모반의 괴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밟은 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폐하였으며 선조의 유교칠신 가운데 현직에 몸을 담고 있던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 등을 중심으로 서인과 남인 수십 명을 삭탈 관직하거나 유배보내었다. 또한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대북파 사이에서 거세게 일자, 이이첨은 강화부사 정항에게 지시하여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암살하고 말았다. 당쟁의 회오리 바람에 어린 왕자는 뜻도 모르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때에도 정인홍은 "아무리 왕법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린 대군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중앙은 이미 대북 과격파가 장악한 뒤라서 그의 의견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과격파들은 아예 반대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정원군(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을 교동도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살해하였다. 물론 영창대군을 따르는 서인들이나 남인들이 인목대비와 김제남을 중심으로 대북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북 과격파는 이러한 정세 불안 요인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하여 위와 같은 옥사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집권층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리일 수도 있다. 결국 계축옥사 사건의 진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강변칠우들이 정말 어떠한 뜻을 갖고 강도짓을 했는지(이 내용조차 조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이첨이 조작한 것인지에 상관없이 이 사건을 빌미로 대북 과격파는 정권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며 광해군은 폭군으로 몰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임금은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까. 바로 여기서 왕권과 신권 사이의 대립, 갈등을 읽을 수 있으며 세조 이후 약화된 왕권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군주체제가 갖는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일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축옥사 이후, 정확히 5년 후 드디어 인조반정을 야기시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다. 계축옥사가 있고 난 뒤에도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 김씨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다가 1617년에 이르러 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사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대해 신하들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다. 같은 대북인이었던 정인홍은 역시 이때에도 전은론을 펼치면서 국모에게 벌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폐륜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던 이원익도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극렬한 어투로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려 대비폐위론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오히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는데도 자꾸 민심을 흐뜨려 놓는다고 하면서 그를 홍천으로 유배보내었다가 여주로 이배시켰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때도 맹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쟁의 병폐에 반대하면서 정도를 주장한 강직한 선비였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과격파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을 끝내 설득시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던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김덕함 등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기회로 삼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뒤, 공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인목대비가 굿을 벌인다는 것을 핑계삼아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말려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광해군은 돌이킬 수 없는 폭군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 민심은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고 반대파에서는 본격적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자는 모의가 진행되었다.
인조반정 : 서인 일파의 집권
인목대비 폐위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들이 극렬한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이 되었다. 마침내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력 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함흥판관에 재직중이던 이귀는 북우후 신경진과 모의를 논의하고, 유생 심기원, 김자점과 뜻을 같이한 뒤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능양군을 옹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단시일에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반정이 있던 전해부터 무력 정변의 조짐은 있었다.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 신경진은 효성령별장으로 있었는데 평산 지방에 호환이 심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귀는 범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보장을 얻어내어 이것을 기회로 서울까지 밀고 내려와 거사하려 했으나 이 모의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러자 다음해에 들어서서 그가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이귀 등은 서둘러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것이다. 거사일을 1623년 3월 13일로 잡고 전날 밤인 3월 12일에 홍제원에 모여서 대오를 가다듬고 일제히 군사 행동을 벌일 것을 최종 약속하였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홍제원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모두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장유라는 자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달려왔다. 이미 정부에서 모반 계획을 알고 일제 검거령을 내린 동시에 훈련도감 이확이 이끄는 정부군들이 창의문에 군사를 결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태는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직 반란군의 반도 차지 않은 데다가 주력부대인 장단부사 이서의 부대가 도착할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반람군 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모인 반란군 수는 불과 600-700명. 그것도 정부군과 접전을 벌일 만한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붙잡힌다면 모두 처형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진퇴양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모인 군사들조차 우왕좌왕하여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으며, 김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대신 대장을 맡으라고 권고하였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면 군사들이 모두 도망갈지도 모르는 지경이었다. 이괄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괄은 군사들에게 '의'자를 쓴 표지 수백 개를 나누어주어 각자 군복 뒤에 붙여 어둠 속에서도 정부군과 구별할 수 있게 조치하였다. 그리고 이괄은 군관들 밑으로 군사를 나누어 전열을 수습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궁궐을 향하여 진격하는 것 뿐이었다. 그때 김류가 보낸 전령이 이괄의 부대를 찾아왔다. 김류가 군대를 일으켜 합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괄은 처음엔 그를 배신자라고 욕하면서 뜻을 합치지 않으려 하였지만 이귀 등이 말리자 결국 김류의 부대와 연합하게 되었다. 김류는 반정의 모의가 정부에 알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담치 않으려고 집에 있다가 그의 측근들이 설득하자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출정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괄은 김류에게 총지휘권을 양보하였다. 이럴 즈음, 이서의 주력부대 등이 도착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반란군은 일시에 창의문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이미 창의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 소속 선봉부대는 문을 부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 주력부대가 북을 치며 들어가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이때 창의문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이확의 부대는 반란군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확은 이미 사태 파악을 하고 광해군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이흥립은 이미 반란군과 내응하기로 결정을 봤기 때문에 아예 반란군이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정도였다. 궁궐의 주력부대가 모두 반란군 세력에 포섭된 상태였다. 반란군은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까지 이르렀다. 이때에도 사전 약속이 되어 있던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반란군의 횃불에 창덕궁의 여러 전이 불에 타올랐다.
반란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반란군 군사들은 돈화문에 이르러 쌓아둔 나무에 불을 질렀다. 한밤중의 궁궐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궁궐 내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시 몇명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의 거사는 별다른 전투도 벌이지 않고 성공리에 끝났다. 남은 일은 왕을 교체시키는 것 뿐이었다. 이튿날 반란군 지휘부는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바로 인조이다. 능양군이 보새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에게 바치자, 인목대비는 기뻐하며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1)선왕(선조)을 독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켰으며 2)토목공사를 크게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3)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하였다는 죄목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인조반정은 모두 일단락되었다. 전날 북문으로 빠져나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던 광해군은 곧 잡히고 말았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인조의 간청으로 사형을 면하게 하여 서인으로 격하시켜 강화도로 귀양보내었다. 사실 광해군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원익의 간곡한 청원 때문이었다. 당시 이원익은 여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반정 이후 인조가 그의 인품을 익히 알고 제일 먼저 조정에 불러 영의정에 임명하려 하였다. 이원익은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인조에게, 자신은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기도 조정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감복한 인조는 광해군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조치를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다시 조정에는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서인들은 그동안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하여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수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낙도 등으로 귀양보내버렸다. 반면, 인조는 반정에 큰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 김류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리고 각기 등위에 따라 관직을 명하였다. 또한 남인에 속한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이 됨으로써 남인이 제2 세력을 형성, 서인과 남인의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는가 : 대동법 실시와 자주외교 정책
여기까지 보면 광해군은 연산군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폭군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는 폭군이었을까. 우선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는 근거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그는 친형인 임해군과 8살의 영창대군을 죽였다. 또한 국모의 아버지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서인들을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조선 국왕 가운데 가까운 친인척을 죽인 임금이 어찌 광해군 하나뿐인가. 물론 결과론적인 지적이지만,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친인척을 모두 살해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선조의 아들이, 즉 언제든지 세력만 있으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왕자들이 영창대군 외에도 13명이나 더 있었다. 만일 광해군이 왕위에 불안을 느꼈다면 이들 모두를 살해했어야 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만을 상대했다. 태종은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왕자의 1, 2차 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세조는 조카와 두 아우를 죽였다. 그리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 역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숙부까지도 죽음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폐위되어 폭군이 된 이는 광해군 뿐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권력 투쟁에서 진 임금은 당시 세력을 잡은 권력자에 의해 폭군이 되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이시애의 반란이 성공하여 세조를 축출했다면 그 역시 역사에 수양대군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실정을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마저 죽이고 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당시 성리학적 이념에서 볼 때 폐륜에 속한다. 이것은 광해군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것을 자의로 행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사화를 일으킬 때, 주위 대신들이 이를 조작한 면도 있지만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는 그도 역시 광분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분명 광해군은 연산군과 다르다. 따라서 연산군에 대한 평가조차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광해군이 처한 당시 정치적, 나아가 외세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의 공적을 드러낸다면 그가 자의적으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대동법 시행이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까지도 대납에 따른 부조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김육 등이 건의하여 모든 공물을 쌀로 대치하자고 하였다. 광해군은 전쟁 직후 피폐화된 국토를 재건설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위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즉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당시는 경기도에만 한정했지만 이후 후대 왕들이 광해군의 취지를 살려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대동법은 1894년까지도 존속하였다. 광해군의 전후 복구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에서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근거로 제시한 것 가운데 하나가 토목공사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세 봉건질서의 안정은 왕권의 강화에 있다. 이것이 독단에 빠져 폭정으로 이어진다면 문제이겠지만, 왕권이 약화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면 그것은 더 큰 문제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문벌귀족들이 득세하여 그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중세에는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대신들이나 관료들이 이를 보필하면서 국정을 이끌고 민생을 돌볼 때 가장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이룰 수 있었다. 결국 광해군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소각된 궁궐을 재창건한 것은 이러한 취지에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서울의 궁궐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 천도를 계획하였다. 전쟁 이후 민심이 흉흉해져 다시 '정씨 왕조설' 등 각종 도참설이 나돌자,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주로 천도할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 궁궐을 지을 기초 공사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또한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막대하고 이때 명나라가 후금과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청병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자기의 독재적인 정권을 유지하는 폭군이었다면 백성들의 원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천도했을 것이다.
광해군의 정국 운영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은 자주외교 정책이다. 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명나라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명나라는 이미 임진왜란에 참가하는 시기 전후로 말기에 처해 있었다. 또한 이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그만큼 국력 소모가 극심했다. 내부적으로 볼 때 농민들은 토지를 수탈당하여 문벌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심화되었으며 이밖에도 농민들은 각종 부세에 시달려 농촌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사회적 모순은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17세기초 전후에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 민란은 하나의 도당을 만들 정도로 강대해져 명나라 정부는 이에 대처하는 데에도 힘겨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거기다가 당쟁이 격화되어 조정 내부는 일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편, 만주를 중심으로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여진족은 누르하치에 의해 강성한 국가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원래 여진족은 11세기 때 금나라를 세워 전성기를 맞은 적이 있지만 이후 원나라에게 패배하여 다시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야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해서, 건주, 야인(고려나 조선 때 여진족을 야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등 3부이다. 이 여진 3부는 각기 사회적 발달 속도가 틀려서 야인부의 경우 '물을 따라 살며' 활 사냥을 해야 할 정도로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이 주로 한반도 북방을 침략한 부족이었다. 반면에 해서부와 건주부는 비록 수렵 생활을 하긴 했지만 목축과 농경이 발달하여 야인부보다는 먼저 계급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나 조선은 이들을 모두 싸잡아 야만인, 또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러한 '오랑캐'가 다시 국가를 세운 것은 1616년의 일이다.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 정권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관제와 법제를 세워 국가 조직을 갖추면서 여러 부족을 통합해 나갔다.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이 그의 수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북방을 수비하던 명나라 장군 이성량 밑에서 성장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섭렵하였다. 그는 이때 병법과 각종 전술도 익혔으며 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안목을 키웠다. 이전에 명나라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동 이북 지역에 180여 개의 위소 (정복지 관리 기관)를 설치해 놓았었다. 그러나 중앙 정권이 약화되자 여진족에 대한 통치도 소홀해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누르하치를 건주위좌도독에 임명하는 등 관직을 준 것이 명나라로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일찍이 배운 학식과 병법을 토대로 강성한 국가를 세워 나갔다. 그리고 명나라의 내정이 날로 갈수록 부패해져 농민 반란 등으로 인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명나라를 치기로 결정하였다. 1618년(바로 광해군이 군사 요청을 받아들인 해이다.), 누르하치는 '칠대한'(한마디로 말해서 중국 민족에게 착취당한 것에 대한 원한이다.)을 내세우며 명을 침입하여 무순성을 불태우고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과 재물을 약탈해갔다. 이로써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도발된 것이다.
명나라 정부는 조선에 군사 요청을 하는 한편,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정시켰다. 그러나 명나라는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 출정한 강홍립의 부대는 누르하치에게 투항한 상태였다. 요동 전투에서 진 명나라는 사실상 요동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된 셈이며 반면 누르하치의 후금은 더욱 강성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나라는 기울고 후금이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광해군은 정확히 읽고 있었다. 이미 그는 임진왜란 때 전투에 직접 참가하면서 명나라 군사들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한 명나라 군사들이 구원병이라고 자처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도 잊지 못할 사실이었다. 유성룡도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었다"고 토로할 정도로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는 왜군 못지 않게 극심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 직후 정인홍이 자주국방론을 주장하면서 명나라 군대는 믿을 것이 못되며 왜적이 쳐들어온 것은 벼슬아치들의 썩은 통치 때문이라고 하면서 민생고를 해결하여 민심을 바로 세워야 국가 기강이 서고 외침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광해군은 이러한 정인홍의 상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국제 정세가 혼돈에 빠지자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에게 명하여 정확한 정세 보고를 하도록 하고 의주지방의 관리를 시켜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시켰다. 불과 몇 년전에 전쟁을 겪어 국력이 약화된 사이에 여진족이 남하한다면 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겪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속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광해군은 판단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다는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군사 요청을 한 것은 1617년도부터이다.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협공으로 후금을 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 정부는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으니 군사를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에 대해 더 짙은 사대의식을 갖게 된 사대파들이 들고 일어나 즉시 군사를 보낼 것을 연일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때 광해군은 묘안을 떠올렸다. 당시 강홍립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광해군이 즉위하기 3년 전인 1605년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도 이덕형을 따라 명나라에 한 차례 더 갔다왔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남병사 (함경도 북청에서 근무하는 무관직. 국경지대의 방비 책임을 맡았다.)에 임명되었다. 그 이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에 강홍립은 세자시강원에서 일하는 보덕을 맡은 적이 있어 광해군과는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즉, 광해군은 그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며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으며 국제 정세에도 밝다는 것을 알고는 중용할 뜻을 가졌다. 마침내 광해군은 그를 한성부 부윤에 임명, 서울에 있게 하면서 자주 국제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
광해군은 무신으로서 신임할 사람이 강홍립밖에는 없다고 최종 결정한 뒤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절대 후금과 싸우지 말며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출정은 명나라 청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누르하치에게 알려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1618년 8월에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7개월이 지나서야 압록강을 건넜다. 광해군의 명령에 따라 명나라와 후금의 동태를 살피며 일부러 행군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강홍립은 명나라 군대에 흡수된 뒤에도 무기가 모자란다, 양식이 떨어졌다는 등 여러 구실을 만들어 후금 군대와 충돌하지 않았다. 4군으로 편성하여 진군하던 명나라 군대는 후금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홍립은 어쩔 수 없이 후금과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군대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때가 1619년 3월초였다. 그는 후금의 누르하치를 만나 광해군의 뜻에 따라 조선은 후금과 조금도 싸울 생각이 없다고 전달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서 8년 동안이나 억류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편, 이러한 내막을 알리 없는 조정 내의 사대파 대신들은 강홍립을 역적으로 몰며 연일 상소를 올려 그의 가족을 처벌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의 가족을 서울에 데리고 와 거처를 마련해주고 신변 보호를 해주었다. 강홍립이 자기의 뜻대로 했으니 이에 당연히 보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광해군의 조치에 대신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홍립에 대한 탄핵 상소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광해군은 국내 정세의 불안을 감안하고, 또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갖고 있는 허구성을 정확히 파악, 후금이 남하하여 이 땅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을 막기 위해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하면서 한편으로는 후금의 침략 가능성을 무마시켜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보기 힘든 절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광해군은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제한적이지만 심지어는 당시 금기시되어 있던 서얼 등용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가 인재 등용에 당파를 가리지 않았다는 증거로는 조정 내에서 계속하여 광해군을 음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된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당파성을 강조하여 소북이나 서인, 남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옥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대북인들에 의한 독재정치가 이어졌을 것이다. 또한 선조 때부터 집필에 들어간 허준의 <동의보감>이 완성된 것도 광해군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례적으로 왕이 죽으면 그 주치의가 탄핵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준을 아끼어 처벌을 내리지 않고 저술 활동을 할 수 있게 조치해 주었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완성된 것도 물론 광해군 때이다.
이제 광해군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 그의 업적과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볼 때 광해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강력한 정부를 갖추어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당쟁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형을 죽이거나 동생을 죽이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과격파의 주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왕권을 이용하여 자파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당파 싸움에 광해군은 휘말려 희생물이 된 것이다.(조선 군주체제에서 왕권과 신권 사이의 관계는 따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었다. 그것은 후대에 세력을 잡은 이들이 조작해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후금과의 전쟁을 피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임금이다. 처음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강홍립도 같이 남하하여 그의 중재로 형제동맹을 맺었지만 그후에도 사대파들은 명분만을 내세워 후금을 계속 자극한 결과,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과 군신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 합방을 빼고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결국 사대파들이 대의명분만을 내세워 정확한 국제 정세를 정책에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인조반정은 자주파와 사대파, 진보파와 보수파의 투쟁에서 자주파가 몰락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사족을 달자면, '묘청의 난'을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 파악했던 신채호가 자주국방론을 주장했던 정인홍의 평전을 쓰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죽었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인조반정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은 언제나 내부에 모순점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터진 것이 바로 1년 뒤에 일어난 '이괄의 반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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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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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셋째 묶음 : 작지만 좋은 몫을
작지만 좋은 몫을
내가 종종 다시 읽어보는 우화 중에 노턴 저스터의 <점과 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직선 하나가 자기와는 다르게 생긴 점의 매력에 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의외로 점은 선에게 '너는 막대기처럼 뻣뻣하고 둔해. 자기 속에만 얽매여 있고 갇혀 있잖아. 외곬인데다 꼭 막혀 있어. 착 가라앉아 가지고 답답하단 말이야. 자기 감정을 짓밟고 억누르고 꼼짝도 못하게 하지'라고 쏘아붙이며 거칠고 단정치 못한 헝클이 하고만 어울려 다니곤 했다. 그래도 직선은 좌절하지 않고 점이 감탄하게 되리라고 생각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리저리 애를 써봐도 별도리가 없어 '이젠 어쩔 수 없다' 고 포기를 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커다란 집중력과 자제력으로 각을 하나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도 구부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놀라 밤잠도 설쳐가며 연습을 해서 정사가형, 직사각형, 삼각형, 평행사변형, 사다리꼴, 십각형 등 원하기만 하면 무슨 모양으로든지 자신을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점은 비로소 힘차고 재치 있고 새로운 모습의 선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점과 선은 무책임하고 불확실한 헝클이를 따돌리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너는 막대기처럼 뻣뻣하고 둔해. 자기 속에 얽매여 있고 갇혀 있잖아. 외곬인데다 꼭 막혀 있어'라고 내뱉은 점의 말이 꼭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해서 혼자서 얼굴을 붉히게 된다. 가뜩이나 마음 그릇이 크지도 못한 데다 소임에서의 경험의 폭도 넓고 깊지 못하여 참으로 융통성 없고 답답한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수 십년의 수도 연륜에 비하면 턱없이 미성숙하고 덕이 부족한 나를 독자들이 글만 보고 아름답게 생각하거나 이상적인 표현을 하가나 하면 나는 정말이지 몸둘 바를 몰라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뻣뻣하고 지루해 보이는 규칙생활이 늘 새롭고 즐거운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좋은 몫을 찾아내어 꾸준히 지속해 온 노력 덕분이라고 확신하다. 그 작지만 좋은 몫이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잇지만 또한 잊혀지기도 쉬운 평범한 일들이다.
예를 들며 어떤 사람이 빨간 수실이나 바늘, 천조각, 또는 헌 우표 등이 필요하다고 혼잣말처럼 말할 경우 꼭 내게 부탁한 것이 아니더라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갖다준다든지, 어떤 모임이 있을 대는 그것에 관계되는 자료들을 미리 찾고 공부해 간다든지, 어떤 공동장소에 며칠씩 잊혀진 채 놓여 잇는 물건들을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그 주인에게 챙겨준다든지 하는 것 등등이다. 다름 일들로 바쁠 땐 약간 귀찮게 생각될 때도 없지 않지만 이렇듯 조그만 사랑의 행위들을 통해서 삶은 단조롭고 지루할 틈이 없어진다.
우화 속의 직선이 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발성을 발휘하여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듯이 우리 또한 매일의 삶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는 가족, 친지, 이웃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하게 자기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뻣뻣한 자신을 구부릴 줄 하는 적극성과 능동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교만은 겸손으로, 고집스러움은 온유함으로, 옹졸함과 인색함은 관대함과 너그러움으로 굴곡을 만들어가는 곡선만능가가 된다면 그만큼 즐거운 삶이 될 것이고 기쁨을 나눌 벗들도 많아질 것이다.
지금 여기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바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의 잔잔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새해엔 나도 곡선을 더 많이 그리는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매일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공초 오상순님의 평소의 말씀을 구상 시인이 정리했다는 '꽃자리'를 다시 외워본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노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1992>
생명을 나누는 기쁨
전쟁 중이었던 월남의 어느 고아원에 박격포탄이 떨어져서 그곳의 선교사들과 몇 명의 어린이들이 숨지고, 여덟 살쯤 된 어린 소녀가 가장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장 수혈이 필요해서 부상병들을 돌보던 군의관과 간호사가 검사를 했으나 위독한 소녀와 혈액형이 맞지 않아 할 수 없이 그들은 서투른 월남어에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부상당하지 않은 어린이들 중에 피를 나누어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한참 후에 헹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년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의료진들은 마침 소녀와 혈액형이 같은 그의 팔에 주사바늘을 꽂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은 왠지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덜더니 차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의아한 군의관은 주사가 아파서 그러느냐고 물었고,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참는 듯했으나 울음을 그치지 않으므로 걱정이 되었다. 때마침 그 자리에 온 월남인 간호사의 통역을 거쳐 이유를 안 의료진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죽는 줄 알았던거예요. 당신들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당신들이 이 어린 소녀를 살리기 위해 자기 피를 전부 뽑아주겠느냐고 물은 줄 알았던거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자진해서 피를 뽑아주려고 했느냐고 다시 물으니 헹이라는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애는 내 친구니까요'라고......
몇 년 전 가을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제목으로 어느 잡지에 소개된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감동을 받았다. 그 소년과 같은 용기와 사랑이 내게도 있을까 자문하며 기회가 되면 나도 작은 몫이나마 헌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한적십자사에서 나온 안내서에는 '헌혈을 건강한 사람이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의 피를 나누어주는, 인간의 행위 중에 가장 숭고한 사랑의 표시이며 참된 용기'라고 설명해 놓았다.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환자들이 당신의 헌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작은 용기가 더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잉태하게됩니다.' '우리 인체에는 생명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잉여혈액이 있습니다' 등의 구호로 사회나 교회 차원에서 캠페인을 하고 있으나 헌혈에 대한 인식 부족,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으로 수혈과 헌혈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기피현상 등으로 헌혈률은 점차 감소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사람이 자기 몸속의 피를 빼서 가까운 가족, 친지도 아닌 모르는 이웃에게 준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일 수도 잇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고 나서도 왠지 조금은 망설여지거나 두려운 마음마저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헌혈은 자시의 마음이나 시간, 소유나 재능의 일부를 쪼개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의 선물과는 또 다른 구체적인 선물, 생명의 나눔임을 나도 이번에 첫 헌혈의 체험을 통해 다시 알게 되었다.
'04-92, 011387호 혈액형 A, 현혈량 320cc'라고 적혀 있는 작은 헌혈증서를 비로소 받아들고 나는 매우 기뻤다. 1989년, 세계성체 대회를 계기로 우리 수녀원에서도 일년에 한번 정도는 헌혈의 기회를 만드는데 나는 3년 내내 시도할 때마다 불합격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성공을 한 셈이다. 헌혈이 끝나고 잠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비닐팩에 들어 있는 나의 피를 보니 묘한 느낌이었다. 내게 주사를 놓아준 상냥한 간호사와 침대에 누워 있는 나의 동료들에게 피빛은 붉은 장미꽃보다 몇배 더 붉은 것 같다고 했더니 미소로 응답했다. 비록 얼마 안되는 분량의 피였으나 물을 보는 느낌과는 확실히 달랐고, 다른 사람의 피를 보는 느낌과는 또 다른 숙연함이 내게서 웃음을 거두어갔다. 그 피가 어느 날, 미지의 이웃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하며 헌혈차에서 나오려니 적십자사 직원이 맛있는 빵과 주스. 볼펜 한자루를 기념으로 주었다. 이미 수차례의 헌혈을 한 이들에 비하면 나는 이제야 시작이지만 크게 무리가 없는 한 더 자주 헌혈을 하려고 한다. 헌혈을 할 때마다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려 했던 한 어린 소년의 그 갸륵한 마음씨를 나는 더욱 가까이 느끼며. '사랑의 삶'으로 뛰어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새롭히리라.
<1993>
어머니의 꽃편지
얼마 전에 팔순을 맞으신 나의 어머니의 외모도, 마음도, 목소리도 모두 연세보다 젊으셔서 다들 놀라는데 요즘은 엷은 화장에 밝은색 옷을 즐겨 입으시고 전에는 망설였던 화려한 장신구 사용도 서슴지 않으신다. 하루의 릴과는 꼭 한잔의 커피로 시직하시고, 맥주도 좋아하시며, 성당 모임에 활발히 참석하시는 신식 할머니지만 또한 꽃밭을 가꾸시고, 장독대를 손질하시며, 뜨개질을 하거나 꽃골무를 깁는 조용한 멋도 잃지 않으신다.
어쩌다 내가 산이 가까운 우이동 집의 어머니를 방문하게 되면 '수녀가 준 꽃씨들을 뿌려서 피운 꽃을 볼래?' 하기며 꽃밭에서 한껏 꽃자랑을 하시는 그 모습이 꽃처럼 환하시다. '자고 가는 줄 알고 새이부자리를 준비했는데 오늘도 그냥 갈 거야?'하시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마음은 안 그렇다면서도 수녀들은 왜 그리 가족들에게 쌀쌀맞은지 모르겠어. 하긴 결혼을 안했으니 어머니의 그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순 없을 거야' 하며 내게 나무라듯 얘기하던 어느 선배 시인의 말이 생각나 공연히 켕기는 마음이 되곤한다.
십자가, 성경책 등으로 작은 성당이나 기도실처럼 꾸며놓은 어머니의 방에는 우리 수녀원의 솔방울도 몇 개 놓여있고, 언니 수녀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어느새 50이 넘은 외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이 기념으로 사다준 손재봉틀이 있어 때로는 가슴 아픔 추억이 살아오는 방, 6.25 때 납치되어 생사도 모르는 남편을 그리며 어머니는 어느 날 그 재봉틀과 나이가 똑 같은 아들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셨다고 한다.
서른 아홉에 혼자 되시어 우리 4남매 뒷바라지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의 보물창고가 되어주신다. 네 명의 자녀와 여섯 명의 손자 손녀, 그리고 하나뿐인 사위와 며느리는 어머니의 기도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으리라. 20대의 새댁 시절에 세례를 받은 어머니는 세상에 수녀원이란 곳이 잇는 줄 알았으면 진작 수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하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이에게 사랑과 기도로 봉사하는 어머니의 좋은 몫을 상기시켜 드리곤 하였다.
비교적 부유했으나 완고한 집안에 태어나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못하신 어머니지만 거의 틀리지 않는 맞춤법에 달필로 쓴 편지들은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어머니의 글에서는 늘 꽃향기가 난다. 치자꽃, 분꽃, 국화, 코스모스 등 각종의 꽃잎들과 단풍잎들이 들어 있고 새로 나온 우표들과 그림엽서들이 보너스로 들어 있기도 한 어머니의 편지들은 우리에게 늘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만의 비밀노트에 틈틈이 적어놓으신 글들이 있음을 알게 되어 우리형제들은 뜻을 합해 어머니의 조촐한 글모음집을 팔순 기념으로 엮어드리게 되었다. 처음엔 매우 부끄러워하시던 어머니도 막상 책이 나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고, 이 일로 평생 처음 신문에도 몇번 나셨다.
'...요즘도 얼마나 극복의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 모습이 눈에 선하고 시시로 마음이 쓰이는군. 재주덩어리 자식들 덕분에 엄청난 선물을 받고보니 은혜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감히 상상조차 못한 일인데 말이지. ...지식이나 두뇌는 남의 것을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남의 것을 빌릴 수 없다는 명언처럼 내가 젊게 사는 것 또한 은총인 것 같아...'
엷게 빛이 바랜 분홍빛 분꽃잎이 살짝 붙어 있는 며칠 전의 어머니 편지를 읽으니, ' 이 지상에서 언젠가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길 날이 있으리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언니의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손녀들의 글에서 '봉숭아 꽃 학교의 교장 선생님' '팔순의 소녀' '멋쟁이' '시계 바늘 같은 분'이라는 별칭으로 표현되신 어머니, 성당의 모임에선 꼭 개근상을 타실 만큼 부지런하시고, 수녀인 딸들보다 더 열심한 '수녀'로 오늘을 살아가시는 어머니께 나도 분꽃 빛깔의 동심을 접어 편지를 쓰며 어머니의 시(우리집 돗나물) 한편을 읽어본다.
춘하추동 긴긴 날을 손길 한번 안 스쳐도 기특하고 기특하다
시름시름 앓다가도 스스로 생기 찾아 파릇파릇 여기저기 싹이 돋나 싶었더니 어느새 노란꽃
꽃피었다 싶었더니 덩굴로 뻗어나네
우리집 뜨락에서 10년 넘게 같이 사는 우리 식구 돗나물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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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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