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해결할 수 있는가
공익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사익을 위해 살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을 해 보았을 문제를 도가, 묵가, 유가에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자. - 이상익(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우리는 개인의 사적 권익과 사회의 공익이나 질서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크게는 그린 벨트를 해제해서 재산권 행사를 보장하라는 요구나 팔당호와 같은 대규모 상수원을 보호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린 벨트나 상수원 보호 문제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존의 규제정책을 지속하되, 국가가 개인에게 일정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재원이 없을 때는 결국 어느 한쪽의 피해가 불가피한 상황인데, 이때 사익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익을 존중해야 하는가? 좀더 사소한 문제로 눈을 돌려 보자. 나는 남의 이목을 의식함 없이 내가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남의 이목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눈살을 찌푸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철학과에 진학하여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고 싶은데, 가족들은 내게 법학과에 진학하여 판검사가 되라고 강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런저런 학과 수련회의 분위기가 매우 싫은데도, 학과의 성원으로서 학과의 단결을 위해 참여해야 하는가?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답변은, 개인의 권익을 우선하는 입장과 사회의 공익을 우선하는 입장, 그리고 양자를 절충하는 입장이라 하겠다. 대체적으로 도가는 개인의 권익을 중시하였으며, 묵가는 철저히 공익을 옹호하였고, 유가는 양자의 중용을 취하고자 하였다.
도가의 위아주의
무위자연을 표방하는 도가는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였다. '자연 그대로의 삶'이란 각종 문명의 이기가 없는 삶이요, 사회의식이나 윤리의식 또는 문화의식 등이 형성되기 이전의 삶이다. 도가는 일체의 문명이나 사회적 관계 및 관념들은 인간의 삶을 쓸데없이 번거롭게 하고, 나아가 참다운 삶의 모습을 왜곡한다고 본다. 도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문, 특히 유가의 인륜을 비판하였다. 도가에 의하면 유가에서 말하는 인륜이란 자연 그대로의 질박한 삶이 훼손된 다음에 생겨난 찌꺼기에 불과하며, 인간이 삶을 평화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곡할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도가는 인륜이라는 개념 이전의 소박한 삶을 꿈꾸는데, 그것은 '조그만 나라의 적은 백성'이 평생토록 사로 왕래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가는 시종 개인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란, 인간은 자신의 귄익을 지키고 자신의 행복을 가꾸는 것에 충실하면 그만이요, 그 밖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가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인의 권익이나 행복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라고 보며, 개인이 자신의 권익과 행복에 충실할 때 사회의 공익도 저절로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도가의 이러한 태도는 춘추 전국이라는 혼란한 시대에 은둔주의와 쾌락주의로 표출되었다. 사회적 현실이야 어떻든 자신은 숨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도가의 이러한 경향을 가장 극단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양주였다. 양주는 "옛 사람은 터럭 하나를 희생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도 하지 않았으며, 천하를 희생하여 자기 한 몸을 받드는 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모두 터럭 하나도 손해보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을 때,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을 위하고, 이른바 천하를 위한다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만 천하는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주의 위아주의는 이기주의와는 구별된다. 그것은 남을 돕지도 않지만, 이기적 동기에서 남을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주의 이러한 주장은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킨다는 점과 사익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사회적 능률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아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 가운데 하나가 충족될 때에만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 승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도가가 추구했던 바와 같이 실제로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왕래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자신의 삶과 남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이러한 왕래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본받는 효과를 낳는데, 도가는 그것이 기교와 위선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의 일반적 능력이 균등하다는 전제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일반적 능력이 균등하다면, 모든 사람의 삶은 서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이요, 따라서 서로 왕래한다 하더라도 특별히 본받거나 질투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전제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는 실제로 충족되기가 지극히 곤란하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삶에는 빈부가 형성되고, 마침내 갈등과 투쟁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가꾼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아주의는 허울만 남은 인륜의 관념이 우리의 삶에 질곡이 되기만 할 뿐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 그 허구성을 배격한다는 의미는 있겠지만,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으로 승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묵가의 겸애주의
도가가 철저히 개인의 권익을 옹호했던 것과는 반대로 묵가는 철저히 공익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묵가는 도가의 위아주의는 물론, 유가의 친친주의도 배격하고 겸애주의를 표방한다. 묵적에 따르면, 천하의 모든 혼란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들은 자기만 아끼므로 아버지를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아우는 자기만 아끼므로 형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며, 신하는 자기만 아끼므로 임금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한다. 묵적은 이러한 이기주의가 혼란의 근원이라고 본다. 또한 묵적은 유가에 대해서 별애주의라며 비판하였다. 별애란 자기와 남을 구별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겸애주의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묵적은 공익이라는 맥락에서 침략전쟁과 음악,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불필요하게 재물을 낭비할 뿐 공익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묵적의 주장대로 완전한 겸애가 실현된다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불평등과 억압이나 착취가 없을 것이여,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 낙원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동기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위적으로도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기심은 개인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북돋는 계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겸애에 의한 공익의 실현은 인간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겸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태한 인간들에게는 실존적 긴장을 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익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공익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비능률과 정체로 이어지기 쉽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묵적의 겸애주의는 그 이상은 좋으나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묵적은 자신의 주장이 실행할 수 없는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즉 어떤 사람이 전도를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을 떠나야 할 때, 자기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면 별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묵적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별애주의자조차도 자가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적이 든 예와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러저러한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오직 한 생명밖에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자기의 자식을 희생시키고 남의 자식을 구할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또한 설령 겸애주의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한국인인 내가 아프리카 어느 구석의 굶주린 아이들과 내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곳의 굶주린 아이의 숫자를 헤아려서 내 자식의 숫자와 더하고, 그 다음 나의 수입을 그 숫자로 나누어 1인당 몫을 계산한 다음 아프리카 어린이의 숫자에 해당되는 만큼을 구호기금으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메리카의 부유한 아이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애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묵가의 겸애주의도 역시 현실성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가의 중용론
맹자는 양주의 위아설에 대해서는 '무군'이라 비판했고, 묵적의 겸애설에 대해서는 '무부'라 비판했다. '무군'이란 개별의식만 있고 공공의식이 없다는 것이며, '무부'란 공공의식만 있고 개별의식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가는 개별의식과 공공의식을 조화시킬 것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명분론으로 구체화되었다. 명분론이란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명이란 각자의 사회적 자위를 의미하며, 분이란 '몫'으로서 명에 따른 권리와 의무 및 욕망의 한계를 의미한다.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각자의 지위에 부합되는 역할을 완수해야 하는데, 그 역할이 자신의 지위에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된다. 명에 따르는 분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전체적인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자는 명분과 실제가 합치되는 것을 '정명'이라 하였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는 백성이 그에게 기대하는 군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신하도 역시 신할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명이다. 한 사회의 다양한 지위에 있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에게 부여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면서 유기적인 연대를 이룰 때에 그 사회는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명분론의 주장이다. 명분론이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타인을 구의 본분에 알맞게 대접함으로써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분의 논리를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적용한 것이 이른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라는 오륜이다. 이 오륜은 더 구체적으로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함', '군주는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함',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함', '벗을 사귀어 어질게 됨'으로 표현되었다. 요컨대 인간은 각각의 경우에 따르는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몫을 다할 때 개인의 권익과 공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가의 명분론은 봉건적 위계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명분론이 상하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논리의 기능을 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분론의 본질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과 수탈을 정당화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하 모든 계층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조화를 구현하자는 데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는 "처음 대부가 되어 말을 치는 사람은 닭과 돼지를 차지 않으며, 경대부 이상의 얼음을 쳐서 쓰는 집안은 소와 양을 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익의 독점을 제도적으로 방지함으로써 각자의 생업을 보장하고,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명분론이 위계질서의 관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계질서란 동서고금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 도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위계질서가 자발적인 예양의 질서냐, 아니면 강제적인 상명하복의 질서냐 하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성악설에 입각한 법가는 법치에 의한 상명하복을 강조하였지만, 성선설에 입각한 유가에서는 덕치에 의한 자발적 예양의 질서를 추구하였다.
유가의 명분론은 공공의식과 개별의식의 조화를 추구한다. 즉 만물이 모두 건곤을 부모로 하므로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고 말한다. 공공의식이나 천지만물에 대한 사랑은 천지만물을 나와 일체로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만물이 건곤을 부모로 하여 일체가 평등하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각자의 개성이 있으며 가깝고 먼 차이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평등과 겸애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개별의식이 비롯된다. 개체와 전체, 개별의식과 공공의식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것이 명분론의 추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가는 사랑의 실천에서도 각각의 경우에 따라 그 몫이 다르다고 본다. 맹자는 사랑의 실천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 물은 반드시 가까운 웅덩이부터 다 채운 다음 아래로 흐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천도 먼저 나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배려하고, 그 다음에 차츰 먼 사람에게까지 미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어버이를 공경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어버이에게 미치며, 나의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어린이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유가는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먼저, 더 많은' 사랑을 베풀 것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는 이와 같이 친하게 대접하는 친친의 원칙이야말로 이치에 타당하고 인정에 부합한다고 본다. 그러나 묵적은 이것을 별애라고 규정하고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먼저,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아 당연한 것 같지만,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의 소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순이 천자이고 고요(순의 훌륭한 신하)가 법관일 때 만약 고수(순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맹자는 "고요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할 뿐이요, 순은 천자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몰래 자기의 아버지를 업고 한적한 바닷가로 도망하여 살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주희는 맹자의 이러한 해법이 천리와 인륜에 지극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은 결과적으로 공정한 법집행을 방해한 것으로서, 공익을 해친 결과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해법이 일반적 원칙으로 승인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유가의 중용론은 그것이 왜곡될 때 자의적인 편의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유가에서는 어떤 경우엔 멸사봉공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엔 친친을 말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멸사봉공의 원칙이 필요할 때도 있고, 친친의 원칙이 필요한 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들의 선택기준을 좀더 명확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가 상충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군에 입대하자니 효도를 할 수 없고, 부모에 대해 효도를 다하자니 군에 입대할 수 없는 경우라면, 바람직하고 정당한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우리는 각각의 의무의 경중이나 상황의 완급을 헤아려서 중하고 급한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경중이나 완급에 대한 판단이 말처럼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각각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는 문제들
양주의 논리는 "사익이 바뀌어 공익이 된다."는 주장이고, 묵적의 논리는 "공익 속에서 사익이 실현된다."는 주장이며, 유가의 논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몫을 다함으로써 "공익과 사익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주와 묵적의 주장은 사실 각각 한쪽으로 치우친 논리요, 따라서 우리에게 보편적인 원칙으로 수용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유가의 중용론은 대체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자의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중용적 선택의 기준을 더욱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 비교하자면, 도가의 위아주의는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묵가의 겸애주의는 공리주의 및 공동체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유경쟁의 논리는 개인과 개인의 경쟁이 역사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믿음의 소산이다. 물론 도가의 위아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였지만, 경쟁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도가는 경쟁의 마음을 버리고, 각자 자신의 기준과 취향에 따라 살 것을 옹호하였다. 반면에 유가의 명분론은 사람들 사이의 교감과 협동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고, 그 전제조건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가의 몫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개인주의적 방법론은 사회체계의 능률을 제고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사회적 갈등의 문제에는 취약하며, 명분론은 사회의 안정적 통합에는 효과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역동성이 미흡하다. 따라서 이 양자를 지양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김능근, "중국철학사", 장학출판사, 1978. 노사광, "중국철학사", 탐구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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