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537 호
단기 4341. 11. 23 (음력 10. 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 」 로 표시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어떤 한자인지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국제신문 2009 신춘문예
문인의 길이 바로 여기에 2009 국제신문 신춘문예 내달 12일 마감
|
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공모합니다. 올해도 많은 문학도의 꿈이 신춘문예로 몰려들 것입니다. 신춘문예를 멀고도 험한 길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없기에 더 멋진 꿈이 또 신춘문예입니다.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들은 한국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신문은 당선된 분들께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예비 문학인 여러분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공모 부문은 단편소설 시 시조 동화 등 4개입니다.
▶마감=2008년 12월 12일(마감일 소인 유효)
▶보낼 곳=부산 연제구 중앙로 2221(거제1동 76의 1) 국제신문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우편번호 611-702
▶응모요령
1. 모든 응모 작품은 어떠한 지면(인터넷 매체 포함)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순수 창작품이어야 합니다. 표절 또는 동일한 작품이 다른 매체에 중복 투고된 사실이 밝혀지면 당선이 발표된 뒤라도 당선을 취소합니다.
2.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을 따로 표시) 주소 전화번호 등은 작품의 별도 표지에 명기해야 합니다.
3. 응모작품 겉봉투에는 '신춘문예 응모'라고 쓰고 응모 부문과 작품 편수를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소설 동화의 경우 작품 표지에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원고량을 표시해야 합니다.
4. 모든 응모 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당선작 발표 = 2009년 1월 1일 국제신문 지면
▶문의 = 국제신문 편집국 문화부 (051)500-5135~7
◇공모 부문 및 상금 |
부문 |
분량 |
상금 |
단편소설 |
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
500만원 |
시 |
3편 이상 |
300만원 |
시조 |
3편 이상 |
300만원 |
동화 |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
300만원 |
|
|
*****************************************************************************
|
|
|
글터 → 오늘의 어록 |
|
|
사람은 자기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잘알고 더 잘 판단한다.(테렌티우스)
|
|
|
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
|
국민
언어예절
한 나라 사람들을 싸잡아 부를 말(호칭)이 없다. 수천만 사람을 묶어서 부를 자격이 있는 이가 누구며, 불러서 대답할 그들이 있긴 하겠는가. 백성·국본은 예스럽고, 아쉬운 대로 인민·국민·동포·겨레 같은 지칭어에다 ‘여러분!’을 달아 부를밖에.
올해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건국 60년’만 강조한 탓에 예년 것과는 용어·주제·틀이 달라 말이 많았다. 그런 점을 뺀다면 형식 자체는 꽤 절제되고 다듬은 문장이었다. 단문 위주여서 연설하고 듣기에 부담이 적었고, 평균 어절이 아홉 안쪽으로 무척 짧았다. 단정·비유·설명·약속·의지 …들도 큰 무리 없이 엮이었다. 포괄적 긍정과 희망적 전망으로 뭉뚱그렸지만 앞뒤 60년이란 시공의 폭이 주는 성금도 좀 봤다.
국경일에 걸맞은 말을 빠뜨린 건 큰 흠이다. 국민·동포·민족·겨레에서 ‘국민’은 서른 번 가까이 썼고 다른 말은 한두번에 그쳤다. ‘국민’ 아닌 동포로, 이국에 뼈를 묻은 선열들에다 숱한 ‘재외동포’가 있고, 최근의 ‘귀화 국민’도 정서에서 그렇다. 그러니 ‘북녘 동포’와 함께 적어도 두어차례는 이들을 부르고 외쳐 말로라도 어루만져야 했다.
아직 광복·독립을 못한 이웃 겨레들도 적잖다.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로서 그들의 염원을 지원·지지함과 아울러 침략주의를 경계하는 언급이 반드시 따라야 했다. ‘세계’를 열댓 차례 썼는데, 예나 앞으로나 배달겨레의 최고 실천 이념이라 할 ‘홍익인간’을 내세움만 같지 못하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넙적하게, 넓다란, 넓치, 넓죽
'어머니는 무를 '넙적하게' 썰어 깍두기를 담그셨다.' '아기가 '넓다란' 아빠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횟집에서 광어라고 부르는 것은 '넓치'의 다른 이름이다.' '술을 주는 대로 '넓죽' 받아 마시다가 금세 취해 버렸다.'
이들 문장에서 '넙적하게, 넓다란, 넓치, 넓죽'은 바른 말이 아니다. '넓적하게, 널따란, 넙치, 넙죽'으로 써야 맞다. 한글 맞춤법에서는 '①명사나 용언의 어간 뒤에 자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은 그 명사나 용언의 어간을 밝혀 적는다. 다만 ②겹받침의 끝소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 ③어원이 분명하지 않거나 본뜻에서 멀어진 경우는 소리대로 적는다'고 돼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넓적하다'는 ①의 경우, '널따랗다'는 ②의 경우, '넙치'는 ③의 경우에 해당한다. '넓적하다'는 펀펀하고 얇으면서 꽤 넓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용언(형용사) 넓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므로 '넓-'으로 적는다. '넓적다리'도 마찬가지다. '널따랗다'의 경우는 꽤 넓다는 뜻이지만 소리가 [널따라타]로 굳어졌기 때문에 '넓-'으로 쓰지 않고 '널-'로 표기한다. '넙치(廣魚)'의 경우도 어원을 '넓다'와 관련지어 볼 수 있으나 본뜻과는 거리가 있어 '넓-'으로 적지 않고 소리대로 '넙-'으로 해야 한다. 반면 '넙죽'은 입을 큼 벌렸다가 닫는 모양, 몸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는 모양, 선뜻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낼 때 쓰이는데, 이러한 경우 '넓다'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넙-'으로 쓰는 것이 맞다.
한나절, 반나절, 한겻
세계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속도경쟁의 시대에 접어든 듯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업종별 기술 발전 정도를 연(年) 단위로 환산했을 때 휴대전화의 경우 2년 정도면 중국이 우리를 앞설 것이라는 등의 얼마 전 보도 내용에 많은 사람이 경각심을 가졌을 텐데요.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도 오는 4월이면 고속철 시대가 열려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에 든다고 합니다.
흔히 '한나절'하면 하루 중 '해가 떠 있는 시간 대부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반나절'을 하루 낮의 반으로 생각하기도 하지요. '나절'은 '즈음·무렵·녘' 등과 같이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낮)를 둘로 나눈 반 혹은 그 어느 때'를 말합니다. '날(日)을 갈랐다(切)'는 의미의 '날절'에서 'ㄹ'이 탈락해 '나절'이 됐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걷기 시작해 한나절 걸려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부터 고부까지는 걸어서 족히 한나절 거리다'등에서 보이는 '한나절'은 '나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수량화해 표현한 것입니다. 낮이 보통 8∼10시간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그것의 2분의 1인 4∼5시간이 '한나절'입니다. '한나절'과 같은 뜻의 다른 말로는 '반날·반오(半午)·반일(半日)' 등이 있습니다. '반나절'은 '하루 낮을 넷으로 나눈 한 부분', 즉 반일의 또 반을 말하며, 정감어린 또 다른 순우리말로 '한겻'이라고도 합니다.
세대주
옛날엔 무엇보다 먹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인지 인구(人口)·식구(食口)·가구(家口) 등 사람의 수를 세는 단어에는 '입 구(口)'자가 들어 있다. '가구'는 '집의 입', 즉 '가족 수'를 뜻하던 것이 주거 및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의 집단이나 그 단위로 쓰이게 됐다. 그러나 오래도록 써온 이 '가구'라는 말을 밀어내고 '세대'라는 단어가 어느덧 자리를 잡았다. '세대(世帶)'는 일본식 한자어로, 일본의 법률을 베껴 오는 과정에서 묻어온 것으로 보인다. 1962년 주민등록법을 제정할 때도 '세대' '세대주'란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정부(문화체육부)는 95년 광복 50주년을 기리는 뜻에서 '일본어투 생활용어 순화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세대'는 '가구'나 '집'으로, '세대주'는 '가구주'로 하라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세대' '세대주'라는 말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민등록 등 공문서에 '세대' '세대주'란 말이 그대로 있으니 주택분양에서도 몇 세대 분양에 무주택 세대주가 어떻고 하는 말들이 계속 쓰이는 것이다. 가관인 것은 건축법에 '다세대 주택'과 '다가구 주택'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세대'라는 말을 없애고 '가구'로만 써야 할 판에 별개의 용어로 취급하고 있으니 헷갈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젊은 세대' '세대 간의 갈등' 등에서 쓰이는 다른 한자어 '세대(世代)'도 있어 이래저래 혼란스럽다. 정부는 이제라도 법률이나 공문서의 '세대' '세대주'를 '가구' '가구주'로 바꾸기 바란다.
|
|
|
시터 → 우리나라 |
|
|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 4 - 나태주
배가 고픈 날은 더욱 춥다 추운 날은 더욱 배가 쓰리다 창 밖에는 빗소리 술잔에 술을 따르듯 쉬임없이 이어지는 가을 빗소리 이 비 그치면 겨울이 오리라 얼음의 외투를 걸친 겨울이 문득 우리 앞을 막아서리라 그대도 이 빗소리 듣고 있는지, 얼룩진 유리창 안에 갇혀 이 빗소리 들으며 나를 생각하는지......
나태주
1945 충남 서천 출생 1963 공주사범학교 졸업 (1985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 1988년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1979 제3회 흙의 문학상 수상
|
|
|
시터 → 현대시조 |
|
|
산책길 - 김태자
가을 이른 산책길 물안개를 흩뿌리며
고이 물든 나무들을 그림 속으로 끌어가니
이 순간 소중히 담아 그대 보듯 보고 싶네.
정갈하고 싸한 기운 보랏빛 구절초
꽃잎 한 잎 한 잎 나직한 고운 음성
길섶에 마냥 앉아서 그대같이 느끼고 싶네.
들길에 물결 지는 한 무리의 코스모스
사운거리는 손짓은 그리움을 풀어내고
가녀린 산뜻한 자태 그대 함께 있고 싶네.
|
|
시터 → 고시조 / 한시 |
|
|
늙은이 저 늙은이
늙은이 저 늙은이 임천에 숨은 저 늙은이 시주가 금여기로 늙어 오는 저 늙은이 평생에 불구문달하고 절로 늙는 저 늙은이
<지은이> 안민영 <말 뜻>
임천(林泉) : 숲과 샘이니, 산림천석(山林泉石)으로 은사(隱士)가 숨어사는곳. 시주가(詩酒歌) :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 부름. 금여기(琴與基) : 거문고와 바둑.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는, 늙은이의 고상한 취미 생활. 불구문달(不求聞達) :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아니함.
<감 상>
늙음을 한탄하기만 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그 늙음을 즐기는 인생도 있어 퍽이나 대조적이다. 늙으면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따라서 '외로움'이라는 것이 늙은이의 인생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그 고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노후의 행 · 불행이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시와 술과 노래와 거문과와 바둑 등, 이만한 수준의 취미를 가졌다면 능히 그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불구문달"의 인생관이 서 있다면 늙음이나 죽음도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 취미가 다양한 사람은 노후의 고독을 덜 느낀다. 주체 못할 정도로 남아도 는 시간과 무료를 취미 생활을 하면서 달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생 활을 가지고 있는 사람 - 예켠대 음악가, 화가 등의 예술인이나 취미 산업의 경영자 등 - 이 일반적으로 장수를 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취미는 젊어서, 적어도 30~40대까지에는 길러 두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만 한간 초당에
다만 한간 초당에 전통 걸고 책상 놓고 나 앉고 님 앉으니 거문고는 어디 둘꼬 두어라 강산풍월이니 한데 둔들 어떠리
<감 상>
초라한 한 간짜리 오막살이. 전통('전동'의 원말. 화살을 넣어 두는 통)은 벽에다 걸어 놓고, 바닥에 책상을 놓고 나 앉고 님이 앉으니 거문고 놓을 곳이 없구나. 에라, 나는 강산풍월주인(江山風月主人)자연을 벗삼고 사는 인생이니, 강산풍월을 노래하는 거문고야 바깥에 놓아 둔들 어떠하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풍류객의 매인 데 없는 생활이 눈에 선하다. 무예의 상징인 화동개, 글 읽어 지식과 도덕을 닦는 책상, 예술-풍류를 익히는 거문고뿐, 장농 · 옷걸이 · 밥상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구나. 옛선비 의 글을 읽고,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무예와 풍류를 익히어 고차원적인 인생을 탐구하는 생활을 노래했다. 그것을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였으니 얼마나 즐거웠으랴. 옛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의 본질을 외면하지 않고 살려고 하였다. 이 점은 현대인도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3장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지식을 택할 것인가, 지혜를 택할 것인가
앎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태도가 어떻게 달랐기에 동양은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는 서양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 황희경(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양의 정신, 서양은 물질을 중시하는 문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오늘날 전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은 사실 근대 과학혁명 이래 빛나는 과학적 성과에 바탕을 둔 것이고, 과학이란 물질적 대상인 자연 속에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말에 수긍하곤 한다. 어떤 학자는 근대 과학혁명 이전에는 동양의 과학수준이 서양보다 오히려 앞섰다고 하면서 동양의 유구한 과학적 전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동양의 근대화 과정은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 과학을 서양의 상징부호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물질현상의 법칙을 이해하는 학문인 자연과학이 서양에서 발달했다고 해서 그들이 정신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했다거나 상대적으로 '동양은 정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러한 이분법의 이면에는 서양 과학의 충격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동양의 열등감 또는 열등감에서 유래하는 자존자대의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논리학의 용어로 말해서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앎(지식)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비교하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비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의 기준을 설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은연 중에 근대 서양을 기준으로 해서 고대 동양의 경우를 불평등하게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대의 서양과 동양의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 의의가 크지 않고, 근대 이후의 동양은 서양과 분리시켜 따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근대 서양을 기준으로 고대 동양의 경우를 일반화하여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다. 여기서는 동양사상 가운데 유가와 도가를 중심으로 동양의 앎은 서양의 앎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지식과 지혜
앎의 성격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양은 지식을, 동양은 지혜를 추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이다. 가령 돌은 어떻게 해야 뾰족하게 만들 수 있다든지 사냥이나 낚시는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현대인의 눈에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만큼 사소한 앎에 불과하지만 원시인에게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환경과 싸우면서 생존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한 지식은 점차 축적되었고 이러한 앎 자체에 대한 반성, 좀 어렵게 말해서 인식론적 탐구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다만 그것이 동양에서는 근대 서양에서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앎에 대한 중시 또는 추구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이었다.
특히 중국 고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학문과 교육을 중시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과 교육이란 지식의 축적과 전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식을 매우 중요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줄곧 계승되어 왔다. 요사이 아시아 각국이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많이 수그러들기는 하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원인을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전통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논리가 많이 등장하였다. 사실 높은 교육열과 여기서 유래하는 우수한 인적 자원이 아시아의 경제발전에 하나의 추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한 학문이나 지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학적 지식과는 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행동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워라."라거나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이성을 좋아하듯이 하며 부모를 섬기되 온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온몸을 다 바치며 친구와 사귀되 말에 신뢰가 있으면 그가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나는 반드시 그가 배웠다고 하리라."는 공자의 말은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보다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였지만 그렇다고 지적 유산을 학습하고 전달하는 학문과 교육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편 중국 고대의 도가사상가인 노자는 매우 극단적인 어조로 "총명함을 끊어 버려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식을 부정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장자도 "인생은 끝이 있고 지식은 끝이 없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면 위태롭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의 원천인 감각적 지각을 부정하는 듯한 사상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즉 혼돈우화가 그것이다. 남쪽 바다에 살고 있는 '휵'과 북쪽 바다에 살고 있는 '홀'이라는 제왕은 중앙에 살고 있는 제왕인 혼돈에게 자주 놀러 갔는데 혼돈의 대접이 아주 좋았다. 휵과 홀은 혼돈의 대접에 보답할 것을 논의하면서,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쉴 수 있는데 혼돈만이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자고 했다. 그리하여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더니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의 이러한 생각은 뒤집어 보면 감각적 지각에서 유래하는 지식을 끝없이 추구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마치 수많은 음악을 들어 본 사람이 고요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이념에 입각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가 좌절을 맛본 이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도가사상가들이 지식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 같지만, 만약 정말로 그들에게 지식이 없었다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상을 하나의 근거로 삼아 동양적 앎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중시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처럼 지식과 지혜는 기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지식이 없이 어떻게 지식의 위험성을 반성할 수 있겠는가. 동양에서는 지(알다)와 지(슬기)를 서로 통용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지식에 대한 추구가 그 출발점에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이미 생존이 확보한 이후에도 점차 이러한 지식에 대한 욕구는 나름대로의 관성을 가지고 끝없이 분출된다는 데에 있다. 지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 주고 문명의 이기들을 선사함으로써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있지만, 지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인 경우에도 그렇다. '식자우완'이라거나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점차 마음의 고통도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얽힌 얘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지식이 고도로 발달하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는 지식산업이 매우 중시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사회냐 하면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찍이 노자가 '국토가 작고 백성은 적은'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본 것도 지식의 부정적 측면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이 곧 지혜는 아니다. 지식과 지혜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여기에는 질적인 비약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과연 지혜로운지가 문제가 된다.
이제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일반적으로 서양의 앎이 지식을 중시한 데 반해 동양의 앎은 지혜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면적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특히 동양에서는 어떤 것을 아는 것을 지혜롭다고 여겼는가. 앎에 대한 태도가 동서양은 어떻게 달랐기에 동양은 근대 이후로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는 서양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동양에서는 그침을 아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였다. 유가의 주요 경전의 하나인 "대학"의 첫머리에는 "대인의 학문의 길은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 백성들과 친하게 지내는 데에 있으며 지선에 머무는 데에 있다."고 학문의 길에 대해 강령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침을 알게된 이후에 안정될 수 있고 안정된 이후에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연후에 편안해지고 편안해진 이후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침을 아는 것'의 효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압축적인 강령이 없었더라면 "논어"에 나오는 수많은 대화가 아무리 주옥과 같은 말들로 이루어졌더라도 하나의 원리로 관통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유가의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장자도 "배움을 중시하는 자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행동을 중시하는 자는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변론을 중시하는 자는 분변할 수 없는 것을 분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데에서 그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이다."하면서 그침을 아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그친다 또는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 너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지선에 머문다는 것은 지선의 너머에 지극히 악한 세계가 있거나 선악을 나눌 수 없는 세계 등이 존재할 수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의 경우도 그가 알 수 없다고 한 이유가 사물 자체의 성질 때문이지 아니면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가 던진 '왜?'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왜 파래?" "그런 거 묻지 말고 공부나 해." "왜 물으며 안 돼?" "어린애는 어른 말을 잘 들어야지", "왜 어린애는 어른 말을 잘 들어야 돼?" "...."
우리의 지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 속에 폭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유가의 학문적 이상은 '수기치인'에 있으므로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앎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를 좀 어렵게 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윤리학이나 정치학에 있었지 지식 자체나 인식론에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괴이하거나 무력을 사용하거나 어지럽고 신기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또한 죽음이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귀신에 관해서는 경원시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현세적이고 실용적이며 정치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지혜롭다고 본 것이다.
도가의 경우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장자의 경우 그가 부력의 원리를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가 있다. "물의 두께가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만약 한 잔의 물을 마당에 부어 놓으면 작은 풀은 그 위에 배처럼 띄울 수 있지만 만약 그 위에 잔을 올려놓는다면 그냥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물은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찾았다)!"라고 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물체의 질량이나 중량과 물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정식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붕새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이 큰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이나 지혜, 운수가 '두껍게 쌓여 있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과학적' 지식의 싹을 가지고 '인생관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가의 경우도 무한히 솟구치는 앎에 대한 욕구를 유한한 인생에 관한 지혜를 얻는 곳에서 멈추고 있다. 앞에서 잠시 밝혔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본 것이다.
말을 잘 보는 법
한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동양철학에는 인식론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서양철학적 의미의 인식론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세상에 백락(말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한유(당나라 때의 대문호)의 유명한 말은 인식론적 함축이 농후한 말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백락(인식 주체)의 인식이 먼저냐 아니면 천리마(인식 대상)의 존재가 먼저냐 하는 인식의 기원과 관련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서양에서의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서양적 의미의 인식론적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 백락과 천리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열자"에 나오는 이에 관한 고사를 잠시 소개해 보겠다. 진나라에 목공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는 천리마를 얻기 위해 백락이라는 인물을 초빙하였다. 그런데 그는 구방고를 자신보다 훨씬 말을 잘 보는 인물이라고 추천하였다. 구방고는 3개월 후에 천리마를 찾았는데 그는 그것이 황색의 암말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데리고 와보니 검은 숫말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구방고가 말의 암수나 색깔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시험해 보니 과연 하루에 천리를 가는 천하의 천리마였다는 이야기이다. 백락은 구방고의 말 고르는 방법을 두고 그는 '암수나 검고 누런 색깔 바깥에서' 말을 보았으며 "보이는 것을 보고 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다시 말하면 구방고는 말의 본질을 보았지 표면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말하는 천리마가 만약 인식론에서 말하는 '참지식'이라고 한다면 구방고가 말의 암수나 색깔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은 우리가 참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감각적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보이는 것을 보고 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매우 신묘해서 간단히 해석하기가 곤란하다. 아마도 구방고의 '마음의 눈'에 보였던 것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과 달랐던 듯하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함축이 있는 이야기가 동양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든다면 조조에 의해 인재 등용의 원리로 작용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문벌을 중시하지 않고 '보이는' 능력을 중시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한유의 말이 명언인 이유도 인식론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그렇다면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 중에 어떤 입장을 지지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유 자신이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서 '백락'임을 에두르면서도 당당히 자부하는 점에 있다.
동양적 앎의 장단점
이상에서 말한 것을 정리한다면 동양적 앎의 특징은 '그침을 안다'는 곳에 모아진다. 그리고 그들이 앎의 욕구를 멈춘 곳은 유가의 경우 인간관계나 도덕적 실천 등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도가의 경우는 정신적 자유나 안신입명(육체적이고 정신적 안정)이었다. 이들의 말은 대개가 선언적이었고 논증을 거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인으로 높이 받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만 논박을 하거나 새로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이러한 소극적 태도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치밀한 논증이나 추리 등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측면에서는 지혜롭지 못한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연 사물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고 그 속에서 안정을 찾는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지혜로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을 잘 보는 것을 진리를 획득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동양의 경우는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이나 과정에 대한 논의가 자세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말을 잘 고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연 구방고는 어떻게 해서 말을 잘 보게 되었을까에 관해서는 언급이 극히 적다. 이에 비해 서양의 경우는 논리나 추리와 같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목하여 누구라도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동서양 문명의 거대한 차이를 낳은 중요한 씨앗이었던 것이다.
참고 문헌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안동민 역주, "신역 장자", 현암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박정호 엮음, "지식의 세계", 동녘.
|
|
|
글터 → 수필 |
|
|
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교도소에 책을 보내자
“스님, 세상에는 좋은 일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이란 내가 30년 가까이 교도소에 드나들면서 재소자를 교화하고 돕는 일을 해온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일만 아니라면 저도 충분히 스님을 돕겠는데....”라고 넌지시 나무라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 택시를 탔는데, 그 기사분 역시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삼중 스님, 물론 좋은 의도로 하신 일이시겠지만요, 제 생각에 그 일은 아무래도 잘못 하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있잖습니까? 그 사형수를 살려 주신 것 말입니다. 그 사람, 교도소 안에서도 소문이 난 퍽 질이 나쁜 인간이라구요.” “그걸 어찌 그리 소상히 아십니까?” “실은 저도 폭력 전과로 들어갔었는데, 감안 안에서 우연히 그 사람과 함께 있었지요. 스님께서 살려주신 그 사람, 다른 재소자들을 어찌나 괴롭히던지.... 저도 비록 죄를 진 몸 이긴 해도 그런 악질 인간은 살려 주지 마셨어야지요!”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나로선 최선을 다해서 구명운동을 해 살려 놓았건만 참회의 모습은 당시 잠깐뿐이다. 사회에 나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다시금 죄를 짓고 다니는 이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한편으론 씁쓸해지기도 한다. 남들은 내가 하는 일을 분명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칭찬은 커녕 이해할 수 없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더러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평생 해온 재소자 교화 일을 후회해 본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말을 듣게 될 때 내 마음이 서운하다거나 이제 그만두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다.
내가 꾸준히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남들에게 칭찬이나 받을 요량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일이요, 나 아닌 다른 누구라도 꼭 해야만 할 일이 바로 재소자들을 돕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사회에서는 죄인을 냉대하거나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참혹한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죄 값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 탓인지 무관심한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이들에 대한 골 깊은 피해의식이 있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비사 신도들 중 한 분이 어느 날, 나를 돕겠다고 자청해 오셨다.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함께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에게 줄 떡과 음식을 준비하기로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예정된 날짜가 지났는데도 그 신도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스님, 죄송해요. 하필이면 엊그제 저희 집에 강도가 들어서.... 저 교도소 가는 일 취소할랍니다.” 그 신도 분은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결코 소외하고 무관심하면 안 되는 곳이 교도소요, 재소자들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소외하면 할수록 이들은 갱생의 기회를 잃고 더욱 크나큰 죄의 길로 빠져 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신이 지은 죄 값을 받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필요 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반성하게 하는 일이요, 참회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의의 따뜻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수원에 있는 교도소 소장 김인호 씨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김 소장은 다짜고짜,
“스님, 저희 교도소에 책을 좀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갑자기 책이라니요?” 의아해서 묻자 그는, “저희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어서요! 우선 형편이 닿는 대로 저희 직원들이 모두 주머니를 털어 어렵사리 마련해 봤는데 2천 권밖에 안 되는 군요. 이 정도 가지곤 턱없이 모자라서.... 스님이 도와주시리라 믿고 전화드린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점은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 교도소란 곳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집결하는 장소이다. 이들 중에는 평범한 회사원도 있지만 사업가나 상인, 택시 기사, 학생, 심지어 고위직 공무원들도 있다. 이들이 지은 죄목도 참으로 다양하다. 참혹한 범죄를 지은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누명을 쓰거나 돈 없고 힘없는 탓에 억울하게 들어본 이들도 적지않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 정치인들 가운데에서도 이 곳을 거쳐 나간 이들이 많다. 나중에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대부분 교도소 안에서 많은 책을 읽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자신이 입지를 다져나가는데 귀중한 토양이 되었다고 술회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된다. 사실 수감된 재조사들에겐 목욕과 운동, 면회 시간을 빼면 모두 다 소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대개는 그 안에서 시시한 잡담을 하거나 아니면 범죄 이야기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그 안에서 더욱 큰 범죄를 모의하고 사회에 나가 다시 죄를 짖는 일이 흔하다는 점이다.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느니 이들에게 책이라도 볼 수 있게 지원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특히 장기수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책이다. 재소자의 가족들이란 대부분 가난하기에 책을 사서 넣어 줄 만큼 충분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책은 마음을 가다듬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참회하게 하고 정신 수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에게 양서 한 권씩이라도 읽히고 싶다는 최 소장의 말에 나 역시 물론 대 찬성이었다.
“김 소장님,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물론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몇 권이나 필요하신지요?” “대략 5천 권이 필요합니다. 재소자들에게 모두 한 권씩 읽게 한 뒤 독후감을 써내게 할 생각입니다. 우수한 사람에겐 가족들과 특별면회를 하도록 하고, 재판부에 보내 양형에 참작하게 할 계획이지요.” “참 대단한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습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김 소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업무 차 일본에 갔을 때 재소자 검도 대표단을 이끌고 온 그와 우연히 만나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서였다. 그때 나는 그에게서 재소자 일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사형수 문제로 고심할 때 내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기도 했고 만날 적마다 항상 편하게 나를 대하곤 했다. 이렇듯 교도소장인 그와 내가 서로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교화위원인 나로선 대부분의 교도관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형수들의 억울한 사연을 매스컴의 힘을 빌어 법조계에 호소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러다 보니 이를 통제하는 임무가 있는 교도관들과는 자연히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물론 교도관들로서는 보안상 고도소의 일이 바깥으로 흘러 나가면 안 되므로 직무상 나를 꺼리게 되는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서로 불편한 관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김인호 소장에게서 전화를 받은 다음 잠시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아는 출판사가 여러 군데 있다. 일단은 그 쪽에 얼마간 도움을 요청해야 겠다. 어느 출판사이든 재고가 있게 마련이고 팔리지 않은 책이 쌓여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나는 급한 마음에 즉시 여러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교도소 안에는 가족이나 친지가 넣어 준 영치금으로 책을 사보기조차 곤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소자의 가족들이란 대부분 형편이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치된 책이라야 고작 5,60권밖에 안 되는데 그것도 교무관실에 있어서 사실 수감자들이 책을 읽고 싶어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게다가 최근 나온 신간은 거의 비치되지 못한 채 빈약한 실정이지요. 좀 도와주십시오. 사실 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교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출판사에서도 재소자들을 위해 선뜻 책을 보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예전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15,6년 전, 당시 삭막한 청송감호소내에 그림이라도 걸어 놓고 싶은 마음에 몇몇 화가를 찾아 다니며 그림 한 점씩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화가들 대부분은 그림을 선뜻 내어 주기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이름없는 화가조차도 자신의 작품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 지만 아무리 가까운 형제지간이라도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거져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청송감호소측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 그림 한 점을 부탁하자 그는 두말없이 선선히 응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청해서 지방의 다른 교도소에 걸도록 자신의 그림 몇 점을 더 내주었다. 운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첫째가는 국보급 화가이다. 무명화가도 달가워 하지 않는 일에 적어도 운보 같은 대가가 적당히 핑계를 대서 묵살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요청에 선뜻 응했다는 것이 나로선 의외였다. 우리나라 법조계의 동량들이 거쳐가는 사법 연수원생들을 위한 그림 요청에는 거절했던 운보가 교도소에 그림을 선뜻 보내온 것이다. 참으로 대가다운 운보의 진실한 인간됨을 알 수 있는 한 예이다.
아무튼 책의 조달이 어려워 전전긍긍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것이 힘들어진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다른 이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얹어 준다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국경제신문사 출판국장인 고광직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랜만이라 서로 안부를 물은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문화부 기자 시절, 한 사형수를 통해 알게 됐으니 그와는 꽤 오린 기간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당시 그는, 옥 안에서 자신의 밥을 나눠 주며 기르던 참 새 한 마리를 사형장에서 날려보낸 가슴 뭉클한 어느 사형수의 이야기를 취재한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얘기 도중 고 국장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실은 스님께서 교도소에 책을 보내시려 한다는 얘기를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정말 뜻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 출판국에는 재고가 1만부 정도 있습니다. 이것으로 저희 신문사에서도 교도소 책 보내기 운동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1만부라면 내가 예상했던 숫자를 훨씬 웃도는 부수였다! 그의 뜻밖의 호의가 너무나 고맙고 고마웠다. 고심하던 내게 그의 말 한마디는 백만 대군이라도 얻은 장수처럼 새로운 용기와 힘을 솟구치게 했다. 그렇다. 이젠 청송감호소에도, 갱생보호소에도 이 책들을 보내야겠다. 책을 읽고 싶어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는 재소자들, 특히 장기수들에겐 이 책들이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껏 내가 해온 어느 일보다도 더 열심히 교도소에 책 보내기 운동을 시작할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반인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들을 위한 일을 찾은 것 같아 내 마음은 바빠진다.
|
|
|
글터 → 한국사 |
|
|
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5.삼별초의 항쟁 : 몽고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최씨정권의 성립과 몽고의 침입
여기서 100년간(1170-1270) 지속된 무신정권의 흐름을 잠시 정리해 보자. 왜냐하면 무신정권의 등장과 몰락이 대몽 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1170년 무신들의 반란 후 바로 정권을 장악한 사람은 이의방이었지만 그는 정중부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중부는 젊은 장교 경대승에게 제거당하였고 경대승이 4년 만에 죽자 고향으로 쫓겨가 있던 천민 출신 이의민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의민 역시 살해당하고 마는데 그 주체가 바로 최충헌이었다. 이로써 최씨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1196년) 최충헌 정권의 등장은 고려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다. 그는 반복된 유혈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정권을 자손에게 세습토록 조치하였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후에 최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최우가 죽은 후 다시 최항, 최의 등으로 이어져 60여 년간 최씨정권이 유지되었다.
최씨정권 초기에는 어느 정도 국내 상황도 진전 국면으로 접어들어섰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민란이 발생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 속에서 발생한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는 다시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몽고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인 때가 최씨정권의 2대인 최우가 집권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206년 징기스칸이 몽고제국을 건설하면서 대륙은 대변동에 휩쓸리게 되었다. 몽고는 서로는 동유럽, 동으로는 금나라 등을 정복하면서 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려와 몽고는 처음부터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접촉이 시작된 것은 거란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거란족은 당시 금나라에예속되어 있었지만 금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잠시 독립을 하였으나 이내 몽고에게 쫓겨 남하하게 되었다. 몽고군에게 몰린 나머지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고려는 대항군을 보내어 평양 동쪽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물리쳤다. 이때 북에서는 몽고군이 거란족을 협공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여.몽의 연합적인 작전이 벌어졌던 것이다.(1219년) 이 작전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는 형제맹약을 맺었다. 그런데 몽고는 이를 빌미삼아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몽고의 입장에서는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서 남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던 고려를 견제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따라 몽고는 사신 저고여를 보내 금품 등 공물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고려를 억압하려 하였다.(1221년)
곧 몽고의 무력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최우 정권은 몽고에 대한 방비를 논하고 1222년 의주, 화주, 철관 등 북방 지역에 성을 쌓았다. 이때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탈하여 고려는 남과 북 양쪽을 모두 방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최우는 나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고려는 가급적이면 몽고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연안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1225년) 몽고는 당연히 고려를 의심하고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몽고는 바로 고려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아직 몽고는 대륙에서 금나라와 남송 등과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고 또한 중앙아시아(서역) 정벌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1227년 징기스칸이 죽고 오고타이가 왕위에 오른 상황이어서 고려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은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벌인 전쟁이 다소 몽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남송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여야할 상황이 임박하자 몽고는 마침내 살리타이를 원수로 내세워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때가 1231년, 고종 18년이었다. 몽고의 침입에 고려군도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지금의 구성과 자산, 광주, 충주 등에서는 적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충주성전투는 매우 유명하다.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지배층인 양반들이나 귀족들은 거의 도망을 쳤지만 하층민들인 농민, 노비들은 성을 지키면서 몽고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후 충주성의 농민 등은 1253년 때에도 몽고군을 물리쳤다. 또한 관악산과 파주 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초적들이 대거 항몽전에 참가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로 개경이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의 입장에서도 고려의 저항이 완강하자 침입 4개월 만에 고려와 강화를 맺고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고는 계속해서 고려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려는 사태가 점점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1232년 6월) 또한 백성들은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가게 하였다. 이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기전에 돌입하겠다는 뜻이며, 따라서 항몽을 선언하고 나선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낸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최씨정권은 전쟁으로 인해 실각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집권 연장을 위해 항몽을 선언했던 것이다.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간 백성들은 식량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 오히려 민심을 자극한 계기가 되었다. 최씨정권은 쿠데타로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몽고군에 대항하여 싸운 민중들을 조직적으로 이끌 이념도 뜻도 갖지 못했다. 강화도 천도는 오직 정권 유지 차원에서 나온 조치이며 소극적인 항몽 자세의 결과일 따름이다. 이러한 고려의 조치는 몽고를 더 자극하게 되었다. 1232년 12월, 몽고군은 2차 침입을 하여 온 나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적극적인 항전을 벌이지 못한 반면 백성들은 스스로 봉기하여 몽고군과 맞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천민들인 처인(용인) 부곡민들의 승리는 커다란 성과였다. 김윤후가 이끄는부곡민들은 살리타이의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살리타이를 죽이고 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것은 당시 백성들의 항몽 자세가 어떠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였다.
이와 더불어 몽고군의 침탈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이 속출하였으며 귀한 문화재가 불에 소각되는 등 고려측이 입은 손실도 대단하였다. 몽고군은 유목 민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번 침입을 하면 전국 구석구석을 도륙하며 살상과 약탈을 일삼았다. 금나라의 경우 멸망(1234년)되기 전 화북지역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전 택주라는 곳에 5만 9천 416호의 가구가 있었는데 전쟁이 종식된 후 남은 것은 973호에 불과하였다고 하니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민가가 한 채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 들어온 몽고군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1254년에 시작되어 6년에 걸쳐 지속된 6차 침입 때 피해는 극에 달하였다. <고려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에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자는 남녀 합하여 20만 6천 8백여 명이며, 살육을 당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이 지나간 주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고군의 난이 있은 이래 이때처럼 혹심한 피해는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눌려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무신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도에 머문 채 강경책을 주장하는 등 대의명분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물론 최씨정권이 대몽 항전을 주장함으로써 민족 자존에 어느 정도 기여한 바도 있다. 그러나 최씨정권 자체가 독단적이고 위압적이어서 정책 차원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씨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즈음에 몽고군의 무력 침입도 일단 소강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가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1231년에서 1259년에 이르는 28년 동안 몽고군과 싸운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의병들이었다. 의병은 주로 농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도둑의 무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초적들도 대몽 항전에 참가하였다. 그렇다면 군대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정권을 장악한 최씨정권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사병 양성에 몰두하였다. 군인전이 사실상 붕괴되고 사병 양성에 따라 중앙군의 조직은 붕괴되어 당시 주요 군대는 최씨정권의 사병이 주력이었다. 몽고의 침입이 있자 중앙군의 후원을 받지 못한 지방군은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곧 군사 통제력마저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강화도 천도 이후 신변 보호를 위해 사병들을 모두 강화도를 지키게 하여 정권 유지의 첨병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때 국가 경찰로 운영된 집단이 삼별초였다. 따라서 몽고군과 주로 싸운 것은 일반 백성들이며 구체적으로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만큼 중앙정부는 정권 유지하기에도 힘에 겨워했던 것이니 이로 인해 유혈 투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최씨정권이 약화된 것은 최충헌, 최우 이후에 집권한 최항 때였다. 최우가 30여 년간 독재 정권을 유지하다가 1249년 사망하자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원래 최항은 서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물림의 대상은 아니었다. 최우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딸만이 있어서 사위인 김약선에게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서자인 만종과 만전을 입산시켜 승려 생활을 하게 하였다. 그런데 최우는 사위 세력을 제거한 뒤 만전을 환속시켜 후계자로 결정하였다. 이 만전이 바로 최항이다. 아마 사위와 알력이 생겨 이러한 번복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권을 잡은 최항은 새 집정으로서 상당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김약선과 이어지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혀 최씨정권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자 최항은 반대파를 대거 숙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 기반이 더욱 흔들렸다. 승려 생활을 하는 동안에 현실에 대한 감각을 배우지 못한 탓에 최항은 당시 대몽 정책에 대해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였으며 8년간 기존 세력에 의지하여 집정하다가 병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최의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주위 사람들의 인망을 얻지 못해 정권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1258년 별장 김준과 유사성 유경 등이 최의를 암살하고 최씨정권을 타도하였다. 이로써 4대에 걸쳐 60년간 지속되었던 최씨무신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육지에서 백성들은 항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처럼 강화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정권 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당시 고려의 현실이었다.
강경책과 화친책의 갈등
최씨정권이 무너졌다고 무신정권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김준 등은 1268년에 임연에게 살해당하였고 임연이 병사한 후 아들인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집권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원종의 밀명을 받은 홍문계의 손에 죽고 말았다.(1270년) 이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몽고와의 관계는 청산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섯 번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받는 동안 정부 내에서는 몽고와 계속 항전을 벌이자는 강경파와 속국으로서의 예를 갖추자는 화친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강경책은 주로 무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화친책은 문신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신들의 주장이 자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권 유지 차원에서 몽고와 항전을 벌이자는 뜻이었다. 문신들은 대국인 몽고와 항전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하면서 개경으로 환도하여 몽고와 화친을 맺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왕권 복위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수차례에 걸쳐 외교 교섭을 가졌다. 몽고는 즉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촉구하였고 고려는 군사적 침략을 중단한다면 환도를 고려하겠다고 대응하였다. 이러한 줄다리기 가운데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고군이 철수하기도 했던 것이며 이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집권 세력인 무신정권은 개경 환도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6차까지 가는 몽고군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며 점차 화친책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화친책이 사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중앙정부에서 몽고군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해 육지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가끔 삼별초가 육지로 나와 몽고군과 항전을 벌였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무신정권 유지를 위해 만든 군대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의지휘하에 있던 삼별초는 지속적인 대몽 항전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화친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백성 가운데 생존자는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이고 농토는 황폐화되어가니 강화도 하나만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면서 무신정권의 무모한 강경책을 비판하였다. 강경책의 헛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만일 진정 무신정권이 몽고와 대적하여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군대를 양성하고 의병을 조직화하여 몽고와 싸워야 했다. 따라서 강화도에 머물면서 강경책을 주장한다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화친책이 대몽 관계의 정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물론 최씨정권 말기에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는 등 다소 온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몽고는 더욱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공작에 몰두하였고 결국 고려는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게 봤을 때 강경책이나 화친책 모두 문제가 있었다. 국가의 존립을 염두해두고 본다면 강경책을 쓰되 실질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군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화친책을 쓰되 그것을 전술적인 차원에서 역이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 구심점이 상실된 고려 말기의 정부는 뚜렷한 대몽 정책 방향이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해 결국 몽고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원종의 사대정책과 삼별초의 항쟁 : 김방경과 배중손
이제 삼별초의 항쟁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살펴볼 차례이다.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임금이었던 원종이 몽고 정부에 입조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보통 강대국이 국왕을 직접 입조하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태자들이 볼모 형식으로 입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종이 직접 입조하였다는 것은 고려가 완전히 몽고의 예속국이 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것을 뜻한다. 위에서 김준 등을 제거한 임연은 원래 원종과 제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자 몽고에 대해 항전을 계속 주장하였다. 임연이 이렇게 강경책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 등의 군대와 무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연은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 안경공을 즉위시켰다. 원종이 스스로 물러나 상왕의 자리에 앉는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이에 몽고는 내정 간섭의 기회라고 여기고 즉시 원종과 임연 모두 입조하라고 명령하였다. 몽고의 입장에서는 원종이 친몽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몽고에서 돌아오던 태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몽고의 세조에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하였다. 몽고군이 다시 침략할 기미를 보이자 임연은 이에 굴복하고 원종을 복위시킨 뒤 입조토록 하였다. 물론 임연은 가지 않았다. 원종 11년, 즉 1270년에 원종은 몽고의 세조를 만나 사대할 것을 약속하고 만다. 원종은 귀국하기에 앞서 먼저 전령을 강화도로 보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즈음에 강경책을 주장하던 임연이 등창으로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들 임유무가 자객 홍문계의 손에 죽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원종은 신변 안전을 위해 몽고군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원종이 입조의 길을 떠날 때 이미 강경파들은 고려가 몽고에 예속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임연은 죽기 전에 삼별초를 중심으로 입보 (비상 사태시 일단 안전 지역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하라고 명령해 놓았다. 임유무 역시 개경 환도의 명령이 떨어지자 당황하면서 삼별초에게 입보하라고 다그쳤다. 그런데 원종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역시 삼별초였다. 원종은 삼별초의 명부를 몽고에게 바치려고 압수하는 한편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만일 명부가 몽고의 손에 들어가면 삼별초는 그 기반부터 무너져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상황은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겉으로 봤을 때 삼별초의 반란은 해체 명령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또한 그동안 무신정권의 사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난은 다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제2의 무신 반란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쟁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삼별초의 창설 동기와 연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한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가 처음부터 3군으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다. 최씨정권의 2대 집정자인 최우는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는다'고 하면서 지금의 경찰 조직과 유사한 별초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주로 밤에 활동한다고 해서 이를 야별초라고 불렀는데 이후 그 수가 불어나자 2군으로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는 명칭을 붙였다. 야별초의 경우 경찰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몽고의 침입 이후 몽고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편성, 삼별초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삼별초가 구성된 것은 최씨정권이 몰락하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별초는 국가 차원의 정예 군대라는 면보다는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적인 군대의 성격이 더 강했다. 삼별초는 대몽 항전에도 나서기도 했는데 지속적인 전투는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몽고와 접전을 벌이면서 삼별초의 군인들은 몽고에 대해 깊은 적의를 품게 되어 무신정권의 하수인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적인 차원에서 몽고의 침입을 대항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결국 삼별초 군인들은 본부를 제주도로 옮기면서까지 4년 동안 항쟁했던 것이다.
그 조직을 보면,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수도경비대 등 임무에 따라 군을 편성하였다. 이들은 왕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으며 수배된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삼별초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된 경위는 대몽 항전을 펼치면서이다. 삼별초는 정예 군대가 와해되자 이를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1253년 전후로 몽고군의 침략이 강경해지면서 정규군의 활동이 둔화되고 대신 삼별초가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는 정규전보다는 주로 기습전과 게릴라전에 능하여 몽고군을 수시로 괴롭혔으며 때로는 정면에서 몽고군을 함정에 빠뜨려 대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어디까지나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군대만으로 몽고군을 물리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실전을 쌓은 삼별초는 강화도 내의 정치 변동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삼별초가 주체가 되어 정치를 변화시킨 경우는 없었다. 대체로 세력을 잡은 무신들에 의해 삼별초는 움직여 나갔다. 삼별초가 나라의 재정으로 운영되고 녹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분명 사병은 아니었지만 최씨정권을 거치고 이후 등장한 무신들의 집권에 따라 삼별초는 사병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별초의 반란은 사병으로서의 역할이 끝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삼별초의 반란이 갖고 있는 복잡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때 편찬된 <고려사>에 보면 삼별초의 초기 지도자 배중손은 [반역열전]에 포함되어 있다. 즉 조선시대 지배층은 삼별초의 저항은 반역이었다고 규정한 것이다.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주장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삼별초를 이렇게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만은 없다. 삼별초는 분명히 군사조직이다. 그것도 정규군이 아닌 특수부대였다. 또한 무신정권이나 권신들의 세력이 이 삼별초에 의존하여 유지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원종의 몽고에 대한 태도와 정책에 내재되어 있었다. 원종의 입조는 왕권 회복을 뜻함과 동시에 화친책이 정세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270년 5월, 몽고에서 돌아온 원종은 고려군이 아닌 몽고군의 호위 아래 강화에 있던 군민들에게 위압적인 자세를 보이며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마치 원종은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원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몽고의 요구대로 개경으로 환도하되 매우 사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와 더불어 삼별초의 명부 압수와 해산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국왕은 몽고에 의존하여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원종이 개경 환도를 서두르자 그동안 대몽 항전을 벌여온 일반 백성들은 원종의 투항주의적인 자세에 반발을 하였다. 백성들은 30년 가까이 대몽 항전을 벌이면서 몽고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국왕이 항복과 다름없는 조치를 취하니 정부에 대해 등을 돌리고 만 것이다.
삼별초는 이러한 민심을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오랜 전쟁 기간 동안에 갖게 된 몽고에 대한 적의가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삼별초의 해체라는 것은 정규군이 와해된 처지에서는 사실상 국가 군대의 위치를 박탈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곧 적에 대해 무조건 항복하라는 명령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삼별초의 항쟁은 민중들의 반발을 토대로 하여 일어났다. 실제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육지에서는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의 항쟁이 병행되었다. 마침내 배중손과 야별초의 노영희 등은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손인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행정기구를 개편한 뒤 관리도 새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원종 왕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이 있어 항쟁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지 3일 뒤에 강화도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에 싣고 진도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투쟁에들어갔다. 이때 이동한 선박이 1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선박이 필요했던 것은 삼별초의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고 개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별초에 가담한 상당수의 노비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도에 새 정부를 세운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에 대비하여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궁성을 짓는 등 군사 시설을 완비해 나갔다. 그리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남부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나중에는 거제도, 제주도 등 주요 섬들이 모두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자진하여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찾아와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남하할 즈음에 전라도 토적참지정사로 파견나와 있던 신사전이나 전주부사 이빈 등은 삼별초의 세력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쳤다. 심지어 내륙의 전주, 나주 같은 도시들도 삼별초에 포위당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삼별초가 남부 지역을 석권해가자 몽고와 개경 정부는 커다란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개경 정부는 몽고군과 협의하여 진도의 삼별초를 정벌할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이미 삼별초가 남하할 무렵에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임명하여 몽고군과 함께 해상으로 추격하도록 조치해 놓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군사력이 워낙 강해서 함부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270년 9월, 개경 정부는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재임명하고 몽고 원수 아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11월,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는 진도 근처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였다. 처음에는 연합군이 이길 것 같았지만 전세는 삼별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김방경이 적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쓰고 개경으로 소환되었고 아해는 겁이 많아 싸우기도 전에 후퇴만 하다가 이듬해 1월에 다른 장수로 교체되는 등 첫 접전은 삼별초의 승리로 끝났다. 삼별초는 기세를 몰아 11월에 제주도를 점령하였고 멀리는 동래와 김해까지도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왔다. 이로써 삼별초는 남부 지역을 항쟁의 교두보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원종이 1271년에 몽고에 보낸 국서내용을 보면, "경상.전라의 공부는 모두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수로로 운송하는데, 지금 역적이 수로의 목구멍인 진도에 진을 치고 있어 선박들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삼별초는 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 재정의원천인 남부 지역의 조운이 차단되자 개경 정부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몽고 정부 역시 삼별초의 항쟁으로 일본 정벌을 늦출 수밖에 없었고 어렵게 이룬 고려와의 화평도 깨지게 되었다. 이에 몽고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진도로 보냈다. 그러나 삼별초는 오히려 몽고의 사신을 억류하는 등 회유책에 응하지 않았다. 몽고로서도 이제는 강경 대응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몽 연합군은 다시 진도를 공격하였고 이때마다 삼별초는 완강히 저항하였다. 드디어 여몽 연합군은 1271년 5월 15일에 김방경을 중심으로 삼별초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이때 몽고군의 사령관은 홍다구와 흔도였다. 그런데 이 총공세에 삼별초는 휘말리고 말았다. 이 무렵 삼별초는 여러 번에 걸쳐 전투에서 승리하자 방비를 소홀히 하였고 몽고가 회유책을 쓰자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를 찔린 것이었다. 그러나 방비가 허술해진 탓보다는 100여 척의 대군이 기습하였기 때문에 삼별초는 순식간에 연합군에게 패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배중손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말았으며 반개경 정부의 상징이었던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삼별초의 김통정은 잔류 군대를 이끌고 마지막 보루인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 다시 전열을 수습하고 재차 항쟁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삼별초가 진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해상권을 장악하여 대몽고전을 펼칠 즈음 내륙에서는 민중들의 항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삼별초는 진도에 임시정부를 설치하면서 각 지방에 격문을 보내 항몽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적이 있다.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육지의 민중들이 호응한 면도 있지만 이보다는 30년 가까이 몽고의 침탈을 견뎌오며 다져진 전의를 바탕으로 마지막 일전을 벌일 결의를 했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내륙에서 일어난 항전의 대표적인 경우가 1271년 1월 밀성군(경남 밀양)에서 있었던 봉기였다. {고려사}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밀성군 사람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은 군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차 진도에 호응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부사 이이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일설에는 '호국'이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병마사라고 칭하면서 군현에 공문을 보내어 그 패거리를 파견하여 청도 감무 임종을 죽였다."
병마사라는 명칭은 여러 반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병마사라고 자칭할 수 있다는 것은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항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관노들의 폭동을 들 수 있다.
"관노인 숭겸과 공덕 등은 그 도당을 모아 다로하치와 궁중의 벼슬하는 자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투항하려고 하였다. (중략) 탈타아는 홍다구 등과 더불어 재상들과 중신들을 모아 숭겸 등 십여 명을 체포하였다. 취조를 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그러나 내륙에서 벌인 항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유존혁이 이끄는 항쟁군은 진도가 점령당하는 시점까지도 남해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삼별초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남부 지역을 통괄함으로써 각 지방의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에 나섰다. 따라서 항몽전은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여 내륙의 민중들이 항전을 벌임으로써 확대되어 나갔다. 이러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만 삼별초는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마지막 항쟁에 돌입한 것이다.
삼별초의 최후 : 몽고에 대항하여 고려의 주권을 지키다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항전에 대비하여 내성과 외성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해변에 장성도 갖추었다. 따라서 제주도로 이동한 후 몇 달 동안은 성 쌓기에 바빠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다시 전투를 시작한 것은 11월에 이르러서였다. 삼별초는 다시 배를 타고 나가 남해안 지방과 내륙 지방을 공격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충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이 다시 본격화된 것은 해가 바뀐 127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별초는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 등 주요 섬들을 공략하여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3월에는 장흥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5월에는 전라남도 대포, 탐진 등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삼별초는 조운선을 탈취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고 전함을 노획하여 불살라 적의 기동력을 마비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몽고는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게 전함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러한 전함 건조 공장도 삼별초의 공격대상이 되어 몽고의 전략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뿐 아니라 몽고군이나 고려 관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였다. 이것은 반몽고적이고 반정부적인 민심을 더욱 고무시키기 위한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몽고의 세조는 1272년 8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탐라(제주도) 공격에 주력하라고 촉구하였다. 세조는 일본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이 해 11월, 심지어 삼별초는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를 공격하여 부사와 그의 처를 납치해간 적도 있었다. 개경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몽고는 삼별초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세조의 명을 받은 홍다구 등이 김통정에게 공작을 벌이거나 제주초유사를 두 번이나 파견하는 등 다시 회유책을 쓰지만 삼별초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진도에서 이미 몽고의 회유책이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삼별초의 항쟁 의식은 고취되었다. 몽고는 결국 제주도를 무력으로 정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도 때와 똑같은 수순이었다. 1273년 4월,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은 160여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제주도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기습하였다. 이때 구성을 보면, 고려에서는 김방경이, 몽고에서는 흔도, 홍다구가 군사를 이끌고 상륙하였다. 이들은 모두 진도 공격에 경험이 있는 사령관들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삼별초와의 전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제주도는 유혈의 현장이 되었다. 삼별초는 연합군에 대적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보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통정은 70여 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후퇴하였으나 형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일설에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삼별초 가운데 1천 3백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연합군은 몽고군 5백 명, 고려군 1천 명을 제주도에 주둔시킴으로써 토벌 작전을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하여 삼별초는 1270년 6월 항쟁을 선언한 이후 만 4년 동안 치열한 항몽 대전을 벌이다가 1273년 4월에 장열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정부는 삼국 통일 당시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이후 처음으로 외세까지 끌여들여 토벌을 하였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항쟁은 분명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보다는 이 반란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삼별초는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삼별초의 저항에 부딪혀 일본 정벌과 남송 침략에 큰 차질을 입은 몽고 정부는 고려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 의식에 밀려 고려의 주권을 넘보지 못하였다. 물론 고려가 이후 몽고의 내정 간섭을 받는 등 속국으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주권 자체가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 몽고의 침입을 받은 아시아, 유럽을 통틀어서 고려만이 주권을 상실하지 않았다는것은 고려의 민중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항몽전을 펼쳤던가를 반증하는 셈이다. 즉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몽고는 고려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에 대항하여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난 최초의 군인 반란이었으며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반역 행위가 아닌 국가의 자존을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의 항쟁이 끝남으로써 무신정권 전후로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어 이후 고려는 원의 내정 간섭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
|
|
글터 → 수필 |
|
|
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기도 일기.2 - 봄이 오는 길목에서
1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2 남쪽의 봄은 빨리 온다지만 어느새 곳곳에 봄이 일어서고 있다.
지금쯤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몰살을 하고, 나도 간간이 잠을 설치며 봄앓이를 하고 있네.
3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서 못 일어날 것 같다가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움직이면 새 힘을 얻는 것처럼 겨울 뒤에 오는 봄은 깨어남, 일어섬, 움직임의 계절이다, '잠에서 깨어나세요' '일어나 움직이세요'라고 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녀처럼 살짝 다가와서 겨울잠 속에 안주하려는 나를 흔들어댄다.
4 박재삼 시인의 <무언으로 오는 봄>을 몇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봄을 맞는다.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히 느껴보게나'
특히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라는 말은 가슴 깊이 머물러 떠나지 않는다.
5 어른도 어린이가 되고 싶은 동심의 계절인 봄, 수녀원 언덕길의 꽃오리들을 보고 '꽃들이 기도손을 하고 있어요'하고 말하던 우리 유치원 어린이의 시적인 말도 새롭고, 여행중 기차 안에서 나와 잠시 사귀었을 뿐인데도 먼저 내릴 때는 '잘가 응? 나 먼저 갈게'하며 아쉬운 듯 정답게 손을 흔들던 뺨이 붉은 그 어린이도 문득 보고 싶다.
6 많은 꽃술을 사랑의 인장처럼 달고 꽃받침을 받친 채로 피어 있는 다섯 개의 매화잎들은 사랑스럽다. 나도 이 봄에 매화 같은 몇송이의 시를 피워내고 싶지만, 이미 품어놓은 시상들을 제대로 낳아 키우는 일 또한 쉽지 않음을 갈수록 절감한다. '시만'쓰면서 생활하는 것보다 '시도'쓰면서 생활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7 수도복 위에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앞치마 하나를 선물받았다. 언제나 앞치마를 입으면 더욱 열려있고, 돕고 싶은 마음, 준비된 마음이 되는 것 같아 기쁘다. 나비 무늬 가득한 앞치마를 입고 저 만치서 달려오는 봄을 맞으러 나도 하늘빛 앞치마를 입고 뛰어가야겠다.
8 먼 나라에서 내 어릴 적의 친구가 보내준 12개의 꽃씨 봉투, 이름과 모양이 각기 다른 꽃봉투를 흔들 때마다 조금씩 특이한 소리가 나는 것도 즐겁고, 극히 작고 가벼운 씨앗들이 어느 날 피워낼 아름다운 꽃들을 미리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마음 가득하다. 꽃씨를 선물로 보낼 친구에게 나도 기도의 꽃씨 한 톨 날려보내야겠다.
<1993>
기도 일기.3 - 한 송이 꽃이렸더니
1 목 타는 가뭄 중에 맛있게 단물 든 과일처럼 길고 긴 고통의 메마름 끝에 비로소 단물 든 나의 사랑이여, 언제 거두어 들일지도 모르면서 벅찬 꿈으로 마음의 속뜰에 심어두었던 내 오래 된 자주 나무빛 사랑이여, 잘 익은 너를 먹으며 한여름 내내 기쁨을 꽃피움이여. (1982. 7. 16)
2 아침마다 일어나 새로운 해방절을 맞는 우리의 꽃, 무궁화여. 아픔의 꽃술 길게 물고 하늘을 향해 섰는 한민족의 꽃이여, 36년 짓밟혀온 우리의 한과 설음을 너는 알고 있어서, 우리 탓도 아니게 두 동강이 나버린 38선의 비극을 알고 있어서 차라리 입다문거지? 향기도 감춘거지? 오늘도 의연하게 버티고 서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는 꽃. 붉은 가슴마다 태극기를 꽂으며 오늘도 자유를 노래하는 겨레의 꽃, 무궁화여 (1982. 8. 15)
3 당신께 드리는 나의 웃음 소리가 색색의 빛깔로 피어나 채송화 꽃밭에서 환한 햇살 받으며 환해지는 마음. 키가 작아도 즐겁기만 한 채송화 무리처럼 나도 다부지게 피니다. 우리들의 추억이 한데 모여 앉은 듯한 채송화 꽃밭에서 나는 오늘도 '작은 자'의 행복을 누립니다. (1982. 9. 15)
4 아침마다 바위 틈에 조용히 숨어 피는 푸른색의 나팔꽃. 그 애는 왜 숨어서만 피고 싶을까. 시끄러운 세상이라 조용히 숨어서 나팔을 불고 싶은게지.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길에 무심히 만난 한 송이의 푸른 나팔꽃으로 나의 아침은 더없이 행복했다. (1982. 9. 29)
5 당신은 어디에 숨고 날더러 꽃이 되라 하십니까. 어둠 속 좁은 땅비집고 나와 겨우 눈을 뜨는 한 송이 꽃이렸더니 이제는 또 알지도 못하는 곳을 떠나라 하십니까. 당신은 어디에 숨고..... (1982. 10. 5)
6 너를 생각하면 과꽃으로 물드는 마음, 나를 바라보던 너의 그윽한 눈빛이 자꾸 살아와서 절로 눈이 감겨지는 고운 날, 겨울도 아닌데 오늘은 춥다. 네가 보고 싶다. 향기로 말을 하는 꽃이 되고 싶다. 살아서 꽃이 될 수 없으면 하얀 종이꽃이라도 되고 싶다. 너를 위해서...... (1982. 10. 12)
7 장미꽃 사이사이에 하얀 점처럼 어우러져 있는 안개꽃의 아름다움, 자기의 개성도 잃지 않으면서 고운 장미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안개꽃의 겸허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내 남은 날들을 아낌없이 '새로운 노래'로 봉헌하게 하소서. 너무 작은 노래밖엔 부를 줄 모르는 저이오나 당신 안에 오늘도 힘을 얻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제가 살아 있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좀더 감사할 이유, 기뻐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고 무심히 맛없이 살아왔던 저를 용서하소서, 오늘도 당신 앞에 한 그루 순명의 나무이고자 합니다, 다시 크는 나무이고자 합니다. (1983. 5. 29)
8 이 가을, 나는 하늘 저 꼭대기로 올라가 우리집의 큰 대추나무, 밤나무, 감나무를 흔들어대는 바람이 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쓸쓸한 사람들을 달래주는 넉넉한 따뜻함은 지니지 못했어도 그들에게 가만가만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고픈 조용한 바람이라도 되고 싶다. (1983. 9. 10)
9 종종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눈물이 난다, 강의가 하느님 중심적인 것일 때도 그렇고 사랑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감동적일 때도 그렇고, 또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놓은 이의 삶을 대할 때도 그러하다. 오늘 점심 식사 후엔 혼자서 천천히 밖의 정원을 거닐었다. 수많은 히말라야송들 중에 꼭 한 그루가 열매를 맺는데 큰 열매가 바람에 놀라 당에 떨어져 누운 모습은 꼭 장미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보는 이마다 신기해한다. 우리 방에서 내다보이는 빈 밭에선 웬 작은 새 한 마리가 모이를 찾고 있었는데 꼬리가 길고 가슴빛이 노란 그 새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오늘 아침, '침묵'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인지 '침묵'이란 단어가 겨울의 빈 밭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올랐다. (1986. 1. 18)
10 봉오리로 맺혀 있던 글라디올러스꽃들이 활딱 문을 열고 일제히 피어났다. 봉오리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꽃들이 활짝 피어나 제 모습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은 다시금 신의 찬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하루종일 꽃이 피는 과정만 묵상해도 즐거울 것 같은 마음. (1986. 5. 19)
11 산사에서 저녁을 먹고 스님과 나를 안내해 준 L양과 달맞이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람결에 꽃잎이 차츰 벌어지는 모양, 꽃이 필 때 꽃받침대가 꽃을 받쳐주려고 꽃 밑으로 재빨리 질서 있게 내려앉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했다. (1986. 7. 3)
12 시원한 수국꽃들이 하늘빛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다. 내 마음도 둥글게 피어나는 듯하다. 아름다운 꽃, 여럿이 어울려 한 덩어리를 이룬 꽃잎들이 얼마나 신기한지. 수국을 주제로 시를 한 편 쓰고 싶다. (1986. 7. 6)
13 모처럼 환히 개인 날, 아침 식사 후엔 흰 옷을 빨면서 바로 앞의 밥나무도 바라보고 새소리도 들었다. 어린 밤송이가 잔뜩 달려 있는 그 밤나무는 우리 식탁에서도 늘 바라볼 수 있어 정이 들었다. 모든 열매들이 어릴 때의 모습은 참으로 앙징스럽다. (1986. 7. 18)
14 엉겅퀴와 강아지풀이 내 책상 위에서 웃고 있다. 산에 오르면서부터는 나뭇잎 한 장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산에서 종종 풀꽃을 따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방안에서 숲을 느끼고 싶어 몇 개씩 따오기도 하는 내 마음을 그들도 이해해 주겠지? 오늘 새벽 산에서 마시는 바람의 맛이 얼마나 감미롭게 좋았는지.
풀잎이 숨을 쉰다. 나무가 숨을 쉰다. 내가 숨을 쉰다.
우리는 산에서 하나 되어 산과 크신 하느님을 사랑한다.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숨 쉬고 또 숨 쉬는 푸름이여, 생명이여.
(1986. 8 13)
15 작년까지만 해도 몇송이 안되던 백합들이 올해는 잔디밭 가장자리로 수백 송이의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조용히 고개 숙인 꽃봉오리들은 그대로 기도하는 수도자의 겸허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꽃이 핀 것도 있고, 입을 다문 것도 있는데 모두 다 아름답다. 마음이 착잡할 때 꽃을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꽃은 늘 침묵으로써 깊은 말을 전해준다. 참을성, 개방성, 적응성에 대하여...... (1986. 8. 18)
<1986> |
|
|
|
|
사진과 그림 |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