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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0 호
단기 4341. 11. 15 (음력 10.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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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눈은 감을수 있어도 기억에 대한 눈은 감을 수 없다.(스타니스러우 J.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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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나랑
고장말
말을 잇거나 열거하는 데 쓰이는 표준어 ‘-이랑’은 어느 고장이나 거의 비슷한 형태로 사용되지만, 제주말과 평안말에서는 좀 달리 나타난다. 제주에서는 ‘-이영’이 쓰인다. “아침이영 정심밥이영 가져오게 뒈며는 …” “붉은 험벅이영 노랑 험벅이영 푸린 험벅이영 오섹 가지로 ….”(<한국구비문학대계> 북제주군 편) ‘-이랑’과 마찬가지로 자음 뒤엔 ‘-이영’이, 모음 뒤엔 ‘-영’이 쓰인다. “산에 간 남을 비여단 배를 짓언 씨어멍이영 메누리영 씨아방이영 이젠 배를 탄 나사난(나서니) ….”(위 책)
‘-이영’은 ‘-이랑’과는 달리 표준어의 ‘-도’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난 나비영 잡지 그렵수다.”(나는 나비도 잡고 싶습니다) “그 사름이영 카키옌 햄수과?”(그 사람도 가겠다고 합니까?) 이는 제주말의 ‘-광’이 ‘-도’의 뜻을 나타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 예자 양지광(얼굴도) 참 곱다.” “그 사름 입은 것광 불쌍하여라.”
평안말에서는 ‘-이랑’은 ‘-이당/이땅’과 대응된다. “아덜이땅 딸이당 흑게(참) 잘살디 않습네?” 모음 뒤엔 ‘-당/땅’이 쓰인다. “왜디땅 복새땅 참 맛있갔습둥.”
표준어의 ‘-이랑’이 ‘-이다’의 활용형 ‘-이라’에 ‘ㅇ’이 덧붙은 형태라면, 제주말의 ‘-이영’은 ‘-이여’에 ‘ㅇ’이 덧붙었다. 평안말 ‘-이당/이땅’은 표준어의 ‘-이다’에 ‘ㅇ’이 덧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가능한, 가능한 한
'가능한'과 '가능한 한'은 다르다. 단어와 구(句)라는 점뿐만 아니라 문장에서 하는 구실도 다르다. '가능한'은 '가능하다'의 관형사형으로 이 말 뒤에는 '가능한 일[것 등]' '가능한 수단[조치·방법·경우 등]'처럼 '가능한'의 꾸밈을 받는 명사가 나와야 한다.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했지만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 '코트 어느 곳에서든 득점이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 재목들이 연달아 나왔다' 등은 바르게 쓰인 예다.
'가능한 한'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또는 '가능한 조건하에서'를 의미하는 부사구다. 따라서 그 뒤에는 '가능한 한'이 꾸밀 수 있는 부사어나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 따라와야 한다. 그런데 '가능한 한'으로 써야 할 것을 맨 뒤의 '한'을 생략하는 경우가 눈에 자주 띈다. '가능한 빨리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가능한'의 꾸밈을 받는 명사가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가능한' 뒤에 '한'(조건을 나타내는 명사)을 넣어 '가능한 한 빨리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라고 해야 바른 문장이다.
아래와 같은 문장에서도 '가능한'을 모두 '가능한 한'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이나 문제점을 가능한 빨리, 정확하게, 나무라지 않으면서 설명한다.' -'제3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보도는 가능한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가능한'이 '가능한 한'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자문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사용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행위의 주체가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자문(諮問)'입니다. '자문'은 물을 자(諮), 물을 문(問)으로 이뤄진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남에게 무엇을 묻는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것을 뜻했지만, 요즘은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방면의 전문가에게 의견을 물음'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단어를 '어떤 사람의 질의에 답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물러난 나이팅게일은 그녀의 봉사활동에 자극받아 유럽 각국에서 막 실시하기 시작한 의료 구호 제도에 대해 자문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 문장은 유럽 각국의 의료 구호 관계자들이 나이팅게일에게 그 제도에 관해 물어본다는 내용인데 단어를 잘못 써서 나이팅게일이 질의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여기서는 '자문' 대신 '조언'이라는 말을 썼더라면 정확한 글이 됐을 것입니다.
'필요시 전문가의 자문을 받기로 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등도 어색한 표현입니다. 이것들은 '전문가에게 자문하기로 했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변호사에게 자문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등으로 바꾸면 됩니다.
한편 '선생님은 우리의 자문에 흔쾌히 응하셨다'의 경우는 우리가 묻고 선생님께서 답하신 것이므로 '자문'을 바르게 쓴 사례입니다.
벗어지다, 벗겨지다
일반적으로 머리 숱이 적은 사람을 가리켜 '머리가 벗겨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머리가 벗겨지면 큰일난다. '머리가 벗어졌다'고 해야 옳다. '벗겨지다'는 '덮이거나 씌워진 물건이 외부의 힘에 의해 떼어지거나 떨어지다'(신발이 꽉 끼어 잘 벗겨지지 않는다), '사실이 밝혀져 죄나 누명 따위에서 벗어나다'(죽어서야 자식들에 의해 오명이 벗겨졌다)의 뜻인 반면, '벗어지다'는 '덮이거나 씌워진 물건이 흘러내리거나 떨어져 나가다'(신발이 커서 자꾸 벗어진다), '머리카락이나 몸의 털 따위가 빠지다'(머리가 벗어지다), '피부나 거죽 따위가 깎이거나 일어나다'(넘어져서 무릎이 벗어졌다), '때나 기미 따위가 없어져 미끈하게 되다'(촌티가 벗어지다)의 뜻이다.
'벗겨지다'는 '벗다'의 사동사 '벗기다'에, '벗어지다'는 '벗다'에 피동의 뜻을 가진 '-어지다'가 붙은 말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경우라면 '벗겨지다'라고 쓸 수 있지만,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면 '벗어지다'라고 써야 옳다.
첫 문장에서처럼 '머리가 벗겨졌다'고 하면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 머리 가죽이 벗겨졌다는 끔찍한(?) 뜻이 되고 만다. 그 밖에 '옷이 커서 자꾸 벗겨진다/햇빛에 그을어 살갗이 벗겨진다'처럼 일반 사람들이 강제성이 없는 경우에도 '벗어지다'보다 '벗겨지다'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지만 이는 어법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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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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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 돌아가서 - 이기철
양파 참깨들이 수돗물에 씻기고 있는 저녁으로 돌아가서 하루 중 가장 쉽고 편안한 식구들의 말소리를 듣는다 작은 불빛 따스하게 내리는 백열등을 켜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서성이는 굴뚝새의 저문 꿈이 보이고 야만의 저녁 들에 스미는 묻힌 씨앗들의 푸른 잠이 보인다 양말을 벗어던져도 춥지 않은 맨발의 이 저녁 온기
어디선가 길게 종이 울고 간혹 끊어지는 동촌 쪽의 물소리 어둠의 깊이 속에 묻혀서 이끼처럼 부서지는 생애의 파편들을 주우며 담요에 베어있는 생계의 절인 때를 떨면 맨드라미 씨처럼 조르르 구르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흩어지고 목조 층계에 덮여 있는 가업이 먼지처럼 내려와 불빛 아래 깔린다
하루의 소문은 굴뚝에 쌓이고 메밀밭에 묻어둔 사연이 일어서서 지상을 덮는 이 겨울 저녁 지붕과 하늘의 경께는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어제의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부엌에선 밀감 담은 쟁반이 부딪히고 수돗물이 마지막으로 쏟아지며 잠긴다 털깃 외투처럼 부드럽고 짤막한 이 하루의 저녁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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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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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무량사 - 김선희
정의로운 쪽으로 바람개비 달아 놓고 목숨껏 휘저어 세상을 버티다가 만수산 소나무 숲에 바람으로 등지다.
기다림이 한 생이 되어 참 쓸쓸히 살았을 죽어서도 삼년동안 산 모습이었다는 매월당 비오는 무량사에서 매서운 법문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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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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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면 달 생각하고 - 이정보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 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려뇨
<말뜻>
완월장취(玩月長醉) : 달을 벗삼아 즐기면서 거나한 기분으로 오래도록 노닌다.
<감상>
아름다운 꽃, 밝은 달을 보면 한잔 술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술이라면 의당 벗과 더불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데에 멋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운 것이 친한 벗인데, 그 벗과 달 밝은 밤에 꽃 아래에서 한잔 건네면 더 부러울 것이 또 무엇이랴.
화조월석(花朝月夕)에, 벗님네와 더불어 담론의 꽃을 피운다는 생각만해도 쾌남아의 가슴 설레는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작자 미상의 이와 비슷한 주제를 가진 시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으니,비교하여 보라.
"꽃피자 술이 익고 달밝자 벗이 왔네/이같이 좋은 때를 어이 거저 보낼소니/하물며 사미구(四美具)하니 장야치를 하리라(작자 미상)"
사미는 꽃 · 술 · 달 · 벗을 가리키며 그것들이 고루 갖추어졌다해서 '사미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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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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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1장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연을 왜 신성하다 했는가
동양에서의 자연은 이상적인 존재이자 인간이 닮아 가야 할 최종목표이다. 즉 인간이 자연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를 지향하는 일체관계로 자연은 파악되는 것이다. 김교빈(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호서대 교수)
동양사람들에게 자연은 무엇일까?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거나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노닌다'든가 '자연을 벗삼는다'고 할 때에는 내 밖에 대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주변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동양에서 쓰는 자연이란 말 속에는 위에서 예를 든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중요한 개념으로 쓰여 온 것은 후자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저절로' 또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자연 밖에 무엇인가 자연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주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스스로 또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원인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서양의 사고와 매우 다른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서양의 자연 개념은 어떠한가? 서양에서 자연을 뜻하는 영어 단어 'nature' 속에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다'거나 '타고난 그대로'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아직 진화하지 못한 원시나 미개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무시한 채 신대륙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바라보던 시각도 바로 이러한 관점이었다. 따라서 원주민처럼 타고난 그대로의 불완전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순화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연 또한 인간의 손길이 닿음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진 경우를 비로소 문화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이 같은 사고의 원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은 구약 성서 첫머리에 천지창조의 과정을 서술한 '창세기'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6일 동안 인간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간이나 자연은 똑같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면서도 둘 사이의 관계를 본다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밖에는 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이 존재하며 세계 안에 담긴 자연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이용 대상이거나 인간이 밟고 넘어가야 할 극복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하게 만드는 역할이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동양의 사유체계에 나타난 자연은 서양과 달리 가장 이상적인 존재인 동시에 인간이 닮아가야 할 최종 목표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맞서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닮아감으로써 언제나 하나를 지향하는 일체관계로 파악된다. 웅장한 산과 냇물을 먼저 그리고 그 한구석에 사람들을 그려 넣는 동양 산수화의 구도가 이런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서양처럼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인간이 불완전한 자연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내 속에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한계인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에서는 자연의 반대 개념이 문화가 아니라 부자연이며 부자연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선수들을 시합에 내보내면서 감독이나 코치가 하는 말은 연습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이다. 만일 박찬호나 박세리 선수가 더 잘 해 보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팔이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면 자연스러움은 깨지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양의 자연은 말 그대로 더 이상의 꾸밈이 필요없는 가장 최고의 경지인 셈이다.
자연을 보는 두 관점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인류는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자연속에 신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자신들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자연의 신비와 그 속에 담긴 절대적인 힘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지혜가 아직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많은 자연 현상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일찍이 큰 강 주변에 모여 살면서 문명의 싹을 틔운 동양의 경우는 자연 환경에 많은 부분을 맡길 수밖에 없던 농경 중심의 상황에서 자연의 변화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자연히 비와 바람을 내는 하늘을 정점으로 삼아 자연에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중국의 전설적 제왕 순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해와 달과 다섯 별의 움직임이 바른지를 살피고 산과 들의 뭇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는 "서경"의 기록을 보면, 바로 자연의 힘을 헤아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에 적응해 가려는 소박한 노력으로서의 종교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자연 존재 각각에 신적인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고 보는 다신교적 이해와 함께 그 자연신들 사이에 위계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대 조상들의 생각을 잘 나타낸 대표적 신화인 단군신화를 통해서도 조상들이 태양 숭배, 산악 숭배, 호랑이토템(Totem)이나 곰 토템 같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기원전 1000년 이전 인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자연신들을 노래하는 것으로 쓰인 베다(Veda) 또한 다양한 자연신에 대한 숭배 모습을 잘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 강력한 신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지각 능력이 발달하면서 점점 깨져나가기도 하였다. 2600여 년 전인 춘추 시대 초기에도 이미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거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같은 현상들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두 강의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이상한 소용돌이 현상이 생기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비적으로 해석하려 하였지만, 그러한 생각에 맞서서 음양의 조화가 어그러져 생기는 단순한 조화라고 설명한 예들도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를 인간 사회의 변화와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본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에 각기 다른 법칙이 있다고 본 매우 과학적인 생각의 싹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자연의 변화를 자연 나름대로의 기계적인 법칙으로 해석한 순자에게서 더욱 발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순자는 이해하기 힘든 자연 현상이 나타나면 이는 곧 하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당시 사람들을 향해 "별을 떨어지거나 나무가 소리내어 울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천지의 변화이며 음양의 조화이고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비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여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오는 것은 어쩐 일인가? 별 것 아니다. 그것은 기우제를 안 지냈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안 지내기도 하는 인간의 행위와 비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자연의 변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물론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궁극에는 인간을 자연과 대등한 존재로 파악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자연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다신-일신-다신으로의 변화
하지만 동양적 사고의 주된 흐름은 한편으로는 자연을 극복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궁극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특히 이런 사고는 중국 고대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자리잡는다. 중국의 경우 부족연합국가였던 은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제를 섬겼다. 갑골문이나 청동기에 나타난 제의 고대 글자는 삼각형을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이것은 꽃이 지고 난 뒤 꽃받침이 오그라든 모양을 따 온 것으로서 바로 여기에 열매가 맺는다는 점에서 수확을 상징하는 글자였다. 그러한 상징성 속에는 많은 수확을 바라는 농경사회의 염원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은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제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다른 부족의 조상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용어가 상제였다. 상제는 은부족의 조상신인 제가 신의 세계에서 다른 부족의 신들을 지배하는 가장 높은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은 주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천으로 상제 개념을 대체해 버렸다. 그리고 은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신이라고 내세웠던 상제가 사실은 천이고, 은나라 사람들은 상제가 은나라 사람들만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잘못이며, 천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제가 은나라 부족과 나아가서는 은나라 임금만을 보증해 준다는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천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존재임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 천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덕이 많은 사람을 뽑아 임금을 시키는데, 그 사람이 덕이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백성들이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여 마침내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생각은 가장 궁극의 절대자가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으로 보편화시킨 것이 성리학이었다. 송대에 나오는 성리학은 만물의 근원을 태극이라고 보면서도 절대 존재인 태극이 모든 만물 속에 들어있다고 함으로써 현상 세계의 모든 존재들 속에 절대 보편의 궁극자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각각 특수한 법칙을 갖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사물에 통하는 보편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 개념의 변화 과정을 가리켜 다신-일신-다신의 변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절대 궁극의 존재가 현상의 모든 개별 존재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은 노장철학이나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먼저 노장철학의 경우를 보면 "장자"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만물의 근원자이며 원리인 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제자에게 장자는 하찮은 벌레나 벼 옆에 자라는 쓸모없는 피 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 답을 듣고 의아해진 제자가 도시 도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이번에는 깨진 기왓장 속에 있다고 대답한다. 더욱 놀란 제자가 다시 묻자 마침내 장자는 똥이나 오줌 속에도 도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도가 모든 만물 속에 똑같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물은 똑같다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불교의 경우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근원을 마음으로 보고 그 마음 속에 불성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때의 마음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끝없이 윤회한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 속에 불성이 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의 사유체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양문명의 중심인 기독교에는 열 가지 중요한 계율이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율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율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교적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한 신들을 부정하고 절대 유일의 하나님을 내세운 것이며,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면서 서양문명의 오직 일신으로 끝이 나고 만다. 따라서 동양이 다신-일신-다신의 과정을 겪었다면 서양은 다신-일신의 과정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신성은 무엇인가
만물 모두에 신적인 존재가 들어 있다는 사고는 문화적으로 다양한 제사 양식을 성립시켰다. 동양에서는 천지 자연의 정점인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뿐 아니라 토지신에 제사지내는 사직제, 산에 지내는 산제 등 다양한 모습의 제사가 자리잡았다. 이러한 자연 숭배는 중국과 우리 나라 모두에서 가장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 밖에도 한 해의 농사 시작을 알리는 선농단의 제사나 서울근교에서 지내는 교제들도 모두 여기에 속하며, 이런 제사들은 모두 국가가 행하는 자연 숭배 양식이었다. 하지만 일반 민속에도 산골 마을의 산제, 바닷가의 풍어제 같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숭배 양식이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제사들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무엇에 대한 숭배였으며 이를 통해 복을 바라는 생각이 그 속에 깔려 있다.
자연 속에 신성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은 자연을 인격체처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을 신성하게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이 인간처럼 좋고 나쁨을 느낄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나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능력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서양에도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빌려와 자연 속에 생명이 있으며 이러한 생명력이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현대에 들어와 이런 생각을 현대 인류문명의 위기인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신성한 무엇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미신적 관점에서 자연의 신성한 힘을 통해 개인 또는 집단의 복을 바라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신성함에 대한 인정이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세계관으로 자리잡는 경우이다. 미신적 관점은 그 적용에서 신성한 힘에 의지하여 복을 빌거나 재앙을 피하려는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지극히 현세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현세지향은 곧 지금 여기만을 풍요롭게 장식하는 물신숭배로 이어지고, 모든 것을 신령스러운 무엇인가의 조작에 맡겨 버림으로써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나 의지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미래지향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이성적인 윤리의식의 부족으로 귀결되며, 오직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점인 세계관적 지향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사고는 자연을 생명력 없는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봄으로써 생명의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자연을 높이고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자연을 단순한 이용대상이나 극복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 생명과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로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만을 생각하는 분할적 사고에 기초한 이기주의를 넘어서서 자연과 인간을 통일적으로 보는 전체론적 사고를 갖게 한다. 그 결과 이러한 세계관은 환경친화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며 아울러 생태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 단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의 신성에 대한 기대를 나라는 개체의 이익과 결부된 작은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생명 단위로 확장시킨 큰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의 신성성에 대한 이해는 인류의 발생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자연의 신성성을 보느냐에 따라 질적인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문제가 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풀이나 나무 한 포기까지도 소홀히 보지 않았던 행동 속에는 위에서 본 자연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에도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였고 자연을 인간의 방식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자연의 방식에 맞추려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많은 자연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훼손된 것과 비교하면 자연에서 신성을 읽던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관점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참고 문헌
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겨레신문사. 한국불교환경교육원,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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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말과 실천
중국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이 하루는 당시의 선사로써 명망 높은 조과 선사를 찾아갔다. 조과 선사는 항상 소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참선을 하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선사는 소나무 가지 위에서 좌선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백낙천은 놀라서 외쳤다. “선사님, 내려오십시오.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선사는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건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비록 땅 위에 서 있지만 당신의 마음속에는 번뇌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소. 그러니 위험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란 말이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백낙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모든 악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오.” 그러자 백낙천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선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것이지만 여든 살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오.”
진리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요, 또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대의 시인 백낙천과 선사의 짧은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다. 선사는 가장 쉬운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했다. 사실 그렇다.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누구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도 행동으로 옮기기란 진실로 어려운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말만 아름답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빛깔은 있되 향기 없는 꽃과 같다.`라고 “잠아합경”에서 말씀하셨다. 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은,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향기 없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모여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은 버드르르하고 그럴 듯하게 잘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다가가보면 실제로 행동이 뒤따르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말로만 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향기 없는 꽃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일전에 부산에서 택시를 탔는데 우연히도 천주교 신자가 운전하는 차였다. 부산은 개인택시의 경우 각 종교마다 돌아가며 쉬는 날이 정해져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불교 신자 기사들이 쉬는 날이었던 것같다. 그런데 차 앞쪽을 보니 작은 모금함이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돈통이라는 글귀가, 바로 그 밑에는 `가톨릭 교회`라고 작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무척 흐뭇해져서 나도 모르게 슬며시 1천원짜리 지폐를 그 모금함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기사가 잠시 힐끗 백미러로 나를 보더니, “삼중 스님이시네요?” 하고 아는 체로 했다. “당신들, 참으로 좋은 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은 돈을 모두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데 쓰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 천주교 신자 택시 기사들은 모두가 이렇게 모금함을 놓고 다닙니다.”
천주교 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기사분은 공손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자신도 살기 어려운 형편에 남까지 돕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들 나 하나 잘살겠다고, 돈 생기면 더 좋은 자가용 굴리고 싶어 아우성인 세상이다. 사랑의 모금함을 보자 내 마음이 모처럼 흐뭇해졌따. 십시일반이라고, 한 푼 두 푼 모아 불행한 어린 가장들을 돕겠다는 그 마음이 실로 고마웠다.
“우리 불교 신자 기사님들도 당신네 천주교인들처럼 이렇게 좋은 일에 나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던 섭섭한 생각을 이렇게 토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기사분은, “실은 저도 그 점이 정말 이상합니다. 부산만 해도 우리 가톨릭보다 불교계 쪽 택시는 4배가 되는 8백 대인데도 말입니다. 저희는 모두 합해 2백열 대밖에 되지 않습니다.” 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불교 신자가 타종교보다 많은 것은 부산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불교 신도들은 정작 포교나 사회 봉사 활동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 좀 서운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그 점을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해 오던 터였다. 부처님은 대자대비를 펼쳐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라고 항상 강조하셨다. 그런데 오히려 수적으론 상대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나 가톨릭교 등 다른 교계에 배해 봉사 활동은 늘 미미한 형편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부처님을 진심으로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적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다들 이 기사처럼 진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많고 적은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 기사님은 어떻게 봉사를 하고 계십니까?” “전 제 수입의 10분의 1을 반드시 이 모금함에다 넣습니다. 십일조인 셈이죠.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더러 장애인들이나 무거운 짐을 지신 노인들도 그냥 태워드리지요...”
봉사가 굳이 거창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가 갑자기 커보였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작은 사랑의 나무를 심어가고 있는 그가 바로 성자요, 부처가 아니겠는가. 언젠가 추기경께서 부산에 오셨을 적에 그분이 자신에게 `봉사왕`이라고 칭찬했는데, 그 말 한마디가 너무 좋고 기뻤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도 큰스님과 찍은 사진은 없어도 추기경과 찍은 사진은 방에 걸어두고 있지요.”
웃으며 그에게 얘기했다.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다. 5천 2백 원 요금에다가 1천 원을 더 드렸더니 그 는 고맙게 받아 다시 그 1천 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좋은 일 많이 하십시오.” “스님도 좋은 일 많이 하십시오.”
2천원 원이 더 보태진 그 모금함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우리 불교 택시 기사님들은 언제쯤 저런 사랑의 돈통을 놓아 남들을 기쁘게 해주실 것인가!
대부분은 귀찮아서 혹은 쑥스러워서 이처럼 봉사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말로는 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리라. 배품과 나눔은 습관이며 용기이다. 이제는 우리도 `봉사`의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경전을 읽었어도 실천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은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란 남에게 베푸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리 배움이 많은 사람이라도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남의 소만 세고 있는 게으른 사람과 다름없는 것이다. 불교는 실천하는 종교이다. 작은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이야말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의 길임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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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신라 말기의 반란 : 궁예의 반란 등 호족들의 신국가 건설 투쟁
신라 말의 정치 동향 : 고려 건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내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애꾸눈의 폭군.
이 말은 '궁예'라는 역사적 인물을 대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이다. 이합집산의 혼란한 후삼국 시대에 여러 호족들을 평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궁예는 어쩌면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폭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관한 평가를 단순히 이런 말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즉 당대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토대, 그리고 민중들의 의식 수준과 사회 사상(또는 종교 사상)이 어떠한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만일 궁예가 일반적인 선입견대로 단순한 폭군으로만 살았다면 그가 어떻게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궁예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한 가지 잣대만을 사용한다면 온당한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궁예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 말기의 정치 현상부터 진단해보아야 한다.(여기서는 '통일신라'라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뒤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필자는 신라가 3국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말 호족 세력인 김헌창과 동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등을 먼저 살펴본다면 궁예의 반란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난 고대국가는 원래 여러 호족 세력들의 연합체였다. 그 연합체가 왕을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 사회를 이루면서 대토지 소유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계급 분화 현상은 신라 말기에 와서 극대화되었다.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인 9세기의 신라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뒤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집안 역시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권세가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자연경제의 핵인 토지를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중소 토지소유자와 소농민들의 토지를 싼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자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따라서호족들이 사병을 키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른바 대농장이 형성되어 대부분의 농민(또한 당시 인구의 거의가 농민이었다.)들이 소작농이나 심할 경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자연히 생계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걸식 생활을 하거나 유랑인들끼리 모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의 집중으로 정전제가 무너진 가운데 과다한 조세와 공납, 부역 등으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이러한 토지 집중화 현상은 약화된 신라 왕권 내의 정치적 암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8세기를 전후로 신라 왕실에서는 서로 다른 핏줄을 타고난 왕자를 중심으로 호족들간에 권력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즉 최고 권력인 왕위 계승 싸움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8세기 중엽 이후인 혜공왕 때에는 '대공의 난'을 발단으로 하여 96각간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 다툼도 치열해졌으나 선덕왕이 즉위함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흔히 선덕왕 때부터를 신라 하대라고 부른다. 선덕왕은 중앙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신라 하대의 정권은 귀족간의 연립 정부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불씨가 되어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정권 쟁탈전에 휘말리게 된다. 통계적으로만 봐도 하대 150년 동안 스무 번이 넘게 왕이 교체되었고,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암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9세기에 들어 왕위 쟁탈전은 더욱 심화되어 싸움의 규모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김헌창의 반란(822년)이다.
김헌창의 반란 : 지방 호족들의 봉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은 자기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고 하고 건원하여 경운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광주), 완산(전주), 사벌(상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중략) 김헌창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김헌창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 싸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 사이의 왕권 다툼이라는 평가가 내려져 있는 이 반란은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의 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신라 말기에 있었던 여러 반란 사건 가운데 당시의 정치 동향을 해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일개 귀족이 국가를 세울 정도로 신라 말기의 정치 분화 현상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김헌창의 반란 후 견훤의 후백제, 궁에의 후고구려 건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어 측근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려 하였지만 김경신(후에 원성왕이 됨)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는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김헌창은 반대 계파가 왕위에 있을 때에도 중앙 관직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당시의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세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원성왕 계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주변으로 밀려난 김헌창은 자기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김경신의 정변으로 부당하게 왕권을 빼앗겼다고 본 김헌창은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가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지역에 이미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할 점은 이 지역이 옛백제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신라 정부는 옛백제 땅에 살고 있는 호족들의 불만을 무마할 만한 정통성이나 견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헌창은 잘 훈련된 중앙 군대를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왕위 쟁탈전에 초점을 두었던 반란이었기에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그를 위해 적극적인 싸움에 나설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했던 것이다. 이것이 뒤에 일어난 견훤이나 궁예의 난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위한 정치적 구호마저 역사 자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 호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더욱 불만을 갖게 되어 신라는 구심점을 점차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반란 사건을 볼 때 신라 말의 왕실은 민중들의 삶은 도외시한 채 계열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자체도 큰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니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라 정부의 정통성부터 의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지방 세력 가운데 중앙 왕권을 대신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나올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장보고의 반란 : 해상 무역의 중심지, 청해진
장보고는 사실상 신라 중앙정부를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국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그의 일생과 당시 정치 상황을 연관시켜 검토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사망 연도는 846년(문성왕 8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호족이며 대상인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부패한 왕실의 무능력함에 혐오감을 느낀 민중들은 장보고의 민족적이고 대국적인 활동에 동조하여 스스로 민병이 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서 그 뜻은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적 출신 성분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자료를 검토해볼 때 일반 평민 출신이거나 또는 천민일 수도 있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 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고 왕의 승인을 받아 청해진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봐서는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모두가 추정일 뿐이다. 어쨌든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활동할 때 만난 대성 장씨를 따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어려서부터 무예에 재능을 나타내었고 바닷가에서 태어난 탓에 물에 매우 익숙하였던 것 같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풍운의 뜻을 품고 잠수에 명수라고 알려져 있는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장보고는 온갖 난관을 헤쳐나가며 생활하다가 서주에 있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무술 장교가 되었다. 당과 신라는 교류가 잦아 신라인이 당나라 군사가 되는 일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군 생활에 복무하면서 여러 가지를 눈여겨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당나라 군대의 특성과 조직 체제 등을 관심있게 관찰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지에 절도사가 할거하고 있었기에 지방에 따라 군대의 특성이 조금씩 달랐다.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 군벌의 속성과 군대 양성 방법 등의 이론적인 것이나 갖가지 병법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을 통하여 몸에 익히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 등주에 이르는 지역에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라방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8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신라와 당 사이의 국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보고도 쉽게 당나라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도심에 거주하는 신라인들도 생겨나 자치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구역을 신라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구역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권리나 생활을 밑받침해주는 정치적 구실도 하였다. 신라방의 구성을 보면, 총책임자를 총관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전지관이라는 직책이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어에 능통하여 신라인과 당인간의 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에 시골에 자리잡은 경우에는 촌락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기관인 구당신라소를 세워 일정 지역 내에 있는 신라인들을 다스렸다. 그렇다고 당나라 지방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신라인들의 자치 지역은 보통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꾸려나갔다. 특히 도심에 설치된 신라방의 사람들은 상업, 운송업, 조선업, 무역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특별히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 소주, 명주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을 넓힘은 물론이고 중국과 신라, 일본 등 동아시아를 오가면서 국제 무역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해안 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 역시 번창하고 있는 해상 무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국외 신라인들의 활동은 활발한 반면 당나라는 물론이고 신라도 중앙 집권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거의 매년마다 흉년과 기근 등 자연 재해에 시달려 유랑민들이 많아졌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적이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였다. 바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해적은 신라 해안에 자주 나타나 주민들을 마구 잡아가 중국의 중원지방에 노예로 팔았다. 무역선 역시 언제나 해적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장보고는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극심한 현실에 분노하였다. 장보고는 여러 조사 끝에 중국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국제 무역에 대한 지식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장보고는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고,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정치적 배경은 물론 신라 왕실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장보고는 마침내 828년(흥덕왕 3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와 동지나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장보고의 말을 듣고 실행할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진골귀족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선덕왕 이후 귀족연립 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앙정부로서는 완도까지 적극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뿐이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왕의 승인을 받아낸 장보고는 완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방민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당시 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은 6두품 이상이어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장보고가 어느 정도 왕실과 관련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보고의 민병대는 얼마 안 가 1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장보고는 이에 자신감을 갖고 완도에 '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을 지닌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사실 진을 설치한 것은 장보고가 처음은 아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의 진만 보아도 658년(태종무열왕 5년) 북진,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 등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은 앞서 세운 다른 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주체도 상이하였다. 그래서 청해진은 설치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 형성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신라의 군사력은 매우 미약해서 실제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왕의 사병과 같은 위치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이나 호족들은 저마다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중앙 군대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도 신라 관직체계에서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본격적으로 해적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때로는 회유를 통하여 해적 세력을 와해시켰다. 장보고는 이러한 눈부신 활동으로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장보고의 해적 소탕 이후 신라인들은 해적들의피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평정하여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신라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 초기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귀족들이 여러 호사품을 찾게 된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신라 등지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이 오가는 중에 사무역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공도 무역의 하나로 편입될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에는 753년 외교 단절 이후 교역 물품이 희귀해져 반대급부적으로 두 나라간에 사무역이 더욱 성행하였다. 또한 발해가 북쪽에 안정된 국가를 세워 서해 북쪽 연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동해 북부 연안까지 자유스러운 해상 유통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점차 해상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일본과 거래할 때 신라 무역상들이 수출했던 물품 내용을 보면, 구리거울 등 금속제품과 모직물 등의 신라산 물품은 물론이고 향료, 염료, 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개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특산품 등이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과 비단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통일기 전에는 주로 특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기 이후에 접어들어서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 등 고가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귀족들이 애용하였던 향료 등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상인의 중개무역으로 수입된 것이었으니 이를 통해 사무역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장보고 역시 해적을 평정한 뒤에는 직접 무역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다룬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 문방구류들을 취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을 통해 재력도 갖추게 되어 당시 신라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던 것은 이러한 물질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으로 자리잡은 장보고는 840년(문성왕 2년)에 이르러서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이 거부 반응을 보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양국간의 사무역은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에 대해서는 견당매물사라는 외교관의 책임 아래 교관선을 보내어 청해진이 교역의 중심지임을 홍보하는 한편 물품 내용 등 여러 무역 실무를 체계화시켜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라고 불렀던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를 통하여 장보고는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국제 무역을 관장한다는 것을 주변 국가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방관과 엔닌이라는 승려가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안정 보장을 요청했던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장보고의 해상 교통로가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점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세력을 안정시킨 장보고는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모든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었고, 연간 5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장전도 갖게 되었다.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하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은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청해진에 필요한 사람을 쓸 때에는 당시 관직의 절대 기준인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스스로 자기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또다른 배경에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던 농민 등을 받아들인 데에 있다. 자연 재해 등으로 민중들은 기본적인 터전마저 잃어버리고 사방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가령 예를 들자면,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유민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강 지역까지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할 정도였으며 이 무렵 일본에도 수백 명이 건너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대거 이동은 사회 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극히 약화되어 흉년 등 자연 재해가 닥쳐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황폐한 고향을 떠난 빈민들은 새 터전을 찾아 외국이나 바다로 무작정 떠났다.따라서 빈민들의 눈에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적절한 피난처로 보였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렇게 찾아온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기 위해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조직화함으로써 그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이제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당시 가장 큰 지방 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 관여하게 되었다. 중앙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성덕왕 때부터이다. 성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앙의 왕위 쟁탈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보고도 이 싸움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때가 흥덕왕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도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년, 즉위 후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어느 날, 경주에서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왕족으로서 뒤에 신무왕이 된다.) 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청해진으로 피난해왔다. 왕족이 청해진을 피난처로 삼을 정도로 이미 장보고는 중앙정부와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2년 뒤인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김우징은 날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였다. 장보고는 사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18년 동안 지켜온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가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다. 그러나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구국의 차원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다그쳤다. 김우징은 2년간 청해진에서 지내면서 장보고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가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자기의 정치적 야심에 이용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동안 정치에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던 장보고이지만 신라 왕실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청해진에서는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김우징이 제시한 '구국적 결단'이라는 명분에 걸려들고 말았다. 장보고는 김우징에게 자기 군대를 내주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청해진을 나와 경주를 공격하였다. 결국 김우징은 반란에 성공하여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다. 비록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경주를 치진 않았지만 사실상 장보고는 자기 군대를 동원시켜 반란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되었다. 정변 이후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높이 사 그를 감의군사로 임명하였다. 이 관직은 신라의 군사권을 총괄하는 고위직이었다. 청해진은 그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해온 정년이 맡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중앙정부에서 정식으로 공직을 맡게 됨으로써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후원자인 신무왕은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문성왕은 장보고의 기세에 눌려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장보고는 직접 중앙정치에 관여하면서 신라 왕실의 정변이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사병들을 갖고 있는 주변 왕족들의 농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군대가 강해야만이 정권이 안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보고는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기 위해 진해장군의 자리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왕족과 귀족들은 장보고를 경계하고 그를 축출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래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일본 등과의 교역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장보고가 군사력을 장악함에 따라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주변 왕족과 귀족들의 정치적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장보고는 군사력만으로는 정변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왕족, 귀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만일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그만큼 약화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대 세력들은 다음과 같이 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부부의 길은 매우 큰 윤리입니다. 예전을 돌아보아도 왕비를 잘못 택하여 나라까지 망한 일이 허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왕비를 택할 수 있겠습니까? 궁복은 원래 섬 사람입니다. 이런 천한 신분의 딸이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장보고와 귀족 사이의 알력은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큰 정변이 일어날 것 같은 삼엄한 분위기가 정치권을 맴돌고 있었다. 반대 세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는 장보고와 정치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장보고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장보고를 직접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대 세력들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투항자로 위장하여 보내 장보고를 안심시킨 뒤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파란만장했던 장보고의 생애가 어처구니 없이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 세력은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다. 장보고가 암살된 뒤에도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의 주도하에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이 때에도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는 등 장보고가 이루어놓은 해상 무역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중앙연합군의 토벌 작전에 휘말려 청해진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가 846년 경의 일이었다. 잔존 세력이 다시 봉기할 것이 두려운 중앙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에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에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장보고가 꿈꾸었던 것은 동지나해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대국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연상선에서 그의 정치 개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장보고가 왜 외척이라는 정치적 전술까지 동원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논할 때 바다를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이순신 장군의 여러 대첩을 중요시 여길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국운을 바로세우려 했던 장보고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결국 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신라는 더욱 부패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장보고는 김우징의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무력 쿠데타에 동조한 결과가 되었으며 뒤에 왕권 안정을 위해 군사권을 장악하여 점진적인 정치 변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의 음모에 말려 장보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변혁은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해진으로 몰려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보면서 신라가 얼마나 썩어 있는가를 직접 체험하였다. 그리고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경제적 수탈 행위도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정치 변혁 시도는 이러한 당대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장보고를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정치적 야심가이며 모반자로 묘사한 {삼국사기}의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비록 장보고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재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삼국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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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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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새 달력을 걸고
12월 중순에 접어드니 나에게도 여기저기서 성탄 카드가 날아오기 시작하고, 거리에 나가면 선물 꾸러미를 들고 바삐 걷는 행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뛴다. 아침부터 가볍게 눈발이 흩날리고 제법 추웠던 오늘, 우리는 관습대로 성탄 맞이 대청소를 했다. 회색 또는 푸른색 작업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유리창을 닦거나 걸레질을 하는 이들의 모습은 모두 밝고 활기가 보였다.
공동작업을 마치고 나의 방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도, 방바닥에도 책과 노트며 편지들이 마구 무질서하게 널러져 있었다. 마침 볼일이 있어 내 방에 들어왔던 어린 수녀에게 방이 지저분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어때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냄새가 나서 좋은데요" 하며 웃었다. 나는 남보다 유달리 깔끔한 편은 못되지만 그래도 내 주변의 것들은 꽤 정리해 가며 사는 편이다. 혼자 쓰는 방안에서의 극히 단순한 '살림살이' 조차도 바쁜 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면 이내 지저분하게 되곤 한다. 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미처 정리 못한 것들을 찾아서 정리하고, 평소에 챙기지 못한 인사를 카드나 연화장에 담아 보내기도 할 것이다. 연말이 가까우니 나도 괜시리 마음이 바빠져서 며칠 전엔 그 동안 벼르기만 하고 못했던 수첩정리도 해두었다.
오늘 방 정리를 하다가 읽었던 <수피의 가르침>이란 책 안에 이런 얘기가 있다.
무척 영리하고 속 깊은 한 젊은이가 어떤 공동체에 들어왔는데, 하루는 그는 지도자가 그에게 사원의 쓰레기를 치우라고 명령했으나 밖으로 나간 젊은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튿날 아침에야 나타난 그는 맡은 일을 경시했고, 이기적이며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비난과 꾸지람을 면할 수 없었다.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은 이제 젊은이가 사원의 쓰레기를 잘 치우리라고 믿었으나 그의 태도는 여전했고, "저는 사원에서 오물은커녕 먼지 하나, 지푸라기 하나 보질 못했어요"라고 오히려 의외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얘기가 그 난해함으로 악명이 높아가자 한 수피(이슬람교의 명상가 혹은 신비가를 일컬음)는 훗날 이렇게 한마디했다고 한다. '피상적인 사람들이여, 그 젊은이는 다른 사람들의 표면적인 정화만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바로 자기 자신을 사원의 쓰레기, 지푸라기, 먼지로 생각했던 거지요.'
위의 이야기는 자칫 자아도취나 형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준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소홀히 할 대가 많은가? 보다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더 마음을 쓰고,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들에 더 마음을 빼앗기며 시간을 보내는 적이 많지 않은지 반성해 볼일이다.
그러고 보니 눈에 보이는 나의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 못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방을 깨끗이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내 안에 가득 찬 미움과 불평과 오만의 먼지,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 양보와 인내와 관용을 심어야겠다. 내 방의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 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지혜를 구하면서....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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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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