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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15 호
단기 4341. 10. 23 (음력 9. 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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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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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아이작가 단편 로맨스소설 공모전
(2008.10. 06 ~ 2009. 01. 15)
매번 새로운 기획과 주제로 갖은 장르의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숨은 진주를 발굴해 온 대한민국 대표 문학창작 사이트 '아이작가(www.ijakga.com)'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 제1회 [아이작가 단편 로맨스소설 공모]를 실시합니다.
그 동안 아이작가에서는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가장 재미있는 소설 공모], 성인 독자를 위한 [S문학작품 공모], 국내 최초로 시도한 [아이작가 중단편 무협/판타지 소설 공모] 등 다양한 공모전을 실시하여 왔으며, 이번에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 담긴 [아이작가 단편로맨스소설 공모]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작가 단편 로맨스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들은 단편집으로 묶어 전자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며, 작품의 전반적인 수준이 보통 이상인 경우 종이책으로도 출간할 예정입니다.
작품의 주제와 소재에는 제한이 없으며, 사랑이라는 큰 틀의 주제 안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첫사랑', '첫경험', '불륜', '삼각관계', '유혹', '우연', '재회', '타이밍', '신데렐라 콤플렉스', '캔디'등의 다소 식상하게 느껴지는 로맨스 소재를 얼마나 짜임새 있고 신선하게 표현하는가가 당선의 관건입니다.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얼만큼 애틋하고 절절한가, 사건과 에피소드가 얼마나 독특하고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집필하여 주십시오.
(*공모시 주의사항 연재로그에 글을 공모한 후 완결이 되면 [관리]-[연재작품관리]-[정보변경]-[완결설정]에서 필히 [완결] 표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완결]표시가 되어 있지 않을시 작품 심사에서 제외되거나 누락 될 수 있습니다)
1. 모집 부분: 단편 로맨스소설
2. 작품 분량: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3. 응모 기간: 2008년 10월 6일 ~ 2009년 1월 15일
4. 응모 방법: 아이작가 공모전 게시판 (글로그 연재)
5. 응모 자격: 제한 없음 (다작 응모 가능. 단, 1인 1작품 선정 원칙)
6. 발 표: 2009년 2월 초
7. 상 금: 최우수작 1편 1백만 원, 우수작 다수 각 10만 원 (전자책 및 종이책 출간 시 책의 판매 인세가 상금보다 많을 경우 상금 액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세를 지급함)
감성과 재능을 겸비한 역량있는 예비 작가님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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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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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하는 자는 운명을 믿고, 변덕 부리는 자는 요행을 믿는다.(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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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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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언어예절
‘어떻게 해서든지, 어떻게든’처럼 ‘어떻게’가 목적 제일주의를 부추기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말의 속성에 걸맞게 모호하게 쓰일 때가 적잖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어떻게 사니?” “어떡해요?” “당신 생각은 어때?”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만 용서하여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자기 의견을 먼저 말하고 상대의 견해를 물을 때 흔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한다. 여기서 ‘어떻게’보다는 ‘어떻다고’가 정확하겠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까닭이다. 생략된 것을 갖추면 “(당신은 이것을) 어떻다고 생각하느냐”가 된다.
집이나 일터로 찾아온 사람을 두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다. 수단·방법·과정, 곧 ‘무엇을 타고 오셨습니까?’, ‘걸어서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말인데도 사람들은 보통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왜 오셨습니까?’로 알아듣는다. 용무를 바로 묻는 게 야박해 흐릿하게 에두르는 말하기로 풀이한다.
‘어떻다, 어떻게’는 불분명한 대상이나 행위를 들추어 의문문을 만든다. ‘어찌하다’는 의문동사인데, ‘어찌하여’보다는 ‘어떻게 하여’로 자릿수를 하나 더 늘린 표현을 많이 쓸 정도다. 이런 관용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이 재미있기는 하나 소통 과정에서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다른 외국어로 뒤칠 때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안성마춤
안성은 예부터 놋그릇(鍮器·유기)으로 유명하다. 이 놋그릇을 주문자의 마음에 꼭 들게 잘 만들어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원래는 '안성마춤'이었으나 1989년 맞춤법이 개정되면서 '안성맞춤'으로 바뀌었다.
'마추다'(주문하다), '맞추다'(맞게 하다)를 '맞추다'로 통일함으로써 '안성마춤'도 '안성맞춤'이 됐다. 그러나 안성에서 '안성맞춤'을 '안성마춤'으로 쓰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안성마춤'쇠고기가 축산물 브랜드 경진대회에서 대상에 올랐다고 '안성마춤'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신문에 실렸다. 안성의 특산물인 포도·배·인삼·쌀에도 '안성마춤'이란 상표가 붙어 있다. 이 같은 일은 안성시가 안성의 5대 특산물을 '안성마춤'이란 상표로 등록해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안성맞춤'이 일반명사여서 등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혹 표기법과 달라야 인지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폐해는 엄청나다. 모메존(몸에 좋은)·누네띠네(눈에 띄네)·으뜨미야(으뜸이야) 등 우리말 상표가 그렇고, 푸르덴셜(프루덴셜)·썬마이크로시스템즈(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외래어 상호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표기를 상표나 상호에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이 시급하다. 굳이 우리말 파괴를 얘기할 것도 없다. 우리 아이들이 '안성마춤'이라는 상표를 보고 '안성맞춤'에 대한 시험 문제를 틀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띄어쓰기
한글 맞춤법에서 띄어쓰기에 관한 기본 원칙은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쓴다'이다. 이때의 '단어'란 '분리해 자립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나 이에 준하는 말, 또는 그 말의 뒤에 붙여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말'을 일컫는다. '철수가 영희의 일기를 읽은 것 같다'에서 '철수, 영희, 일기, 읽은, 같다'와 조사 '가, 의, 를', 의존명사 '것' 따위를 말한다. 접사와 어미는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쓰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 조항으로 첫째, 조사는 단어지만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쓴다. 둘째,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나 숫자와 어울려 쓰이는 단위명사(삼학년, 제1실습실)는 붙인다. 셋째, 둘 이상의 단어가 결합해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것과 단음절로 된 단어가 연이어 나타날 때(좀더 큰것, 그때 그곳)는 붙여 쓴다.
새 맞춤법에선 보조용언은 띄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붙여 쓰는 것도 허용한다.단 앞말에 조사가 붙거나 앞말이 합성동사인 경우, 중간에 조사가 들어갈 때(책을 읽어도 보고)는 띄어 쓴다.
이렇듯 원칙은 복잡하지 않은데 사람들은 띄어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단어의 품사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말에는 표기는 같은데 품사가 다른 것이 꽤 많다(조사와 의존명사, 어미· 접사와 의존명사, 관형사와 접사의 구분 등). 그렇기에 같은 글자라도 어떨 때는 띄어 쓰고, 어떨 땐 붙여 쓴다. 다음 회부터 일반적으로 자주 틀리는 '만, 지, 데' 등의 띄어쓰기를 살펴보겠다.
띄어쓰기 - "만"
우리 언어생활에서 자주 보이는 '만'이란 글자는 띄어쓰기와 관련해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한다. 앞말에 붙기도 하고, 조사나 접미사와 함께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하며, '하다' 앞에 붙기도 한다. 쓰임에 따라 품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띄어쓰기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 쓰임을 살펴보자.
'만'이 어떤 대상을 한정(공부만 하다)하거나, 다른 대상과 비교(집채만 한 호랑이)하는 뜻을 가질 경우에는 조사이므로 앞말에 붙여 써야 한다. 그러나 주로 '만에, 만이다, 만이야' 꼴로 쓰여 경과한 시간을 나타내거나(친구가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떠났다), 앞말이 뜻하는 동작이나 행동에 타당한 이유가 있음을 나타내는 경우(그가 화를 낼 만도 하다), 또는 앞말이 뜻하는 동작이나 행동이 가능함을 나타낼 때(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할 만은 하다)는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쓴다.
동사 뒤에서 관형사형 어미 '-(으)ㄹ'뒤에 쓰여 어떤 대상이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할 타당한 이유를 가질 정도로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는 경우(이 음식은 정말 먹을 만하다), 또는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함을 나타내는 경우(내겐 그를 저지할 만한 힘이 없다)는 '만하다'라는 보조용언이 되므로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나 붙여 쓰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참고로 '오래간만'이나 그 준말인 '오랜만'은 명사로 한 단어(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났다)이므로 붙여 쓴다. '만'이 '마는'의 준말로 쓰일 경우(먹고는 싶다만 돈이 없다)도 조사이므로 붙여 쓴다.
띄어스기 - "지"
'이것이 열매인지 꽃인지 알겠니?' '그 모임에 갈지 안 갈지 아직 모르겠다.'에 나오는 '지'는 '-ㄴ(은,는)지' '-ㄹ(을)지'의 형태로 쓰인 어미이므로 앞말에 붙여 쓴다.
그러나 '여기에 온 지 두 시간이 넘었다'에서처럼 '시간의 경과'를 나타낼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이처럼 '지'의 띄어쓰기는 '어떤 일이 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동안'을 나타낼 때만 띄어 쓰고 그 외에는 붙이면 된다. 그래도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해 다른 구별법을 알아보자.
비슷한 형태의 다른 말(-ㄴ지→-ㄴ가, -ㄹ지→-ㄹ까)을 붙여서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그가 제시간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를 예로 들어 보면 '-는지' 대신 '-는가'를 붙여서 말이 되면 붙여 쓰고, 그렇지 않으면 띄어 쓴다. '도착했는가'를 '도착했는 가'로 띄어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비슷한 형태인 '도착했는지'도 '도착했는 지'로 띄어 쓰지 말고 붙여 쓰면 된다.
반면 '집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에서는 '-ㄴ지'를 '-ㄴ가'로 바꾸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때의 '지'는 '-ㄴ가'와는 성격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붙여 쓰는 '-ㄴ가'와는 다르게 띄어 쓰면 된다.
'그가 도착할지 모르겠다'에서 '-ㄹ지'의 경우도 '-ㄹ지' 대신 '-ㄹ까'를 붙여 보면 '그가 도착할까 모르겠다'로 말이 된다. 이 경우의 '-ㄹ지'는 항상 붙여 쓰는 '-ㄹ까'와 성격이 같은 것이므로 붙여 쓰면 된다.
띄어스기 - "데"
문장 중에 '데'가 들어가게 되면 띄어 써야 할지, 붙여 써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우선 '데'가 어미인지, 의존명사인지 판단해야 한다. 어미이면 붙여 쓰고, 의존명사이면 띄어 쓴다. '학교에 가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에서 '-ㄴ데'는 어미이고, '이 일을 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에서 '데'는 의존명사다. '데'가 '곳이나 장소'(올 데 갈 데 없다), '일이나 것'(사람을 돕는 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경우'(머리 아픈 데 먹는 약)의 뜻을 나타낼 때는 의존명사다.
반면 '-ㄴ데, -는데, -은데, -던데' 형태로 쓰여 '상황을 미리 말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뜻(날씨가 추운데 외투를 입고 나가거라/너 고향에 자주 가던데 집에 무슨 일 있니)일 때는 연결어미이고, '어떤 일에 대한 청자(聽者)의 반응을 기다린다'는 뜻일 때(어머님이 정말 미인이신데)는 종결어미다.
그런데 의존명사와 연결어미가 똑같이 '-ㄴ데'형태일 때는 겉으로 볼 때 비슷해 웬만한 문법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ㄴ데'와 '-는 데'의 띄어쓰기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뒤에 '에'를 비롯한 조사가 결합할 수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에'가 결합할 수 있으면 띄어 쓰고, 결합할 수 없으면 붙여 쓴다. '학교에 가는데(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는 '에'가 결합할 수 없으므로 붙여 쓰고, '이 일을 하는 데(에) 며칠이 걸렸다'는 '에'가 결합할 수 있으므로 띄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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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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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불만족 - 오토다게 히로타다
1. 행복한 아이 - 유아기, 초등학교 시절
오토의 룰
손은 무엇에 쓰이는가
반 아이들이 나를 도와주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외톨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일일이 신경써 주지않아도 나혼자 모든것을 잘해 나갈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드디어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반의 한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학년의 국어교과서에 ‘손의 작용’에 대해 공부하는 대목이 있다. 문자그대로 ‘손’은 어떨때 쓰이는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등을 공부하는 단원이다. 손이 없는 아이를 맡고있는 선생님으로서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단원이다. 교과서 진도가 그 어름까지 갔을때 다른반의 선생님들까지도 ‘다카기 선생님,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라며 걱정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단원을 건너뛸 생각은 없어요” 나중에 선생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항상 함께 생활하다보니 네가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라는 사실을 차츰 의식하지 않게 되었던것 같아. 그저 내가 맡고 있는 서른 여덟명 가운데 한 아이로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만일 그때 우리반 아이들이나 내가 너를 장애이라는 생각으로 대했다면 아마도 그 단원을 공부하기는 좀 어려웠을 거야”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손의 작용’이라는 제목을 칠판에 쓴뒤 아이들에게 ‘오늘 손을 사용하여 어떤일을 하였는가?’를 공책에 쓰도록 했다. 모두들 ‘이를 닦았다’ ‘글씨를 썼다’는 등의 내용을 적었지만 난 ‘휠체어에 올라갔다’라고 썼다. 휠체어란 앉는 것이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동작에 손의 도움은 필요없다. 그러나 나는 휠체어에 앉기위해 기어올라야만 한다. 손에 힘을 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놀려대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오토는 휠체어에 앉을때 손을 사용해’라고 모두들 당연한 일로 여겨 주었다. 어쩌면 선생님은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물어뜯기
유치원에서 반장도 하고 골목대장도 하던 나였다. 그래서 인지 콧대가 세서 친구들과 싸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는 전매특허인 입씨름으로 끝났지만 때로는 인정사정 없이 한판 붙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네가 잘못했잖아. 사과해!” “무슨말을 하는 거야. 네 잘못이야 너야말로 사과하지 못하겠어?” ‘뭐라고? 억울하면 여기까지 와봐“ 상대는 내사정거리 밖에 있는 책상위에 서서 나의 성질을 돋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단숨에 뛰쳐들어가 몸을 부딪쳐 책상을 뒤집어 엎는다. 그러고서 굴러떨어진 녀석에게 다시금 육탄공격을 해댄다. ”너 정말 이럴래? 무슨짓이야?“ 녀석 또한 내게 덮쳐온다. 연거푸 주먹을 내 뻗지만 허리아래에 있는 내게 펀치는 미치질 못한다. 이번에는 녀석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이쯤대면 나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어떻게든 이기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도 반격에 나선다. 녀석이 내지른 발을 붙잡고는 죽기살기로 물어뜯는 것이다.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물고는 절대로 놓지 않는다. ”으아악!“ 드디어 녀석이 비명을 지른다. 정말 힘껏 물고 늘어졌다. 모든것을 손 대신 입으로 처리해 오면서 내 턱은 다른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발달 해 잇었다. 이빨에서 놓여난 녀석의 발에는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정말로 아팠을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싸움이란 상대가 강한지 약한지 따져 볼 겨를이 없다. 서로 화가 나면 그냥 한판 붙는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아이들의 싸움. 그래서 오토 소년은 오늘도 이빨을 간다.!?
같이놀자
나같은 장애인에게 학교생활에서 가장 괴로운때가 언제냐고 물어오면 대부분 ‘쉬는시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웬만한 공부벌레가 아닌 이상 아이들은 쉬는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장애아는 다르다. 수업시간에야 45분이나 50분은 금방 지나간다. 그렇지만 쉬는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고 있을때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 외롭다. 쉬는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내경우는 달랐다. 싫기는커녕 다른아이들처럼 쉬는시간이 제일 좋았다. 이런나를 보고 ‘대체 뭘하고 놀았기에 그렇게 쉬는시간이 재미있고 좋았을까?’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했던 놀이는 야구, 축구, 피구등 보통아이들과 다를것이 없었다. 이런 몸으로 야구나 축구를 어떻게 할수있냐며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아이들처럼 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포기할 내가 아니다. 나도 참가할수 있는 ‘특별한 룰’이 있으면 되니까. 우리반 친구들은 그것을 ‘오토의 룰’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것은 야구다. 배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빙 돌린다. 투수가 던진 볼을 때릴때도 있다. 이것은 ‘오토의 룰’중에서 스윙에 해당한다. 볼을 치는 순간 내옆에 서있던 친구는 1루를 향해 대신 뛰어간다. 이런 룰도 있다. 투수가 던진 볼을 풀스윙한다. 회심의 일격인 셈이다. 볼은 기세좋게 내야 뒤쪽으로 날아간다.나에겐 더할나위 없는 장타인 셈이다. “야 오토! 굉장하다. 이번에 때린건 홈런급인데!” “정말 그래.우리오토에게도 홈런의위치를 정해주자.” “그래 그렇게 하자. 다른 사람은 외야수를 넘기면 홈런이니까. 오토한테는 내야수를 넘기면 홈런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내야와 외야의 경계쯤되는 부분에 선이 하나 더 그려진다. 전국 고교야구 고시엔대회에서의 ‘럭키존’이 아니라 ‘오토존’이 생겨난것이다. 이런 룰은 다른놀이를 할때도 생겨난다. 축구를 할때도 “야 우리 오토가 슛을 성공시키면 한 번에 3점을 주기로 하자.” 3점이라면 축에서는 엄청난 득점이다. 친구 멋진 드리블 솜씨로 상대팀 골문앞까지 공격해 온다. 골키퍼가 앞으로 뛰쳐나온 순간 골문앞에서 기다리던 나에게 패스를 한다. 나는 텅빈 골대안으로 공을 차넣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트트릭(한사람이 한 시합에서 3득점을 올리는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정말 엉터리같은 룰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바로 피구. 친구들은 ‘오토한테 공이넘어가면 상대팀의 몇명은 오토의 반경 3미터 이내에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고’ 정했던 것이다. 그정도의 거리라면 나도 어느정도 위력있는 공을 던져서 다른아이들과 비슷한 확률로 상대를 맞힐수 잇다. 또 내야에 서면 공을 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항상 외야에 뛰었다. 공에 맞았을때는 나 대신 다른 애가 내야로 들어간다는 룰도 정해졌다. 그때 친구들은 ‘저애는 장애아라서 불쌍하니까 같이 놀아주자’는 생각으로 이런 룰을 만들었던것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중의 하나로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햇다. 나또한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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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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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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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3부 나라를 열다
4. 기자조선은 실재했는가
단군에 이어
우리는 앞에서 단군신화의 역사적인 의미를 확인했다. 우리 역사의 첫 통치자로 단군이 등장하고 첫 국가로 조선이 건국된 과정을 신화를 통해 알아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배자의 출현과 초기 단계의 국가 형성과 계급 분화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 단군신화는 농업을 생산수단으로 삼는 북쪽에서 온 이주집단과 사냥과 어로를 생업으로 삼는 선주민집단이 유대를 맺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단군이 세운 조선이 맹주자리를 확보하고 영역을 계속 넓혀나가 그 이름이 널리 퍼지자 그의 자손들도 단군이라는 신화적, 상징적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계의 조선은 아직 고대국가라기보다는 영역국가로 불리는 것이 온당하다. 조선은 차츰차츰 극력을 키워 이웃 민족이나 나라와 투쟁을 벌이면서 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 단군이나 조선은 민족과 국가의 기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고 또 단군은 나라를 연 할아버지라는 의식이 적어도 삼국시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3세기에 이루어진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 미개한 백성들이 호수와 산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 제각기 나라라고 일컬으며 서로 침범하였도다 ........ 그중에 큰 나라가 어느 것이었던가 먼저 부여와 비류를 가리킬 수 있고 다음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남북의 옥저와 예와 맥이 이어졌다 이 군장들은 누구의 후예인가 묻노니 세계는 모두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도다 ]
여기에서는 혈통과 국가 계승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민족정서의 문제이지, 역사 사실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단군이 선양했다는 가자의 문제는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기자는 서기전 12세기경에 조선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기자의 동래설은 중국 기록에 무수히 나오고 이를 따르는 우리의 기록도 풍부하다. 일단 여기에서 두 가지 기록을 살펴보자.
기자가 조선으로 달아나자 주의 무왕이 기자를 그대로 조선에 봉하였다.(상서)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지만 기자는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사기)
요컨대 천하를 통일한 주의 무왕이 기자를 예우하여 조선에 봉하였으나 기자는 신하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선은 주의 속곡이 아니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기자는 평양으로 와서 교화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후한서에 이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일찍이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기자는 조선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8조금법을 제정하자 그 백성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부인들은 정절을 지켰으며,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다."
기자가 미개한 나라에 농사법도 가르치고 예절도 일러주고 법령도 시행하여 선진 중국 문화의 혜택을 받게 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유학자들이 기자를 받드는 주된 근거였다. 기자는 은나라의 삼인으로 꼽히는 현자였다. 그는 은왕실의 근친으로 포악한 주임금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자 조정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주의 무왕이 은의 주임금을 치고 나라를 차지하자 주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나왔다. 이에 무왕은 현인을 알아보고 예우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앞뒤를 잘 짜맞춘 그럴듯한 미화이다.
기자는 정말 은나라에서 왔을까
기자의 이야기를 역사책에 쓰기 시작한 것은 1천여 년이 지나 한나라 때부터였다. 선진시대에는 기자와 조선을 별개로 보았고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도 없다. 물론 작은 사건이라 빼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한나라가 뒤를 이은 이후 중국에는 중화사상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여파가 기자 문제로도 나타난 것이다. 조선이 끊임없이 중국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독자적으로 주변국가와 무역을 하면서 조공을 거부하자, 이런 식으로 명분을 만들어 자신들의 중화의식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 그때의 기록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였지, 왕으로 삼았다고 하지는 않았다. 결코 왕으로 봉할 수가 없었다. 조선후에 봉하여 조선을 주나라 아랫자리에 두었다. 그 뒤 세습한 기자의 후손을 계속 조선후라고 일컬었다. 봉건제국가였던 주나라에서 제왕은 하나일 뿐이다. 주나라 말기에 춘추시대의 많은 나라들이 주의 천자에게 봉함을 받지 않고 멋대로 공이라는 봉작을 붙였다. 주공의 예에서도 보듯 공은 후의 윗자리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패자들이 너도나도 왕이라고 일컬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조선도 왕이라고 참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조선후는 조선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는 봉작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조선에는 별도의 왕이 있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심지어 후대의 조선왕이었던 비왕이나 준왕에게 기씨 성을 붙여 기록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청동기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조선은 신석기문화에서 초기 청동기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이 중국보다 미개하고 지배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군사력이 보잘것없었다고 할지라도 어디에서 온 줄도 모르는 기자에게 군주자리를 선선히 내주었을까? 그런 국가가 역사상 존재할 수 있을까? 더욱이 기자의 교화에 감복해서 왕위를 내주었다고 보는 것은 더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 당시 논어와 맹자를 읽어 유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닌데 왕위를 내줄 정도로 유교문화를 흠모하고 선진문화에 감복했겠는가? 기자와 그 무리가 강력한 군사로 조선을 쳐서 빼앗았다면 이는 정복전쟁의 단계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근세조선에 들어와 한때 이데올로기 조작의 하나로 국조를 높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에 편승하여 평양과 서울에 국조묘를 세우면서 기자를 윗자리에 놓고 단군을 아랫자리에 두었다. 위패의 위치만이 아니라 종묘에 딸리는 제전을 기자묘에만 두거나 단군묘를 기자묘에 더부살이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는 썩은 유학자 출신의 관료들이 저질러 놓은 짓거리였다. 그러나 세종이나 세조와 같은 군왕들이 이를 차츰 바로잡아 갔다. 기자를 받드는 선비들은 기자가 은나라의 현인이라는 것말고도 8조금법과 정전법을 시행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두었다. 금법은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따위의 세조항이 전해지나 이는 어느 고대국가나 수행했던 율령이다. 평양에 기자가 시행했다는 정전법의 흔적도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때 군량미를 대기 위해 일구었던 둔전이었다거나 고구려에서 구획했던 토지 정리의 흔적이리라는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기자가 은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기씨나 한씨의 조선설을 내세우는 쪽도 있다. 이는 궁색스러운 견강부회이다. 그야말로 멋대로 조작한 기록이나 족보의 애용을 전거로 빌려온 것이다. 또 단군조선은 북경 근방까지 확대된 동북아의 대제국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기자조선이나 그뒤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모두 요동의 서쪽 곧 부경 근방과 요서의 서쪽에 있었다는 중국 본토설을 내세우는 주장도 있다. 이는 더욱 얼토당토않다. 그렇게 되면 모든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성과가 괴리에 빠지고 만다. 이는 고대조선의 대제국을 염두에 둔 민족자존이나 민족정서와 관련되는 견해이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좀더 과학적인 입장에서 기자국의 실재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은은 원래 동이족 계통이라거나 동이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보는 설이다. 이는 주나라가 화하계인 것과 반대되는 중국사의 두 줄기이다. 기자는 은나라가 망하자 은과 밀접한 동이가 있는 동쪽으로 몸을 피했다. 기자의 세력은 점점 주의 압력에 쫓겨 동쪽으로 나왔고 끝내 백이와 숙제의 나라인 고죽국근방으로 쫓겨났다. 고죽국은 요동의 서쪽 난하 언저리에 있었다. 기자는 이곳에서 한동안 더부살이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해갔고 이로 하여 기자조선이 생겨났다는 견해이다. 기자의 이동은 사실로 인정하면서 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설은 부정하는 이중의 논리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서는 기자를 숭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당서에 적혀 있다. 또 다른 설은 산동반도에 있던 기족이 기자의 후손이 라는 것이다. 기자의 후손이 동이족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이곳의 내이나 회이와 동족의식으로 연맹하였다고 본다. 이런 견해는 상당히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역사 속에 때로는 신비 속에
이렇게 초기의 조선은 약 2천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때로는 신비 속에 때로는 미궁 속에 빠져 많은 논란과 의문을 낳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헌자료와 함께 고고학적 성과를 통하여 차츰차츰 그 편린을 찾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영역 문제가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중심지역이 요령에 있었다는 설을 내세워왔다. 곧 송화강 유역과 요동 일대, 그리고 심양 등지의 남만주지방을 포괄하는 영역이 초기 조선의 영토였다는 주장이다. 조선의 수도도 이 일대에 있었으며, 연나라와 각축을 벌였다고 하였다. 대동강가의 평양을 또 다른 지역의 평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강동군에서 단군릉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이후 조선이 처음부터 평양에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남한에서는 주된 근거지가 처음에는 요령지방에 있었는데 연나라와 그뒤의 진한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평양으로 옮겨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문헌기록만이 아니라 비파형동검의 분포 시기, 세형동검의 분포 시기가 이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 요서와 요동의 청동기문화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하나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요서지방은 중원 및 북방계의 청동기문화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요동의 동쪽은 위에서 말한 대로 비파형동검문화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고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요동과 패수의 위치 문제가 늘 논란거리이다. 옛 지명은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경계 문제에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조선의 영역 문제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정리해보자. 첫째, 종래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 이남 지역에서 찾는 견해에 따르면 진한시대의 요동은 현재의 요하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다. 조선 영역을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요동군의 위치는 요하의 동쪽에서 청천강에 이른다. 따라서 이 견해대로라면 당시 요동군의 영역은 요하 동쪽지역이 되며 요동과 요서의 경계가 현재의 요하로 고정된다. 둘재, 연나라 동쪽에 조선요동이 있었다는 전국책의 서술에 따라 조선 땅에 속하는 요동이 있었고, 진한시대에 요동국과 요동군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각 도읍지를 고려하여 요동을 지금의 난하 동쪽에서 찾고 있다. 난하를 예전에는 요수라고 일컬었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최근의 견해에 따르면 연나라 때의 요동군은 요하 중류의 군사기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나라 때 그 범위가 압록강까지 뻗었다. 군현지배가 본격으로 이루어진 것은 한나라 때였다. 그러므로 연나라 장수 진개가 침입하기 이전의 조선 영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대릉하 유역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요동의 서쪽 경계가 요하냐, 난하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게속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기전 330년에서 320년경 조선의 영역은 대동강-압록강-요하-대릉하의 각 하류지역에 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견해는 요하 쪽에 역점을 둔 것이다. 수도를 나타내는 왕검성이나 험독은 중국의 압박에 따라 옮겨간 것이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조선의 영역의 요령지방에서 심양, 평양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초기 단계 지배구조는 연맹체적이 성격으로 각 지역에는 자치적인 여러 정치세력들이 있었다. 그중의 맹주가 군주와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이를 중국의 역사가들은 조선후나 기자후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군장들은 분명 왕노릇을 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도 아니었고 또 중국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서기전 5세기에 들어와 청동기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조선은 강력한 국가로 나아갈 물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농업 생산력을 기초로 하여 통치 수단인 무기가 발달 하였고 여기에 따르는 군사, 형벌, 행정 체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 문헌에 조선후나 가지후가 왕이라고 참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단적인 보기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나타난 칭왕의 분위기가 조선에도 나타났다고 본 것은 그들의 시각일 뿐이다. 왕위는 세습으로 전해졌고, 비왕, 준왕과 같은 왕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조선의 칭왕은 일찍부터 있어온 것이지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을 틈타서 나온 풍조를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군주 아래에는 대부 같은 지배체제도 갖추고 있었다. 일부 중국 것을 모방하기는 했으나 관직명에 고유의 이름을 썼다는 사실은 뒷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직 이름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기자가 가르치고 시행했다는 8조금법은 지금 세 조항만 전해진다. 기자의 동래설이 허구라 할지라도 이 금법까지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이쪽 사정이 전해져서 책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인다. 2.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게 한다. 3.도둑질한 자는 남자이면 도둑 맞은 집의 종놈으로 삼고, 여자면 종년으로 삼는다. 죄를 벗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의 돈을 내야 한다.
첫째 조항에서는 국가의 형벌군이 행사된 사실을 확인할 수있다. 죄인에게 형벌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의 주요 통치행위일 뿐 아니라 경찰력이 뒷받침되어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조항에서는 당시 농업 생산이 경제생활의 기초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곡식이 교환이나 벌금의 중심 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째 조항에 여러 가지 문제가 걸려 있다. 물건을 소유한자는 부자인 경우가 많고 도둑질한자는 가난한 자인 경우가 많다. 물건을 훔쳤을 때 처벌을 가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잡는데 기초가 된다. 그러나 물건을 훔친자를 노비로 삼는 형벌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이렇게 편중된 형벌은 바로 노예 소유자가 있고, 노예 소유자는 지배계급이나 부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세 번째 조항은 부자와 노예 소유자를 옹호하는 법령이다. 이를 볼 때 당시에 노예제가 엄격히 존재했고 사유재산제가 상당히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예 확대의 방법이 전쟁포로 외에 여러 통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수준이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돈으로 벌금을 물린 것은 화페의 사용을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귀족, 평민, 노예의 계급적인 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장군이나 벼슬아치나 지방 호민은 상층부의 귀족세력을 이루면서 특권을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수탈과 노역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들은 생산활동에 동원될 뿐만 아니라 순장의 대상도 되었다.
영역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지배 구조를 확립한 조선은 국가의 기본요소인 군사력을 길렀다. 다양한 청동제 무기를 만들어냈으며, 이어 철제 무기 생산에 주력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칼, 창, 도끼 따위의 많은 무기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때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마구, 거여구가 특히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마구는 말안장이나 고삐, 징으로 구분되며 거여구는 수레바퀴나 장식 따위로 구분된다. 앞에서는 마소를 농사일에 부렸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농사가 아닌 군사용 또는 운수용으로 소나 말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서쪽의 흉노나 중국 민족과 전쟁을 벌이는 단계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필수조건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연나라와 긴 전쟁을 벌였다.
서기전 7세기, 제환공의 패업을 도운 관중은 동쪽의 오랑캐를 회유하여 복종시켰다. 그는 전략가답게 싸우지 않고 제나라나 연나라가 벌인 오랑캐와의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다. 그 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과 연나라의 중간지대에 있던 흉노와 동호족들은 끝내 연나라의 철제 무기 앞에 정복당해 동화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선과 연나라는 서로 이마를 맞대게 되었다. 조선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청동제나 일부 철제 무기를 갖추고 있었고 농업 생산력도 높았다. 더욱이 중원에서는 일곱나라가 일어나 왕을 자칭하고 있었다. 조선은 확장 전략을 세우고 연나라 변방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 해서 두나라 사이에 분쟁이 연이어졌다. 연나라 소왕은 마침내 진개에게 큰 군사를 주어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이 전쟁은 서기전 3세기경에 시작되었으나 자세한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개가 동쪽의 땅 2천여리를 빼앗았다는 기록만 전한다. 연나라는 전국 7웅 중에서도 제나라와 더불어 부자나라였다. 그리고 철제 무기를 사용했다. 조선은 이런 강국과 오래 맞서 싸울 만큼 힘이 있었다. 그 뒤 조선은 중심지를 평양으로 옮겼고, 연을 멸망시킨 진나라는 통일을 이룩하고 요동에 군사기지를 만들어 동쪽을 방어했다. 곧이어 진나라를 멸망시킨 한나라의 유방은 연나라를 부활시키고 요동태수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위만의 장으로 넘긴다.
조선은 예맥의 동일 문화권을 정치적 통일체로 결속시키고, 연과의 계속되는 투쟁을 통해 통합력을 키워나갔다. 청동기문화 말기에 조선은 고대국가로 전환할 통치 조직과 지배 구조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언제나 도전이 있으면 응전했고, 충격이 가해지면 결속했다. 조선은 영역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시련을 겪으며 차츰차츰 성장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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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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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2.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어느날, 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입에 담기 어려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가 부처님께 출가한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차츰 수그러들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대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대는 음식을 대접하는가?” “그렇소.” “만약 손님이 먹지 않으면 누가 먹는가?” “그거 당연히 내가 먹을 수밖에 없지.”
그러자 부처님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오늘 내 앞에서 했던 나쁜 말도 내가 받지 않는다면 다시 그대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바라문은 마음 속에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술과 주정
“순경 아저씨, 택시 좀 잡아 주십시요.”
신내동 부근에서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서 있는데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모범운전자 복장을 경찰로 잘못 오인한 것이다.
“여기에 제 차를 타십시오.”
정중하게 손님을 태운 모범택시 기사 정씨는 손님에게 행선지를 여쭈었다.
“동대문 구청 앞!”
좀전에 오다보니 중랑교까지 차가 밀리는 정체 상태라,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차는 전농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낮에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본 사람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출근 시간이 지난 낮 시간대인데도 곳에 따라선 주차장이 무색할 만큼 차가 밀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전농동 방향도 역시 예상처럼 순조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속 5십 킬로의 속도는 낼 수 있었다.
“빨리 가, 난 지금 급하단 말이야.” “가고 있습니다. 손님.” “아니, 이 차가 왜 이리 더뎌? 최소한 1백 킬로는 달려야잖아?” “고속도로도 아닌 시내에서 그렇게 빨리 다닐 순 없습니다. 1백 킬로는 속도 위반입니다. 지금 앞의 차들도 다 그렇지 안습니까?”
그러자 남자는 주먹으로 기사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면서 빨리빨리 가라 재촉하면서,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난 00구청 토목과장이란 말야!”
하고 목청 높여 외쳐댔다. 토목과장이든 건설과장이든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운전하고 있는 사람 머리가지 때리다니!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경우를 가끔 당하는 정씨는 상대가 술에 취한 손님이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손님 다 왔습니다. 요금은 4천 원 입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아까 차에 탈 때 나가 줬잖아? 5천 원을 냈으니 거스름돈 줘야지.”
이건 완전히 오리발이다. 게다가 거스름돈까지 챙기겠다는 고약한 놀부심보가 아닌가. 아니 당신이 언제 내게 요금을 주었느냐? 줬다, 안 받았다 하는 실랑이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그가 갑자기 문을 열더니 밖으로 튀어나갔다. 술에 취한 사람 따라잡기란 식은 수프 먹는 격. 1백 미터쯤 가서 도망가던 손님을 잡아온 기사는 안 되겠다 싶어 근처 파출소로 가자고 화를 내며 말했다. 아무리 취중에 무법천지라 해도 이 손님은 심하지 않은가. 이번에는 그 남자를 사정없이 택시에 밀어넣고 아예 문을 잠갔다. 이 사람 신분이 사실인지 한번 확인해 봐야 했다. 가는 도중 그는 억센 손으로 기사의 두 눈을 가리면서 주먹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치기까지 했지만 결국 완강하게 버디는 그를 끌고 파출소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서도 미친 개처럼 날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신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는 거야! 나를 몰라. 나를?” 라고 소리지르며 신분 조회를 하려는 순경을 윽박질렀다. 순경의 따귀를 때리고 짐승처럼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 수갑이 채워지고서야 그는 풀이 죽은 채 잠잠해졌다. “나참, 기가 막혀서, 이 사람 00국청에 근무하는 건 사실인가 본데....일일노무자이구만, 근데 당신이 토목과장이라구 속여?“ 조회를 하던 순경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했다. “술 깨면 벌금 지우고 내보내!”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그는 코까지 골면서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먹고 주정하는 것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또 술을 마시고 저지른 실수나 실언이나 횡포에 대한 처벌은 웬만하면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소한 가해를 해도 술 취한 사람에겐 인정상 눈감아 주는, 면책 비슷한 용서가 허락된다. 즉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술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전 기사들은 이처럼 술에 취한 손님을 태울 때가 가장 곤욕스럽다. 마치 옛날 상전이 하인 부리듯 함부로 대하고, 소위 `달구지`나 끄는 네 주제에..., 하는 식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사람,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반말을 하는 건 예사이고, 걸핏하면 동네 북으로 아는지 운전중인 기사의 뒤통수를 때리며 폭력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택시 기사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마저 생기고 서글프기 짝이 없단다. 그래서 기사들 중에는 차라리 빈 차로 갈 망정 술에 만취한 사람은 아에 차에 태우지 않는 이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엄연한 `승차거부`로 법과 자신의 양심에 저촉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돈을 못 벌어도 손님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모 부장 판사의 얘기가 가십난에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늦은 밤 술에 만취한 상태로 택시를 탄 이 부장 판사가 00동 00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아파트에 이르러서도 내릴 생각을 않고 기사에게 저쪽 0동 바로 앞까지 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술이 많이 마신 상태여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 보였고, 또 대단위 아파트 단지인 터라 택시 기사는 손님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그런데 0동 앞에 이르자 그는 또, “여긴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데? 조쪽 동인가 보다. 그리고 가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로 가니 또 아니다. 저쪽 동이다 하고 가리키는 것이 빙글빙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몇 번이나 그 아파트를 도는 해프닝이 계속됐다. 그러자, “야, 왜 집을 제대로 못 찾는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와락 성질을 내던 손님이 `너 감장에 잡아넣어야 겠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느냐.`라고 아랫사람 부리듯 호통까지 치자다 갑자기 기사의 양 볼을 때리는 것이었다. 택시 기사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이 손님의 집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그 근처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파출소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순경에게 오히려 고함과 호통을 치면서 기물을 던지고, 집기를 부수고 말로 할 수 없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신원 조회 결과, 그는 모 지법 꽤 이름 있는 부장 판사임이 밝혀졌다. 결국 그의 부인을 불러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하는 각서 한 장을 쓰게 한 뒤 술 취한 그 부장 판사는 곧 풀려났다.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다. 하나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의 선거에 의해 뽑는 만큼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제아무리 부장 판사라 할지라도 각서 한 장만 받고 사면조치 한 것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어쨌든 그저 웃어넘기기만은 어려운, 술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불가에서는 술을 곡식으로 빚은 차라 하여 `곡차`라고 한다. 술, 하면 우선 경허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경허 스님에게는 술에 관한 일화가 많기 때문이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해인사를 향해 가던 때의 일이다. 경허 스님은 해인사를 가는 길에 노자를 털어 술을 사먹고 갔는데 그만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어느 주막에 들른 경허 스님은 돈도 없이 주모를 꾀어 외상술을 먹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했다. 만공 스님은 그런 경허 스님의 행동이 의아스러웠다.
“스님, 갑자기 종이와 붓은 왜 가져오라 하십니까?” “단청불사 권선을 할까 하네.”
그러더니 절에서 단청부사를 한다는 내용의 권선문을 적어 집집마다 다니며 권선을 하였다. 사람들은 권선문의 문장도 비범하고 경허 스님의 자태도 여느 스님과 다르게 느껴져 조금씩이라도 도참을 했다. 이렇게 하여 전대가 두둑해지자 경허 스님은, “이만하면 단청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라며 만공 스님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주막을 찾아다니며 시주금 받은 돈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에 만공 스님은 놀라서 말렸다.
“스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부처님을 팔아 술을 먹다니요?” “아, 이 사람아, 이보다 더 좋은 단청불사가 도 어디 있겠는가?”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의 얼굴을 보니 겨울 추위 탓으로 취기에 오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경허 스님의 얼굴을 보며 만공 스님은 무릎을 쳤다. “과연 참으로 멋진 단청불사구나.”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계실 때였다. 경허 스님은 아침만 먹으면 어슬렁어슬렁 일주문을 빠져나가 동구 밖 술집들을 순회하시곤 하는 하는 습관이 있었다. 술집마다 경허 스님이 내려오면 막걸리를 철철 넘치게 한 사발씩 주었다. 이를 다 마시고 해가 지면 경허 스님은 비틀대면서 다시 일주문을 넘어오셨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경허 스님이 아무리 취해도 꼭 대적광전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길 젊은 승려 몇 명이 하루는 숨어서 몰래 엿보기로 했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경허 스님이 술냄새를 풍기며 대적광전에 들어섰다. 그런데 법신 비로자나불 정면에 선 경허 스님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빼더니 턱 밑에 세우는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 모른는데도 밤새도록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수행을 하시는 것이었다. 범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히 불가능한, 탈속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대 자유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형식적인 계율이나 어떠한 틀에도 구애됨이 없었기에 거리낄 것이 무애자재하셨던 경허 스님이셨다.
술이란 잘 마시면 약이요, 잘못 마시면 독이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옛 선조들은 술을 담궈두고 익기를 기다려서 지인들을 불러 정담을 나누기도 했고, 밭에서 일을 하다 쉴 때면 늘어진 노송 밑에 앉아 칼칼한 막걸리 한잔으로 피로를 풀기도 했다. 술에 취해, 달빛에 취해 시를 읊다 물 속에 비친 달을 따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태백의 이야기는 차라리 멋스럽고 낭만적이다. 그가 다시 살아와 작금의 이 현실을 본다면 무어라 할지? 자못 궁금해질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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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
"자신의 영적 힘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까?" "많지."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단 하루 동안에 얼마나 자주 마음이 어지럽혀지는가를 알아내어라."
이는 이미 고인이 된 인도의 사제, 안소니 드 멜로가 엮은 이야기 모음집에 나오는 한 예화이다.
수도원에서는 요즘도 잠심이라든가 수렴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렇듯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은 모든 이에게 다 필요하겠지만 특히 수도의 길을 가는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몫이 아닐 수 없다.
왠지 마음이 자주 들뜨고 산만해지기 쉬웠던 나의 20대 초반에 나는 '지금은 내가 너무 젊어서 그렇지만 그래도 마흔 살쯤 넘으면 늘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게 되겠지'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도 20여 년이 지나 어느새 4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는 내 마음을 한결같이 잘 다스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수시로 체험하고 있다.
규율은 엄격했으나 지도수녀님의 세심한 배려와 교육이 늘 보장되어 있던 수련 시절에 비하면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사소한 것쯤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융통성과 자유가 허용된 지금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못해진 듯한 자신을 보는 일이 허다하다. 그야말로 잠심과 수렴이 부족하여 더 깊이 내려가지 못하고 겉도는 기도와 묵상, 건성 듣고 놓쳐버리는 이웃의 말들, 좀더 효율적이지 못한 직무수행, 굼뜨기만 한 사랑의 실천 등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부탁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쓰던 물건을 잃어버려 종종 '정신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 또한 나이에서 비롯된 건망증으로만 탓을 돌리기보다는 딴데 가 있거나 흩어져 있는 내 마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싶다.
내 마음은 달을 닮아 차오르기도 하고 기울기도 해 그리고 해를 닮아 떠오르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내 마음은 파도를 닮아 밀려오기도 하고 밀려가기도 해 그리고 밭을 닮아 씨앗을 키워서 열매 맺기도 하지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을 이렇게 읊어보기도 했지만 참으로 마음이란 하루에도 몇번씩 개었다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가 잔잔해지는 변화무쌍한 날씨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붙들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내가 원하지도 않는 곳으로 마구 줄달음쳐 가 주인인 나를 당황케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며 맑게 다스리고, 곧게 키우는 법을 익혀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TV, 라디오, 사람의 소리 등 외부로부터의 모든 소음을 떠나 나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나는 좀더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체험할 수 있고, 이에 대한 갈망을 새롭힐 수 있으리라. 또한 지금껏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깨달음의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고, 무심히 잊고 있던 감사와 기쁨을 새로이 발견하며 놀라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쁨 속에서도 한가닥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사색과 명상을 게을리하지 않는 생활태도를 길들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일은 제쳐두고 오직 다른 일을 위해서만 숨차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때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가.
'만물의 원리는 모두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마음을 반성하여 성실해지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키우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라고 한 맹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는 내마음을 흐리게 했던 크고 작은 욕심들을 반성해본다.
'내 마음아, 내가 외적인 일에 너무 바빠 너를 좀더 자주 들여다 볼 수 없었음을 용서해.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그것이 욕심이라면 즉시 버릴 수 있도록 나를 좀 도와주어야 해. 알았지?'라고.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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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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