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512 호
단기 4341. 10. 17 (음력 9.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제9회 시흥문학상 전국 공모
*********************************************************
제 1회 낭송문학 신인상 공모>
시청각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눈과 귀로 접하고 느끼게 되는 감동의 진폭은 깊고 넓다. 특히, 소리의 울림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언어' 의힘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상상력의 극대화를 이끌어내며 문자 언어와는 또 다른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운문이나 산문을 낭송한다는 것은 활자화 된 글에 새롭고 창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중 하나이다.
본지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낭송문학을 문학의 한 영역으로 인정하는 부분에 대하여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토론을 거쳐 왔다. 낭송문학을 문학의 한장르로 인정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많은 낭송문학인들이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기존의 활자 문학을 재조명하고 척박하게나마 문학의 새로운 지형을 확보, 개척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때에 낭송문학에 대한 정식 등단 절차를 도입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국내 문예지 최초로 정기적인 <낭송문학 신인상 공모>를 개최하기로 결정하며, 낭송문학을 발전시켜 나아가고자 하는데 뜻을 모았다.
21세기 문학은 수용자 중심의 문학이다. 대중성이 무엇보다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문학의 스펙트럼을 더욱 다양하게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이런시대의 목소리에 힘입어 낭송문학은 머지않아 바로지금, 여기 '오늘의 문학'으로서 자리 매김하게 될 것이다.
▣ 응모요령
• 원고는 수시로 접수합니다.
• 당선작품은 심사와 함께 본지에 발표합니다.
• 당선자는 등단 작가로 대우합니다.
• 예심과 본심을 거쳐, 중견문인으로 구성된 본지 <심사 위원회>에서 최종 심사합니다.
• 응모 작품 겉봉에<신인 문학상 응모작>이라고 명기하고, 간단한 약력과 주소, 전화번호, 사진을 첨부합니다.
•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낭송문학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없이 순수 육성으로 녹음한 낭송작품 5편을 CD나 테이프 또는 음원파일로 제작하여 우편또는 이메일로 접수합니다. 응모작품 시<낭송문학 응모작>이라 명기하고, 간단한 약력과 주소, 전화번호, 사진을 첨부합니다.
•접수된 낭송작품으로 예심 심사 후 본심은 현장 낭송 심사로, 본지 심사위원회로 구성된 영상미디어국에서 응모자의 낭송을 직접 심사합니다.
•당선작품은 본지 영상미디어국에서 제작하여 홈페이지에 공지합니다.
•당선자는 정식 낭송문학인(낭송가)자격증서를 교부합니다.
▣ 보낼곳 : 월간 문학세계 편집부
주소 : 133-020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966-23 금룡빌딩 2F
편집실 : TEL. (02) 2298-7661~4 FAX.(02) 2298-7665
홈페이지 : http://www.moonhaknet.com
e-mail : ing@moonhaknet.com
|
|
글터 → 명언 / 격언
|
-백년을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프랭클린)
|
|
창작도움 , 글터 → 말글
|
강쇠
사람이름
‘가루지기타령’은 옹녀와 변강쇠의 활달한 성 행각을 다룬 판소리로, 영화와 만화의 밑감이 되기도 하였다. 몽골 사람이름에 ‘간토모르’가 있다. 말 그대로 강철, 바로 강쇠다. 몽골말 ‘간’과 우리말 ‘강’이 서로 만나고 있다. ‘강’이 든 이름에 강이·강가히·강고리·강돌이·강마·강만이·강비·강상이·강치가 있다. 강골(强骨↔약골)은 단단하고 굽히지 아니하는 기질을 이르며, 강돌은 강이나 냇가에 있는 호박돌이다. ‘강생이’(강상이)는 고장말로 강아지고, 강치는 몸집이 물개와 비슷한 바다 동물로, 지느러미 모양의 다리를 갖고 있다.
쇠를 만들 때 쇳돌(철광석)과 횟돌(석회석)을 용광로에 넣고 가열하면 쇳돌 찌끼와 횟돌이 엉긴 슬래그는 위로 뜨고 쇳물만 아래로 고인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무쇠(주철)다. 무쇠는 단단하나 탄소가 많아 잘 부러진다. 달군 쇠를 두드려 단련하는 것을 불린다고 한다. 무쇠를 불린 것이 시우쇠(정철)다. 탄소량이 0.035∼1.7%가 되게 불린 것이 강쇠(강철)로, 질기고 녹도 덜 슨다. 탄소의 함량이 매우 적은 ‘무른쇠’(연철)는 ‘뜬쇠’라고도 한다. 사람이름에 ‘무쇠·믈쇠’가 있다. 수철(水鐵)로도 불리는 무쇠는 ‘믈쇠’에서 비롯된 듯하다.
첫가을에 부는 바람이 하필이면 강쇠바람일까? 용광로 같은 여름 끝, 열기에 그을린 강쇠 같은 사내들 사이로 부는 바람인 모양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굴착기, 굴삭기, 레미콘
청계천을 복원하는 대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광교가 45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교뿐 아니라 수표교 등 다른 다리들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같은 공사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게 '굴착기(포클레인)'다. 땅을 파는 기계인 굴착기를 흔히 '굴삭기'로 부르는데 이는 일본의 '대용한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른 표기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한자 획수가 많으면 '상용한자'에서 발음이 같은 것을 찾아 뜻이 좀 다르더라도 획수가 적은 글자를 대용한다. 이를테면 나이를 말할 때 '20歲'를 '20才'로 쓴다. 일본어에선 세(歲)와 재(才)가 [사이]로 똑같이 발음되기 때문이다.
굴착기(掘鑿機)의 '鑿'과 굴삭기(掘削機)의 '削'도 [사쿠]로 발음이 같다. 그래서 복잡한 '鑿' 대신 '削'을 끌어와 '굴삭기'로 쓰는 것이다. 여기서 착(鑿)은 '삽으로 판다'는 뜻이고, 삭(削)은 '칼로 깎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사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또 다른 단어로 '레미콘'이 있다. 레미콘은 굳지 않은 상태로 뒤섞으며 현장으로 배달하는 콘크리트 또는 그런 시설을 한 차를 말한다. 영어로 'ready-mixed-concrete'라 하는데, 이것을 일본인들이 줄여 만든 조어가 '레미콘'이다. 우리말로는 '회반죽, 양회 반죽' 또는 '회 반죽 차, 양회 반죽 차'로 순화해 쓸 수 있다.
환경이든 우리말이든 한번 훼손된 것을 되돌리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갯벌, 개펄
물빛과 하늘색이 짙어지니 철새들도 바쁘다. 황혼을 틈타 길 떠나는 나그네들이 잠시 머무르며 이별의 군무를 펼치는 곳이 있다. 물 빠진 바닷가다. 이런 곳을 '갯벌'과 '개펄' 중 어느 것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궁금증이 일 때가 있다. '개펄'은 갯가의 거무스름하고 미끈한 '흙'을 말하고, '갯벌'은 바다에 접한 넓고 평평한 '땅'을 말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원을 따져보면 '개펄'과 '갯벌'의 첫 글자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즉 강 맨 아래쪽인 하구(河口)와 바다가 만나는 곳을 말한다. '벌'은 넓은 벌판, '펄'은 '벌'이 거센말화한 것이다. 이처럼 어원만으로 본다면 갯벌과 개펄은 다른 점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러나 사전을 찾아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개펄'은 '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이다. 물이 빠지고 난 뒤 바다에 드러나는 미끈미끈하고 질척거리며 검은 빛이 나는 곳으로 간조와 만조의 차가 큰 곳에 발달한다. 이 때문에 동해안보다 서해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여름이면 고운 개흙을 이용해 피부 미용을 위한 갖가지 진흙 마사지 행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갯벌'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모래사장 또는 그 주변의 넓은 땅'으로 개흙이 깔린 부분 외에 바다와 접한, 모래가 깔린 부분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개펄보다 의미가 더 넓다.
손톱깍이, 연필깍이
집에서 많이 쓰는 물건 중에 '손톱깎이' '연필깎이'가 있다. '손톱깎기' '연필깎기'와 발음이 비슷(깎이[까끼], 깎기[깍끼])하다 보니 적을 때는 헷갈린다. '깎이'는 '깎다'라는 동사의 어간에 사람·사물·일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가 붙어 만들어진 것이다. 때밀이·구두닦이·젖먹이·재떨이·옷걸이·목걸이·감옥살이·가슴앓이 등이 이런 것들이다. '-이'는 명사·형용사, 의성어·의태어 등에 붙어 사람·사물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절름발이·애꾸눈이·멍청이·똑똑이·뚱뚱이·딸랑이·짝짝이 등이다.
'손톱깎기' '연필깎기'의 '깎기'는 '깎다'라는 동사에 명사 구실을 하게 만드는 어미 '-기'가 붙은 형태로 단순히 손톱이나 연필을 깎는 행위를 뜻한다. '나 손톱 깎기 싫어' '연필 깎기는 정말 귀찮아' '혼자이기는 해도 외롭지 않다' '사람이 많기도 하다' 등에서처럼 '-기'는 동사·형용사가 문장에서 명사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주부들은 가족들의 두꺼운 옷을 챙기고 김장 담글 채비를 하는 등 겨울 준비에 바쁠 때다. 이처럼 겨울 동안 먹고 입고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옷가지나 양식 등을 통틀어 '겨우살이'라 하고, 그렇게 준비해 다가오는 겨울철을 맞는 일을 '겨울맞이'라 한다. 이때의 '-이'도 위에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
|
|
글터 → 수필
|
오체불만족 - 오토다게 히로타다
1. 행복한 아이 - 유아기, 초등학교 시절
1976년 4월6일, 활짝 피어난 벚꽃 위로 다가선 부드러운 햇살. 정말 따사로운 하루였다.“응애!응애!”불에 데여 놀란 것처럼 울어대며 한 아이가 태어났다. 건강한 사내아이였고 평범한 부부의 평범한 출산이었다. 단 한가지, 그 사내아이에게 팔과 다리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선천성사지절단. 쉽게말해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였다. 출산과정에서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떠들석하게 문제가 되었던 살리드마이드를 잘못 복용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원인은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나는 초 개성적인 모습으로 태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태어 나면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그건 나말고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동화의 주인공 모모타로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정상적인 출산이었다면 감동적인 모자 상봉의 장면이 연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난 산모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될 것을 염려한 병원측에서 ‘황달이 심하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어머니와 나는 한달이 넘도록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해도 어머니는 정말 태평한 분이다. 아무리 황달이 심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식을 한달동안이나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도 ‘아,그래요’라며 그냥 넘어 가다니. 그때까지 아들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본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어머니는 초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모자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이 찿아왔다. 어머니는 그날 병원으로 오는 중에야 비로소 내가 황달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마 팔다리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그냥 몸에 약간의 이상이 있다고 했다. 일단은 직접 만나보게 한 후에 사태를 수습하자는 생각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날 보는 순간 기절할 것을 대비해서 병실 까지 준비해 두었다. 아버지와 병원, 그리고 어머니를 둘러싼 긴장감은 그렇게 높아만 갔다. 그러나, 모자 상봉의 그 순간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어머,귀여운 우리 아기...”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을 염려한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비록 팔과 다리는 없었지만 배 아파 낳은 아들을 비로소 만날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도 더 컸던 것이다. 이렇게 성공적인 모자간의 첫 대면은 곁에서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감동 그 이상으로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받았던 첫 인상의 기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먼 훗날까지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모자간의 첫 대면이라면 그 중요성은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랬다. 어머니가 나를 만나 처음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생후 1개월,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미운 일곱살
어린 나폴레옹
우리 세 식구의 새로운 생활은 에도가와 구 가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이사 온 곳이라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대개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혹시라도 이웃이 알게 될 까봐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달랐다.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아들의 존재를 이웃에게 스스럼없이 알려 주었다. 지금이야 10센티미터 조금 넘게 자란 팔과 다리가 있지만 어렸을 때 나의 팔다리는 정말이지 동글동글한 감자를 연상시켰다. 그런 내 모습이 영락없는 곰인형 처럼 보였는지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비록 인형처럼 예쁘구나가 아니라 곰인형처럼 예쁘구나 라는 좀 색다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내가 문제아가 될 소지는 이미 간난아이 때부터 엿보였다. 무슨 아이가 도대체 잠을 안 자는 것이다.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밤새 목이 터져라 울어제꼈던 모양이다. 하루종일 시달리던 어머니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만하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나는 우유도 다른 아이들의 반 정도 밖에 먹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병원을 찾아다니며 상담까지 하는등 별의별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고생이 지나치면 달관하는 것일까. 그 무렵 우리 부모님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이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개성적이었잖아. 그러니 우유 마시는 양이나 잠자는 시간도 딴 애들과 달리 저만의 개성이 있는것 같아. 우리 이제부터 비교하지 말자구.”흐음, 훌륭하신 판단. 잠도 적게 자고, 우유도 적게 마셨지만, 난 잔병치레 하나하지 않고 쑥쑥 잘 자랐다. 생후 9개월 되던 어느날, 처음으로 말을 시작 했다.옹알이만 하던 내가 갑자기‘아아압바,아아압바,압바,아빠’라고 말문을 연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이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으니 어머니가 무척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래,엄마보다는 아빠라는 발음이 더 쉬웠나 보지, 뭐’라고 생각하셨다나. 그후 나의 수다는 걷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돌을 맞이할 무렵에는 그야말로 왕수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도 그런 내가 대견했는지 네모난 나무조각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난감 세트를 사오셔서 레슨을 해 주셨다. 세탁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 나무조각을 내게 보이면서 “이게 뭐지?” “털털털털”“이건?” “압바 앙교(아빠 안경)” 그럼 이건?“ ”싱뭉(신문)“ 이런식의 레슨은 아버지의 퇴근과 함께 매일 반복 되었다. 우리 어머니라고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느날 신문에서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 것은 뇌의 전두엽(사고와 판단등을 담당하는 부분)을 절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글을 읽고 자극을 받으셨다. 두분은 한마디로 아기 교육에 관한 한 극성아빠, 극성엄마이셨던 것이다.
애 팔다리가 없니?
네살이되자 나는 세타가야 구 요가에 있는 성모 유치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특별히 장애아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유치원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좀 멀었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아예 그 근처로 이사를 했다. 유치원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서 누군가 ‘고향이 어디니?’라고 물으면 난 요가라고 대답하곤 했다. 낯선 동네로의 이사, 과연 여기에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성모유치원의 기본 교육이념은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틀에 박힌 생활은 전혀 없었다. 그저 저마다 일정한 규칙을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저하고 싶은데로 재미있게 노는 것이 전부였다. 단체생활이 부담스러운 나의 경우, 성모유치원의 지도 방침은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곧 친구들도 사귀었다. 내가 친구를 많이 사귈수 있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내게 팔다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또한 아이들의 눈에는 신기하고 부럽기만한 전동휠체어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친구들의 눈에 멋있게만 보였을 전동 휠체어, 그리고 거기에 앉아있는 팔다리가 없는 나. 언제나 내 주위에는 아이들이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짤막한 팔과 다리를 만져보며,‘왜 이러니?왜 이렇게 됐는데?’라며 계속 질문해 온다.‘으응,엄마 뱃속에 있을때 말이야, 병에 걸렸대. 그래서 팔과 다리가 생기지 않은 거래’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으응,그러니’라며 우린 곳 사이좋은 친구가 되곤했다. 지금에야 말이지만 그때 난 정말 힘들었다. 성모유치원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한 명씩 와서 묻는 바람에 답하고 또 답하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매일 같은 질문을 듣고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힘겨웠던 모양이다. 어느날은 집에 돌아오자마자,‘엄마 너무 힘들어’라며 와앙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그무렵 유치원 선생님들도 ‘오토가 힘들어하지 않나요?’라며 걱정해 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선생님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늠름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골목대장
남달리 짧은 팔다리와 전동 휠체어 덕분에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침구들이 많았다.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래서 골목대장 특유의 기질이 그 무렵부터 비죽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생일이 몇달만 빨라도 체격에서 차이가 난다. 4월6일생이기 때문에 또래들 중에서 체격이 제일 컸던 나는 맡아 놓고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휠체어를 굴려가며 아이들과 함께 술래를 잡아야 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한 나는 술래잡기가 제일 싫은 놀이 중의 하나였다. 놀다가 싫증나면 ‘모래밭에서 놀사람 여기 모여라’라고 외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재미있게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모두 내게로 모여들어 전동 휠체어 뒤를 졸졸 따라 온다. 손이 없는 나는 모래놀이를 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성을 만들어라고 명령한다. 만약 다른 아이가 나는 터널을 만들고 싶은데 라고 했다가는 내 말투가 금방 거칠어진다.“오늘은 성을 만들고 놀거야. 싫으면 너 혼자 절루가서 놀아” 이렇게 제멋데로였지만 친구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오토하고만 잘 놀면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지 않는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고 고집쟁이로 변해갔다.
차츰 어머니나 선생님에게까지 생떼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부모님은 나 때문에 무척 마음 고생을 하셨다. 그러나 그 버릇없던 문제는 내가 유치원 반장으로 뽑히면서 서서히 해결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장이 되면서 태도가 수그러들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유치원 학예회때 우리 반의 작품은 ‘꿈동산 유치원’이었다. 그 중 ‘지지’라는 자동차 수리공 역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라는 이름이 할아버지 같다며 싫다고 아무도 그 역을 맡으러하지 않았다. 바로 그 때, 손을 번쩍 들며 하겠다고 나섰던 친구, 나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싱고였다.‘그래?그럼 내가 할께’라던 그친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싱고에게 지기 싫어서 ‘지지’다음으로 인기가 없던 나레이터를 하겠다고 선뜻 나섯다.비록 어린 나이 였지만 싱고 처럼 멋있고 싶은 나름데로의 필사적인 노력 이었다.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어쩌면 이무렵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나레이터는 무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뒤에서 목소리로만 출연하는 것이었다.그런데 내가 맡은 나레이션은 학예회가 끝난 뒤 학부모들로부터 ‘저 아이는 이다음에 아나운서를 시켜도 되겠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원래 튀기 좋아하고 아이들을 많이 몰고 다니던 나로사는 나레이터가 좋은 반응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난 처음으로 세상일은 무대 앞만이 아니라 무대 뒤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의 협력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운 셈이다.
그 학예회를 계기로 개구장이 유치원생은 조금이나마 어른스러워질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누구하고나 사이좋게 지냈다. 유치원을 졸업 할 무렵에는 매일 친구들 집에 놀러가곤 했다. 심술궃은 골목대장을하며 부모속을 썩이던 미운 일곱살 시절은 이렇게 서서히 마감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까탈스러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가는 상상도 하지 못한채.
|
|
|
시터 → 우리나라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 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
|
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3부 나라를 열다
1. 첫 임금 단군
어머니가 곰이라니
우리나라를 처음 열고 첫 임금이 된 이를 단군이라 하여 받들고 있다. 남한에서는 나라를 연 날을 개천철이라 하여 10월 3일을 지정하여 기리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새로 복원하여 모든 인민에게 참배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단군을 나라의 할아버지로 받들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내용을 단락을 지어 살펴보면 이러하다.
첫째,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은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를 내려다보니 태백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였다. 환인은 하느님이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완성자이다. 여기에서 환웅을 서자라고 표현한 것은 맏아들이 아닌 여러 아들들 중 하나를 나타낸 것이다. 환웅이 하늘나라보다 인간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랐으므로 환인은 태백산을 홍익인간할 수 있는 터전으로 정했다.
둘째, 환인은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있는 신단의 나무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불렀다. 그가 바로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목숨, 병, 형벌, 선악 따위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인간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의 표상인 천부인 세 개를 받아 환웅은 직접 부릴 수 있는 부하와 함께 하늘에 기원하고 나서 신령스러운 곳에 신의 도읍지를 열었다. 일단 인간 세사에 내려온 환웅은 환인의 아랫자리인 천왕이 되었다. 자연의 조화와 인간의 여러 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자가 된 것이다.
셋째, 그때에 같은 동굴에 살던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늘 신령스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하고 빌었다. 환웅이 영험한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볕을 보지 않으면 곧바로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먹으며 삼칠일 곧 21일 동안 금기를 지키려 했다. 곰은 잘 지켜 여자의 몸을 얻고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여기에서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정작 사람은 없다. 그리고 쑥과 마늘이 등장하는데 곡식은 나오지 않는다. 참을성 없는 호랑이는 금기를 못 지켜 끝내 짐승 그대로 남았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넷째, 여자의 몸이 된 곰은 혼인할 대상이 없어 늘 신단의 나무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가화하여 곰과 혼인한 뒤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은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지 50년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단군은 신인 천왕과 곰 출신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첫 임금으로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지정하였다. 개국 연대는 중국의 이상적인 제왕이었던 요임금과 같은 시대인 서기전 2333년으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또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금미달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에, 주나라 무왕이 기묘년에 즉위하여 신하인 가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어 1,908세까지 살았다. 단군은 오래 나라를 다스리다가 중국의 기자가 조선의 왕으로 오자 왕위를 내주고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줄거리가 조선과 단군에 관련된 기술의 전부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건국의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신화로 취급하여 역사와 구별하기도 하고 신화에서 일정한 의미를 찾기도 한다. 이 기술을 토대로 그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의미를 함께 찾아보기로 한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과 그 자손들이다. 이를 통해 어떤 사실을 상징화하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원시 단계는 신화로 시작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물론 세계사에서 역사가 긴 나라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역사시대 이전의 이야기가 너무나 길다. 천황씨에서 시작하여 복희, 신농, 황제,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요와 그위를 이은 순에 이르기까지 신화적인 이야기를 사실처럼 후세에 와서 적어놓고 있다. 중국역사는 갑골문자로 기록된 은나라에서부터 시작된다. 은 이전의 하왕조도 부분만 인정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가장 사실적인 토대 위에서 사기를 쓴 사마천도 요순시대를 애써 적고 있다. 신화는 원시공동체에서 계급사회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관념 형태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질기고 또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일정하게 국가의식과 계급의식이 반영되어있어 역사를 캐는 하나의 보고가 되고 있다. 신화에서는 등장인물을 신성시하여 초월적인 존재로 보면서 역사시대의 인물과 엄격한 구별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단군신화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다시 첫째 부분을 따져보자. 환인은 천신이나 천제 곧 하느님을 뜻한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환인을 한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두 단어를 하나의 뜻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환'은 '환한 세계'의 뜻으로 보아 태양을 상징한다고도 본다. 환인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주에서 제석이라 하였다. 환인과 제석은 모두 불교용어로 산스크로데벤드라를 한자로 석제환인다라라고 번역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이 기록을 승려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윤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석은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삼천대천 세계의 하나인 제석천에 있는 최고의 신격이다. 이와 달리 환인은 하늘과 빛의 뜻을 지니 가장 신성한 존재를 일컫는 우리말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고, 하느님이라는 우리말 소리값에 가까운 한자를 찾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한다.
일연이 다소 용어를 빌려오거나 그뜻에 걸맞은 표현을 했을 수는 있으나 내용을 변조했다고는 볼 수 없다. 고유용어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한자말을 빌려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는 산의 다른 이름이라든가 내용이 다른 기록과 연대가 마지 않을 경우에는 일일이 주를 단 것으로 보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삼위태백'은 보통 같이 붙여 읽고는 당연히 태백산으로 여겨왔다. 뒤에 다시 '태백산 마루'가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위를 '세 위태로운 산' 또는 '세 높은 산'으로 보고 그중에 태백산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겼다고 보는 것이 문리에 순조롭다. 이렇게 보아야 태백산이 주어가 되어 중심지역으로 떠오른다. 여기에 나오는 '홍익인간'은 원시공동체사회의 평등 이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 소유, 분배를 공동으로 하여 삶을 꾸려나가는 이념이다. 이는 계급이나 독점을 위한 갈등과 투쟁이 없는 삶의 방식이다.
다시 둘째 부분을 따져보자.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온 것은 바로 인간세상을 다스리라는 통치권을 받은 것이다. 이 위임을 통해 환웅은 정통성을 지닌다. 환웅은 인간세상의 지배자로서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의 나무 아래에 터전을 잡았다. 그러면 태백산은 지금 어디인다? 일연은 "곧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라고 주를 달았다. 이에 따라 줄곧 묘향산으로 여겨왔으나 근세조선 후기의 실학자들과 구 한말의 대종교 관계자들은 백두산이라고 고증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을 한민족의 기원지로 우러르는 것이다. 산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신성한 장소이다. 산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있으면서 매개 역할을 한다. 산에는 예전부터 제단이 있었고,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이 있었다. 신단에는 나무를 심고 신성하게 받든다. 이 나무는 신단의 수호신역할을 한다. 신단은 제정일치시대에 지배의 중심지역이었으므로 자연히 신시가 되었다. 신단수는 고대부터 내려온 거목신앙의 한 표상이다. 여기에서는 애니미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시는 뒷날 소도로 이어졌고 신단과 신단수는 당산으로 이어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소도는 신성지역이어서 죄인이 도망가서 숨어도 잡지 않았다. 당산은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위해 기원하는 곳이었다. 뒷날 고구려에서는 묘역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는데 이 풍습도 여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환웅을 천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교에서 제석과 차별을 가진 사천왕천의 사천왕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사천왕은 삼천대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하늘을 맡은 이로 인간세상과 가까이에 있다. 그러니 인간과 더할 수 없이 친근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풍백, 운사, 우사는 자연의 변화를 다스리는 소임을 맡고 있다. 원시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폭풍과 홍수였고 또 이를 몰고오는 구름이었다. 특히 농경이 시작되면서 홍수와 가뭄은 더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를 잘다스리는 것은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우 임금도 황하의 홍수를 잘 다스려 순임금에게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원시시대에는 물을 다스리는 사람이 지배자로 부상했다. 곡식 맡은 이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주식이 사냥이나 물고기잡이로 얻은 짐승이나 물고기에서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곡식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농경지가 확대되고 농업생산이 증대되면서 사람의 목숨과 병에도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목숨을 맡은 이와 병을 다스리는 이가 등장한다. 형벌을 맡은 이와 선악을 맡은 이도 나타나는데, 이때는 부족 단계이든 씨족 단계이든 군장이 등장한 시대였다. 곧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로서, 강제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지배체제의 강화가 요구된다. 형벌이 있어야 다스릴 수 있고 질서를 잡을 수 있다. 고대조선이 이런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신선한 아침의 나라 조선
다시 셋째 부분을 따져보자. 곰과 호랑이의 등장은 큰 의미를 지니다. 환웅은 하늘에서 온 신이라고 했으나 외부에서 온 유이민으로도 볼 수 있다. 유이민인 환웅이 곰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로 하는 종족과 결합을 시도하였다. 호랑이토템 종족은 육식을 위주로 하면서 공격적이고 참을성이 없어서 결합을 못했다. 그러나 곰토템 종족은 잡식이었으며 타협적이고 협동적이어서 결합이 성공했다. 두 원주민 정치집단의 공동체관계가 깨지고 새로운 유이민 집단과 동맹관계가 성립되었다. 호랑이토템 종족은 실패자로 전락하여 사라졌다. 호랑이와 곰은 우리나라 산짐승의 대표이다.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 유역의 여러 종족들은 호랑이를 산의 주인으로 여긴다. 또 중국 사람들과 우리 선인들은 호랑이를 산신으로 받들었다. 시베리아 흑해 위쪽에 사는 코미족은, 어느 처녀가 마을에서 쫓겨나 곰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을 시조로 받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은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뒷날 백제에서는 곰을 나라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여기에 쑥과 마늘이 나온다. 이는 그때 사람들이 곡식과 함께 채소를 먹었음을 뜻한다. 오늘날 생산되는 향신료인 마늘은 훨씬 뒷날 중국 하나라를 통해 들어와 재배되었다. 이때의 마늘은 들에서 나는 달래였을 것이다. 쑥은 식용으로뿐만 아니라 약용으로도 널리 쓰였다.
다시 넷째 부분을 따져보자. 웅녀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고 환웅은 여신이 아니라 남신이었다. 환웅은 가부장적 지배자였고 웅녀는 지배에 매인 종속관계에 놓여 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남자였다. 만약 여자로 설정했다면 왕위에 올려놓는 데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자나 지배자는 어디까지나 남성이어야 했다. 그러니 모계사회나 모권사회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다. 단군의 이름에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한결같이 단군이라 쓰고 있으나 뒷날에 쓰인 제왕운기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단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단군은 신단과 연결된 호칭이다. 제정일치시대에 신단에서 치르는 제사는 제사장이 주관한다. 이 이름은 신단의 제사장이면서 통치자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단군은 박달나무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신단수를 박달나무로 보고, 신시에 있는 나무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 의미가 첫 번째와 한결 다르다. 여러 해석에 비추어보아 합리적이지 못하다. 지금도 박달나무의 뜻을 따서 쓰고 있으나 변질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단군왕검은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한 시대에 왕위에 올랐으니 역사가 유구하다. 고려시대만 해도 중국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또 찬란하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를 이렇게 맞추어놓은 것은 민족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기록한 이의 자의가 깃들여 있다. 환웅은 평양성을 첫 도읍지로 삼는다. 삼국유사 주에는 "지금의 서경이다" 라고 밝혀서 당시 행정구역이었던 대동강가의 평양임을 분명히 앴다. 평양을 '편편한 땅덩이'라는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고조선의 발상지를 지금의 중국 땅인 요동반도의 어느 지역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처음 그 땅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기에 중국 세력의 압박을 받아 대동강가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보는 것이다. 이 주장은 청동기문화의 추적으로 상당한 근거를 확보했다. 나라를 처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고 앞에서 말했다. 일연도 앞의 제목에는 고조선이라고 밝혔지만 본문에는 '고'라는 관형사를 붙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처음 조선이라 했으니 엄밀하게 보아 고조선은 정식 명칭일 수가 없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뒷날의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이나 조선인민공화국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거나 단군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나 후한서에도 그냥 조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운 뒤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나라 천자에게 책봉을 받으려 하였다. 나라이름으로 '조선'과 '화령'을 선택하여 보내자. 명나라 천자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유래가 있다"고 하여 지정하여주었다. 그뒤로 이씨왕조가 조선을 독차지하여왔다. 본래 원조에는 관형사를 붙이지 않으며 혈통을 표시할 적에도 누구의 2세 3세라고 하거나 성을 따를 뿐이다. 그러니 첫 조선에 관형사를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첫 조선을 그대로 살려 부르기로 한다. 뒤의 글에도 이 뜻에 따라 첫 조선에 관형사를 붙이지 않고 표기할 것이다. 조선은 직역하면 "아침이 신선하다" 는 뜻이다. 또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동방이라고 하고, 또 동해에서 해가 떠오르니 좋은 상징어라 할 수 있다. 뒷날의 왕조에서도 이 국명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이웃 나라에서도 그렇게 불렀다.
단군의 나이는 1908세?
마지막 단락을 따져보기로 하자. 여기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고 하였다. 뒷날 백악산을 구월산으로 고증한 탓으로 구월산에는 단군 관계 유적이 많이 널려 있었고 나라에서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나라를 1500년동안 다스렸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이는 단군이 임금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고 왕검도 순수한 우리말 임금을 이두식 한자로 바꾼 것으로보아 한 임금이 계속 왕위를 누린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세습으로 왕위를 계속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고대처럼 선양이 아니라 세습군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환단고기에는 역대의 왕 이름과 재위 연대가 적혀 있으나 믿을 것이 못된다. 중국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단군은 왕위를 물려주고 은거했다고 기록했다. 이 대목이 가장 황당하다. 이는 중국의 기록을 보고 그대로 쓴 것이다. 적어도 후대에 윤색하여 덧칠한 것이다. 고려 중후기에 유교문화가 침투해오면서 사대적 분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설은 중국 한나라 때에 이른바 중화사상이 번지면서 역사책에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기자가 조선지역에 들어와 살 수도 있고 또 정복전쟁으로 왕위를 빼앗았다면 어느 정도 사리에 맞는다. 그러나 선양의 형식을 빌려 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다. 조선이 국가 성립의 초기 단계였다면 지배층이나 군주가 선양을 할 수 있었을까? 미개한 탓이나 미덕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면 더욱 사리에 어긋난다. 또 기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초기 청동기의 무기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위협을 해서 선양을 받았을까? 적어도 많은 무리와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와서 한바탕 전쟁을 벌인 뒤 강제로 왕위를 빼앗았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단군이 신선이 되었다는 설은 단군을 신비하게 만드는 도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단군은 탄생부터 여느 인간과 달랐으므로 세속의 권력을 버린 정신세계의 지배자로 설정한 것이다. 후대에 도가들은 도교의 원뿌리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내용이 또 있다. 이 내용에는 민속학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이 기록에 삼이라는 숫자가 다섯 번 나온다. 이 숫자는 우리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환인, 환웅, 단군은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세우는 과정에서 세 주인공이 된다. 이는 하늘, 땅, 사람, 곧 삼재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내기를 할 때나 씨름을 겨룰 때 삼세판을 기본으로 한다. 상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세 번을 참아준다. 아이를 낳았을 때 삼칠이, 곧 세 번 칠일마다 삼신 할머니에게 빈다.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주기도 하며 우리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삼은 우리의 전통생활에서 기본적인 숫자 개념이었다. 또 백일 동안 금기를 지키게 했는데 그 흔적이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불교의식에도 49일이나 백일기도가 있는데, 이것이 민중신앙으로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해진 뒤인 1287년, 곧 고려말에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을 찬양하였다. 그는 환웅을 단웅으로 바꾸어 표기하면서 단웅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게해 사람으로 화신하게 하고 박달나무 신과 혼인시켜 단군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였고, 단군의 후예는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맥으로 퍼져나갔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단군의 사적을 적었으며, 평양, 구월산 등지에 사적을 보존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동국통감에서는 단군 기원을 사묵유사의 경진년이라는 연대의 오류를 바로잡아 요임금 무진년이라고 밝혀 서기전 2333년으로 고증해놓고 있으며, 택리지에서는 단군을 구이라고 기록하였다. 유학자 정두경은 "성인이 동해에 났으니 때를 요임금과 함께 하였네" 라는 찬양의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화사상에 물든 유학자들은 단군을 기자의 아랫자리에 두려는 의식을 보이기도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군은 나라를 잃었을 때나 외세가 밀려올 때 민족사상의 표상으로 추앙을 받아왔다.
단군신화는 국가 성립의 역사적 상황이 반영되어 전해져오고 있다. 이 신화 자체는 결코 역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조선과 단군은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우리 역사의 유구성과 독자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 우리 역사의 여명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적 역사를 추구하면서도 단군신화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조선은 그 발전 단계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고대국가를 형성했다고 보고 있으나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나라의 골간을 차음 갖추어나갔으리라는 근거를 여기에서 찾을 수도 있다.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인정한 것은 남북 정통 사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단군이 세웠다는 조선도 지금의 요동에서 일어나 차츰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동강가의 평야에 도읍하여 발전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1993년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종래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곧 평양시 강동군 문호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의 한 무덤에서 단군과 그 아내의 유골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어 고구려 양식의 여러 석실봉토분에서 나온 86개 유골을 연대 측정한 결과 5천 년 전쯤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하였다. 또 이들 무덤에서 청동판에 금을 입힌 금동왕관의 앞면 세움장식과 좁고 길쭉한 돌림띠 장식이 각각 1점씩 나왔고 나무관을 고정하는 데에 쓰인 쇠못 6개도 나왔다고 하였다. 이대로 따져보면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연대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보다 600년쯤 앞서게 되고 신석기시대로 보아온 연대에서도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남한의 역사학자들이 5천 년 전의 유골이 완전하게 보존되었다는 사실과 고구려 양식을 따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북한에서는 이것이 고구려 때에 무덤을 새로 단장한 탓이고 토양이 석회질이어서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조선은 요동이 아닌 평양에서 건국했고 단군은 실존인물이며 건국 당시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갖춘 고대국가라고 하여 기존의 학설을 크게 수정하고 나섰다.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여 북한에서는 거대한 화강암 1,600개를 사용해 단군릉을 복원해놓았다. 그러면서 북한이 조선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역사시대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은나라보다도 선진적인 문화를 갖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선사시대 및 초기 역사새대에 걸쳐 요동반도, 남만주, 한반도 일대에서 민족의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여러 이주민이 섞여 초기 한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종래의 고고학적 성과도 허황한 소리가 되고 만다. 북한의 주장을 과학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좀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록에 환단고기, 규원사화 따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단군을 이은 역대의 왕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단군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 있기도 하나 모두 조선 후기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
|
|
글터 → 수필
|
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사랑이 뭐길래
사랑이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선인들이 사랑에 대해 제각기 정의를 내려왔지만 아직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는 못한 것 같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사랑이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며 험난한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마력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있으므로 인간은 역경 속에서 힘을 얻기도 하고 사막에서도 외롭지 않다. 또 인생이라는 긴 강물의 흐름 속에 사랑은 은은한 연꽃의 향기로 마음을 에워싸는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 사랑 때문에 목숨을 끊기도 하고, 남을 헤치는 불행한 경우도 있다.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고 사랑을 소유하려는 집착이 지나친 결광이다. 이혼한 아내에게 재결합을 외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총기를 난사하거나 함께 살던 여자가 도망쳤다고 해서 그녀의 집까지 찾아가 살인을 하는 남녀간의 사랑은 차라리 독약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왜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자신의 마음까지도 다치게 되는 것일까?
3,4년전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스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스물대여섯쯤 됐을까? 내가 탄 택시의 기사분은 무척 건장해 보이는 젊은이로, 잠시 주저하더니 이렇게 내게 물어왔다. “말씀해 보시지요.” “실은 제게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가 미리 말하기도 전에, 그 기사이 나이로 보아 아마 여자나 결혼 문제가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저는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도 하나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 얼마간은 단꿈에 젖어 행복하게 잘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아내가 그만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군요? 그러니 부인이 자식도 버리고 가출을 했겠지요.” 그러자 그는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지 모릅니다. 내 잘못이거니 하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우리 기사들 수입이래야 뻔한 게 아닙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했는지, 자기도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간 거지요.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저를 찾아온 거였어요. 장사를 하려고 하는데 밑천이 없어서 곤란하니 5백만 원을 꿔달라고요.” “그래 당신은 어떻게 했소? 그 돈을 주었소?” “그랬지요.”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어쩌다 가출을 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여자는 참말 장사를 하려고 나갔던 게요? 혹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지는 않으셨소?” 그제서야 그는 머뭇거리면서, 그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으며 현재 그 남자와 살고 있는 중이라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바보요? 당신을 버리고 자식까지도 버린 채 집을 나간 여자를, 더구나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자에게 피땀 흘려 벌은 돈까지 주다니 말이 안 되지 않소?” “스님, 제 마음이야 오죽 괴롭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떠난 여자이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다림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지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승복을 입은 내가 어찌 저들 남녀간 애정의 깊이를 알리요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미 떠나간 여자를 그토록 못 잊는 이유가 뭐요?” “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를 떠나 다른 남자와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때 내 아내였던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녀를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길을 막고 누구에게든 한번 물어보시오. 떠나간 여자가 다시 온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금이야 당신의 마음이 그녀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지울 수 없는 과거로 남아 괴로워하게 될 거요. 그때는 어떡하시겠소?”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언성을 높였지만 마음 한편으로 그가 측은하게 생각됐다. 그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스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사랑에 눈 먼 그 기사는 아직도 기약 없이 그녀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고혜의 바다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애타는 심정으로 사는 그 기사처럼 이토록 사랑이란 사람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슬픔과 고통으로 몸부림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년간의 사랑은 더욱 그렇다. 유부녀인 심프슨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부귀와 영광의 상징인 왕관을 아낌없이 내버려야 했던 영국의 에드워드 8세, 자신을 길러 준 유모의 남편 위홍을 사랑했으나 2년 뒤 그가 죽자 슬퍼한 나머지 헌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리고 죽은 연인의 원당인 해인사로 내려가 여생을 보낸 신라 시대 진성 여왕, 이미 유부남인 김우진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한 나머지 꽃 같은 젊음을 현해탄에 던진 근대기 신여성..., 한 남자를 위해 간첩이 되어 끝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 김수임..., 이 모두가 부와 명예보다 사랑을 더 귀하게 여긴 사람들이며,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던지고 사랑을 택했던 사람들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미운 사람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라고 “법구경”에서 말씀하셨다. 무릇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돌아서면 괴로움과 미움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끝없이 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아예 사랑과 미움의 집착마저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로 생각될지 모르나, 모든 애욕의 괴로움의 근본은 결국 쓸데없는 집착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이러한 집착과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 말이다. 그러나 애욕의 괴로움이 비단 이 세상의 중생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속세를 벗어나 수행하는 자에게도 이러한 고통, 즉 마장이 끼여든다. 그래서 마장을 견디지 못해 때로는 환속의 유혹을 받고 파계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 것이다.
신라 시대 의상 대사를 사모한 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 대사는 36세의 나이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불법을 배우러 유학을 떠나던 도중 흙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를 뒤로 한 채 혼자 중국으로 건너가 불도에 정진하여 마침내 화엄종의 정수를 체득하게 된 우리 불교의 태두이다. 그가 유학하던 시절, 잠시 머무르던 주인집 딸 선묘는 준수한 용모에다 번득이는 총기를 지닌 이 이국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옷을 곱게 꾸며 입고 온갖 교태를 부려 의상의 눈길을 끌고자 했으나 의상의 구도 일념에는 한치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애욕의 의상을 단념하고 새로운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이 생이 다하고 또 다음 생이 이어져도 자신은 의상을 도와 그가 대업을 이루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서원이었다. 서원대로 10년간 그녀는 의상을 도와 지극한 정성으로 뒷바라지했고, 마침내 의상은 중국불교철학의 진수를 체득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떠나는 날, 선묘는 의상을 위해 옷가지를 마련하고 있다가 그가 배에 탄 뒤에야 소식을 듣고 달려나간다. 그러나 이미 배는 선창을 떠나 바다로 멀어져가고 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서운함만 가득 차 멀어지는 뱃전을 바라보는 선묘! 수천 리 뱃길이 위험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자 `이 몸을 던져 저 배를 보호하리라.`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바다도 감동하여 과연 그녀의 뜻대로 용이 되게 하여 의상이 탄 배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 땅까지 인도하여 갔다는 이야기이다. 귀국 후 의상은 산천을 섭렵하며 자신의 법륜을 굴릴 마땅한 절터를 물색하다가 마침내 한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절을 지으려 할 때 의상은 고민에 빠졌다. 사교의 무리 5백이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공중에서 거대한 돌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신변이 일어났다. 끝내 죽어서라도 의상을 도우려는 선묘의 혼이었다. 도둑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그제야 의상은 순조롭게 절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신묘한 변화를 연출해 낸 돌로 인해 부석사라 이름지운 의상은, 죽어서까지 자신을 도운 선묘의 혼을 기리기 위해 그 옆에 선묘각을 지었다고 한다.
이 선묘 설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질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지고한 행동으로 승화시킨 이상형을 보여준다. 선묘의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은 이승의 생사를 뛰어넘어 마침내 지고한 사랑의 행동으로 승화되었다. 만약 선묘가 의상에 대한 사랑을 이루고자 욕심을 내고 집착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사랑 대신 미움으로 채워진 마음은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고통 속에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랑은 욕심을 인연으로 하여 욕심으로부터 생겨나며 욕심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하고 “출요경”에서 말씀하셨다. 사랑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다. 사랑도 지나치게 소유하려고 집착하면 번뇌와 절망으로 변하는 법, 욕심없이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법을 배우자. |
|
|
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잘 준비된 말을
매우 어줍잖은 글이긴 하지만 나는 어느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어 원고청탁도 꽤 자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더러는 거절을 한다 해도 늘상 글빚을 많이 지고 사는 셈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아니든간에 시나 산문 등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기까지는 참으로 남모르는 아픔과 인내, 아낌없는 정성과 노력이 요구된다.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마음에 드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수없이 종이를 버리며 잠을 설칠 때도 많고, 옆사람이 눈치를 챌 만큼 끙끙 몸살을 앓곤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이렇듯 힘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언어생활을 한번씩 되돌아 보게 된다. 내가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만큼 심사숙고하고, 이것 저것 미리 헤아려 분별 있는 말을 하도록 애쓴다면, 성급하고 충동적인 말로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뱉아버린 말들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나 불신이 우리 주변엔 얼마나 많은가?
누가 어쩌다 한결같이 겸허하고,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말씨를 쓰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쳐다보며 감탄할 만큼, 요즘 우리의 언어생활은 퍽도 거칠고 삭막해졌음을 자주 절감한다.
흔히 글은 오래오래 종이에 남는 것이고,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쯤으로 생각해버리기 쉽지만, 한 마디의 말 또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가? 한 사람의 펜으로 씌여진 글은 그 사람 특유의 개성을 지닌 작품이 되듯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결코 함부로 말할 수가 없으리라. 너도나도 바쁘게 살다보니 별로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매일 잠깐씩 일부러라도 틈을 내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신의 언어생활을 점검해 보고 늘 잘 준비된 말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꾸준히 자신을 성찰해 간다면 아무래도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더하게 될 것 같다.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좋은말, 선한 말만 골라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남을 비난하고도 상관도 없는 일에 끼여들어 흥분하거나, 불평과 짜증과 푸념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말의 질을 높일 수가 있고, 이것은 곧 삶의 질을 향기롭게 높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유 없이 남을 깎아내리는 말, 무례하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말, 천박하고 상스러운 말은 아예 입에 담지를 말자. 잘 안된다면 절어도 우선은 횟수를 줄이려고 노력하자. 우리의 말씨가 거칠어지는 것이 시대 탓, 무분별한 매스 미디어 탓이라고만 하지 말고,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매일의 언어생활을 참으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꽃피우자.
'미리 준비하고 말하라. 경청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네가 듣기를 좋아하면 배우는 게 많고, 귀를 기울일 줄 알면 현자가 되리라'는 성서의 말씀을 다시 새겨 들으며 나도 말에서 뿐 아니라 모든 면에 잘 준비된 현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1989> |
|
|
사진과 그림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