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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79 호
단기 4341. 7. 31 (음력 6.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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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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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세계인권선언 감상문 공모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약속’으로 평가받는 세계인권선언을 널리 알리고자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함께 감상문 공모 행사를 엽니다. 세계인권선언의 숭고한 뜻을 새기고 우리 사회의 인권 현실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마감일 : 2008년 8월 3일(일) ○ 응모처 :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팀(public@humanrights.go.kr) ○ 분량 : 200자 원고지 6매 이내 ○ 응모방법 : 국가인권위원회 및 <한겨레21> 홈페이지에 게재된 세계인권선언을 읽고 자유로운 형식의 감상문 작성 후 이메일 공모(이름,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 주소 명기) ○ 당선작발표 : 1, 2차 서면심사 후 국가인권위원회 및 <한겨레21> 홈페이지 게시(8월 6일 예정) ○ 시상 : 최우수상 1명(상품권 50만원 상당) 우수상 1명(상품권 20만원 상당) 가작 3명(상품권 10만원 상당) ※ 수상자와 소설가 공지영 선생님(인권홍보대사)의 토론(8월 7일 예정)
※ 모든 수상자에게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표창 및 <한겨레21> 6개월 구독권, 모든 응모자에게 국가인권위원회 발간 격월간 <인권> 1년간 발송(기존 잡지 구독자는 추가 발송 없음) ※ 기타 문의사항 :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팀(02-2125-9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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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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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이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게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여가가 생겼다는 뜻이다. / 플로이드 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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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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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근아기
사람이름
상산군 황효원은 신씨가 아이를 못 낳는다고 버렸다. 임씨를 맞아 두 아들을 낳자 화목지 못하다며 임씨를 버리고 다시 신씨와 살았다. 신씨가 죽자 호적에 구사(종)인 ‘쟈근조이’를 아내로 올렸다. 상산군의 일을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 아뢰어 풍속을 바로잡도록 명을 내려 달라고 했으나 성종 7년(1476년), 임금은 더 논하지 말고 이씨(쟈근조이)를 상산군의 ‘움아내’(후처)로 삼도록 해 주라 일렀다.
중세 말 ‘쟉다·혁다·다’는 모두 작다는 뜻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름에서는 한결같이 ‘쟉다’에서 비롯된 ‘쟈근’(者斤/小斤)이 이름의 밑말로 쓰였다. 쟈근이·쟈근개·쟈근대·쟈근도티·쟈근만·쟈근모디·쟈근올미·쟈근토리 따위 사내이름과 쟈근이·쟈근가이(히)·쟈근금·쟈근년(녜)·쟈근덕이·쟈근비·쟈근아기·쟈근장이 …들 계집이름이 있다. <정종실록>을 보면 몸종을 ‘쟈근이’(小斤)로 부른다. ‘쟈근’이란 말이 작다는 뜻과 다른 뜻도 있음이 엿보인다.
크다는 말에 ‘한’과 ‘큰’이 있다. 땅이름에서는 ‘한’이 자주 쓰이고 사람이름에서 ‘큰’(大隱/大/大 )이 더 쓰였다. 사내이름에 큰가히·큰난이·큰노미·큰동이·큰쇠·큰아기·큰아희·큰이 따위가, 계집이름에 큰이·큰덕이·큰벌어지·큰비·큰아기 …들이 있다. ‘한’이 든 이름에 한이·한덕이·한덩이·한돌히·한비·한섬이·한쇠 …들이 쓰였는데, ‘한’이 꼭 ‘크다’는 뜻은 아닌 듯하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부처꽃
풀꽃이름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로, 들어온 것은 벌써 1600∼1700년이 되었다. 풀꽃이름에도 ‘불두화/ 부처손/ 동자꽃’ 등 불교 영향이 많이 스며 있다. 서양 풀꽃이름 중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것들에 견줘본다면, 문화바탕이 확연히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염주나무는 영어로 ‘욥의 눈물’(Job’s tear), 삼색맨드라미는 ‘요셉의 코트’(Joseph’s coat)로, 성경을 알아야만 하는 이름들이 꽤 된다.
‘부처꽃’은 냇가나 연못 등 습지에 자라는데, 길고 화사한 자주보랏빛 꽃을 승려들이 백중날(음력 7월15일) 재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바쳤다고 해서 붙었다는 견해가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있고, 연꽃과 함께 절 근처에 많이 피며, 그때가 가장 절정기니까 그럴듯한 설명이다. 또한 이 꽃을 부처님 앞에 흔히 바친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천굴채’(千屈菜)라 하며, 방광염을 낫게 하거나, 이뇨제·지사제로 쓴다. 요즘 새로 생기는 생태공원이나 냇가마다 보기에도 좋고 물도 맑게 한다고 많이 심는다. 날씨가 좀더 더워지는 칠팔월에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듯하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한국의 자원식물Ⅳ>에서
"가지다"를 버리자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는 근 30년 동안 꾸준하게 읽혀온 책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불편한 것이라며 버림에서 오는 자유로움과 평화를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소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소유욕이 마음뿐 아니라 말에도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평소 '가지다(갖다)'라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쓴다. 이는 영어 'have'가 들어간 문장을 직역한 형태로, 우리말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금강산에서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위 두 문장은 '회담하다' '만나다'만 써도 완벽하게 서술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회담을 가지다' '만남을 갖는다'로 씀으로써 어설픈 번역투 문장이 돼 버렸다.
-다음달 한국 순회공연을 갖는다. -6월 중 방한해 정부 대표와 정례 협의를 가질 예정이다.
이들 문장도 '순회공연을 한다' '정례 협의를 할 예정이다' 등으로 해야 우리말답다. '싸운다'를 '싸움을 갖는다'로, '헤어진다'를 '헤어짐을 갖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또 '아침 식사한다' '아침밥을 먹는다'고 하지 '아침 식사 갖는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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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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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1. 희망에 대하여
야생이 빌
나는 항상 내가 여든세 살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여든세 살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쉰여덟 살까지라도 살수 있으면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쉰여덟이 될 때 레이첼은 열두 살이 된다. 대강 세상 물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다. 엄마를 잃은 것은 어떤 나이에도 힘든 일이지만, 비록 엄마가 사실은 이모일지라도, 나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다. 매일 아침 자명종이 울리면 몇 분 동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다. 바깥 날씨가 어떻든지에 상관없이 나는다리를 쭉 뻗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강아지를 쓰다듬어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은 햇살이 방에 쳐진 레이스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날이다. 하지만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도 좋아하고 나뭇가지를 집 벽에 쓸어대며 부는 바람 소리도 좋아한다.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은 시간은 아침이다. 아침은 내게 희망을 준다. 이년 반쯤 전 한밤 중, 왼쪽 부신에 있던 종양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술대에 누워서 이젠 다 자란 세 아이들과 아직 끝내지 못한 사업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레이첼 이었다. 응급차가 와서 나를 실어갈 때 레이첼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미친 듯이 울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수술을 잘 견뎌냈고 놀랄 만큼 빨리 회복을 해서 육주 후에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첼 과의 생활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종양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악성으로 되어 버리기 전에는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내지를 못했다. 다섯 군데의 종합병원을 다녔지만 아무도 몰랐다. 가끔 대장이 막히기는 했지만 수술을 받지 않고도 치료를 할 수 가 있었다. 삼개월 마다 시카고로 가서 종양 전문의의 검사를 받았는데 매번 무사 통과였다. 그래서 얼마 후엔 '야생의 빌' 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올해 정초부터 심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소 보다 등이 더 아팠고 항상 미열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았다. 결핵부터 (같은 직장에 결핵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관절염까지 모든 검사를 다 받았다. 정밀 검사의 한 순서로 복부 자기공명 영상촬영이 있었다. 45분에서 한 시간 가량 걸린다던 검사가 두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없었다.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 귀로 들어갔다. 병이 들었다고 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고, 누가 내 손을 잡아 줄 수도 없었다. 자기공명 영상촬영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 날 길다란 바늘을 종양까지 넣어 조직검사를 했다. 결과는 '야생의 빌' 이 재발했다는 것이었다. 앞이 까마득했다. 레이첼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좀 잘난 척하기는 하지만 자격은 충분해 보이는 의사가 나를 보러왔다. "실험적인 수술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놈이 어떤 놈인지 한 보고 제거할 것은 제거합시다.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난 희망을 앗아가버리는 실망스런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다 제거할 수 는 없었습니다. " 그들은 아직도 무엇을 제거했으며 무엇을 제거 할 수 없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모두들 다른 말을 했다. 다섯 명에게 물어 보면 다섯 가지 대답이 나왔다. 분통이 터졌다.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억누르는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말라갔고 아무것도 먹을 수 가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옆으로 돌아 누울수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때면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식구들과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이 날마다 위문을 왔지만 아무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처음 종양이 터졌을 때 죽어버렸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울증을 털어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미끄럼을 타듯 나는 우울증을 이겨냈다. 항암 화학요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결국은 그것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암에 걸렸다가 회복하고, 의사가 예언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래 행복하게 산 사람들에 대한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 친한 친구와 목사님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레이첼과 나는 밤마다 기도를 드린다. 1992년 12월의 끔찍한 저녁에 차라리 죽어버렸더라면 하는 생각은 다신 하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이 생겼는데 그때 죽었더라면 하나도 몰랐을 것이 아닌가! 첫째 아들이 첫 번째 책을 출간했고, 연기를 하는 막내아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고, 딸아이와 남자 친구가 멋진 집을 지었다. 레이첼은 자전거 타는 법과 글 읽는 법을 배웠고 나는 소중한 옛 친구와 다시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던 일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캘리포니아로 이사 갔던 여자 동생이 다시 이사를 와서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그 날 밤 죽었더라면 작년 가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 할 뻔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갑자기 엄마를 잃은 쇼크로부터 회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나는 우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삶을 다시 연장해 주신 것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새와 들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꽃을 꺾고 또 심고, 동생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레이첼의 숙제를 도와 주며 날마다 내가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희망' 때문인 것 같다. '희망' 은 이제 나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희망이 있는 한 나는 회복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다.
- 메리 L. 랩 -
암에 걸린 아이들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대할 때는 어느 만큼의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어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릿광대 같은 짓을 하며 권위 의식을 가진 어른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어른들은 걱정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도 더 아이 같아진다면 걱정거리가 태산처럼 쌓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은 잊었다.
- 콘래드 하이어즈 -
아직도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남편 크레이그와 나는 메이오 병원의 햇빛이 잘 드는 상담실에 앉아 있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어린이 암 전문의는 가능한 동정심을 총 동원해서 여섯 살 먹은 우리 아들이 암 말기이며, 그것도 특별히 치사율이 높은 암이라는 비침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크레이그와 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묻는다. "제이슨은 죽을 건가요?" 의사가 슬픈 대답을 한다.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의사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란한 목소리로 의사가 입을 연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말씀드리는 수 밖에 없는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생각하기도 힘든 일은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아마 부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지도 모르겠다. 자기네 집에 침략자가 들어올 것이며, 그래서 그 사악한 침략자가 아이를 유괴해 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린이 암은 <숙녀의 가정 일기> 란 잡지에 게재되는 성녀같은 엄마들, 굳건하고 강인한 그런 여자들에게나 생기는 일 인줄 알았다. 제이슨이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나는 어른, 어린이를 합쳐서 암에 걸린 사람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나는 가정 주부였고, 아이가 넷이었고, 그 중 하나는 아직 젖먹이였다. 크레이그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고 아빠였다. 우리는 미네소타 주 윌딩톤의 목가적 동네에 사는 특별할 것이 없는 가족이었다. 그런데 아들의 병은 아늑한 우리집의 지붕을 뚫고 불타오르는 유성처럼 우리의 삶에 쳐들어왔다.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했다는 것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말이었다.
아들은죽지 않았다. 2년 동안의 잔혹한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와 수술이, 또 하나님의 나라에 홍수가 날 정도로 우리가 해댄 기도가 아들의 목숨을 살렸다. 지금 제이슨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십대 소년이다. 댄 마리노와 래리 버드(미국의 프로 운동 선수들)의 충실한 팬이고 온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록 음악을 틀어 놓는다. 또한 <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한 나의 책>(당시 제이슨은 상당히 노력했지만 철자법이 틀리고 말았다.)을 쓰기도 했다. 제이슨은 치료가 다 끝나갈 무렵에, 회복이 잘 진행되고 있을 때 그 책을 썼다. 어느날 오후 제이슨과 나는 소파에 파묻혀 앉아서 암에 대한 어린이용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어린 환자가 쓴 책이었다. 나와 제이슨이 함께 읽은 다른 책들처럼 결말에서 아이는 죽고 만다. "정말 지독한 책이잖아!:" 제이슨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왜 항상 죽는 아이에 대해서만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그러냔 말야? 나 같은 아이들에 대한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나? 암에 걸렸다가 살아나서 자라고 그러는 애들 말이야. 왜 그런 책은 스지 않지?"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내가 제안했다."네가 그런 책을 쓰면 어떻겠니?" 하지만 아이가 진짜 쓸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글세" 아이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제이슨이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다. "여기 있어, 엄마." 아이는 말하며 노란색의 노트에 꼬불꼬불 쓴 '책'을 건네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 우습고도 귀여운 조그만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트를 넘기며 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암에 걸리면 무서워하지 마세요." 라고 아이는 충고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렸다가 낫고 죽지 안고 살기 때문이에요." 어른도 잘 이해하지 못해 고생하는 병에 대해 조그만 아이가 그토록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것에 나는 감동했다. 그날 저녁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책을 읽으라고 주었다. 책을 다 읽고 덮으며 크레이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 일을 끝내가고 있지만, 어떤 엄마 아빠들은 이 일을 지금 막 시작하려 하고 있어. 그런 엄마 아빠들에게 이 책을 전해 주면 멋지지 않겠어?" 아들의 암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이다. 당신 아이의 불행이 문제가 되었을 때 당신이 얼마나 끈질겨질 수 있는지는 아마 당신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일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 줄 때 가 나는 너무 좋다. "제랄린, 너는 정말 강한 여자야.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거야." 물론 견뎌냈을 것이다.
병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부모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 가족이 겪어낸 일은 어떤 면에서도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얼마나 훌륭히 적응하고 생존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남편과 내가 저지른 실수는 딱 한가지가 있다. 어린이 암은 환자나 부모뿐 아니라 가족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에 적응해갈 능력은 누구나 에게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겪는 치명적인 병은 친척, 친구, 선생님, 직장 동료등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암에 대한 연구의 진전은 최근 들어서 더욱 빨라졌다. 특히 어린이 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만약 제이슨이 20년 전에 암에 걸렸다면 아마 수주일 내로 죽었을 것이다. 1960년 중반에는 암에 걸린 어린이 다섯 명 중 단지 한 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 중반엔, 회복률이 세 명중 한 명으로 늘어났다. 20년 전이었다면, 아마 남편과 나는 아들의 즉각적인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요즘의 회복률은 세 명당 두 명으로 상당히 높으며, 의학적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어린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희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험을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은 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랑과 믿음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서 제이슨이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우리의 생활은 제이슨의 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의 삶은 더욱 발전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런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린이 암을 경험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바로 그 증거이다.
- 제랄린 게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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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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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 윤성학(1971∼ )
참 어이없기도 해라 마중물, 마중물이라니요
마중물 : 펌프로 물을 퍼올릴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먼저 윗구멍에 붓는 물 (문학박사 이기문 감수 『새국어사전』제4판, 두산동아)
물 한 바가지 부어서 열 길 물속 한 길 당신속까지 마중갔다가 함께 뒤섞이는 거래요 올라온 물과 섞이면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그 한 바가지의 안타까움에까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나요 철렁하기도 해라 참 어이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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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을 낯설고 불편한 곳으로 여기는 십대들에게 ‘마중물’은 외국어에 가까울 것이다. 펌프도 사어(死語) 축에 끼리라. 우물과 상수도 사이에 ‘뽐뿌’가 있었다. ‘뽐뿌질’이 있었다. 그런데 사라진 말이 어디 한둘이랴. 창경(窓鏡)이라고 아시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윈도’를 여닫으면서도 창경은 처음일 터. 어른들께 여쭤보시라. 오래되지 않은 옛날이야기가 한 보따리는 나올 것이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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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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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철원과 한탄강 - 큰 여울 줄기 따라 한탄의 전설이
연천군 전곡에서 철권군 월저이로 이르는 한탄강 줄기에는 슬픈 전설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벌을 거쳐 전곡에 이르러 임진강에 합류된다. 한탄이란 쉽게 말하면 "한여울", 즉 튼 여울을 뜻한다. 고유어로 불러야 할 강 이름을 굳이 한자말로 부르다 보니 자칫 한숨쉬며 탄식한다는 한탄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급한 개울을 일러 "여울"이라 한다. 한자어로 말하면 천탄이 되겠으나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지명이 가지는 주술성 때문인지 이 강은 이제 한민족의 비극의 강으로 인식되게이 이르렀다. 한여울과 같은, 이처럼 멋진 우리말 멋진 우리말 이름을 두고 왜 굳이 한탄이라는 한자말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탄식 서린 비극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한탄이라는 이름에 대한 색다른 풀이도 있다. 예로부터 이 강은 지배자에 대해 항거했던, 궁예나 임꺽정같은 걸출한 민중 지도자가 철저히 패배했던 쓰라린 역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어쨌든 한탄강은 국토의 허리를 자르는 민족분단의 강이기에 우리의 뇌리 속에 비극의 강으로 인식되는 게 아닐까?
한탄이라는 강이름뿐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강 부젼의 지명에 물과 관련된 한자를 붙이다 보니 자연 "탄"이나 "천"과 같은 거센소리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한탄, 신탄, 차탄, 포천, 회천, 연천, 동두천, 운천, 철원등과 같은 거센소리 지명들은 한결같이 슬픈 전설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탄강이 긴 탄식을 그치고 임진강의 품에 안기는 전곡을 지나면 연천의 차탄리에 이른다. 차탄이란 "수레여울"이란 뜻, 여울이 수레바귀처럼 빙빙 돌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 원님이 수레를 타고 민정을 살피다가 태봉 앞여울에서 수레와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정을 베풀던 그 원님의 덕을 기려 차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유독 인정이 많고 그래서 울기를 잘했던 모양이다. 고을 원님이 순직했을 때도 주민들은 여울 앞에 나와 울었고,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승하했을 때도 마을 뒷산에 올라 서울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 산이름마저도 망곡산이라니, 옛날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차탄리 북쪽 신탄리에는 또 하나의 통곡이 있다.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는 철도 중단점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울음이 아니라 "철마는 달리고 싶다"면서 더 이상 갈수 없는 한탄을 토해 내는 수레바퀴의 울음이다. 남방 한계선 철책 앞, 예로부터 "달우물골"이라 불리던 월정리역에도 같은 구호가 적혀있다. 그것은 단순히 철마의 통곡이 아니라 민족의 염원을 담은 절규가 아니겠는가. 연천이라는 지명의 앞 글자인 "연"이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어서 그럴까. 차탄천이 끝나는 군남면 남계리에도 눈물과 관련된 아픈 전설이 있다. 옛날 삼형제를 키우던 홀어머니가 그만 삼형제를 모두 차탄천 급류에 잃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어미는 매일 이 냇가에 나가 울다가 끝내 세 아들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해 동안 이 지역이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에 얽힌 전설도 슬프기는 매한가지다. 재인은 재주 부리는 광대를 일컫는 말인데, 옛날 외줄타기를 장기로 하는 재인이 아내와 함께 이 고을에 살았다. 대단한 미인이었던 재인의 아내를 탐낸 고을의 수령이 재인에게 폭포위에서 줄을 타게 한 뒤 그 줄을 몰래 끊어 죽게 만들었다. 재인의 아내는 용오 못잖게 절개도 곧았던 모양이다. 겁탈하려는 수령의 코를 깨물어 저항하고 그녀는 스스로 혀를 물어 자살하고말았다. 그 뒤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이름하고, 수령의 코를 깨문 여인이 살았다 하여 그 마을을 "코문리", 즉 고문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철원으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팔교를 지나 지포리 방면으로 향하면 우람한 산줄기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울음산"이라 불리는 명성산인데, 이 산에는 한때 태봉국을 세워 위세를 떨쳤던 궁예의 울음이 아직 남아있다. 그가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다가 이곳에서 성을 쌓고 저항했으나 끝내 운세를 돌이키지 못하고 식솔들과 헤어지면서 대성통곡했다는 그런 산이다. 산정호수쪽에서 보면 우람한 산세가 용트림이라도 하듯 위세를 펼치지만, 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지금도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던가. 궁예의 패주와 관련된 지명은 이 밖에도 더 있다.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항서밭골,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야전골, 싸움 끝에 줄행랑을 쳤다는 패주골, 적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등이 그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세달사라는 절에서 나무꾼 노릇을 하던 애꾸눈 승려 궁예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정말 탐욕스럽고 흉악무도한 악한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반란 농민군을 이끌고 부패한 왕조에 저항하면서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걸출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월정역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비무장지대 한가운데에 희미하게 윤곽만 잡히는 하회산 근처가 궁예가 세웠던 태봉국의 대궐터라고 한다. 그 옆으로 흐르는 역곡천도 한탄강으로 합류될 것이지만 지금은 가 볼수 없는 곳이어서 궁예의 생애만큼이나 허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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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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