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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30 호
단기 4341. 1. 13 (음력 12.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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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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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
‘책씻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글방이나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다 떼었을 때 스승과 동학(同學)에게 음식을 차려 한턱내는 의례다. ‘세책례(洗冊禮)’ 또는 ‘책거리’라고도 한다. 음식은 국수, 송편, 경단 등을 준비하는데 송편은 꼭 대접했다. 깨나 콩 등으로 만든 소를 넣은 송편에는 학문도 그렇게 꽉 채우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책을 씻는다’는 뜻을 가진 이러한 축하 행사는 외국에도 마찬가지다.
▼출판(出版)은 목판 인쇄로 책을 제작해 세상에 내놓는 것을 개판(開板)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중국에서는 오대(五代) 때 각인판(刻印板)·누판(鏤板), 송나라 때는 개판 각판(刻板)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목판의 재료로 가래나무 ‘재(梓)’를 이용한 데서 상재(上梓)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인시(印施), 각판(刻板), 인서(印書), 인출(印出), 간행 등의 단어를 썼다. 19세기에 출판(出板=出版)·발행(發行) 등의 말이 등장했다.
▼최근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을 이뤘다. 특히 지난 9일 여의도는 국회 안팎에서 20여 건이 열리는 등 말 그대로 ‘출판기념회의 날’이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총선 입지자는 이날(선거 90일 전)까지만 출판기념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행사로 꽤 두둑한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법상 책을 공짜로 증정할 수는 없다. 돈을 받아야 한다. 책값은 대개 1만 원 안팎이지만, 의례상 축하의 의미로 책값 이상의 거금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그들만의 잔치’다. 이런 곳에 가보면 각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력 인사들이 다 모여 있다. 어느 실력자의 행사에는 1만여 명이 몰렸다는 후문도 들린다. 자기를 알리고 눈도장을 찍으려는 속셈이 뻔하다. 정작 책의 내용과 깊이는 뒷전이다. 출간은 자신의 학문과 지혜의 집적물을 대중에 처음 선보이고 평가해 달라는 뜻이다. 졸고(拙稿)라며 낮은 자세로 필명(筆名)을 얻는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와는 상관없는 허명(虛名)을 좇는 자리가 돼 뒷맛이 개운치 않다.
조광래논설실장
http://www.kwnews.co.kr/new_view.asp?s=301&aid=208011100036&t=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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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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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을 보고 대양이 존재함을 믿는 것, 그것이 신념이다. / W.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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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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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2. 행동의 방향을 밝히는 충고
도망가기
누구나 싸워서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보다 용감한 사이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싸우다 힘이 부치면 ‘겁쟁이’ 소리를 듣더라도 줄행랑을 놓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스 작가 메난더가 “도망치는 사람만이 훗날 다시 싸움을 도모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은, 용감한 것이 비겁한 것보다 훨씬 좋지만 신중함이 무모하고 경솔한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분하고 억울하더라도 이성을 잃지 말고 냉정히 행동하여야 한다. 싸우다 질 것 같으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라. 버마제비가 제 분수도 모르고 수레바퀴와 대결하다 죽는 ‘당랑거철’의 만용을 부리다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와신상담
중국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아들 부차를 불러 복수할 것을 명령하고 죽었다. 와신이란 말은 부차가 오나라로 돌아와 월나라를 쳐서 없앨 때까지 섶나무 위에 누어잤다 해서 생겨난 말이다. 부차는 절치부심 힘을 길러 월나라 구천의 군대를 대파하고 구천의 항복을 받아냈다. 오왕 부차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한 구천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쓸개’를 옆에 두고 쓸개를 핥으면서 12년 동안 절치부심하였고, 마침내 힘을 길러 오왕 부차에게 복수를 하였다. 상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왕 부차난 월왕 구천이 패배 당시 무모하게 맞부딪쳤더라면 ‘와신상담’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신 장군
한신은 소년 시절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가난 때문에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어려울 때 마을의 건달 하나가 시장 바닥에서 한신에게 싸움을 걸었다. 건달은 “야 이놈아 몸뚱이만 커가지고, 칼을 차고 있으면 다냐, 속은 겁쟁이면서”하며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놈아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찔러봐. 그럴 용기가 없으면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고 놀려댔다. 한신이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엎드려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온 시장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후에 한신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한나라 최고 장군이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옛날에 그에게 모욕을 주었던 건달은 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겨울 삭풍에 사시나무 떨듯’떨면서 목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가 한신 장군 앞에 끌려왔다. 한신은 “내가 그때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너를 죽이면 내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다녀야 하므로 내가 이루려는 꿈을 못 이루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하며 ”수치를 안고 치욕을 참아야만이 큰 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신은 벌을 받을까봐 떨고 있는 그를 안심시킨 후 동네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손자병법에 이르길 ‘적의 실력을 알아낸 후에 진격하고, 이길 자신이 확실할 때 회전한다.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는 이길 것 같이 대들면서 즉각 물러나야만이 후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 역시“적의힘을 헤아려 본 후에 싸운다“고 하였다. 싸우다 힘이 모자라면 젖 먹던 힘을 다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날쌔게 도망가라. 지지부진한 사업도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정리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귀신 작전에 끌려들어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질 이유가 없다.
싸우다 힘이 딸리면 도망가라.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He who figths and runs away, may live to fight another day.)
사람을 따를까, 진리를 따를까
의법불의인이란 말이 있다. 사이비 목사의 허황된 사기 행각을 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든지, 스님들이 사찰에서 각목으로 난장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이 설법하는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진리까지 버리지는 말라는 말이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잘못을 보고 이에 실망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하는 진리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겠다. 신흥 종교나 유사 종교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큰 까닭은 종교 진리 자체를 믿고 따르기보다 전하는 사람(교주)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 때문이다.
예수는 유태의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유태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따르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지 실천하지 않는다.“ 전하는 진리 자체에 의존해야지 전하는 사람의 위선적인 행위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이다. 자식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보다 더 늦게 일어나면 자식이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듣는 대로 행하라’는 뜻으로 “아비 행동은 따르지 말고 아비가 하는 말은 진리이니 따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솔선수범보다는 못하지만 말이다.
사람을 따르지 말고 진리를 따르라. (Do as I say, not as I 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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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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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13장 - 이해했으면 비판하라 1/2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V)
1. 생각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자
어떤 책이라도 일단 읽기로 작정을 했으면
#1 우선 이해한다. #2 이해했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비평해 볼 것.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독서를 왜 하는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넓은 세상에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읽는' 방법이 성행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이런 일이 있다. 브라우닝 부인(1806-1861, 남편 로버트와 함께 시인 부부로 알려진 영국의 여류시인)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자 여러분의 감상을 물어본 적이 있다. 시인은 여기서 철학을 '신에의 공감'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그 점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알 수가 없는데요"라는 답이었다.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틀려도 좋으니까 부딪쳐 보려는 자세조차도 엿볼 수가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이해할 힘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썩히는 짓과 같은 것으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신문을 읽듯이 편하게 앉아서 시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꾸준한 교양을 계속 쌓아 가는 사람도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는 넘어 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겨 놓은 단편들을 발굴했다고 몹시 기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편지 따위라든가 친필 원고 따위를 연구한답시고 몇 년씩 세월을 보내는 태도가 무언가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독서하는 마음'의 자세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0행밖에 안되는 세네카(65, 로마 제정 초기 문인)의 문장을 두 시간씩 들여서 연구하는 프랑스의 예비대학교(이것을 리세라고 한다)의 수업 방식은 뛰어난 지적 훈련의 한 방법이다. 외국에서 찾아와서 구경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하며 나중에는 홀딱 반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세의 학생 자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드디어 '올바르게 읽는 습관'이라는 빛나는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 그들도 머지 않아 '그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외국어를 알고 있다면 한번 번역에 착수를 해 보라. 더구나 매우 지적이고 예술적인 번역이 되도록 해 보라. 하루에 넉줄 정도라도 좋다. 이 작업이 얼마나 '완전히 이해하는 습관'을 붙이는데 도움이 되는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이유로 내동댕이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생각하는 노력! 이것이 '이해하는' 독서의 시작이고 또 종점이기도 하다.
2. 우선 의심해 보라
대체 자기가 쓴 글을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한편 그 작가에 대해서 작자의 참다운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남김없이 캐내려고 노력하는 독자가 대기하고 있는 법이다. '남김없이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면 이미 비평이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셈이다. 본래 '비평한다'는 말은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비평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직능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쉽게 알 수 가 있다. 누구도 남의 흠을 찾아내는 전문가를 가리켜서 비평가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판정자라고 부를 따름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까지는 자기 자신은 자진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맞장구를 쳐 놓고 막상 자기 차례가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대방 이야기를 그대로 복창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빌어온 의견'에 익숙해져 버리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의견의 포로가 되어 버리게 되며, 지배를 당하는 '양'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화뇌동의 충동을 누를 수 없는 마음속에는 겁쟁이 심보와 게으름뱅이 근성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비판정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어릴 때부터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빠르다는 법은 없다. 빠를수록 좋다. 우리들은 교사가 해야 할 역할의 중요성을 여기서도 강조화고 싶다. 뛰어난 문학작품의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세미나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했으면 좋을 듯하다.
학생들은
#1 되풀이해서 정독을 할 것. #2 구조를 조사할 것. #3 중심이 되는 관념을 파악할 것. #4 관념이 어떻게 전개되며, 지속되었는가를 판단할 것.
이와 같은 순서로 이해 비평의 방법을 몸에 익혀 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이 올바른 지도를 받아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소년 소녀들의 눈이 어른들의 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매우 놀라운 발전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젊은 마음 속에 뚜렷이 뜨여진 눈, 그 눈빛이야말로 '힘찬 어른의 자각'의 증거가 아닐 수가 없다. 역사를 연구하는 효과도 문학의 경우에 뒤지지 않는다. 방법이 올바르기만 한다면 효과적인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속담이라든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일반적 원리'도 훌륭한 '생각하는 소재'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이해 판단의 공식은 여기서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 좌우지간 학생들에게 의심이 싹트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책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교사는,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 그림은 아름답습니다"
와 같이 일정한 관념을 늘어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외우게 해서는 안된다. 학생 쪽에서 보면
"이것은 정말로 진리라고 할 수가 있는가?" "이 그림은 과연 아름다운가?"
와 같은 관점에서 스타트할 일이다. 무수한 '견해'가 여기서부터 갈라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요는 '판단하는 마음'이 일관해서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지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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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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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장 다보다
본뜻 :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봐야 할 장을 다 둘러 보았다는 뜻이다. 즉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일,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했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일이 글러 버렸다는 뜻의 반어적 의미를 가진 말로 쓰인다.
"보기글" -그 사람이 먼저 와서 계약했다면 그 일은 이미 볼장 다본 거구만 더 이상 미련 가지지 말게나 -비가 온다면 야외 파티는 볼장 다보는 거지 뭐
부아가 난다
본뜻 : 부아는 '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화가 나면 숨이 가빠지고 그렇게 되면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데서 나온 말이다.
바뀐 뜻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화나 분한 마음을 가리킨다. 흔히 쓰는 부애는 틀린 말이다.
"보기글" -너는 올 필요 없다는 소리에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한바탕 해댔다 -당신은 도대체 집에서 뭐하는 여자야! 하는 남편의 말에 부아가 난 나는 그 동안 쌓였던 불만을 한꺼번에 토해 냈다
말높이기
말에는 같은 표현이라도 정중하고 높이는 표현과 친근하고 편하게 말하는 표현이 있다. 상대를 높이는 정도에 따라 아주 높임, 조금 높임, 낮춤과 같이 몇 단계로 나뉘기도 한다. 우리말은 높이는 단계에 따라 ‘합니다-하오-하네-한다’로 나누기도, ‘해요-해’로 구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자바말도 높임의 단계가 엄격히 구분되는 언어로 유명하다. 높임 단계 따라 낱말이 달라진다. ‘밥’이란 말은 [sega]와 [sekul]로,‘먹다’도 두 단계인 [mangan]와 [neda]로 나뉘어 있어, 우리말에서 ‘밥-진지’,‘먹다-잡수시다’를 구별해 쓰는 것과 같다.
‘집’을 가리킬 때 [omah], [grija], [dalem] 셋을 쓰는데, 각각 낮춤말·중간말·높임말이다. ‘가다’도 [arep], [adjeng], [bade]로, ‘지금’이란 말도 [saiki], [saniki], [samenika]처럼 세 단계로 나뉘어 있다. ‘당신’이란 말은 두 단계로 낮춤말은 [kowe], 중간말·높임말은 [sampejan]이다. 그래서 ‘너는 지금 밥을 먹고 있느냐?’는 말은 높이는 정도에 따라 자바말에서는 세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apa kowe arep mangan sega saiki?’(낮춤), ‘napa sampejan adjeng neda sekul saniki?’(중간), ‘menapa sampejan bade neda sekul samenika?’(높임) 이 정도면 우리말 높임 표현보다 더 복잡한 편이 아닐까?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맞부닥치다
‘맞-’은 명사나 동사 앞에 붙어 새말을 만드는 앞가지다. 명사 앞에 붙는 ‘맞-’은 ‘맞고소·맞고함·맞담배·맞바둑·맞바라기·맞잡이·맞적수·맞장기·맞줄임·맞트레이드’에서처럼 ‘마주 보면서 하는’, ‘서로 엇비슷한’의 뜻을 더한다. 동사 앞에 붙는 ‘맞-’은 ‘맞들다·맞바꾸다·맞서다’에서처럼 ‘마주, 정면으로, 서로 엇비슷하게’란 뜻을 더한다. ‘맞-’은 부사 ‘마주’의 모음 ‘ㅜ’가 줄어들어 만들어진 말이므로 그 뜻에 ‘마주, 정면으로’란 뜻이 있다. 이런 앞가지 ‘맞-’이 붙은 낱말로 ‘맞부딪다·맞부닥뜨리다’ 같은 말은 큰사전에 올랐으나 ‘맞부닥치다’는 없다.
“대불이는 운수 불길하여 … 나졸들과 맞부닥치기라도 한다면 낭패일 듯싶어, 발걸음을 돌렸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그런 것들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새삼스레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괴로움, 나아가 그것들과 맞부닥쳐 평범한 사나이로서의 고달픔과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픈 ….”(이문구 〈장한몽〉) “다만 그것이 맞부닥칠 대상이 눈앞에 선뜻 나서지 않아 밑바닥에 잠재해 있을 뿐이다.”(전광용 〈태백산맥〉)
‘맞부닥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맞닥뜨리다’, 또는 ‘어려운 문제나 반대에 직면하다’란 뜻으로 쓰인다.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하나를 골라 길을 가면서 갖가지 장애물들과 맞부닥치고 다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루스트)을 아쉬워하며 사는 듯하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가와 끝
“무슨 팔자인지 밀려오는 일이 끝도 가도 없네!” 이런 푸념을 듣는다. ‘끝’은 무엇이며 ‘가’는 무엇인가? ‘끝’과 ‘가’는 본디 넘나들 수 없도록 속뜻이 다른 말이었으나 요즘은 걷잡지 못할 만큼 넘나든다. 아니 넘나든다기보다 ‘끝’이 ‘가’를 밀어내고 있다.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가로 갖다 두어.” 하던 것을 요즘은 흔히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끝으로 갖다 두어.” 한다.
‘가’는 바닥이나 자리나 바탕 같이 넓이가 있는 공간에서 가운데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를 뜻한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데’가 반드시 얼마간의 너비를 지니고 있는 자리기에 ‘가장자리’라는 말을 함께 쓴다. ‘끝’은 시간을 흐르는 채로 두고 또는 도막으로 잘라서 맨 마지막, 흐르는 시간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나 움직임에서도 맨 마지막, 흐르는 시간처럼 길이가 있는 물건의 맨 마지막을 뜻한다. 나아가 공간도 어느 쪽으로든 마지막을 뜻하지만, 공간의 ‘끝’은 ‘가’와 달리 너비를 지닌 자리가 없어 ‘끄트머리’(끝의 머리)라는 말을 함께 쓴다.
그러니까 ‘가’는 공간에만 쓰고, ‘끝’은 시간에 써야 본바탕이지만 공간까지 넓혀 쓴다. 그만큼 ‘끝’의 뜻넓이가 ‘가’보다 본디 넓어서 조심스레 가려 써 버릇하지 않으니까 힘센 ‘끝’이 힘여린 ‘가’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끝으로 밀어 두어.” 하는 말을 제대로 따르면 광주리는 반드시 마루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끝’에는 광주리를 받을 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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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맥주는 사이다의 어머니
날씨가 더워지면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는 것이 청량 음료다. 우리 나라의 청량 음료 판매 회사들은 7, 8월 두 달 동안 1년 매출액의 절반을 올린다고 한다. 시원한 청량 음료는 마시면 가슴 속까지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 묘미는 바로 톡 쏘는 맛에 있다. 이를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영국인 목사이자 화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였다. 1733년 의상 장식가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스틀리는 23세에 목사가 됐지만, 1765년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나면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프랭클린의 영향으로 작은 사물일지라도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곤 했던 그는 1767년 요크셔 리즈에 있는 밀힐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을 때 자신의 '사소한' 호기심을 '소다수' 발명으로 연결시켰다. 어느날, 프리스틀리가 목회 활동을 벌리고 있던 리즈 마을의 커다란 맥주 공장 앞을 지날 때였다. 맥주 발효되는 냄새가 길손을 유혹하는 그 곳은 언제나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어떻게 맥주가 만들어지는지 한 번 공장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었지만 목사 신분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마음을 굳히고 용기를 냈다. 공장문을 열었다. 순간 커다란 공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나무통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어 보니 거품이 통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효모가 액을 발효시키면서 일으키는 거품 같은데, 이 거품의 성분이 무엇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때 인기척 소리에 놀란 그는 재빨리 공장을 빠져 나와야만 했다. 프리스틀리는 다음날부터 맥주 공장 앞을 서성거렸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기회만 나면 안으로 들어가 그 거품을 모아 왔다. 이 거품은 물보다 가볍고 공기보다 무거워 나무통 속의 액체 위에 그대로 고여 있었으며, 거품의 두께가 20cm를 넘을 정도여서 모으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거품에서 기체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알아 낸 것이라곤 이 기체에 불을 가까이 대면 불이 사그라진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1772년 여름, 그는 더위에 지쳐 물을 들이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톡 쏘는 맥주 맛의 비밀은 거품이 아니라 기체에 있는지도 몰라. 물에다 이것을 녹이면 맹물보다 훨씬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곧 두 개의 물컵을 준비했다. 한쪽에는 물을 가득 채웠고, 다른 컵엔 발효 중인 액체 위에서 모은 기체를 담아 두었다. 그리고 물컵을 기울여 서서히 기체가 있는 컵에 부었다. 이 실험을 반복한 결과 그는 어렵지 않게 거품이 풍부한 새로운 물을 얻게 됐다. 이 물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톡 쏘는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 새로운 물이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그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곧 이 물을 '소다'라 이름 짓고 시판에 나서 크게 성공하였으며 세계적인 유행음료로 정착시켰다.
그 후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 향료를 넣은 탄산수가 개발됐고 사이다, 코카콜라 등 청량 음료의 탄생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한편, 국내 청량 음료의 출현은 1905년께 일본인들이 일제 '금강사이다'와 '미츠야사이다'를 궁중이나 일본인용으로 수입한 것이 그 시초였다. 당시 일본은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끌던 영국 병사들로부터 탄산 음료 제조술을 습득, 발전시켜 상품화하는 단계에 있었다. '사이다'라는 명칭은 원래 사과술을 일컫는 말인데, 한 일본인이 사과향을 섞은 '사이다'라는 명칭의 청량 음료를 상품으로 내놓았다가 이후 그 이름이 무색 탄산 음료의 대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우리 식의 사이다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는 탄산수라는 뜻의 '소다 팝' 정도를 들 수 있다. '칠성사이다'는 사이다 공장에서 일했던 기술자, 지주 등 7명이 함께 자본을 투자하여 1950년 5월 갈월동에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를 세우면서 생산을 시작하게 됐는데, 7명이 모였다는 의미로 제품명을 칠성으로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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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 4부 항산화벽이 무너지면 건강도 무너진다
흡연, 과음은 항산화벽을 무너뜨리는 주범
담배는 연기 성분과 타르 속에 프리라디칼 및 기타 독성 화학물이 매우 많으므로 폐를 비롯한 인간의 여러 조직에 산소적 스트레스를 준다. 이제 여러분들은 프리라디칼이나 항산화제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 있을 것이므로, 흡연이 해로운 다음의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첫째, 담배에는 프리라디칼이 많이 들어 있으며, 특히 질소의 활성산소화물, 히드록시라디칼이 있어서 지질의 과산화변질을 일으키고, 또한 단백질에 손상을 준다. 타르 속에는 퀴논이라는 프리라디칼 생성 독소가 들어 있다. 또 담배 연기는 폐조직 세포를 자극해서 활성산소를 만들게 한다. 담배연기로 자극받은 흡연자의 폐에는 금연자의 폐보다 백혈구가 더 많으므로 여기서 활성산소가 더 많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흡연의 이런 피해는 호흡기에 그치지 않고, 유독물질이 혈액 내로 침투하여 심혈관 질환, 발암 유발 등 여러 질병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둘째, 이렇게 엄청나게 증가된 활성산소를 처리해야 하므로 그동안 잘 저축해 놓았던 항산화 탱크가 일시에 바닥이 나버리게 된다. 항산화 저장고가 바닥이 나더라도 이를 빨리 알아차리고 긴급 보충을 해 주면 피해가 덜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흡연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 비해 항산화제가 풍부한 음식을 제대로 안 먹는다. 또 술도 더 많이 마시는 편이니 세포들이 구제불능의 파산지경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몇 모금만 피워도 항산화제가 소모된다
지역 방위 항산화제인 비타민C의 경우를 예로 들면 흡연자의 비타민C 농도는 비흡연자에 비해서 20~40%가 더 낮다. 1997년에 덴마크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흡연 때 가장 약해지는 항산화방어벽은 비타민C였다. 흡연으로 인한 항산화 탱크의 파산을 실감시켜 주는 한 실험을 소개한다. 인체의 혈액을 채취해서 6~9모금의 담배 연기를 뿜어 주고 난 후 다시 혈액의 변화를 측정하였는데, 놀라운 변화가 관찰되었다. 비타민C와 조효소 큐가 혈액 내에서 완전히 고갈이 되었던 것이다. 또 비타민E는 처음보다 약 25%가 줄어들었다. 마찬가지로 베타카로텐, 라이코펜 같은 카르테노이드계 항산화제도 9모금 노출후엔 35%가, 27모금 노출 후에는 60%가 소모되어 감소되었다. 이러한 피해는 흡연을 많이, 오래한 사람일수록, 또 원래 가지고 있는 체내 항산화 방어벽이 약한 사람일수록 일찍 오며, 그로 인한 피해도 더 크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흡연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끊는 것이며, 어떤 방법도 이것의 대암이 될 수는 없다. 굳이 차선책을 말한다면 흡연양을 줄이거나 항산화벽을 튼튼히 하는 일이다.
술을 마시면 활성산소도 증가되고 간질환도 잘 온다
술과 활성산소와 알콜성 간질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애주가드의 간에는 지질의 관산화변질 정도가 증가되며, 간질환 정도가 심한 사람일수록 지질의 과산화변질 정도가 크다. 술이 지질의 과산화 변질을 일으킨다는 말은 다시 말해 술을 마시면, 조금 마시건, 적당히 마시건간에 관계없이 우리 몸에 활성산소가 생긴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생긴 프리라디칼은 다시 알콜과 반응해서 히드록시-알콜 라디칼이라는 물질도 만들어 내어 지질을 더욱 산화시킨다. 이런 면에서 보면, 술을 마실 때 최고의 안주는 항산화제가 풍부한 안주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얘기는 7부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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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영월군수가 되자 단종의 신위를 설치하여 괴상한 변고를 없앤 김륵
김륵(1540-1616)의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희옥, 호는 백곡이다. 퇴계에게 글을 배웠다.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홍문관의 청환직을 지냈다. 어느 날 차자를 올려 임금의 덕성이 매우 절실함을 논하였더니, 임금이 그를 앞에다 불러 놓고 책망하였다.
"그대가 나더러 영민하고 슬기로움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처리하는 일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임금이 더욱 노여워하다가 깨닫고서 신하를 통하여 김륵에게 사과하고 술을 하사하면서 그 자리를 파하였다. 동왕 17년에 영월군수가 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영월군에 괴상한 변고가 있어 수령이 부임하였다가 번번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맨 먼저 용기를 가지고 그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노산군(단종)의 묘를 찾아 배알하고 신위를 설치하여 송 부인(단종 비 송씨)을 배향하게 하고는 제수와 예물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받들었더니 3년동안 영월군에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는 영남 안 집사의 명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이 되어 국가를 부흥시키는 열 여섯 가지의 계책을 진달하였다. 그 후 영천의 귀학정으로 은퇴하여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77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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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하청
황하의 탁류가 맑아지기를 암만 기다려도 허사라는데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주나라의 영왕 7년(BC585년)때 얘기다. 정나라가 채나라를 침공하여 그곳의 공자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채는 초의 속국이었던만큼 채나라 군병이 정나라를 공격해왔다. 그 무렵 약소국인 정나라는 북쪽의 나라와 남쪽의 초나라에게서 항상 압력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 정나라의 지도자들은 긴급히 구수회의를 가졌는데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초나라에게 항복하자는 의견과 진나라의 구원을 청하자는 의견이 그것이었다. 먼저 항복론을 펴는 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시에 노래하기를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려도 끝이 없으며 사람의 수명에는 한정이 있느니라 하였고. 지금 우리 백성들은 위급한 상태인만큼 초나라에게 항복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덜어 줍시다. 진나라 군사가 오면 또한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약소국의 도리인 것이오."
한편 진나라의 구원을 청하자는 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약소국일수록 신용이 없으면 당장 망하오. 우리는 진나라와 다섯 번이나 동맹을 맺었던 만큼 이제와서 그 신의를 저린다면, 설령 초나라가 구원해주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겠소? 진나라는 우리를 멀리하고 속국으로 삼을 것이오."
결국 정과 초는 화평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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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조신의 꿈
조신은 신라시대의 스님이다. 옛날에 세규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스님들끼리 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스님들에게 명을 하여 절을 관리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신 스님이 바로 그 절의 관리인으로 파견이 되었다. 그런데 조신이 태수 김흔의 딸을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신 스님은 낙산사의 관음보살상 앞에서 김흔의 딸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날이 가고 달이 갔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한 조신 스님의 기도와는 달리 그 여자가 시집을 가 버리고 만 것이다. 조신은 관음보살상 앞에 나아가 비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았다고 목놓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날이 저물 때까지 기도하고 방으로 돌아온 조신 스님은 그만 쓰러져 잠이 들고 말었는데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속에서 김흔의 딸인 처자가 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반가운 얼굴을 하고 합장하더니 절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스님을 보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속 깊이 스님을 사모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저는 시집을 가고 말았어요. 그러나 죽어서도 저는 스님과 함께 무덤에 묻히고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도망왔어요."
조신은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함께 40여 년을 살았다. 그러나 자식만 다섯이 생겼을 뿐 집구석이라고 형편이 없었던 것이다. 너덜너덜 해진 옷과 피곤한 몸으로 나물죽을 끓여 먹으며 할 수 없이 방랑을 하게 되었는데 명주 해현 고개를 넘다 그만 다섯 살 난 큰아이가 죽어 버리고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조신은 아이를 묻고 통곡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우리가 이 꼴이란 말이오. 물새처럼 우리가 모여 있다가 이렇게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짝 없는 새가 거울을 향해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우리 여기서 헤어집시다."
조신은 아내의 제언을 듣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글픈 이별의 손을 놓았는데 그만 꿈에서 깨었다는 것이다. 이윽고 넋이 나간 듯 조신이 멍청히 앉아 있는데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 조신이 해현으로 가 아들을 묻었던 자리를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돌미륵을 깨끗이 씻어 근처 절에 봉안한 후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세우고 열심히 공덕을 쌓았다는 이야기로, 후에는 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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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3장 소현세자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소현세자에게 북방길은 분명 위기였으나, 조선으로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끝나가는 성리학을 금지옥엽 모시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사고방식을 깨트리고, 또한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의 수행원들과 북방길에 오른 세자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지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를 심양관(瀋陽館)이라 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 조선 대사였고 심양관은 조선 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소현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명과의 전투에 투입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이는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임경업과 이완이 이끄는 조선수군 6천 명을 파병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의 반청인사였으니,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 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형편이되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용골대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세자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는 벌컥 화를 내며,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호통쳤다.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했을 정도로 소현제자는 담도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 20년에은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조선 해안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가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심문했는데,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오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주니 그와 한마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런 관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9년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세자는, 심양에 와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현세자가 보기에 중원의 대세는 이미 청으로 기울고 있었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니며서 명을 위협했다. 사실상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 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세력만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다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던 날 황제의 외척과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 출신 이자성을 성천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이렇듯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의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는 이말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 온지 7년째 되던 해인 1644년4월이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길에 올랐다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했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막 정예군인 오삼계 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이미 중원의 정세가 청으로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현세자는 오삼계 군단의 항복 장면을 목격한 후,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승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청군은 남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령해 간 것이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고, 이로써 청은 명의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북경을 함락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북경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주씨네 떡가루로 이씨가 쪄낸 빵을, 이웃 조서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이는 주씨의 명 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결국 조씨를 국성으로쓰는 만주의 청에게 고스란히 빼앗긴 것을 풍자한 노래였다. 이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소현세자는 이미 7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인조 18녕 임경업이 명과 싸우지 않고 사실상 투항했을 때, 세자가 놀랐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세자가 보았을 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조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 정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춰졌다.
부정아닌 부정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 온지 3년째 되던 해인 인조18년, 부사 이경헌과 서장관 신익전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는데, 청은 이 제의에 대해 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내라고 요청했다.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부른 후에야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청은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했다. 청은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원손을 만주의 봉황성에서 맞바꾸자고 제의했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청의 구왕 다이곤과 질가왕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한 송별연을 열어주었고, 인조 18년 2월 12일에는 청 황제 태종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흥망룡의를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이를 본 세자는 깜짝 놀라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입니다."
용골대가 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대흥망룡의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연결되었다. 세자 빈객 신득연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임진왜란때 선조가 명이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세자는 청 태종의 송별연 다음날 심양을 떠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인조는 노정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했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폐지시켜버렸다. 심지어 "4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마저 거부했다. 다만 인조 18년 3월 7일 서울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맞은 것이 유일한 환영이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이고 대신들도 눈물을 흘려 조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처의 오목도 이를 저지하자 인조가 설명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이 부정에 녹은 것일까? 세자는 그해 4월 2일 다시 청나라도 떠나게 되었다. 심양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원손 석철이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세자에게 청의 범문장이 그해 6월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원손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날씨가 몹시 덥고 아이가 병이 있으니 서늘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라고 말렸던 것은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시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비운의 세자와 원손은 이국의 수도 심양에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사이도 없었다. 청에서 조선에 군사 징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해 1월에는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지평 조한영 등이 목에 철쇄를 매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어 세자는 쉴 틈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인조 21년에는 전 정승 이경여와 선조의 부마인 동양위 신익성, 그리고 전 판서 이명한등이 심양에 끌려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된 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자는 조선 편에 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볼모 신분인 세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어서 조선인이 죽어갈 때마다 세자 또한 한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왕 인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조 21년 10월 역관 정명수가 청이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하자, 인조는 처와 세자가 결탁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인조가 세자 귀국 문제를 비변사 당사에게 논의하자, 정태화는 "청에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한다. 이처럼 세자의 귀국을 두고 근심하는 데서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음이 달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청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이렇다.
"청인이 내게 입조를 요구한 것은 전한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제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일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랬다. 인조는 구왕 다이곤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인조의 이런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신하들이 아니었다. 심열이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신하가 어찌 감히 우러러 세자의 귀국을 청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음달 심양에서 온 중관을 만난 뒤 인조의 의혹은 더욱 커진다.
"세자가 아무리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우리의 인마가 들어간후에야 나올 수 있을 것인데 역관 정명수의 말을 전해 들으니 세자가 돌아올 시기가 가까운 듯하다. 명수의 말이 이처럼 쉽게 나오는 것은 내 추측이 허망한 소리가 아니라면 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있을 것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뜻을 알아차린 감자점이 답했다 .
"성상은 항상 이를 염려하시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마약 뜻밖의 변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 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청에서 인조을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군신 상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으니, 이조의 불안감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이 인조를 폐하고 세자를 세우려 한다는 생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의심일 뿐이었다. 청은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들을 청으로 부른 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번의 귀국은 세자반 강씨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인조 21년 6월 사망했는데도 세자빈이 아직 곡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었으므로 세자 부부가 동행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인조22년1월 초하루 자신들 대신 볼모로 들어온 원손과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만났다. 아들들을 볼모로 잡고 곡을 하러 떠하는 상황이니 눈물의 상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의 만남을 감시하던 청나라 사람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볼모 생활 중에서 부친이 사망하여,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다. 그러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잡히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가 없었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곡을 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빈소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세자빈의 돌아갈 기일은 임박했는데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라며 세자빈 강씨의 빈소행를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 삼공은 거듭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표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으때 반드시 의하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끝내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조 22년 2월 초순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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