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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1 호
단기 4341. 1. 3 (음력 11. 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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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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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공모
매년 1월 5일 응모 작품 마감/ 매년 2월 수상작 발표
1976년 창간 이후 한국 문학의 최전선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계간 《세계의 문학》이 민음사 창사 40주년을 기념하여 <신인 문학상> 제도를 정례화하고, 우리 문학의 내일을 이어나갈 역량 있는 신인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가고자 합니다. 탁월한 미적 감각과 문제적 작품으로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는 패기와 야심 넘치는 신인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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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부문 및 분량
소설 부문 - 중단편소설 2편 이상 시 부문 - 10편 이상 평론 부문 - 문학평론(100매 이내) 2편 이상
상금 소설 부문 - 500만 원 시 부문 - 300만 원 평론 부문 - 3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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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작품은 반드시 우송 또는 직접 접수시켜야 하며 원고의 반환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당선자에게는 계간 《세계의 문학》에 최대한의 발표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이후의 집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응모 작품의 마감은 매년 1월 5일(마감일자 소인 유효)을 원칙으로 하며 매년 2월 28일 이전에 수상자를 결정하고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심사 경위를 발표합니다.
보낼 곳: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번지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우)135-887
(주)민음사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담당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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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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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쟁이란 다른 사람들이 불이 났다고 생각하게끔 연기를 피워 놓는 사람. /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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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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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죄와 법
법의 정신은 과실이나 무지로 지은 죄는 크더라도 너그럽게 대하고 고의성이 짙은 죄는 작더라도 엄하게 벌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또 죄가 있다는 심증이 가더라도 확증이 없으면 처벌하지 않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생각하여 준다는 말이다. 몇년 전, 경찰관이었던 사람이 살인죄로 형이 확정되어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진범이 붙잡혀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조사를 한 경찰, 기소한 검찰, 선고한 법원 모두가 마구잡이 수사와 선고를 한 셈이됐다. ‘심증이 가더라도 확증이 없으면 죄를 주지 않는’원칙에서 벗어난 경찰, 검찰, 법원은 신뢰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법 집행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이 있다. ‘형벌을 주는 것은 죄를 없애는 데 있지 사람을 처벌하는 데 있지 않다‘는 서경의 말이 그것이다. 옥사를 다스리는 목적은 죄인을 선도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논어는 ‘법 집행을 하는 사람은 죄인을 문초할 때 그의 죄상이 밝혀진 것을 기뻐할것이 아니라 범인이 죄를 범한 이유와 원인을 따져 그의 처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새겨들어야 할 말임에 틀림없다.
법을 몰라서 저지른 죄도 죄다. (ignorance of the law is no excuse for breaking it) 법에 대한 무지로 저지른 죄 역시 죄에 해당된다. 법에 관한 격언 즉 법언으로,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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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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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7장 - 외형적인 고독
사색의 실마리(I)
1. 고독이 갖는 매력
여기에 아주 흔한 라틴어로 된 시가 있다.
아! 행복 할진저, 이 고독 아! 고요 할진저, 이 행복
실상 흔해빠진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고독'이라는 상태가 갖는 매력, 힘, 그 속에 우리들의 마음에 속삭여 오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독-그리고 정밀! 이 관념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고독 속에 기꺼이 몸을 던진 몇몇 인물들이 이미지가 지금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화려한 왕궁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브르타뉴의 장원에 틀어박힌 세비녜 부인(1626-1656, 프랑스의 서간문 작가), 정원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살기를 즐겼던 보스에(1627-1704, 프랑스의 신학자)나 매러디드(1828-1909, 영국의 소설가), 루소는 숲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맛보았다고 했으며, 실비오 페리코(1798-1854, 이탈리아의 작가)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의 하루하루를, 알렝 제르보(프랑스의 선원)는 대서양에서 표류하는 동안 보트 위에서 고독의 즐거움을 마음껏 맛보았던 것이다. 디킨즈(1812-1870, 영국의 소설가)와 같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도 밤길을 혼자서 걷는 것을 즐겼다.
밤길을 혼자서 거닐 때의 당신의 기분을 생각해 본다. 당신도 문득 그런 상태를 행복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참된 당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둠 속의 고독'에서, '뭔가'가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이런 약삭빠른 말을 내가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문득... 문득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문득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란 것은, 정말 묘한 무엇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2. 밀실이야말로 자유의 보루
모든 일은 욕심대로, 장사 속으로만 처리하려는 속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문득 고독을 사랑'하는 심정이 되는 수가 있다. 눈을 번득이며 도박을 하던 친구가 돈을 모두 잃고 난 후의 그들의 마음을, 그 위안해 주는 것은 고독이 아닐까? 오직 홀로 있을 때만 그들은 내일에의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입에서, "이제는 지겹다!"라는 말이 터져 나올 때, 마음은 분명히 고독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겹다는 것, 단조하고 평면적인 생활,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생활의 되풀이에서 오는 허망함... 고독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반대 쪽에 있다. 이런 것은 실은 우리들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우리들의 마음은 '진부함'을 미워한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그 어디서나 잡동사니 투성이뿐! 이런 풍경을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이러한 지저분한 것들은 아예 없어져 버리는 편이 훨씬 좋은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만이' 호젓이 숨어 살 수 있는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안식처를 찾아내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이 우리들의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해준다. 사회라고 하는 곳은 이른바 사회사상을 생산해 내는 곳이다. 사회사상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말도 실상 따지고 보면 슬로건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한 낱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산된 낱말에는 다소간 명령적인 위력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이러한 명령이라든가 강제와 같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우리가 피해갈 수 있는 곳은 '고독'이라는 진부한 시구까지도 갑자기 빛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아침에 어느 때보다 한두 시간 일찍이 눈을 떴을 때, 커피를 진하게 타서 한잔 마신다. 그리고 소파(침대가 아니고)에 편안하게 앉아서 당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 보라.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한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단순화가 극점에 이르게 되면-그 때에는 '고민 거리'의 응어리는 말끔히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부인은 자기 집의 지하실 한 구석에 자기 가족들도 잘 모르는 밀실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 부인은 평범하고 붙임성 있는 상냥한 부인이다. 당신도 그녀의 기분을 알만하지 않는가? 여기서 지금까지 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혼자 있고 싶다는 소원만큼 강한 것은 없다. #2 이 소원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은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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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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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전보다, -피우다, -부리다
본뜻 : 딴전은 '다른 전'에서 온 말이다. 옛날에는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를 전이라 했다. 딴전을 본다는 것은 이미 벌여 놓은 자기 장사가 있는데도 남의 장사를 봐준다거나, 다른곳에 또 다른 장사를 펼쳐 놓는 것을 말한다.
바뀐 뜻 : 하고자 하던 일을 제쳐 두고 오히려 다른 일에 더 매달린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눈앞에 놓인 문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태도 등을 가리킨다.
"보기글" -너는 반찬거리 보러 나온 애가 옷가게에서 웬 딴전을 그렇게 보고 있니? -딴전 피우지 말고 어서 그 얘기나 좀 해봐라
딴죽걸다
본뜻 : 씨름이나 태권도 등에서 쓰는 기술의 한 가지로써 상대편 다리를 치거나 걸어 넘어뜨리는 재주를 '딴죽'이라 한다.
바뀐 뜻 : 상대방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서로 합의가 되었던 일을 딴 짓을 하여 어기는 일을 말한다.
"보기글" -왜 가만히 지나가는 사람 딴죽을 거는 거야? -아니, 상거래의 기본을 어겨도 유분수지 할인 판매 안 하기로 해 놓고서 그렇게 딴죽을 걸어도 되는 거야?
복잡다난·미묘
‘복잡’(複雜)은 홀로 문장에 쓰일 수 없는 말뿌리다. 문장에 쓰이려면 ‘복잡하다’, ‘복잡성’, ‘복잡스럽다’처럼 접미사와 결합하여 파생어가 되거나, ‘복잡골절’, ‘복잡반응’처럼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합성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복잡’이 포함된 복합어로, ‘복잡괴기(複雜怪奇)하다’, ‘복잡다기(-多岐)하다’, ‘복잡다단(-多端)하다’ 등이 있다. ‘복잡’에 한자어가 결합된 다음 다시 접미사 ‘하다’가 결합된 낱말인데, 큰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유형에 속하면서 흔히 쓰이는 낱말로 ‘복잡다난하다’, ‘복잡미묘하다’들이 있는데, 아직 큰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복잡다난한 신사년은 갔다.”(김동인 〈젊은 그들〉) “복잡다난한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백척간두에 선 민주 대한의 역군이 되기로….”(김원일 〈불의 제전〉) “겪어 볼 것은 모두 겪어 보자.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사회의 복잡미묘한 구성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서….”(박태순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 이 몇 달 동안에 있었던 東洋 三國 안의 실정은 그처럼 어처구니가 없이 복잡미묘했다.”(유주현 〈대한 제국〉)
‘복잡다난하다’는 ‘여러 일이나 상황 따위가 얽혀 어려움이 많다’, ‘복잡미묘하다’는 ‘일이나 상황 따위가 얽혀 야릇하고 묘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 정도면 사전에 올릴 만하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움과 싹
가을이 오니 메와 들에 푸나무들이 겨울맞이에 바쁘다. 봄부터 키워 온 씨와 열매를 떨어뜨리고 뿌리와 몸통에다 힘을 갈무리하느라 안간힘을 다한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봄여름 쉬지 않고 일한 잎은 제 몫을 마쳐 기꺼이 시들어 떨어지고, 덕분에 사람들은 푸짐한 먹이를 얻고 아름다운 단풍 구경에 마냥 즐겁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풀은 땅속에서 뿌리만으로, 나무는 땅위에서 꾀벗은 몸통으로 추위와 싸우며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푸나무는 또다시 ‘움’을 틔우고 ‘싹’을 낸다.
‘움’은 무엇이며 ‘싹’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싹’을 “씨, 줄기, 뿌리 따위에서 처음 돋아나는 어린 잎이나 줄기”라 하고, ‘움’은 “풀이나 나무에 새로 돋아나오는 싹”이라 했다. 둘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풀이다. 그러나 ‘움’과 ‘싹’은 말처럼 뜻도 다르다. 다만 둘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비슷해서 마음을 꼼꼼히 지니고 살지 않으면 가려내기 어려울 뿐이다. ‘움’이 자라 ‘싹’이 된다.
푸나무의 목숨이 처음 나타날 적에는 씨앗이거나 뿌리거나 줄기거나 ‘눈’에서 비롯한다. 씨앗이나 뿌리나 줄기의 ‘눈’에서 새로운 목숨이 나타나는 첫걸음이 ‘움’이다. ‘움’은 껍질이나 땅을 밀고 나오면서 미처 햇빛을 받지 못해서 빛깔이 하얗고 모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 희누런 ‘움’이 터져 나와 자라면 햇빛을 받아 빛깔이 푸르게 바뀌고 모습을 갖추면서 ‘싹’이 된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벌레
가을이 깊어가면서 ‘메뚜기’가 뛰어다니고, 장독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대는가 하면, 따사로운 햇볕에 각종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벌레’는 ‘버러지’와 함께 표준말로 쓰인다.
‘벌레’의 15세기 형태는 ‘벌에’다. 이 당시의 표기 방식은 ‘몸애〉모매’처럼 연철 표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벌에’는 ‘버레’가 아닌 ‘벌에’로 적었다. ‘몰애’(沙)도 같은 유형이다. 제2음절에 쓰이는 ‘ㅇ’은 ‘ㄱ’이 약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벌에’의 이전 형태는 ‘벌게’로 추정할 수 있고, ‘몰애’의 이전 형태는 ‘몰개’로 추정할 수 있다.
‘벌레’의 방언 형태는 ‘벌레, 버래, 버러지, 벌게, 벌거지’가 있다. ‘벌게’의 경우는 ‘벌에/버래’보다 오래된 형태다. 그래서 ‘벌게’의 경우 고장말에서는 ‘벌개, 벌기, 블기’ 등으로 나타나고, ‘벌레’는 ‘버래, 벌레, 버랭이’로 나타난다.
‘벌거지〉버러지’의 변화에서 보는 것처럼, ‘벌거지’도 ‘벌ㄱ’에 뒷가지 ‘-어지’를 연결해 쓰는 고어형이다. 방언에서는 ‘벌거지, 벌가지, 벌걱지, 블그니, 벌갱이’로 쓰인다. ‘버러지’는 ‘벌’에 접미사 ‘-어지’를 연결한 것으로 ‘벌러지, 버럭지, 버레기’가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벌게, 벌거지’가 단순히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가 아니라, 중세국어인 ‘벌에’보다 이전에 썼던 옛말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방언에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말이 많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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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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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장건, 다시 떠나다
한때 장건은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의 흉노 토벌에 참가했다. 그때 토벌군은 장건의 안내로 물과 풀이 있는 장소를 따라 전진했으므로 물과 말 사료의 공급에 곤란을 받지 않았다. 장건은 이 공으로 박망후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12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장건은 이광 장군과 더불어 흉노 토벌을 위해 또다시 출격했다. 이 토벌에서 이광 장군은 흉노의 포위망에 갇히어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이 이광 장군과 합류할 날짜에 도착하지를 못한 것이 패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처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나라는 표기 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서역 지대에서 수만 명의 흉노군을 격파하고 기련산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혼야왕이 부족민을 거느리고 한으로 하옥해 왔기 때문에 금성과 하서의 서쪽으로 남산을 따라 염택에 이르는 일대에서는 흉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흉노측은 이따금씩 척후병을 내보냈으나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2년 후 한나라는 또다시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으로 쫓아 버렸다. 무제는 그 후에도 대하 등의 외국 사정에 대해 장건에게 묻는 때가 종종 있었다.
"제가 흉노 땅에 있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손에는 현재 곤막이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곤막의 아버지 때에는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때에 흉노가 이 땅을 침략하여 그 부친을 죽이고,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곤막을 들판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아기에게 날라 주며 늑대가 찾아와서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선우는,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필경 신의 아들일 것이다'하고 아기를 주워다 길렀습니다. 성장한 곤막은 군대를 잘 다루고 번번이 공을 세웠으므로 선우는 오손의 옛 부족민을 곤막의 지휘하에 넣고 서역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곤막은 부족의 경제력 향상에 힘을 기울이며 주변 부락을 습격하고 수만의 병사를 양성해서 거의 매일 침략전을 전개했습니다. 선우가 죽은 것을 기화로 곤막은 수하 부족을 이끌고 멀리 딴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흉노에 대한 조공을 거절했습니다. 흉노측에서는 유격대를 자주 내보냈으나 결국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곤막은 역시 신의 아들이라고 공격을 중단하여 명목상의 속국으로 방치하였으나 내심으로 흉노는 대대적인 공격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정세로 보건대, 선우는 한나라의 새로운 사족을 못쓰는 형편이니, 지금이야말로 오손에게 마음껏 선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손족을 혼야왕의 옛 땅에 거주시켜 우리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오손을 이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흉노의 바른 팔을 떼어 버리는 결과가 되며, 게다가 한번 오손과의 연합이 성립된다면 오손의 서쪽에서 대하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들을 모조리 길들여 속국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무제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장건을 중랑장에 임명하고 3백의 인원을 주었다. 말은 한 사람에 두 마리씩, 소와 양은 만 단위의 숫자였다. 여기에 수천만 금에 해당하는 폐백을 들려 황제의 친서를 지닌 부사를 다수 수행시켰다.
요령부득
그 뒤 장건은 드디어 오손에 닿았다. 그런데 오손왕 곤막은 한나라 사자를 거만한 태도로 맞았다. 장건은 불끈 화가 났으나 그들이 한나라 물건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공하옵게도 천자께서 보내신 물자이니 만일 왕께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도로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곤막은 일어나서 사물을 경건히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였다. 장건은 곤막을 설득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오손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혼야왕의 옛 영토를 소유 할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우리 한나라는 옹주(제왕의 딸)를 왕의 부인으로 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손의 내부는 이미 분열 상태에 있었고 왕도 노경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흉노에 대해서는 너무 오랫동안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발동하여 한에 접근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신들이 모조리 반대했다. 그리하여 왕도 이를 반대하여 단독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건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요령을 알 수 없었다.(요령부득)
당시 곤막에게는 10명 안팎의 아들이 있고 가운데 아들이 대록이었다. 그는 강건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대록의 형이 오손의 태자였는데, 태자에게는 잠취라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으나 태자 자신은 젊어서 죽었다. 태자는 죽을 때 아버지 곤막에게 뒷일을 맡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취를 태자로 삼아 주십시오. 절대로 딴 사람을 태자로 삼지 마시옵소서."
곤막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잠취를 태자에 봉했다. 그러나 대록은 노했다. 그 자리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우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조카인 잠취와 아버지 곤막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곤막은 늙기도 했으려니와 평소부터 대록이 잠취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취에게도 1만여 기를 주어 거주지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곤막 자신도 1만여 기를 가지고 스스로 방위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국민은 세 갈래로 분열하게 되었고, 곤막은 그저 명목상으로만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곤막으로서도 이런 배경이 있었으므로 장건과의 약정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할 수 없이 장건은 같이 온 부사를 주변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 파견하고 자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곤막은 길잡이와 통역을 딸려 장건의 귀로를 전송했다. 장건은 오손의 사자 수십 명과 답례로 받은 말 수십 두를 대동하고 돌아와서 그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했다. 장건은 이번의 큰 일을 완수한 공으로 9경에 끼었다. 그리고는 1년쯤 후에 장건은 죽었다. 장건을 따라 한나라에 왔던 오손의 사자는 한나라 인구의 풍부함과 왕성한 경제 활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오손에선 그 말을 듣고 한나라를 중시하게 되었다. 다시 1년쯤 지나자 대하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 사자로 갔던 장건의 부하들이 모두가 원지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서북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교통이 열리게 되었다. 장건 이후의 사자들은 모두 박망후 장건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상대국에 대한 성의를 증명했고, 상대국 또한 이로써 한의 사절을 신용했던 것이다.
명마를 좋아하는 황제
박망후 장건이 죽은 뒤, 오손이 한과 교통하기 시작했음을 안 흉노는 화를 내며 오손 공격을 계획했다. 때마침 오손에 파견된 한나라 사자 가운데는 남쪽으로 진출하여 대원, 대월지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후부터는 이 통로를 왕래하는 자가 잇따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흉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오손은 사자를 한나라에 파견해서 말을 헌상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옹주를 부인으로 삼고 동맹국의 우의를 맺겠다고 청원했다. 무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했다.
"우선 약혼 예물을 받으신 다음에 옹주를 보내시도록 하시는 게 좋은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무제는 주역을 풀어 점을 치니, "신마가 서북방으로부터 찾아올 것이다."하는 괘를 얻었다. 그러는 중에 오손의 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었으므로 '천마'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피땀을 흘리는 대원의 말(한혈마)을 얻고 또 그것이 한층 더 좋은 말이었으므로 오손의 말은 '서극'이라 개명하고 대원 말을 '천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은 서쪽에 처음으로 성을 쌓고 또한 주천군을 새로이 설치하여 서북 제국과의 무역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한나라는 안식, 엄채, 여헌, 조지, 신독국으로 빈번이 사자를 내보내게 되었다. 더구나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바람에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좁혀져 도중에서 서로 만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외국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사자는 큰 부대는 수백 명, 작은 부대라도 백여 명이며, 휴대하는 물자는 박망후가 갈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후 행사가 관례화함에 따라 인원은 줄어 갔다. 한나라가 1년간에 내보내는 사자는 대강 10여 차례, 적을 때에도 5, 6차례는 되었으며 그들은 먼 나라인 경우는 7, 8년씩 걸렸고 가까운 경우에는 수년 만에 귀국했다.
견물생심의 건달들
장건이 외국과의 통로를 개발한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그를 수행했던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진귀한 산물이나 무역 통상의 이익을 들먹이며 사자로 갈 것을 지원하고 나섰다. 무제는 이런 나라들이 보통 사람들이 가고자 원하는 곳이 아니므로 그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허락하고 이들에게 부절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가운데서 강력을 불문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사절의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사자의 자격 기준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원래의 사명을 완수하기는커녕 도중에서 답례품을 착복하고 사라지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무제는 이 무리들이 외국 사정에 정통해 있다는 점을 평가해 행적을 상세히 조사하고는 중죄에 처한 후,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로 다시 사자를 지원하도록 했다.
주변국과의 교통이 활발해질수록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늘고, 한편 태연히 위법 행위를 행하는 자도 늘었다. 수행하던 하급 관리들도 타국의 산물과 풍습을 자꾸 선전했다. 이에 대해서 조정은 허풍을 떠는 자는 정사로 임명하고 소극적인 자는 부사로 발탁했으니, 허풍 떠는 자나 건달들이 모두 사자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사자가 된 자들은 예의 없이 빈곤한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물건을 횡령하고 이것을 싸게 팔아서 외국 무역의 이익을 얻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국들도 한나라의 사자들이 하는 말이 각각 다른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군대가 오지는 못하리라 판단하여, 식량의 공급을 하지 않아 사자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나라 사신끼리 식량에 궁한 나머지 서로 공격하는 추대를 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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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의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의 비밀
심혈관 질환에서의 효과
1995년 국제생화학 심포지움에 의하면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성분으로 프리라디칼에 의한 지질의 변질성분, 일부 포화지방산, 콜레스테롤을 들었다. 반대로 동맥경화증을 억제하는 성분으로 항산화제, 생선기름, 신선한 다가불포화지방산, 섬유소, 구리, 망간, 아연, 셀레니움을 꼽았다. 생선 중에서도 등푸른생선 기름 성분인 오메가3 지방산은 혈중 지질을 좋게 만들고 혈소판이 엉기는 것을 억제하여 심장병 발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1996년 심혈관 위험 관련지에서도 항산화제 성분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이 심장병이 덜 생기며, 그 중에서도 비타민E 섭취량이 많은 경우가 가장 덜 생겼다고 보고하였다. 1995년 내과학 연보 논문에서도 비타민E를 음식이나 정제로 2년간 복용시에 위험이 감소되었다. 1996년 미 내과학회지에서는 하루 800단위의 비타민E를 복용시 심근경색증 재발률이 감소되는 것을 보고하였다.
뇌혈관 질환에서의 효과
현재 중풍 예방 목적으로 의사들에 의하여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은 저용량의 아스피린이다. 그런데 아스피린과 함께 400단위 정도의 비타민E를 같이 주면 중풍 발생이 더 감소될 수 있다. 각종 질병으로 심장이 멈춘 후에 응급처치로 다시 심장이 뛰게 되더라도 뇌 손상이 와서 식물인간이 되는 수가 많다. 이때 프리라디칼에 의한 지질산화를 막는 항산화제를 주면 뇌 손상이 최소화되어 회복이 빨라지는 효과가 관찰된다. 아직은 불확실한 면이 있지만, 항산화제가 뇌혈관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각종 암 예방 효과
자궁경부암의 아주 초기에 베티-트랜스 레티노익산을 바르면 약 40%에서 어느 정도 좋아지는 것이 관찰된다. 또 베타카로텐을 먹이는 경우에 약 70%에서 병의 진행이 억제되었다. 물론 아주 초기 실험 단계이므로 실제로 적용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베타카로텐은 항사화효과 외에도 면역증강 효과, 자궁경부의 상피세포 성장인자 억제효과 등으로 항암작용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구강암의 경우 비타민E나 베타카로텐은 구강암으로 가기 전 단계의 상태를 억제한다. 또 거기서 2차암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는 정도가 50-60% 정도된다. 이런 긍정적인 연구와는 반대로 항산화제가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들도 많다.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 암이 소화기암이다. 그런데 소화기암은 신선한 야채, 과일, 섬유소를 많이 먹는 사람에서 발생 위험이 적다. 특히 정백가공이 안된 곡류 섭취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셀레니움, 오메가3 지방산 섭취도 발생 위험 감소의 가능성을 보인다. 멀티비타민, 멀티미네랄을 복용시 식도암 억제 효과를 시사하는 연구가 있지만 아직은 불확실하다.
대장암, 직장암의 경우에 항산화물질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먹는 것과 암발생의 위험감소가 관련이 있다. 물론 대장암 예방 목적으로 항산화제를 꼭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항산화제 사용에 대한 전체적은 흐름은 긍정적이다.
베타카로텐이나 비타민C 같은 항산화제를 많이 섭취하면 흡연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흡연을 한 지 오래된 사람에게 항산화제가 폐암 에방 효과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흡연자는 항산화 물질을 풍부히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폐암을 예방하려면 흡연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토마토에 많은 카로티노이드의 일종인 라이코펜을 충분히 복용시 일부 전립선암의 예방 효과가 관찰된다. 항산화제 복용에 의한 췌장암, 유방암, 방광암 예방 효과는 긍정적인 연구도 있지만 효과가 없었다는 연구들도 있다. 피부암의 경우는 항산화제가 자외선에 의한 피부암 유발 요인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인다. 비타민E 등의 항산화제는 염증이나 기카 손상에 의한피부 상처가 치유되는 데 촉진작용을 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항산화제가 풍부한 음식을 많이 먹거나 혹은 정제로 복용시 암 예방 효과가 관찰되지만,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항산화제 복용보다는 이미 잘 알려진 암 유발 원인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아울러 항산화제를 같이 복용한다면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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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천수를 다한 정작
정작(1533-1603)의 자는 사경, 호는 고옥이고, 정렴의 동생이다. 어렸을 적에 강가의 정자에서 놀다가 멀리 보이는 백사장 위에서 어떤 사람이 가로로 부는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시를 읊었다.
멀고 먼 모래 위에 있는 사람 처음엔 한 쌍의 백로로 의심했지 불어오는 바람결에 갑자기 가로 부는 피리 소리 들리니 해맑은 가락에 강과 하늘이 저무네
정작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중년에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정욕을 끊은 지 36년 만에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정작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감별하는 기술을 통달하여 기이한 경험이 많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쓰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정작은 백일하에서도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다. 벼슬은 사평에 이르렀으며, 술을 즐기며 시를 잘하였고 또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신기한 효험이 나타난 적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우연하게 사기의 빌미로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며칠 만에 고질이 되었는데 고옥이 약으로 치료를 하였더니 그 증세가 다섯 번 변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약 또한 다섯 번을 변경하여 모두 효험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고옥에게 청원하였다. "내가 당신이 병을 고쳐준 그 사람과는 대대로 쌓인 깊은 원수 관계여서 이미 옥황상제에게 고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서 내가 다섯 번이나 그의 증세를 변경시켜 가며 당신의 약을 회피하였소. 그런데 당신은 줄곧 다섯 번이나 그 약을 변경시키면서 그를 낫게 하였으니 내가 앞으로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듯하오. 그렇지만 반드시 여섯 번 그의 증세를 변경시킬 터인데 당신이 만약 다시 새로운 약으로 그를 치료한다면 나는 당장 그 원수를 당신에게로 옮겨 당신을 따라다니며 빌미가 되겠소"
고옥이 깨어나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환자의 집안 사람이 급히 왔으므로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그의 병 증세가 정말 변경되었다는 것이었다. 고옥은 꿈에 나타났던 징조를 염려하지 않고 또 증세에 따라 투약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그 사람의 병이 낫게 되었다. 대체로 사기가 사람에게 빌미가 된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몸을 보양하는 혈기가 허약함을 틈타서 그 사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좋은 약으로 잘 막아내기만 하면 사기가 그 틈새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다 고옥은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사기가 감히 원수의 대상을 옮겨 정기를 침범하지는 못하였다.
고옥이 일전에 친구 서너 명과 여름에 모여서 대화를 하였는데, 짧은 처마로 내리쬐는 햇볕에 더운 기운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만약 호수 위에 있는 높은 다락에 앉아서 옷을 벗어 흔들며 발을 씻는다면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당장 자네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보겠네" 고옥이 곧장 문 밖으로 나가 세숫대야에다 물을 붓고 부적을 넣은 다음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더니, 조금 있다가 뒤편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친구들에게 그쪽을 보라고 하였다. 친구들이 그쪽을 보니 집 아래에 갑자기 호수가 생겼는데 너비는 1천 이랑쯤 될 정도로 넓고 아득하여 끝이 없었으며,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가운데 섬이 솟아 있는데, 채색을 한 다락집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무지개 다리로 육지와 통하게 하여 완연히 그림 속의 거울 같았다. 고옥이 친구들을 데리고 무지개 다리를 거쳐 다락집으로 올라가니 연꽃 향기가 풍겨 오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황홀하기가 신선이 살고 있다는 낭원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타고 공중에 날아오르는 듯하여 청량관에서 한번 씻고 그치는데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선경에 있는 아이가 술잔과 소반을 받들어 올리는데, 좋은 안주와 맛있는 술이었다. 모두 실컷 마시고 취하여 조용히 할 이야기도 결렬하게 하며 술이 몇 순배돌자 그대로 물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서로 다락 속에서 상대방을 베고 날이 저무는 줄 몰랐다. 그러다가 깨어 보니 바로 낮에 앉아 있었던 조그마한 집이었으므로 친구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흩어졌다.
또 한번은 고옥이 그의 형 북창을 따라서 고향으로 가는데, 어느 산골 마을에 이르러 어떤 집 앞을 지나다가 나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애석하기도 하다. 저 집안이여" 북창이 타일렀다.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을 하는가. 잠자코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그 집안에 재앙이 그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군자가 인을 베풀고 널리 구제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네 말이 옳으네. 나는 먼저 떠날 터이니 자네 혼자 가 보게" 고옥이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나그네로 길을 잃고 날이 저물었음을 핑계 대며 하룻밤 묵어 가기를 요청하였다. 주인이 고옥의 외모가 헌걸차고 장자의 기풍이 있어 보이므로 즉시 허락하였다. 밤이 이슥하자 고옥이 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까 주인집 문 앞을 지나다가 마침 상상하기 어려운 큰 재화가 닥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하여 그 재해를 없애 주고자 합니다. 만약 내 말을 허탄하고 망령되다고 하지 않는다면 재화가 바뀌어 복이 될 것이니 주인께서 기꺼이 따라 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보셨다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빨리 백탄 수십 석과 큰 나무궤 하나를 장만하십시오" 주인이 즉각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백탄을 뜰 가운데다 쌓고 궤는 그 곁에다 두고서 관솔불로 백탄에다 불을 붙이니 타는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에 그 집안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는데 나이 가 6, 7세 쯤 되어 보이는 주인의 아들도 그 틈에 끼여 불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옥이 재빠르게 그 주인의 아들을 잡아 궤 속에 집어 넣고 궤 뚜껑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주인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옥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빨리 궤를 끌어다 이글거리는 백탄 위에 처넣게 하였다. 주인의 온 가족들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모두 고옥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단지 울부짖으며 통곡할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이 그 궤를 태워 터지게 하였는데 비린내가 사람들의 코를 찌르므로 타는 궤 쪽을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불에 타 꿈틀거리더니 조금 있다가 몸을 휘감은 채로 죽고 말았다. 고옥이 종에게 명하여 타다 남은 불은 치우고 타고 남은 백탄의 재를 쓸어 모으게 하고는 몇 치쯤 되는 낫의 끝부분을 찾아내어 주인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 물건을 기억하겠소?" "기억하고 말고요. 제가 10년 전에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길렀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물고기의 숫자가 불어나지 않고 점점 줄어들어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큰 구렁이란 놈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그 요물을 없애 버리려고 큰 낫을 휘두르자 구렁이도 성이 나서 대가리를 쳐들고 요동하다가 낫의 끝부분이 구렁이의 몸통을 찔렀는데 구렁이가 버둥대는 바람에 낫 끝이 부러지고 구렁이도 죽었습니다. 이 쇠숱이가 그때 부러졌던 낫의 끝부분이 아닙니까?"
주인이 종을 불러 창고 속에 꽂아둔 끝이 부러진 낫을 가져오게 하여 맞추어 보니 바로 그 낫의 끝부분이었다. 그제야 주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놀라고 정작의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주인의 아들은 바로 구렁이의 독과 정기로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니, 만약 며칠 더 지났으면 주인의 집안에는 엄청난 재화를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기운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차마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염려할 것이 없으니 이해를 하신다면 다행이겠소"
고옥이 옷깃을 여민 뒤 작별하자, 주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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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보신
널리 사리에 통달하고 또한 높은 덕망과 영지에 의해 몸가짐에 실수가 없는 현인을 칭송하는 말이다. 은나라 무정은 왕위에 오르자 부왕의 상을 입기를 3년, 연후에도 정치에 관해서는 말을 않고 조용히 산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중에 설이라는 현자를 초야에서 찾아내어 그의 도움으로 선정을 펴서 만백성의 경모를 받았다. 여러 신하가 무정을 찬양하기를
"천하의 사리에 통달하여 민중보다 먼저 아는 이를 명철이라 하옵니다. 명철한 이는, 정치와 도덕의 율법을 정하는 분이올시다." (서경)
또한 시경에 보면 주나라의 어진 재상 중산보를 찬양하여 '명철보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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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하늘지기
나는 한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백하건대 나는 승가대학에 가 보지를 못 했다(아직도 늦은 건 아니지만).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00암에 있을 때다. 그때 입시를 준비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못했다. 산에는 절이 있는데 절에는 스님이 없어서였다. 나까지 절을 비운다면...... 노스님의 공양이며,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망설였다. 나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노스님께 운을 뗐다.
"스님, 대학엘 가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공부를 해야지."
암자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수십 년, 수백 년 된 숲 속의 나무들이 눈바람에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는 곧 비명 소리가 되고, 따악딱 뼈마디 부러지는 듯한 굉음이 노스님의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걸망 싸들고 가."
얼마간 노스님은 묵묵부답이시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성난 짐승처럼 어금니를 깨물고 식어 버린 찻잔을 챙겨 노스님의 방을 나왔다. 적막 산천에는 외로움이 들끓었고 밤은 칠흑같았다. 나목들이 눈바람에 쓰러져갈 때 나는 손바닥을 펴 허공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밤파도가 치는 것이었다. 그때 노스님의 말씀 속에는 꼭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게 들어 있었다. 4년 대학 생활을 하면 그 좋던 머리가 둔해지고, 팔팔했던 기운 또한 사라질 것이다. 오고 가는 그 시간에 공부를 짬지게 하라는 거다. 그러나 내겐 여운이 남는다. 그때 대학에 갔어야 옳았는지 안 간 것이 잘한 것인지......
그러나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뚫어져라 책을 들여다봐도 눈이 티미할 때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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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1장 제12대 인종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중종이 사망할 무렵 궐 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중종이 폐비 신씨를 궁에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중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폐문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화문을 열어놓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중종이 폐비 신씨가 보고 싶어 입궐시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통화문을 열어 놓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는 폐비 신씨를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승을 불러다 중종의 쾌유를 비는 불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돈 것은 반정세력의 압력에 밀려 신씨를 폐위시켰던 중종이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업보였다. 중종이 소윤을 제거한 상태에서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폐비 신씨 문제는 사림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과 굳건한 유대를 맺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갓 즉위한 인종은 하늘이 낸 대효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효자였으며, 또한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선비를 자처한 호학애사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선연중에 세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궁관에서 독서를 그치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나와 "벌이 소매 속에 들어가서 몹시 쏘기로 이제 겨우 잡아냈노라"라고 말했다. 또한 인종이 즉위한 후에는 중국 사신이 접대하는 관원에게, "당신의 임금은 성인이오.그런데 당신의 나라는 조그마한 나라라 성인과 맞지 않으니 오랫동안 당신에의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이오, 당신들은 복이 없소"라고 했다는 말이 <아성잡기>에 실려있다. 여기에서 성인이란 공자나 주자같은 유학자를 뜻한다. 이런 인종에게 사림파는 많은 기대를 걸었다. 호학의 인종이 사림파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사림파의 가장 큰 현안은 기묘사화 때 피화당한 조광조 등 사람파의 신원이었다. 인종은 조광조, 김식 같은 기묘사화 피화자들이 훈구파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믿었고, 세자 때부터 즉위하면 때를 보아 사림파를 신원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인종은 사림파와 같은 세계관,역사관을 공유한 정치가였다.
거듭된 사화에 시달리던 사림파는 인종의 즉위를 쌍수 들어 환호했다. 반면 훈구파는 인종의 역사관이 자신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인종을 지지한 사림파는 당연히 또 다른 인종의 지지세력인 대윤과 가까워졌고 그에 비례해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소윤과는 멀어졌다. 인종이 즉위하자 세를 얻은 것은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대윤의 영수인 윤임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인자하기는 했으나 그리 만만한 군주는 아니어서 윤임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인종 행차 때 있었던 한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
인종이 거동할 때 한 사람이 어가 앞을 막아서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인종이 억울한 사연을 적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판서 윤임이 말리고 나섰다.
"예로부터 송사하는 사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한 예가 없습니다." 이에 인종은 "임금이 친히 글을 보고서 그 원통함을 가리고자 하는데 송사를 맡은 관원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드리지 않은 예는 있었던가?"라고 반문했다. 인종은 이처럼 온화하면서도 자기 주관이 뚜렸한 임금이었다. 만약 인종이 그처림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 화려한 문화정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인종은 문정왕후가 세자 시절부터 자신을 박해하고 정적으로 대했음에도 그녀를 어머니로 깍듯이 모셨다.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지아비 중종을 잃은 계모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으로 임명했다. 대간이 즉각 이를 반박하고 나선 것은 윤원형의 참판 임명이 얼마나 파격적인 조치인가를 말해준다.
"윤원형은 사신을 따라가며 장사꾼을 데리고 가 중국에서 모욕을 받았으니 너무 비루합니다. 척리는 어질고 재능이 있어도 특별히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논박에도 인종은 윤원형의 관직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인종의 이런 특은에도 감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들 경원대군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인종이 동생을 참판으로 임명했음에도 문정왕후는 인종을 압박했다. 문정왕후는 문안 온 인종을 위협했다.
"홀로 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전하겠소."
홀로 된 첩이란 대비 자신을 가리키며, 약한 아들은 경원대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종은 이말을 듣고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침부터 더운 햇빛이 쪼이는 땅바닥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석고대죄하는 셈이었다.
문제의 '주다례'
이런 일들은 부왕 중종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소약해진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종의 병세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하하기 한 달 전쯤인 재위 1년 6월 4일인데, 이날 인종은 최초로 약방 제조들의 문안을 받는다. 그때 인종의 대답은 심상했다.
"더위 증세가 조금 있을 뿐이니 문안하지 말라." 그리고 첫문안 이틀 후인 6월6일 약방 제조들이 문안했을 때 인종의 답은 한층 환해진다. "이제는 기후가 덜하니 문안하지 말라. 이렇게 몹시 더운데 문안하니 도리어 미안하다."
이후 약 보름 동안 <인종실록>에는 약방의 문안 기록은 보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집무를 본 기사만 나온다. 그러다 6월17일 문제의 '주다례'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인종이 문정왕후가 내놓은 다과를 먹고 독살당했다는 야사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다. 6월 17일 영의정 등 삼공이 인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내일 경사전의 주다례를 지낸 뒤에 대비전에 문안하시겠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전하의 옥체가 강녕하시지 못한 데다 날씨는 매우 덥습니다. 이런 때에 노동하시면 혹시 중병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멈추소서."
"내 기후가 이제 매우 좋아졌으니, 무더위를 당했더라도 편안히 앉아서 오래도록 제례를 그만둘 수 없다."
이렇듯 삼공이 주다례와 대비전 문안을 그칠 것을 아뢰는 판국에도 대비 문정왕후는 이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는 곧 주다례와 문안을 강행하라는 뜻이었다. 다음날 인종은 예정대로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대비는 어가를 따른 시종과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리는 등 일행을 극히 환대했다. 그 동안 인종은 대비전의 내전에서 문정왕후의 다과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인종은 갑자기 약방에 명하여 약을 지어 들이게 하였다. 인종의 병은 이질, 즉 심한 설사였다. 주다례 직후부터 설사가 나더니 그 이틀 후인 20일 무렵부터 증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은 것이다.
"이질 증세가 잇달아 음식을 먹지 못하니, 권제를 따르는 것이 무슨 보탬이 있곘는가? 의원은 별다른 증세가 없다 한다."
닷새 후인 6월25일 승지 박한종은 인종이 "설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기운이 매우 지쳐 있고 구역 증세도 있어서 그저께부터 통 수라를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인종의 증세가 갑자기 위급해졌다. 눈동자가 술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지고 손바닥이 매우 더워졌다. 그러다가 기운이 가라앉아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헛소리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인종의 병이 위급해지자 의원들은 별각의 고요한 곳으로 옮겨 조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인종은 경복궁 안 한복판에 있는 아마산 동쪽의 청연루로 옮겼는데, 이 조치가 조금 효험이 있었는지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기운을 점점 회복했으며 열도 잠시 내려 미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정왕후가 소동을 일으킨다. 갑자기 궁을 나가 의혜공주 집에 머물러 쉬면서 청연루로 가 인종의 병세를 살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명분이었다. 인종의 증세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가주서 안명세, 검열 윤결등은 한결 같이 문정왕후의 이 의외의 거조를 만류하고 나섰다.
"상의 옥체가 위급하시더라도 대비께서 친히 문안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경동만 더할 뿐입니다. 인심이 의구하고 경동하여 위 아래가 황급하면 변고가 일어나는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정왕후가 벌인 거동 소동은 의혜공주의 집이 궐 밖 여염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평소에도 대비는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한번 왕비가 되면 죽을때까지 궐 밖 구경을 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과부인 대비가 궐 밖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인종이 병환중인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주저 앉은 문정왕후는 다음날 다시 의혜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면서 소동을 일으켰다. 이는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왕비가 된 날부터 인종을 핍박했던 그녀가 인종의 병세를 걱정해 소동을 일으킬리는 만무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백성들에게 인종이 와병중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대궐밖의 일반백성들은 그중 궁궐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알수 없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자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그가즉위 한지 1년이 채 안돼 급서할 겨우 그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일 것은 분명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동안 임금의 병석을 지킨 사람은 인종의 외숙인 대윤 영수 윤임 이었다. 윤임은 병석에 있는 인종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그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8일 주다례 후 대비전을 문안했을 때의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종이 다과를 들고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대비전에서 마련한 다과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증거도 없는 그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인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6월 28일 어의 박세거는 드디어 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부가 매우 손상되어 병이 뿌리가 있는 듯합니다."
손상된 장기는 비위였다. 그러나 부왕의 사망에 지나치게 애를 태워 비위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장과 위는 음식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기로, 음식물에 의해 손상되는 장기이지 슬픔 때문에 손상되는 장기는 아니다 .또한 비위는 독극물이 투입되었을 경우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키는 장기이기도 하다. 내외의 이런 의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정황후는 세 번째 거동 소동을 일으킨다. 인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이었다. 거동 장소는 여전히 딸인 의혜공주 집이었다. 대비의 소동은 병구완에 정신이 없는 대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만류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주의 집은 여염에 있으므로 결코 옮겨서는 안 되니, 마지못하면 승정원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은 경복궁에 있으므로 임금이 투병하는 청연루와 가까웠다. 그러나 승정원이 비록 궐 내에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대비가 승정원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정원이 집무를 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 문정왕후가 인종을 도와주는 거조는 그냥 대비전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양사와 홍문관에서 대비의 승정원 이를 반대했고, 문정왕후도 승정원을 "불편"하다며 의헤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대신과 대간에서 거듭 만류하자 겨우 소동을 멈추었다. 문정왕후는 이런식으로 인종의 병 치료에 바쁜 신료들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런 소동 속에서 인종은 어의 박세거가 올린 소시호탕을 들기를 거부하고 나선다.
"내 병이 어찌 이 약을 마시고 곧 낫겠는가?"
인종은 생애 대한 미련을 포기한 듯 윤임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광조의 복직과 현량과의 복설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한이다." 윤임이 만류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잡언을 많이 하십니까? 병환만 빨리 나으면 무엇이든지 어찌 수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인종은 혀를 차면서 탄식할 뿐이었다. 죽음을 앞둔 인종에게 가장 큰 한은 조광조 같을 사림파를 신원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인종은 대신들에게 유교를 내린다.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마음속으로 늘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하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히 고칠 수 없어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 병이 위독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민심을 위로하려 한다. 조광조 등의 벼슬을 일체 전일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대로 회복하여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어 전위 교서를 내렸다. "경원대군 이환에게 전위한다. 경들은 더욱 힘쓰고 도와서 내 뜻에 부응하라."
결국 인종은 투병하던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월 1일, 재위에 있은 지 불과 여덟 달 만이었다. 그날 밤 서울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서울 사람들이 스스로 놀라 움직이며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 수레가 지나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서로 이런 소문을 전해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서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소동이 3-4일 계속된 후에야 그쳤다.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문정황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아직 미성년이었으므로 성종 때의 고사에 따라 대비가 섭정을 해야 했다. 당시 섭정할 수 있는 사람은 중종비인 대왕대비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왕대비 인성왕후 두 명이었다. 그러나 대비가 스스로 섭정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고, 대신들이 결정해 주청해야 했으므로 조정은 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누가 섭정해야 하는가를 물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소신을 밝히고 나선 인물이 사림파 이적이었다.
"송나라 철종때 태황태후가 정치를 대리한 전례가 있습니다. 어떻게 형수와 시숙이 함께 궁전에 나앉을 수 있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사림파 이언적이 문정황후의 대리를 주청하고 나섰으므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이처럼 모순되게도 사림파 이언적의 지지를 받아 대리청정하게 되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언적이 을사사화때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했다며 비판했는데, 율곡의 속마음은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한 데 있다기 보다는, 문정왕후의 섭정을 주장함으로써 사림파의 집권이 그만큼 늦어진 데 대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사림파 이언적의 이순진한 주청은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림파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왔다. 인종이 위독할 때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소동을 벌였던 문정왕후흔 정권을 잡자마자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녀의 속마음을 인종의 장례 절차에서 먼저 드러난다. 윤원형과 함께 소윤을 이끌던 이기가 인종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했다.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루를 모셔도 임금이건만, 인종은 임금이 아니니 대왕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같으면 대역죄로 몰릴 주청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장례는 임시로 빨리 치르는 약식 장례인 갈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종의 장례일이 승하한지 다섯 달이 채 못 되는 10월 27일로 정해졌는데, 문정왕후와 소윤은 여기에서 20여일을 다시 앞당긴 10월 15일로 장례일을 수정했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이 부당하다고 상소한 것은 당연했다.
"대행대왕의 장례일을 10월 27일로 정한 것도 이미 5개월의 상기에 어긋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또 15일로 당기니 놀라고 의혹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에 따라 장례일을 늘려 잡으소서."
교리 정황도 갈장은 안 된다고 상소하고,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문정왕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사인 <영남야언>에는 윤원형이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을 짧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적혀 있다 .윤원형이 깊은 밤 남산에서 들불과 초를 켜놓은 채 손수 향을 피우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며, 궁중에서는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인종을 저주했다는 것이다. 상복을 입는 날 윤원로, 윤원형, 이기 등 소윤이 갓을 털고 서로 하례하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고 정황이 분노했다.
"이 역적놈들의 기색을 보기 원통함이 더욱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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