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과연 이데올로기의 종언인가 - 김창호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일 뿐, 완전히 이데올로기가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
근대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데올로기의 역사라 할만큼 자유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들 역시 특정의 이데올로기에 속해서 살 수밖에 없었던 탓으로, 우리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20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1919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 사이의 냉전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생존을 뒤흔들어 놓고 우리의 사고 구조를 왜곡하기에 이른다.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전쟁들이 냉전적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이었으며, 그러한 전쟁들 속에서 인간은 이데올로기에 희생, 왜곡되어 왔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분단과 남북의 대립, 특히 그 대립으로부터 야기된 남한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삶 등도 그러한 냉전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의 원리보다 평등의 원리를 '형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비해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 발전의 추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하였다.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와 함께 장구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이루었던 사회주의라는 한 축이 붕괴됨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서는 정치적 문제나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현실 감각이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비해 경제가 중요하며, 우리의 행위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비해 경제가 중요하며, 우리의 행위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정당성보다 경제적 효율성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공동화된 시기에 경제적 이해 관계만이 유일한 행위의 규칙이 되기 때문에, 이념적, 정치적인 요소보다는 각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 관계가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최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냉전적 대립이 와해되고 난 이후 WTO, NAFTA, EU, APEC 등의 결성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 관계에서도 경제적인 요소가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어쨌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이처럼 이데올로기 대신 경제가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사실적으로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종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견해들은 최근 몇몇의 미래학자들에 의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분석적으로 제시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하게 되는 현실적 근거를 주로 기술 체계의 변화에서 찾는다. 단순화의 위험은 있지만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대량 생산 체제인 포드주의 생산 체제 하에서는 노동과 소유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제한된 공간에서의 노동자들의 집단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세력화, 그에 따른 노동과 자본의 대립, 나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첫째, 포스트포디즘의 등장과 함께 대량 생산이 아니라 '다품종 소량 생산'이 지배적인 생산 형태가 되었으며, 다품종 소량 생산은 컴퓨터 및 정보 통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다. 이러한 기술적 조건 아래서 노동과 소유가 결합된 형태로 생산이 이루어지므로 노동과 소유의 분리에 기초한 전통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육체 노동에 의한 생산에 비해 정신 노동에 의한 생산이 보다 높은 생산력을 갖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육체 노동자를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주요한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보 통신의 발전은 세계의 지역적 분할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통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이율 배반적 관계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주장하는 견해에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삶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삶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견해는 비단 최근에 대두된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 이데올로기 개념이 '내용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미 그 개념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과학적 인식을 방해, 왜곡한다는 의미에서이며, 근대 이후의 기계적 세계관과 자연 과학에 근거하여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를 비판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 개념이 과학에 대립되는 왜곡된 지식, '허위 의식'으로 규정된 것도 바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대당(상대 대, 마땅할 당) 관계로 보는 전통적 관점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과학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과학 자체도 일정하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러한 물음에 동의한다면, 과학은 반이데올로기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란 말인가?
반과학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개념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자연 과학과 같이 인간의 관념을 대상으로 삼는 과학을 제창하였던 트라시(Destutt de Tracy)에 의해 창안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그는 종교적, 형이상학적 편견을 극복한 이데아에 관한 과학을 정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발생과 달리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의미는 중세 기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과학의 투쟁으로부터 형성된다. 근대 이후 자연 과학의 발전은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의 자연 과학은 혁명적 이론의 중심에 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 과학에 기초한 기계적 세계관은 이와 같은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과의 투쟁 가운데 형성되었다. 당시 자연 과학의 발전에 기초한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무엇보다 우선 종교적 도그마로부터 해방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에 이성적 주체를 철학의 중심적 개념으로 파악한 데카르트에서 실증주의 창시자인 외귀스트 콩트(A. Comte)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철학의 중심적 내용을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베이컨의 우상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종교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적 태도와 이데올로기 개념을 결합시킨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1) 현실 모순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2) 현실의 모순을 은폐한다면서 이데올로기를 '허위 인식'이라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규정은 근대의 자연 과학과 철학들이 취하였던 관점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과학의 반대, 혹은 안티(반대 반)체제로 간주함으로써 인지적 영역에서의 오류로 파악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파악할 경우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차이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왜곡된 지식이고 과학은 진실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한, 이데올로기가 허위의 함정에 빠져 있는 동안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꿰뚫어 폭로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만이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이데올로기와 과학은 반대의 특성을 지니며, 양자는 서로 소급 불가능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와 과학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이처럼 명백하게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과학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도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도 특정 계급의 이해를 옹호해 주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은 마치 어떤 이념적 지향으로부터 중립적인 것으로 신비화되어 있으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특정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구체적으로 개진되는데, 그들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 나아가 그것에 기초한 기술적 합리성의 그것이 특정의 계급 이해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배의 원천과 그것의 모순을 은폐,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과 기술이 자연을 합리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였듯이 사회에서 인간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경제와 관료 제도가 보다 합리화되고 컴퓨터와 같이 그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 보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장치들이 마련되면서 인간의 삶은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과학과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과학과 기술이 특정의 가치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은 '기술 합리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특히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기술 합리성'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이념이 되며,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관료 제도의 발달, 즉 인간에 대한 테크노크라시적 기술의 발전은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을 은폐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고, 또한 대중의 저항을 무력화하여 대중을 탈정치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과학과 기술의 사용에 따라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그 자체가 이간의 소외와 허위 의식, 즉 이데올로기를 낳는 근원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과학과 기술은 더 이상 인간의 진보를 촉진하는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 혁명의 과정에서 그 본적으로 전복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과학과 기술, 인간의 합리성을 협소하게 파악하여 그것의 부정적 측면만 확대, 강조함으로써 그것의 긍정적 측면들은 무시한다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과학과 기술에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과학과 기술을 버리고 원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과학과 기술, 인간의 합리성을 버리고 과연 바람직한 사회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과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들을 소개했다. 그 중에는 이데올로기를 과학의 반(반대 반)정립으로 보는 관점도 있었고, 과학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기원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견해를 지니고 있는 두 관점 모두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구태여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 속에서 살게 되는데, 사회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이념적 통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각 구성원들이 하나의 사회 공동체를 이룰 때 필연적으로 그 공동체의 통합을 형성, 유지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요구된다. 만약 사회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없다면 그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비단 한 사회 공동체의 통합에만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 내에서의 특정한 계급, 계층들의 통합과도 관계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란 특정의 계급, 계층의 이익과 연결되어 그것의 인지적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는 의견, 가치 및 지식의 체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왜곡하는 '허위 의식'이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비과학적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가운데는 과학적 전제 위에 서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고 비과학적이거나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도 있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는 본래 과학과 구별되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도 '과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중에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을 어떻게 준별할 수 있을 것인가? 긍정적 관점, 즉 이데올로기를 사회 통합의 주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관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가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 하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 담지자 계급의 특수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과학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 계급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고 따라서 현실의 모순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며, 반면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는 진보 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과학적이라 주장해 왔던 레닌주의에 의해 대변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즉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이데올로기 또한 과학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른다면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의 통합적 성격만을 강조하면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현상을 비판할 수 있는 인식적 수단(과학)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하고,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가 사회와 국제 관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탈이데올로기론', '이데올로기 종언', 즉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이념도 결국 그것이 우리의 삶을 통합하고 규제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탈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아니라 '경제' 이데올로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이데올로기란 개념은 여전히 사회를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를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관점과 개념만을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현실을 분석하는 데 적절한 다양한 관점을 그때 그때마다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문헌 J.라레인, '현대 사회 이론과 이데올로기', 한울, 1992. D.벨, '이데올로기의 종언', 삼성문화문고 5, 1983. P.F.드러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한국경제신문사, 1993. J.플라메나츠,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까치, 1989. T.이글턴, '이데올로기' A.크레스피그니, J.크로닌, '현대의 이데올로기', 인간사랑,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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