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99 호
단기 4340. 11. 8 (음력 9.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생태계 보호라는 것에도 일장일단이 있다. 마치 공기 중에 어느 정도 불순물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운노을이 생기듯이. / B.V.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길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궁리란 복잡다단한 것이니 만큼 한 가지 방법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한가지 일을 궁리해서 터득하지 못하였다면 이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궁리하는 사물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힘껏 탐색해도 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거나, 나의 모든 재주로써는 이를 잘 밝히지 못하여 억지로 터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우선 그 일을 놓아두고 다른 일을 궁리해야 한다. 이렇게 이 일 저 일 궁리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쌓고 깊이 익히면 자연히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진리가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지난번에 풀지 못했던 미세한 뜻의 실마리를 다시 잡아내어 이미 터득한 지식을 응용해서 살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에 풀리지 않던 것이 함께 일시에 깨달아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용법이다. 궁리하다 풀리지 않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한 가지 일에 완전히 궁리 터득된 다음에 조금씩 순서에 따라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궁리의 대원칙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개인이 우선인가, 사회가 우선인가 - 오창희 (1/2)
사회에서는 각 개인과 집단이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의 공익을 우선하는 입장과 개인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하는 입장은 역사적으로 대립하여 왔다. 두 입장이 함께 추구되고 조화될 수는 없을까?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한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안면도와 울진 지역 주민들의 핵 폐기물 저장 시설 반대 시위, 김포 주민들의 산업 쓰레기 반입 반대 운동, 수도권 지역 주민들의 그린벨트 해제 건의 등등. 이 사건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역적 이익, 혹은 각 개인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이익과 상반되는 데서 생겨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접하노라면 과연 사회 전체의 공익과 개인의 이익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사회, 과연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사건들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회 체제 일반에까지 적용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는 국가 혹은 사회 전체의 공익이 모든 개인의 이익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각 개인은 사회 전체의 공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위해 왔다. 반대로, 또 다른 사회에서는 개인의 이익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므로 모든 것에 앞서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각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의 공익을 우선하는 사회 체제를 '전체주의'라 부르며, 반대로 개인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하는 사회체제를 '개인주의'라 부른다. ('개인주의'는 특정한 사회 체제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다른 사람과의 이해 관계를 표현하는 영어인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기주의의 반대는 이타주의이며, 반면 개인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이다.) 그럼 왜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생겨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사회의 특징이 무엇이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의 사회를 이루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사회라고 할 때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업을 통한 서로간의 역할 분담, 이에 따른 상호간의 의존 관계, 유기적인 상호 연결, 공동의 이익 추구, 공동의 의식 구조 공유 등이 사회를 정의해 주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단순히 각 개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유형의 집단들도 포함하고 있다. 거기에는 기업체나 국가처럼 각 구성원들 사이에 관계가 밀접하고 조직 체계가 분명한 집단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느슨하고 조직 체계가 불완전한 집단도 있다. 국가나 가정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소속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기업체와 같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소속되는 집단도 있다. 또, 가정이나 교회, 학교와 같은 소규모 집단이 있는가 하면, 기업체나 군대와 같은 중간 규모의 집단, 그리고 국가나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연합과 같은 대규모 집단도 있다. 따라서 사회는 각 개인들과 또 이 개인들로 구성된 온갖 종류의 집단들이 규모에 따라 하나의 위계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복합체라 할 수 있다.
개인은 사회에 능동적이며 수동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회 혹은 집단들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 사이에 특수한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우선 각 개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며, 각 개인들의 활동으로 거시적 사회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각 개인들의 의지에 따른 행동이 곧 인간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개인들이 없다면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점에서 각 개인들은 사회에 대해 능동성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각 개인들은 사회에 대해 수동성을 갖기도 한다. 특정한 사회에 속한 각 개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회의 의식 구조나 문화에 동화된다. 예를 들면, 한국에 태어난 사람은 한국민의 독특한 국민성과 의식 구조, 생활 양식을, 그리고 일본에 태어난 사람은 일본의 그것들을 자기도 모르게 습득하게 된다. 또, 특정한 기업체에 입사한 사람은 근무하면서 그 기업체의 분위기나 정서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기업체에 대한 애사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특성이 구성원에게 이입되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이며 불가항력적이라 할만큼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뿐 아니라 특정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위치나 또는 각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들은 그의 행동을 제약하고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제약 조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각 개인들은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 대해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수동성을 갖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집단이나 사회가 단순히 개인들의 합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또 다른 특성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특정한 조직으로 잘 짜여진 집단은 단순히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비해 몇 배의 힘을 발휘한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집단은 그 자체가 마치 하나의 개체인 양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 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성립된 집단들은 다른 집단들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R. Niebuhr)에 따르면, "개인의 차원에서는 각 개인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해심을 갖거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집단 대 집단으로 만나게 될 때에는 언제나 이해 관계로 대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각 개인은 도덕적이 될 수 있지만 사회는 언제나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 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한의사 대 약사의 분쟁이나 미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분쟁에서 보듯이, 각 집단끼리는 대부분 이해 관계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 집단의 한 특성이 될 수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사발통문
본뜻 : 어떤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쓰지 않고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뺑 돌려 적은 통지문서 주동자가 누구인지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순서 없이 쓴 것이다.
바뀐 뜻 : 남들이 눈치채지 않게 일을 꾸미는 사람들까지 몰래 돌려보는 회람 형식의 문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이번에 추자도로 바다낚시 간다는 사발통문 받아 봤어? -3월 1일 오전 10시 탑골 공원에서 모이자는 사발통문이 제대로 다 돌았는지 모르겠군
터키말과 튀르크어파
우리말에서 과거를 나타낼 때 용언이 양성모음이면 ‘았’을 쓰고 음성모음이면 ‘었’을 쓴다. ‘길을 막았다’에서 ‘막’의 ‘ㅏ’가 양성이어서 ‘았’이, ‘밥을 먹었다’에서 ‘먹’의 ‘ㅓ’가 음성이어서 ‘었’이 쓰였다. ‘아라/어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소리 현상을 모음조화라 한다. 우리말에서는 소리흉내말에서 두드러진다. ‘촐랑촐랑, 출렁출렁’처럼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서로 어울린다. 이런 모음조화 현상이 잘 지켜지는 말이 터키말이다. 터키말에서 복수는 ‘-lar, -ler’로 표현하는데, 이들은 명사에 어떤 모음이 있느냐에 따라 같은 소리를 가진 형태가 선택된다. araba-lar(자동차), ekmek-ler(빵)가 그렇다. 터키말은 우리말보다 더 철저하게 모음조화가 지켜지는 말이다.
이 터키말이 알타이어족 튀르크어파에 든다. 튀르크어파는 역사책에 돌궐로 적혀 있으며, 오래된 비석글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그 대표적인 언어가 터키말이고, 거기에서 동북쪽으로 시베리아 동쪽까지 올라가면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말·우즈베크말·키르기스말·투르크멘말을 비롯하여, 중국땅에 있는 위구르말·살라르말, 러시아 쪽 알타이말·추바시말·야쿠트말 등 모두 서른 남짓 말이 분포하고 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되기도 한다. 이들 언어를 쓰는 민족들은 대부분 터키언어권에 든다는 유대감이 강하다. 말을 통해 겨레의 유대감을 굳건히 하는 좋은 보기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과대포장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의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이란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지나침’과 관련한 한자말에 ‘과대·과소’가 있다. 이는 ‘지나치게 크다’는 뜻과 ‘아주 작다’는 뜻으로 맞서는 듯하지만 ‘지나치다’를 큰 데도 작은 데도 적용한다는 점에서 조어상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과’(過)는 더하는 쪽에 어울리지 빼고 모자라는 쪽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이런 데서도 ‘말의 한계’를 본다.
“어느 때부터인가 별 볼 것 없는 내용에 책표지만 화려한, 과대포장하고 인공 성형한 책이 늘어났다.”(〈한겨레21〉431호) “연극은 인간 심성의 과대포장의 산물이란 게 한결같은 내 주장이야.”(김원우, 〈짐승의 시간〉)
이처럼 한 낱말처럼 굳어져 쓰이는 말에 ‘과대평가’ ‘과대포장’이 있다. 과대평가는 사전에 오른 말이나 과대포장은 아직 오르지 않았다. 내용물에 견줘 포장재를 지나치게 써 부피를 늘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장식을 덧붙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는 이런 뜻에서 의미가 확대돼 “업적을 과대포장하다”, “선거 공약을 과대포장하다”, “인물이 과대포장되다”처럼 사실보다 과장하고 지나치게 부풀린 것을 일컫는 데 많이 쓰인다.
공산품이 늘어나고 경쟁 상품이 생기면서 상품을 필요 이상으로 포장하는 일이 많아진 1970년대 이후 생긴 말로서, 그런 현상과 함께 좀체 사라지지 않는 말이 되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5)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두희는 문제의 황후로 조나라의 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명문 집안 출신이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찍부터 궁중에 시녀로 뽑혀 들어가 여후를 섬기고 있었다. 얼마 후 여후는 궁중에 있는 여인들을 제후들에게 후궁으로 보냈는데, 두희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두희는 조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조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저를 꼭 조나라에 보내 주시는 거죠?" 담당자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담당자는 막상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녀를 대나라로 가는 일행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그대로 여후에게 승인되었다. 그래서 두희는 할 수 없이 대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울며 불며 담당자를 원망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대나라는 북쪽의 오지로서 흉노와 국경을 맞댄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나라로 향했다. 대나라로 간 두희는 다행스럽게도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대나라 왕에게는 왕비가 있었고 그 사이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왕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왕비가 난 아들들도 이상스럽게 차례로 병이 들어 모두 죽고 말았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몰락하자, 중신들은 여씨를 싫어해 박희의 아들이었던 대나라 왕을 천자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대나라 왕이 황제로 즉위하여 몇 달 뒤에 태자를 정하게 되자 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두희의 장남(후의 경제)이 태자로 뽑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희는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그렇게도 가기 싫어했던 곳으로 가서, 결국 황후가 된 것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두희에게는 소군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했었기 때문에 소군은 너댓 살 때 장사꾼에게 팔려 가야 했다. 소군은 그 뒤 1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면 팔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양 땅에서 숯을 구으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그는 동료 백여 명과 함께 낭떠러지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벼랑이 무너졌다. 그래서 모두 압사당했으나, 오직 소군만이 요행히도 목숨을 건졌다. 소군이 무사히 살아간 뒤, 점을 쳐 보니 며칠 후에 제후가 된다는 점괘를 얻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소군은 이튿날 장안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그곳을 떠돌다 소문을 들으니 이번에 새로 즉위한 왕의 황후가 관진 출신으로 두시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혹시 어릴 적 헤어졌던 누나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 이름과 자기 성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옛날 누나와 뽕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두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곧 소군을 불러 들였다. 여러 가지 확인해 보니 그의 대답은 상소문과 똑같았다. 황제가 물었다.
"혹시 다른 증거는 없는가?" 그러자 소군이 대답했다. "누나가 나를 두고 장안으로 올라갈 때 주막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때 누나는 쌀 뜨물을 얻어다 제 머리를 감겨 주고 밥을 얻어 먹여 주었습니다. 그러고나서 누나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을 듣자 두희는 자기 동생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뛰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소군에게 집과 밭을 주고 또 후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덕망있는 학자들을 그와 사귀게 하였다. 하지만 소군은 결코 자랑하지도 않고 뽐내는 일 없이 겸손한 자세로 살아갔다. 그 후 소군은 제후로 임명되었다. 또한 두희의 사촌 형제인 두영은 용기있는 사람이었으며, 오초 7국의 난 때 진압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을 받고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 갔다. 한편 두희는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들인 경제를 비롯해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나 노자의 글을 즐겨 읽게 되었다.
밀어 주려면 확실하게 밀어 주어라
두희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바로 경제와 양왕, 그리고 큰 딸이라는 의미의 장공주였다. 그런데 장공주는 출가한 후에도 자주 궁궐에 나타나 어머니 두희(두태후)와 함께 힘을 발휘하였다. 이때 경제는 할머니인 박희의 집안에서 박씨 여인을 맞아 황후로 삼고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박희가 죽자 바로 폐위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황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당시 경제에겐 모두 6명의 여자가 낳은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로 보면 율희가 낳은 유영이 가장 큰 아들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은 태자가 되었다. 한편 경제의 누나인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외조카인 태자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태자의 어머니인 율희는 시누이인 장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공주가 경제에게 많은 미녀들을 추천해 붙여 주었고 그 미녀들은 율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희는 장공주의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뒤부터 장공주는 올케인 율희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경제에게, "율희는 후궁들을 만날 때마다 내시를 시켜 뒤에서 침을 뱉게 하고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 같소."라고 율희를 비방하는 등 기회만 있으면 율희를 헐뜯었다. 이에 경제도 점점 율희를 멀리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경제가 몸이 아파 앞날이 걱정되던 끝에 율희에게 상의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식들을 잘 부탁하오." 그러나 율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들까지 돌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경제는 매우 속이 상했다. 이때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왕부인의 외아들(뒤의 한무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래서 그녀는 왕부인과 짜고 율희를 어떻게든 쫓아내려 했다. 그 무렵 율희는 자기가 황후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경제에게 자주 말해 봤지만, 경제는 계속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부인은 공작을 꾸몄다. 즉, 시종관을 시켜 황제에게 율희를 황후로 맞아야 한다고 진언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시종관이 경제를 찾아 뵙고 말했다.
"아들이 귀하면 어머니도 귀한 법입니다. 지금 태자의 어머니가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마땅히 황후로 맞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완전히 격노했다. 그리고는 바로 시종관을 투옥시키고 처형시켜 버렸다. 또한 태자까지 폐위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분을 참지 못한 율희는 마침내 자살해 버렸다. 그 뒤 왕부인이 황후가 되었고, 그 아들 철이 태자에 올랐다. 그리고 태자는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한나라를 전성시대로 이끈 무제였다.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인 황제
한무제는 영걸스러운 황제였지만, 초기에는 주위의 여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16세에 즉위한 무제에게는 우선 할머니인 두태후가 있었고 어머니 왕태후가 있었으며, 그리고 장모이면서 고모이기도 한 장공주도 있었다. 이들 모두 무제를 황제로 만든 일등 공신들이었다. 두태후는 노자에 심취해 유교를 선호하는 무제와 그를 둘러싼 신흥세력을 결사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두태후의 친족인 두영과 왕태후의 이복동생인 전분은 인척 관계를 이용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러 방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무제의 부인은 진황후였는데 바로 장공주의 딸로서 사촌간이었다. 그런데 진황후는 자기 어머니인 장공주가 무제의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점을 항상 과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른바 석녀였다. 설상가상으로 무제의 형제는 1남 3녀로 모두 여자 형제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무제는 온통 여자들에게만 포위되어 있는 셈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이러한 무제를 가엾게 여긴 사람이 다름아닌 누나, 평양공주였다. 그녀는 출가했으면서도 무제와 잘 통했고 그래서 무제는 자주 그녀의 집에 놀러갔다. 평양공주도 그러한 무제를 위해 성대한 잔치도 베풀고 미녀들로 하여금 시중까지 들게 하였다. 어느 날 무제가 평양공주의 집에 들러 잔치를 벌였다. 그때도 역시 미녀들이 나왔는데, 무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노래를 부르는 기회가 나왔는데, 무제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당시에는 귀인이 용변을 본 후에는 옷을 모두 갈아입어야 했다. 그래서 하인 한 명이 언제나 수행하도록 했다. 그 날 무제가 가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안 평양공주는 그녀에게 그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변소라 하지만 공주의 집인지라 옷 갈아 입는 곳도 매우 넓었다. 어쨌든 그녀는 평양공주의 하녀로 위청의 누나였다. 그 뒤 위자부는 궁중에 들어가 아들을 낳고 드디어 아기를 못 낳는 진황후 대신 황후가 되었다. 진황후는 그 후 미도를 했다는 죄로 유폐되었다. 미도란 나무로 만든 인형을 땅 속에 묻어 특정 인물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엄격한 법 적용으로 혹리로서 유명한 장탕이 심리했는데, 무제는 처형하는 대신 그녀를 유폐시켰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2장. 총알도 뚫지 못한다.
발명 또는 발견의 계기가 되는 우연이라는 것은 화합연구에서는 실지로 온갖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출발물질 중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불순물의 존재일 때가 있었다. 이것은 예컨대 크라운 에테르를 발견함으로써 찰스 J. 페더센과 도날드 J. 크램 그리고 장 마리렌 이상 3인이 1987년도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경우이다(제36장). 또 어떤 경우에는 우연한 촉매의 존재로써 나타나, 영국의 화학자들이 에틸렌 중합에 이용하여 레이다용의 이상적인 절연체를 적시 적절한 때에 제조할 수가 있었다(제26장). 그리고 때로는 필요한 시약이 약품고에 없어서 무엇이든 다른 것으로 대용했다는 실로 단순한 계기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연구소에서 어떤 유용한 폴리에스테르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발명된 폴리에스테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종류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매일 접촉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다.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라는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자동차 범퍼나 미등이 이것으로 되어있을지도 모르고, 제트비행기의 좌석 옆의 창문에 사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대통령이나 로마 교황의 자동차가 이것으로 방호되어 있는 것을 당신이 보았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런 것들 중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1953년의 어느날 다니엘 폭스가 약품고에서 원하는 물질을 찾지 못했던 사건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년 전에 오클라호마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폭스 박사는 뉴욕 주스케넥터디에 있는 G.E. 사의 연구소에서 고온도와 고습도에서도 분해되지 않는 전자 자석용 전선의 절연체를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룹의 기획회의에서 "가수분해에 견고한 폴리에스테르만 있다면 좋겠는데..."라고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장황스럽게 투덜댔다. 즉, 이것을 열이나 습기로 분해되지 않는 폴리에스테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폭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전에 박사연구원으로 연구하고 있을 때에 구아야콜이라는 페놀성 화합물의 탄산에스테르가 예상외로 가수분해가 안 되는 사실을 알고 그는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형태의 화합물이 대체로 물에 분해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약품고로 가서 구아야콜과 화학적으로 가까운 비스-구아야콜을 찾아보았다. 그는 이 화합물을 분자의 양끝에서 연결하여 원하는 폴리에스테르로 만들 작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게 약품고에는 비스-구아야콜이 없었으므로 폭스는 관련된 화합물인 비스페놀(bisphenol)A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마침 그 무렵에 시판되기 시작한 에폭시 수지의 성분이어서 엽가이고 입수하기가 쉬웠다. 탄산알킬(지방족 탄산에스테르)류를 비스페놀A와 가열하는 실험을 몇 번인가 시도했으나 잘 될 것 같지가 않아서 폭스는 방향족 화합물인 탄산디페닐을 비스페놀A와 가열해 보았다. 이 반응의 부생성물로 예상되는 페놀(끓는점이 높은 액체)을 반응용기에서 증류함에 따라 용기의 내용물은 점점 점도가 높아졌다. 서서히 온도를 올리고 압력을 내림으로써 끓는점이 높은 페놀을 더 제거했다. 이것을 하는 도중에 휘젓는 교반봉이 더 이상 돌지 않게 되고 모터가 멎어버렸다. 생성물은 점도가 너무 강해 플라스코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그대로 냉각시켰다. 냉각되자 생성물은 굳으면서 줄어들었고 플라스코의 유리에서 분리되었다. 폭스가 플라스코를 깨고 굳은 내용물을 꺼내보니 교반봉 끝에 반구형의 덩어리가 되었으며 군데군데 유리 플라스코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1987년의 강연에서 폭스 박사는 그 후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 생성물 덩어리를 두들겨 보고 콘크리트 바닥에 던져도 보았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무에 못을 때려 박는 망치 대신으로 쓸만도 했다. 결국 톱으로 단면을 자르고 그 몇 개를 섭씨 300도쯤의 온도에서 압축하여 천연 그대로의 필름으로 만들었다. ... 연구소에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고분자화학자가 많이 있었는데도 우리 그룹의 대부분은 열가소성 고분자의 합성에 관한 경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으며 또한 이 포리카보네이트처럼 색다른 고분자의 상업적인 중요성에 관해서 전혀 평가할 줄을 몰랐다. 간단히 말해, 폴리카보네이트의 활용은 한동안 보류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특히 신규사업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여 피츠필드에 생긴 G.E.사의 화학개발부가 새로운 연구과제를 찾고 있었다. 당시의 개발부장은 피츠버그 판 유리(P.P.G.) 사에서 옮겨 온 페츠커스 박사로 그는 P.P.G.사에서 지방족 폴리카보네이트에 관해서 상당한 경혐을 쌓았었다. P.P.G.사의 저융점에서도 부서지기 쉬운 지방족 폴리카보네이트와 G.E.사의 고용융점에서도 매우 강한 방향족 폴리카보네이트의 차이를 아는 그는 당장에 초기의 폴리카보네이트 개발을 위한 옹호자가 되었다. 새로운 플라스틱 개발이라는 것이 시간도 걸리도 간단하지는 않지만 결국 G.E. 사는 성공하여 갖가지 새로운 응용을 발견했다. 그런데 방향족 폴리카보네이트를 개발하고 있던 곳은 G.E. 사뿐만이 아니었다. 제조법은 다소 다르지만 독일의 바이엘 사도 잘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스의 발견은 사실상 재발견인 셈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용도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어떤 고분자였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것과 유사한 고분자가 1902년에 이미 독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G.E. 사가 강조한 것은 폴리카보네이트의 투명성과 강도였다. 곧, 다른 플라스틱들도 ' 폴리카보네이트와 거의 같은 정도로 강하다' 거나 '폴리카보네이트와 같은 강도' 등의 광고를 내게 되었다. 폴리카보네이트는 투명하고 매우 강하며 넓은 온도범위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투명한 방탄 구조물을 만들 수 있으므로 대통령이나 로마 교황을 지키는 보호물, 외국 대사관의 건물, 은행 출납부의 창구, 교도소의 철창이 없는 창문, 값을 메길 수없을 만큼 귀중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피복, 아이스하키 경기장의 관객 보호용 받침대, 초음속 제트기의 지붕, 스쿠버 다이빙용 마스크, 기동대원이 사용하는 방패 등에 이용된다.
폴리카보네이트의 강도, 투명성, 증기 멸균이 가능한 성질 등의 특성 때문에 우유병 5갤론(약19리터)들이 용기와 의료용 기구인 보호용 안경과 헬멧 등에고 사용되고 있다. 앰트랙(Amtrak:미국 철도 여객 운송 공사)의 앞 유리창에는 석탄덩어리가 부딪쳐도 깨지지 않도록, 또 항공기의 밖으로 나온 차양에는 새와 초음속의 속도로 부딪쳐도 끄떡없도록 각각 폴리카보네이트의 얇은 층으로 설계되었다. 그토록 철저하리 만큼 엄격성이 요구되지 않는 용도로는 승용차, 버스, 열차, 항공기의 창이나 항공기 객실의 선반, 자동차의 미등이나 새로운 디자인의 헤드라이트 등도 포함된다. 또한,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함으로써 충돌에 대비한 범퍼가 만들어지는 등 전세계에서 35종의 모델의 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다. 폭스 박사는 1987년의 강연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교반봉 끝에 붙은 반구형의 덩어리가 어디까지 성장하는가를 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또 개인적인 만족감의 크나큰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 우리는 그가 처음에 원했던 출발물질을 입수하지 못했다는 운 좋은 실패와 그 대신 세렌디피티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과 그리고 폭스 박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의 예민한 직관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대사간을 시켜 준다고 꾀는 심정을 꾸짖은 성세창
성세창(1481-1548)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번중, 호는 둔재이다. 예조 판서 성현의 아들이며, 김굉필의 제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23년에 국문을 받고 평해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벌받은 뒤에 불려 왔다. 인종 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장연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보다 앞서 중종 14년에 승지로 있으면서 시국이 위태롭게 될 기미를 알았다. 오래 전부터 김정, 이자와 친하였는데 매번 그들에게 서슬이 너무 날카롭다는 것으로 경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임명되어 집에 있었는데, 심정이 그가 청류들과는 뜻이 다르다고 여겨 성세창의 집을 찾아와 사간원 대사간을 시켜준다고 꾀었다. 성세창은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사양했다.
"용렬하고 우둔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지난날 국가에서 백면서생들을 처벌한 것은 실제로 애매하며 그들을 처벌하자고 북문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아뢴 것은 매우 올바르지 못하오. 언관(간관)의 직책에 있는 자는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의당 바로 간하여 그 잘못을 규명해야 할 것이오"
심정은 얼굴빛이 변하여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 일로 당시 재상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남곤이 죽자 정광필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 중종 23년에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때 성세창이 이조 참판으로 있었다. 성세창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식이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매우 법도가 있고 우아하였다.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다가 대제학을 맞게 되자 여러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필법, 서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절이라고 지목하였다.
|
|
|
글터 → 이글저글
|
권토중래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듭 다그쳐 온다는 것이니 한 번 실패한 자가 다시금 세력을 일으킨다는 뜻. 만당의 시인 두목 (803--852)이 항우를 읊은 싯귀에서 비롯된다. 두목은 두보와 견주어서 소두로 일컬어진 시인이었던 바, 항우가 31세로 세상을 떠난지(BC202) 천년이 지난 시기에 항우가 "싸움에 진 몸이 부형을 뵐 낯이 없다"고 자결했던 오강땅에 이르러, 그가 강동으로 돌아가서 재기를 기약하지 않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을 애석해 한 것이다.
'승패는 병가로서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감싸고 견디는 것이 사내인 것을. 강동의 자제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항우는 단순하고 격한 성품이었으며 그의 애인 우희와의 이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다. 그러나 당송팔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은 두목의 시에 대해 반대 의견이었으니 '강동의 자제가 지금 있다 할지라도 구태여 군주를 위해 권토중래 할까 보냐'고 노래하였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항우는 힘을 과신했다.'고 하였고 역시 당송팔가의 한 사람인 증공도 같은 견해였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마차를 때려야 하나 소를 때려야 하나?
명함을 파 가지고 다니는 스님들이 요즘엔 부쩍 늘었다. 명함이 없는 나는 명함을 받아 들고 어정쩡하게 하늘을 본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그저 스님의 법명과 연락처만을 기재한 명함을 두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스님이라고 해서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지 말란 법은 팔만사천 경전 중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나 명함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문제다. 주지직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00위원, 00간사니 해서 별별 해괴한 직함들을 스님이 가지고 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어서 명함의 크기를 아예 두 배, 세 배로 늘려야 할 판이다.
닭볏만도 못한 벼슬들을 자랑하며 내노라 하고 웃음짓는 스님들을 보면 대개가 몸집도 좋다. 얼굴에는 기름기가 찰찰 넘치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트렁크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골프채(?), 각종 증권, 주식까지 투자하나 보다. 기가 막히다. 나는 그따위 모습을 볼 때마다 성직을 핑계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협잡꾼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간판은 필요악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간판을 내걸어야 손님(신도)들이 푸닥거리하러 절집에 문전성시를 이루는가. 어찌 보면 사이비교의 교주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명예를 쾌락으로 여기는가. 그런 바지저고리 스님들을 보면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스님도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좋은 나라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이도 사기치는 이들도 종교의 자유를 들먹이는 걸 보면 불국토다. 무당박수모양 뻥뻥 튀며 다니는 가짜 스님들, 암살 테러 안 당하고 팔자걸음으로 그것도 탄탄대로로 내달리는 걸 보면.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새 왕조 설립의 욕망이 부른 반원친명정책)
작은 섬의 큰 사건
여의도가 한강 하류의 작은 섬이듯, 위화도는 압록강에 있는 작은 섬이다. 그러나 작은 이 섬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근조선의 건국을 예고하고, 나라 역사의 큰 물줄기를 소용돌이치게 한 곳이다. 서기 1388 년(우왕 14 년)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4 만여 명의 군대가 이성계의 명령을 받아 말을 돌린 곳이 바로 위화도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시 고려 임금이던 우는 폐위되었고, 고려 왕조 최후의 수문장이었던 명장 최영도 유배살이를 거듭하다 결국 목베임을 당했다. 실권을 손에 쥔 이성계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서 대토지소유자를 축출하는 등 차츰 새로운 왕조를위한 기반을 닦아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되었고, 나아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한차례 뒤틀어놓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현실성을 들어 이성계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민족자주성을 들어 그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 전에 이미 더 이상 진군할 생각이 없음을 우왕과 최영에게 거듭 밝힌 바 있었다. 그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작은 국가가 큰 국가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왜구가 침입할 가능성이 높고, 무덥고 비가 많이 내려 아교가 녹아 활이 못쓰게 풀어질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휘계통상 상급자였던 최영과 우왕은 이성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을 서둘렀다. 이에 이성계는 위화도에 머무르고 있던 군대의 공동 지휘자인 조민수를 설득해서 군대를 돌렸으며,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당시 이성계의 지휘에 따르던 군대는 4 만여 명에 가까웠으며, 최영이 거느린 군사의 수는 1 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성계가 지휘하는 군대는 절반 이상이 정예기병이었지만, 최영이 거느린 군사는 대부분 경비 보병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인지라 승리는 당연히 이성계의 몫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과 함께 요동정벌의 계획표는 백지장이 되었으며, 외교노선도 완전히 바뀌었다. 명나라는 정벌의 대상이 아니라 사대와 동맹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원나라는 보복과 응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최영과 이성계의 이력서
최영과 이성계는 모두 고려 말기의 명장이다. 고려 말기의 불안한 정세에서 내우외환을 받을 때마다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무공을 세울 기회는 물론 나이가 19살이나 많은 최영에게 더 많았고, 실제로 지휘계통에서도 늘 최영이 상급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먼저 1316 년에 태어난 최영의 군사경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로를 세워 벼슬길에 나섰으며, 1352 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여 호군이 되었고, 1354 년에는 원나라를 지원하는 원병 지휘관으로 출정하여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무인이 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1358 년에는 400여 척의 병선을 끌고 온 왜구를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고, 1359 년과 1361 년에는 홍건적을 격파하여 수도를 되찾는 데 결정적 공로를 세웠다. 또 1363 년에는 '김용의 난'을진압하기도 했다. 1364 년에는 처음으로 이성계와 함께 '최유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1376 년부터 5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왜구를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1335 년에 태어난 이성계의 군사경력도 화려한 편이다. 그는 1361 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로를 세웠고, 같은 해 홍건적과 싸워 개경을 탈환하는 데도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개경을 탈환할 때 가장 먼저 개경성에 입성한 인물이었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무장 나하추가 이끄는 수만 명의 군사를 맞아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끝에 그들을 대파하기도 했으며, 1364 년에는 최영과 더불어 최유의 모반을 진압했고, 여진족을 눌러 복속시키기도 했다. 1377 년에는 지리산 동부를 약탈하던 대규모의 왜구를 물리쳤고, 1380 년에는 전라도 운봉에서 아기바투가 지휘하는 대규모의 왜구를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일러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또 1382 년에는 여진을, 1384 년에는 왜구를 각각 물리쳤으며, 그런 공로로 말미암아 그는 늙은 최영의 다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업적을 세운 무인이었지만, 그들의 근본은 상당히 다른 편이었다. 최영이 순수한 무인관료였다면, 이성계는 자신의 통치지역과 사적 군사기반을 가진 무인문벌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국가에서 동원시킨 군대를 지휘하는 관료적 지휘관으로 별도로 사병을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1361 년 개경 탈환에 참여할 때도 이성계는 자기 집안의 세력근거지인 영흥지역에서 2천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왔으며, 그 이전에 박의의 난을 진압할 때도 사병을 동원했다. 그 뒤 그의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그의 사병도 계속 늘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여진족의 거주지역인 간도지역에서 원나라의 지방관리를 지낸 조상들의 세력을 이어받아 그곳에서 독자적인 실력을 기른 인물이다. 그는 원래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의 천호였지만,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반도에서 몰아낼 때 내응을 해서 공로를 세움으로써 고려 정부가 주는 벼슬을 받게 되었다. 고려 정부는 그의 공로와 세력을 고려하여 그에게 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임명하여 그를 동북지대 최고 실력자로 인정했다. 이성계는 바로 그런 배경을 업고 군사적 공로를 세움으로써 중앙정부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성계의 출발점은 처음부터 최영과 달랐으며, 정치적 선택도 최영과 같을 수 없었다. 자기 힘의 근거가 고려왕조였던 최영은 고려왕조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밖에 없었지만, 독자적 세력을 가진 이성계는 상황에 따라 고려왕조를 전복시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