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96 호
단기 4340. 11. 5 (음력 9. 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사람에겐 우정이 있다. / 윌리엄 블레이크 (영 시인)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온 정신을 한데 모아서
글씨를 쓸 때엔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한다. 글자 자체가 좋거나 나쁨을 미리 기대하지 말고 오로지 글자 쓰기에 정성을 기울인다. 쓴 글자가 교묘하거나 치졸한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의 분수와 공부한 노력이 따라 절로 결정될 뿐이다. 이러한 옛 성현들의 태도는 '기를 기르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로움을 모아 하고 그 결과를 마음에 두지 말라. 이 일을 절대 잊지 말고 무리하게 꾸미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현의 마음의 법은 반드시 글씨를 쓰는 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주자 또한 '일이 그 가운데 있으면 모든 점과 획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뜻을 멋대로 버려 두면 글씨가 거칠어지고, 예쁜 것을 취하면 글씨가 흐트러진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이른바 일이란 곧 정성을 말한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 서유석
사회주의와 복지 국가의 이념:사회적 평등
자본주의 경제는 사유 재산제를 근간으로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재산권, 특히 생산 수단에 대한 사유의 권리를 인정한다. 여기서 생산 수단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 생산의 근원이 되는 토지라든가 지하 자원과 같은 원천적 수단을 말하는데,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생산 수단의 자유로운 소유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토지를 임대해 주고 지대(땅 지, 대금 대)를 받아서, 또 그렇게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본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기계와 노동력을 사서 상품을 생산하고 그 판매 이윤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거꾸로 그러한 생산 수산을 소유할 수 없었던 노동자는 적으나마 생활비를 얻기 위해 자본가에 고용되어야만 했다. 약자의 입장에 있는 노동자의 삶은 점점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형식적으로 보장되었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있을 경우에는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계급에 있어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실질적 불평등의 결과에 다다랐던 것이다. 19세기의 마르크스에게서 비롯된 사회주의의 이념과 20세기의 혼합 경제적인 복지 국가의 이념은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즉 소유에 대한 무제약적인 자유만이 강조되었던 초기 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제기되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평등 이념이 새로운 내용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따르면,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불평등의 새로운 원천인 '생산 수단 소유에 있어서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실제적인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실현되어야만 경제적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한 의미의 법적,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가 확립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자유주의 경제의 부작용을 극복하려는 다른 하나의 시도인 복지 국가의 이념은 일종의 혼합 경제 체제를 지향한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럽 각국에서 원칙적으로는 사유 재산 제도와 개인적 의사 결정의 원리를 인정하면서도 개인적 권리의 남용을 막고 경제적, 사회적 형평을 추구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안적 시도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의 원칙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국가는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국민 전체에 대하여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그 기본적 기능으로 하게 된다. 그래서 의료 보험이라든가, 주택과 토지 등의 공공적 활용, 실업 수당의 지급, 무상 교육의 실시 등을 통해 모든 개인의 형평 있는 복지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한 이 두 가지 시도 역시 그 나름의 문제를 드러냈음은 물론이다. 우선 20세기에 진행되었던 사회주의 이념의 현실적 적용 시도들은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를 드러내면서 거의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 스탈린 식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특권층화된 관료 사회의 부패라는 원인 말고도 재산 증식의 유인을 상실한 근로 대중들의 생산성 저하가 실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지 국가의 시도에서도 동일한 난점으로 나타났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상적인 복지 국가로 지목되던 스웨덴의 경우, 가장 커다란 당면 문제는 사람들이 이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한 점수를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자.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공부할 의욕을 잃을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실업 수당을 받아 생활할 수 있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물론 복지 국가의 이념이 그렇다고 포기되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생산성이 심각하게 저하되면 결국에는 골고루 나누어 줄 자원 자체가 부족하게 되고 그 결과 복지 정책의 시해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는 현대의 경제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두 원리로서의 자유와 평등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민주 사회에서 개인간의 상호 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자유와 평등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보완하면서 민주주의를 끌고 나가는 요소로서,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렵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각 개인이 보람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삶의 조건들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만일 이러한 자유가 제한되면 보람있는 삶을 실현할 가능성은 그만큼 위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모든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욕구 실현만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 실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갈등과 충돌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나아가 각자가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상호간의 다툼 때문에 실제로는 욕구를 실현하기도 어렵게 되고 만다. 따라서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자유 경쟁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약은 사회 구성원,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이나 집단에서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결코 선별적이거나 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참고 문헌
K.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G.오웰, '1984년'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봉두난발
본뜻 : 봉두는 본래 쑥대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웃자란 쑥의 줄기같이 긴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진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쑥대강이 같이 헙수룩하게 마구 흐트러진 머리털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이 도령이 봉두난발에 거지꼴을 하고 들이닥치자 월매는 기가 막혔다 -요즘은 봉두난발 헤어스타일이 유행이라며?
‘뛰다’와 ‘달리다’
광복 뒤로 얼마 동안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면 “달려라! 달려라! 우리 백군 달려라!” 하는 응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을 지나고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뛰어라! 뛰어라! 우리 백군 뛰어라!”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온 나라 젊은이가 너나없이 ‘뛰다’와 ‘달리다’를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아예 두 낱말의 뜻이 본디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국어사전들이 이들 두 낱말의 본디 뜻을 그런대로 밝혀 놓았다는 사실이다. ‘뛰다’는 “있던 자리로부터 몸을 높이 솟구쳐 오르다” 또는 “몸이 솟구쳐 오르다”, ‘달리다’는 “‘닫다’의 사동사” “달음질쳐 빨리 가거나 오다” 또는 “빨리 가게 하다” “뛰어서 가다”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두 낱말의 뜻이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국어사전에서도 ‘달리다’를 “뛰어가다” 또는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서 ‘달리다’와 ‘뛰다’가 서로 헷갈릴 빌미를 두었다.
‘뛰다’는 본디 “제 자리에서 몸을 솟구쳐 오르는 것”이고, ‘달리다’는 본디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면 또렷하고 올바르다. 하지만 이런 본디 뜻을 올바로 가린다 해도 쓰임새에서는 조심스레 가늠할 일이 없지 않다. ‘뛰다’는 ‘뛰어 오다’와 ‘뛰어 가다’ 또는 ‘뜀박질’ 같은 쓰임새가 있어서 ‘달리다’ 쪽으로 자꾸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지역 언어
‘지역’(地域)은 ‘일정하게 나눈 범위의 땅’, ‘전체 사회를 특징 따라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지역 언어라 하면 ‘어떤 특징 따라 나눈 공간 영역에서 쓰는 언어’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행정을 중심으로 지역을 나누고 있어 남쪽의 경우는 서울·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제주 지역으로 굳혀 써 왔다.
사전의 뜻과 다르게 ‘지역’이라는 말을 ‘중앙’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잘못 다루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서울’도 하나의 지역에 지나지 않는데도 “지역 발전이 소외되고 있다”는 표현에서는 중앙과 대립하는 ‘지방’을 두고 하는 말로 쓰인다. 고장말(방언)을 ‘지역어’라 부를 때도 본디 개념에서 벗어난 채, ‘지방의 말’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적잖다. ‘지방’이란 개념에 ‘서울 이외의 지역’이라는 뜻이 있어 ‘지역’과 ‘지방’이란 말을 뒤섞어 쓰면서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방언학에서는 “방언이란 본디 균질적이던 한 언어가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화되어 생겨난 분화체로서, 특정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서만 사용하는 음성·음운·문법·어휘의 체계를 가리킨다”고 그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지역의 언어라고 할 때, 그 개념에는 한국어로서 가지는 보편적인 음운·통사·화용 현상, 문체, 어휘, 억양, 리듬, 음의 높낮이와 장단, 속담, 관용 표현은 물론, 고장의 고유한 언어 특성들을 포괄한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낚시질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한다. 엄청난 양의 지식 자원이 넘쳐나는 인터넷 세상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적절한 비유라 하겠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듯이 인터넷에서도 낚시질이 이뤄진다. 정보를 낚기도 하고 사람을 낚기도 한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으면 신나는 일인데, 인터넷에서 ‘낚시질’은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인다.
“낚였다!”란 한 마디 댓글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고 글 올린 사람에게 놀림을 당했음을 토로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낚시글’을 피할 수 있도록 경고를 주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낚시질’은 사실과 다르거나 엉뚱한 내용을 글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온갖 사은품을 내걸어 손님을 낚던 시대가 지나고 ‘낚시글’로 누리꾼들을 낚는 시대가 되었다. 낚시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떡밥’이다. 미끼와 함께 떡밥을 던져넣으면 물고기들이 몰려들듯이 인터넷에서 ‘떡밥글’을 올리면 누리꾼들이 너도나도 댓글을 단다.
실제 공간에 대응하는 가상공간이 생기고 그 가상공간에서 머물고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생활에서 쓰던 말들이 인터넷에서 새로운 뜻의 말로 탈바꿈한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다가 “배꼽 보여요!”란 말을 들으면 옷매무시를 고쳐야 하겠지만 가상공간에서 ‘배꼽이 보인다’는 말은 인터넷에 올린 사진이 안 보이고 ‘?’ 표시만 보인다는 뜻이니, 사진 파일을 다시 올려야 한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3) 과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진평)
다섯 번 과부된 여자에게 장가들다
진평은 젊을 적에 형인 진백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형은 진평의 재주를 알아 보고, 자기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큰 도회지에서 공부하도록 해 줬다. 이런 형의 태도를 그의 아내는 늘 못마땅해 하며, 어느 날 이렇게 투덜거렸다.
"저렇게 밥이나 축내는 시동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어요."
그러자 진백은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곧장 이혼해 버리고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때 근처의 동네에 장부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녀는 시집만 가면 남편이 곧 죽어 자그만치 다섯 번이나 과부가 된 처지였다. 평소 그 손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진평은 장부에게 찾아가, "손녀를 제게 주십시오."하고 청혼했다. 장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초상이 나서, 진평이 그 집에 가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부도 조문객으로 왔다가 진평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진평은 이를 눈치채고 핑계를 대어 상가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부는 몰래 진평의 뒤를 밟았다. 진평이 들어간 곳은 허름한 초가집이었고 문이라야 고작 거적대기로 가린 것이었다. 하지만 집앞에는 귀한 손님들이 다녀갔음인지 수레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장부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가 큰아들을 불러 말했다.
"네 딸을 진평에게 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겠느냐?" 그러자 아들은, "진평이라면 가난한 주제에 생업에 힘쓰지 않아 모두 비난하는 자이온데, 하필 그런 사람에게 딸을 준다는 말씀인지요?"하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장부는 끝내 우겨서 진평을 손녀 사위로 삼았다. 결혼 비용도 모두 장부가 지불해 혼사도 무사히 치뤘다. 그러면서 그는 손녀를 불러, "시댁이 가난하다고 조금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하고 단단히 훈계하였다. 그 후 진평은 마을 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는 항상 공평하고 매끄럽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모두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
의심나는 자는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할 때 진평은 형 진백과 작별하고 위나라에 찾아가 위왕 구를 만났다. 위왕은 그에게 벼슬 자리를 주어 등용했다. 진평은 이제야 자기의 큰 뜻을 펼 기회라 생각하여 위왕에게 여러 계책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헐뜯는 자들이 많아 결국 진평은 몰래 떠나야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항우의 군대가 황하까지 진출하였다. 진평은 청년 수백 명을 이끌고 항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드디어 항우가 진나라를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한 후, 진평은 높은 벼슬에 임명되게 되었다. 그 뒤 항우가 팽성에 도읍을 정한 자 오래지 않아 유방이 관중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진출할 때, 항우의 부하였던 앙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항우는 진평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 진평이 나아가 쉽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진평은 벼슬이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이 황하를 건너와 앙을 공격하니 앙은 항복해 버렸다. 이에 항우는 진평이 그들과 무슨 묵계를 하지 않았는가 의심하고 진평을 불러 추궁하려 했다. 진평은 변명해 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을 알고 오직 칼 한 자루만 지닌 채 몰래 도망을 쳤다. 진평은 가까스로 강까지 도망해서 나룻배를 간신히 타게 되었다. 그런데 사공은 첫눈에 그가 망명하는 장군임을 알아보았다. 준수한 외모와 깨끗한 옷차림, 그리고 혼자 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영락없는 망명 장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평이 분명 많은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기회를 봐서 진평을 없애고 재물을 빼앗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러한 사공의 마음을 알아보고 일부러 옷을 모두 벗은 후 같이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하니 못된 뱃사공도 비로소 그가 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탈출에 성공한 진평은 드디어 수무 지방에서 유방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방은 그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평은 자리를 뜨지 않고 유방 앞에 버티고 앉아 자신의 큰 뜻을 일장 연설하였다. 유방은 처음엔 건성으로 듣다가 어느새 진평이 말에 푹 빠지게 되었다.
"과연 천하의 모사일세."
그러더니 그날로 진평에게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여러 장수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진평이라는 자는 한낱 떠돌이에 불과한 한량입니다. 위나라에서도 쫓겨난 신세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자에게 장수들의 감찰을 맡기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더구나 진평이 여러 장수들에게 재물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반간계의 명수
말이 하도 많아지자, 유방은 장량을 불렀다.
"요즈음 진평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이에 장량이 대답했다. "진평은 항우에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사람을 쓸 줄 아시는 폐하께 찾아온 사람입니다. 지금 천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장군들에게 재물을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은 앞으로 항우 진영을 이간 공작하려는 반간계를 위한 자금의 조성 때문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그럼 그렇지. 내 눈이 틀릴 리가 있나."하며 좋아했다.
실제 진평은 그 후 항우 진영의 제일 가는 참모인 범증을 반간계로 실각시키는 등 항우 진영을 이간질하고 스파이를 심어놓아 정보를 빼내는 반간계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것은 항우 진영을 약화시키는 큰 이유가 되었다. 또한 진평은 유방을 호위하여 항우에게 완전 포위되었을 때 거짓 항복 사건으로 유방을 탈출케 하는 등 그 공로가 무척 컸다. 그리하여 진평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재패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0장. 오염된 물과 진흙에서 얻은 약
시클로스포린.
1981년 이래 시클로스포린(cyclosporine)은 인간의 장기이식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약은 거부반응을 억제한다. 거부반응이란 인간의 면역계의 작용으로써, 다른 조직을 인식하면 때로는 그 즉시 이식된 기관의 기능상실을 야기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시클로스포린은 놀라울 정도로 부작용이 적다. 1983년 하원 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알버트 고아(1994년 현재 미국 부통령)가 소집한 의회 공청회에서의 보고에서 피츠버그대학 의학부의 외과 의사인 토마스 스타즐 박사는 1979년에 이 약이 사용되기 전, 간장 이식은 가장 잘된 경우에서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20년간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사용된 약은 거부반응을 방지할 수 있을까하는 점에서 신용할 수 없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클로스포린을 사용하면서부터 이식된 간장 조직의 기능을 중요한 시기인 처음 1년동안 유지하고 있는 환자의 비율이 35%에서 내지 70%로 향상되었던 것이다. 존스 홉킨즈대학의 멜빌레 윌리엄 박사는 신장 이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미국 국내의 4개의 병원이 이 새로운 명역 억제제 시클로스포린에 관해서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만 이들 병원의 모든 연구자가 지금까지 이식의 생존율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시해 온 여러 가지 방법들은 이 약을 일반인에게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시클로스포린을 사용하면 모든 시체 신장 이식 수술이 80% 내지 90%가 성공하는 데 반해 사용하지 않으면 성공률은 5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장 이식 및 심폐 동시 이식에서도 시클로스포린에 의해서 크게 도움받고 있다. 스탠포드대학의 외과 의사 노먼 슘웨이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 12월에 시클로스포린의 사용을 시작한 이래 동종 이식된 심장에 임상검사상 거부반응이 발견된 예는 한 건도 없었다." 라고 한다. 시클로스포린 발견의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회사의 사원이 세계를 여행할 때 새로운 항생물질이 함유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미생물 테스트를 통해 알아보기 위해 흙의 샘플을 가지고 오도록 장려했던 제약회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스위스의 바젤에 있는 산도스 사도 이러한 회사 중의 하나이다. 1970년, 미생물학자 장 보렐은 미국의 위스콘신 주와 노르웨이에서 각각 여생자가 가지고 온 흙을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 결과 이 두가지 흙이 물에 녹지 않는 물질을 생산하는 두 가지 새로운 균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클로스포린A로 명명된 이 물질은 항생물질로서의 성질은 약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독성이 낮았기 때문에 테스트를 계속한 결과 보렐은 1972년 1월에 이 시클로스포린A가 현저한 면역 억제효과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산도스 사의 경영진은 면역관계의 연구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고 보렐에게 시클로스포린A의 연구를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보렐은 이 결정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다행히도 시클로스포린A의 연구는 계속하기로 허락받았다. 그는 이 면역 억제효과가 테스트했던 모든 동물종에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인체 실험을 시도해보니 물에 잘 녹지 않은 성질 때문에 체내 흡수의 문제가 생겼다. 그때 한 지원자가 젤라틴 캡슐에 넣어 내복해 보았는데 약 성분은 혈액 중에서 거의 또는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보렐은 운반의 방법에 문제가 있으며, 그 해결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진해서 소량의 물과 유화제를 함유한 거의 순수한 알콜 속에 약을 녹여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그는 '갈지자걸음'이 되었다고 보고했으나, 어떻든 2시간 후에는 그의 혈액 중에 약리학적으로는 활성인 농도의 약이 검출되었다(후에 경구 투여용으로 더 좋은 용제로 올리브 오일이 발견되었다).
1978년 6월, 영국의 외과의사들이 처음으로 시체 신장 이식의 부적합한 예와 골수이식 환자에 관하여 연구했다. 그 후 많은 연구자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성공을 거두었다. FDA가 약을 승인하여 장기 이식의 가능한 센터에서는 어디서든지 이 약이 보통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식되는 장기는 제공자의 신체로부터 환자의 신체까지 24시간 이내에 이송되어야 한다. 이 제약 때문에 어떤 정소에서 장기를 신체로부터 떼내어 다른 장소까지(통상 비행기로) 운송하여 시클로스포린A로 처방한, 이식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환자의 신체에 이식하는 조작을 빠른 속도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클로스포린A의 정식명은 지금은 단순하게 시클로스포린으로 바뀌었다.
시클로스포린에는 기생충으로 말미암은 병의 치료라는 또 하나의 놀랄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약은 열대 지방의 병의 근원이 되는 주혈흡층이라는 기생충을 죽인다는 것이다. 존스 흡킨즈대학 의학부의 어네스트 뷰딩 박사는 처음에 시클로스포린이 이 병의 증상을 어느 정도 개선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약이 기생충에 대한 직접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이다. 시클로스포린은 또 말라리아 원충도 몰아내어 없앤다. 이 역시 말라이아에 걸리는 얼마되지 않는 동물 중의 하나인 쥐를 실험할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시클로스포린은 클로로퀸에 내성을 갖는 말라리아 원충에도 효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클로로퀸은 1940년대에는 말라리아에 대해서 효력이 있었으나 베트남전쟁 중에 내성종이 출현했다).
거부반응억제와 기생충을 죽이는 효과가 시클로스포린에게 왜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화학구조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어서 11가지의 아마노산 성분으로된 고리형 분자이다. 그 중의 하나인 아미노산은 이미 알려져 있는 분자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천연아미노산이 L형(좌수형)인데 반하여 이것은 진귀하게도 D형이다(파스퇴르와 분자의 우수형, 좌수형에 관해서는 제12장 참조). 또한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아미노산이다. 시클로스포린은 이미 합성되었으며, 화합자들은 유도체나 유사체를 만들어서 그 구조의 어떤 부분이 이 생물학적 효력에 필수인가를 조사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아직 시클로스포린보다 뛰어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새로운 한 예이다. 산도스 사는 전세계 이곳저곳의 흙 속에서 흥미있는 항생물질을 탐구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심장이나 폐, 간장, 신장과 같은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장기의 이식 수술에 혁명을 일으킨 약을 발견하였으며, 다른 항생물질을 발전하는 것보다 중요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틀림없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조정과 저자를 숙연하게 한 대사헌 최숙생
최숙생(1457-152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진, 호는 고재이다. 성종 23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중종 14년(1519)에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최숙생이 사헌부 대사헌이었을 적에 서울 사대문 안의 무당들을 모두 내쫓아 동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와 서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에 모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성남에 있는 비구니들이 사는 건물을 철거시켰으며, 불상을 헐어 버리고 중들이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집 가운데 규정을 위반하고 멋대로 지은 칸살은 철저히 수색하여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위반한 칸살은 여지없이 철거시키는 등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키는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자 조정과 저자가 숙연해져 범법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그 무렵 이세정이 경서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에는 정통하고 능숙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써 이장곤, 성몽정, 김세필, 김안국, 김정국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이세정은 성품이 치밀하지 못하고 산만하며 옹졸하고 우직하여 재간이 없었으나,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조정에 추천하여 청양헌감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최숙생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이세정의 여러 제자들이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청양헌감에 대하여 넌지시 부탁하였다.
"우리 스승에게는 학문과 깨끗한 지조가 있으니 조심스럽게 대하고 고과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마시오" "그렇게 하겠소"
최숙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러나 최숙생이 충청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청양현감을 근무평점을 꼴지로 매겨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뒤 최숙생이 갈려서 중앙으로 돌아오자 김정국 등 세 사람이 최숙생을 찾아가 따졌다.
"충청도 한 도 안에 교활한 관리로 주민을 해롭게 하는 자가 그렇게도 없어서 하필이면 조세징수 실적이 부진한 자의 고과에 꼴지를 매겼단 말이오. 당신의 성적 고과가 잘못된 것 아니오?" "다른 고을 수령의 경우는 비록 교활하다 하더라도 도적은 제 하나 뿐에 불과하므로 주민들이 오히려 견뎌 낼 수 있소. 청양현감 자신은 비록 깨끗하긴 하지만 통제불능의 큰 도적인 고을의 여섯 아전이 그 밑에 있으니 주민들이 견딜 수가 없소. 그리고 또 뱃속이 텅빈 사람이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리겠소?" "스승님의 뱃속에는 육경이 꽉 차 있는데 어찌하여 텅비었다고 말하시오?"
김정국이 묻자 최숙생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스승 뱃속의 육경을 모두 가져다 나누어 자신들의 창자와 뱃속에다 가득 채워 가지고 그것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출세를 하였으니, 당신 스승의 배가 아무리 크더라도 거기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국척
국천 척지의 준 말이니, 머리가 하늘에 닿지 않도록 굽히고 땅이 꺼질까봐 조심스럽게 걷는다... 다시 말하자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용이다.
육조시대 송 나라의 범 엽 (398-445)이 지은 '후한서'의 전팽전에 보면 -공정한 진팽을 맞이하니 부도덕한 관리들은 국척하여 잔꾀를 부릴 여지가 없어졌다. 또한 육조의 양 나라 무제의 장자인 소명태자가 엮은 문선에 보면 장형의 동경부에 -어찌 국천 척지함에 그치랴. 더욱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고운 햇살 맑은 샘물
바람이 불었다. 무덤 위로 망초꽃은 시들어가고 산이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산 속을 떠돌던 안개, 산울림 사이에 이윽고 몸을 떠는 나뭇가지들. 입산금지 팻말과 철망 위에 앉은 빨간 고추잠자리 날개 위로 노을이 쌓였다.
저게 계룡산? 저게 오서산? 장곡사는 어디? 까치네는? 참 읍네는?
아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는 호기심. 호기심이 소년들을 흘려 상봉에서 산상봉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닙니다.
*신대철 시인의 "칠갑산 1" 중에서
그 옛날 경허 큰스님이 머무르셨던 곳 장곡사 누각 앞에 서니 깨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그배 익는 소리도 들렸다.
"공양하셨어요?" "아, 예." "이제 곧 달이 뜰 것입니다."
깊어 가는 칠갑산. 주지스님의 장삼자락이 노을에 펄럭거렸다. 내가 읊조린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주지스님은 산상봉의 만월을 가리켰다.
누가 둥근 거울 빚어서 저 하늘 높게 걸어 놓았나 그 바람 끝없어 온누리 구석구석 비추네
수작청원경(누구 수, 지을 작, 맑을 청, 둥글 원, 거울 경) 고현만장공(높을 고, 멀 현, 일만 만, 길 장, 하늘 공) 광명무한량(빛 광, 맑을 명, 없을 무, 한정 한, 수량 량) 편조십방중(치우칠 편, 빛날 조, 열 십, 방위 방, 가운데 중)
"입산해서 머리 깎고, 먹물장삼에 행건으로 복장만 갖춘다고 다 깨우치는 건 아닙니다. 근간에 보면 때맞춰 일어나야 할지 앉아야 할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아요. 똑바로 보고 뼈를 깎는 자세로 수행정진하는 길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스님의 말씀으로 천축 영산의 동조팔천 한빛(일광: 안 일, 빛 광)을 받아드니 날이 밝았다. 칠갑산 스님의 말마따나 그래도 법륜(법 법, 바퀴 윤)은 굴러가고 불일(부처 불, 날 일)은 빛났다. 비록 오탁악세(1)에 찌든 중생이지만 나무들 서로 몸을 비벼 불을 구하듯,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 쥐 잡을 때같이, 얼음을 밟고 강을 건너듯, 불붙은 머리의 불을 끄듯, 칠갑산 종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출발하는 아침. 고운 햇살, 맑은 샘물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다.
* 주1. 오탁악세(다섯 오, 흐릴 탁, 악할 악, 세상 세): 다섯 가지 종류의 더러움 모양이 나타나 악한 일이 많은 세상. 다섯 가지 더러움이란 첫째, 겁탁(겁탈할 겁, 흐릴 탁): 사람의 수명이 차제로 감하여짐에 따라, 또 시대가 흐려짐에 따라 입는 재액. 둘째, 견탁(볼 견, 흐릴 탁): 부정한 사상의 탁함이 넘쳐 흐름. 셋째, 번뇌탁(번민할 번, 번뇌할 뇌, 흐릴 탁): 마음이 번뇌가 가득하여 흐려짐. 넷째, 중생탁(무리 중, 날 생, 흐릴 탁): 인륜도덕을 돌보지 않고 악한 행위만을 일삼음. 다섯째, 명탁(목숨 명, 흐릴 탁): 인간의 수명이 차례로 단축되는 것.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1. 실패한 고려 르네상스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고문운동과 중국 르네상스
지루한 삼국시대가 끝난 뒤에 드러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중국 한족의 확고한 강세와 기마종족의 급격한 침체로 특정 지을 수 있다. 비록 대진이란 이름으로 기마종족 연합국가를 다시 세웠다지만, 이런 세력변화를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진이 멸망한 뒤에는 거란족 중심의 기마종족 연합국가인 요나라가 세워져 그 자리를 대신했으나, 그 또한 '백일몽'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기마종족의 탁월한 문명사적 업적들은 결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지않았다. 그 업적은 기마종족들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의 중심세력이었던 조선족(고려 이후의 우리 겨레)에 의해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중국 한족도 그런 업적과 전통을 수입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기반을 드넓히려 하였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기마종족들의 위대한 문명사적 업적들이 중국으로 흘러들었고, 남조신라와의 교류에 의해서도 많은 문화적 업적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문화적 의욕을 가진 중국 한족은 여전히 문헌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에게 부족한 문헌들을 고구려부터 구해달라고 요청한 데서도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난다. 사실 중국이 가지고 있던 문헌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헌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옛 문헌들로부터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참고가 될 만한 더욱 많은 문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근세의 출발점을 상징하듯 이 시기의 한족도 근세를 향한 시대병을 앓고 있었는데, 한유가 제창한 '고문운동'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한유의 고문운동은 당시 유행하던 문체인 사륙변려문을 반대하고 그 이전 시대에 많이 쓰였던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운동의 외형이지 본질은 아니었다. 한유의 고문운동은 얼핏 문체의 복고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결합하여 새로운 사상적 방향성을 창조해내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고문운동을 통해 문체가 훨씬 자유로워짐으로써 사상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기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한유는 그의 수필집인 "창려집"에서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의 유명한 수필 '스승에 대하여'는 일정한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폭 넓은 배움의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중국 르네상스 시기의 개방적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문운동 시기의 중국 문화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유종원이나 유우석도 고문운동의 지지자였지만, 그들이 모두 한유와 같은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유는 유종원 등과 달리 사상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했다. 그래서 한유의 사상은 그의 동료나 후계자들에 의해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게 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리학파 또는 주자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고문운동과 함께 시작된 중국 르네상스는 먼저 유교라는 테두리를 넓히려고 애썼다. 그들은 불교의 문헌과 도가의 문헌 및 기마종족계의 문헌을 소화해냄으로써 그것을 유교 재무장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기마종족계의 문화유산이었다.
원시 유교 그 자체가 기마종족적인 전통을 중국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를 중심사상으로 설정한 이상 그것과 호흡이 가장 잘 맞는 것은 기마종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실제로 고구려와의 전쟁 및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당나라로 흘러든 문헌들은 이런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했다. 먼저 성리학자들은 일원론적인 음양오행설을 수용했는데,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태극도설'은 일원론적인 음양오행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정호,정이 형제를 거쳐 주희에 의해 방대한 사상적 체계로 발전했다. 당나라 후반기에 출발한 중국 르네상스가 송나라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요컨대 당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후기에 이르는 350여 년의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기였던 셈이다.
성리학적 동아시아 질서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파의 사상은 유교를 중심으로 기마종족의 문화를 통합한 것이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는 불교와 도가까지 통합해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은 중요한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동아시아를 휩쓸 수 있었다. 첫째 요소는 당나라 이후 중국이 아시아의 최강자로 부각되었으며, 사상,문화적 측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위진남북조의 제자백가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족의 지적 활동은 매우 왕성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적 경향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이후 통합된 사상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둘째 요소는 새로 체계화된 성리학이 기마종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어서 기마종족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유 등이 정통으로 삼았던 유학도 원래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을 담고 있는 것인데다 새로 추가된 핵심적인 요소도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이었던 탓이다. 그러므로 한족을 제외한 아시아의 주민 대부분이 기마종족의 후예였던 상황에서, 성리학은 이제 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중국적 세계질서를 세울 사상적 무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로 성리학은 그것이 성립된 중국에서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기마종족 국가에서 더한층 엄밀해지고 체계화되는 기이한 현상을 드러냈다. 중국에서 성리학은 체계화됨과 동시에 섭적이나 왕수인 등 한족 고유의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지식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고, 뒷날 고증학파로부터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수입한 근조선에서는 별다른 비판조차 없이 찬란한 발전을 거듭했다.
뒷날 권근은 주돈이의 태극도를 계승하여 '천인심성합일도'를 그렸고, 이황은 천명도를 내세워 주리론 철학을 가장 높은 봉우리로 끌어올렸으며, 이이는 주기론을 상당한 경지로 끌어올렸는데, 이 모든 것도 결국 이런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성리학은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으로 구분되어 살아오던 문화적 경계를 허물어내기 시작한 엄청난 사상적 업적이었다. 실제로 성리학을 통해 동아시아 사회는 마침내 하나의 문화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성리학이 중국에 의해 체계화된 사상이고, 그 이후 동아시아의 주된 생활양식이 이 사상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또는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