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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1 호
단기 4340. 10. 31 (음력 9. 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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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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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하나여성 글 마을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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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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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함은 차분한 열정. / 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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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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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 공부
학문이란 단번에 뛰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므로 한두 해의 공부로 효과를 기대한다거나 만약 이처럼 마음을 먹었다면 이는 참으로 꼼꼼하지 못한 짓이다. 학문이란 죽을 때까지 닦아야 하는 일로서 비록 성현의 경지에 도달했더라도 끝났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보다 못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아플 경우, 불필요한 억지 탐색과 무리를 하지 말아야겠다. 인간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쳐 없어지는 법 공부만을 무작정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의 명백한 곳에 눈을 두고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면서, 이 속에서 한가롭고 편안히 쉴 필요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 결심을 굳혀야 한다. 이처럼 오랜 세월의 공을 쌓으면 마음의 병이 치료될 뿐 아니라, 흐트러짐 없는 정진의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찰의 공부를 생각에 떠올리지 말라는 말은 학자의 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의 병은 반드시 이처럼 한 뒤에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질을 바로잡는 일이 내게 있지 남에게 있지 않다'는 말은 참으로 불변의 이론이다. 그러나 엄한 스승, 훌륭한 벗과 함께 지내면 이끌어 주고 갈고 닦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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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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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2 장 과학 철학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우기동
인간의 범죄 행위의 궁극적 정보가 생물학적 특성에 있다는 입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입장은 어떤 실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그렇다고 환경, 문화적 요인에 있다는 입장에는 함정이 없는 것인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궁극적 요인은 생물학적인가 사회 문화적인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온갖 범행 수법과 잔인함, 그리고 완전 범죄를 노린 치밀한 사전 준비. 이번 7인조 '지존파'가 저지른 연쇄 납치, 살해, 시체 유기 사건은 지금까지 있었던 강력 범죄를 총망라한 집합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이어서 세상을 소스라치게 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살인 연습'을 통해 범행을 익히고 스스로 범죄자로서의 대담성을 키워 왔던 것으로 드러나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또, 대부분 20대 초반의 범인들은 '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세상에 증오를 느껴 보복하려 했다.'고 말해 우리 사회의 뒤틀린 윤리와 도덕성 회복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반인륜적 범행으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살인 사건에 관한 신문의 기사 내용(1994년 9월 22일)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종종 범죄형 인간에 관한 논란이 벌어진다. 과연 이 지존파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유형이 따로 있을까? 이들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심성을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을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범죄형 인간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생물학적 유전자의 특성이 있을까? 아니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아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지존파의 범인들이 말하듯이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에 대한 증오심'은 개인의 심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일까? 요컨대 인간의 행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존파와 같은 범죄 행위의 궁극적 정보는 생물학적 특성에 있을까? 아니면, 사회적 환경, 특히 문화에 있을까? 여기서 전자의 입장을 '생물학적 결정론'이라 하고, 후자의 입장을 '문화적 결정론(혹은 사회적 결정론)'이라 한다.
인간 행위의 궁극적 정보는 이미 유전자에 부호화되어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의하면, 자존파와 같은 범죄자들의 범죄 행위를 결정하는 궁극적 정보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유전자에 이미 부호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이러한 행위의 결정은 자연적으로 부연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결정론은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우익 경향의 보수주의 이념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발생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960년대 이후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신우익 경향의 보수주의가 뿌리 내리는 역사적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정치적, 경제적 착취와 식민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매판 성격을 지닌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이 벌어져 왔다. 대내적으로는 경기가 침체함에 따라 실업이 점차로 증가하고 여러 형태의 사회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났던 지배 엘리트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 인종주의의 대한 흑인의 투쟁,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투쟁, 권위주의 교육에 대한 학생의 투쟁, 복지 제도의 확립을 위한 투쟁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도전에 대하여 지배 세력은 기존의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신우익 이념은 단순한 보수주의를 넘어서서 구성원들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바로 이러한 신우익의 이념에 깔려 있는 철학적 전통이 개체론(individualism)과 환원론(reductionism)이다. 개체론은 집단보다 개체에 우선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측면에서도 개체의 권리가 집단의 권리보다 절대 우선권을 갖는다. 말하자면 개체론은 사회의 집단적 이해 관계보다 개인의 애해 관계를 우선시 한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은 17세기 홉스의 철학적 견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홉스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간관이다. 이러한 인간이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재산과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욕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이다. 여기서 홉스는 당시에 전개되고 있던 자본주의적 관계의 반휴머니즘적 상황을 일정한 방식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이러한 홉스의 견해를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상태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환원론은 복잡한 전체의 성질을 구성 성분으로, 그리고 사회를 구성원 개인들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단백질 분자의 성질은 그 분자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로 설명할 수 있고, 또 원자들은 그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들과 양성자들 그리고 중성자들로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백질 분자의 성질은 그 분자의 구성 성분인 원자들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원론에 의하면 사회의 특성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인간들의 특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고, 바로 그 개별 인간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홉스의 견해를 원용해서 설명하자면, 개인은 공격적이고 투쟁적이기 때문에 사회도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은 바로 이러한 개체론과 환원론의 철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삶과 활동은 개인을 만드는 세포들의 생화학적 성질에 따른다. 그리고 개인을 구성하는 생화학적 특성은 개인들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요컨대 인간들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의 작용 결과이다. 결국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유전자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특성, 즉 유전적 계승은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 역할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특성이 다르지 않고 또 그 역할도 다르지 않다면, 신(조물주)이 굳이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태도를 두고 있는 체계가 바로 '인간 우생학', '사회 생물학' 등이다. 서론에서 제기했던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지존파와 같은 범죄자가 천인공노할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 풍토가 만연해 있고 자신들이 돈이 없어서 열등감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건전한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반인륜적인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반인륜적인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즉, 범죄형 유전자가 부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인간이든 사회 질서든 기존의 것이 자연적이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신우익의 보수 이념은 이와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근거하여,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인종주의를 정당화하고, 부를 소유한 계층과 소유하지 못한 계층의 차이도 자연적 질서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생물학적 결정론은 인간적 특성과 기존의 사회 질서 체계를 정당화하는 신우익의 이념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사회적 환경(문화)의 영향이 결정적이다?
이에 반해서 사회적 환경 결정론, 즉 문화적 결정론에 따르면, 지존파와 같은 범죄 행위는 사회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그래서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결정하는 데에 생물학적 특성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문화에 의해서만 일의적으로 결정된다. 이와 같은 문화적 결정론은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를 문화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문화 환원론(cultural reductionism)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문화 환원론을 대표하는 견해가 '천박한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이다. '천박한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환원론(economic reductionism)'의 입장을 취한다. 즉, 인간의 지식과 문화적 현상은 경제적 생산 혹은 이 생산으로부터 파생된 사회 관계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경제사에서 나타나는 법칙이 역사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고 인간의 행동을 유발한다. 일상 생활의 고통과 건강하지 못한 상태 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 질서의 불가피한 결과다. 따라서 지존파와 같은 범죄형 인간은 그들의 생물학적 특성과는 전혀 무관하고 오로지 사회 환경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존파 범인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세상에 대한 증오'가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생겼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증오심이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사회 경제적 위치와 조건이 그들을 범죄형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천박한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는 인간 행위를 일단 개인의 수준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개인은 생물학적으로 텅 빈 상태이며, 문화적 백지 상태의 일종이다. 이러한 개인이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습득하게 되고, 이렇게 습득한 문화가 개인의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 요컨대 개인의 행동은 생물학보다는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이 개인의 행동을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환원하는 데 반해서,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는 개인의 행위를 그 개인이 접하는 문화적 특성으로 환원한다. 이렇게 볼 때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개인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과 일맥 상통한다. 이때 생물학적 결정론에서의 개인은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이며,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에서의 개인은 문화적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이다. 생물학적 특성은 철저히 개별적 특성인 데 반해서, 문화적 특성은 개인이 습득한 것이지만 사회적이다. 미국 사회에서 유태인들 중에 전문 직업인과 학문 연구자가 많은 것은 전문 지식과 박학을 강조하는 유태인의 문화적 전통에 기인한다. 그리고 최근에 이 분야에 일본인과 중국인이 많이 진출하는 것도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문화 사회학적 상대주의'의 설명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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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옥엽
본뜻 : 부모와 자식을 얘기할 때, 부모는 나무에 자식은 가지나 잎에 비유하곤 하였다. 금지옥엽이란 말 자체도 금으로 만든 가지와 옥으로 만든 나뭇잎을 지칭하는 말로서, 본래는 임금의 가족이나 자손들을 가리키는 존칭이었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귀여운 자손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내가 너를 얼마나 금지옥엽 키워 놨는데 그래 기껏 한다는 게 도둑질이냐? -외아들에 장손인 그가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컸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새말과 사전
영어사전으로 유명한〈웹스터사전〉은 해마다 새말 100개 정도를 사전에 추가한다. 지난 7월6일 이 사전 11판에 실릴 100여 새말 목록이 발표됐다. 그 중 ‘구글’(Google)이 으뜸 화제다. 인터넷 검색 회사 이름이 아닌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다”란 뜻의 일반동사로 싣는 것이지만 상호임을 존중해 표기도 대문자 그대로 살린다고 한다.〈옥스퍼드사전〉은 개정판에 실을 새말 조사작업을 1990년대 초부터 시작했다. 직원은 8명 정도지만 프리랜서와 봉사자를 합치면 20명 이상이 새말을 조사한다. 여기에 올린 새말 중 논란이 된 낱말로 ’머글’(muggle)이 있다. ‘머글’은 소설〈해리 포터〉에서 “마법을 못 쓰는 보통 사람”을 일컬었는데, 단지 소설가가 만들어 낸 말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 분야의 속어로 널리 쓰이면서 올림말이 됐다. 사전에서 이 낱말을 발견하고 자격이 있는 말이냐고 문제 삼는 이들이 있었으나 편찬자들은 속어라도 널리 쓰이면 사전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99년에 발간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90년대 중반부터 수집한 새말을 올림말로 실었다. ‘노숙자, 지자체, 도우미, 간판스타’ 등이 그 보기다. 새말이 생겨나서 정착이 될 때까지 10년은 걸리는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그 주기가 줄어들고 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말 중에 우리 삶에 스며든 새말을 잘 골라 사전에 싣는 것도 편찬자들의 소임이라 하겠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사라져가는 언어(2)
인류 문화의 값진 유산인 언어가 사라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언어학자들은 세계 6천여 언어 중 일천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23%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사라질 위기에 놓인 언어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북아메리카에는 165가지 토박이말이 쓰이는데, 그 중에 74가지는 몇몇 노인들만 쓸 뿐 거의 절멸 상태이며, 58가지 언어는 일천 명 미만이 사용한다고 한다. 중남아메리카 400여 언어 가운데 27%인 110가지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 가운데 ‘코아이말’은 지금 한 가정에서만 사용하고 있으며, 멕시코에 있는 ‘올루테코말’은 10여 명의 노인들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남북아메리카에서 토박이말을 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는 파라과이를 제외하고 어느 나라도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오세아니아주에서는 1년에 한 언어씩 사라진다고 한다.
천년 전까지만 해도 위력을 떨치던 유럽의 아일랜드말, 스코틀랜드말, 게일말, 브르타뉴말도 사라질 위기에 놓인 형편이다. 아일랜드말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이제 젊은이들이 더는 배우기를 바라지 않아 가정에서도 쓰이지 않는 형편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대표적인 언어는 일본 쪽의 ‘아이누말’을 비롯하여 ‘만주말’이 있다. 우리말과 관련을 맺고 있는 알타이어족의 여러 말들이 만주말처럼 사라질 위기에 놓인 셈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엎어지다와 자빠지다
어느 대학교수가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 깨진다더니”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엎어지면 아무리 재수 있는 놈이라도 코가 깨지기 쉽다. 이분은 “재수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 깨진다” 하는 속담을 잘못 끌어 썼다. 어찌 이분뿐이랴! 아무래도 요즘 젊은 사람의 열에 예닐곱은 ‘엎어지다’와 ‘자빠지다’를 제대로 가려 쓰지 못하는 듯하다. 제대로 가려 쓰자고 국어사전을 뒤져도 뜻가림을 제대로 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엎어지다’는 앞으로 넘어지는 것이고, ‘자빠지다’는 뒤로 넘어지는 것이다. 두 낱말 모두 본디 사람에게 쓰는 것이었으나 사람처럼 앞뒤가 있는 것이면 두루 쓰였다. 비슷한 말로 ‘쓰러지다’가 있다. ‘쓰러지다’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모로 넘어지는 것이다. 앞으로든 뒤로든 모로든 그런 걸 가리지 않으면 그냥 ‘넘어지다’ 한다. ‘넘어지다’는 ‘엎어지다’와 ‘자빠지다’와 ‘쓰러지다’를 모두 싸잡아 쓰는 셈이다. 사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우리 고향에는 ‘구불지다/굼불지다’도 있다. 이것은 가파른 비탈에서 넘어져 구르기까지 하는 것, ‘넘어지다’와 ‘구르다’를 보탠 것이다.
이것들과 뜻이 아주 다른 말이지만 뒤섞어 쓰는 것에 ‘무너지다’도 있다. 이것은 본디 물처럼 아래로 부서져 내린다는 뜻이다. 엎어지나 자빠지나 쓰러지나 넘어지나 일으켜 세우면 본디대로 되지만 무너진 것은 본디처럼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그만큼 다른 낱말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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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8.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진승, 오광)
한 점 불꽃이 광야를 불사르다
한편 반란군들이 뿔뿔이 흩어져 진승의 군대에 패색의 기운이 감돌자 갖가지 음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형양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오광의 부하들 중에서는 오광을 없애려는 음모까지 생겨났다. 어느 날 오광의 부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장이라는 장수가 이렇게 제의했다.
"엊그제 주문의 군사도 대패하여, 주문이 자결하였다. 그 주문을 이긴 장한의 군대는 반드시 이쪽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곳 형양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장한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우리 패배는 불보듯 뻔하다. 우선 형양을 포위할 병력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정예군은 장한의 공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오광이란 작자이다. 그 작자는 욕심만 태산처럼 많을 뿐, 병법에는 일자무식이다. 도무지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선 오광부터 없애야 한다. 오광이 있는 한, 우리는 개죽음 당할 뿐이다."
이 제의에 나머지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오광을 죽이고, 그 머리를 진승에게 바쳤다. 진승은 매우 화가 났으나 모든 장수들이 들고 일어난 일인지라 할 수없이 전장에게 장군의 자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전장은 정예군을 이끌고 형양성을 빠져 나가 장한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장은 여지없이 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전장을 격파한 장한은 여세를 몰아 진승의 척후대를 궤멸시켰으며, 계속하여 진승의 본부대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진승도 손수 출전하여 독려했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크게 패배한 진승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승은 자신의 수레를 끌던 마부 장가라는 사람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장기는 진승을 죽인 후 진승의 시체를 들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승의 부하였던 장군 여신이 다시금 군대를 조직하여 점령당했던 영토를 되찾고 장가를 처형시켜 원수를 갚았다. 그리하여 진승은 왕이 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진나라를 멸망의 길로 빠뜨린 주역이었다. 실제 그가 각 지방에 파견했던 장군들이 곳곳에서 진나라를 격파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스스로 완성을 시키지는 못했지만 진나라 붕괴의 서막을 열어젖히는 반란의 불꽃을 피워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불꽃은 유방에 이르러 천하제패의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방은 천하 통일 이후 진승의 묘를 크게 짓고 제사도 성대히 모시도록 하였다.
옛 친구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
진승이 왕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머슴살이를 할 때 함께 일했던 옛 친구 하나가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궁궐의 문을 두드리며,
"진승을 만나고 싶다." 라고 청했다. "웬 놈이냐. 냉큼 사라지지 못할까."
수문장의 서릿발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가 진승과 매우 친했다는 등 계속 떠벌렸다. 하지만 수문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계속 문 앞에 있다가 외출하려는 진승을 보았다.
"승! 날세."
진승도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자기 수레에 그를 태워 궁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궁궐을 처음 본 그 친구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기막힌 곳이구나. 승이도 정말 출세했군. 도대체 이 집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거야?"
진승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그 친구는 마음대로 궁궐을 출입하며 멋대로 행동했다. 또 아무에게나 진승과 같이 머슴살이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다. 이윽고,
"그 시골 사람은 곤란합니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지껄이고 다녀 대왕의 위엄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진승은 결국 그 친구를 잡아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자 진승의 옛 친구들은 모두 궁궐에서 자취를 감추고, 진승은 외로운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진승은 주방과 호무라는 두 사람에게 감찰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무슨 일이든 엄격하게 문초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도 왕의 명령을 완전히 따르지 못했다고 죄인으로 취급하여 포박하려고 덤빌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진승은 무조건 신뢰하였다. 그래서 모든 장군들이 진승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이것이 진승의 패인이었던 것이다. 실로 가까운 친구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는 옛말은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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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7장. 테플론(원자폭탄에서 프라이팬까지)
테플론(Teflon)이라는 것은 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에 대한 뒤퐁 사의 등록상표이며 달라붙지 않은 프라이팬에서 우주복, 인공 심장판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사용되며 매상은 10억 달러에 달한다. 그것은 뒤퐁 사의 젊은 화학자 로이 J. 플랑켓트에 의한 우연한 발견의 결과인데, 그는 이 운명적인 날인 1938년 4월 6일의 겨우 2년 전에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갓 학위를 받았다. 이날 플랑켓트는 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에서 독성이 없는 냉매를 만들 목적으로 이 가스 봄베의 밸브를 열었다. 그런데 아무 가스도 나오지 않아서 플랑켓트와 그의 조수 잭 리복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봄베의 무게는 불화탄소(플루오로카본)의 기체가 가득 들어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므로 플랑케트는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봄베로 냉매의 연구를 계속하는 대신 이 '비어있는' 봄베에 대해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밸브의 주둥이에 철사를 밀어넣어 보고 봄베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봄베를 톱으로 가로 잘라 보았다. 그 속에서는 매끈한 하얀 분말이 나타났다. 화학자인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즉각 이해했다. 테트라 플루오로 에틸렌의 기체분자가 서로 중합되어 고체의 물질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이 화합물이 중합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 신비한 '비어있는' 봄베 속에서 그것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루워졌던 것이다. 이 우연한 발견과 이 폴리머의 이상한 성질에 용기를 얻어서 플랑켓트와 뒤퐁 사의 화학자들은 바로 '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을 필요에 따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 왁스와 같은 백색 분말은 실로 놀라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산과 염기 그리고 고열에서도 끄떡없으며 어떠한 용매에도 녹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래보다 불활성인 한편, 모래하고는 달라서 미끈미끈하다. 그러나 이런 재미있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하더라도, 만일 제2차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새로운 폴리머에 관해서 오랜 세월동안 그 이상의 연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매우 고가였기 떄문이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원자폭탄 제1호의 제조에 관계하고 있던 과학자들이 원폭용 우라륨-235를 제조하는데 사용되는 물질의 하나로써 6플루오로화 우라늄이라는 위험한 부식성 가스에도 끄떡없는 개스킷(gasket)용의 재료를 필요로 하는 새태가 일어났다. 미국 육군의 원자폭탄 계획 담당의 책임자였던 레슬리 R. 그로브즈 장군은 우연히 뒤퐁 사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이 개발한 매우 불활성인 새로운 플라스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비슷한 우연의 정보로 인해 영국에서 레이다 설비용 절연체로서의 폴리에틸렌 사용이 전쟁 중 개발을 촉진하게 된 이야기에 관하여는 제26장을 참조할 것). 그것이 고가라는 것을 들은 그로브즈 장군은 가격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미끈미끈한 폴리머는 혼합해서 개스킷과 밸브로 성형되었다. 이것들은 확실히 부식성인 우라늄 화학물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뒤퐁 사는 전쟁 중에는 테플론을 이 용도로만 제조했다. 일반 국민은 전쟁 후까지 이 새로운 폴리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실제로 테플론으로 도금한 빵 찌는 판과 프라이팬이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었다. 여러 가지 새로운 폴리머가 그렇듯이 처음 대중용으로 생산된 이들 테플론 제품은 약간 기대에 어긋났다. 이 플라스틱은 달라붙지 않은 조리용 기구의 표면에 접착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부들의 습관대로 박박 문지르다 보면 냄비나 프라이팬은 벗겨지는 것이었다.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여 실험해 본 뒤퐁 사는 1986년에 테플론 가공의 4세대 째인 실버스톤 슈프러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3세대 째인 실버스톤보다 2배의 내구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 동안 그 외에도 많은 용도가 개척되었으므로 조리 기구의 가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플랑켓트는 1910년 오하이오 주 뉴 칼라일에서 태어났다. 1932년 맨체스터대학을 졸업했으나 대공황이던 때라 직장을 얻지 못하고 오하이오주립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유명한 화학자 폴 폴로리와는 대학과 대학원 동급생이자 친구였다. 플로리는 고분자 물리화학의 업적으로 1974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로이 플랑켓트는 1936년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뒤퐁 사의 잭슨연구소에 들어가서 냉매로서의 플루오로카본을 연구하도록 명 받았다. 이 연구 중에 젊은 플랑켓트는 극적으로 테플론을 발명해 냈던 것이다. 그 후의 테플론의 개불은 고분자 제품을 그때까지 주로 취급해 온 뒤퐁 사의 다른 부문에 인계되었다. 플랑켓트는 화학자로서 다른 일로 옮겼으며, 곧 이어서 뒤퐁 사의 플루오로카본과 4에틸연 제조부서의 관리직으로 출세했다. 프레온 제품이 부장이던 시절에는 텍사스 주 코퍼스 크리스티 부근에서 공장 설치에 전력했다. 1975년에 뒤퐁 사를 퇴직한 후 플랑켓트 부부는 코퍼스 크리스티 가까이에 있는 섬의 별장에서 지내며 낚시와 골프를 즐겼다. 플랑켓트는 모교인 맨체스터대학과 오하이오주립대학 그리고 워싱톤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시로부터 존 스코트 메달과 아메리카 제조업협회, 플라스틱공업협회, 아메리카 화학자협회 등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973년에 그는 플라스틱전당에 가입하였으며, 또 1985년에는 아메리카 발명자 영예 전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플랑켓트는 이러한 영예 이상으로 전세계 수백만의 생명에 불 밝힌 테플론 이용법의 다양성에 긍지를 갖고 있다. 그는 테플론재의 대동맥이나 맥박 보조기가 신체 안에 장치되어 있는 덕택으로 오늘도 살아있다는 편지나 전화가 너무 많아서 다처리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체가 거부반을을 일으키지 않는, 많지 않은 물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테플론은 인공 각막이나 턱, 코, 두개골, 허리나 무릎 관절 등의 인공뼈, 귀 부분, 인공 기관, 심장 판막 또는 힘줄이나 봉합용 실, 의치, 담관 등에 사용할 수 있다. 테플론은 우주복의 외피감으로서도 사용되었다. 전선이나 케이블의 절연체로서 달에서 태양으로부터 강력한 복사열에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선의 선단 부분이나 기타의 내열 보호막 또는 연료탱크에도 테플론이 사용되고 있다. 이 훌륭하고 귀중한 응용도 모두 로이 플랑켓트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명 우연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발견된 것은 우연을 만나 사람에게 호기심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로이 플랑켓트가 불소(플루오린)의 화합물에서 냉매를 개발함에 있어서 또 하나 다른 세렌디피터적인 일이 있었다. 1928년 제너럴 모터스 사의 냉장고 부서의 찰스 F. 케터링은 당시 냉장고에 사용되고 있던 암모니아와 이산화유황과 같은 유독 유해한 물질 대신에 안전한 무색, 무취, 무미, 무독, 불연인 냉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화학 문헌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토마스 미즐리와 알버트 헨은 불소와 염소를 모두 함유하고 있는 탄소화합물을 결정해야 하는 단계에까지 갔는데 불소의 화합물이 때로는 유독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독성의 보고를 시험하기 위해 미즐리와 헨은 간단한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의 견본을 합성해서 그것으로 동물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약회사에서 3불화안티몬 28그램이 들어있는 다섯 병을(그 당시 미국에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주문했다. 그들은 이 다섯 병 중에서 한 병을 무작위로 선택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을 합성시켰다. 이 클로로플루오로카본 화합물의 가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불소를 함유한 유기화합물은 독성이 없다는 그들의 믿음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이 실험을 재확인하기 의하여 두 사람은 다른 병에 들어있는 3불화안티몬으로 이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의 견본을 계속 합성하여 기니피그로 실험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번을 반복해도 기니피그가 전부 죽는 것이었다. 주의깊게 조사해 보았더니 다섯 병 중에 한 병을 제외한 나머지 네 병의 3불화안티몬에는 물이 함유되어 있었는데 이 물 때문에 치사성의 가스인 포스겐(phosgene)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포스겐 속의 염소원자는 이 클로로플루오르카본 합성의 출발원료로서 3불화안티몬과 함께 사용된 유기염소화합물에서 유래한다). 기니피그를 죽게 한 것은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이 아니고 포스겐이었던 것이다. 미즐리와 헨이 맨 처음 동물실험에서 습기가 없는 3불화안티몬의 병을 선택할 수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클로로플루오로카본을 냉매로 쓴다는 아이디어를 포기하였을 것이며, 이들 화합물이 유독할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좋은 선택으로 프리지디어 사와 뒤퐁 사와의 공동사업으로서 뒤퐁 사 안에 클로로플루오로카본 화학의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프레온 부서가 생기고 겨기서 로이가 테플론을 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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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종신토록 장가를 못 들어도 김안로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고 한 정희등
정희등(?-154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원룡, 사간 구의 아들이다. 구의 호는 괴은이다.조광조 등과 함께 기묘사류에 속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문을 닫고 틀어박혀 병을 핑계하고 자리에 앉아 18년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며느리를 맞아 예를 드리는 날에 일어나 다니기를 평시처럼 하니, 집안 식구들이 비로소 병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정희등은 조행이 독실하고 식견이 매우 넓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한차례 글을 읽되 비록 시간이 급하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날마다 법도로 삼아 깊이 자득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가 되고 중종 29년에 문과 급제하여 교리, 필선을 지냈다. 정희등이 상처를 하자, 김안로가 딸의 배필로 삼으려 했다.
"차라리 종신토록 장가를 들지 않더라도 권세가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
정희등이 끝내 끊어 버리고 응답하지 않자 김안로가 매우 유감으로여겨 벼슬길이 막혔다. 김안로가 망하자 비로소 청직에 선발되었다. 정희등이 본디 진복창의 사람됨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구수담이 진복창의 재주와 기예를 크게 인정하여 극력 천거 발탁하므로, 정희등이 큰 소리로 반대하였다.
"훗날 나라를 그르칠 수도 있는 간인을 시론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되오"
진복창이 정희등에게 유감을 품은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구수담도 정희등이 너무 너그럽지 못한 것을 그르게 여겼다. 명종 즉위년(1545)에 정희등이 지평의 직에 있으면서 아뢰었다.
"구수담, 박광우, 김저가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신과 함께 이조에서 대간을 뽑을 때에 잘못 선발한 실수를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간신 진복창을 지칭한 것이었다. 명종이 크게 성내어 정희등을 죄주려 하니, 대신이 회계하였다.
"정희등이 강직하게 직언한 것을 죄주어서는 옳지 못합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정희등이 출사하여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걷어내 불태우며 말하였다.
"사군자가 간인이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숙연해 하였다. 정희등이 용천으로 유배되어 갈 적에 어머니 김씨가 길까지 쫓아와 말하였다.
"네가 젊을 때부터 정직하게 살아왔으니, 죄를 얻은들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느냐. 지금 영결하게 되니 나는 실로 할 말이 없다"
길에서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희등은 이날 밤에 곤장 맞은 여독으로 죽었다. 뒤에 구수담이 죄를 받아 죽을 적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진복창의 간사함이 이에 이를 줄 몰랐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원룡(정희등의 자)을 만나겠느냐"
정희등이 죽게 되자, 가산은 관에 몰수되어 염습할 수조차 없었다. 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을 뿐이었는데, 한밤중에 도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명 3백 필을 거두어 모아 주면서, "누구인지 묻지 말라" 하였다. 장사지내는 날 영남에서 선비 1백여 인이 와서 조문하였는데, 모두 부의를 냈지만 성명을 말하지 않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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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70세. 당의 서울 장안, 그 동남쪽에 곡강이라는 못이 있다. 경치가 아름다운 못으로서 봄이면 서울의 상춘객이 들끓었다. 그 곡강 가에서 두 보는 몇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나이 47세 때 일이다.
'날마다 조정에서 돌아오면 봄옷을 전당 잡히고 곡강 가에서 만취해 돌아간다. 술빚이야 예사로운 것, 가는 데마다 있거니와 인생이란 예로부터 일흔까지 산 이가 드물구나'
두 보는 당시 1년 미만을 숙종 밑에서 조그마한 벼슬을 살았거니와 숙종을 에워싼 정치의 소용돌이가 두 보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그 무렵에 곡강 가에서 꽃과 술을 벗삼아 노래한 시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인생도 59세로 끝났는데 유랑과 가난으로 일관된 고달픈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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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다섯번째 이야기 날아가버린 종달새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초목이 무성한 아름다운 과수원을 가진 시골 농부가 있었다. 그는 힘이 들거나 피곤하면 과수원을 찾아가 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종달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달콤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농부는 그 소리에 반한 나머지 덫을 놓아 종달새를 잡았다. 종달새는 자기가 잡힌 신세가 되자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나를 잡으려고 애를 쓰는 거죠? 나를 잡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 "네 노랫소리가 내 마음속으로 구구절절이 스며들기 때문이지. 네 소리에 반해서 너를 잡은 거란다." "그렇다면 아저씨가 헛수고를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돈을 주거나 통사정을 해도 나는 노래하지 않을 거니까요."
이 말을 들은 농부는 화를 내며 자기를 위해 노래를 하지 않는다면 종달새를 잡아먹겠다며 협박했다. 종달새가 말했다.
"나를 어떻게 잡아먹을 건데요? 나를 삶아먹으면 워낙 조그마하니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테고, 나를 구워 먹으면 오그라들어 더 작아질 텐데요. 그러지 말고 나를 그냥 날려 보내주세요. 그러면 아저씨에게 세 가지 충고를 해드릴게요. 그 세 가지 충고가 돼지 세 마리를 잡어먹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을 걸요?"
솔깃해진 농부는 종달새의 말을 믿고 풀어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종달새는 농사꾼에게 말했다.
"우선 첫 번째 충고는 아저씨가 듣는말을 모두 곧이 곧대로 믿지 말라는 거예요. 특히 사실 같지 않은 말들은 더 그렇구요. 두 번째 충고는 자기 것은 끝까지 지키라는 거예요. 마지막 세 번째 충고는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은 가슴아파하지 말라는 거예요."
종달새는 이 말을 마치고는 나무 위로 올라가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기도를 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농부의 눈을 멀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이 그에게서 지혜를 빼앗으셨기에 그가 눈이 멀어 나를 보고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우둔하여 내 몸 속에 일 온스나 되는 수정이 들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만에 하나 그가 내 몸 속에 이런 보석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되었겠지만 나는 그의 손에 죽고 말았겠지요."
이 소리를 들은 농부는 종달새를 풀어준 것을 너무나도 후회하면서 가슴을 쳤다.
"아이구, 아이구, 불쌍한 내 팔자야. 내가 왜 그 여우같은 종달새 말을 들었는지 내 손으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고 말았구나." 농사꾼의 한탄을 듣고 종달새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내 충고를 벌써 잊어버렸나요? 내 조그만 몸집에 일 온스나 되는 큰 수정이 어떻게 들어 있겠어요? 당신이 듣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당신의 것도 지키지 못하는 데다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일에 단념하지도 않는군요. 당신은 내가 말한 세 가지 충고 중 하나도 못 알아 듣는 바보예요."
종달새는 이렇게 농사꾼을 실컷 약올리고는 훌쩍 날아가버렸다.
* 손 안에 있을 때 지키지 못한 금은 보화를 부러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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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8. 한국사에 등장하는 두 개의 천리장성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장성과 영토를 축소시킨 고려장성)
두 개의 천리장성
우리 역사에는 두 개나 되는 천리장성이 등장한다. 하나는 고구려 말기에 연개소문이 지휘해서 쌓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11세기 초 고려에서 쌓은 것으로 고려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남쪽의 비사성에서부터 요동성을 거쳐 북쪽의 부여성에 이르는 성인데, 그것을 쌓는 데만 16 년이 걸렸다. 이 장성은 당나라의 침입을 예상하고 631 년부터 쌓은 것으로, 이미 있었던 주요한 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 방어체계와 보급체계를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장성으로 1033 년부터 1044 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성곽도 이미 1014 년(현종 5 년)부터 한반도 동서북 지역에 쌓아오던 성곽을 서로 연결시킨 것이므로 완공기간은 30 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장성은 잘 알려진 대로 거란족과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의도에서 쌓은 것이다. 이 장성들은 모두 국방을 위해 엄청난 노동력을 들였던 역사적 흔적이다. 그런데 두 장성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장성이라 일반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주요한 거점을 연결시킨 성인데, 천리장성의 경우 그것은 각각 고구려와 고려의 국경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에 비해 고려장성이 축소된 영토를 상징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점은 다른 데 있다. 고구려의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반면에 고려장성은 오늘날의 휴전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나라를 세운 뒤 한족은 주변 기마종족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국방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점령자였으며, 대륙을 방어하기 위해 기마종족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방어선을 쌓아나갔다. 주나라를 거치고 분열의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이런 방어선은 꾸준히 관리되었다. 한족 사이의 분열을 마무리짓고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진나라는 그 방어선을 본격적으로 정비해서 마침내 만리장성을 완성하게 되었다. 기마종족의 대륙진출이 두려웠던 진시황은 엄청난 국력 낭비와 정치적 파탄까지 무릅쓰고 이 장성을 완공시킨 것이다. 그 뒤 만리장성은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의 본격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같은 종족들 사이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적 경계를 분명히 하는 울타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조시대를 거치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만리장성은 더 이상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의 경계가 되지 못했다. 중국 한족은 이미 만리장성을 넘어 대륙의 동북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제 새로운 경계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이 세워질 때까지 기마종족은 공세를 펼치는 세력이었으며 중국 한족은 방어하는 세력이었기에, 방어하는 한족이 장성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공세와 수세를 펼치는 세력관계가 뒤바뀌자 방어를 위한 성벽을 쌓을 세력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기마종족의 연맹체였던 고구려가 만리장성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의 완공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에 이르는 수백 년 세월은 두 세력 사이의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말기는 그런 의미에서 기마종족의 퇴조기였다. 천리장성은 그런 퇴조현상을 막고 새로운 경계선을 확정하여 역학관계의 반전을 꾀하려는 것이었으나,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그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종족분열의 장벽
고구려가 멸망한 뒤 퇴조기에 접어든 기마종족들은 대진을 세워 중국 한족의 공세를 막아내고 고구려의 옛 전선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대진이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기도 했다. 한족이 대진에 붙인 '해동성국'이란 표현은 그런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진이 외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그 내부의 종족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대진은 성장하는 국력을 통합의 힘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왕족과일부 귀족의 권력독점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같은 기마 종족으로서 대진의 날개 역할을 맡았던 거란족이 먼저 반기를 들었고, 마침내 대진은 기마종족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대진의 명망 이후는 기마종족의 분열기였다. 그 분열은 연맹이나 동맹의 해체에 그치지 않고 각 종족들 사이의 적대적 대립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분열된 각 종족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영역을 차지하고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는데, 고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는 먼저 거란과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대진 멸망 이후 거란은 다른 종족들과 화해하려고 했으며, 고려에도 낙타를 보내는 등 선심을 썼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화해를 거부하고 철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거란이 보내준 낙타를 받지 않고 굶겨죽인 것은 그런 적개심의 상징적 행위였다.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개심은 마침내 세 차례에 걸친 무모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결전은 두 종족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했으며, 고려의 경우 다른 기마종족으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소 종족적 정서에 치우친 편협한 정치노선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잘못된 노선은 끊임없이 잘못된 정책을 만들어냈다. 다른 기마종족(주로 거란족)과 대립하기 위해 중국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 결탁했으며, 마침내 다른 기마종족(주로 거란족과 여진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장성과 달리 같은 종족 내부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거란이 보여준 태도도 그런 분열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033 년 평장사 유소가 왕명으로 처음 성을 쌓을 대, 거란은 돌로 성을 쌓는 것은 우호관계를 위한 도로를 봉쇄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성을 쌓는 데 방해를 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현종은 성을 쌓은 유소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의 공로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추충척경공신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천리장성은 이처럼 거란 및 여진에 대해 국경을 확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문화적 경계를 획정한 것이기도 했다. 아울러 고려와 여진의 혼혈을 막는 구실도 이 천리장성이 담당하고 있었다. 국경이라는 측면에서 고려가 장성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면 거란족이나 여진족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그런 경계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고려왕조보다 월등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고려와 자신들이 같은 갈래의 형제종족이라고 여기면서 섞여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그것을 거부했다.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적 세계질서로 다가가고 있던 고려의 입장에서 그들은 야만족일 뿐, 더 이상 형제종족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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