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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5 호
단기 4340. 10. 12 (음력 9. 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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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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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0>무인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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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흐린 강물이 흐른다면/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강물이 될 때까지’ 중에서》
1979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젊고 힘센 산양처럼 뿔과 발굽에서 불꽃과 먼지를 일으키며 시의 상봉, 상상봉을 내달리는 느낌을 주는 시를 만났다. 문학에 뜻을 두기 전이었지만 용돈을 아껴 그런 시가 알알이 들어찬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샀다. 시인의 첫 시집이기도 하고 내가 돈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며. 내가 잘못 판단했을 경우 혼자만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에게 꼭 사서 읽으라고 권한 최초의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 표지를 넘기자 표지 안쪽 하단에 시인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맨 뒷부분에 ‘자연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 정황을 포착하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보이고 있다’라는 표현이 내 마음에 경외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사전에서 ‘unique’를 찾아서 ‘유일무이한, 독특한, 진기한’이라는 뜻을 새기며 수십 번을 써보았다.
‘죽은 사람이 살다간 南向(남향)을 묻기 위해/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산)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 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 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활짝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흰 모래 사이로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습니다.’(흰 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 나비로 날아와 앉고’)
되풀이해서 읽다 보니 눈물이 날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리 읽어도 뼈처럼 단단한 시는 물러지지 않고 식상하지도 않았다. 정련된 우리말 표현과 날카로운 감각, 교과서에서 배운 내재율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노래의 울림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어떤 시보다 천연스럽게 시다웠다. 그러면서 시가 그토록 나의 ‘생활(生活)’-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에 가까워 보일 수 없었다. 그러면서 시인은 상상하기 힘든 고독과 초극의 의지를 동무처럼 동반하여 어디론가 끝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20여 년 후 만난 신대철 시인은 비무장지대와 몽골, 바이칼 호수와 알래스카, 그리고 정신과 육신의 극오지를 두루 다녀온,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또한 내가 마음속 깊이 경외하는 바요 동경하는 바였으니 그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득한 무인지경, 인적 끊어진 절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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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스르르 흘러 들어와/나를 몇 개의 섬으로 만든다./가라앉혀라,/내게 와 죄 짓지 않고 마을을 이룬 자들도/이유 없이 뿔뿔이 떠나가거든/시커먼 삼각파도를 치고/수평선 하나 걸리지 않게 흘러가거라./흘러가거라, 모든 섬에서/막배가 끊어진다.’ (‘무인도를 위하여’ 중에서)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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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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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약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미리알 수 있다면,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우리는 더다정하게 할 것이다. /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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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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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실천하지 않으면 도루묵
이상의 열여섯 가지 조항은 스승과 제자, 학우 사이에서 서로 타일러 힘쓰고 경계하며 도와 힘껏 실천해야 한다. 학생들 가운데 마음을 잘 단속하고 모범적으로 학문이 성취되어 뛰어난 자가 있으면 그를 칭찬하고 상을 주라. 만일 여러 학생들 중 학교 규칙을 준수하지 아니하여 향학열이 부족하거나 허황하게 날짜만 보내며 허송세월 하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거나 건방지게 굴어 못된 짓을 일삼거나, 행동거지가 정중하지 않거나, 언어가 진실 되지 않거나, 스승을 존경하지 않거나, 어른과 덕이 있는 분을 업신여기거나, 예법을 경멸하거나, 염치를 돌아보지 않거나, 사람답지 못한 자와 사귀기를 좋아하거나, 아래 또래에게 몸을 굽실거리고, 방탕하게 굴고, 노는 것을 낙으로 삼거나, 따지기를 좋아하거나, 재물의 이익 때문에 남의 원망을 듣거나, 공부 잘하는 친구를 시기 질투하며 선량한 이를 속여 헐뜯는 사람은 아예 사귀지 말라. 일가 친척에게 화목하지 못하고 이웃과 불화하며, 제사 때 엄숙하지 못하고 예의 풍속을 지키지 못하며,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어려움을 서로 구제하지 않으면 진정코 안될 일이다. 이러한 과실은 벗들이 보고 듣는 대로 깨우쳐 주되, 고치지 않을 때에는 선생님이나 윗사람에게 알려 혹독하게 꾸짖으며, 그래도 고치지 않고 억지 변명으로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벌을 주고 학칙에 의해 퇴학시킨다. 학교에서 쫓겨난 뒤에 마음을 바꾸고 허물을 고쳐서 착하게 공부하려는 흔적이 뚜렷이 있을 때에는 다시 학교에 들어오기를 하가하고 출석부에 다시 이름을 올린다. 만약 끝까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못된 짓을 되풀이하며 자기를 나무라는 이를 도리어 원망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사람'이 될 때까지 더욱 엄한 벌을 주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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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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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8. 심설 논쟁
4. 논쟁의 의의
조선조 후기 주자학자들의 성리설 논의는 주자학 본래의 논의와 연관시켜 볼 때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주자학에 대한 수정주의적 경향이고, 둘째는 정통주의적 경향이다. 그들 가운데 주자학 수정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입각점은 심, 성, 정을 리의 측면에서 일관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심은 심의 본체라고 하는 측면을 보편화시킨 것이며, 그 주된 문제 의식은 심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것이었다. 주재라고 하는 측면, 즉 인간의 의식이 행위를 주재한다고 하는 것은 리의 능동적 원인성을 강조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이것은 인간의 선 행위의 근거를 심에서 직접 구함으로써 그 실천성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학에 대한 전통적 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벌어진 심설 논쟁은 이황과 이이 이후 줄곧 문제가 되어 왔던 논쟁점에 대해 최종적이고 총괄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주자학적 논의의 마지막 지점에까지 이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척사위정이라고 하는 현실 인식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심설과 관련된 논쟁이 격렬하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심설 논쟁에서 각각의 입장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즉 리기론에 이은 심성론에서의 이러한 차이가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처럼 인식론이나 수양론의 방면에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의식의 현상적 측면을 중시하느냐 본체적 측면을 중시하느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인식 주체와 대상간의 논의로 연결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심을 리기의 합이나 리 자체로 이야기할 때, 그 리의 측면으로 이야기되는 심의 본체라는 것이 성 개념과 얼마나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문제가 된다. 그것은 심을 기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성을 지향했던 방향은 당시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보여 준 방향과 똑같은 것이었다. 심설에 대한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부단한 논쟁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심설 논쟁이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현상윤, "조선유학사" (현음사, 1982) 도전건차, "주자학과 양명학", 김석근 외 옮김 (까치, 1985) 유명종, "조선후기성리학" (이문출판사, 1985) 배종호, "한국유학의 철학적 전개"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윤사순, "한국유학사상사론" (열음사, 1986) 송석구, "율곡의 철학사상연구" (형설출판사, 1987) 안병주, "유교의 민본사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7) 민족과사상연구회 "사단칠정론" (서광사, 1992) 최근덕, "한국유학사상연구" (철학과현실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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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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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안하다
본뜻 :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다.
바뀐 뜻 : 살피다, 생각하다, 고려하다, 참작하다 등의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보기글" -자네 사정을 십분 감안하여 이번에 특별 근무에서 자네는 제외하기로 했네(자네 사정을 충분히 생각해서) -그쪽 사정을 감안해서 찾아가야지, 아무 때나 불시에 들이닥치는 건 결례라네(그쪽 사정을 살피고 찾아가야지)
새말 만들기
기성세대들은 대체로 새말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흔히 ‘통신 언어’, ‘인터넷 언어’, ‘채팅어’, ‘외계어’ 등과 같이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쓰는 말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국어원 설문 조사 결과, 기성세대의 90% 이상이 통신 언어로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새말을 만드는 주체는 청소년만이 아니며, 그렇게 부정적인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새말을 만들 수 있다. ‘아?d?d’이라는 말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잘못 친 오타인데,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면서 인터넷 시늉말(의태어)로 널리 쓰이게 됐다. 이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새말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만든 말도 있다. ‘발열옷, 골프폰’처럼 학문이나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물건이나 개념이 생겼을 때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밖에서 들어온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댓글’이나 ‘누리꾼’이 그런 보기다.
널리 쓰이는 말이라도 일본어 잔재, 어려운 한자어들은 쉬운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돼 왔다. ‘나시’(なし)를 대신할 말로 ‘민소매’라는 말을 만들었다. ‘적자생존’에 비추어 만들어 낸 ‘혁자생존’(革者生存)처럼 흥미를 끌거나 강조하려는 조어도 있다.
누구나 새말을 만들어 쓸 수 있는데도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쓰는 말이 곧 새말이라 생각하게 된 것은 인터넷이 의사소통과 문화 확산의 주된 매체로 자리잡았다는 말도 되겠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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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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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힌다
목공이 즉위한 지 36년, 목공은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하고 군대를 일으켜 또다시 진나라를 공략하게 했다. 진군은 황하를 건너가자 배들을 불살라 버리고, 결사적인 각오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진을 단번에 무찌르고 땅을 빼앗아 버렸다. 이로써 전날 효산 골짜기에서 패전한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목공은 황하를 건너 그동안 효산 골짜기에 버려진 병사들의 시체를 모아 제사를 지낸 후 매장했다. 또한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사흘 동안에 걸쳐 통곡하게 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그대들 병사들이여, 나의 맹세를 들으라. 우리들의 조상들은 매사에 있어 노인들의 말씀을 항상 따랐었다. 나는 그 계율을 어기고 건숙과 백리해의 충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충성스러운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도다. 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새로이 태어나는 후세와 자손들을 위하여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모든 병사들은 목공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머리를 숙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왕 폐하께서는 참으로 우리 병사들을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승리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
이듬해에 목공은 유여가 세운 작전 계획에 따라 서쪽의 융족을 토벌했다. 그리하여 융왕 치하의 열두 나라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천 리나 넓히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융나라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주나라 천자는 목공에게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하고 그 공적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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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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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0장. 우연한 의학적 발명.발견.
질소 마스터드 가스와 암의 화학요법.
제 2차세계대전 중에 병사들이 우연히 마스터드 가스(mustard gas ; 살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독가스)에 당한 사실이 암의 화학요법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스터드 가스란 원래 액체이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군대에서 이를 고의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쌍방 모두 상대방이 먼저 사용할 때를 대비하여 전선 가까이에 두었다. 이것이 가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용시 폭발한 포탄에 의해서 흩어뿌려지면서 기화하여 인간을 포함한 주위 전체에 번지기 때문이다. 마스터드 가스를 실은 연합군 측의 선박이 이태리의 항구에서 폭격 당하자 이 독가스가 해상으로 번졌으며, 많은 병사가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구조되어 마스터드 가스의 영향에 대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환자의 대부분이 혈액 장애를 일으켜 백혈구가 위험할 정도로 감소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수 종양에서 백혈구가 과잉생산되는 어떤 종류의 백혈병에서는 백혈구의 감소는 용태의 개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후 마스터드 가스는 백혈병 환자에게 시험되었다. 그러나 마스터드 가스의 높은 독성 때문에 금지되었으므로 그 대신 유황 마스터드 가스의 분자 구조와 유사성을 띄고 있는 질소 마스터드류가 백혈병에 시험되었다. 질소 마스터드란 보통의 마스터드 가스와 흡사한 화합물인데 보통의 마스터드 가스 분자속의 유황 원자가 질소원자로 바뀐 것이다. 독가스 후보로서 여러 가지 질소 및 유황 마스터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폭격으로 병사가 우연히 독가스의 피해를 보고 나서 수백 개의 질소 마스터드 유사체가 기타의 구조상 연관이 있는 화합물이 항암제로써 실험되었다. 결국 어떤 형이 되었건 인간의 암 치료약으로는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었던 종양 지연 효과는 긴 안목으로 보면 치료약이 발견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가능성을 높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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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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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홍패는 몰수되고 백패마저 도둑맞은 심잠
신잠(1491-155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원량, 호는 영천자, 아차산인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이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동왕 14년에 현량으로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에 과거의 방을 파하여 홍패(문과 합격증)를 몰수당하고, 곧 장형을 받은 후 장승으로 유배되었다. 17년 동안 배소에 있다가 양주로 배소가 옮겨져 편한 대로 살게 하니 아차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또 백패(진사시의 합격증)를 도둑맞았다. 신잠은 시를 지어 읊었다.
홍패는 이미 뺏기고 백패마저 잃었으니 한림과 진사가 모두 이름뿐이로구나 이제부터 아차산 아래에서 묻혀 살 것이니 '산인'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뺏을꼬?
그 뒤 특별히 음직으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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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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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각추방
초등학교 반장에서부터 국정을 다루는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선출방법은 투표에 의한다. 즉 투표권의 행사없이 올바른 민주정치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어느 나라처럼 선거때마다 '피아노 표'니 '쌍가락지 표'니하여 해괴한 표의 뉴페이스가 나타난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다.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치를 유지하고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위해 이 투표제도를 활용했다. 즉 세력이 비대하여 독재가가 될 염려가 있으면 국민은 그 사람의 이름을 사금파리에 적어서 투표한다. 그것이 일정한 수에 달하면 지명된 정치가는 10년간 국외추방을 당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 '패각추방'(오스트라키모스) 제도 덕분에 그들은 민주정치를 수호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남용되어 도리어 해가 많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말았다. 투표에 종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시만해도 '이집트'에서 수입하여 쓰는 형편으로 무척 귀중했기 때문. 기원 전 850년 경 '아테네'의 정치가 '크레이스테네스'가 '오스트라콘'에서 비롯된 것이니만치 '도편추방'이라고 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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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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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아홉번째 이야기 콩과 콩 껍질
재산도 많고 평판도 좋은 부자가 있었다. 남 부러울 게 없는 삶이었지만 그는 항상 '만약 가난해지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심 끝에 현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자 덕망 높은 현자는 부자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어느 마을에 내로라 하는 부자인 두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극심한 가난에 빠지고 말았지요. 입에 풀칠할 것조차 구하지 못했던 그가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콩을 몇 알 띄운 수프 한 대접이었습니다. 쓰디쓴 수프를 먹으며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부족한 것 없었던 옛날이 생각나 그는 서글픔에 잠겼습니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콩 껍질을 등뒤로 버리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자신이 버린 콩 껍질을 주워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부자였던 두 사내 중 다른 하나였지요. 그는 껍질을 주워 먹는 남자에게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지요.
"한때는 내가 자네보다 더 부자였지. 그런데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이젠 끼니를 채우지도 못하게 되었다네. 오늘도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자네가 버리는 콩 껍질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후로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한 끝에 그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끝낸 현자는 부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한다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신의 섭리지요. 그러나 원하는 것 모두는 아니더라도 신이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편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으니, 만일 돈이 모자라 어려운 때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보다 더 부유하고 명예로운 사람들도 어려운 때가 있음을, 당신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 자신의 빈궁한 처지가 서글퍼질 때면 자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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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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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3. 너무나 길었던 삼국시대 (700 년 동안의 분열이 가져다준 역사적 상처)
삼국시대는 반환점
열국시대가 고조선의 해체와 함께 이루어진 분열기였다면, 삼국시대는 분열에서 다시 통합을 이루어가는 반환점이었다. 삼국 가운데 신라가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세워지기 전에 6부촌이 있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은 미리 이주해온 가자계의 정착민들과 토착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이주해온 세력을 받아들이고 그 지도자였던 혁거세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웠는데, 이 과정이 신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추대한 지도자의 호칭이 거서간이고 그것이 진한 사람들의 용어라고 했으므로, 진한인들 또한 신라라는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38 년조에도 진한인들이 신라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중국에서 살던 사람들(중국지인이라고 하였고 중국인이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 진나라의 건국으로 살기가 어려워 동쪽으로 건너왔는데, 대부분 마한 땅 동쪽에서 살며 진한인들과 섞여서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건국과 함께 이미 세 갈래 이상의 종족이 연맹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 정착자인 6부촌 계열과 중국계 기마종족의 이주자(진한인) 및 지도자로 추대된 혁거세 계열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기마종족으로서 일찍이 고조선의 구성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는 또 다른 이주집단인 석탈해계를 받아들였고, 뒤에 다시 북부여계의 이주집단인 김알지계를 받아들였으며, 뒷날 가야계까지 받아들여 여러 갈래의 종족이 공존하는 연맹국가를 발전시켰다. 즉 신라는 초기부터 그 이전의 다른 독립국과 달리 분열을 마무리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성격을 띠었던 셈이다.
그런 성격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내부의 5부족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연맹국가로 출발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또 고구려는 건국 이후 왕성한 정복사업을 벌임으로써 종족통합을 시도했는데, 옥저나 동부여 및 낙랑 등이 모두 무력에 의해 통합된 나라였다. 백제의 경우 비류와 온조를 각각 지도자로 하던 초기의 두 세력이 점차 통합되었으며, 나아가 마한까지 통합함으로써 서서히 큰 국가로 발돋움해갔다. 또 백제는 강력한 해상주도권을 가지고 중국 대륙의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의 주민들까지 통합해나갔다. 이처럼 삼국의 건국 시기는 각 나라의 독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계 가마종족의 해체,분열기를 통합기로 전환시키는 반환점, 곧 열국시대의 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문화적 내용이 결국 통합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삼국 이후의 역사는 삼국의 사상과 문화라는 압축 프로그램이 풀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의 분열기간이 너무 길었던 데서 비롯된다. 무려 7백여 년이 넘어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기나긴 세월은 통합의 근본 범위가 흔들리고, 통합의 방향이 비뚤어지며, 통합의 성격이 변질될 수도 있는 그런 과정이었다. 즉 분열이 굳어지고 전통이 위협받기에 충분한 세월이 지루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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