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2.기자 사명과 외교 요청의 갈등 속에서
1980년 5월 초 남한에서 대학 요소가 일기 시작할 때, 나는 영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당시 휴가를 얻어 쉬고 있었는데, 뉴욕타임스 해외국장 봅 셈플이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나는 1978년 여름부터 뉴욕타임스 사무실을 운영하는 심재훈씨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팀을 이루어 남한을 취재하는 일선기자단인 셈이었다. 따라서 내가 이 시기에 한국을 떠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전두환이 5월 17일에 권력을 장악하고 날조된 죄목으로 김대중을 체포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따돌리던 시점에서, 우리의 활동 초점은 전라남도로 쏠렸다. 나는 심재훈에게 뉴욕타임스 전세차 한 대에 운전기사를 딸려 광주로 내려보냈는데, 그 차에는 우리의 동료인 '르몽드'지 기자 필립 퐁스(Philippe Pons)가 함께 탑승했다. 5월 19일 오후 늦게 심재훈이 전화를 걸어 숨가쁘게 전하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가 불러준 이야기를 받아 적어 뉴욕으로 전송했다. 그때의 광경은 영국인인 내게는 1415년 어진코트 전투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했다. 물론 당시의 전투는 프랑스 땅에서 영국의 헨리 5세 군대와 막강한 프랑스 군대가 벌인 전투라 역사 내지는 정치 면에서 전혀 비슷한 점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 심재훈이 보았던 광경을 무심결에 토로하는 과정에서 - 육군 병사들이 착검한 총을 가지고 근거리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같은 인간들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 역사 500년을 더듬어볼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총검을 휘두르는 가운데, 민중은 닥치는대로 무기를 손에 들었다고 했다. 심재훈이 이야기한 '도끼들'로 말하면, 유럽에서는 중세기 이래로 전쟁에서 무기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보다 몇 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박정희는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파견했었다. 그가 암살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몇몇 사람들에게 머리가 깨지는 부상을 입혔을 뿐 아무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서,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심재훈과 필립이 영안실을 돌면서 그들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이었다. 공수부대가 미쳐 날뛰게 되었든지, 전두환에게서 학살명령을 받고 내려갔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이 중 후자가 훨씬 설득력 있어 보였지만, 우리로서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고, 그래서 기사를 그런 방향으로 작성하지 못했다(1983년까지 내가 서울과 도쿄 지국장으로 있던 기간에는 그러했다). 심재훈이 손수 작성한 기록을 읽어내려갈 때, 목소리가 한 음정 올라가 있었다. 모든 일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주요한 해외사건이 터지면 여러 기자들을 투입하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관행으로, 사실상 해당 지역 내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여들곤 한다. 우리는 당시에 방콕에 사무실을 두고 동남아에서 활동하던 헨리 캠(Henry Kamm)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짐 스터버(Jim Sterba)도 불러들였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마침 우연하게 홍콩에 와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사연이야 어찌 됐든 베이징에서 온 폭스 버터필드(Fox Butterfield)도 있었다. 나는 지국장으로서 이 팀을 기술적으로 이끌어갈 책임이 있었다. 실생활에서는 뉴욕타임스에서 가장 고참 특파원의 한 사람인 캠에게, 제아무리 소리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권위가 위임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임자로서의 내 임무 때문에 서울에 머물러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 서울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심재훈에게 광주에서 올라오도록 당부했다. 그는 우리가 탈 차와 기사를 구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우리는 나의 고정된 거처인 조선호텔에서 만나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그 당시 뉴욕에 있는 내 직속 상관이었고 지금은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있는 조 렐리벨트(Joe Lelyveld)와 상의했다. 그가 내린 결정은 내가 심재훈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고, 다른 사람들은 서울에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뉴욕에 있던 나의 상사들은 상당히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중군기자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나는 사실 사람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적도 없었다. 절대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퀘이커 교도(Quaker)로 자란 나는 그 동안 주제넘게 종군기자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상황이 마치 내전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나는 포화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누가 광주로 내려가느냐 하는 토론이 끝났을 때쯤에는 이미 닷새가 훌쩍 지나버리고 있었다. 그때가 서울 시간으로 5월 25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동안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전두환(그 무렵에 나온 별명이 '광주 살인마')이 서울에 있었고, 그가 곧 기삿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광주가 다시 공격을 받거나 광주에서 협상이 무산될 때까지는 그러했다. 어찌 됐거나 심재훈과 필립과 나는 5월 26일 아침에 육로로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그후 이틀간은 내 생애에 가장 힘겹고 두려웠던 날들이었다. 나는 우리가 광주에서 직면한 상황에 속수무책이었다. 신문들은 속기록을 이용하기 때문에 직접 사건장소에 가보기 전에는 사태의 실상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우선 우리는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내서 뒷길들을 이용하여 줄곧 차를 몰았다. 그때까지 범세계적인 광주 취재보도를 통해, 나와 수억의 독자들은 이 도시가 '포위되어' 있다고 결론짓고 있었는데, 이는 이런 상황을 표사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했다. 하지만 '포위된다'는 말이 무장한 사람들이 둘러친 바리케이드 너머로 서로 상대편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가 가로질러 온 텅 비다시피 한 길거리들 어디에 바리케이드가 있으며, 무장한 사람들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는 광주에 당도하기 전에 여러 차례 군 검문소를 지났다. 군인들은 우리를 세우고 서류를 훑어보았으며, 우리가 기자들이라는 심재훈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 흘깃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만일 이것이 '실력자(strongman)' 전두환의 새 세상을 움직이는 모습이라면, 그의 힘은 그야말로 걸리적거릴 것이 없었다. 한편, 광주시내는 평화로웠다. 화창하고 따사로운 그날 오후에 우리가 거리들을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동안 어쩌다 딱소리 또는 뻥소리가 들렸을 뿐이며, 그것도 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심심풀이로 내는 소리거나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개구리 뛰기나 줄넘기, 뜀뛰기를 하면서 내는 소리 정도일 터였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이윽고 우리는 서울로 빠져나가는 넓은 도로에서 바리케이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방어벽에는 정부 편에서 배치한 젊은 군인들 한 떼가 미제 가죽끈이 달린 전투복 차림에 따분한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옆구리에 흰 별이 그려진 탱크 두어 대가 받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광주가 미국 꼭두각시 군대에 포위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믿었다가는 영락없이 북한 앞잡이가 될 판이었다. 상쾌한 5월의 그날, 오후 내내 거리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사건기사를 만들 만한 일은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앉았다. 아니,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필연적인 결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었다. 심재훈과 필립(카스트로의 수염에 버금갈 만큼 덥수룩한 수염으로 꼭 혁명가 인상을 지닌 기자)과 나는 광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 즉 대학생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여기에서 나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이 선동가들을 서울에서 보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자면 내 이야기에서 몇 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다. 전두환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남한의 기본적인 시각은, 이는 내가 전두환의 군대 동료들이나 그의 '정보' 장교들과 나눈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나무란 나무에는 모조리 북한 앞잡이가 달라붙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주에는 널찍한 대로든 좁다란 공원이든, 금방 보아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납작하고 칙칙한 도청 청사 주변에든 나무가 별로 없었다. 나무 한 그루마다 북한 간첩 하나로 계산되는 판인데. 아니면 당국의 시나리오를 믿을 경우 그렇다든가. 물론 지방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를 장악하고 있는 대학생 지도자들은 모두가 평양 꼭두각시들, 오랜 세월 암약하다가 이윽고 밝은 대낮으로 몸을 드러낸 앞잡이들이 틀림없을테고. 심정적으로는 이런 주장이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망발이라고 믿을지라도, 정부의 선전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으니, 적어도 무장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의혹이 남아 있는 한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셋이 그들의 거처로 들어가 만난 대학생 지도자들은 아이들에 불과했다. 몹시 지치고 대단히 어려 보이는 젊은이들로, 무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도 모르고 있었다. 철저한 퀘이커 교도로 자란 나도 총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행군하고, 내 군사 장비를 어떻게 손질하고, 경례는 어떻게 붙이는가 정도는 십대의 대부분을 영국 기숙학교에서 보내면서 모두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진맥진해 있는 대학생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여러 날 깊은 잠을 자지 못한 후라 피로한 데다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들의 대변인을 만나러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들은 카빈총을 마치 장난감총이나 되는 듯이 벽에다 기대놓고 있었다. 과연 장전이나 되어 있고, 안전장치는 제대로 해놓은 것일까?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이 젊은이들은 훈련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거기에 선 채 졸다시피 하고 있을 때, 나는 문득 우리 중에 하나에게 일제사격이 가해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사실은 전두환으로서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대변인의 신원은 그 당시 '볼티모어 선'지의 불레들리 마틴이 쓴 훌륭한 기사에 낱낱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내 인상은 마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내가 보기에 그는 순수한 제펀스식 민주주의자였는데, 블레들리는 그를 훨씬 과격하게 보고 있었다. 알다시피 우리처럼 유럽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학시절에 마르쿠제나 헤겔을 읽는다고 해서 그를 좌익으로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가 서울에 있는 미대사 빌 글라이스틴(Bill Gleysteen)을 찾아가서 폭력을 자제하고 타협을 선언하도록 주문한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 대변인이 우리 셋에게 해온 요구로, 같은 날 이른 시간에 블레들리에게 했던 요구도 동일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요구를 받고 매우 비참한 기분이 들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기자란 자신이 기삿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요구를 받고 매우 비참한 기분이 들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기자란 자신이 기삿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같은 호소를 전하지 않고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일을 내 기사를 통해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최종 결정은 뉴욕에 있는 편집국 사람들이 내 기사를 받는 대로 내릴 테고, 지금으로서는 이 가사를 심재훈에게 들려서 시외로 내보내 서울로 전송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광주에서는 모든 전화가 불통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심재훈 없이 혼자서 광주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고육지책이었다. 그렇지 않고 설령 내가 글라이스틴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더라도, 그가 받든 다른 누군가가 받든 간에 공직자로서 당장 행동에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광주에 있는 누구와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을 터였다. 다른 한편 그날 오후 광주의 분위기로 보아 광주와 극소수의 무장한 대학생들은 전두환이 결정만 내리면 언제든지 함몰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 대학생들은 탱크도 대포도 기관총도 없고 철모도 쓰지 않았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그 전화에 목숨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도울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면담을 끝낸 것은 오후 5시경이었는데, 그때쯤 나는 바로 기사를 마무리했고 곧 이어 심재훈과 필립은 길을 나섰다. 나는 홀홀단신으로 뒤에 남았으나, 그에 앞서 심재훈은 나를 위해 대학생들이 있는 전남도청에서 좁은 길로 200미터쯤 떨어져 있던 한 여인숙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들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을 두고 생각해본 것도 여러 해 되었다(내가 뉴욕타임스로 보낸 기사는 그날 밤에 뉴스 원고망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그 밤의 사건들은 기사를 앞지르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위층 방에 들어서는 대로 침대에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아래층에는 여관 주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내가 듣기로 이곳은 김대중의 아성으로, 일종의 뜨거운 텃밭이나 같았다. 저녁 8시나 되었을 시각에, 내 방 바깥 복도에서 요란하게 쿵쿵거리는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대학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군복을 입었지만 모자는 쓰지 않고 있었다. 키는 땅딸막했고, 럭비선수 같은 체격이었다. 하지만 나를 책임지고 있던 여관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여관 주인의 형편없는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대학생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내가 하지 못했던 글라이스틴과 연락을 취해주거나, 아니면 무슨 수로든 사태에 개입해주기를 다시 한 번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을 추스를 수 있는 전화도 하나 없었다. 나는 만일 그날 밤에 공격이 시작되면 기사도 전송할 수 없겠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한밤중에 잠을 깼다. 무엇이 나를 깨웠는지 지금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별안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깥은 칠흑처럼 어두었다. 그래도 지붕들은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불빛이 비추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코 도시는 정적에 묻혀 있었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광주는 함락되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잠까지 들어 있었다! 기분 나쁜 정적이 감돌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누군가 도청에서 확성기를 틀고 있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몹시 흥분하여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애띤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모르면 몰라도 십여 분간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지금이 마지막이다!" 골자는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거기에다 시민들에게 밖으로 나와서 대학생들, 기껏해야 몇 명 안 되는 대학생들과 합류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덧붙여진 것 아닐까? 그 목소리에 실려 있던 격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노르웨이 화가 뭉크(Munch)가 그린 유명한 그림 '비명'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얼굴과 움푹 패인 입을 머리에 떠올리고한 화실에서 별안간 목청이 생겨나 엄청난 음량으로 소리를 토해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그 목소리에 담긴 힘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셰익스피어의 비극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이처럼 힘찬 '비명'을 요구하는 국면은 없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열리는 문소리, 길거리를 황급히 내닫는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은 다 어디 간 것일까? 집안에 들어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문고리를 푸는 소리, 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 목소리가 뚝 그쳤다. 그 이후로 일어난 일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저 소리들만 있었다.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깥이 칠흑처럼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달빛 또는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있었다. 하지만 광주시는 완전히 암흑 천지였고, 여관 이층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것이라고는 지붕 한두 개의 어슴푸레한 윤곽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잠깐 바깥에 나가볼까 생각해보다가,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집주인으로서 나를 맞아들인 여관 주인과 그의 친구들이 나를 내보내줄 리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여관 사람들 스스로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누군들 자살행위를 하고 싶겠는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누구 하나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고... 그런데 어둠 속에서 들렸던 그 지독한 비명 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때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억지로 머리를 짜내노라면 기억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따-따-따-' 하는 자동화기 소리. 거기에 섞여 자그맣게 들리는, 아이들이 파티에서 터뜨리는 폭죽 소리 비슷한 '따다닥' 소리와 '핑핑' 소리. 나는 이 소리들을 학생들이 카빈총을 쏘는 소리로 간주했다. 이런 카빈총으로 정규군 부대와 맞서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간간이 내가 모르는 어떤 화기에서 발사되는 엄청나게 큰 '쉬웅!' 소리. 자동차 소리는 아니였을까? 그 '쉬웅!' 소리가 내게는 마치 벽 두께가 일 미터나 되는 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지면서 무방비상태에 있는 젊은이를, 청년 또는 처녀를 덮치고 있는 듯이 들렸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모든 소리가 멈춘 지 몇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은, 흐른 다음이었다. 200미터 거리에 있던 내게는 비명 소리, 고함 소리, 투항을 촉구하는 외침 소리 등 도청 건물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나자 굼뜬 행진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내 평생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희한한 것이었다. 그 행진은 공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름아닌 헬리콥터들의 행진이었다. 날이 밝은 직후에 첫 번째로 선회할 때 보니 헬리콥터 무리는 굉장히 높이나 고도는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이 떠 있는 높이는 족히 6백여 미터는 되었다. 혹시나 당할지 모르는 불상사를 고려한 고도로는 너무나 높았다. 게다가 도시는 죽은 듯이 고요했고, 저항은 일체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조심하고 있었다. 헬리콥터들은 이른 아침 햇살을 몸체에 받아 반짝이면서 두 번, 세 번, 네 번 선회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지휘관이 어디에 있든 간에, 누군가가 그에게 밖에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집안에 틀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더군다나 이 도시에는 비행물체 공격용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군부는 저항이 지극히 산발적이고 지극히 미미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들은 북한 사람 또는 눈에 보이는 나무줄기 뒤에 숨어 있을, 그에 비견할 만한 존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여보세요, 광주는 저항하지도 않고 있잖소! 그렇다면 시민들이 느끼고 있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그날 아침 이른 시각, 날이 환해진 직후였다. 나는 그때라고 생각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자칫하면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어 시간의 흐름을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요점은 틀림이 없을 터인즉, 바로 내 방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던 것이다. 여관 주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주 꾸밈없고 활기차며 쾌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침식사 할 준비는 되었소? 잠은 잘 잤소?" 사내는 탁자를 돌아가며 행주로 꽤나 세게 두드려댔다.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뭐라고요?" "음, 그러니까 저..." "잘 삶은 계란 하나면 어떻소?" (그는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말했을 테지만, 그가 했던 말을 1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하는 만큼 내 머릿속의 공백들은 내 자신이 채워가며 이야기해도 이해하기 바란다.) 달걀이 나왔다. "이봐요, 당신 손은 어떻게 된 거요?" 여관 주인은 별안간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가 내게로 몸을 숙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앉아 있었다. 내 엄지손가락 하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당황했다. "으음. 난 신경이 곤두서면 엄지손가락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어요." "좋아요, 좋아. 어서 달걀이나 들어요."
사내가 쿵쾅거리며 나갔다가 다시 차를 들고 쿵쾅거리며 돌아왔다. 아니, 대충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던가 싶다. 만일 그가 일반 시민의 표본이었다고 한다면, 정녕 그가 그 시점에서 취한 태도는 광주의 '함락'을 결코 함락이 아닌 한낮 우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오늘날까지도 광주의 최후를 떠올릴 때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바로 사내의 그 쾌활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이윽고 싹싹한 여관 주인이 나를 찾아왔다.
"이젠 됐으니, 밖에 나가도 됩니다."
나는 부츠를 신고 밝은 길거리로 혼자 나섰다. 물론 내가 곧장 향해 간 곳은 도청이었다. 심재훈이 없으면 도움될 만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은 나도 익히 알고는 있었다. 여관 문밖을 나서니 바로 앞에 군용 차량 한 대가 건물 하나를 들이박은 채 서 있었다. 차 앞유리창에는 운전자가 앉아 있었을 바로 그 지점으로 총탄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카빈총이었을까? 카빈총들도 총탄을 발사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대학생이나 주민이 단 한 발로 군용차를 정지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도청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있는 모퉁이를 돌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들은 군인 한두 명에게 떠밀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길바닥에 있는 어떤 것에 쏠리고 있었다... 사내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철모는 쓰지 않은 채였다. 그 대학생들 중의 하나일까? 어젯밤에 나더러 글라이스틴 대사와 접촉해주도록 마지막으로 호소하려고 내 여관방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던 체구가 크고 억세게 생긴 친구 아닐까?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는 영영 알 수 없으리라. 게다가 내 멍청한 머리로는 죽은 군인을 어린 대학생 가운데 하나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막 쏟아져 나온 생생한 피가 줄기를 이루어 경사진 도로를 따라 흘러 도랑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믿기지 않을 만큼 붉어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선홍색의 페인트 같았다. 내가 살해당한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사내는 달아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엎어진 채 사지를 큰대자로 뻗고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심재훈이 없는 상황이라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나는 뒤로 휙 고개를 돌렸다. 맥빠진 젊은 남녀들 한 무리가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묶인 채 차량으로 향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축 처진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이런, 그들은 끌려가서 사정없이 얻어맞을 판이었다. 그들에게는 고약스런 상황이 벌어질 참이었다. 나는 턱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나는 이런 광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 심재훈이 탄 차가 운전기사와 필립을 싣고 시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왈칵하는 것이 있었지만, 도무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이 순간까지도, 어쩌면 내가 광주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직시할 용기가 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어린 대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그 일 말이다. 기자에게는 늘 변명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후에 나는 대체로 기사 쓰는 일이라면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이렇게, 광주는 내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나는 1968년에 처음으로 남한을 돌아다녔는데, 이는 그해 일어난 푸에블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나의 체험은 시골에 초가집 마을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오랜 옛날 심은 고목들이 주위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현대화는 박정희 때에 이루어졌다. 그는 집권 초기 처음 여섯 해 동안 즉, 1960년대만 해도 아직, 빨간 지붕에 흉칙한 작은 주택들로 시골 경관을 망쳐놓지는 않고 있었다. 그 빨간색은 내가 맨 처음 알았던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색깔 배합이었다. 나는 일찍이 도쿄에서 그곳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면서 미군 군화를 신고 미군 대위의 호위를 받으며 휴전선 부근 들녘을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에게 있어 한국이 국가보안을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하고 있고 미국의 지대한 이익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배치하고 있었고, 이 흉칙스럽게 갈라진 휴전선의 틈새는 세계의 주요 화약고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점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은 '전진배치' 상태에 있고, 바로 거기에다 대형 야포들을 박아놓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점은 지난 30년 동안 언제고 그래왔듯이 광주사태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북이 한 차례 소란을 피우고 싶은 유혹은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할 수도 있었다. 북이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백만이 넘는 군인들이 무장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적개심 서린 경계선에 바짝 붙어 있었다는 것은, 그러면서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군사 역사에 이례적인 기록이 아닐까 싶다. 전장에 나와있는 군대들은 통상적으로 그 나름의 타성을 지니는 법이다. 리처드 홀브루크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카터 행정부 밑에서 한국을 책임맡고 있는 공직자로서의 그가, 1979년 10월 박정희 암살의 여파로 절박해진 상황에서조차도 틈만 나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서울의 교회 인사들과 여타의 반체제 인사들을 몹시 싫어했다는 점은 익히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하듯이 북한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 마당에, 박정희 암살 이후에 평양측의 폭력성을 자극할 만한 방식으로 행동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난 수십 년간 북쪽은 사건에 사건을 잇따라 일으켜왔고, 남쪽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리가 그 당시에 아는 바에 따르면 1979년 말 한국에 대한 워싱턴의 우려는 이란 인질사태(hostage crisis)로 인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한국이 제 2의 이란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사태가 훨씬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데 불안이 있었다. 미국인 수만 명이 서울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인질들 문제로 금세기 남은 세월 동안 북한이 세계 신문의 한 장을 차지해버리고도 남을 잠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휴전선에서 서울까지의 근접 거리도 심각한 현실 문제가 되고 있었다. 지금도 마음머고 남쪽을 밀어붙이면 어렵지 않게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실정이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이것은 단순한 전쟁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관리들은 다년간에 걸쳐 북측과 협상을 벌여왔다. 내 생각에 그들 중 본보기가 1994년에 평양과 핵협정을 맺을 때 미국측 협상단의 일원이었고 지금은 조지타운 대학 외교대 학장으로 있는 로버트 갈루치인데, 최근에 도쿄를 방문한 그는 군사 부문에서 장차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예측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서방 관리들은 지금껏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전혀 예측해내지 못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말했다. 낙관론자들도 상당수 있다. 1980년대 초엽에 서울에서 빌 글라이스틴의 부관으로 있었던 빌 클라크는 연전에 도쿄에서 했던 한 연설에서 2000년까지는 한국이 통일되리라고 예견했다. 그래서 나는 갈루치에게 이 점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는 아무런 예측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에는 미지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내가 뉴욕타임스를 위해 취재한 광주사태 기사는 현재 보안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기사는 광주사태 1년 전과 그후 2년 동안 써온 것들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신문기자로서 분쟁거리를 촉발하는 데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와 심재훈이 1979년 초가을에 김영삼씨를 취재했던 인터뷰 기사는 그가 국회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까지 도발적일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김영삼씨의 국회의원직 제명은 부마사태 폭발로 이어졌고, 바로 그뒤에 박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그러니까 나는 폭발의 임계점을 향해 내닫던 한국사회의 이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던 셈이다. 우리가 쓴 기사들은 미국 내 한국계 미국인들이 전화를 통해 곧바로 한국으로 다시 전송되곤 했다. 한국에서 일부 인사들은 우리가 감정을 부추겼고,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박정희씨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추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테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은 전두환 시절 어느 시점엔가 나의 체재기간을 연장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무렵 도쿄 주재 미국 대사였던 마이크 맨스필드는 어느 날 나더러 다음번에 서울을 갈 때는 신변에 해를 입지 않도록 서울에서 도쿄로 새로 부임한 그의 부관 빌 클라크를 대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때는 광주학살이 있은 지 일 년째 되던 때였다. 나는 정확한 발언이나 날짜는 적어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맨스필드씨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제안을 해올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보다 중요한 핵심이 있다. 대통령 암살이 있고, 1979년 12월 12일 군부가 전두환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광주학살이 벌어진 이후로, 분명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야수들, 모르면 몰라도 심지어는 내 피나 심재훈의 피를 노리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심재훈은 광주사태가 있었던 바로 다음달에 아내 장명수씨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새벽녘에 집에서 눈을 가리운 채 지프차로 끌려갔다가, 취조를 당한 후에 풀려났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 역시 한국의 안정을 위협하고 따라서 미국의 이익까지 위협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물론이다. 일단 손가락질이 시작되면 끝이 없는 법이다. 광주사태는 일종의 지렛대였다. 그 이후로 좋든 싫든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세력은, 단순히 그쪽으로 기우는 경향으로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로서,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한국사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시에 감지할 수 있었고 지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방법으로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길거리에서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광주에서 죽은 이들, 특히 끝까지 남았던 대학생들은 결코 헛되이 죽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내가 우려하는 바는, 내가 설령 극소수의 불평 많은 언론인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광주사태 이전이나 이후나 서울 주재 미 대사관의 식견이 지극히 형편없었다는 사실이다. 빌 글라이스틴이 서울에서 미 국무부에 급히 보낸, 이제는 비밀이 해제되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고서들을 보면 그가 그토록 중차대한 시기에 처음에는 상황을 올바로 파악했으나 금방 돌변하여 사태를 흐려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1979년 12월 12일에 보인 전두환의 움직임을 곧바로 '명칭만 다를 뿐 명확한 쿠데타'로 보았다. 옳은 판단이었다. 그것은 장차 닥쳐올 보다 불행한 일을 예고하는 징표였다. 그럼에도 12.12사건들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첫 번째 통화를 '얼떨결에 나온 것'으로 치부했다. 두 번째 사례도 있다. 광주에서 5월 18일과 19일 사건들이 터진 직후에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한국군대가 길거리에서 시민들을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고 보고했다. 정확한 말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에도 며칠 안 가서 광주에 대한 정책 결정을 위해 5월 22일에 열린 막중한 백악관 회의 바로 직전에 글라이스틴은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고 남한에서의 정책 기조 전반에 대해 가해지는 위협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은근히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이 했던 보고의 전체적인 무게를 뒤바꾸어 버렸다. '15만 명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소중한 재산이 파괴되고 있다'. 이런 판단들은 당시에 나를 위시한 언론인들이 그곳에 내려가서 직접 목격하고 내렸던 판단과는 달리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광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전두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홀부르크처럼 업적과 경험이 충만한 사람, 보스니아에서의 기록이 경탄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람이 필요했었다.
1980년 봄에 누군가가 전두환 장군을 두고 이런 우스갯소리를 지어냈다. "전두환을 벽에다 내동댕이치면 머리 뒤꼭지까지 완전히 벽에 들어박힐 것이다." 그는 명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억셌고, 그래서 글라이스틴은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한국의 여론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자력장(磁 力 場)이 필요했다. 청와대 안팎에서 저지른 그 사람 자신의 지독한 악행들에 못지않게, 그 사람으로 인해서 발생한 국민들의 불행이 결국에는 그를 감방으로 끌고 갔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역사로 보면 더없이 간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당분간 그럴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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