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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44 호
단기 4340. 8. 16 (음력 7. 0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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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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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 공모
소천아동문학상은 우리 아동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강소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제정된 권위 있는 아동문학상으로, 2006년부터 신인상을 신설하여 패기있는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모집 부문| 장편동화 (초등학교 3, 4학년 대상, 미발표 창작물) |원고 분량| 200자 원고지 250매 안팎 |응모 자격| 신인 및 등단 10년 이내 기성작가 |응모 마감| 2008년 1월 31일(마감일 우체국 소인 유효) |시상 내역| 당선작 1편, 상패 및 창작지원금 500만원 (당선작은 책으로 출간하며, 인세는 별도 지급합니다.) |수상자 발표| 2008년 4월 초 (주)교학사 홈페이지 및 개별 통보 |응모 방법| ① 우편으로 접수하며, 겉봉에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 응모작’이라고 명기하세요. ② 인쇄물, 디스켓, 줄거리 요약물을 첨부하세요. ③ 성명, 주소, 전화번호, 생년월일, 약력을 기입하세요. ④ 같은 원고를 타사 공모에 중복 투고하였을 경우 심사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보낼 곳| 121-021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105-67 (주)교학사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 담당자 앞
|문의| TEL (02)707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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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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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값이 싸고 습관적으로 쓸수 있는 데다가 세금이 공제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 / 「선샤인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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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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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사람의 아들이 해야 할 일
사람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진정으로 효도하는 이가 적은 것은 부모의 은혜를 깊이 모르는 까닭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셨으니, 이 은덕을 갚고자 하면 하늘같이 망극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목숨과 혈육은 모두 어버이가 주신 것, 숨과 기와 맥이 두루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효자들은 늘상 슬프도다. 부모의 은혜를 어이 갚으리' 하였다. 어찌 감히 몸을 제 것이라 생각하여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마다 항상 이 마음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부모에 대한 정성이 생기리라. 요컨대 부모를 섬기는 자식은 한 가지 일, 한 가지 행동이라도 감히 제 마음대로 말고, 반드시 명령을 받은 후에야 행동 할 일이다. 만일 당연히 할 일을 부모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간곡하게 말씀드려 승낙을 얻은 후에야 실행 할 것이요, 끝내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제 의사대로 곧장 밀고 나가서는 안된다. 만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복을 갖춘 후, 부모의 침실에 가서 태도를 바로 하고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따뜻하고 추운지를 여쭈어라. 저녁이면 침실에 가서 이부자리를 보아 드리되 덥고 추운 것을 살피며, 시중을 들 때에는 항상 즐거운 얼굴로 공손히 응대하여 매사에 지성을 극진히 하라. 바깥으로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인사드리고 아뢰어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의지할 뿐 자신의 힘으로 부모를 보양하지 않으려 한다. 만약 이렇게 세월만 보내다 보면 끝내 부모에게 은혜 갚을 날이 없으리라. 모름지기 살림을 맡아 부모를 극진히 모신 후에야 자식의 할 일을 바로 닦는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식이 모시려 해도 듣지 않으시면, 비록 살림살이가 궁색하더라도 마땅히 부모가 잡수실 것을 극진히 준비하여야 한다. 생각이 오로지 부모 봉양에 있다면 어떠한 진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왕연이라는 사람은 한겨울에 성한 옷이 없으면서도 부모에게는 극히 맛있는 음식을 드렸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감탄하여 눈물이 절로 흐르지 않을 수 있으랴. 보통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은 지나치게 허물이 없다. 그러나 이런 폐습을 반드시 씻어 버리고 존경심을 극진히 가지라. 부모가 앉거나 누운 자리에는 자식이 감히 앉거나 눕지 못하며, 부모께서 접객하던 곳에선 자식이 감히 손님을 접대하지 못하며, 부모가 말을 타고 다니던 곳에선 자식이감히 말을 타고 다녀서는 안 된다. 부모의 뜻이 의리를 해치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받들어서 조금도 어기지 말 것이요, 만일 이치에 부당한 것이면 화평하고 부드러운 기색과 음성으로 되풀이 말씀드려 이해하시도록 할 것이다.
부모가 병환에 들어 계시면 마음으로 걱정하고 다른 일을 제쳐놓은 채 의원부터 찾아가라. 약을 짓고 치료하는 일에만 힘쓰다가 병이 나으신 다음에야 평상시대로 행동할 것이다. 나날이 살아가면서 잠깐이라도 부모를 잊지 않을 때 비로소 '효도'라 할 수 있다. 제 몸가짐이 착실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에 법도가 없으며, 항상 즐겨 놀기만 하는 자식은 모두를 배반하는 불효자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부모님을 오래 섬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도 부모의 은혜를 끝내 갚지 못한다. 옛사람의 시에 '하루의 부모 공양은 높은 벼슬의 부귀와 바꿀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시간을 아낀다'고 하는 일이 이와 같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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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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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1. 교선 논쟁
4. 교선 논쟁의 의의
요세의 결사 운동은 교종 쪽의 실천 운동이기는 하였으나 현세 구복적인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등 의천, 지눌, 보우 등의 교선 일치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려 불교의 교선 논쟁에서 실제적인 내용을 이룬 것은 의천의 교주선종과 지눌의 선주교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주선종과 선주교종의 논쟁에는 한국 고대 불교의 최대 쟁점이었던 불성론과 불국토 문제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의천은 비록 실천을 중시하였으나 결과는 차별적 불성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또 본체와 현상의 통일을 주장하였지만, 이와 같은 통일은 우선 '분리'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분리로 말미암아 현실적 삶의 공간을 본체에 대비되는 현상 세계로 간주하게 되며, 결국에는 현실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됨으로써, '바로 여기'가 불국토요 내 마음이 불법이라는 정토 사상을 신앙하였던 민중들로부터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지눌은 불성을 일반인들이 통상 가지고 있는 평상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의천의 입장과 대비되었다. 나아가 지눌은 이를 근거로 회광반조라는 '쉬운' 방법을 주장하여, 보살(실천)의 도만 행하면 삶의 공간인 삼계가 불토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눌은 난해한 불교의 교리를 모든 사람의 주관 의식과 결부시켜 바로 인간 자신의 문제로 해결하려 했다. 말하자면 중생과 부처는 곧 한 몸임을 밝혀 자기가 곧 부처라는 신념 아래 수행해 나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불교가 교선 대립의 극복을 과제로 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 내부의 문제보다는 외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주선종에서 선주교종으로 진행된 것을 두고 불교 역사의 발전 단계로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기의 불교가 성종과 상종 사이의 이론적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해소를 주과제로 한 것이었던 데 반해, 고려 불교는 이론과 실천의 일치 문제를 주요 과제로 한 점에서 긍정적인 특징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고려 시대 정신계를 주도하였던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교선 대립의 극복 문제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이자 궁극적인 문제인 성불의 문제에서 첨예한 대립을 빚으면서, 그 해결의 과제를 다음 시기인 조선 불교의 과제로 넘기게 되었으며, 이는 다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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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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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본뜻 : 회계 장부를 기록할 때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서 생기는 결손을 가리키는 말로서, 모자라는 금액을 나타내는 숫자를 붉게 쓴 데서 비롯되었다. 적자의 반대말인 흑자도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바뀐 뜻 : 적자는 손해, 흑자는 이익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보기글" -이번 달은 엄청나게 적자가 났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달엔 무슨 일이 있어도 흑자가 발생해야 하는데 걱정이야 -적자 가계부를 적는 일도 이젠 더 이상 못하겠어요
전하
본뜻 : 전하는 본래 임금이 정사를 보는 전각 아래란 뜻이다. 즉 임금을 뵙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 역시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방을 높이는 존칭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말이다. 중국의 "사물기원"이란 책에 보면 이 말은 황태자를 부르는 호칭으로만 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에서 쓰는 말보다 한 단계 낮은 말을 쓰자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주로 임금에 대한 존칭으로 널리 쓰였다.
바뀐 뜻 :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이나 왕비 또는 왕족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보기글" -전하께오서 첫째보다는 셋째를 더 귀히 여기시니 장차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양녕 전하! 장차 떠맡아야 할 이 나라를 두고 어디를 가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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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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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제국주의 영국의 마지막 부채 - IRA와 아일랜드
테러의 정치학
테러리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비공식적이고 반인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모든 사회에는 공식적 질서와 함께 그에 반하는 세력이 공존하게 마련이니 탈법적 테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장구하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테러리즘이 발흥한 것은 1960년대이다. 1960년대 제3세계의 존재는 테러리즘의 발흥을 가능케 했던 조건이다.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 공업국의 수탈 때문에 저발전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그들 국가의 일부 정치 세력들은 강대국에게 협상을 제의하거나 호소하는 일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보다는 강대국과 매판 권력을 향해 테러를 가할 때 피지배 상황이 끝장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지금도 제3세계는 테러 단체의 발생지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해방군이나 1996년 말 일본 대사관을 점거했던 페루의 투팍아마루 혁명 운동 등은, 제3세계의 빈곤과 비민주화를 그 토양으로 삼고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도 1960년대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당시 서구의 젊은 세대들은 급속한 산업화의 반인간적 폐해를 목격했고,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무수한 살상에 분노했으며, 서구 사회의 부조리에 절망했다. 그들은 절망과 분노의 표현으로서 대중 운동이나 공개적 집단 행동 등에 투신했다가, 일부는 테러라는 극단적 저항 수단으로 옮아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RAF가, 그리고 동양의 경제 대국 일본에서는 적군파가 생겨났다. 테러는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국제적인 문젯거리이다. 전세계에는 약 550여 개의 테러 단체가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테러 행위는 주로 미국 등의 패권 국가나 제3세계에서 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 중에서도 온화한 인상을 지닌 영국에서 테러가 빈발한다는 사실은 다분히 의외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는 총격과 폭발 사고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민주주의의 발생지이고 경제적 수준도 높은 영국을 무력 충돌로 몰아가는 주범은 아일랜드 공화군, 즉 IRA(Irish Republican Army)이다. 이들은 요인 암살뿐만 아니라 공공 장소에 대한 무차별 테러도 거리낌없이 자행하면서 서방 세계, 특히 영국인들에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본성적으로 폭력적인 집단일리는 없다. IRA의 조직화와 테러 전략을 유발한 사회적 조건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이다. 영국은 19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했으며, 현재도 북아일랜드를 통치하고 있다. 그 역사적 시기 동안 쌓여 온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IRA가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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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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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남녀관계와 만족의 함수
서구의 전통인 부인에 대한 정중함은 그릇된 성의표준을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주었는데, 이는 이미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어서 새로운 위험이 임박해 와도 모르는 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남녀의 근본적 요구는 아이를 낳는 것이므로 자연의 법칙은 서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재치 있게 아이의 생산을 남자와 여자에게 과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행복과 만족감은 생리적으로 아이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것은 인생의 일반적인 생애 중에서 지극히 짧은 동안일 뿐이고 아이를 낳게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며, 그것을 끝내고 나서도 상당한 세월이 존재한다. 게다가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 일생동안 단지 아이를 낳는 일에만 만족해 있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도 우리들과 같이 일부일처제 아래에서 한 여자와의 생리적 관계보다 더 많은 만족감을 얻을 가치가 당연히 있다. 일부다처제 아래에서는, 남자가 만일 원한다면 생기 적인 성관계를 단순하게 되풀이하는 것으로 자기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으나 그것도 지성이 결핍되고 생리적인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 남자의 경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만일 지성을 지닌 남자라면 그 반복에 질력이 나고 말 것이다. 나는 민감한 감각과 지성이 넘친 일부다처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인 관계가 없는 여자를 발견하고 매우 흥분하였으며, 사상이나 감정을 주고 받으면서 더욱더 많은 만족감을 얻었다. 그것은 실제로 성의 에센스가 스며드는 것 같은 교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예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남자와 여자의 일반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 모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우 큰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에서 남자와 여자의 현재의 간계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서로가 즐거움을 나누어 가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쌍방 모두 인생의 핵심인 정열, 연민, 쾌할함이 부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틀린 두사람 사이에 이해와 올바른 평가가 있으면 서로 나누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쾌활하고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개혁이 필요하지 않지만, 매일 신문을 읽는 것만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하며 감사하도록 교육시켰다면 얼마나 많은 파탄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남자와 여자의 만족스러운 관계를 찾기 위해서는 여자를 교육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대답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독일식 파시즘이나 동양의 문명은 여자에게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타국의 영향에 좌우된 일이 그다지 없었으므로 만일 파시즘 사상이 파동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파시즘의 사고는 벌써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령 방위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전쟁의 분위기가 느껴질 때 파시즘적인 사고 방식은 아무래도 강해지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민으로서 평등한 책임을 갖는 입장에서 뒤로 물러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그녀들의 대부분은 많은 자유를 누려왔으므로 새삼스럽게 노예를 지위로 다시 떠밀리 수는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노예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며, 게다가 정의를 실행한다는 쾌감도 따른다. 그렇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무척 힘든 일로, 우리들처럼 도덕적인 국민에게는 불가결의 정의감을 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타당한 이론을 발견하여 말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의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소수에 속하는 여성 전체 그룹이 억압당하고 노예화 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오싹하고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여자를 압박하는 이와 같은 행동에 책임을 지지 지지 않고 그와 같은 일이 실현되었을 경우, 남성은 그것을 기정사실로써 반대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의 심정은 전체적으로 귀여운 여자에 대한 센티멘털한 감정을 안게 됨으로써 대개의 경우 부드러워진다. 여자의 무지가 낳는 또 하나의 불행한 결과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 여자가 무지 속에 갇혀 있으면 미신과 야만 가운데로 되돌아가 자식들에게 그 생각을 주입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남자의 예속물로 다루는 국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악하고 있는 것인데, 유년 시절에 받은 나쁜 영향은 다음에 교육을 받아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내아이라도 어릴 때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무래도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머니의 무지로부터 받은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여자가 인간으로서 자라는 것과 같은 비율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진실을 찌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미국의 여성을 육아와 부엌과 교회로만 억지로 한정하는 것은 여자 스스로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실행되기 어려운 것이다. 뒷검음질 치고 싶은 게으른 여자들도 만일 그렇게 됨으로써 특권의 여러 가지가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절할 것이다. 여자들의 생활무대를 육아, 부엌 교회로 한정하는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하고 싶은 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없으며, 생각한 것도 먹어보지 못하고, 미국여성이 당연한 일로써 마음 편하게 보내고 있는 오락시간의 10분의 1마저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게다가 여자는 소유주인 남성에게 아첨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데, 자기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것은 뭐라 해도 구하는 편이든 지키는 편이든 복종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이다. 미국의 여자들은 알고 싶은 곳 즉 제멋대로의 속에서 살아왔다. 여자는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할 뿐으로 그 외에는 아무것에도 쓰지 못한다. 국가를 위해서라든지 국가에 충성한다든지 하는 책임감은 갖고 있지 않다. 제멋대로 아무 곳에나 왔다갔다하며 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하고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듯 들린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참다운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존경마저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을 제외하면 여자는 부족한 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 때문에 여자는 전부를 잃고 있는 것이 된다. 남성의 호의와 존경이 없으면 여성의 생애는 재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여성의 불만으로부터 수 많은 악이 흘러나온다. 이 생태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대답은 간단 명료하다. 새로운 교육, 즉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아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햐여 빛을 쐬는 교육, 남자와 여자를 참다운 의미에서 평등하게 하기 위하여 남녀의 이간을 없애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전통에 의하여 남녀의 기능이 다름을 강조한 나머지 남자와 여자가 이간되어 온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말들은 해왔지만, 남자와 여자의 본능적인 기능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진실된 연구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이를 갖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남자의 독립적 역할이며, 여자의 독점적 역할은 임신과 출산과 수유라는 사실이다. 이것만이 남녀가 서로에 대해 아는 교육의 전제가 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모두가 억측으로 사실로부터 벗어난 편견의 결과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아는 교육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우선 먼저 배격해야 할 사상은 인류의 남자와 여자라는 좋든 싫든 둘로 나누어져 있는 이 커다란 그룹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성의 척도에 의하여 일체의 활동을 미리 결정지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인종적 편견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도 흑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너는 그런 것이 좋기 때문에 가사와 육아에 관한 일을 할 뿐이고, 그 외의 활동으로부터 영구히 쫓겨난 것이다. 만일 산업계에 나가 일하고 싶으면 네게는 가장 낮은 지위밖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똑같은 일로 얼마를 받든지 너는 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 만일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다면 중요한 직위에는 아무리 오래 있어도 올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만큼 실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펴져 있지는 않다. 어머니날을 정해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를 선발하는 감상적인 행사를 한꺼풀 벗겨 보면, 여성은 소수민족이 받는 모든 고난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에는 남자와 여자의 활동을 확실히 구별하는 이유가 훌륭하게 있었다. 남자는 옥외에서 여자는 옥내에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여자가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여자가 그 옛날 차지하고 있던 기능과 비교한다면 실제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감정적으로는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역할이 있다. 아이와 남자에 대하여, 그녀가 있는 곳에는 가정과 안정이 있다는 감정을 안겨주는 소중한 일이 있는 것이다. 여자는 오늘날에도 아이와 남자의 중심이지만, 집은 이미 그렇지 않게 되어있다. 남자와 아이는 위안과 격려와 애정의 원천으로써 여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에는 실제의 활동을 통하여 여자가 한 가정에서 얼마나 소중한가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그것은 여자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굽는 빵과 그녀의 애정에 온 집이 의지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애정과 위로는 빵집에서 나오는 빵과 냉장고의 음식물을 통하여, 또 백화점에서 사오는 옷가지 등을 통해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녀의 것으로 남겨진 것은 다만 언어뿐으로, 언어는 그녀가 느끼는 애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녀가 가정에서 도덕 교육을 하려 해도 그것 또한 세계의 실상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충분할 뿐이다. 여자는 도덕교사로서는 완전히 실패자임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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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성종으로부터 친구 대접을 받은 유호인
유호인(1445-149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극기, 호는 뇌계이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가 되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할 적에, 임금이 내시 한 사람만 데리고 밤에 임어하였다. 유호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임금이 사모만 쓰고 앉도록 하고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비단 이불이 해져 솜이 나오고 또 솜의 빛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임금이 칭찬하였다.
"네가 맑고 중요한 벼슬을 지내면서 청렴 검소함이 이러하니 가상하다" 임금은 곧 내시에게 이불을 가져오게 하여 덮어 주었다. 벼슬은 합천 부사에 그쳤다. 한번은 영남으로 어버이를 뵈러 귀향하는데, 임금이 내관을 시켜 중로에 따라가서 그의 시주머니를 뒤져서 가져오게 하였다. '조령에 올라서 읊은 시'는 이렇다.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멀리 떨어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머니와 가까워졌네
주상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충효가 모두 구비되었구나"
공이 일찍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산음현감을 자청해 나갔는데, 관리로서의 일처리가 미숙하여 일반적인 문서도 잘 처결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장을 올렸는데, 여러 날 지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자, 다시 호소하였다. "판결을 내려 주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고 오직 본 소장을 도로 찾아 가고자 할 뿐입니다" 유호인이 답을 못하여 우물쭈물하는데 통인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부임하던 날 올린 소장도 아직까지 판결하지 못하였는데, 네가 올린 소장은 겨우 닷새 밖에 안 되었다. 어찌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너무 심하다" 뇌계가 그 민첩함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 통인이 참으로 영특하고 매우 뛰어나다"
영남의 방백이 부임차 하직 인사를 할 적에 성종이 그를 인견하고 특별히 부탁하였다. "내 친구 유호인이 현재 산음현감으로 있으니, 경이 그를 보살펴 주구려" 그 방백은 왕의 뜻을 거행하지 않고 끝내는 '유호인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만 읊고 있다'는 죄목으로 파면했다. 한다. 당시 군왕들의 넓은 기상과 도량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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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시저'는 뛰어난 전략가인 동시에 간결하고 박력있는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있다.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한 '시저'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갔다. '폼페이우스'는 그 곳에서 죽고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을 속삭인다. 그후 기원전 47년 '시저'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제라'에서 '폰토스'의 왕 '파투나케스'의 대군과 대치했다. 그리고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자 '시저'는 곧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승의 기쁨을 전했다. 그 편지가 곧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붸에니 뷔디 뷔키)의 세 마디였다. 동시에 이는 가장 군인답게 간결하고 요령있는 보고로써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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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하나하나의 만남이 각자의 일생을 방향 짓는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을 신비로운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기쁜 일
'달과 6펜스'라는 작품으로 동양에서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문호 서머셋 몸이 일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축하연을 연 날 밤, 친구 한 사람이 물었다.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일은 뭔가?" 서머셋 몸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 있지.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 중인 한 병사에게 편지를 하나 받았었는데, 이런 편지였다네. '당신의 작품을 통독했는데 한번도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이상의 기쁨은 없다네. 그것이 평생을 통해서 제일 기뻤던 일일세."
쉽게 쓰려면 쓸 수 있는데도, 아니 그렇게 쓰려고 노력해야 하는 데도 ,억지로 어려운 말을 사용해서 이상하게 빙빙 돌려쓰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장을 늘어놓고는 뿌듯해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현학적인 악취미다. 그런 글을 써 놓고 스스로 훌륭하게 썼다고 생각하며 뿌듯해 하는 얼굴은 그 사람이 얼마나 유치한가를 상징한다. 현학적인 악취미를 즐기는 것은 학자가 아직 진지한 학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때의 현상이 다 진지한 경지에 이르면 그런 버릇은 당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문장이라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인 이상 그 기능을 충분히 다하려면 무엇보다도 일단 쉬워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쉽게 전달받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문장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교묘하게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쓰느냐가 문제가 된다. 적어도 글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면으로 도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어려운 기술이면, 난해한 어구를 사용하여 읽는 사람을 혼란시키는 것이 오히려 문장의 초보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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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열여섯번째 이야기 최고의 기사는 누구인가
여느 때와 같이 루까노르 백작은 빠뜨로니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했다. "빠뜨로니오, 예전에 아주 막강한 세력을 가진 왕이 나의 적이었던 때가 있었소. 둘 사이의 대결은 하도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어 결국에는 화해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짓고 합의를 했다오. 그래서 지금은 친구가 되어 전쟁이 없어졌다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항상 서로를 의심하고 있소. 더군다나 그의 측근들이 그에게 하듯이 나의 벗들도 그가 우리 관계를 악화시킬 구실을 찾는 데 여념이 없다며 나를 불안하게 한다오. 그대는 내 모든 문제를 알고 있으니, 이런 때 어찌해야 하는지 충고해주기 바라오." 빠뜨로니오는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제게 요구하시는 조언은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조언을 드리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백작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전쟁 준비도 하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또 당신을 모시고, 당신의 불행을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며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당신께서 어떤 일에 대비를 하시도록 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리고 백작님께서 나쁜 일에 대비하시는 것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며, 땅을 일구어 식량을 준비하고 요새를 튼튼히 하는 것에 반대하는 자는 당신의 재산이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신께서 많은 친구와 부하를 거느리며 그들을 위해 너그럽게 베푸는 것을 저지하는 자는 당신의 명예와 영토 수호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지 않으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되실 것이나, 한편으로는 그 일들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일이지만 저의 조언을 바라시니 선하고 정직했던 한 기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군요."
성스럽고 자비로운 페르난도 왕이 회교도들이 점령하고 있던 세비야를 포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를 모시고 있던 많은 부하들 중에 당대 최고의 무사로 인정받고 있던 세 명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로렌소수아레스 갈리나또였으며, 두번째는 가르시아 뻬레스데 바르가스였고 세번째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하루는 이 세 기사가 서로 누가 최고의 무사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쟁이 끝날 것 같지 않자 그들은 무장을 하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세비야의 성문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음날 세 기사는 무장을 하고 그 마을로 갔습니다. 성벽과 망루 위에서 정찰을 하고 있던 회교도들은 그 세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는 외교서신을 전하는 사자일것이라고 판단하고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기사는 성 밖의 담을 지나 성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기사들은 창끝으로 문을 여러 번 두드린 후 말을 돌려 다시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지요. 이들이 서신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회교도들은 노하여 기사들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성문을 열고 기병 천오백 명과 보병 이만 명 정도가 뒤따르기 시작했을 때 세 기사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따르는 회교도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본 기사들은 말을 돌리고 기다렸습니다. 적이 다가오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기사가 먼저 나서서 싸웠습니다. 로렌소수아레스와 가르시아 뻬레스는 움직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적이 더 가까이 오자 가르시아 뻬레스 데 바르가스가 싸우기 시작했고 로렌소 수아레스는 혼자 계속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 회교도들이 그를 에워싸고 공격을 하자 그도 용감하게 싸우기 시작했지요. 왕의 군사들은 이 세 기사가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는 즉시 지원하러 달려갔습니다. 많이 다치고 백적간두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다행히도 이 세 기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의 결투는 너무 치열했기에 페르난도 왕도 몸소 참가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승리는 기독교인들에게 돌아갔으나 진영으로 돌아오자 왕은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무모한 짓을 벌인 세 기사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하들이 세 기사를 용서해 달라고 빌자 왕은 그렇게 했지요. 후에 왕은 목숨을 건 그 모험의 발단이 세 기사 중 누가 최고인가를 가리지 못하여 생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휘하의 모든 훌륭한 전사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세 기사 중 누가 더 훌륭했는가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이자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혹자는 처음 혼자 싸움을 시작한 기사가 가장 용감하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두번재가, 또 다른 이들은 세번째가 가장 뛰어났다고 했지요. 모든 의견의 근거와 이유가 너무도 논리정연하여 틀린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격론 끝에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회교도인들이 수가 많기는 하여도 세 기사들의 용기와 노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첫번재 기사가 가장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 너무 많아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은 승리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수치스러움을 당할 수 없어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용기를 가지고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두려움을 견디면서 적이 더 가까이 다가와 공격을 할 때까지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두번재 기사도 나름대로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두려움을 견디고 회교도들의 공격을 직접 받고서야 싸움을 시작한 로렌소 수아레스 갈리나또가 세 기사 중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뛰어나다.”
"루까노르 백작님, 당신께서는 불안과 공포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이 있다는 것도 아시지요. 그러나 불안하실수록 그만큼 더욱 현명하게 대처하실 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비하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갑자기 당신에게 화를 입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충고하건대 절대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마시고 급작스럽게 큰 화를 입지는 않으실 것이니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사람들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 근거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자들은 뭔가 일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측근이나 상대의 친구들도 전쟁을 원하는지 평화를 원하는지 스스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시에는 쓸모 없으며 온전한 평화를 즐길 줄도 모릅니다. 그들은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워 그 틈을 타 축재나 하려고 하며, 당신을 심란하게 만들어놓고는 재산을 갉아먹으려고 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당신께 해가 되는 일을 하더라도 그들을 정확히 파악하시는 한 당신께서는 안전합니다. 당신은 모든 일에서 소신껏 행동한다는 것을 만인이 알게 될 것 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부당한 행위를 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백작님께 해가 되는 일을 하면서까지 못된 자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평화를 누리실 것이며 착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 타인의 불평을 받아주느라 해를 입지 말라. 고통을 참을 줄 아는 자만이 승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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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1.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
1980년에 일어난 광주 사건을 취재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 가운데 가장 힘들고 정신적으로 엄청난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비록 AP통신과 나 개인에게는 커다란 업적이 되었지만 그후 몇 년 동안 나는 당시의 충격적인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광주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나는 한국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신문기자 생활을 거쳐 AP통신의 국내 지부에서 2년 동안 근무한 후 도쿄 지사로 발령받았던 것이다. 그전에 나는 해병대 복무 중 6년간을 일본과 베트남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일본은 외국인이 살아가기에는 힘든 곳이다. 나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고 일본어도 약간 할 줄 알았지만 폐쇄적인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성격, 그리고 외국인을 싫어하는 정서 때문에 상당히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좀더 개방적이고 미국인의 성격과 맞는 한국(남한)으로의 출장을 아주 반가워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주로 한 일은 우리 회사의 현지 통신원이었던 K.C.황의 업무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는데, 그는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뛰어난 언론인 중 하나였다. 비록 그는 능력 있고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박정희의 독재정권하에서 혼자 취재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체포와 구금의 위협이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사실, 언젠가 그는 정보기관의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5일동안 갇혀 있다가 그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을 강요받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서울로 날아가 K.C.의 해박한 지식과 광범위한 취재원을 이용해 그가 직접 하기에는 위험한 노동 문제나 정치 문제들을 취재했다. 다른 모든 언론인들처럼 나도 언제나 기관원들에게 미행을 당했고 내 전화 또한 도청되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방해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 당시 미국인 기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일시 또는 영구적인 국외 추방이었다. 나는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까지도 내걸었던 야당 지도자들과 나와 함께 일했던 K.C.를 비롯한 훌륭한 언론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매번 한국 출장이 기다려지곤 했다.
1979년 10월, 나는 기사 때문에 몇 주 동안 서울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외국 특파원들은 몇 명 되지 않았고, 10월 26일 저녁에는 나말고 로이터통신 기자 한 명이 더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호텔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나는 동트기 전에 K.C.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대통령이 저격당했고 거리에는 탱크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금 사무실로 나올 수 있겠나?"
나는 호텔 바에서 보낸 전날 밤을 후회하면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고는 AP 사무실로 달려갔다. 경찰과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였고 아무도 나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K.C.와 그의 조수 사이먼(Simon) 김, 그리고 세 번째 현지 직원이었던 안씨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었다. 헌법에 의하여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는 갑작스런 발표가 있었지만 대통령 박정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K.C.는 전화를 들어 그가 가진 모든 취재원들과 연락했고 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천천히, 단조롭게, 그리고 약간씩 공식 정보가 늘어났다.'박정희가 총에 맞아 부상당했다','몇 명이 더 다쳤다','박정희는 중상을 입었고 몇 명은 죽었다','박정희는 죽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 때마다 K.C.의 취재원들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고 그날 밤 이후 며칠 동안 우리는 차차 진실을 알게 되어 이를 기사화하였다. 박 대통령은 인기 여배우들과 몇 명의 관료를 데리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주최한 연회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김재규와 측근들이 박정희와 경호원 다섯 명을 사살해버렸다. 비록 최규하가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김재규와 맹약을 맺은 몇 명의 최고위 관료, 군 장성들이 나라를 접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몇 주 동안만 한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 김재규와 기타 장성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사령부 요원을 제외하고 그들이 실제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하던 몇몇 젊은 장교들은 이 쿠데타를 아주 달갑잖게 생각하였고 실제 병력은 이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소장이던(곧 중장으로 승진하는) 전두환은 자신의 부대에 행동 개시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와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새로운 군인 집단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보다는 한반도의 안정에 더 관심이 있었던 미국은 재빨리 전두환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다음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체포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시행됐던 계엄령을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언제나 정치적으로 적극적이었던 한국의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새로운 권력이 기반을 다져갈 무렵인 5월에 나는 다시 서울에 왔다. 그때 남부의 도청 소재지인 광주에서 심각한 학생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광주는 한국의 가장 뛰어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의 고향이다. 5월 1일, 수백 명의 학생들이 계엄령과 강압 정치의 종식을 요구하면서 광주시내를 행진했다. 시위는 두 주일 동안 계속됐고 점차 서울과 다른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전두환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5월 17일, 계엄령을 확대 실시하면서 김대중을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던 것이다. 거칠고 고도로 훈련된 이들은 남도 사람들에게 안 좋은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이들은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격을 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 버스 안에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폭동은 계속 확산되었고 군인, 경찰들과 시위대들 간의 충돌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우리는 서울에 있으면서 사이먼 김을 광주로 내려보냈다. 5월 20일 밤, 그가 전화를 걸어 불길한 소식을 알려왔다. 더 이상 학생들만이 아닌,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도청 건물을 포위하자 군인들이 발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 다음날 광주시민들은 세무서와 KBS를 불태웠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군인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과 군대 병력을 광주 밖으로 철수시켰다. 이즈음 나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Robin Moyer)와 함께 광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도시로 비행기를 타고 가 내키지 않아 하는 택시 운전사를 설득하여 광주로 향했다. 해질 무렵 광주 외곽 10~15킬로미터 지점에서 우리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보았는데, 그들은 시위대와 군인들 간의 전투로 길이 아주 위험하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는 차를 세우고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광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킬로미터 정도 더 갔을까, 폭동의 첫 번째 조짐을 볼 수 있었다. 불타는 시내 버스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계속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 위에서건 가끔 지나치는 건물들에서건 전혀 인기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드디어, 자정이 약간 지난 후 우리는 광주의 경계선으로 들어섰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뒤집힌 승용차와 불타 버리거나 유리창이 모두 깨진 버스들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처음 마주치는 2,3층 건물로 다가가자 차량들로 만들어진 바리케이드를 볼 수 있었다.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우리는 잽싸게 버스의 잔해 뒤로 몸을 피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Kija! Kija!"(기자요! 기자!) 나나 로빈이나 한국어는 한두 마디 정도밖에 모르는 처지였다. 손을 들며 천천히 버스에서 벗어나 바리케이드로 다가갔다. 양쪽 건물 옥상에서 철컥하고 소총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슴푸레한 글미자가 다가와 한국말로 뭔가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국어 기자증을 건네 주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영어로 시민군 사령부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자 우리는 즉시 동의했다. 새벽녘에 시민군 지도자들은 우리의 신분을 확인했고 사이먼 김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 우리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내를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가장 정확한 정보를 맨 먼저 전세계의 언론사에 제공하는 AP의 기자로서 나는 즉시 지난 이틀간의 사건들을 종합하고 사상자 수를 파악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끌려갔는지 알지 못했지만, 군인들이 철수하기 전 시체를 트럭에 싣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광주 시내의 임시 시체 안치소와 병원 영안실들을 돌아다니며 사망자 수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그날 오후까지 100구가 넘는 시체를 발견했다. 이러한 희생자들의 모습과 썩어가는 시체에서 나는 냄새는 내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내가 다음으로 한 일은 기사를 외부로 전달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미 군대가 광주를 봉쇄했고 모든 전신, 전화망도 단절된 상태였다. 그때, 우리에게 하루 동안 차를 태워 주었던 친절한 목사님이 대안을 제사했다. 자전거 몇 대를 빌려서 오솔길과 논두렁을 통해 시내를 벗어나 10~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우체국에 있는 전화기로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때 사용 가능했던 가장 가까운 전화기였다. 나는 그 제안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AP 서울 사무소로 기사를 보내기 위한 힘들고도 스릴 넘치는 모험의 시작이었다. 며칠 동안 자전거를 타고 광주시내와 우체국을 오간 후, 그 목사님은 친절하게도 자기 차를 우리에게 빌려주었다. 우리는 그 차에 'Press(보도)' 표시를 붙이고 비포장 도로와 험한 오솔길을 덜컹거리며 내달려 군 봉쇄선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가장 많이 갔던 곳은 바로 그 우체국이었다. 한번은 근처의 미군 기지에 있는 전화기를 쓰려 했지만, 내 통화 내용을 들은 장교들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길까봐 기지 출입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그다음부터는 계속 우체국 전화를 써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액션과 서스펜스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강경파 학생들과 역시 강경했던 군인들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꾸며진 시민수습위원회를 취재하였고, 주요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급조바리케이드에서 학생들을 인터뷰했다. 심지어는 반대편의 군인들과 이야기해 보려고도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광주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군인들은 우리를 몇 번인가 억류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로 따져 보았을 때 협상은 불가능했고, 조만간 벌어질 전투에서 시민군의 승산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들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소총들은 탱크와 장갑차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눈발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뒤 한번은 젊은 학생 지도자와 오랜 식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광주로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던 열 명이 채 못 되는 외국 기자들에게 원시적인 기자증을 발급해준 시민군 언론담당이었다. 그의 열정과 설득력 있는 주장, 그리고 다음번에 그를 보았을 때의 상황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그와의 인터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외국인 기자들은 시민군 사령부가 된 도청 뒤의 작은 여관에 모여 있었다. 몇몇 상점들과 식당이 아직도 영업 중이었지만 음식은 점점 귀한 것이 되어갔다. 기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저녁동안만 문을 연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 우리에게 주인은 방금 우리가 그 집의 모든 음식들을 거의 다 먹어치웠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업가는 당시 내가 신고 있던 이탈리아제 새 구두의 밑창이 다 닳아버렸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고 신발가게 주인을 찾아내어 내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가게의 셔터를 올리고 특대 사이즈의 신발을 뒤지다가 결국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왔다. 비록 한 사이즈가 작아서 엄지 발가락이 꼭 끼었지만 나는 기쁘게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그때쯤 군인과 시민 들의 초기 전투에서 줄잡아 300명 이상이 죽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모든 사태가 끝나기 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게 분명했다. 군대는 광주의 중심가로 탱크를 이동시키며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고,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공격에 대한 급보를 전해왔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광주시민들은 비록 겁이 났지만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해 주요 도로의 바리케이드를 지키며 겨우 7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탱크와 대치하고 있었다. 내가 반란군 진영에서 본 가장 강력한 화기는 한국전쟁 당시 쓰던 대전차포였는데, 지금 군인들이 앞세운 현대식 전차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이제 더 많은 외국 언론인들이 광주시내로 잠입해 들어왔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던 학생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Press(보도)'와 'AP' 표지판이 달린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때면, 모든 군중들이 우리를 성원하는 갈채를 보냈다. 결국 5월 27일 새벽 2시, 군인들이 최후 통첩을 해왔다. 두 시간안에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도청에 위치한 사령부 안에서 학생들이 M1 소총을 분배하기 시작했고 다른 학생들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원은 거의 오지 않았다. 우리는 도청 앞 광장을 향해 다가오는 탱크 소리와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전투 때 길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해아 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특파원은 도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고 뒤편에 위치한 여관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기로 했다. 전투는 점차 격렬해졌고 중화기들의 발사음까지도 들려왔다. 동트기 직전, 나는 공수부대원들이 조용히 도청 주변을 돌아 사령부가 있던 건물로 돌격하는 것을 보았다. 전형적인 시가전 교본에 따라 그들은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 한층 한층 내려오며 '청소'를 시작했다. 군인들은 방마다 충격 수류탄을 던져넣고 돌입하며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쏘아댔다. 날이 밝아오면서 나는 겨우 15미터 정도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 공수부대원 두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갔을 때, 두 명 모두 나를 발견하고는 M16을 갈겨댔다. 첫 번째 탄환이 내 귀에서 겨우 몇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맞았고 나는 안씨와 다른 특파원이 웅크리고 있는 구석으로 몸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군인들이 쏜 총알이 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얇은 벽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우리는 미친 듯이 복도로 뛰어나갔다. 정부는 분명히 이 여관에 외국 특파원들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는데, 아무도 군인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지 않았든가, 아니면 그들이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쏘아대는 것 같았다. 비록 한 시간 정도 간헐적인 총성이 들렸지만 사령부에 대한 공격이 전투의 마지막이었다. 총소리가 잦아든 후, 텔레비전 기자 한 명을 포함한 외국 기자들은 여관에서 나오며 나이 지긋한 상사 한 명이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의 흥분을 이기지 못해 벌벌 떨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총을 들이대며 한국어로 뭔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기자증을 흔들어댔지만 그는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대령 한 명이 지프를 타고 왔다. 우리는 상사를 밀쳐내고 대령을 불렀다.
"대령, 사상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김'이라는 이름이 셔츠 주머니 위에 새겨져 있던 그 대령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폭도 둘이 군인 한 명이 죽었소."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우리는 도청 건물 주위를 돌면서 17구의 시체를 확인했는데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끼어 있었다. 바로 시민군 언론담당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체는 반쯤 타 버렸고 45구경 권총의 탄창이 곁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또 손을 뒤로 묶인 학생들이 줄을 지어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는데, 젊은 여자 한 명과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을 포함하여 적어도 60~70명은 되는 듯 싶었다.
석 달 뒤, 전두환은 공식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 후 김대중은 반란 수괴 혐의로 이름뿐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것은 내가 한국에서 취재한 마지막 사건이다. 1981년,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전임되었고 그 다음에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옮겨갔다.
17년이 지난 오늘날, 전두환과 그의 후계자가 부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김영삼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며, 김대중은 여전히, 그러나 이제는 민주화된 한국에서, 야당 지도자인 것을 보면서 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만족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언론인으로서 우리는 중립을 지키고 최대한 객관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을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며, 독재자와 자유 경선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 그리고 압제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들간의 차이를 확실히 구별하기는 어렵고 자주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직접 본 것과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보도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는 이러한 차이가 내게 처음으로 확실히 알리려고 노력했다. 내 견해가 아닌, 진실로서 말이다. 나는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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