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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32 호
단기 4340. 7. 30 (음력 6. 1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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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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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옥랑희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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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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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하는 것이 신성한 것은 아니다. 반대할 권리가신성한 것이다. / T.아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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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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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닭을 쳐도 선비답게
네 형이 멀리서 왔으니 기쁘기는 하다만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아보니 옛날에 가르쳐 준 경정의 이론을 하나도 제대로 답을 못한 채 우물거리더라. 슬픈 일이로구나. 왜 이렇게 되었느냐? 어린 날에 화를 만나 혈기를 빼앗기고, 정신을 지키지 않은 채 놓아 버렸기 때문인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자주 점검하며 지난날 배운 것을 복습했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지경에 이르렀겠느냐? 한스럽고 한스럽다. 네 형이 이러니 넌들 오죽할까? 문학이나 사학에 상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네 형이 이렇게 되었을 때, 완전히 손도 못 댄 너야말로 알 만한 일이로다. 내가 집에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을 가르쳤다는 데도 듣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다른 집안에서도 홀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겠지만, 나는 지금 멀리 귀양살이 와서 풍토병이 심한 남쪽 변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외롭고 불쌍하게 지내며 밤낮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고 마음속에 담긴 뜨거운 마음을 쏟아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너희들은 이것을 얼핏 읽어보고는 고리짝 속에 처넣어 버린 후 다시 마음을 두지 않아서야 어찌 되겠느냐?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하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농서를 잘 읽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아라. 색깔을 나누어 길러도 보고, 닭이 앉는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살지고 알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 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 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 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법이다. 만약 이만 취하고 의를 못 보며, 가축 기를 줄만 알았지 그 취미를 모르면서 이웃 채소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것은 산골에 사는 못난 사람들의 양계이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느냐.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라는 사람의 "다경", 유득공의 "연경" 같은 서적처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세상일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해야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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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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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현대의 사상/해방 이후-현재
2. 남한의 서양 철학
실존 철학의 융성과 서양 철학 연구의 정착
전후의 정신적 황폐함 위에서 꽃핀 실존주의 및 실존 철학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철학의 추세였으며, 1950년대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6, 25 전쟁이 남긴 민족적 상처는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구체적 역사 현실에 맞서려는 철학적 노력은 사라지고 허무주의적 기풍이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전후의 정신 상태는 불안이라든지 절망과 같은 용어가 호소력을 지닐 정도로 병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대부터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실존 철학이 철학도들의 정신과 가슴을 사로잡게 되었다. 철학도뿐만 아니라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 절망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한국의 지식층에게 실존주의 및 실존 철학은 '시대의 사상'으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존 철학 연구의 효시를 이룬 박종홍이 1950년대 실존 철학의 광범한 수용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떠오른 것도 이런 배경 아래서였다. 경직된 냉전 체제로 인해 한국의 지성계에는 좌파 이념이 설 땅을 잃었으며, 민족주의 이념조차 용공으로 배척되기 일쑤였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이 완전히 배제된 지적 지형에서 실존주의는 유행처럼 지식인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1950년대의 실존주의는 전후의 정신적 폐허를 극복하려는 지적 모색과 분단 의식을 강요하는 냉전 문화에 대한 개인적 수준의 항변을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역사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개인의 내면적 자아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 때문에 실존주의는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숙고나 비판적 수용의 노력이 결여된 채 1950년대 분단 한국에 문자 그대로 직수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철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서양 철학 사조는 독일 관념론과 실존 철학이었다. 이 두 철학 사조는 철학의 외연과 동일시될 정도로 이 기간 동안 한국 철학을 지배하였다. 이런 현상은 이 땅에 서양 철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독자적 수용의 길을 걷지 못하고 일본 철학계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일본 철학계가 독일 철학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철학도 독일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31년에서 1968년까지 발표된 철한 논문 가운데 철학 사조로서는 독일 관념론과 실존 철학이 우세하며, 철학자로는 칸트, 헤겔,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독일 관념론은 식민지 시대에서 철학적 훈련을 쌓은 철학자들에 의해 1950년대에 와서도 계속 연구되었고 그에 따라 일정한 학문적 성과도 낳았다. 특정 철학에 대한 이러한 편중에도 불구하고 학문 분과로서 철학 발전을 위한 정초는 계속 다져져 갔다. 1953년 '한국철학회'가 발족되었고 초창기 철학자들과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온 "철학"지가 간행되었다. 또한 철학 교육을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철학 교재의 집필과 철학을 보급하기 위한 사상 강좌류의 저술이 이루어졌다. 특히 1950년대 말 다수의 철학자들이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옴으로써 철학의 관심 영역이 과학 철학, 현대 논리학 등으로 차츰 폭이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철학회 초청으로 미국과 독일의 철학자들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면서 서양 철학과 직접 접촉하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의 확대는 미국 문화 일변도의 수용에 따른 불가피한 추세로서, 이후 독일 계통의 철학과 아울러 한국 철학계의 중요한 관심 영역을 이루게 되었다.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의 연구 내용이나 방법론도 미국적 학풍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6, 25 전쟁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긴밀해졌기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제공하여 도미 유학을 장려하는 등 미국 정부의 정책적 배려를 통해 유학생이 증가하는 한편, 교수도 교환 교수와 연구원의 자격으로 미국 대학들에서 지식을 배워 왔다.
1960년대 들어오면서 철학적 관심이 서서히 다원화되는 한편, 한국 철학계의 세대 교체도 이루어져 갔다. 1963년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방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참여한 '한국칸트학회'와 박종홍 교수의 환력기념 논문 발간위원회가 모체가 된 '철학연구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 이미 성립하였지만 그간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한국철학연구회'도 재정비 되었다. 이제 개별적 연구 활동을 주로 하던 1950년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움직임, 즉 학회라는 형식의 결집이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비교적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출발한 학회가 발족되었는데, 1958년에 세워진 '한국사상연구회'가 그것이다. 이 학회의 발족은 서구 수입 철학 일색의 한국 철학계를 반성하고 철학의 자기 터전을 재정립하려는 포부 아래 전통 사상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이 땅의 서양 철학 연구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철학의 영향을 드세게 받았다는 지각이 생기면서 이처럼 전통 사상에 대한 관심이 부활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 철학 유산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당시 새로운 외래 문물의 거센 파도 앞에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전통 사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전통 사상에 대한 철학적 접근의 바탕에 민족 의식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철학적 접근의 방법론이 엄격하게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철학의 관심 영역은 독일 철학 계통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크기였지만, 독일 철학, 영미 철학, 전통 철학의 세 영역을 중심으로 정착되었고,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 훨씬 세련된 형식으로 재현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경제면에서 물량적 증대를 이루게 되는데, 이처럼 사회 전반에 급속한 산업화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 변동을 가져 왔으며 거기에서 철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래의 독일 관념론과 실존 철학 중심에서 영미 철학, 고대 철학, 현상학 연구 등으로 철학적 관심이 다원화되고, 서양 철학계의 현황이 수시로 소개되었다. 또한 개인의 계몽적 연구에서 벗어나 학회 활동이 활성화되고 공통의 토론이 빈번해졌다. 그간의 철학적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많은 외국 학위 취득자가 귀국하여 인적 자원도 두터워졌으며, 서양 철학의 다양한 조류를 수용하는 데서 나아가 비판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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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
본뜻 : 옛날 성들은 주로 흙이나 돌로 지었다. 어금니 아를 쓴 아성이란 어금니처럼 단단해서 잘 무너지지 않는 성이라는 뜻이다.
바뀐 뜻 : 가장 중요한 적의 근거지나 난공불락의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A팀은 B팀의 아성을 공략하여 드디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농구의 아성 기아가 대학 농구 팀인 중대에게 어이없게 무너졌다
안양
본뜻 : 불교에는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말에 여러 가지가 있다. 안락, 안양, 서방, 정토, 서찰, 서방정토, 무량광명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안양은 안양계, 안양보국, 안양세계, 안양정토 등으로도 쓰인다.
바뀐 뜻 : 불교에서는 여전히 극락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지만,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경기도에 있는 한 도시의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함인지 불교에서도 극락을 지칭할 때는 안양이라는 말보다는 서방정토, 무량광명토 등을 많이 쓰고 있다. 안양은 현재 시흥군의 중앙부에 자리잡은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1973년 7월 1일, 시로 승격했다
"보기글" -너, 우리 동네인 안양이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거 아니? -서울의 위성도시인 안양에서 서울까지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몇 만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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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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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동성애 운동의 역사
동성애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희귀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수천 년 동안 금기와 단죄의 대상이었다. 현대 대중의 집단 의식이 표현되는 대중 매체 속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동성애자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아 있다. 동성애자들도 20세기 들어 차별적 제도와 편견에 맞서 인권 운동을 벌였는데, 동성애 운동은 다소나마 진전된 동성애자들의 인권 상황을 일구어 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운동은 서로 합의한 성인 사이의 동성애를 규제하는 법률을 철폐하고 취업, 신용, 주거 등에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회 관행을 고치기 위해 시작된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동성애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베를린에서 1897년 설립된 동성애 과학 인도주의 위원회가 최초의 동성애 운동 단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단체는 관련 간행물을 발행하고 시위를 벌이고 법률 개정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인근 네덜란드나 오스트리아 등지로 뻗어나갔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 단체의 운동은 중단되고 만다. 유럽 국가 중 영국에서는 1914년 동성애 관련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띤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성애 운동의 본령은 유럽 지역보다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후반 들어 동성애 운동 단체가 여럿 결성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남성 동성애자 단체는 헨리 헤이 등이 1950년 LA에서 결성한 `마티신 소사이어디(Mattachine Society)`인데, 오늘날에도 가장 유력한 동성애자 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 이 단체명은 중세 유럽의 마스크를 쓴 어릿광대의 이름으로 비롯된 것이다. 귀족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스크로 가려야 했던 그 광대들처럼, 동성애자들도 본래의 성향을 숨겨야만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여성 동성애자 집단은 1956년 결성된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로, 이 단체는 고대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 사포를 사랑했던 매춘부 빌리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50년대 말부터 동성애 단체가 결성되면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차별하는 사회 질서에 구체적인 저항을 펼 준비를 해 나갔다. 1960년대 말부터는 게이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친구나 가족 또는 공공에 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성해방 경향이나 정치적 자유주의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은 흐름이었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의 조직화는 결국 이성애 중심의 사회 질서와 정면 충돌하게 된다. 동성애 운동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1969년 6월 28일 오전 3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발생한다. 경찰이 스톤월(Stonewall)이라는 게이 바를 습격하고 몇몇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하려 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전처럼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경찰에 맞선다. 200여 명의 동성애자들이 경찰에 야유를 퍼붓고 투석전을 벌인 이날의 저항은 단 45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다음 날 다시 시위가 재연되었으며 400명의 동성애자들과 2,000명의 경찰이 대치하여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은 동성애자들이 부당한 억압에 맞서 최초로 소리를 내지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동성애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매년 6월이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게이 프라이드 위크`를 통해 동성애자들은 스톤월 항쟁을 기념한다. 영원히 잊혀질 운명이었던 사랑이 드디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1948년 킨제이 보고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0%, 그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합의된 수치인 인구의 2-4%에 해당하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움을 벌여 나가게 된 것이다.
스톤월 항쟁 이후 미국에서 동성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항쟁 후 1년 내에 미국에서는 12개의 동성애 단체가 구성되었고, 1970년 시카고 대학에서는 660명이 참여한 최초의 공개적 게이 댄스 모임이 열려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1973년에는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정신 질환 리스트에서 제외하는데, 이는 단순히 의학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성애자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이제 정신 의학 분야에서 동성애는 치료 대상 질환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동성애 운동이 탄탄대로를 걷지는 못했다.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최초의 동성애자 민선 시장인 조지 모스콘이 암살되었다. 감히 동성애자 주제에 시 행정을 책임질 수 있느냐는 이성애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셈이다. 1981년 최초로 에이즈가 보고되자 동성애자들은 더욱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의사들은 에이즈의 발병 및 감염 경로를 발표하면서 많은 동성애자들을 거론했다. 이 때문에 에이즈는 감기처럼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에이즈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이 원인 불명의 질환을 동성애를 단죄하기 위해 신이 내린 역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성애 공동체와 동성애 개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까지 빈발하게 되었다. 시련 속에서도 동성애 운동은 계속되었다. 미국 하원 의원 제리 스튜즈를 비롯한 여러 공직자들이 동성애 경향을 공표하였다. 1984년에는 위스콘신 주에서 최초로 동성애 반차별법이 통과되었고 현재 미국 전체 주에서 절반 정도는 합의에 의한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기했다. 클린턴 정부는 엄격한 규율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에서도 `추궁과 공표를 금지(don`t ask, don`t tell)`정책, 즉 동성애 성향의 공표를 금지하는 동시에 동성애자에 대한 추궁도 엄격히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성애 운동이 그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사회는 미국 등 서구의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아직도 많은 사회에서는 동성애자가 운동에 나서기는커녕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이성애자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그만큼 높은 편견의 벽이 동성애자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동성애 운동은 싹을 틔우고 자기 발전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자들은 일종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자들은 모든 사회에 있게 마련이고 그들도 엄연히 사회의 일부라는 사실이 동성애 운동의 근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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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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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6. 일하는 여성에게
'여자끼리는 협력할 수 없다'는 여성에 대한 독설
4명의 여성이 모여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 내놓은 상품은 건강식품이었다. 웨이터도 웨이트리스도 없는 작은 식당을 할 계획이었지만 차차 생각이 바뀌어 결국은 어느 테니스 클럽에 부탁해서 그곳의 부지 내에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다. 출자금은 한 사람당 6천 달러라는 상당한 액수였는데, 총 2만 4천 달러 중 설비비에만 2만 달러의 돈이 소비되어 버렸다. 그럭저럭 겨우 개점을 했지만, 첫 출발부터 사업이 순조롭지 못하여 불과 4개월 후에는 4만 8천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빚만 떠 안은 채 어이없는 실패로 끝나 버렸다. 원인은 한마디로 서로의 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무책임한 행동, 하찮은 다툼, 각각의 상이한 사업계획과 목표들이 실패를 초래한 것이다. 4명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사라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모두 무책임했습니다. 레스토랑을 연다고 하는 공통의 목표는 갖고 있었지만,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물론 어느 시점에서 단념하면 좋은지, 또 단념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애초에 우리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경험이 전무한 분야의 사업을 경솔하게 시작한 것이 무엇보다도 실패의 커다란 원인이었습니다."
케롤 하이야트는 저서 <<여성과 일>>에서 동업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업자는 배우자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 우선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야만 한다. 상대의 행동에 울컥 화가 치밀어도 결혼생활의 경우의 마찬가지로 그것이 관계의 악화 로 이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20년쯤 전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여자만의 집단 내에서 살 바에야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할 정도였다. 여성서로에게 불신감을 갖거나 대항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이제는 서로 공감을 갖고 협력하기 시작했지만, 사라와 그 동료들은 여전히 여성을 비난하는 낡아빠진 경구과 같은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레스토랑은 사업이 아니라 무슨 상어 싸움처럼 서로를 상처입혔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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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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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높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 권경희
권경희(1451-149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번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9년(147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수찬으로 임명되자 대간이 권경희의 아내 김씨의 집안이 미천하다는 것을 들어 논박하였다. 권경희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듣고 그 며느리를 버리도록 핍박하였으나 권경희가 사직하며 말씀드렸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10여 년 동안을 함께 가난한 생활 속에서 고생하며 밤낮으로 오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렇게 못할 짓을 해 가며 높은 벼슬에 등용될 수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어찌 못할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의롭게 여겨 역시 며느리를 버리라고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또 논박을 하였으나, 임금이 감싸주며 대간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경희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선비이다"
그러자 권경희의 처가인 김씨 집안에서 조정에 진상을 보고하여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 마침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권경희의 장인은 김치운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권경희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예악을 터득한 바가 많았는데 그가 돌아오자 모두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학식이 부쩍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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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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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입에서 술 냄새 그칠 날 없는 모주군이 절주를 권하는 친구에게 소리친다.
"여보게, 술은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 말씀이야.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이쯤되면 곤란하지만 아무튼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끝' 혹은 '전부'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수학의 부호로서도 눈에 익은 희랍어의 알파벳은 전부 24자. 그 첫째가 '알파'이고 끝자가 '오메가'인 데서 온 말이다. 희랍인은 이 알파벳을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신약성서의 '요한'이 받은 계시(묵시룩) 23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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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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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비구니와 밤손님
어느 날, 비구니 안요니의 여승방에 도둑이 들었다. 어지간히 궁한 도둑이었는지 안요니가 덮고 자던 이불까지 벗겨 가 버렸다. 자다가 도둑을 맞은 안요니는 간신히 남은 종이 이불을 둘러쓰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옆방에서 자던 다른 젊은 비구니가 도둑이든 것을 알고 달려와서 방 입구에 소매가 좁은 평상복이 한 벌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했다.
"도둑이 흘리고 간 겁니다. 자아, 빨리 입으세요." 그러자 안요니가 대답했다. "당치도 않아. 일단 훔친 이상 도둑은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남의 물건을 멋대로 입을 수는 없어, 도둑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까 가져다주게나."
젊은 비구니는 어쩔 수 없이 도둑의 뒤를 쫓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옷을 내 주었다. 그러나 도둑은 너무나 감동하여 훔쳐 간 것을 전부 돌려주었다. 젊은 비구니가 기뻐서 그것을 가지고 달려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안요니가 정말 안됐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머, 그래? 이걸 미안해서 어쩌지?"
눈감으면 코 배가는 어수선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일화와 같이 너무나 얼빠진 인간 관계를 보며 아마도 백이면 백 사람 모두가 일소에 붙이고 생각지도 않으려 할 것이다. 과연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라 단언해도 크게 틀리지 않고, 현대 사회 속에서 안요니처럼 살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 안요니의 얼굴이 당당한 빛을 발하면서 우리 마음의 어딘가를 꼭 잡고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실리다, 합리다, 사기다, 라고 아우성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렇더라도 모두들 마음속으로나마 안요니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기 때문에다. 안요니를 비웃던 웃음을 지금 당장 멈추고 마음속을 조용히 들여다보자.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비원이 몽상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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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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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네번째 이야기 아마씨의 위험을 피한 제비
하루는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소. 나보다 권세 높은 주변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나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함정을 파는가 하면 나쁜 음모도 꾸미고 있다고 하오. 나는 그 말을 믿지도 않고 의심조차도 하지 않소. 허나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니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조언을 좀 해주었으면 하요." 빠뜨로니오가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제 생각에 백작님께서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아시려면 어떤 제비와 다른 새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어떤 사람이 밭에 아마씨를 뿌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제비는 만약 아마씨가 다 자라면 사람들이 그것으로 새 잡는 그물이나 올가미를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새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불러모아 놓고 어떤 사람이 아마씨를 뿌렸는데 만약 그 씨가 나서 자라게 되면 큰 해를 입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씨가 싹트기 전에 그곳으로 가서 씨를 다 파헤쳐버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초창기에는 그 해악을 뿌리뽑기가 쉽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새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비는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다른 새들은 그것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가 한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윽고 그 아마는 싹이 터서 뽑아버리고 싶어도 새들의 발톱이나 부리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새들은 아마가 다 자라면 자기들이 해를 입게 될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제비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습니다. 한편 다른 새들이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자 위험을 느낀 제비는 도리어 아마씨를 뿌린 그 사람에게로 날아가서 그의 보호 아래 있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비는 자신과 후손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비는 사람들의 보호 아래서 살게 되었고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제비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던 다른 새들은 날이면 날마다 그물과 올가미에 의해 사냥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루까노르 백작님, 백작님께서 앞으로 닥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그 피해를 입지 않으시려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하고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그 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한 법입니다. 자기에게 무슨 해로운 일을 안겨다 줄 소지가 있는 어떤 징후나 움직임에 직면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하는 사람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법입니다."
* 자기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일이 있다면 처음부터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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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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