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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7 호
단기 4340. 7. 23 (음력 6.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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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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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문학상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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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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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투표가 아니라 공정한 개표로 가늠하는것이다. / 톰 스토파드(영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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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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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자살은 죄악이다
아비가 병들어 죽었는데 자식이 따라 죽으면 효도인가. 그것은 효도가 아니다. 오직 그 아비가 불행하게 호랑이나 짐승에게 몰렸을 때에 그 자식이 호위하다가 죽으면 효자이다. 임금이 죽었는데 신하가 따라 죽으면 충성인가. 그것은 충성이 아니다. 오직 그 임금이 불행하게 난리에서 역적에게 시해 당하게 되었는데 신하가 호위하다가 죽거나, 혹은 자기가 불행하게 포로로 되어 오랑캐의 막사 뜰에 끌려가서 강제로 절하도록 할 때 그에 굽히지 않고 죽으면 충성이다. 그런즉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가 따라서 죽으면 열부라 하여 그 문설주를 빛나게 하거나 팻말을 붉게 하고, 세금을 면제하여 그 자손의 부역을 경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미안하지만 그것은 열부가 아니다. 성깔이 좁을 것뿐인데 관리가 살피지 못했을 따름이다. 여기에 명망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그 성정이 편협하여 통하지 못했던 탓이다. 천하에 죽음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천하 만사 중에 흉한 것으로는 제 몸을 죽이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제 몸을 죽여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오직 제 몸을 죽이는 것은 의리에 합당할 때에 한한다. 남편이 호랑이나 도둑에게 몰렸을 적에 아내가 따라서 호위하다가 죽었으면 열부일 것이며, 혹은 제 몸을 도둑이나 음탕한 자에게 몰려서 몸을 더럽히게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죽으면 열부일 것이며, 일찍 과부로 되었다가 그의 부모와 형제가 제 마음과는 다르게 남에게 개가시키려고 할 때 그것을 거절하다가 죽었다면 열부일 것이며, 그 남편이 원통한 일로 죽었을 때 그 아내가 실상을 알리고자 울부짖다가 형벌을 당해 죽으면 열부이다.
남편의 죽음은 집안의 불행이다. 시부모가 늙었는데 봉양할 사람이 없고, 여러 자녀들이 어린데도 젖먹여 기를 사람이 없으니 죽은 자의 아내 된 사람은 마땅히 슬픔을 참고 억지로라도 살아서 봉양할 사람이 없는 시부모를 힘써 봉양하다가 그가 죽거든 장사하고 제사지내며, 아래로 양육할 사람이 없는 자녀들을 양육하여 자라나거든 혼례를 시켜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루아침에 모질게도 스스로 제 마음 속에 작정하기를,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나한테 시부모 될 사람도 없고,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나한테 자식도 없다'하여 횃대에 스스로 목을 매어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이와 같은 사람이 어찌 모질고 잔인하지 않으며 크게 불효하고 크게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천하의 도는 한길뿐이다. 크게 불효하고 무자비하면서도 홀로 그 남편에게만 도리를 다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가 또 그 집 문설주를 빛나게 하고 팻말을 붉게 하고 세금을 면제하며 그 자손에게 부역을 경감하여 준다면, 이것은 그 백성에게 서로 본받아서 크게 불효하고 무자비하도록 권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것은 열부가 아니라 소견머리가 좁다는 것이다. 아아, 신체발부(몸과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한테 받은 것이므로 감히 헐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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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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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2. 후기/3.1운동기--해방 이전
1. 전통 철학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으로 조선 봉건 왕조가 몰락하면서 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국망이라는 현실은 당시 유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유교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특히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던 주자학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국망의 책임이 지워지면서 비교적 철저한 비판이 가해졌다. 이것은 1876년 개항 이래 유학을 중심으로 한 동도의 보존에 매달렸던 척사위정론이나 동도서기론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일어난 것이다. 유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다만 반성과 비판의 표적이 유교 일반에 대한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 시기 그 입장의 차이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가 공교 운동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승희와 이병헌이 있는데, 둘 다 영남 학파 이진상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종래 주자학으로는 당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아 종교화를 통한 유교 개혁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공교 운동은 당시 중국의 강유위가 대동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한 공교 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둘째는 양명학의 중시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은식과 정인보가 있는데, 정제두 이래의 강화 학파 학맥을 직간접적으로 잇고 있다. 이들은 주자학 대신 양명학을 통해 유학을 근대의 철학, 시대의 철학으로 탈바꿈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는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유교 전반뿐만 아니라 특히 종래 유학자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하면서 고유 사상으로서의 선교를 말한 인물도 있다. 신채호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승희는 대한제국이 패망하기 직전인 1909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밀산부 한흥동에 한인 부락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망명 한인 공동체의 이념 정립과 교육을 위해 공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에 망명하고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한인공교회를 설립하여 북경공교회로부터 승인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예운집주"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동의 이상 세계를 적고 있으며, "공자세기"에서는 공교의 교주로서 공자의 모습과 위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의 공교 운동은 유교의 종교화와 근대적 자기 발전을 꾀하였다. 특히 그는 유교에서 민족성과 세계성 모두를 찾고 있다. 곧 그는 민족 문화의 전통으로 유교를 인식하여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바탕으로 삼는 한편, 유학이 지니는 보편적 가치 체계를 바탕으로 민족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병헌은 1914년 이래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여 강유위를 직접 만나고, 또한 곡부에 있는 공자 후손과 교유하면서 공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승희와 달리 국내인 경남 산청에 배산 서당을 세워 유교의 재건과 개혁을 도모하였다. 그의 공교 우동과 유교 개혁 사상은 "유교복원론"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책은 불교의 근대적 개혁 내용을 담고 있는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비견될 만하다. 그도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 중심의 유학으로는 당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 자체로 원만구족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당시 유교 전체에 대한 비판을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뒤 공자를 절대 유일의 교조로 내세우고, 상제를 주재신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유교와 다른 종교의 평등한 지위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유교의 궁극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드러내 보였다. 박은식은 한말에는 언론을 통한 애국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일제 강점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역사 자료를 수집, 편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많은 역사서를 저술하고 번역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동명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대동고대사"가 있으며, 번역서로 "발해사"와 "금사"가 있다. 그는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내놓은 "유교구신론"에서 당시 유교의 폐단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인민보다는 제왕의 편에 주로 서 있다는 점이다. 둘째, 철저한 구세주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셋째, 번다하고 지리한 주자학에만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어 이러한 봉건적이고 소극적이며 주자학에만 빠져 있는 유교에 대한 구신책으로 간단하고도 쉬우며 효과가 두드러진 양명학을 말하고 있다. 곧 양명학에 의한 유교의 개혁을 통해 근대 사상으로 되세움으로써 민족 독립 등 새로운 시대 요구에 부응하는 사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양명학의 강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의 유학자가 각종의 과학 이외의 본령의 학문을 구하고자 한다면, 양명학에 종사하는 것이 실로 간단하고도 긴요한 법문이다. 대개 치양지학은 직접 본심으로 하여금 바로 범속을 초월해서 성인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는 길이요, 지행합일설은 마음의 은미한 곳에 대하여 성찰하는 법이 긴요하고도 절실하며 사물을 응용하는 데 있어 과감하고 힘이 왕성하다. 이것이 실로 양명학파의 기개와 사업의 특별히 두드러진 공효가 많은 까닭이다."
정인보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23년 귀국하여 교육과 언론에 종사하면서 국학의 연구에 심형을 기울였다. 그는 강화 학파의 후예인 이건방의 제자로 박은식에 이어 근대 양명학을 꽃피웠으며, 대표적인 저작으로 "양명학연론"이 있다. 그는 과거 수백 년간 조선의 역사는 실로 '텅 비고 거짓됨'이 드러낸 자취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조선 수백 년간 학문으로는 오직 유학이요, 유학으로는 오직 정주학을 신봉하였으되, 신봉의 패단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그 학설을 받아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사영파요, 다른 하나는 그 학설을 배워 중화적전을 이 땅에 드리우자는 존화파이다. 그러므로 평생을 몰두하여 심성을 강론하되 실심과는 얼러볼 생각이 적었고, 일세를 떠들썩하게 도의를 표방하되 자신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그는 주자학에 대해 '텅 비고 거짓됨'의 책임을 돌린 뒤 실심, 실행의 학으로 양명학을 말하고 있다. 그는 "양명학연론"에서 양명학을 일으킨 왕수인과 그 후예들, 기본적인 이론 및 한국 양명학파에 대해 적고 있다. 한편 그는 이러한 실심, 실행에 대한 관심을 실학으로까지 넓혀 실학 사상가들의 문헌을 발굴, 정리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국학 연구를 통해 민족 정신을 밝히고 민족 전통을 보존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신채호는 한말에 언론 활동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과 국학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대표적인 저술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이순신전", '조선혁명선언' 등이 있다. 그는 유교에 대해 비교적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선 그는 유교의 말폐로 모화의 폐단, 모방과 의타성 조장 및 노예 사상 등을 들고 있다. 문약이라든가 당파 등 조선 사회가 지녔던 각종 폐풍은 모두 이러한 유교의 말폐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비판은 이처럼 유교의 말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의 본질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윤리 도덕마저 이제는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이요", "국가와 민족을 멸망케 할 도덕"이라고 극언하는 데까지 이르다. 그 이유로 유교의 윤리 도덕이 지니는 본질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약자 패자의 도덕, 복종의 중시 곧 노예의 도덕, 공사의 전도, 소극적 자세를 들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의 비판이 유교 전반에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반면 그는 고유 사상론을 전개하였다. 곧 우리의 고유 사상은 화랑에 의해 전수된 낭가 사상으로서 국선 등으로 일컬어지는 선교라고 보았다. 이상에서와 같이 유교 지식인에 의한 유학의 근대적 변모는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유학 및 동양 철학에 대한 근대적 학문 방법에 따른 연구가 시작되면서 강단 철학이 등장하였다.
강단 철학으로서 동양 철학의 시작은 일제에 의한 경성제국대학의 설립과 직결되어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3년 설립되고, 3년 후인 1926년부터 법문학부에서 조선어문학 강의를 통해 조선 사상사가 강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강의를 담당했던 인물이 다카하시 고이다. 그의 '조선유학대관'(1927)과 '이조유학사에 있어서 주리주기파의 발달'(1929)이라는 글은 우리 나라 강단 동양 철학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연구를 통해 한국 사상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한국 유학은 수백 년을 주자학에만 매달린 것에서 볼 수 있다시피 사상적 고착성이 그 특성이다. 둘째,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볼 수 있다시피 독창성이 전혀 없는 종속성이 그 특성이다. 셋째, 주리파니 주기파니 하는 학파의 분열이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 혹은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 등의 분열과 연결되듯이 분열성의 당파심이 또한 그 특성이다. 이러한 주장은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관변 어용 학자들에게 비판과 극복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성균관에서 친일 어용 기관으로 변모해 버린 경학원을 중심으로 황도 유학이 전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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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달
본뜻 : 문무과에 급제했으면서도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달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닭을 봉이라 우겨서 '봉이'라는 별호를 얻은 봉이 김 선달이 있다. 선달의 높임말이 '선다님'이다.
바뀐 뜻 : 후대로 내려오면서 급제 여부와 상관없이 벼슬을 하지 않은 성인 남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보기글" -장터 사람들이 그를 모두 장 선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나도 얼결에 그렇게 부르고 말았다 -세상을 풍자하며 노닐었던 봉이 김 선달만큼 자유로운 사람이 또 있었을까
섭씨
본뜻 :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인 셀시우스가 정한 온도의 눈금이다. 중국인들이 셀시우스의 이름을 한자로 섭씨라고 표기한 데서 유래한다.
바뀐 뜻 : 기호는 도C로 나타내며 1기압 하에서 얼음이 녹는 온도를 0도C로 하고, 물이 끓는 온도를 100도C로 하는 온도를 말한다.
"보기글" -장마철에 섭씨 30도가 넘으면 불쾌지수가 90을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중동 사막 지역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해도 그곳은 워낙 건조 지대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섭씨 40도와는 비교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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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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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동성애 억압의 역사
인류가 섹스의 생물학적 의미를 파악한 시기는 기원전 9,000년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에는 성숙한 여인이면 누구나 자력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겠지만, 성행위 후 몇 달이 지나야 임신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상들의 무지가 이해될 법도 하다. 남성도 잉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터득한 후 많은 변화가 생겨난다. 먼저 인류 역사는 여성의 모성 숭배 문화에서 남근 숭배 문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출산력을 상징하는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을 동굴 벽에 공들여 새기던 인류가, 이제 고대 이집트에서처럼 남근 상징물을 종교의식의 중심 소품으로 활용하거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남근 그림에 권위의 상징인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섹스에 사회적 의미가 부가되었다. 기본적인 사회 제도들, 예를 들면 부와 권력의 세습 제도나 가족 제도 등은 섹스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섹스는 규범에 의해 규제되어야 했고, 그런 규범을 보호하기 위한 터부가 만들어진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섹스와 관련해 가장 먼저 생긴 금기는 근친 상간의 금기이다. 고대 이집트나 잉카의 왕가들은 혈통 보전을 위해 남매나 부녀 간의 결혼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회에서 근친 상간은 엄격한 금기의 대상이었다. 수천 년간 지속된 또 다른 금기가 동성애 금기이다. 현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기초를 이룬 초기 기독교는 간음과 매춘은 물론이고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부부의 성관계도 죄악시했으니, 동성애에는 더욱 완고할 수밖에 없었다. 남색을 의미하는 소도미(sodomy)라는 용어는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도시 소돔에서 유래되었다. 알다시피 소돔은 동성애를 비롯한 문란한 성행위로 더럽혀진 곳이고 그래서 신의 분노를 사 불탄 도시이다. 동성애는 신의 권능에 대한 도전 행위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중세에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성관계를 죄악시했고 자위, 오럴 섹스, 동성애를 금기시했으며 규범을 어긴 성행위에는 엄격한 처벌을 가했다. 현재도 카톨릭과 유태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가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있다.
동성애 금기가 어떤 형태로 법제화되고 실행되었는지 문헌을 뒤져보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영화 <토탈 이클립스>(아니예츠카 홀란드감독, 1996년)가 보여 주는 한 장면도 충실한 자료가 될 만하다. 1870년대 초반 어린 무명 시인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베를렌(데이비드 툴리스)은 정신과 육체 양면으로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함께 파리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여행한다. 그런데 두 연인이 벨기에의 브뤼셀에 도착했을 때 베를렌은 절망감에 빠진다. 부유한 처가와 아내에게 버림받은데다가 랭보마저 떠나려 했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판단력을 잃은 베를렌은 총을 쏘아 랭보의 왼손에 관통상을 입힌다. 법정으로 끌려간 베를렌은 이 치상 사건의 경위를 조사받는다. 이런 심문 과정은 절차상 당연하겠지만, 이상한 일은 베를렌이 추가적인 검사까지 거쳐야 했다는 사실이다. 베를렌의 사생활에 관한 풍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재판관은 두 의사에게 베를렌이 동성애 경험이 있는지 검사하도록 의뢰한다. 영화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검사 과정을 보여 준다. 의사들은 베를렌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그 내부를 더듬은 후 그가 동성애자임을 증언한다.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서는 합의에 의한 동성애가 명백한 범죄 행위로 여겨졌고, 동성애 전력이 판명되면 그 사실만으로도 옥살이에 처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막론하고 배척 대상이었던 동성애가 모든 사회에서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역사적 시대가 있었으며, 우리 모두에게 낯익은 한 사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300년까지의 황금기 동안,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유명 작가들을 배출했다. 현대 서구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가 바로 동성애를 공인한 희귀한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은 동성애 욕구를 자연스런 것으로 보았고, 특히 사제간의 동성애 관계는 제자 부모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미성년 남색을 타락으로 여긴 이도 있었지만,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태도는 현재 우리가 꿈꾸지 못할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동성애를 공인한 사회의 또 다른 예로 뉴기니 등지의 원시 부족이 거론되지만, 문명 사회 그리스만큼 강한 설득력을 지닌 사례는 찾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 사회와 같은 예외적 상황이 있지만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동성애자를 단죄하는 경향이 인류 역사에서 대세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성애 금기가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인 경향이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읽으면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동성애 금기가 그랬던 것처럼 동성애도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소수의 불순한 무리에 의해 어느 순간 솟아난 것이 아니다. 편견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사회의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인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동성애자는 주변인으로 내몰렸지만 그들이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물들이라는 일반의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다수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 성향을 숨겨 왔겠지만 적지 않은 인물들이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표했거나 후에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는 역사적인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다윗 대왕은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였다. 그리고 오스카 외일드와 제임스 볼드윈 그리고 컴퓨터 발명자인 앨런 튜링 등도 모두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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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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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인가.
여성을 위한 개혁을 시작하는 가장 쉬운 길은 남성의 공격으로부터 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 자신 속에 있다. 그러나 그 기운이 모든 나라에서 여성측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예로 일본의 여성을 들 수 있는데 몇 세기 동안이나 남자의 소유물로서 억압되어 온 그녀들이 지금 갑자기 남성들과 어깨를 겨누고 똑같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일본의 남성은 발 밑에 찍어누르고 있는 여자를 자기 곁에 일으켜 세우는 것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설 곳은 가정이므로 공직으로부터 내쫓아 버리라는 지난날의 성명은 독일의 우스꽝스러운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여성은 지금까지 가정에서 나와 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성명은 중국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미국의 여성이 남자의 곁에 자기의 설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미국의 많은 남성은 여자가 그렇게 할 것을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여자는 그렇게 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의 치명적인 약점은 지나친 망설임이었다. 집의 문지방에 서서 나갈까, 집에 있을까를 걱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다.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까를 생각하고 그것에만 의지함으로써 여자로서 자신의 가치나 능력에 따라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성스러움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하였고, 만일 여자다움을 잃는다면 남자들의 마음을 잡고 주의를 끌 수 없게 될 것을 겁냈다. 영원한 여자로서의 힘을 통해 자신을 되찾으려고 생각하면, 집안에 앉아 문을 닫고 사나이가 자기 품에 뛰어들기를 계속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을 것을 확신하고 대담하게 밖으로 나가 사나이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여자가 참다운 여자이고 여자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면, 여자로서의 본질적인 여자스러움은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는다. 여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일국을 통치할 수도 재판소에서 재판관이 될 수도 공장에서 공장장이 될 수도 있으며 교량건축가도 또는 기계 기사도, 그 밖에 무엇이라도 되지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여자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 일을 훌륭히 해낼 수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여자다운 특질은 더욱 겉으로 표출될 것이다.
여자가 여자로서의 가치를 깎아내리며 남자들의 흉내를 내 남자처럼 행동하면 주위에 있는 동료에게 혐오감을 줄 것이다.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의식적으로든 또는 무의식적이든 생각하고, 여자 쪽에서 자기 손으로 일을 마쳐 버리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여자의 특질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다. 여자는 익숙하고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떠나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마음이 스스로를 불안으로 몰아 넣어, 이 불안 속에서 마침내 두려워하고 있는 남성의 흉내는 낸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동작은 오싹할 만큼 남자와 같은 행동으로 나오든지 아니면 변명하듯 과장된 거짓의 여자스러움 사이를 서로 왔다 갔다 할 것이다. 참다운 여자의 특질은 어디엔가 중심이 있어서 강하고 저항적이다.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불안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약하지 않다. 여성이 자신을 가지면 세력의 선풍이 되어 강한 힘의 샘이 된다. 여자임이 자연스러우며 올바른 것이며, 그것을 바꾸거나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여자는 남자의 곁에 자신의 장소를 기꺼이 차지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녀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여자이니까 하는 조소를 들어왔다. 너무나 오랫동안 여자여 약한 자여 하고 불려왔다 몇 대에 걸쳐 여자는 장사를 할 머리도 없고 정치에 대한 이해 능력도 없다고 설교 당해 왔다. 그래서 자기 불신으로 어쩔 수 없이 퇴화당하여 저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한가지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남성이 인정한 것은 도덕적으로 뛰어났다는 것이다.남성들은 여성들이 도덕적으로 뛰어나다고 정해 버렸다. 혹은 그렇게 꾸민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에 와서 얼마 안 되는 여성들이 사업이나 정치에 진출하여 남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정치적 책략, 또는 경제나 법률상의 속임수를 쓰면 큰소리로 여자도 남자들처럼 사업이나 정치를 하는 데 치사하지 않느냐고 화를 낸다. 남자들고 마찬가지로 치사할 거면 무엇 때문에 여자가 정치에 진출하느냐고 남자들은 따진다. 물론 그런 여자는 어디에서도 곤란한 존재지만 돼먹지 않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자도 여자도 거짓말쟁이, 도둑이나 강도, 살인을 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용납받지 못하며,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선량한 여자가 남자 곁에서 일할 경우 매우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왜 선량한 여자가 가정 밖으로 나오면 거추장스럽기만 하단 말인가 이처럼 남자가 무척 관대하게 여자에게 준 도덕의 우위성은 실제를 밝힌다면 여자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남자들이 허용해 준 우위성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여자는 남자들의 권력과 세력 속에서 한나만 던져준 이 초라한 정의의 누더기에 달려 들어 발가벗은 자신을 감추려든다. 남자들이 도덕적인 우위성을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면 물론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그런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장사를 할 때 눈처럼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 어떤 오점도 눈에 뜬다. 남자들은 실제로 첨렴 결백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여자로부터 떠나 버렸다. 남성을 위해 변호할 것은 많이 있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여자에게는 큰 죄를 저지를 만한 유혹이 없으니 선량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조금 게으르거나 인색하거나 거짓말쟁이이거나 무관심하거나 소문내기를 좋아한다 해도, 이런 작은 죄는 여성의 약점에 지나지 않을 뿐 도덕의 강한 윤곽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남성은 여자가 자기 곁에 나타나 자기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일까? 이상한 것은 여자가 남자들보다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올바른 점은 뭐니뭐니해도 온실에서 자라 세상 풍파를 겪지 않고 유혹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므로 참다운 저항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들이 경험에 의해 얻은 굳셈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사나이는 적어도 죄업을 거듭해 왔으므로 일정한 한 도를 넘은 죄의 싱거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죄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어리석은 짓이나 실패를 했다고 해서 그렇게 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는 도덕상의 올바름을 오랫동안 강제 당하고 있었으나 거기에 대해 조금도 보상받지 못했다. 선량함에 대한 상은 남자들만이 아직까지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천사로 받들어지기는 해도 교회의 프린스로서 목사가 되는 것은 남자들인 것이다. 여자는 가엾게도 그렇게 남자보다 더 선량하다고 칭찬을 받고 있지만, 교회에서 남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좌석에 걸터 앉아 듣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여자는 품행의 단정함에 대하여 교회로부터 아주 조금밖에 보상받고 있지 못하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도덕적으로 높은 것이 종교 세계에 들어가는 조건의 하나이므로 여자는 그 세계에서 어떤 세력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천만의 말씀, 남성은 거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발견하였다. 여자에 대해서는 올바른 길을 요구하는 남자가 자신은 거기에서 면제 받을 수 있는 종교를 만들어 냈다. 구원을 원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이 있으면 올바른 품행은 결국 더러워진 누더기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라고 남자는 선언한 셈이 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애정은 죄악을 용서하는 것이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남자의 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죄를 씻어 남자를 깨끗하게 하여 오점이 없는 자로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큰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성은 자신의 부족한 데서 우월성을 만들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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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시로써 신숙주를 굴복시킨 윤자운
윤자운(1416-1478)의 본관은 무송이고, 자는 망지, 호는 낙한헌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 26년에 문과에 각각 합격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상을 지내고, 성종조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문명은 신숙주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동년(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이)모임에서 신숙주와 겨루어 대련을 짓기로 하였다. 신숙주가 먼저 "반가운 친구는 모두가 백발이요" 하니 윤자운이 "젊은 재상은 다만 일편단심뿐"이라고 화답했다. 신숙주는 그만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윤자운을 극구 찬양하였다. "나는 공의 정밀하고 민첩함을 따를 수 없구려!" '흑두'와 '청안', '백발'과 '단심'은 멋진 대구를 이루어서 훌륭한 대련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신숙주를 감탄시킨 것은 '단심'이란 쌍관어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쌍관어'란 한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말이며, 시작법에서 은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시의 기법이다. 그때 신숙주가 사랑하던 기생의 이름이 바로 '단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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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여군
희랍신화에 의하면 '코카서스'에서 '스키타이'지방에 걸쳐 '아마존'이라 부르는 용맹한 여인족이 살고 있었다 한다. 그녀들은 남자 뺨칠 정도로 무술에 능하고 말를 잘 탔으며 때로는 희랍에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또 '트로야' 전쟁 때는 여왕 '펜테실리아'에 이끌려 '트로야'군을 편들기도 했다.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종족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에 다른 나라의 남자를 끌어와서 자식을 받았다. 아들이 나면 죽여 버렸고 딸만 기르는데 어려서 왼쪽 유방을 도려내어 활쏘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남미 '브라질'에 있는 세계 최대의 강 '아마존'도 이 전설에서 이름을 딴 것인데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이 강을 탐험한 '스페인'탐험대가 도중에서 여자들로 이루어진 토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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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동요하지 않는 마음
에이헤이사의 제2조 에조 선사가 도겡 선사 밑에서 수행을 할 때의 일이다. 병석에 누워 있던 에조의 어머니가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장 집으로 가 봐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스승인 도겡 선사가 정한 규율에 따르면 에조가 속세로 나갈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두 번, 한 번에 사흘뿐이었고, 어머니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제한된 날짜를 따 쓴 뒤였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50여명의 동문들이 입을 모아 권했다.
"어머니와 금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면 이보다 더한 불효가 있겠는가. 불가의 계율이 엄격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하니까 스승님께서도 허락하실 거야. 말씀드리고 빨리 가보게나."
도겡 선사는 제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에조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잠시 후에 고개를 저으면 말했다.
"여러분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에 따라야겠지만, 그보다도 불가의 규범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머니의 인정에 끌려 불가의 수범을 거역하면 이보다 더 큰 불효의 죄는 없을 것입니다. 출가한 자는 부모를 도에 들게 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인정대문에 계율을 깨면 어머니는 최후의 대죄를 범하게 되어 영겁의 영락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계율을 깨면서까지 어머니 가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수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 굳은 불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을 들으면 한시라도 빨리 머리맡으로 달려가서 금생의 이별을 하고 싶은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소망이다. 아무리 불도수행에 정진하던 에조라 할지라도 같은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잃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라, 아무리 수행자라고 해도 자칫 그 슬픔의 무게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다가 냉정한 판단을 잃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주위 사람들은 으레 자식의 도리를 우선시하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임무 같은 것은 누군가가 대신 메울 테니 빨리 달려가라고 권한다. 에조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시점에서는 불가의 규율이 엄중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만은 특별한 경우이니 예외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안이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이 일화에서는 도겡 선사가 제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자코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극히 의미심장하다. 즉 좌선의 스승으로서 도겡의 그릇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 준다.여기서 도겡선사가 무엇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도겡선사는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에조는 수행자로서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로서 자신이 취해야 할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심경으로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조의 행동은 아들로서 결코 불초하고 냉혹한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효성에 관한 단순 한 미담 따위가 아니다. 침착하지 못하게 허둥지둥하다가 현실에 "굴복"하는 것밖에 모르는 우리의 경박한 눈에는 에조의 단정하고 논리 정연한 정신 자세가 우러러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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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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