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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1 호
단기 4340. 7. 14 (음력 6.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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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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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육사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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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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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고 싶은지 잘은 모르겠는데 가슴이 아파 오고, 그래도 좋은 것은 ; 봄의 열병.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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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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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음악이 있는 곳에 행복이
아아, 사람은 원래 제대로 착하지 못하고 반드시 가르친 다음에 착하게 된다. 그 이유는 칠정(기쁨, 분노, 슬픔, 놀람, 사랑, 증오, 욕심)이 마음속에 얽혀서 원만하게 화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 으쓱하는 마음에 만족스러운 일이 있으면 거기에 음탕한 것이 섞여 들기도 하며, 혹 발끈 충격 받은 일이 있으면 성내는 때도 있으며, 혹 슬퍼하기도 하고, 혹 두려워하기도 하며, 혹 노려보기도 하며, 혹 원망하기도 하여 그 마음이 화락을 얻을 때가 없다. 마음이 화락하지 못하면 온몸이 따라서 어그러지게 되고, 동작하는 데에도 모두 법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거문고, 비파, 종, 북, 꽹과리, 피리 따위의 음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그 화평과 화락의 뜻을 유발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엔 반드시 음악을 이용하는 것이 알맞지 않겠는가. 성인의 도도 음악이 아니면 시행되지 못하고, 제왕의 정치도 음악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며, 천하 만물의 감정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되지 못한다. 음악이 없어지면서 형벌이 심하여졌고, 음악이 없어지면서 병란이 잦아졌다. 음악이 없어지면서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음악이 없어지면서 속음과 거짓이 성하여졌다. 무엇으로 이렇게 된 연유를 아는가.
일곱 가지 감정 가운데서 그것이 나오기는 쉬워도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노여워하는 마음이다. 버럭 성내어 답답한 사람은 마음이 화평치 못하고, 분하여 성낸 사람은 마음이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 때에 오직 남을 형벌 함으로써 한때의 심기가 통쾌해지면 비록 풀리는 듯순해질 수 있으나, 거문고, 피리, 종, 꽹과리 소리를 듣고 그 마음이 화평하게 풀어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윗사람이 형벌로 다스리고, 무기로써 위압하면 아랫사람은 이에 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근심과 고통과 탄식하는 소리와, 간사하고 아첨하며 숨으려는 꾀만 있게 될 뿐이다. 이것이 곧 음악이 없어진 후에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음악이 없어지자 속임과 거짓이 성하여진 이유이다.
요즘 세속의 음악은 모두 음탕하고 상스러우며, 가락이 슬프고 부정한 소리뿐이다. 그러나 그런 음악이라도 앞에서 한창 연주하면 높은 사람은 아전붙이를 용서해 주고 집안 어른은 종들을 용서하게 된다. 세속의 음악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옛 제상이나 성인의 음악이랴. 그러므로 예의와 음악은 잠깐 동안이라도 내 몸에서 떠나서는 안된다. 음악을 진작시키지 않으면 사회의 교화는 시행할 없으며, 풍속도 마침내 변화시킬 수 없다. 음악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의 화기도 결국 이루어 내게 할 수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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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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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3. 민중 사상과 종교
2. 갑오농민전쟁 이후의 민중 운동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민중들은 동학당과 영학당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활빈당 투쟁과 의병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조선 말기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활빈당 투쟁에 나타난 이중적 사상 구조 :
1899년부터 1904년에 걸쳐 활동한 비밀 무장 결사체인 활빈당의 투쟁은 갑오농민전쟁을 계승한 대표적인 무장 농민 투쟁이었다. 그들은 유학의 왕도 정치 사상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면서 거기에 평등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의 변혁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강하고 깊게 영향을 준 것은 당시의 사회 상황이었다. 그들의 사상 구조가 이렇게 이중적으로 드러나는 원인은, 한편으로는 갑오농민전쟁 및 그 이후의 농민 운동이 여러 차례 좌절을 겪으면서 그 운동들을 이끌었던 많은 인사들이 정부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았다는 테서 찾을 수 있다. 즉 여러 차례의 민중 항쟁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민중을 이념적으로 이끌어 줄 사상이 미처 확립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현실 문제를 관망하던 일부 유생들이 농민 전쟁에 참여했던 민중의 들끓는 항쟁 의지를 결집하면서 새로운 지도 세력으로 등장했는데, 이들은 유학의 의리 정신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조직한 결사체가 바로 활빈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천 방안을 표명한 '대한사민논설 13조목'에서 개화 정책을 실행하면 나라가 어렵게 된다고 하면서 요순의 효제안민법과 선왕의 의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개화 사상가들의 주장과는 대치되는 것으로서, 유학의 왕도 정치 사상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13조목'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봉건 사상과는 다른 혁신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행해야 한다든가,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목민법을 채용한다든가, 악형을 폐지하며 행상인에게도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금한다든가, 곡가 안정책의 실시를 주장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민중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앞장서 이끌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국가의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민중에 의한' 정치하고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로 볼 때는 전통적인 봉건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특히 상인의 존재를 중요시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까지도 민중의 범주에서 고려하는 등 민중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나아가 민중의 의식을 강화하고자 애쓴 점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점은 분명 전통적인 봉건 사회에서 지배층이 민중을 바라보던 인식과 차이가 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민족의 생존 위기가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투쟁의 중심을 우선 민족의 생존 도모에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에게 반침략 사상이 반봉건 사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 당시 조선에 들어온 대다수 외국인들이 조선에 이로움을 주기보다는 해를 가져다 주는 대상이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그들은 조선 정부가 계속해서 외국인의 요구를 들어 주게 되면, 민중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국가의 장래도 갈수록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외세의 침략에 정부와 민중이 다 함께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활빈당은 당시 사회의 여건 속에서 비록 외적으로는 유학의 민본 사상을 앞세우고는 있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봉건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민주적인 요소들까지 끌어안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활빈당이 아직 유학이라는 전통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유생들의 결집체였던 만큼 유학적 이념이 그들의 투쟁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민본 사상과 왕도 정치라는 봉건적 이상향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것은 여전히 전통 사상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반영한다.
민중 의병 전쟁에 나타난 반제 반봉건 사상 :
의병 전쟁은 초기에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했지만 점차 민중이 주도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1908년 의병 전쟁이 한창 고양되던 때 민중 출신 의병장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신돌석과 함경도의 홍범도 및 황해도와 경기도의 김수민 등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이들의 의병 전쟁은 척사위정 사상에 근거한 유생 중심의 의병 활동과는 여러 모로 달랐다. 민중 중심의 의병 전쟁은 외세 의존적인 정부의 개혁 조치에 반대하고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치안, 교통, 금융, 체신 등의 통치 기구와 그 시설은 물론 일본인과 친일 관리 및 친일 단체와 친일 지주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국권 회복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일본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들도 민중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공조한다고 보고, 이들 외세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무력 공격을 가하였다.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약소국 민중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들은 고리대 등의 악랄한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나 부자들은 물론 매판적 관료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 불법으로 농민의 토지를 몰수하는 통감부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중 의병 전쟁은 철저히 민중이 주체가 되어 당시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 점이야말로 유생이 주도한 의병 전쟁과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들은 부패한 관리들은 바로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점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현실 모순의 뿌리인 봉건 체제 자체의 한계를 극복할 대에만 외세의 침략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동시에 풀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상은 반제 반봉건을 강하게 반영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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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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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필
본뜻 : 보필은 본래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임금을 모시는 신하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앞에서 모시는 신하를 의, 뒤에서 모시는 신하를 승, 왼쪽에서 모시는 신하를 보, 오른쪽의 신하를 필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좌우 양옆에서 모시는 신하의 역할을 가장 중하게 여긴 데서 보필이란 말이 나왔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자신의 윗사람을 잘 돕는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비슷한 말에는 보좌가 있다. 우리말 '도와 드림'과 바꿔 쓸 수 있다.
"보기글" -옥이야, 여행하는 동안 연로하신 김 선생님을 잘 보필하도록 하거라 -우리 회장님을 보필하는 데는 김 실장을 따라갈 사람이 없지 가히 입안의 혀처럼, 때로는 양쪽 날개처럼 처신하잖아
복마전
본뜻 : 원래는 마귀가 숨어 있는 집이나 굴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사회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비밀리에 나쁜 일이나 음모를 꾸미는 곳, 또는 그런 무리들이 모여 있는 악의 근원지를 일컫는 말이다.
"보기글" -공무원 사회에 사정 바람이 불 때 알고 봤더니 다른 데도 아닌 국세청이 바로 탈세의 복마전이었더구만 -국회가 정경 유착의 복마전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의원들 각자의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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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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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미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언 보호 구역? 인디언 구역!
우리는 `인디언 보호 구역`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Indian Reservation`의 번역어일 이 표현은 전적으로 정복자 미국인 중심의 번역 방법이다.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면서 인디언들에게 거주할 땅을 지정했다. 그곳에서 조용히 정착해서 살면 해를 입히지도 처벌하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보호 조치가 아니라 억류와 인디언 분리 정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립적인 의미로 `인디언 구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을 밝혀 둔다. 아울러 한때 우리 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으며 지금도 흘러간 명팝송으로 기억되는 노래(Raul Revere & Raiders의 <Indian Reservation>)의 가사를 소개하려 한다. 이 노래를 흥겨운 댄스풍의 음악이지만 체로키 부족의 비극을 담고 있으며,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숨은 희생자 체로키 부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체로키 부족 국가 전체를 빼앗고 이곳 인디언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뺏었고 토마호크(체로키 부족의 전쟁용 도끼)와 활과 칼과 말을 빼앗았다. 그리고 우리의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우리가 손으로 만들었던 염주 목걸이는 사라져 이제는 일본인들이 그것을 만든다. 명예롭게 살고 명예롭게 죽은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이여. (중략) 나는 이제 셔츠와 넥타이를 하고 있지만 나의 몸 깊은 곳은 여전히 인디언 기운이 가득하다. 나의 몸 깊은 곳은 여전히 인디언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체로키 국가는 다시 부활하고야 말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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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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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성 콤플렉스-남녀의 엇갈림
섹스는 싫다. 아이를 원할 때만 응해야 하는 것이라고 배우고 자란 여성은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한 여성을 아내로 가진 남성은, 섹스를 해도 아내가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기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마지못해 응하는 여성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여성이다. 섹스를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다소의 시간과 마음으로부터의 노력과 성에 대한 스스로의 욕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섹스에 대한 생각은 점점 변해가는 것이다. 섹스를 어떻게 느끼는 것이 좋은지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여성이 있다. 섹스는 남녀의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까다롭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즐겁고 행복하며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남성은 - 일부의 여성도 그렇지만 - 상대로 하여금 자기의 방식에 맞추기를 강요하기도 한다. 한편성에 대한 욕구를 말로 나타내기를 꺼려하거나 남편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멈칫거리는 경우,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어떤 방식이 좋은지를 말하지 않는 여성도 있다.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슬슬 나의 취향을 알아줄 때도 된 것 같은데...하면서 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남성 자신도 방법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적극적으로 잠자리에 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며, 둘이서 정열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말하는 여성도 있다. 섹스를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대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섹스 후에 대개 낮 시간에 점찍어 둔 귀걸이에 대해 말하거나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 새 차가 필요하다. 또는 거실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고 싶다는 등의 말을 비친다. 이처럼 남편과 마음의 결합을 가질 수 없거나 혹은 전혀 가질 생각이 없는 여성은 단지 기계적으로 성행위를 하고 있을 뿐, 마음은 딴 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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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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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빌려 온 신숙주의 책을 뜯어 벽에 바른 김수온
김수온(1409-1481)의 본관은 영동이고, 호는 괴애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 정랑으로 있었다. 하루는 그가 좌랑 김 아무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잘 보네. 자네의 관상을 보니 오래 살 관상일세" 김 좌랑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비법을 함부로 전할 수 있나? 술을 한턱 잘 내면 조금은 일러줄 수가 있지" 기대에 부푼 김 좌랑은 잔치를 차려 병조의 동료들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김수온에게 다시 청했다. "저의 관상이 오래 살게 생겼다고 했으니, 이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선생은 이미 50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것이오. 선생이 얼마를 더 살지는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 오면 책장을 떼서 도포 소매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한 장씩 꺼내어 암송하고 혹 잊어버리면 다시 꺼내서 보곤 하였으며 다 외운 뒤에는 모두 버렸다. 신숙주가 아끼는 고문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 책표지를 다시 만들어 애지중지하다가 김수온의 성화에 못 이겨 빌려주게 되었다. 한 달 쯤 뒤에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신숙주는 그 집 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책이 모두 낱장으로 뜯기어 그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신숙주가 어이가 없어 하며 그에게 사연을 물어 보자 김수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벽에 붙여 놓고 드나들 적마다 읽고 외우면 참 편리하지요"
그의 벼슬은 영중추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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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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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의 바위
여성 상위시대라고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의 주부들은 고달프기만 하다. 아침마다 첫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한바탕 수선을 떤 끝에 남편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면 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소제다 빨래다 하여 일을 해도 끝이 없다. 이러한 주부의 노력은 곧잘 '시시포스의 바위'에 비유되기도 한다.
'시시포스'는 희랍신화의 무한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죄인 가운데서도 '탄타로스'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존재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가파른 비탈길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올리는 것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바위를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시시포스'는 본시 '코린토'의 왕이었는데 무척 꾀가 많고 교활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였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벌을 받게 된 데 대해서도 사신을 속여서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제우스'의 정사를 폭로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의 영원한 고역은 옛부터 여러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아 왔으며 근자에는 '프랑스'의 '까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를 부조리의 영웅이며 운명에 도전하는 거인이라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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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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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태양왕을 거절한 철학자
괴테와 독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준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렌즈를 닦는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좋아하는 철학 연구에 열중했다. 그리고 수학과 기하학 등 자연과학의 원리를 철학에 도입하여 새로운 학설을 세웠다. 그런데 그런 방식에 대해서 당시의 보수적인 철학과 종교계가 격렬하게 비난했고, 그 때문에 그의 생활은 점점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굳은 신념을 앞세워 결코 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학설을 굽히지 않았다. 그 무렵 절대 왕정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는 문예를 좋아하고 문화 전체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생활에 곤란을 겪고있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파견했다.
"만약 그대가 프랑스에 와서 그대의 저서를 내게 헌상해 준다면 해마다 충분한 돈을 보내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태양왕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냉담했다.
"뜻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학문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내책을 헌상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거절하겠습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가 계속되면 처참한 심정에 빠져 자신을 무너뜨리기 쉽다. 가난은 의식주라는 욕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먹이'를 내보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달려들게 된다. 하물며 이 일화와 같이 중상주의 정책으로 당시 유럽에서 둘도 없는 부와 권세를 휘어잡은 루이 14세가 직접 돈을 대 주겠다고 하면 덥석 먹이를 물지 않을 사람이 없다. 게다가 보수적인 학풍 속에서 자신의 학설이 동네북이 되고 있을 때 그 저서를 헌상하라는 조건은 지극히 회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우리들이라면 이를 파격적인 영광으로 여기고 기꺼이 수락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자신의 학문을 지키려는 순수한 자세를 견지하여 궁핍한 생활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권세 위에 군림하는 문화 이해자'에게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의 강철같은 신년에서 나온 행동이다. 스피노자의 굽힘 없는 당당한 자세는 먹이만 생기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을 오히려 인간의 본능으로 긍정하려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엄하게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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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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