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2. 개화 사상과 서구 사상의 유입
서구 사상의 유입
2. 개항 이후 서구 사상의 유입
사회 사상 :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불평등 수호 조약을 맺고 난 이후부터 조선에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높아졌다. 개항 후 최초로 일본의 외교 사절이 된 김기수가 1876년 보고한 "일동기유"에서는 "그들의 학문은 경전을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부국강병을 받들고 있다", "군사나 농사에 모두 서양의 방법을 쓰고 있다", "화륜이면 천하에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등의 내용을 싣고 있는데, 이는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 사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하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1881년에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그의 인솔하에 38명의 기술 학생을 청에 파견하고,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유길준은 류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경응의숙에 입학하게 되었다. 후쿠자와는 "서양사정", "학문의 장려", "문명론개략" 등을 저술한 사람이었는데, 이 중에서 "서양사정"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 저술로서 유길준도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사정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동경대학교 초빙 교수로서 일본에 처음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한 미국인 생물학자 모스(E.S. Morse)의 강연을 들었고, 이것을 인연으로 나중에 미국 유학 시절에 그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 유길준이 영향을 받은 서양 사상은 자유 민권 사상과 사회 진화론을 들 수 있다. 우선 자유 민권 사상에 관하여 유길준은 "서유견문"의 제4편 '인민의 권리'와 제5편 중의 '정치의 종류'에서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인민의 권리에 대하여 "무릇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사람인 권리인 현우, 귀천, 빈부, 강약의 분별이 없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공명정대한 윈리이다"라고 하여, 사람은 각각 그 신분에 따라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견해를 배격하고, 천부의 인권은 만민 평등이며 인간을 사회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인위적인 구별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 박영효는 "백성으로 하여금 응분의 자유를 누리게 하여 원기를 키워야 한다"고 하여, 인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만인이 평등하여 움직일 수 없는 통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 '통의'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보전하고 자유를 구하며 행복을 원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변법 개화파의 정강에서도 "문벌을 폐지함으로써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관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 하여금 백성을 택하도록 하지 말자"(김옥균의 "감신일록")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현실적 한계가 뚜렷이 있었다. 아직도 명분론적 군신 관계의 존왕 사상이 뿌리 갚게 자리 잡고 있어 전제 군주권을 어느 선에서 제한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학에서 그 합리성을 찾고 있다는 점이 유학을 완전히 배제한 일본의 후쿠자와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자유 민권 사상은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하나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하여 그 사상이 점차로 대중들 자신의 것으로 되고, 만민공동회에 의한 외국의 이권 반대, 정권으로부터 수구파의 배제, 중추원의 개혁에 의한 의회 설립 등을 요구하는 등 정치 무대 전면에 광범위한 시민 대중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 이 당시 지배적인 서양 사상은 사회 진화론이었다. 사회 진화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진화론자인 후쿠자와의 지도를 받았고, 미국에서 열렬한 진화론자인 모스의 지도를 직접 받기도 하였다. 사회 진화론은 조선의 개화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인류 사회가 미개 -> 반개화 -> 문명 개화로 발전한다는 사상 속에 반영되어 있다. 유길준이 진화론을 소개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제국주의의 각축이 일반인들에게도 실감나게 되었으며, 진화론에 대한 믿음도 보편화되었다. 사회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스펜서(H. Spencer)와 헉슬리(T. Huxley)등이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와 국가간의 경쟁 관계에까지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 사회 진화론은 사회적 다원주의라고도 하는데, 종족과 사회 집단간의 투쟁을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만 파악하여, 경쟁 원리를 사회적 진화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집단간의 경쟁이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소수가 약한 다수를 지배하게 되는데,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 도태의 한 형식으로 파악하는 사회 진화론은 결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옹호하였다. 그러나 가장 현실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경향들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원리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미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진화론은 처음에는 일본에서 받아들였으나,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인이 쓴 글의 번역을 통해 널리 대중화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서 엄복이 헉슬리의 이론을 번역한 "천연론"(1898)과 "군학이언"(1903), 양계초의 "음빙실문집"(1903)이 들어와 조선 대중들 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엄복은 헉슬리의 진화론을 스펜서 식으로 해석하여 중국인들에게 부강에 대한 분발을 독려하였다. 즉 스펜서는 진화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사회와 우주에까지 확대시킨 반면에, 헉슬리는 우주와 윤리의 진화 원리는 별개의 것이라 하였는데, 엄복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스펜서의 입장에서 번역했던 것이다. 양계초는 저널리스트로서 평이한 문장으로 이 이론을 중국에 대중화시켰다. 그가 서양에 대해 가진 지식은 직접 서양을 접하고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로 일본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그가 주도한 계몽 운동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현실 인식의 도구이자 현실 긍정을 합리화시켜 주는 이론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조선에 쉽게 수용된 것은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의 전통 철학과의 마찰이 적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 앞에 놓인 조선의 현실에서 구국을 위한 자강의 논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사회 진화론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는 우선 자강론에 입각한 애국 계몽 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하였던 각종 학회와 단체의 원동력이 되었고, 새로운 역사 의식과 정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하였다. 거구로 사회 진화론은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로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인종주의적 편견과 인종간의 대립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이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조선과 중국 및 일본과 협력하여 백인종에 맞선 투쟁에서 이겨야 하다는 논리로서 연결되면서 일제 침략의 도구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회 진화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수용한 조선의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에게서는 민족주의 구국 사상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므로 사회 진화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화기에 하나의 사회 사상으로서 작용하면서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사상: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특이한 점은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에 앞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전도에 힘썼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국인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만주와 일본에서 선교사들과 어울리면서 성서 번역을 도와주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활동을 벌여 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조선의 기존 유학이나 불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갑신정변을 전후로 하여 국내에 터를 잡게 되었다. 이들은 천주교의 전철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사의 신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왕실과 가깝게 지내려 노력하였으며, 전도보다는 의료와 교육 사업에 더 열을 올렸다. 이리하여 이 당시 선교사들은 되도록이면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환심을 살 수 있는 방향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왕 자신도 선교사들을 상당히 신임하게 되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이들을 전적으로 믿고 신변 안전을 위하여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벌이면서 서서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 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많은 수가 경건주의(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청교도적인 순수한 복음적 삶을 중시하여 오로지 성서와 신앙적 체험을 강조하였으며, 성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사경회와 신앙 부흥회를 중심으로 하는 길을 다져 나갔다. 그래서 세속과 신앙의 분리를 당연하게 보거나 세속에 무관한 태도를 보이는 등 비정치화된 경향, 즉 경건과 피안의 길을 열어 나갔던 것이다. 이 점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혐의를 불식시킬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신학의 빈곤, 사회와 현실을 무시한 영혼 구원, 정치와 무관한 경건주의, 합리성의 결여, 그리고 이원적인 신앙의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신학뿐만 아니라 과학이나 학문의 발달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는 오늘날까지도 일부 한국 교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즉 개인의 불행이나 행복이 정치,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인 연관보다는 하나님과 인간 개인의 신앙적 관계에서 해석되고, 이러한 틀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 아래 활동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두고 같은 선교사인 알렌(Allen)은, "미국의 선교 본부는 너무나도 많은, 훈련받지 못하고 비신사적인 광기의 열광주의자들을 한국에 보냈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18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선교의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이른바 '네비우스 방법'이라 불리는 원칙이 그것이다. 즉 조선인의 자립적인 선교, 조선인 교회의 자립적인 운영, 그리고 자립 보급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1893년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에서는 선교 지역의 분할 정책,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에 대한 선교의 강화, 초등 학교의 경영을 통한 어린이 선교, 모든 종교 서적의 한국어 사용 등을 결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교파 교회적인 선교 정책은 이후 한국 교회가 단일적인 민족 교회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교사들의 모호한 태도와 그들의 한국인 교역자에 대한 신학 교육 정책도 한국 교회의 방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근본주의 신학과 윤리를 배경으로 가진 미국계 선교사들은 인문 지식이나 세속 학문의 기초적 소개에도 인색하고 조심스러워 했으며, 그리하여 교역자의 지적 후진성이라는 비극적 요소를 한국 교회에 뿌리기도 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비록 존왕과 충군적인 체제 순응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터득한 반봉건적인 자주 의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개화파 지식인들도 그러했듯이 그들 역시도 서양이 저렇게 부강하게 된 것은 기독교 때문이라고 믿었다. 당시 '독립신문'등에는 이따금 "평등과 자유와 문명 개화와 자주 독립이 예수교에서 나왔다"고 하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또 초기 기독교 신도들은 구국제민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입교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학적 교양을 쌓은 그들이지만 나중에 기독교의 교육 운동을 통해 근대적 사상에 접하기도 했고 애국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으며 예배를 통해 애국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에 대한 적극적 항쟁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었던 '정동구락부'의 멤버로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은 독립협회를 창립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관리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입헌 군주제에 입각한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하며 근대적 시민 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앞장섰다. 또 이들이 창립한 독립협회는 그들의 주장을 여론화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집회도 열었다. 이들이 당시 주로 주장하던 내용은 민족의 자각과 러시아 세력의 배척, 그리고 국가의 이권을 지키고 국가 영토를 수호하며 민권을 신장시키고 의회 정치를 실현하는 것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이상재는 고려 말 유학자인 이색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낙방한 뒤 개화파 인사인 방정양의 후원을 받아 개화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한때 그는 기독교를 반대하였고 미국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을 보고는 미국을 미워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 '민유방본', 곧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학적 가르침을 바탕에 두면서도 서양적인 천부인권설을 부각시켜 "국가의 대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서 국왕이 이것을 모아 대표한다"고 대정부 규탄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3년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애국 계몽 활동과 구국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출옥한 뒤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교육 운동과 사회 운동에 정열적으로 활동하였다. 또 국권이 박탈되자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후에 기독교에서 제사 문제가 사회 문제로 확대되자, "종교에서 조선의 혼을 잃지 말라. 미신이 아닌 이상 부모의 제사 지냄이 무엇이 그르랴"라는 기사를 쓰기도 하였다. 1890년 이후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 적용되면서, 특히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자립적으로 세워지고 근대적이고 서양식의 교양을 갖춘 인재들이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 지방 사람들이 중국과의 교역의 길목에 위치해서 전통 유학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지닌데다 신분적으로도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거의 봉쇄되어 있어 새로운 풍조를 받아들이는 데 더 적극적일 수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근대적 의미의 부르주아가 형성되는 데도 이 지역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새로이 형성된 중산층을 통해 기독교인의 정치적 참여가 체계화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일제 시대의 항일 세력 및 해방 이후의 정치 세력이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양산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할 것이다. 개화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사상적으로 전통적 가치관에 회의가 싹트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서구 문명을 등에 업고 등장한 기독교를 과학과 제국주의로부터 엄격하게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자유와 평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매력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서양의 조선 침략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일본이 전면에 나서자 민중과 일부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을사조약 이후 기독교의 신도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였으며, 1907년부터는 대부흥회 운동을 통해 내적인 동력을 더욱 키워 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가 3.1 운동의 정신적 뒷받침이 된 원인이다.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한국 역사에서 성서 읽기를 통해 한글을 보급시키고, 교육 사업을 벌여 상당 부분 의식을 근대화시켰으며, 항일 투쟁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여러 모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고 실천하려는 보수적 신도들의 태도는 완고한 신앙관과 실천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후에 신사 참배 거절이라는 일제에 대항하는 형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필연적으로 전통 사상과의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전통과의 융화나 타협이 아니라 자기 부정, 곧 전통에 대한 부정의 강도 여부가 신앙의 척도가 된 것으로 잘 표현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본질과 그것과 융화된 서양 문화 자체를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온통 서양 문화, 특히 미국 문화를 따르고 모방하는 것이 경건한 삶의 표준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들이 서구 지향적인 문화 의식을 갖고 전통과 단절된 이질적인 예배 의식을 감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언어의 개념은 서양 언어의 번역어로 대체되고 전통 문화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어 철저히 소외되어 갔다. 외국 것이면 무조건 대접받는 풍토를 세운 것도 바로 이들 초기 지적, 경제적 중산층의 후예인 유학생들의 몫이었다. 초기 기독교 신도들이 갈등한 민족에 대한 애착과 교리에 대한 신봉은 "교회 속의 민족이냐, 민족 속의 교회냐"하는 문제로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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