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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95 호
단기 4340. 6. 6 (음력 4.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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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 8회 전국 가사 · 시조 창작 공모전 안내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조선 중기에 담양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가사문학의 창작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제 8회 전국 가사 ? 시조 창작 공모전’을 다음과 같이 개최하오니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다 음 -
1. 주최 및 주관 기관 ? 주최 : 담양군(한국가사문학관) ? 주관 : 조선대학교 ? 후원 : 문화관광부, 전라남도, 전라남도교육청
2. 분야별 응모 작품 수 ? 가사 : 학생부 1편, 일반부 2편 ? 시조 : 학생부 2편, 일반부 3편
3. 응모 자격 ? 학생부 : 초 · 중 · 고등학생 ? 일반부 : 대학생 및 일반인
4. 응모 요령 ? 주제 : 자유 ? 응모 방식 : 우편 또는 전자우편(E-mail) ? 유의 사항 1) 원고 표지에 응모부(학생부, 일반부), 응모 분야(가사, 시조), 인적 사항(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을 기재할 것. 학생인 경우 학교명과 학년을 반드시 기재하기 바람. 2) 전자우편(E-mail)으로 응모할 경우 한글문서로 작성하여 반드시 첨부파일 형태로 보낼 것. 3) 응모 작품은 과거에 발표되었거나 현상 공모한 적이 없는 순수 창작품이어야 함. 4) 응모 작품은 일절 반환하지 않음.
5. 공모 기간 및 접수처 ? 공모 기간 : 2007. 5. 16~2007. 8. 15(3개월간) ? 접수처 1) 우편 (501-759)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 375번지 조선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517-872)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319번지 한국가사문학관 2) 전자우편(E-mail) sanje2@hanmail.net 또는 gasa240@hanmail.net ? 문의 : 조선대학교 국문과(062-230-6514) 또는 가사문학관(061-380-3240)
6. 입상자 시상 ? 일시 : 2007. 9. 14(금) ? 장소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319번지 한국가사문학관 세미나실 ? 내역 : 27명(총상금 530만원) 1) 대상 : 1명(문화관광부장관상, 상금 150만원) 2) 최우수상 : 2명(전라남도지사상, 조선대학교총장상, 상금 각 50만원) 3) 우수상 : 4명(담양군수상, 담양군의회의장상, 담양군교육장상, 상금 각 20만원) 4) 장려상 : 20명(담양군수상, 상금 각 10만원) ※ 단 상의 내용은 다소 변경될 수 있으며, 장려상의 경우 상금의 일부를 도서로 대체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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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모든 것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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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목표를 설정하라
용기는 삼덕(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의 덕목, 곧 지, 인, 용을 말함)중의 하나이다. 인간이 사물을 마음대로 활동하게 만들고 천지를 다스리는 일은 모두 용기의 작용 때문이다.
"어진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냐? 나도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라고 공자의 제자 안연이 말했는데, 무슨 일을 하려는 사람은 이처럼 용기가 먼저 발동하는 것이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학문을 하고 싶을 때 거기에 특출한 어떤 이를 설정해 놓고 그분처럼 되려고 실천하기만 한다면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만다. 문장가가 되고 싶으면 "도연명이나 한유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서 열심히 실천에 옮기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글씨 잘 써서 이름을 날리고 싶으면 "왕희지는 어떤 사람이냐?"에서 시작하여 노력하면 된다.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 목표되는 한 사람을 정해 놓고 그와 같은 사람의 수준에 오르도록 노력하면 그 수준에 이를 수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용기라는 덕목으로부터 가능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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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2. 재편기/고려말--양란 이전
1. 주자학
조선 주자학의 발전
1. 사림파의 등장과 좌절
조선 초기의 통치 질서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관학파 유학 사상은 성종대 이후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통치 질서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됨으로써 향촌의 자율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 반면 15세기에 이루어진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향촌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는 계속적으로 증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요구를 조심스럽게나마 제기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당시 향촌 사회를 지배하던 중소 지주들이었다. 또한 리 범주보다는 심 범주를 중시하고,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하기보다 불교와 같은 이단 사상과의 타협을 모색하였던 관학파 유학 사상도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주로 중앙의 고급 관료들, 관학파 유학자 자신의 부패화로 나타났다. 관학파 유학자들의 부패화는 권력의 집중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였지만, 비판자들은 그것이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비판자들은 중앙에 의한 타율적 통제보다는 향촌 사회의 자치적 질서를 중시하고, 엄격한 도덕률에 의해 규율되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심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 질서는 이미 주자학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다. 주자학은 원래 자율적 도덕률에 의해 통제되는 향촌 사회를 모델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판자들이 바로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사림파 유학자들은 고급 관료의 부패성을 공격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그들은 향촌의 자율적 질서가 강조됨으로써 자신의 출신 기반인 향촌 사회에서 중소 지주로서의 자신들의 입지가 강화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사림파 유학자들의 생각은 당연히 중앙의 권력자들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 나타난 것이 사화였다.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라는 당시의 기본적인 통치 체제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사림 출신의 관리들이 희생당했다는 점에서 사화는 그 이전에 일어난 이른바 사육신 사건과 유사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희생당한 관리들이 모두 주자학의 이념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사화와 사육신 사건은 유사한 사상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들 사림파 유학자의 대표자로는 사화기의 인물은 아니지만 사림파 유학자의 선배격이었던 길재와 김숙자를 들 수 있고, 사림파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 그리고 사화기의 인물로서 김굉필과 정여창, 조광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들로 평가된다. 이들 중 길재는 조선의 건국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려 유신의 정절을 잘 지켰다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숙자는 "소학"을 중시하였고, 김종직은 많은 사림파 유학자들을 길러 낸 큰 스승이었으며, 정여창은 심을 중시하는 관학파 유학 사상에 비해 리를 중시하였고, 김굉필 역시 "소학"을 중시하여, '소학 동자'로 자칭하였다고 알려진다. 조광조는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성현을 본받고 지치를 일으킨다"는 구호 아래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지치, 즉 지극히 올바른 통치의 실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는 중종에게 중용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자 지치주의 운동이라는 도학 정치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 과정에서 조광조는 현실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앞서 나갔다고 할 수도 있다. 군자소인론을 철저히 적용하여 훈구 대신들의 비리를 공격한다든지, 그와 연관하여 훈구 대신들에게 주어졌던 잘못된 포상을 삭제해 버린다든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존치시켰던 도교의 성전인 소격서를 혁파한다든지, 향약 곧 향촌의 자치 질서 규약을 보급하여 향촌 사회의 자율성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든지, 현량과를 설치하여 신진 관리들을 등용하였다든지 하는 그가 실시한 조치들은 거의 모두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향약의 보급과 현량과의 설치는 그가 대변하는 역사적 입장과 관련하여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다. 결국 조광조는 발전하는 향촌 사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주자학적 이념의 철저한 구현을 목표로 하여 또다른 개혁을 진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에 진행되었던 사상적 개혁이 불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조광조의 개혁 운동은 관학파 유학 사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고려 말의 개혁 운동은 조선의 건국이라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조광조의 개혁 운동은 기묘사화라는 비참한 실패로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한 꼬장꼬장한 개혁 운동이 현실을 장악하던 왕실과 고급 관료들의 저지로 좌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볼 때 조광조의 개혁 운동은 결코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조광조 개혁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향촌 사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고, 조광조의 사상을 계승하는 철저한 주자학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원래의 주자학적 이념에 충실할 것, 이것이 당시의 역사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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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귀감
본뜻 : 귀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본 모습이다. 옛날에는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서 그것이 갈라지는 균열 상태를 보고 사람의 장래나 길흉을 점쳤다. 반면에 감이라는 글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기 위해서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고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판단하는 모든 행위에 감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감상, 감별, 감정 등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므로 귀감이란 말은 사람의 길흉이나 미추를 판단해 주는 기본 도구였던 셈이다. 즉길흉을 점쳐 주는 귀와 미추를 알려주는 감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바뀐 뜻 : 본보기가 될 말한 언행이나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죽음에 앞서서도 의연하고 떳떳했던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 시대 황희 정승을 청백리의 귀감으로 여기고 있다
금일봉
본뜻 : 상금, 기부금, 조의금 등에서 금액을 밝히지 않고 종이에 싸서 주는 돈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사금의 의미로 널리 와전되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본뜻이 바뀐 것이 아니므로 일상생활에서 본뜻대로 써 줘야 한다.
"보기글" -김 할머니는 한국 장애자 재활원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그는 사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받은 금일봉을 사내 탁아소 건립 기금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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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꽃을 든 사회 혁명 - 히피
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세 유형
먼저 포레스트를 위협한 블랙 팬더(Black Panthers)는 실제 존재했던 단체이다. 공식 명칭이 `자기 방어를 위한 블랙 팬더 정당`인 이 단체는 1965년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애초의 목적은 흑인 지역에서 빈발했던 백인 경찰의 폭력을 막는 일이다. 경찰의 곤봉 세례는 흑인 젊은이들의 몸통을 향했고 흑인 여인은 성추행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흑인이 호소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물리력 행사를 선언했던 것이다. 후에는 훨씬 더 정치적인 색체를 띠게 되어, 흑백 분리와 흑인 자치의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흑인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미국 정부가 수세기 동안 거둔 세금을 돌려달라는 주장도 내세운다. 단순한 호소나 평화 시위 대신 폭력을 통해 흑백 평등을 이루려 했던 그들은 당시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FBI의 책임자였던 에드거후버는 블랙 팬더가 가장 치명적이며 위협적인 미국 내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SWAT, 즉 FBI의 특별 기동대가 생겨난 것도 블랙 팬더의 무력 시위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사이 미국 경찰은 캘리포니아,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블랙 팬더와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블랙 팬더는 최소한 30명의 조직원을 잃었고 부상자는 그 몇 배에 달했다. 미국 경찰과 FBI는 블랙 팬더를 와해시키고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많은 경우 정부의 대응은 불합리했다. 체제 수호 의지와 인종차별 의식이 작용해서 블랙 팬더 단원들을 학살하는 데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블랙 팬더의 시카고 지부를 이끌던 프레드 햄프턴의 죽음이다. 1969년 12월 시카고 경찰은 블랙 팬더의 아지트를 습격하는 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프레드 햄프턴을 비롯한 몇몇의 블랙 팬더 단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블랙 팬더 단원들이 10분 이상 총을 쏘며 저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런 발표를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부검 결과 프레드 햄프턴의 시신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렇다. 경찰과 FBI는 햄프턴의 보디 가드 중 하나를 구워삶아 햄프턴 등을 곯아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아지트의 평면도를 얻는 데 성공했는데, 그 평면도에는 단원들이 잠들어 있는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결국 경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블랙 팬더의 지도자들을 살상했던 것이다.
블랙 팬더는 70년대 중반부터 무력 투쟁 전략을 포기한다. 사실 그런 과격한 전략으로는 미국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고, 또 흑인들의 총 몇 자루가 미국의 공권력에 맞서는 일은 불가능했다. 블랙 팬더는 흑인 구역 내에서 교육, 의료, 구호사업 등을 진행하면서 흑인들의 삶을 보살피고 권익을 보호하는 데 노력하다가, 1980년대 초반 소멸한다. 제니의 연인 웨슬리가 대표하는 저항 운동은 학생 운동이다. 1960년대 미국의 학생 운동으로는 먼저 자유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을 들 수 있다. 1964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처음에는 학원 내의 정치 활동 금지령에 대한 저항으로서 시작 되었고 후에 베트남전을 계기로 반전 운동으로 발전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마리오 사비오가 주동한 농성이다. 버클리대의 학생이던 그는 수천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대학 행정 건물을 점거하고 28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반전과 사회 개혁을 외치는 학생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약80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1960년대 미국학생 운동의 조직으로 유명한 것이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이다. 이 조직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글 자막은 `민주학생단`으로 번역했으며 웨슬리가 이 단체의 대표로 설정되어 있다. 1959년 버클리에서 조직된 SDS는 역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는 조직으로 성장한다. 블랙 팬더처럼 총을 들고 전면전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 단체도 상당히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구호를 내세웠다. 그들은 각 대학에 지부를 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고 곳곳에서 시위와 점거 농성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주장도 역시 반전과 평화 그리고 징병 반대와 사회 개혁으로 모아졌다. 60년대에 맹위를 떨치던 SDS는 1969년에 두 개의 분파로 갈라진다. 일기 예보관을 의미하는 웨더멘(Weathermen)은 테러리즘 전술에 의존해 사회 개혁을 이루려 했고, 또 다른 분파는 희망 없는 미국 대신 제3세계 혁명으로 눈을 돌렸다. 이 두 조직도 1970년대 중반에 소멸하고 만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SDS와 블랙 팬더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흑인들은 호전적인 대사를 쏟아붓고 권총을 빼들어 포레스트를 위협했다. 그리고 지성적인 학생 운동의 지도자는 여성에게 폭행을 가하도록 연출되어 있다. 시각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면 감독은 19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두 부류를 소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을 악의적으로 일그러뜨렸지만, 이런 청년들을 소개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으니 나쁜 기회만은 아니다. 그런데 감독이 초대한 나머지 한 가지 청년 운동의 유형은 무엇이고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청년 운동은 히피 문화였고 영화 속에서 이 괴상망측한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은 제니이다. 포레스트가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쯤 제니는 히피 문화에 젖어든다. 그런 제니의 모습은 얼핏 지나가는 장면들에 담겨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게 <포레스트 검프>가 히피 현상을 외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몸소 뛰어든 이 사회 개혁 실험은 분명히 인류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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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2.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약
인생의 시나리오는 자기 자신의 손으로 쓴다.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대개 모순되어 있어서 무척 당황스럽게 만든다. 한 사람의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에서 어머니는 딸의 유아적인 부분을 향해 언제까지나 부모의 귀여운 아기로 있어 달라고 호소한다. 메시지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하고 있지만, 대개는 엄마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너의 장점을 알아주는 것은 엄마인 자기뿐이라고 넌지시 말하거나, 만일 자기를 버린다면 곤경에 빠지더라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
"보브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고 엄마 있는 곳으로 달려오지는 말아라." "어째서 지방에서 근무하는 거지? 여기서는 적당한 일을 발견할 수 없었니?" "급료가 20달러 올랐다고? 어째서 40달러가 아니냐?" "프로포즈 받았다고? 믿을 수가 없구나, 해리를 전화로 불러내 보렴. 정말인지 아닌지 직접 들어보자."
이런 말들에는 딸이 어른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적 갈등이 나타나 있다. 스스로는 그렇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 그녀들에게는 많든 적든 어머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딸을 만들려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딸을 위해 좋은 것, 올바른 것, 최선의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하는 어머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보브와 결혼한다구? 네 나름대로 올바른 선택을 한다고 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보브와 어울리지 않는구나. 내 말 안 듣고 나중에 실패하면 그때는 너를 도와주지 않겠다."
속뜻이 있는 말은 딸들에게 때로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떻게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여성도 멈춰 서서 이렇게 말해야 할 때이다.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남의 규범을 따라야만 할 이유는 없어요."
가족의 영향력은 물론 크다. 그러나 자기의 인생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인생을 연기해 줄 의무는 없다. 자기에게 적합한 규범이 아니면 깨끗이 버려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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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육신보다 격이 더 높은 사람 최덕지
최적지(1384-1455)의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가 당나라 청하로부터 뱃길로 와서 전주에 살게 된 것이다. 지금 전주를 객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최담은 문과에 합격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광지,직지, 득지, 덕지 사형제를 낳았다. 덕지의 호는 연촌우수이고 권양촌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태종 5년(1405)에 생원시, 문과시를 거쳐 직제학을 지내고 남원부사로서 영암 영보촌에 눌러앉아 누각에 존양루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문종 원년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 겨울에 나이 때문에 사직하였는데, 집현전의 학사들이 그를 위해 한강가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전송하였다. 이때 그를 흠모하여 부른 송가가 40여 편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히 했으니 공은 곧 나의 스승일세
당시에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참혹한 화를 많이 당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시습은 오늘의 백이요, 육신은 오늘의 방련이요, 연촌우수는 육신에 비해서 더 높은 자다"라고 하였다. 향년 72세이고, 시호는 문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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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분화산 위에서 춤을 춘다
'프랑스'의 7월혁명 직전인 1830년 5월 '팔레 로와이얄' 궁전에서는 '루이 필립'이 '나폴리'왕을 위해 베푸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시의 이름난 작가 '사르반디'가 '루이 필립'을 보고 말했다.
"과연 나폴리다운 연회올시다 전하! 우리는 분화산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1824년 '샤를르' 10세가 즉위한 후 프랑스에서는 시대에 역행하는 전제 정치를 단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그런 끝에 1830년 의회와 충돌,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지만 자유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왕은 선거를 무효로 하고 선거법을 멋대로 개정,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다. 이로 말미암아 긴장 상태가 계속되던 끝에 그해 7월에 파리에서 폭동이 발발, 3일 동안 정부군과 시민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으나 정부군의 패배로 왕은 영국에 망명했으며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 연유로 해서 눈 앞에 박두한 전쟁의 위험을 모르고 놀아나는 국가의 지도자를 곧잘 분화산 위에서 춤추는 것에 비유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북괴 남침의 정보가 꼬리를 무는 데도 "북진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하고 잠꼬대 같은 호언을 한 당시의 국방장관이나 바로 6.25 전날 밤 파티를 열어 취한 몽롱하여 남침의 보고를 받은 육군의 수뇌 등 모두가 분화산 위에서 춤을 춘 위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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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장래를 생각하는 넓은 시야
도쿠가와 바쿠후의 해국 장관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1867년 3월 네덜란드에서 새로 만든 군함 가이요마루로 귀국했다. 바쿠후 말기, 바쿠후 측과 정부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그는 바쿠후 측에서 동란에 참전했다. 전황은 바쿠후 측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군함11척을 끌고 홋카이도로 탈출하여 하코다테의 고료가쿠를 거점으로 정부군에게 완강히 저항했다. 하다 못해 홋카이도를 바쿠후의 손으로 제압하여 가신들의 회생을 꾀하려고 했지만, 오후레츠항 동맹의 붕괴에 이어 센다이, 아이즈, 요네자와 등 여로 항이 잇달아 굴복하여 대세는 이미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로 기울었다. 고료가쿠를 공격하는 군대를 지휘하던 구로다 기요다카는 에노모토의 사람됨을 아까워하여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쓸데없는 반항으로 개죽음을 당하는 어리석은 짓을 멈추고 항복하는 게 어떤가?" 에노모토는 이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후의는 감사하지만 그 뜻에 따르기 어렵다." 그는 답장과 함께 해진전서라는 책 두 권을 보내 왔다. 책에는 이런 편지가 끼여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 고심하며 배운 귀중한 해군 서적인데, 전화로 흔적도 없이 타 버리는 아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귀관에게 증정한다."
구로다는 적과 아군으로 갈려져 싸우는 현실에 구애되지 않고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해군의 장래를 생각하는 에노모토의 넓은 도량에 감동하여 답례로 청주 다섯 통을 보냈다. 사태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우리는 그 절박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타개하려고 절박한 부분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높은 곳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잃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특별히 탓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태가 급박한데도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여유 있게 전체를 두러보면서 대처하는 에노모토의 인격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세계라 할지라도 , 항상 좁은 시야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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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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