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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8 호
단기 4340. 5. 12 (음력 03.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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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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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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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마음은 극히 주관적인 장소이므로, 그 안에서는 지옥도 천국이 될 수 있고 천국이 지옥으로 될 수도 있다. / 존 밀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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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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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천하개위아도대, 사불초, 부유대, 고사불초, 약초구의, 기세야부, 아유삼보, 지이보지, 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자고능용, 검고능광, 불감위천하선, 고능성기장, 금사자차용, 사검차광, 사후차선, 사의, 부자이전즉승, 이수즉고, 천장구지, 이자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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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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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일곱째 장
직역
하늘 아래가 모두 나의 도가 크다고 말하나, 비슷할 뿐 닯지 않았다고 한다. 무릇 오직 크기 때문에 그러므로 비슷할 뿐 닯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닮은 것이라면 오래도록 그것이 미세한 것일 따름이다. 나에게 세가지 보물이 있는데, 지니고 그것을 보존 한다. 하나는 자애이고, 둘은 검소함이고, 셋은 감히 천하 앞에 나서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자애로운 까닭에 능히 용감하고, 검소한 까닭에 능히 넓을 수 있으며, 감히 천하 앞에 나서서 행하지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능히 그릇의 으뜸이 된다. 지금 자애를 버리고 용함할려하고, 검소함을 버리고 넓을 려고 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 한다면 죽음 뿐이다. 무릇 자애로 싸운다면 싸움에서 이길 것이고, 그것으로 지킨다면 견고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그를 구하려 한다면 자애로써 그를 보호한다.
해석
지구는 크다. 그래서 축구공같지 않고 바둑판 같다고 생각을 했다. 대도는 그런 것이다. 그 속에 파 뭋혀 살기 때문에 지구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용기는 무엇인가. 자신의 힘자랑을 하는 것이 용기인가. 자신보다 약자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용기인가. 아니다. 그것은 힘만 있으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굽힐줄 알고, 힘이 딸리면서도 나설 줄 아는 것이 용기이다. 강자라고 알려진 사람에게 덤빌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그냥 무조건 덤비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일이 강자에 의해서 제지될 때 나서는 것이 용기다. 그것은 자신과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힘이 든다. 누군가를 위해서, 스스로 부서질 줄 알면서 나가는 것이 용기이다. 힘이 있으면 누구나가 용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어도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되면 무릎을 꿇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용기이다.
검소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검소하면 넓게 쓸 수 있다. 생활에서 쓸때 쓸 줄아는 것이 검소한 것이다. 그리고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쓰지 않는 것이 검소함이다. 이렇게 산다면 넓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넓게 고를 수가 있는 것이다. 쓸모도 없는 호화상품을 사서 정작 필요한 것을 사지 못하고, 필요한데 쓰지 못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사니까 사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는 없지만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사는 군중심리에 의해서 일어난 사회적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앞서기 위해서는 뒤가 있어야 한다. 모두 앞서겠다고 달려나가면 뒤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결국에 가서 서로간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모두 목표로 하는 것은 아주 조금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갈길이 아니라면 뒤로 물러설 필요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밖의 것에서 앞서려고 하지 마라. 설혹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길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진하라.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앞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애정이 없는 용기는 폭력이다. 자신의 힘만 믿고 날뛰고, 검소할 줄 모르고 낭비를 하고, 매사에 일등만 할려고 몸을 혹사하면, 결국에 남는 것은 한장의 부고장 뿐이다.
애정을 가지고 싸운다면 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싸운다면 고통스럽지 않다. 그리고 정으로 똘똘뭉친 곳은 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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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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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세상 사람들은 나의 도는 크기는 한 어리석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로지 크기 때문에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만일 어리석게 보이지 않았다면 이미 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된지 오래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그것을 지니고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첫째는 자애, 둘째는 검소,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롭기 때문에 용기가 있다. 검소하기 때문에 널리 베풀어 쓴다. 감히 천하의 앞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큰그릇이 되어 남의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애를 버리고 용기만을 취하려고 하고, 검소한 것은 버리고 널리 쓰려고만 하며, 남의 뒤에서 서려고 하지 않고 앞에만 나서려고 한다. 이런 일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자애로움을 지니고 싸우면 이길 수 있고, 자애로움을 지니고 지키면 견고한 것이다. 하늘이 장차 그를 건져내고자 할 때에는 자애로써 그를 지켜 주는 것이다.
주
불초: ...와 같지 않다, ...만 못하다, 어리석다, 못나다, 현명하지 못하다. 구의기세: 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라는 뜻임. 삼보: 불교에서는 불(부처님), 법(부처님 말씀), 승(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수행자)을 지칭한 말임. 원래는 노자의 도덕 경에 나오는 말로 중국인이 인도의 불교 경전을 번역할 때 차용한 것임. 한자 문화권의 최고 지성이 불교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데 노자 사상이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의 경론 삼백권을 한어로 번역하여 이름을 떨친 후진의 고승 구마라습은 노자도덕경에 주석을 달았으며, 소설 서유기의 주인 공으로도 유명한 당의 현장 법사는 노자를 범어(산스크리트어, 완성이란 뜻이며 고대 인도의 지식층이 사용한 말, 지금도 쓰이고 있음)로 번역하여 인도의 사상계에 소개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광: 널리 베풀어 쓰는 것. 기장: 기는 그릇 즉 쓸모 있는 인재를 말하며, 장은 어른, 우두머리를 뜻함. 사: 사(버리다)와 같음.
해
세상 사람들은 노자의 도를 크기는 하나 막연하고 실효성이 없는 교설로 보고 있다. 그것은 뚜렷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도 없고 해석상에도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반짝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통속적인 이념이 아닌 것이다. 노자의 도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성에 호소하는 보편타탕성이 있음에 틀림없다. 도덕 경이 2천여년 동안이나 동양의 최고 지성(근대에 와서는 서구인까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만 보아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낸 위선과 허위 의식에 대하여 노자처럼 날카롭게 메스를 가한 이도 드물 것이다. 특히 고도로 발달된 기술 문명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자연과 인간의 대화가 인류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교설에 더욱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장에서 노자는 삼보를 역설하고 있다. 그의 삼보란 자애, 검소, 자신을 남 앞에 내세우지 않는 것(겸양)이다.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위세를 부리며,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싸워서라도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욕망 충족을 위한 무자비한 경쟁과 쟁탈은 인간성마저 상실케 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는 하늘이 사람을 구제할 때에는 자애로써 지켜 주고 감싸준다고 말하고 있다. 자애를 강조하는 노자의 논조에는 보편적 인류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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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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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터리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높이 16.2㎝)이 덕수궁미술관 2층 제3전시실의 진열장에서 백주에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정확히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를 전후해서였다. 그날도 미술관은 평일처럼 오전 9시에 전시실 문을 열고 9월 24일부터 한 달 동안 계속돼 온 해방후의 출토 및 발굴문화재 특별전 관람객을 입장시키고 있었다.
제3전시실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김영석 씨가 국보 불상의 도난 사실을 발견한 것은 오전 10시 40분께였다. 잠시 딴 방을 돌다가 제3실에 돌아온 그의 눈앞엔 청천벽력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게 높이 1m의 진열대 위ㅔ 놓여져 있던 사방 60㎝의 유리곽 속의 국보 고구려불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담한 범인은 유리곽 속에 푸른색 볼펜으로 급히 적은 다음과 같은 조소적인 메모 쪽지를 남기고 있었다. "국장님(문화재관리국장을 지칭, 당시 하갑청 씨)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 부리다 죽은 자식 자지 만지는 격이 되지 말고. -24일. 이따 11시경에 국장님께 알리겠음(인편·편지·전화 등). 지문감정 의뢰 불요." 물론 국보 불상의 도난사실은 즉시 경찰에 신고되었다. 치안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전국의 공항 및 항만을 긴급 봉쇄하고 철저한 비상검문을 실시하도록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서울 시경에서는 민완 형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벌써 안전한 은닉처에 숨어 있었다. 한편 하갑청 문화재관리국장은 범인이 메모로 약속한 자진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30분쯤 지난 때에 하국장의 집(당주동)에 범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은 "미안하다. 돌려주겠다"는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오후 3시와 6시에도 걸려 왔다. 그러나 범인은 메모에서 24시(밤 12시) 안에 반환하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국장은 피가 마르는 듯한 초조감 속에 범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밤 11시 5분께. 드디어 네 번째로 범인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 왔다 부인 서정희 씨가 먼저 전화를 받은 후 하국장에게 넘겨주었다. "불상을 한강철교의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및의 모래밭에 묻어 놓았으니 찾아 가시오." 마치 스릴러 영화의 대사 같았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하국장은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부인과 운전사 셋이서 한강으로 차를 달렸다. 과연 불상이 비닐봉지에 잘 싸여져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극적인 사건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하국장이 경찰에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한 처사와 범인이 20만 원을 요구했다는 설은 뒤에 많은 의혹을 낳게 했고, 사건 내막은 시종 미스테리로 남았다.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국보 제76호의 (난중일기) 도난사건은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테리가 채 잊혀지기도 전인 그해 12월 30일 밤에 발생했다. 그야말로 민족혼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무뢰한이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침입하여 (난중일기)를 계획적으로 훔쳐갔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을 분노케 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사건 발생 10일 만인 1968년 1월 9일, 부산 시경 형사대에 의해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도난당했던 (난중일기)도 무사히 되찾았지마, 잡고보니 범인은 1963년 봄에 서울 봉은사에서 보물 제321호의 '지정 4년명' 고려 청동향로를 훔쳐 서울 시내의 골동상에 팔아먹으려다가 붙잡혔던 전과범 유근필이었다. 그는 이번엔 훔친 (난중일기)를 일본 쪽에 팔아먹으려고 부산에서 루트를 찾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임진왜란 때 침략해 온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민족과 국가를 지킨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과 애국혼이 담겨져 있는 친필 기록물이자 지정국보인 (난중일기)를 딴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1970년 7월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중요한 문화재의 도난사건이 있었다. 경붑 안강읍의 옥산서원에 전래되던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삼국사기)의 도난이었다. 경찰 수사로 뒤에 다 찾은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2질의 (삼국사기)가 보존되던 중에 독락당에 있던 1질 9책은 끝까지 되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중단되었다. 도난을 면한 1질은 사건 후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 (권50) 보물525호 (옥산서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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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2. 고대의 사상/고조선--삼국 시대
2. 유학
유학의 전래와 수용
유학의 한국 전래 시기에 관한 문제는 한국 유학사의 첫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유학 전래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이이를 비롯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을 바탕으로 기자가 동쪽 한반도로 왔다는 은, 주 교체기(기원전 12세기 무렵)를 유학의 전래 시기로 믿었다. 이는 공자에 의해 유학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유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구한말 장지연은 유학이 비록 공자에 이르러 집대성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유학의 근본이 되는 '홍범구주'가 기자를 통해 전해졌으니 우리 나라가 유학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런가 하면 유학이 진한 시대에 유입되었다는 이병도의 설이 있다. 그는 진나라 사람들이 진역을 피해 진한에 들어옴으로써 유교 예속이 우리 나라에 광범하게 전해졌으며, 특히 유학 사상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한반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던 연나라와의 빈번한 접촉을 바탕으로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유학이 전해졌다고 보는 김충열의 견해 등이 있다. 일단 학술 사상으로서 유학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 이전의 중국 문화를 곧 유학으로 이해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공자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유학이 중국 사상의 주류가 되는 것은 동중서의 건의로 한 무제가 유학을 국교화한(기원전 136년)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중국 문화와의 접촉이 곧 유학의 전래와 단순히 일치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사상으로서 유학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학이라기보다 중국 문화의 전래 시기를 한대 이전으로 소급해 볼 수는 있겠으나, 유학의 본격적인 전래는 아무래도 유학이 국교로 채택되었던 한 무제 이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학의 전래 시기가 언제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용과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유학 수용의 성격은 무엇보다도 고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삼국은 각각 유학을 바탕으로 율령을 제정하고 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또 태학 등 국립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학적 교양을 가르치면서 고대 국가의 틀을 세우 나갔던 것이다.
삼국 시대의 유학
삼국 시대에는 원시 유학인 공맹 사상과 함께 한대의 경학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유학 사상은 정치 원리, 예속, 법제, 교육 제도 등 삼국 시대의 사회 생활에 폭 넓게 영향을 미쳤다. 또 개인 윤리와 사회, 국가 윤리에서도 삼국이 당면한 사회 국가 질서를 정비하고 체계화하는 데 필요한 원리를 유학 사상으로부터 원용하였다. 특히 삼국이 공통으로 유학 사상을 활용한 것은 정치 이념과 교육 제도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교육 기관으로서 태학을 건립하고 그 이듬해에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이것은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했다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길러 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동명왕이 "도로써 다스리라"고 후왕에게 유언한 내용과 형식은 유학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서,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게 왕도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또 진흥왕 순수비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서 유학적 정치 이념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에도 애민 사상과 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안민가' 중에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백성은 백성 구실을 다할 양이면 나라는 태평에 멱감으리라"고 한 것은, "논어"의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는 정명 사상과 부합하는 것이다. 유학은 정치 원리로서뿐만 아니라 윤리 사상과 생활 습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학이 윤리 가운데서도 개인, 사회, 국가를 연계시킬 수 있는 행동 원리인 효와 충이 특히 강조되었다.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 숭배를 더욱 성하게 하였으며, 유학의 예법에 따른 국사와 종묘를 새로이 세워 받들게끔 하였다. 신라의 세속오계에서는 충효, 신의, 도의 등 유학적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효보다 충을 우선시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신라 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요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삼국은 유학 사상을 수용하고 고대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사회 규범으로 체계화하였다. 또 백제의 경우에는 "구당서"에 "그 서적에는 오경과 제자서 및 역사서가 있으며, 표나 소는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였다"고 한 데서 유학이 백제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일찍부터 '박사' 칭호가 보이는데, "서기"를 쓴 고흥과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왕인이 역사 기록에 보이는 박사들이다. 중국 한 무제 때 성립된 오경 박사 제도가 그대로 백제에 전해졌는데, 백제에서는 이런 제도를 통해 유학을 나름대로 체계화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여러 박사들은 일본에 초빙되어 일본 고대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백제가 한자와 유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여 독자적인 유학으로 토착화시킨 뒤 이를 다시 일본에까지 전파, 일본의 고대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왕인 박사를 일본 문화의 시조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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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상피 붙다
본뜻 : 고려 시대에는 친족이나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부서에서 벼슬살이를 하거나 송사를 맡거나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일 등을 하지 않았다. 정실이 개입될 요인을없애고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의 하나였던 이 같은 일을 '상피'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 '상피 붙는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바뀐 뜻 :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말이 절대 금기 중에 금기인 가까운 친척 사이에 성 관계를 갖는 것을 일컫는 말로 변이 되었다.
"보기글" -아, 글쎄 요 아랫마을 개똥이 엄마가 죽은 남편 형님하고 상피가 붙었다지 뭐유 그래서 그렇게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는구만 -옛날 서양에서는 왕가의 순수 혈통을 보존한답시고 형제끼리 상피 붙는 것도 예사로 여겼다며? 자기 남동생하고 혼인한 클레오파트라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
서방님
본뜻 : 서방은 원래 벼슬 안한 남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바뀐 뜻 : 후대로 오면서 남편에 대한 호칭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요즘은 남편을 부르기보다는 결혼한 시동생을 부르는 호칭으로 널리 쓴다.
"보기글" -아이고, 서방님! 춘향이가 서방님 못 보고 죽는 줄 알았소 -둘째 서방님이 이번에 연수차 외국에 나간다는데 뭘 해주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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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혹성이라도 병합하고 싶다
식민지를 한뼘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서양 열강들의 욕심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역사는 피로 얼룩져 갔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일삼는 그들에게는 식민지를 하나라도 더 얻는 것이 자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이요 자국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태는 것이었지만, 식민지 국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잔혹했던 과정이었다. 이러한 잔혹한 과정이 유감없이 드러난 곳이 남아프리카 식민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진두지휘함으로써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모습을 보인 인물이 바로 세실 로드(Cecil John Rhodes, 1853-1902)였다. 영국인인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70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당시 불어닥친 금광업에 손을 대었다. 한 어린이가 갖고 놀던 돌이 다이아몬드임이 밝혀져 남아프리카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세실 로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이아몬드 광업을 성공하여 독점권을 얻자 이웃 트랜스발 지역까지 손을 뻗쳤다. 당시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했다. 원래 그 지역에는 네덜란드 이주민들의 후예인 보어(네덜란드어 '농민'이라는 말에서 나왔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영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19세기 전반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오렌지 자유국과 트랜스발공화국을 세웠다. 그런데 영국은 이 이웃지역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이 지역을 다시 병합하고자 했다. 이 지역인 병합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세실 로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국의 과잉인구와 상품을 처리하기 위해 식민지 정치가는 새로운 영토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지구를 모두 분할하고 나면 혹성이라도 병합하고 싶다. 제국주의, 그것은 늘어만 가는 인간의 '위장 문제'인 것이다."
1890년 케이프 식민지의 수상이 된 그는 트랜스발공화국의 병합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추진했다. 1895년 말 정복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의 노골적인 침략기도가 세계에 알려졌고, 빗발치는 비난에 못이겨 그는 수상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각 후에도 영국은 여전히 이 병합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1899년 양국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그것이 바로 보어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오렌지와 트랜스발공화국을 병합했고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경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여론이 나빠져 영국은 명예로운 고립이라는 외교정책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로드는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인들은 흙이나 수목 빛깔과 비슷한 카키색의 군복을 착용했는데, 이것이 후일 각국의 군장비에 채용되었다. 로드라는 이름의 어원은 로드스섬이다. 에게해 앞에 있는 섬 이름으로 영어의 장미(로즈)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그리스말로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뛰어 보아라." 하는 말은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할 때 격려하는 말로 쓰였다.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쪽에 자리잡은 짐바브웨이는 과거의 이름이 로디지아인데, 1895년에 로드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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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진실한 사랑과는 구별되는 로맨스
여성들만의 점심식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참으로 맛없는 비프 스튜가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들은 요리사를 불러 그 되나마나인 요리를 칭찬하고 기립박수까지 쳤다. 집에서 그처럼 맛없는 음식을 내놓고도 가족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주부가 도대체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여성은 사소한 일에서 남성에게 감사하고, 여성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이 남성을 칭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남성을 높이 칭찬하고 자기 자신을 깎아내림으로써 '흐름에 역행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이 로맨틱한 환상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에 있다. 일찍이 결혼은 주로 경제적 정략적인 이유, 혹은 혈족결합의 목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부부는 상당히 실제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세상을 적으로 삼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우는 두 사람에게 가정은 안전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편안한 피난 장소였다. 하지만 장밋빛 환상을 품고 결혼하여 가자가 제각기 자신만의 행복을 구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이혼율은 단숨에 뛰어 오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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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기생을 사랑하여 눈물 흘린 박신
박신(1362-1444)의 본관은 운봉이다.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있던 그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 강릉 기생 홍장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가 도내 여러 군을 순시하고 돌아오자 강릉부윤 조운흘(호는 석간)이, 거짓으로 홍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운흘이 찾아와서 경포대에 뱃놀이하러 가자고 권하였다. 운흘은 오기 전에 홍장을 불러 예쁘게 꾸미고 또 호화로운 놀잇배도 따로 준비하고는, 처용을 닮은 관리 하나를 뽑아서 홍장을 태우도록 미리 일러두었다. 박신이 운흘과 함께 경포대로 나가니 미인을 실은 호화 유람선이 호수위에 두둥실 떠 있는데, 그 위에 채색으로 단장한 편액이 하나 걸려있고 그 편액에 다음과 같은 시가 씌어 있었다.
태평성대 신라에서 조용하게 늙은 이 몸 천년세월 흘렀건만 풍류는 그대로일세 관찰사가 경포대에 뱃놀이 나왔으나 놀잇배에 미인을 어이 차마 태우리
관찰사 일행이 천천히 포구로 들어가서 바닷가를 배회하던 중 갑자기 운흘이 박신에게 말했다.
"이곳엔 전해 오는 신선 이야기가 있지요. 지금도 달 밝은 저녁이면 신선들이 나와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산천과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찌 신선이 없겠는가!"
박신이 눈물을 글썽이다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홍장이었다. 좌석엔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날의 놀이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조선조에서 그의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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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탑
우리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하는 것이 있지만 공을 들인 끝에 무너져 버린 것이 바로 이 '바벨'의 탑이다. 이 세상에 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만을 남겨 놓고 전 인류를 대홍수로 멸했거니와 ('노아'의 홍수) '노아'의 자손들도 그 수가 불어나자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동쪽에 있는 '시날'평야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빛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의논을 하여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계획을 본 하나님은 한심한 생각이 들어 그들의 오만함을 꺽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 말이 달라져서 의사소통이 안되니 혼란만 빚어질 뿐 일이 될 리 없어 마침내 그들은 탑의 축조를 포기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언어가 통하는 무리들끼리 모여 살게 되었다. 그리고 쌓다 만 탑을 '바벨', 즉 히브리어로 '혼란'이라 불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나 일 따위를 두고 '바벨의 탑'이라 부른다. 구약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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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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