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68 호
단기 4340. 4. 25 (음력 03.0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
|
문학소식 |
제8회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 모집
저희 예술위(*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매 분기마다 '우수문학도서'라는 걸 선정합니다 여기에 선정된 도서를 대상으로 해서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대회'는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 모두가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행사로 이번이 9회째를 맞고 있습니다.
제8회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 모집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병익)는 한국문학작품을 널리 읽히기 위해, 예술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독서감상문을 모집합니다.
■ 응모부문 : 어린이부, 청소년부, 일반부
■ 대상도서 : 전 부문 2007년 1분기 우수문학도서 전종.
■ 응모기간 : 2007년 6월 15일까지
■ 응모방법 :
○ 분량 2000자 내외.
○ 사이버문학광장(www.munjang.or.kr)에 마련된 별도 게시판 사용.
○ 초, 중, 고등학생은 반드시 소속 학교와 학년, 반을 기입할 것.
○ 원고 말미에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기입할 것.
■ 시상내역 :
○ 대상 : 전체 1명 - 10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과 상장
○ 최우수상 : 각 부문 1명 - 5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과 상장
○ 우수상 : 각 부문 2명 - 3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과 상장
○ 장려상 : 각 부문 3명 - 1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과 상장
※ 노력상 : 각 부문 5명 - 3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
※ 단체상 : 초/중/고등학교 1~3개 곳 - 2007년 2분기 우수문학도서 전종
■ 발표 : 2007년 6월 28일 사이버문학광장(www.munjang.or.kr), 문학나눔 홈페이지(www.for-munhak.or.kr)
■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주관 :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
■ 후원 : 국무총리복권위원회, 문화광관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서울문화재단, 교보문고, 알라딘, YES24, 인터파크
*자세한 사항은 관련 홈페이지(www.for-munhak.or.kr, www.munjang.or.kr)를 참조하세요.
*예술위원회 선정 2007년 1분기 우수문학도서는 www.for-munhak.or.kr, www.munjang.or.kr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문의처 :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무국
전화 760-4690, 4691, 4695, 팩스 760-4692, 홈페이지 www.for-munhak.or.kr, 이메일 munhak@for-munhak.or.kr
독서감상문 응모하러 가기
|
|
글터 → 명언 / 격언 |
두려움은 혼자 간직하되 용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나누어 주라.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57장)
|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이정치국, 이기용병, 이무사취천하, 오하이지기연재, 이차, 천하다기휘, 이민미빈, 민다리기, 국가자혼, 인다기교, 기물자기, 법령자창, 도적다유, 고성인운, 아무위이민자화, 아호정이민자정, 아무사이민자부, 아무욕이민자박.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쉰 일곱째 장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병사를 사용하라. 천하를 취할때는 일 없음으로 하라. 내 어찌 그것이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 것일 따름이다. 하늘 아래 꺼리고 피할 것이 많으면 백성들이 가난해 지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혼미해지고,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이한 물건들이 점점 생겨나고, 법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적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나가 함이 없음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변하게 하고, 나가 고요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곧아지고, 내가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해진다. 내가 욕망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통나무가 된다.
해석
정법은 무엇이고 기법은 무엇인가. 정법은 활짝 펼쳐놓고 하는 행위다. 드러나 있을수록 깨끗하고 당당한 것이다. 기이함이란 무엇인가.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다. 무력을 쓸 때는 그 파장을 최소화 해야한다. 전쟁을 해도 백성들이 전쟁을 하는 지도 모르게 해야 한다. 백성들이 전쟁을 하는지도 모르는 전쟁은 딱 하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병사를 움직이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법으로 하라고 한 것이다. 무력을 먼저 쓰는 것은 자신이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하게 하라는 것이다. 적이 싸움을 먼저 걸어와 피하지 못한다 하여도 그것이 정법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사라는 것은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 말라는 것이다. 천하를 취할때는 아무일이 없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천하가 굴러들어와야한다. 무력으로 천하를 장악하려 하지마라. 바퀴 벌래가 싱크대위에서 깔깔거리는 것과 똑 같을 뿐이다.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데 규제가 심하다. 정권이 무서워서 밖으로 나다니기도 힘이들다. 그럼 당연히 백성은 가난해 진다. 일을 하지 못하는데 부유해질 턱이 있는가.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두 개를 가지고 싶어한다. 나보다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백성들이 각기 이로운 것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 빼았으려고 한다. 그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기술이 발달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이러한 물건들이 사람을 헷갈리게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고 옷이 보인다. 차가 보인다. 차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
법은 무엇인가. 서로간에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져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인간의 정이 메말라가면서 더욱 발전한 것이 법이다. 법령이 많다는 것은 그많큼 범죄가 많다는 것이다. 법령이 많아져서 범죄가 생긴 것이 아니다. 법령을 많이 만들어야 안심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법을, 범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법은 불안에서 나온다.
강제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규제하게 만든다. 물은 길을 일러주지 않아도 대해로 들어가는 길을 알고 있다. 사람만이 길을 알려주어도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법이 범죄를 만든다고? 그럼 지금 법을 없애면 범죄도 없어지겠네. 당신 말이야 법이 없어진 사회를 생각할 수 있어. 곳곳에서 범죄가 일어날 걸, 아마 그 첫 희생자가 당신이 될 지 누가 알아.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나는 무욕할 뿐이다. 그거면 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간에 나만 무욕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한다라고 핑계를 대지 마라. 그것은 자기 기만일 뿐이다. 나만 무욕하면 된다. 그렇게 그렇게 하면 모두들 원래의 순수상태로 돌아간다. 나만 돌아가면 된다. 그때까지는 법과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내일로 미루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일로 미룰 시간이 없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57.
나라는 바른 도로 다스리고, 전쟁은 임기응변의 기계로 해야 하지만, 천하는 일없는 것으로 차지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바로 다음에 열거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지 말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는 더욱더 어지러워진다. 사람들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물건이 더 많이 나온다. 법령이 반포되면 반포될수록 도둑은 더욱더 늘어만 간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한다. 내가 행하는 일이 없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며, 내가 꾀하는 일이 없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넉넉해질 것이며, 내가 바라는 것이 없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질박해질 것이다.
주
정: 바른 것, 바르게 하는 것. 기: 기이한 꾀, 속임수, 임기응변의 책략. 기휘: 꺼려서 피하는 일, 금기. 이기: 날카로운 무기. 기교: 교묘한 솜씨, 기교와 같음. 기물: 교묘한 솜씨로 만든 물건. 정: 고요하게 있으면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
노자는 대도를 고요하게 마음을 비우고 작위 함이 없는 것으로 보고 그것에서 유출된 인생도 정허무위, 정허무욕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자의 본체관과 그것에서 연역된 그의 윤리관은 정지적인 것을 특성을 하고 있다. 정허를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후세의 송대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송대 성리학의 발단을 연 태극도 설에는 '성인은 만사를 정율하기 위하여 중정인의로써 천하 만민을 가르치는 데 고요함으로써 으뜸을 삼는다. 고요함으로 오성의 감동이 없고, 타고난 오성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것을 인극이라고 한다. 성인은 이 인극에 선다.'고 하며 정을 근본으로 하는 윤리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희 주정 금욕 사상도 노자의 정허무욕설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 순박, 소박, 질박.
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청정무위로 해야 하며, 전쟁에서는 임기응변의 책략으로써 해야 한다. 천하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위무사로써 임해야 할 것이다. 위정자가 무엇을 해보겠다고 나서면 자연히 백성의 생활은 위축되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집집마다 예리한 무기를 많이 비축하면 할수록 나라는 점점더 혼란에 빠진다. 성들의 기교가 발달되어 교묘한 솜씨로 만든 물건이 생겨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그리고 나라의 법령이 정비될수록 백성의 간지도 늘게 되어 지능적인 범죄는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 말을 강조한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며, 내가 무사 무위하게 처신하면 백성의 살림은 저절로 넉넉해 지는 것이다.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들도 그것을 본받아 저절로 순박해진다. ' 노자의 이와 같은 냉소주의적 발언에는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한 정치에 대한 고발이 깔려 있다. 위정자들은 고통이나 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 공명심과 탐욕에서 전쟁이나 거창한 사업 등을 떠벌리기를 좋아하였다. 백성들은 자연히 과중한 군사 복무와 세금과 부역 등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노자는 이 점이 안타까왔을 것이다. 그는 위정자에 대하여 제발 욕심 좀 버리고 백성을 이대로 내버려두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무사 무위가 최상의 정책임을 역설하는 그의 논조에는 시대의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노자의 정치철학도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5장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국보들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위협한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유린했을 때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유물엔 큰 피해가 없었다. 이번엔 북으로 실어 가려고 한 증거가 뚜렷했으나 기동력의 부족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다음날엔 정부 선발대가 서울로 올아왔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이번에도 미국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물건의 각별한 보호조치를 강구했다. 미국대사관이 이기봉 서울특별시장을 위해 내준 비행기에 국립박물관의 선발대로 최순우 연구관이 편승하여 서울에 올라온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되고 부탄 이때의 서울은 그럴 겨를이 없던 전쟁 초기와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고 있어 군인과 경찰 선발대를 제외하면 황량하고 텅빈 도시였다. 박물관 직원으로서 혼자 서울에 올라온 최연구관은 이번에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나이 많은 수위 한 사람을 겨우 찾아내어 박물관에 남아 있던 서역벽화를 위시한 물건들의 포장과 부산으로의 4·5차 운반에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다. 중공군이 다시 구파발까지 육박해 오는 춘계공세의 위험을 무릅쓴 임무수행이었다. 2차 서울수복 후의 두 차례에 걸친 나머지 유물의 부산 이동으로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부산의 미국대사관 차고를 임시 창고로 빌었던 유물상자들은 뒤에 경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부산 시내의 한 약품회사 창고인 4층 콘크리트 건물로 모두 옮겨져 보호되다가 휴전과 함께 서서히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전쟁 중에도 국립박물관 미술관 소자으이 국보와 기타 미술문화재들은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었지만 개인 소장품과 지방 사찰의 건물과 국보급 유물중엔 적절한 대책이 없었던 탓으로 영원히 사라지거나 행방불명이 된 것들도 있었다. 1948년 10월게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양양면 서면)에서 목기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산집을 짓다가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킨 국보급의 신라종이 있었다. 정원 20년(신라 애장왕 5년, 804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들어 있던 이 동종은 같은 오대산지역의 '상원사동종'(725년명, 현재 국보 제36호)과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명, 현재 국보 제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종으로 그것은 해방 직후의 최대의 발견이었다. 발견자인 산 속의 선량한 목기공들은 그 사실을 즉시 관계당국에 신고했었다. 문교부의 정보 연락을 받은 국립박물관의 황수영 연구관이 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다음해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삼엄한 전투지구여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월정사까지 가서 자세한 얘기만 들은 후, 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능한 한 빨리 월정사로 옮겨다 놓도록 당부하고는 일단 돌아왔다. 그후 동종이 계획대로 무사히 월정사로 옮겨져 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홍직 연구관과 함께 두 번째로 오대산을 찾아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정초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기적의 새로운 국보급 신라종을 보았다. '상원사동종' 및 '성덕대왕신종' 과 양식을 같이하는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종으로서 종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 있었다. 입체적으로 사진도 찍고 종소리도 한번 울려 보았다. 맑고 신비스런 신라의 음향이 오대산의 자운을 흔들었다. 임진왜란 같은 때 왜병이 약탈에서 종을 보호하려고 중들이 땅 속 깊이 묻어 감추었던 것일까? 현장 조사에서 출토지 근처가 선림사터란 것만 밝혀졌을 뿐 수수께끼의 동종이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했으니 기적이었다. 한데, 누가 예측했을까.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땅속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지 겨우 3년 만에 이 제3의 국보급 신라종은 누구도 보호대책을 쓰지 않아 무참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비운의 신라종이었다. 한국정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박물관에선 해방 후 처음인 국보특별전이 열렸다. 개인 소장품들도 거의 출품됐다. 그중에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의 소장이었던 당시 국보 제413호의 '청화백자진사도문재접'도 포함돼 있었다. 해방 전까지 나이토라는 일본인이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 창랑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을 국보특별전에 출품하고 있었다. 안으로 큼집하고 탐스런 복숭하 셋을 꽃처럼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 가느다란 잎사귀를 장식적으로 그려 넣은 호화롭고 귀족적인 대접으로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되었던 걸작 조선자기였다. 전시 기간이 끝나자 이 대접은 노량진에 있던 창랑의 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도 안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3년간의 전란 끝에 휴전이 성립되고, 국보들의 안전 여부가 확인될 때였다. 창랑의 별장에선 '동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 는 대답이었다. 확인한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청랑의 국보 대접은 그후 '동란 중 소실'로 국보목록에서 자동삭제되었지만, 이렇다할 해명자도 없이 '행방불명' 으로 처리되다가 1962년의 문화재 재지정 때에 와서야 국보 해제가 된 도자기가 또 하나 있다. 역시 한국전쟁 직전의 국보특별전에 나왔던 물건이었다. 당시 소장자는 장아무개였다. 미군정 말기에 수량과 내막을 알 수 없는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법반출시키고 자신도 일본에 건너가 살다가 죽은 골동상인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사람들의 소장품이었던 문화재를 가장 많이 독점해 갖고 있었다는 장아무개는 전에 아가와라는 일본인이 소장했던 지정보물인 고려자기 '철채백화당초문매병' 을 어느새 입수하고 있었다.
국보특별전을 기획하며 과거의 지정문화재들의 행방을 찾던 국립박물관의 관계직원이 그 고려자기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아 다행히 장아무개의 소유가 되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거처를 수소문해보니, 그는 일본에 건너가 있고 물건만 박태식(뒤에 H증권 사장)이란 사림에게 잡혀져 있었다. 박씨는 그때 돈 5백만 환을 장아무개에게 빌려주고 그 담보로 도자기와 불상 등 약 50점의 고미술품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국보 고려자기(해반 후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372호)가 들어 있었다. 박씨는 장아무개의 측의 허락을 받고 그 국보 고려자기를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했고 전시기간이 끝난 후 장아무개 측은 박씨에게 담보로 잡혔던 물건들을 도로 찾아버렸다(박태식의 증언).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보 '철재백화당초문매병' 은 영원히 사라졌다. 장아무개가 다른 물건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시켰다는 유력한 설이 있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협의자는 일본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국보 고려자기의 행방엔 일언반구의 증언도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죽었다. 조국애나 민족의식이라곤 추호도 없던 골동상인이었다. 8.15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부주의로 파괴되었다는 2점의 국보 고려자기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당시 소장자의 해명이 애매하여 '행방불명'으로 여겨져 있고, 또 하나는 조각난 것이 확인되었으나 한국전쟁 후의 처리 여부가 불분명한 채로 세상에서 아주 잊혀져 있다. 해방 직전에 광산왕 최창학이 일본인 소장자 이도로부터 사 가졌던 '청자상감보상화문대접' 과 '보주문합자' 이다. 해방 후 과거의 지정보물을, 소재지나 건재 여부도 정확히 조사함이 없이 국보 명칭으로 모두 재지정할 때 국보 제371호의 번호가 붙여졌던 물건으로서 과거의 소장자가 밝힌 바로는 대접을 3만 원에, 그리고 합자를 2만 원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국보 고려자기 입수 사실은 해방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당국이 확인하고 있지 못했다. 국보 소재지의 변동 신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전후의로 무질서한 사회상이었다. 최창학뿐 아니라 8·15로 인한 국보 유전 시기를 틈타 그것들을 입수해 가졌던 골동상인이나 돈 있는 수집가 가운데 그 사실을 당국에 자진해서 신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보특별전이 기획됐다. 최창학이 과거에 이도가 가졌던 국보 고려자기 2점을 입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장가 사회에서 확인한 국립박물관의 최순우 연구관이 출품을 부탁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해명이었다.
"내가 입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15직전, 시골에 소개돼 갔다가 돌아와서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하여 모두 깨졌다. 그래서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섯 조각이 난 청자대접의 조각을 내보였다. 그러나 합자는 그때 아주 바스러졌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명이었다. 아무리 바스러졌기로서니 물건이 지정된 보물이었는데 뒤에라도 관계당국자나 박물관 전문가에게 확인도 안 시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을까. 확실히 다섯 조각이 났던 대접은 잘 붙여 수리한다면 원형만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들조차 한국전쟁과 소장자의 타계로 영영 증발하고 말았다.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합자와 능히 복원할 수 있었던 깨진 대접 조각들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국보 불상 한 쌍의 수수께끼이다. 동란 직전인 5월에 국보특별전을 끝낸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김원룡·최순우 연구관 일해이 광주 조선대학의 특별초청으로 한국의 고미수에 관한 강연을 하러 내려갔다. 강연 일정을 마친 일행은 광주 일원의 문화재와 유적을 살피게 되었다. 그들은 무승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에 전해 오던 당시 국보 제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 과 제212호의 '금동보살입상' 을 보러 찾아갔다. 그런데, 절에 이르러 주지에게 들으니,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몰이 심하여 작은 국보 불상들은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는 것이었다. 김관장 일행은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국보가 옮겨진 사실과 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서장은 안전한 금고 속에 귀중히 모셔 두었던 두 불상을 내보이며 '부득이한 보호조치' 라고 설명했다. 사실 거기까진 참으로 잘한 국보 보호의 잠정적 대책이었다. 그러나 1933년에 증심사 오층석탑 속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이 두 국보 신라불(높이 15cm내외)은 그때 국립박물관의 김관장 일행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비극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장은 위급한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금고 속의 국보 불상엔 신경을 못 썼고, 그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휴전 후, 서울에서 관계전문가가 현지에 내려가 보았으나 두 국보 불상의 행방을 알거나 증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경찰서장도 여럿이 바뀌고 있었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가져갔던 경찰서자의 변명은 의심하자면 충분히 위문스러웠다. 아무리 정세가 급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아주 귀중하게 금고 속에 모셔 보호하고 있던 작은 국보 불상 2개쯤 살릴수 없이 버리고 떠났을까.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증심사 국보 불상의 행방불명은 어떤 책임 추궁도 없이 기정사실로 돼버렸고, 10년 후의 국보 재지정 때에 가서는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후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지만 강원도 간서의 건봉사는 한국전쟁 전까지는 38선 이북이었다. 이곳에 일제 때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지금니화엄경' 권46과 정호 2년명(고려 고종 1년, 1214)의 '동제은상감향로' 가보존 돼 있었다. 해방후 서류상의 국보 번호 제412와 제419호였다. 이 두 국보도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화엄경은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졌고, 향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서 외금강 신계사의 유물수집소로 이전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전쟁 당시의 주지로부터 들었다는 어떤 증언자의 말을 빌리면, 향로도 한국전쟁 때까지 그대로 건봉사에 보관돼 있었고, 절이 온통 불탈 때 누군가가 밖으로 굴려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얘기인지 이 또한 믿기 어렵다.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76호였던 진주의 유서 깊은 촉석루가 원인 모를 폭탄에 맞아 완저히 불타버린 것은 유엔군이 진주를 점거했던 공산군을 격퇴시킨 지 20일 후인 195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공중에서 느닷없이 낙하해 온 폭탄 하낙 촉석루 지붕 한복판에 직총으로 맞아 작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중했던 2층 누각의 고건축물은 화염속에 사라져 갔다. 돌발적인 참사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당했던 공산군의 박격포탄이었을까?
현재의 건물은 1959년 진주 시민들이 복원한 것으로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진주의 전설적인 명승지인 남강의 절벽 위에 위치하는 촉석루는 역사가 밝혀주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왜장 게다니를 끼고 남강물로 떨어져 죽은 조국의 상징적 명소이다. 진주 시민들은 과거의 국보 건축물을 재현시키는 동시에 논개의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는 명소를 되꾸민 것이다. 촉석루가 불탈 때, 경북 안동에서는 국보 제302호로 지정 보호되던 문묘 대성전에 직격탄이 명중하여 박살이 났다. 이 대성전 건물은 전북 장수의 향교 건물과 함께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문화재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2년 후인 1955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였다. 전남 승주군에 위치하는 명찰인 송광사의 여러 국보 건축물 중 백운당과 청운당이 그동안 절을 점령하고 있던 빨치산들의 방화로 깡그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국보 제404호로 지정돼 있던 건물이었다. 불길은 대웅전에서부터 치솟았다. 이어서 백운당과 청운당으로 번지면서 송광사 경내는 순식간에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산밑 마을로 쫓겨 가있던 3명의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그 엄청난 불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 스님이 마을로 다시 뛰어 내려가서 사람들을 동원시켰을 때는 이미 대웅전과 국보 건물인 백운당.청운당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스님들은 다른 국보 건물인 국사당(현재 국보 제56호)과 하사당(현재 보물 제263호)만은 살릴 수 있었다. 그때 화재를 면한 약사전도 지금도 보물 제302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말엽에 창건된 국내 최대 명찰의 하나인 송광사는 지금도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절로서 유명하다. 빨치산 점령 하의 최악의 수난과 화재 때 국보 건물 두 채와 많은 부속건물을 잃긴 했으나 스님들은 나머지 국보와 기타 유물들을 잘 보호했다. 현재 이 절엔 건물 아닌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로 10점의 국보와 보물이 간직돼 있다. 같은 전남지역인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불타 없어진 것도 한국전쟁 중의 참화였다. 2층 팔작지부에 속속들이 웅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던 조선 초기(추정)의 이 대웅전 건물은 당시 국보 제240호로 지정돼 있었다. 여기서도 국보 건물의 대웅전은 잃었으나 나머지 국보 석탑과 부도 및 탑비엔 큰 피해가 없었다. 곡성군 관음사의 국보 건물이었던 원통전의 경우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에 빨치산들이 불질러 타버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작고한 고건축 전문가 임천은 일제 때(1930년 전후)에 실화로 불탔다고 증언한 적이 있어 확실한 내막을 알수 없으나 해방 후에도 국보 제273호로 지정문화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관음사는 또 국보 제214호의 '금동관세음보살좌상'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원통전이 불탈 때였는지 아니면 한국전쟁 때의 어떤 수난으로였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깨져 국보의 면모를 상실했고, 지금은 목록에서 삭제돼 있다. |
|
|
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불교란 무엇인가
4. 불교의 중국적 변용
중국의 본격적인 불교 수용은 정치적 혼란기이자 사상적 과도기인 위진남북조 시기이다. 인도와 사상적 전통이 매우 다른 중국의 정신적 풍토에 수용된 초기 불교는 그와 유사한 도가 사상이 매개된 이른바 '격의 불교'였다. 이어 수와 당이라는 통일 왕조가 등장하자 초기 불교도 역사 정황에 상응하여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또 위진남북조 시기에서 통일 왕조의 등장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인도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다양한 갈래의 불교 사상이 거의 동시적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요컨대 중국 불교의 독특한 모습을 연출시킨 주요한 요인은 통일 왕조의 등장, 다양한 갈래의 대, 소승 불교를 동시에 수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불교와 중국 전통 사상과의 만남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수용된 중국 불교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형태적으로는 종파 불교이고, 이론적으로는 교판 불교라는 점이다. 물론 인도의 부파 불교나 대승 불교의 여러 계열도 일종의 종파 불교라 할 수 있지만, 중국 불교의 종파적 전개 형태에 나타나는 특성은 인도의 경우처럼 다른 갈래의 불교와 대립적이지 않고 모든 갈래의 불교 사상을 자기 종파의 내부에 유기적으로 통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불교 사상의 갈래를 하나의 구심점에 유기적으로 통일하려는 각 종파의 교판 이론은 비록 비역사적이고 낙관적이기는 하지만, 불교 사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중대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중관 학파와 유식 학파의 이론적 통일이라는 문제 제기와 그 해결 문제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영역이었고, 그것은 결국 교판 이론을 추구했던 중국 불교의 중대한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불교 사상과 중국 전통 사상과의 만남에서 나타난 인도 불교 사상의 중국적 변용이다. 유학과 도가 등 중국 전통 사상에서도 여러 계보가 있지만, 어느 사상을 막론하고 모두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데 중국 사상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더구나 중국의 현실주의는 결국 '천하가 왕토'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제 군주제적 국가관 혹은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따라서 중국적 사유체계에서는 종교적 영역의 배타적 권위와 고유성이 어떤 형태로든 용납되지 않았다. 중국에 수용된 불교도 불교의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한 '현실의 국가'에 어떻게든 적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될 당시의 지배 권력이 그들의 정치 현실을 긍정할 것을 불교에 요구할 때, 불교의 대응 방식은 현실의 권력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개체의 현실적 삶에 대한 문제로 바꾸어 놓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응방식이야말로 중국의 현실주의와 불교 본래의 목적을 다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대표적인 중국 불교가 천태종과 화엄종 그리고 선불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일찍이 중국적 사유 속에 존재하지 못했던 인간 및 세계의 치부를 끈질기게 파헤치는 논리의 치밀함이라든가, 현상계의 저편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세계관이라든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재정립시키려는 정신 분석 등을 통해 중국적 사고에 입체적 깊이를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천태의 '번뇌즉보리' 사상이나 화엄의 '사사무애' 사상, 선불교의 "무명은 본래 없다"는 사상 등에는 철저히 현실에서의 해탈이 강조된다. 고통받는 '지금의 삶' 저편에 있는 해탈을 위해 지난한 수행적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의 저변에는 이미 '현실의 삶'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지금의 삶'을 미래로 흘러가는 객체화된 시간에 맞추어 언제나 그 '지금의 삶'을 파편화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땅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중국적 불교의 과제와 그 해결의 논리는 바로 이 문제에서 흘러나왔다. 즉 객체적 시간선상에 나열해 있는 추상적 삶들을 역전시켜 그것을 실재하는 '지금의 삶' 안으로 회귀시켜 놓고, 바로 이 '지금의 삶'에 들어 있는 중층적 의미를 발견하여 살아가는 것이 해탈이라고 하였다. 특히 선불교는 일체의 이론적 그물을 걷어 내고 한 개체의 실존에서 직각적으로 해탈의 삶을 구현해 내는 실천적 방법을 계발한 점에서 인도 불교의 발전 계통으로 볼 때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에 수용된 인도 불교는 중국 사상사에서 볼 때 가장 심대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공적인 응전으로 결실된 중국 불교는 이후 중국 사상사에 일대 전환을 불러 왔다. 중국은 이질적인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변방의 이민족을 통합하여 자기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었고, 경험적 현실을 기반으로 한 현실 위주의 사유 방식에 입체적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송대 이후로 나타난 신유학이 거시적으로는 세계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려 하는 한편, 인간의 내적 깊이를 세밀히 점검하여 현실적 행위의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사유 방법은 결국 불교를 성공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능력이 전통 유학에 유감없이 발휘된 명백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중국에 수용된 불교가 중국 사상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치밀한 사색과 철학적 태도를 형성시켜 준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행길
본뜻 : 원래는 크다는 뜻을 가진 '한'이라는 고유어와 '길'이 합쳐진 말로, '큰 길'이라는 뜻이다.
바뀐 뜻 : '한길'은 음운 변화를 거쳐 '행길'로 소리가 굳어졌다 또한, 큰길에 도로가 놓이게 되고 차와 사람이 많이 다니게 되면서 단순히 큰길을 가리키던 뜻도 '사람과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보기글"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행길에는 아예 나가 놀지 말거라 -할머니, 행길에 나가실 땐 차조심 하시구요, 꼭 횡단보도로 건너셔야 해요
허풍선이
본뜻 : '허풍선'은 본래 숯불을 피우기 위해 풀무질을 하던 손풀무의 일종인데, 아코디언처럼 생긴 풀무의 손잡이를 잡고, 폈다 오무렸다 하여 바람을 내는 기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옆에 달린 바람 주머니가 크게 부풀어 오르는데, 크게 부풀어 올랐던 바람 주머니가 곧 가라앉아 훌쭉해진다.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의 말도 '허풍선'이라는 풀무처럼 금방 훌쭉해져서 처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허풍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허풍선이'는 '허풍선'이라는 기존 명사에 사람을 가리키는 접미사 '이'가 붙어서 과장이 심하고 허풍을 떠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실속없이 지키지도 못할 허풍만 떨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앝잡아 이르는 말이다.흔히 '허풍쟁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보기글"
-그 사람 알고 봤더니 참 대단히 허풍선이더라구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딱 반만 믿으면되겠던 데요 -그 사람 나이가 들어서 이제 좀 철이 났다 했더니 그 허풍선이 기질은 여전하더구만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
한 나라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의 영토를 확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신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국민적 자각이다. 독일의 경우도 그 예외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은 유럽 국가 가운데 뒤늦게 통일을 이룩한 나라이다. 그것도 철혈재상이라는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책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그렇지만 독일이 뒤늦게나마 통일을 이루게 된 데에는 독일인들이 통일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국민으로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독일 국민들이 하나인 민족으로 자각하기 시작하고 통일준비를 하게 된 것은, 기묘하게도 나폴레옹에게 당한 패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은 존재였지만, 그와의 전쟁을 통해서 독일인들은 중세 이래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근대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싸워 패배함으로써 중세 이래 내려오던 신성로마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게다가 1806년 예나에서 독일 북쪽 지역을 지배하던 프로이센이 다시 나폴레옹군에 대패함으로써 독일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패배한 프로이센은 틸지트조약을 맺었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얻은 땅을 다시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병력도 제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굴욕감이 독일인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프랑스군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를 여러 번 되씹었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의 근대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프로이센이 근대적인 여러 개혁을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독일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림 형제가 유명한 동화집을 펴내 독일어를 연구함으로써 독일어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서 독일인들의 민족정신을 각성시켰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2)와 쉴라이에르마허였다. 베를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유명한 연설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재능있는 달변가인 피히테는 원래 예나대학의 교수였으나, 무신론 논쟁으로 인해 베를린대학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으로 옮긴 피히테는 여러 강연을 통해 그의 명성을 떨쳤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유럽 외교를 좌우했던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도 그의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점령하에 있던 베를린에서 그는 1807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프로이센의 애국심과 도덕성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어떤 혈통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독일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어 도덕적 부흥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피히테는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더없는 환호를 표시했다. 그러나 황제의 제관을 쓴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 것을 보고, 그는 나폴레옹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을 오히려 더럽히고 있으며 역사상 모든 악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관리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결연히 나폴레옹에 대해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하여 "그의 정신에 도덕적 의무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인류의 구원자이자 해방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신의 손에 쥐어진 채찍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앞의 제물인 양 우리의 벌거벗은 등을 채찍 앞에 드러내 놓고 핏자국이 맺힌 채 '주여! 주여!'하며 구원을 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채찍을 꺾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피히테의 호소는 독일 국민의 봉건적 해방과 프로이센의 강대화에 큰 영향을 했다. 물론 그의 사상에는 절대강자를 강조하는 독일적인 국가주의 사상의 싹이 느껴지고, 그것이 오래지 않아 독일 통일과 나치즘을 이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
|
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전통은 반드시 깨진다.
현재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 않으며, 능력의 한계까지 쏟아 붓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과연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사회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그 능력에 알맞은 인간으로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여자의 큰 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가 무엇을 바르는지 알지 못하며, 단지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에게 반해 있는 동안마저도 그녀는 따분하고 귀찮은 존재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곤란은 한가지였다.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전통, 그 전통에 남자와 여자 모두가 구속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전통이야말로 죄인이다. 그러면 전통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해답은 하나, 그것을 버리는 일이다. 죽어있는 것은 반드시 깨진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지성이 있는 사람들이 시작해야 할 임무이다. 무지한 자는 완전을 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전통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지성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바로 학교이다. 학교는 무엇이나 새롭게 일을 시작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처럼 남자 학생은 산업계나 과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며, 여자 학생은 특별히 이렇다 할 전문성도 없는 교육을 받는 대신에, 고등학교나 대학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교육의 주된 목적으로 하자고 제안해 보자. 이것은 조금도 비현실적이라거나 공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참다운 교육을 하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와 이해야말로 차분하고 현명한 사외의 기초이므로 남자와 여자를 일부러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교육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교육의 전환을 위해서는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합니까?" 하고 외치는 열성 있는 교사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교사는 일정한 프로그램이 없으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며, 또 프로그램을 믿고 있지도 않으므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세울 기초를 제안하는 것뿐이다. 첫째, 남자와 여자는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는 첫 날부터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최후의 시간까지 함께 학교에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연령별로 학교를 구분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가 가장 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생물학적인 연령일 때에는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 6세의 여자아이는 생물학의 연령에서 보면 7세의 사내아이와 똑같다. 15세의 소녀는 17,8 세의 소년과 맞먹는데, 지금처럼 학급별로 구분을 해 버리면 남자와 여자는 상호간에 상처를 주는 셈이 된다. 남자아이는 현재의 학급제도에서는 언제나 여자아이 쪽이 우수한 것처럼 보이므로 상대에 대해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또한 15세의 충동을 일으킨 소녀가 본능적인 관심을 15세의 소년에게 던졌을 때, 소년 쪽은 생물학적으로 소녀를 받아들일 만큼 발달해 있지 않으므로 소녀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반발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왜지 자신의 무능함이 분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들일 만큼 발달해 있지 않으므로 소녀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반발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왠지 자신의 무능함이 분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소년의 마음에 깊이 박힌 적개심이 머리를 든다. 이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의 우월성을 힘을 다해 과시하려 하고, 그것을 오랫동안 지속하려고 한들 누가 책할 수 있겠는가? 생물학적인 나이를 서로 어울리게 하는 것은 유치원 시절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정식 학교교육이 시작된 최초의 날부터 최후의 날까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모든 기술적인 면을 포함한 지식의 전체는 한치도 틀림없이 똑같게 남녀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정이나 육아, 그 밖의 무엇이건 여자의 영역이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는 것 또한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가정에 대한 일도, 가정 밖의 일고 같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을 다시 되찾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협동하며 일하는 장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에필로그
옛 사람들이 삶의 지표로 삼았던 성리학의 본분은 지행이었다. 배워서 익힌 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선조와 같은 봉건전제시대에서도 말과 행동이 다른 판서나 정승보다 아는 바를 가지런히 실행하였던 중인, 천민들을 백의 정승이라고 칭송하면서 더 존경하였다. 지행하기를 가르치는 스승이 많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정작 지행을 수범해 보이는 스승을 만나기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 그런 연유로 나는 채찍으로 읽는 '역사'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지행하는 어려움을 애써 배우고 있다. 역사를 적은 전적을 세세히 읽게 되면 지행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가르친 선현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가 있기에 지행에서 얻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아울러 알게 되는, 이른바 삶의 규범을 터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의 사수를 앞장서서 주도하였던 학봉 김성일의 경구는 진실로 음미해 볼만하다.
나의 평생에 한 마디의 말을 체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허물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스승이요, 나의 좋은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해적이라는 그 말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그리 지행할 것을 다짐하게 되고, 또 이미 지행한 바 있는 학봉 김성일의 인품에 감동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아첨하는 말에 현혹되고, 직언하는 사람을 원수같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 또한 사람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배워서 익힌 바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된다. 현실의 삶이나 인품을 경계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지행'해야 될 말은 얼마든지 있다. 학문을 하는 자는 오직 정성을 다하는 것과 오래 계속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요, 오래 계속하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조선조 최초의 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체험적인 고백이자 충고지만, 이 말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삶의 지표로 삼아서 지행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역사는 이미 있었던 지난날의 일을 적어서 앞날의 일을 예견하는 것이기에 배워서 익힐 만한 체험적인 가르침의 보고가 아닐 수 없으며, 또 지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세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소홀히 하고서는 국가도 개인도 온전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역사를 살피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다. 대개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전 시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자취를 살펴보려면 오로지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한다. 얼마나 기막힌 말인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혼돈의 해결책이 오직 역사를 살펴보는데 있음을 알려주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 세종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열어 가는 첩경이고도 남는다.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수천 년의 역사가 이토록 온전하게 흐를 수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는 한때의 잘못이 가장 온당했던 것으로 적힌 곳도 있지만, 그 잘못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 웅징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나는 또 '역사'를 채찍으로 읽으면서 평생의 규범으로 삼아 왔다. 그것은 스승의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연표)
1. 태조(1392--98) 2. 정종(1398--1400) 3. 태종(1400--1418) 4. 세종(1418--1450) 5. 문종(1450--52) 6. 단종(1452--55) 7. 세조(1455--68) 덕종 8. 예종(1468--69) 9. 성종(1469--94) 10. 연산군(1494--1506) 11. 중종(1506--44) 12. 인종(1544--45) 13. 명종(1545--67) 덕흥대원군 14. 선조(1567--1608) 원종 15. 광혜군(1608--23) 16. 인조(1623--49) 17. 효종(1649--59) 18. 현종(1659--74) 19. 숙종(1674--1720) 20. 경종(1720--24) 21. 영조(1724--76) 장조, 은언군, 전계대원군 22. 정조(1776--1800) 23. 순조(1800--34) 익종 24. 현종(1834--49) 은신군, 남영군, 흥선대원군 25. 철종(1849--63) 26. 고종(1863--1907) 27. 순종(1907--10) 강, 은
* 점역자 설명: 위 계보에서 연보가 없는 왕들은 왕세자 혹은 부원군 등이며, 왕과 더불어 실정을 한 경우 입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물고기
희랍어로 Ichthus (이크투스)라고 하며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크리스트' (Iesous christos. theonhyos, soter) 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물고기는 종종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런 어부'는 로마 교황을, '어부의 반지'라고 하면 교황이 끼는 반지를 가리킨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