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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4 호
단기 4340. 4. 1 (음력 02.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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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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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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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독신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다. 독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 / 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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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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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大道甚夷, 而民好徑,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謂道과, 非道也哉.
사아개연유지, 행어대도, 유시시외, 대도심이, 이민호경, 조심제, 전심무, 창심허, 복문채, 대리검, 염음식, 재화유여, 시위도과, 비도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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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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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셋째 장
직역
나에게 잠깐 동안 지혜가 생겨서, 대도를 행하하고 한다면 늦출까 그것이 두렵다. 큰 도는 대단히 평탄한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조정이 매우 깨끗할 때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가 텅 비어있다. 복장이 아름답고, 허리에 날카로운 칼을 두르고, 실컷 먹고 마시고, 재화에 남음이 있다. 이들을 일컬어 도적이라 한다. 도가 아니다.
해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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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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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만약 나에게 조그마한 지혜라도 있어서 위대한 도를 행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오로지 작위 함이 있을까 두려워 할 것이다. 위대한 도는 매우 평탄한데도 백성들은 지름길을 좋아한다. 궁궐은 깨끗한데 백성들의 논밭에는 풀이 무성하고, 창고는 비어 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오색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차며, 맛있는 음식도 싫증을 내며, 재물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도둑의 사치이지 도가 아닌 것이다.
주
개연: 조그마한, 미세한. 시: 인위, 작위를 뜻함. 시를 이의 차자로 보고 바르지 못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뜻으로 새겨 사의 동의어로 해석하는 이도 많음. 외: 두려워하다, 떨다, 무서워하다. 이: 평탄하다의 뜻임. 경: 지름길. 조심제: 궁궐은 매우 깨끗한데 단장되어 있다는 뜻임. 조는 궁궐을 뜻하며, 제는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다는 뜻임. 백성들의 논밭은 풀이 무성하다는 뜻의 전심무와 상대되는 말이므로 지배계급의 이기주의적 사치에 대한 비난임. 도과: 도둑의 사치, 위정자의 가렴주구를 통렬히 비난한 말임.
해
나에게 큰 도를 행할 만한 지혜가 있다면, 작위 함이 있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무위자연의 도는 안전하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사악하고 신속한 지름길만을 가고자 한다. 작위 함은 백성들로 하여금 무위자연의 도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속임수와 착취로써 백성을 대한다면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백성들의 논밭은 전쟁과 부역으로 풀만이 무성한데 지배계급은 호화로운 궁궐에서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고 고급 요리에도 싫증을 낼 정도의 사치를 부리고 있으니, 이것은 남의 재물을 약탈하여 잘사는 도둑의 소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도와는 거리가 먼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노자는 이 장에서 지배계급의 가렴주구에 대하여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는 사회 밑바닥의 서민의 입장에서 당시 사회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에 의한 사치와 횡포에 대한 규탄은 맹자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에 다른 점이 있습니까?"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정치를 잘못하여 죽이는 것에 다른 점이 있습니까?"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면 임금의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얼굴에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 가지 고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은 미워하거늘 하물며 나라의 정치가 짐승을 몰아 가지 고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일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는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노자와 맹자는 모두 춘추 전국의 난세에 태어나 위정자의 횡포한 정치와 부조리한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철인이었다. 다만 맹자의 경우는 그 치유책으로 인의에 의한 왕도 정치를 주장한 데 반하여, 노자의 경우는 무위 이치를 처방전으로 제시하였음은 두 현인의 세계와 인생을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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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3장 서양인의 수집
간송 전형필과 존 개스비 컬렉션
1914년을 전후해서 일본 도쿄에 와서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존 개스비, 당시 25세의 청년이었다. 도쿄에 정착한 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그는 거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골동상에서 희한하게 아름다운 꽃병 하나를 발견했다. 값을 물으니 500원, 당시 시세로는 호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개스비는 꼭 그것을 입수하고 싶었고, 결국 사고야 말았다. 본시 귀족 가문의 미술품 애호가였던 그는 예리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대 그가 처음으로 산 것은 일본 도자기로 '나베시마 핵회화훼문병' 이었는데, 뒷날 일본의 중요미술품(보물급)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제대로 본 명품이었다. 그는 곧 고려자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서 거기에 완전히 미쳤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섹계의 어느 나라의 도자기보다도 훌륭하다"고 개스비는 감동했다. 이후 그는 서양인으로서 고려자기의 최대의 안목 있는 수집가로 군림하게 되었는데,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안에서의 수집은 물론, 여차하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골동상을 순례하면서 걸작과 일품을 사 모았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1930년대 초기의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맞기에 바쁜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개스비가 도쿄에서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달려왔다. 알고 보니 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입수하고 싶다고 서울의 골동상에게 말해놓았던 일본인 고관 수장의 걸작인 고려시대의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과 '백자박산향로' 를 어떤 가격으로라도 사버릴 작정으로 돈을 준비해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와 거래를 하고 있던 골동상은 때가 공교롭게도 섣달 그믐날이어서 난처했지만 개스비의 결의가 하도 비장한 바람에 실례를 무릅쓰고 소장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본인 교관을 움직였던 것인지 개스비는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정월 초하룻날 아침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원했던 두 점의 고려자기를 손에 넣고 도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집념의 성공이었다. 그때 개스비가 서울의 일본인에게서 거액으로 양도해 간 2점의 고려자기는 그의 다른 고려자기 컬렉션과 함께 몇 해 후에 가서 서울의 민족적인 문화재 수집·보호자였던 간송 전형필이 몽땅 인수히게 되지만 보통 진품이 아니었다. 간송이 그것을 인수하자 총독부에선 곧 보물로 지정했었다. 현재는 이 '청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이 국보 제66호, '백자박산향로' 가 보물 제238호로 지정돼 있다. 간송은 1957년에 존 개스비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고도자, 특히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수집한 사람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대개는 그 수집품이 양이 많은 반면 질이 떨어지고, 질이 우수하면 양이 많지 못하였다. 또 처음에는 수집열이 대단하였으나 몇 해 지나는 동안에 차차 식어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 영국인 존 개스비 씨는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방대한 수량의 최우수 작품만을 모아놓았으니 당시 고려자기 수집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내외에 떨쳤던 것이다. …오랜 시일을 두고 투철한 감상안과 열성 있는 수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은 당시의 고미술 수집가, 특히 도자기 수집가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간혹 수집가와 골동상들이 모여서 한담을 할 때면, '개인으로 그의 수집품만큼 우수한 고려자기르 가진 사람은 없을 것' 이라느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그만큼 거대한 수집을 한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 라느니 하는 것이었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고미술 수집여화) )
1930년대에 중엽에 이르러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그처럼 유명했고 또 그 내용은 어떤 수집가의 컬렉션보다도 높이 평가됐다. 따라서 그의 집을 출입하는 골동상이 도쿄·서울·부산 등지에 여러 명 있었다. 간송도 한창 수집을 하던 때라 역시 그들과 접촉이 있었다. 간송은 그들에게 "만약 개스비가 그의 고려자기들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해 달라" 고 넌즈시 부탁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정보는 없었다. 간송 정형필은 존 개스비가 언젠가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모두 내 놓아 처분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때엔 일본 사람이나 기타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안도록 즉각 손을 써서 인수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민족적 사명이었다. 과연 간소의 예측은 적중했다. 1937년 2월의 일이었다 . 개스비와 가까이 접촉하고 있던 도쿄의 한 골동상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는데, "개스비가 고려자기들을 처분하려고 한다" 는 것이었다. 몹시 고대하던 정보였다. 그러나 편지 내용만으로는 미진한 점이 많았다. "처분한다면 전부냐, 일부냐?" 간송은 그 점을 확실하게 확인해 달라고 도쿄의 정보 제공자에게 지급으로 독촉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정확한 회신이 날아왔다. "처분결정은 확실하며,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한다. 중간 알선은 나 한 사람만이 위임받았다. 일단 전보를 칠 터이니, 그때에 지체없이 도쿄로 와 달라." 며칠도 안돼서 기다렸던 전보가 오고, 간송은 그 즉시 도쿄로 출발했다.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국수적인 반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신과 정부 고위층을 기습, 잔혹한 살상을 감행한 저 유명한 2·26사건의 꼭 1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도쿄 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골동상이 마중나와 있었다. 급히 여관으로 직행한 간송은 비로소 개스비가 왜 그의 소중한 컬렉션을 전부 처분하려 하고 있는지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년 전 바로 오늘 발생한 2·26사건을 보고 개스비 씨는 즉각적으로 일본이 멀지 않아 미·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급히 중요한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골동상의 말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변화였다. 사실 2·26사건 이후 일본에선 군부의 정치 지배력이 무섭게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스비가 예측했던 그대로 몇 달 후 먼저 중일전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간송은 중간 골동상의 안내를 받으며 도쿄 고지마치에 호화저택을 갖고 있던 존 개스비를 방문했다. 그때의 인상과 개스비에게서의 극적인 고려자기 인수의 감회를 간송은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밝은 아침 햇볕이 유리창으로 따뜻이 비치는 2층 응접실에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푸른 비취빛이 줄줄 흐르는 향로, 매병과 알토란같이 모아놓은 향합·유호를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단정한 옷차림을 한 주인 개스비 씨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빈틈없는 정장을 한 집사가 엄숙히 시립하고 있었다. 알선인이 '어제 서울에서 오신 전선생이십니다' 하고 소개를 하니,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아아, 그러세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하며 반가워하였다. 그날 저녁에 비로소 들으니, 알선인은 그때까지 매수인이 누구인 것을 밝히지 않고,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그도 알선인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터이므로 어련하겠느냐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도쿄나 오사카의 저명한 수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뜻밖에 한국 청년(당시 간송은 31세였다)이 나타나서 의외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도 전부터 한국의 고미술품 수집가로서의 나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항상 한국의 그 훌륭한 고미술품들이 한일합방 이후 수십 년 동안을 통째로 일본인 손아귀 속에서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 수집가가 차차 생겨서 열심히 수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 대에 내가 나타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 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그때 간송이 지금 돈으로 치면 아마 수억 원대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거액의 사재를 아낌없이 지불하고 존 개스비의 알짜 고려자기 컬렉션을 몽땅 인수하여 국내에 되가져 온 용단은 보통 위대하고 용기 있는 민족의식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개스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만일 간송이 평소 예의 주목하고 있다가 즉각 달려가지 않았던들 그것은 일본 안의 재벌 수집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컬렉션이었다. 또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 고려자기를 그때 영영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국보 '청자상감연로원앙문정병' 과 보물 '백자박산향로' 외에도 그때 도쿄의 영국인 개스비에게서 극적으로 인수, 국내로 되가져다가 보호한 고려자기 가운데 현재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는데,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청자오리형수적'(국보 제74호) 등이 그것이다. 보물 제241호의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도 그때 개스비의 컬렉션에 들어 있었던 물건인 것 같다.
그렇듯 국보급이 5∼6점이나 포함돼 있던 개스비의 컬렉션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사오기 위해 간송은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있던 공주지방의 농장을 급히 처분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개스비는 전쟁이 임박하고 있는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컬렉션을 내놓게 되었으나 근 30년간 최대의 사랑과 안목으로 수집하였던 한국의 도자기들과의 석별을 아쉬워하면서 고려청자의 '양각모란문잔' 하나와 '향합' 하나를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짐(인수한 고려자기)을 싸는 동안 그는 나를 오랜 친구와 같이 친절해 대접해주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아무쪼록 그 훌륭한 귀국의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 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의 서재나 응접실을 보아도 송청자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조선백자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귀하는 구주나 일본의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고려자가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매우 떨어지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다.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구말구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존 개스비 씨 이야기), 1957년)
존 개스비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간송에게 모두 도로 내준 후에도 한 1년 동안 도쿄에 머물러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서울로 운반된 개스비의 컬렉션은 1936년 간송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 생명의 보존처로서 세운 성북동 숲속의 보화각(간송미술관)에 들어간 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호되고 있다. 간송은 또 생전에 그 도자기들을 매만질 적마다 개스비를 생각하곤 했다. (존 개스비 씨 이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맺고 있다.
"그가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면 때때로 고려자기를 생각할 것아다. 만일 그가 아직 생존해 있어서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다행히 전화를 면한 그의 애장했던 고려자기를 보여주고 싶다. 말없는 자기들도 뜻이 있으면 반겨하리라."
고려자기를 매체로 한 한국의 간송과 영국인 개스비의 이 일화는 과거 일제 밑에서 도굴과 불법적인 독점만 일삼던 부지기수의 일본인 수집가들을 상기할 때 정말 고려자기처럼 깊고 파란 빛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정당한 입장에서 서로 팔고 산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 수집가와의 사이엔 그런 우정도 있는 일화가 하나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은 적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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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실학이란 무엇인가
3. 실학의 전개와 내용
전통적으로 실학이라는 용어는 '실사구시지학'의 준말로 이해되어 왔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동한의 반고가 "한서"에서 서한 경제의 아들인 유덕의 학문 태도를 칭찬하며, "학문을 닦는 데 옛것을 좋아했으며, 실사에서 옳음을 구했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유덕이 허와 무를 숭상하는 황로학과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배척하고, 수신, 제가, 치국의 도와 예약형정의 법을 숭상하였다는 의미이다. 결국 실사구시라는 말은 학문의 방법과 내용 및 지향을 담고 있는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유학의 방법과 내용 및 지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실사구시의 학문을 의미하는 실학은 본래부터 유학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실학'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은 주자학이 확립되면서부터이다. 당대의 한유는 당시 사회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전통 유학의 쇠퇴에서 찾고, 노장학과 불교를 비판하면서 유학의 도통론을 제기하였다. 성리학은 바로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이른바 신유학이었다. 성리학자들은 유학을 갱신하여 성리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학문을 노장학과 불교는 한 마디로 '무군무부지학'이라 지칭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노장학은 문명으로부터 초탈하여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는 일체의 인간사를 실체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각각 허와 무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반면에 유학은 각종의 문물과 제도, 그 중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는 도덕과 윤리를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허와 무에 대비되는 유학의 실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학'의 용례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았다. 성리학은 노장학 및 불교와의 차별성뿐만 아니라 종래의 유학 전통과도 일정한 차별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당 시대의 유학은 경학의 한 방법론인 훈고학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훈고학은 자구 하나하나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장구지학으로도 불렸고, 주석을 붙여 해설하는 이외에 그것의 암송을 중요한 방법으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기송학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것은 도의 본의를 벗어나 문자의 수사를 중시하는 사장학이나, 학문을 입신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과거지학 등과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이러한 학문들이 모두 경전을 통하여 도덕을 체득하고 그것을 사회에 실현한다는 유학 본래의 취지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노장학이나 불교와 같은 이단만이 아니라 훈고학, 사장학, 과거지학 등도 허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주자학자들이 사용한 실학이라는 개념은 주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이를 비롯한 몇몇 주자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실학이 도덕학의 범위를 넘어 경세학의 함의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다지 명확하지도 않았고 일반적이지도 않았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17세기를 경과하고 18세기에 이르면서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실학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박지원의 실학론이다. 그는 사농공상 사민의 역할과 관계를 새로이 규정하는 과정에서 실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그에 따르자면 사의 학문적 대상은 농, 공, 상업의 이치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농, 공, 상인은 사의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발판으로 각각의 업을 성취할 수 있는데, 농, 공, 상인이 업을 잃는다면 그것은 사에게 실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에게서 실학이란 농, 공, 상업 등 생산과 유통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의 이 언급이 조선 후기 실학의 모든 영역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산업의 분야와 더불어 실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에는 자연 과학을 더 꼽을 수 있다. 그 대표자 중의 하나가 바로 홍대용이다. 그는 비록 스스로 실학이라는 용어를 자연 과학에 한정하여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실학'을 지향했던 그의 학문에서 자연 과학 분야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특히 천문학은 그에게서 사상적 전환의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실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실학의 중심 내용은 자연 과학과 생산 및 유통의 문제였다. 그들 역시 유학자인 점에서 결코 윤리 도덕의 문제를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문제의 중심으로 설정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번잡한 이론을 세우는 데 매진하지는 않았다. 이 점이 바로 그들을 주자학자들과 구별하게 하는 요소이고, 그들의 학문만을 특별히 실학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들의 실학, 즉 조선 후기 실학이야말로 '실학'이라 칭하는 데 손색이 없는 것으로, 그것은 당대의 역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역사적 평가의 차원을 넘어, 낡은 전통에 대한 비판 작업의 훌륭한 모범으로서 끊임없이 되새겨질 필요가 있다. 근래에 중국의 모택동은 실학의 실사구시 원칙을 새로이 해석하여 자신의 사상적 지침의 하나로 삼은 바 있다. 그는 '실사'가 인식 주관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모든 객관 존재를 의미하고, '시'는 객관 사물의 내부적 연관, 즉 법칙성을 의미하며, '구'는 사람들의 탐구 행위를 의미한다고 풀이하였다. 이렇게 보자면 실사구시란 객관적 존재로부터 그 법칙성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결국 인식 주관의 상상이나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인식, 그리고 종래의 낡은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적 지침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실사구시는 결코 이론 일반의 배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 사상은 세계에 대한 추상을 기본으로 하고, 추상은 곧 이론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조선 후기 실학이 주자학과 비교하여 이론적 포괄성이나 치밀성이 약했던 것은, 그것이 충분히 무르익고 체계화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지, 이론 자체를 경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실학은 다만 리기론이나 예학이 가지는 비실용적이고 비객관적인 측면, 즉 공리공담만을 배척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실사구시는 주관적인 억측이나 낡은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에 관한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이론을 확립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새로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역사학회 편, "실학연구입문" (일조각, 1973) 유사순,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열음사, 1987)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청년사, 1989) 정성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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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본뜻 : 흔히 하루만 사는 날벌레로 알고 있는 하루살이의 실제 수명은 여러 날이며, 유충 상태에서는 수년간 물 속에서 살므로 이름처럼 생명이 짧지 않다.
바뀐 뜻 : 저녁 무렵에 떼지어 날아다니는 날벌레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흔히 생활이나 목숨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보기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이리 붙고 저리 붙어서 먹고 사는 하루살이 인생을 언제나 마감할래? -전쟁이 일어나면 그땐 누구나 하루살이 목숨이지 뭐
하염없다
본뜻 : 동사 '하다'의 명사형인 '하욤'이 변해서 된 말이 '하염'이다 그러므로 본래는 '하는것이 없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시름에 싸여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나 끝맺는 데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보기글" -마루 끝에 나와 앉은 옥이는 하염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고향에 계신 엄마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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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는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성서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을 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에게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끔찍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콩도르세나 고드윈과 같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이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콩도르세는 "인류가 도덕적 정신으로 발전하려면 우선 사회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여 한다."고 주장했다. 고드윈은 더 나아가 사유재산과 사회계급을 철폐하여 사회경제적 평등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예언은 멜서스 목사의 설교에 의해 잘못된 예언으로 부정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된 멜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는 '고드윈과 콩도르세 등의 저술과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개선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이라는 부재를 단저서 "인구론"을 써서,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먼저 빈곤이란 불가피한 운명이니 오직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설교를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회란 언제나 빈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어서, 가난한 사람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노력은 항상 허사가 된다. 왜냐하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을 추방하려는 시도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했다. 가령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비심을 베푼다면, 이들은 더 많은 자녀를 양육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그러나 식량의 증가는 이에 못 미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인구가 감소될 것이다. 그 결과 생활수준은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는 인구억제가 필요악임을 주장했다. 불임이나 산아제한 또는 성욕의 절제에 따르는 출생률의 감소는 더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런 방식은 그 실효성이 의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인구억제 방식은 그 사망률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죽음을 가져오는 자연적인 작용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기근이라는 무서운 형태의 재난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위해 다른 형태의 파멸을 부지런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빈민에게 청결함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더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더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러한 말을 한 멜서스 답지 않게, 그는 실제 매우 온화했다고 전해진다. 맬서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됐지만, "인구론"으로 인해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경제학 교수로도 활약했다.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가 아니라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으므로, 맬서스가 영국 최초의 정식 경제학 교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가난은 신의 섭리가 아니었다. 맬서스의 우려와는 달리, 그동안 인구는 증가했지만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도 않았고, 또 식량문제도 분배가 문제이지 절대적인 양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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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사화산을 지나며
아벨라르. 일본에 가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배어 있는 생활문화의 수준을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문화권에 속해 있고, 매우 가까운 지리적 조건 속에서 우리와 얽힌 역사의 매듭들을 아직 다 풀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흔히 그 경제수준으로 전후의 강대국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나라의 뒷골목 작은 찻집이나 여관을 눈여겨 본 사람은 어떻게 일본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명이 서민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스며 있어 빈부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고, 겉치례보다는 실리와 편리를 추구하고 있는 그들의 강한 생활관을 잠시 동안의 여행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줄곧 함께 여행을 했던 C 여사와 함께 하코네 관광을 하기 위하여 떠난 길에 잠시 오다와라의 작은 여관에서 묵었습니다. 일본식 가옥의 작은 여관에서 우리는 정갈하고 섬세한 노부인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마치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깨끗이 손질된 이부자리, 다림질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깨끗하게 세탁된 자리옷, 그리고 아침 식탁 위의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음식 등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던, 그 작은 여관의 하룻밤은, 내게 보여 준 가장 전형적인 일본의 인상이었습니다. 조금 습기가 배어 있는 듯한 밤 공기와 사방이 나무와 종이로 되어있는 벽, 작고 아늑한 방의 그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한 가정의 분위기를 충분히 풍겨 주어, 우리는 여행의 무거운 피로와 조금 들뜬 기분을 충분히 풀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편안하고 아늑한 것이지요. 함께 있으면서 서로 편안하게, 다른 잡다한 일들을 잊고 있는 사이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따뜻하게 감싸면서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뜨겁지도 무료하지도 않은 평화로운 분위기- 이런 것이 가정일 테지요.
아벨라르. 나는 마치 오래 동경해 오던 가정을 찾은 듯했던 그 여관의 은은하고 정결한 분위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하코네 관광을 하면서 보고 느낀 아름다움은 여느 여행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로프웨이(ropeway)를 타고 지났던 사화산의 풍경은 매우 이채로왔습니다. 일본은 자주 지진이 일어나는 나라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곳곳에서 사화산의 누우런 유황 연기가 뭉긋거리면서 올라오고 로프웨이를 타고 가는 우리의 코에도 유황냄새가 짙게 스며 왔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위협, 노여움처럼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나는 내 속에서 타고 있는, 겉으로는 내보일 수 없는 억제된 감점의 불길을 보는 듯했습니다. "사랑은 가슴 속에 숨겨 둘 수 없는 불덩이다. 모든 것이 나타나고야 만다. 그리고 이 불덩이는 불완전하게 덮으면 불길은 더욱 강해질 뿐이다"라고 한,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1639-1699, 프랑스)의 말을 떠 올리면서, 언제까지라도 불완전연소를 할 수밖에 없고, 그 연소를 불완전하게 덮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열렬하게 희구하는 내 사랑의 노여움이 사화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유황연기처럼 가슴의 밑바닥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사화산의 연기는 그것이 아름다운 경치라기 보다는 깊이 내 가슴 속에 스며들어 마치 연기와 같은 내 사랑을 자책하고 한탄하게 했습니다.
가슴 속 불길 칭칭 붕대 감아 눌러 놓고 침묵의 자물쇠 굳게 잠그고 몇 줄기의 연기 낮게 띄어 올리면서 살아 있음. 친구여 우리는 알지 겨울 강 풀리고 얼음 벽 쩍 갈라지며 드러눕는 날 죽었던 얼굴 밀어내고 일어서서 세상에 떠도는 유황냄새에 확- 불 당기며 솟아오를 불기둥, 친구여 가라앉히고 있는 속쓰림 고이고 고여 물로 풀릴 날 있을까.
사방에 대못 박고 앉은 사화산을 지나면 우리의 가슴 속 녹슬고 있는 작은 벨이 떨면서 울고 있는 것을 알지.
-강계순 <사화산>을 지나며
아벨라르. 우리의 사랑이 물처럼 풀려 어우러질 날이 있을까요? 세상의 온갖 것에 불지르고 타올라 본래의 모습, 본래의 뜨거움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 날이 올 수 있을까요? 가슴 속에 고여 있는 불기둥은 사화산처럼 안으로만 타 들어가서 영영 터져 오를 수 없이 연기로만 떠오르고 말 것인가요? 내 속의 화산은 언제나 꿈틀거리면서 터져날 것 같은 긴장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늘 위험하고 불안하여 움츠리고 있는 내 속의 불길은 무엇으로 덮어도 그 타는 냄새가 온 세상에 번져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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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명성황후 시해, 그 '여우사냥'의 비밀
*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되도록 빨리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지만 미처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 반대쪽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역사는 준엄한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 경험하였다. 졸저: "양식과 오만"에서
불행한 출발
조선조는 태조 이성계에서 순종까지 27명의 임금이 5백 19년간 조선반도를 통치하는 것으로 파란 많았던 왕조의 막을 내리지만, 여기에 다섯 사람의 추존 임금이 추가 되어 형식적으로는 32명의 임금이 있었다. 추존 임금이란 왕위에 오른 아드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님을 높여서 왕위에 올려 모신 경우를 말한다. 성종의 아버님이었던 덕종, 인조의 아버님인 원종, 영조의 아드님이었던 진종, 장조, 그리고 순조의 아드님이었던 문조의 다섯 분이 추존 임금이다. 여기서 유념해 둘 점은 추존 임금에게는 '몇 대'라는 순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세계는 27대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전의 경우는 다르다. 중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 데서 중전을 곤전이라고도 부르지만, 임금이 27명이 있었다 하여 중전도 27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전이 세상을 떠나면, 곤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 하여 새 중전을 맞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양가의 규수를 간택하는 경우도 있고, 후궁 중에서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맞아들인 중전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경우는 중전의 수가 임금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43명이었고, 여기에는 폐비가 되었던 성종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와 숙종비 장옥정(장희빈)은 포함되지 않는다. 왕권이 확립된 봉건전제시대의 중전은 국모의 예우를 받는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위세가 막강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당사자의 성품이 온유하고 강경함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교차가 클 것이지만, 우리에게 민비라고 불리는 명성황후의 생애처럼 파란과 불행으로 점철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불행은 간택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전으로 간택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명문거가의 출신이어야 하고, 사가의 부모가 후덕하고 덕망이 있어야 하며, 형제자매들의 우애가 돈독해야 함, 당사자의 행실이 가지런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경우는 처음부터 이에 반대되는 조건이 간택의 사유가 된 것이었다. 장김(안동 김씨)에 의해 저질러진 60년 세도에 치를 떨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또다시 외척의 발호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처음부터 가세가 빈한한 집안의 규수를 중전으로 간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명성황후가 부대부인 민씨의 척분이라면 관향이 여흥, 흠잡을 곳이 없는 명문이다. 그러나 일찍 양친을 잃은데다가 형제자매마저 없었고, 가세가 궁핍하여 척분들까지 신통치를 못했다. 흥성대원군 이하응은 민규수의 이 같은 약점을 노렸기에 자신의 처남인 민승호로 하여금 그녀의 양오라비로 삼아서 중전으로 간택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어렸어도 총명하고 영특하였던 명성황후에게는 수치스러운 상처로 새겨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명성황후는 열세 살 어린 나이로 곤위에 올라 첩첩산중과도 같은 중궁전에 갇혔고, 소년 고종이 궁인 이씨의 거처를 드나들게 되면서는 비록 어린 보령이었지만 독수공방으로 인한 고독과 정한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춘추 스물 한 살 때에 이르러 대망의 원량을 생산하여 온 왕실을 들뜨게 하였다. 정조 10년 5월 열하룻날에 문효세자가 보령 다섯 살로 세상을 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네 분의 임금이 바뀌면서 8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원자에게로 왕위가 이어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 기쁨은 더욱 헤아릴 길이 없었으나,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갓 태어난 원량에게는 항문이 없었다. 하늘의 시새움인가. 강보에 싸인 원량이 대변불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성황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갓 태어난 원량에게 산삼을 다려 먹이게 함으로써 금지옥엽과도 같았던 원량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뜬다. 시아버님 흥선대원군을 향한 명성황후의 반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왕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완화군(영보당의 소생)이 무럭저럭 자라고 있었음에랴. 명성황후는 가슴에 새겨진 통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다시 회임 하였다가 공주를 생산하지만, 그 공주 또한 겨우 여덟 달을 살고 세상을 버렸다. 명성황후는 며느리로서의 불행, 지어미로서의 불행, 어머니로서의 불행 그 모든 통한의 불행을 중전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는 것으로 보상받고자 하였던 철의 여인이었다.
임오군란
명성황후의 불행과 고통은 정치적으로도 잠잘 날이 없었다. 명성황후에게 통한으로 점철된 오욕의 세월을 안겨다 주었던 것은 고종 19년 6월에 발발된 '임오군란'이었다. 이 때 그녀의 연치 32세, 범상한 사람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겪게 된다. 무위영에 소속된 구 훈련도감 병사들에게 열세 달이나 밀려 있던 녹미 가운데서 겨우 한 달치의 양곡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쌀에서 냄새가 나고 모래가 섞였다 하여 구 훈련도감 병사들이 항변하자 선혜청의 관리들은 가증스럽게도 항의하는 병사들에게 매질을 가하면서 더 큰 불상사를 자초하였다. 가뜩이나 탄압과 핍박에만 시달려 온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폭도화된 병사들은 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때려부수고, 외척의 두령이자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를 주살하였지만 분노는 더욱 달아오를 뿐이었다. 그들은 경기감영으로 달려가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무장한 폭도들은 임금의 거처인 창덕궁을 습격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면서 무엄하게도 명성황후의 시해를 기도하였다. 이미 조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은 폭도들에게 짓밟혔고, 창덕궁은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난장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감지한 명성황후는 상궁들에게 휩싸인 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무예청 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구사일생으로 창덕궁을 빠져 나왔으나 피신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다시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응식, 민긍식 형제의 집으로 옮겨졌으나, 거기도 안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다시 여주를 거쳐 충청도 장호원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게 된다.
임오군란을 교묘히 이용하여 권토중래에 성공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성황후가 이미 폭도들에 숨졌음을 선포하고 장례준비에 돌입한다. 명성황후의 생매장을 시도하는 흥선대원군의 독선이었으나, 군란을 수습한 그였기에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국모의 장례를 서둔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에 접한 명성황후의 분노와 상심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존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 병사들에 의해 수습의 실마리가 잡히고, 아이러닉하게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토록 철통같이 믿었던 청나라 장수들에 의해 그들의 군진으로 유인되었다가 중국땅 천진으로 볼모가 되어 끌려가게 된다. 나라의 주권을 유린되고, 국토는 다시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임오군란'이 수습되는 와중에서 고종은 충청도 장호원에 사자를 보내 지어미 명성황후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조정 공론을 거쳐 영의정을 보내 정중히 환궁하게 한다. 피눈물을 쏟아야 했던 수모의 세월을 감내하면서 궁중으로 돌아온 명성황후는 더 강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는 것으로 통한의 아픔을 보상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정치표면으로 등장하여 뭇 사내들을 호령하는 일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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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프랑스의 시인 '라 뽕떼느' (1621-1695)의 '우화'에 나오는 말. 14세기의 영국 시인 '쵸서'도 이 말을 썼다고 한다. 이 말이 생긴 것은 로마 제국의 도로가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발달된 것과도 관계가 있는 뜻. 로마인은 토목건설의 능력이 탁월했으며 광대한 영토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군용 도로를 닦았는데, 지금도 유럽 곳곳에는 그때의 길이 남아 있어 '로마가도'라 불리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고대 문화는 일단 로마에 집약되었다가 다시 서구로 번져갔다. 그러므로 유럽 문화의 거의 모든 원류는 로마에서 발상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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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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