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62 호
단기 4340. 3. 30 (음력 02.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
|
문학소식 |
|
|
▲ 소설가 김지우 영정. |
|
ⓒ 강기희 |
| 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월요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화창하지 않습니다. 어젠 휴일이었지만 몸과 마음은 휴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휴일이 되지 못하고 마음 또한 화창하지 못한 이유는 한 소설가의 죽음 때문입니다.
소설가 김지우가 세상 떠나는 날엔 비가 내렸다
소설가 김지우 선생이 지난 주 토요일 오후 1시 급작스런 죽음을 맞았습니다. 올해 나이 45세이니 아직은 젊다고 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면 젊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봄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주말(24일) 김지우 선생이 죽음을 맞는 순간 저는 평택 대추리에 있었습니다. 오전엔 비도 뿌렸지요. 맘껏 내리던 비가 그친 시간 김지우 선생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황망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 하면서 순간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날아든 문자메시지를 몇번이고 확인하는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그것 조차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김지우 선생이 봄날 꿈같은 날들을 외면하고 눈을 감다니요. 이래도 되는건지 불쑥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김지우 선생이 마지막 생명의 끈을 놓는 순간 세상엔 비가 내렸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하늘도 알았나 봅니다. 하늘마저 실수라며 눈물을 쏟는 시간 김지우 선생은 자신과 맺은 모든 인연 접고 눈을 감았습니다.
딸의 울부짖음도 그녀의 감은 눈을 뜨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였으며 소설가였습니다. 청바지를 즐겨입는 멋쟁이였기도 했습니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걸을 땐 누구든 연애를 걸어볼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무너진 대추분교 건물 잔해를 바라보며 김지우 선생의 활짝 웃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참 착한 웃음이구나' 할 정도로 꾸밈이 없습니다. 맘껏 웃고 맘껏 울 줄 아는 김지우 선생의 소설가적 삶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더 억울하고 화가 났습니다.
김지우 선생은 동료 소설가로서 평소 저와 벗처럼 지냈습니다. 편안한 친구사이였지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가끔씩 만나면 격의 없이 어깨를 치며 낄낄 거렸습니다. 그러던 김지우 선생이 벗 남겨두고 홀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몸은 대추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김지우 선생에게 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촛불을 밝히는 대추리 밤이 더 없이 슬퍼 촛불조차 바라보기 싫었습니다. 어둠 깔린 대추리에서는 길을 찾아나서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대추리로 들어왔던 마지막 버스가 길이 막혀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며 다른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먼길을 돌았습니다. 가수 정태춘의 고향인 도두리를 지나 그의 노랫말에 나오는 선말고개를 넘어 김지우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강남성모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반갑다며 어깨 치던 벗 한줌 재로 남아
영안실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문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소설가 현기영, 시인 김준태, 시인 김정한, 시인 도종환, 시인 이도윤, 시인 이승철, 시인 김규철, 소설가 김종광, 평론가 이명원 등등.
그 시간 소설가 김재영의 눈엔 눈물만 고여있었습니다. 이흔복 시인은 취한 채 말을 잃었습니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손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국화꽃 향기 가득한 영안실엔 두 딸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영정 사진으로 남은 김지우 선생은 벗이 왔지만 반갑다며 어깨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선 국화향기만 났습니다. 향불 하나를 피우며 이렇게 먼저 가도 되는 건지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쓸쓸하게 쓴 소주만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동료 문인들과 애써 떠들어 보지만 쓸모없는 말들이 전부입니다.
올해 초 김지우 선생에게 전화를 해 보아야 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서너차례 있었습니다. 별다른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잘 지내?" 하고 물어 볼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도 전화를 걸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사는 일이 바빠 그랬다는 핑계는 그야말로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김지우 선생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초 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를 마친 날이니 1월 말쯤 되었나 봅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녀와 마주 앉게 되었는데,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은 게 첫 인사였습니다.
그녀는 날이 추웠던지 검은 외투를 입은 채 말없이 소주잔을 만지작 거렸습니다. 문단에 나오고 처음 총회 자리에 나온 김지우 선생이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탓입니다.
"작품 잘 보았습니다."
제가 먼저 말문을 트고 나갔습니다. 그녀의 첫작품인 '눈길'을 읽었던 터라 아는 체를 했던 것이지요. 그제야 그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쓰겠다는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 시절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는 즐거움은 남달랐습니다. 그녀의 작품엔 끈적한 송진 같은 것들이 녹아있었습니다. 한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끈적함은 그녀의 삶이었고, 그것은 작품의 장점이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할 때 김지우 선생은 저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왔습니다. 모처럼 만나 술판이나 벌여보자고 한 자리였는데 그녀가 꽃다발을 제게 건넸습니다. 그녀도 출판기념회에 꽃다발을 건네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꽃 고마워. 나도 소설 더 열심히 쓰지." "축하해, 기희씨 작품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래."
그날 김지우 선생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지우 선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참 나쁜 사람입니다. 지난 가을 <오마이뉴스>에 인터뷰 기사가 나갔을 때 김지우 선생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강기희씨는 구순하고도 다정다감한 소설가 입니다. 한국평화문학포럼에서 사회를 전담하고 있는데 혜량 깊게 아우르는 너그러운 말과 인품이 돋보이는 분이지요. 장편 <개같은 인생들>의 뚝심있는 입담이 아주 재밌답니다. 동료 소설가로서 자부합니다. - 소설가 김지우 글
과찬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라 기분 좋습니다. 이런 말 쉽게 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만 실은 위의 말을 제가 김지우 선생께 해야 할 말들입니다. 그녀가 꼭 그랬거든요. 그러나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어깨를 툭 치며 "고마워" 해야 할 그녀가 곁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
|
|
소설가 김지우 약력 |
|
|
|
소설가 김지우 선생은 1964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0년 단편소설 <눈>으로 제3회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작품집으로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2005, 창비) , <금방울전> (2006, 창비) 등이 있다.
|
|
|
|
| 오늘(26일) 오전 그녀는 한줌의 재로 남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오열과 눈물 속에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겁많은 그녀가 뜨거운 불길을 어찌 견뎠을지 그 순간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녀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큰 슬픔과 충격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기억하기에 더 그렇습니다. 봄날 한점 꽃잎처럼 진 그녀. 왜 서둘러 떠났는지 자꾸만 묻고 싶은 날입니다.
영안실에서 슬픔에 젖은 손세실리아 시인과 손을 마주잡고 살아있는 우리라도 건강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긴 너무 억울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지우 선생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 억울함 풀길 없어 살아남은 자 힘든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어나는 꽃들이 다 그녀 같아 눈을 뜨고 있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눈 감고 그녀와 못다 나눈 술잔 건네며 남은 이야기들을 해야겠습니다. 환장하게 화창한 봄날 우리의 마음은 그녀를 보낸 환장함에 젖어 있습니다.
김지우 선생, 이승의 짐 다 벗어놓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남은 우리들 지켜 보아 주시다 가끔씩 이승 내려와 예전처럼 낄낄 거리며 어깨도 칩시다. 술판이 벌어지는 날엔 자리 하나 비워둘 테니 꼭 찾아와 못다한 삶 나눕시다.
김지우 선생, 이제 우리는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모든 걱정 이승에 던져놓고 기쁨만 가지고 가소서. 우린 당신을, 당신의 작품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선 불행은 없고 행복한 삶만 이어지길 살아있는 자 비옵니다.
벗이여, 편히 영면하시옵소서!
- 오마이뉴스 |
|
|
글터 → 명언 / 격언 |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도와주는 것은더욱 좋은 일이다. / 칼릴 지브란(레바논 시인)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一章 (노자 - 도덕경 : 제51장)
|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是以萬物莫不存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元德.
도생지, 덕축지. 물형지, 세성지. 시이만물, 막부존도이귀덕. 도지존, 덕지귀, 부막지명이상자연. 고도생지, 덕축지, 장지육지, 정지독지, 양지복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원덕.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쉰 한째 장
직역
다시 한번 고민해볼것.
도란 그것이 태어남이오, 덕이란 그것이 쌓아 감이요, 물이란 그것이 형체를 이룬 것이다. 세라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온갖 것이 도를 높이 여기고, 덕을 귀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대저 명령이 아니고,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란 그것이 태어남 이오, 덕이란 그것이 쌓아 감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고, 그것을 기르며, 그것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독하게 한다. 그것을 길러주고 덮어 감싸준다. 낳았으나 가지지 않고, 되게 해주어도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해석
도는 생명력이다. 모든 만물이 이 도에서 나온다. 덕은 얻음이다. 모든 만물들은 얻음으로 자란다. 양분을 얻지 못한다면 생물은 죽는다. 사람을 보라. 음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얻음. 의식에도 얻음이 있다. 자라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정도 얻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멈추어 버린다. 그럼 죽는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는 생명력이오. 덕은 사물이 태어 나기 위해서 얻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속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도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가 된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고, 덕은 어머니의 정혈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와 덕이 아니다. 최소한의 느낌이라도 있어야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형이다. 형체가 아니다. 형이다. 그림자 같은 것이다. 아이가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느낌이 와야 한다. 이 형보다 발전이 된 것이 성이다. 이루어 진 것이다. 아이가 태어 난 것이다. 이때 부터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첫 과정이 호흡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는 호흡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호흡이 자신이 개체로서 처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호흡을 중요시 한 것이다.
노자는 사물이 처음 출발하는 점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에서 파고 들어가야 한다. 도는 그냥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처음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세이다. 단전히 고정되어 있는 집합체이다. 어미에게서 나왔지만 우리는 어미의 자궁속의 일을 알지 못한다. 거대한 나무를 보라. 그럼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안다. 그러나 그것이 새싹일때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는 것은 힘이 든다. 땅속에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의 첫 출발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나무가 아직 싹도트기 전의 상태에서 이것이 어떻게 자랄지 지켜 보면 노자의 말을 수긍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 자란 나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에 대한 추구는 그대의 현존에서 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근원에 도달 할 수 있게 된다. 도는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도의 증거이다.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 도가 다른 만물을 낳았는데 나는 낳지 않았는가. 아니다. 도는 그대를 낳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를 높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먹이고 살려준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먹고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대가 만든 것이 있는가. 지구는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라. 지구는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도가 만든 것이다. 그대의 식탁에 있는 음식들은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농부가 만든 것도 아니다. 도가 만든 것이다. 전 우주의 과거가 만든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도는 근원이다. 모든 만물이 도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도를 높이 여기는 것이다. 낳았지만 형체는 없다. 씨앗이다. 아직 이미지가 없다. 구별할 수 없다. 이제 조금씩 이미지가 생긴다. 씨앗이 발아를 한다. 그때 가 덕이다. 그리고 씨았이 땅위로 드러났다. 형체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한다. 이때가 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에 새싹만 보고 그것이 어떻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힘들다. 새싹은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다자라면 세를 이루게 된다. 자신의 영역권을 가진다. 이때에 이르러 하나의 사물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이다.
도는 근원이다. 그렇기에 도를 높이는 것이다. 덕은 토양이다. 사물이 사물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규율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면서 아는 것이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51.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은 그것을 기르고, 물체마다 형태를 이루게 하며 힘으로 그것을 자라게 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어느 것이나 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없고 덕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누가 명령을 해서 시키는 일이 아니건만 언제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길러 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생장시키고 육성케하며, 안정시키고 돈독하게 하고 키워 주고 감싸준다. 도는 만물을 낳고도 제것으로 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키워 주면서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덕이라고 한다.
주
도생지: '도가 그것을 낳고', 여기서 지는 대명사로 만물을 지칭하고 있음. 축: 기르다, 사육하다. 세: 힘, 형세. 정지독지: 그것을 안정시키고 돈독하게 한다, 정은 정과 같고 독은 독을 뜻함. 정은 형태를 부여하는 것, 독은 바탕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많음. 양지복지: 길러 주고 감싸주다. 복지는 돌보아 주다, 감싸주다, 비호하다의 뜻임. 현덕: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덕. 현은 검다는 뜻 외에도 아득하다, 맑고 고요하다, 신비하다, 불가사의하다의 의미가 있음.
해
이 장에서 노자는 도와 덕의 존귀함과 겸허함을 칭송하고 있다. 천하 만물의 생성은 다 도 즉 자연의 이법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것의 성숙이 도의 작용인 덕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존귀한 일을 하는 도와 덕은 스스로 존귀하다고 내세우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존귀한 것이다. 도와 덕은 만물을 생성화육하는 데 명령을 내리는 일이 없다. 그것은 간섭이니 통제니 규제니 하는 말을 모른다.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할뿐이다. 도와 덕은 만물을 감싸주고 보호하건만 그것을 제것으로 한다든가,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랑하는 일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도의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3장 서양인의 수집
구한국시대의 서양 외교관들
1971년 6월에 나는 구미 각국의 유수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내막을 10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 소개했다. 편의상 몇몇 경우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면, 먼저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수각수로도' 는 윌리엄 앤더슨이라는 영국인이 가져간 것을 1881년에 박물관에서 인수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은입사향로'(1358년명) 하나는 인버네언 부인이 갖고 있다가 1945년에 대영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호놀롤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의 목각동자상과 고려청자 '상감연화문주전자' 는 1927∼1928년에 개인(미국인)이 기증했다고 카탈로그에 명기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에는 1910년대 중엽에 한국에 와서 수집한 찰즈 B.호이트의 고려자기 컬렉션이 모두 유증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은 또 1910년대에 일본인 오카구라가 입수해 갖고 있다가 미국인 에드워드 J.흄즈에게 팔아넘긴 신라시대의 걸작 '금동약사래입상'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고, 그외에도 국내에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11세기 고려시대의 은제도금 주전자와 승반을 갖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은 1910년대 중엽에 르 브롱드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기증받았고, 덴마크의 국립박물관에는 구한말에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는 신라시대의 청동불 2구와 고려말의 목불, 그리고 각종 민속자료가 진열돼 있다. 1950년대 후기에, 그전까지의 소장자인 일본인으로부터 신라시대의 금동관(고분 도굴품)을 입수해 갖고 있는 파리의 기메미술관엔, 1887년에 서울에서 한·프조약을 체결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한국명 갈임덕)가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서울에서 수집한 고려자기 등이 기증돼 있다. 파리에 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한국문화재로서 체르뉘스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자그마한 동종은 미술관 창설자인 앙이체르뉘스키가 1871년에서 1837년까지 중국·일본으로 미술품을 수집을 떠났을 때 일본에서 사 간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이 종에는 1311년 마들어졌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독의 쾰른동양미술관에 있는 한국 도자기들은 "1910년에 아돌프 피셔가 현지(한국)에서 출토품을 수집한 것을 1차세계대전 직후에 입수했다" 고 미술관 카탈로그에 소개돼 있다. 또 이곳에 진열돼 있는 고려청자 '표형주전자' 는 1928년에 런던에서 공개된 호브슨의 컬렉션에 들어 있던 물건이다. 이상은 현재 구미 각국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중 반출 시기와 경위가 확실한 극히 일부의 내용이지만, 그 나머지는 한국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약탈 혹은 불법적으로 수집한것들이 일본을 통해 각국으로 팔려 나간 것들이다. 다만 앞에서 몇 사람의 서양인 이름이 언급됐듯이 1883년의 인천 개항 이후 서울에 등장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기술자·정부고문·선교사·외국어 교사 등 여러 분야의 서양인 가운데 한국의 옛 미술품을 수집한 사람이 더러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역시 제한돼 있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일본인 무법자들처럼 이땅의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무법의 수집가는 별로 없었다.
1894년에 서울의 프랑스어 학교 교장으로 초빙돼 왔던 에밀 마르텔의 회고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한국에 오던 무렵에 고려자기를 수집하고 있던 서양인은 미국 공사 알렌(한국명 안연)과 프랑스 공사 플랑시 등이었는데, 플랑시의 수집품들은 현재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보존돼 있다. 그중에는 내가 그에게 기증한 것도 있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년)
마프텔 자신도 서울에서 약 50년 사는 동안 상당히 안목 있는 수집을 했었는데, 그의 컬렉션이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
|
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7. 주자학의 특성
일반적으로 성리학은 주자학과 양명학을 아울러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성리학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이-주희 계열의 성리학, 즉 주자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주자학은 조선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그 특성에 대해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 주자학의 특성은 과연 무엇인가?
첫째, 주자학은 "성품이 곧 이치이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는 송명 유학의 한 유형이다. "성품이 곧 이치이다"라는 명제는 "세계는 이치와 기질의 오묘한 조화로 이루어졌다"는 명제, 그리고 "마음은 이치와 기질의 오묘한 조합이다"라는 명제와 서로 상관되어 있다.
둘째, 주자학이란 정이와 주희 계열의 사상적 입장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사상적 유형을 말한다. 이미 말했듯이 신유학의 역사는 여러 가지 사상적 실험을 복합적으로 내재하면서 전개되었다. 북송 초기 송학은 세계와 인성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기론적 바탕을 상속으로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북송 초기 신유학의 역사에 나타나는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등은 세계와 인성이 기질로 이루어졌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세계와 인성을 이루는 존재론적 개념으로서 기질 이외의 이치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한 사람은 정이였다. 주희는 이러한 정이의 입장을 상속받아 송학의 완성된 형태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학이란 정이로부터 시작된 신유학적 실험이 주희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이 후 조선 주자학이나 일본 주자학에까지 이어져 나가는 사상적 흐름이라 하겠다.
셋째, 주자학은 송명 유학 또는 신유학의 사상적 중심에 놓이는 사상의 한 형태이다. 송명 유학은 새로운 사상적 화두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유학을 혁신시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유학은 일상적 삶 속에서의 바른 행동과 실천을 추구하였던 학문이었다. 그런데 일상적 삶이란 구체적이고 상황적인 것이지, 논리적 문맥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유학은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낸다거나 형이상학적인 구조를 갖추는 데에는 그다지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 유학이 놓인 환경은 다른 사상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치열한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그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여겼고, 불교나 도교와 같은 사상적 적들을 이겨낼 수 있는 무기로서 자신들만의 특징을 단련해 낼 필요가 있었다. 유학의 특징은 바로 그것이 일상적 삶 속에 뿌리를 두고 바른 행동과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었지만, 이러한 특징들을 원형 그대로 원용해서는 이미 웅대한 형이상학적 구조와 정밀한 논리적 체계를 갖춘 불교나 도교의 사상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유학은 이들 도교 사상이나 불교 사상의 어느 부분을 상속받아서라도 스스로를 논리적 체계 속에 세우고 자신 안에 형이상학적 문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노력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존재 방식을 해명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신유학사에서 나타나는 "주역"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 발현이었다. 이 노력은 처음에는 객관적으로 전개되어 가지만, 일단 어느 정도 역량을 축적한 다음부터는 주관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했다. 즉 유학적 세계 속에 놓여 있는 도덕주의라는 이념이 세계 해석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시기로 마침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존재 세계를 해명하고자 하는 열정과 도덕주의라는 이념의 결합은 존재로부터 도덕을 발견해 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거꾸로 도덕을 존재화시켜 내려는 태도로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신유학은 마침내 '이치'를 세계 구성의 근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이-주희 계열의 사상적 입장이다. 그러니까 정이-주희 계열의 철학, 즉 주자학은 이념으로서 기능하는 유학적 도덕주의가 송대의 사상적 환경 속에서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라고 하겠다. 그것은 송대 초기 도학 계열의 사상적 실험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며, 아울러 명대 신유학을 배태해 낸 바탕으로서 기능하였다.
넷째, 주자학이란 인간을 이원적 구조를 통해 바라보는 태도를 가진 사상의 유형이다. 주자학에서 세계는 '이치'와 '기질'이라는 두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마음도 이치와 기질이라는 두 요소의 복합으로 이루어진다. 주자학은 이와 같은 기본 구조 위에서 도덕주의라는 이념을 구현해 나가는데, 이 때 특히 이치의 권능에 의존하며 기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 인간의 기질의 작업을 통해서만 현실 세계 속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요, 구체적인 인간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기질이 주자학적 구조 속에서 세계와 인간을 구성하는 존재론적 원소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문맥에서는 오히려 부도덕 따위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원인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기질을 통해서 드러나는 현실적 인간이나 현실적 인간의 마음도 부정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자학에서 도덕의 구현이란 어떤 측면에서는 현실적 이간과 현실적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떠나서, '이치' 자체 또는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이치'로서의 '성품'자체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주자학적 수양을 주장하는 명제는 유학의 가장 건강한 특성 중 하나인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도덕'에 상처를 입힌 채 '창백한 이성주의'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다섯째, 주자학이란 유학의 역사에서 전개된 지식론적 흐름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입장을 제출한 사상 형식이다. 이 점은 말할 것도 없이 주희의 공적이다. 유학사에서 지식론이 독립되어 적극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주희부터였다. 그것은 주희의 "대학" 해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대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왕수인의 학문을 정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할 때, 명대의 유학 역시 지식론과 결코 무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주희가 독자적인 지식론의 성립을 가능토록 하는 틀을 제시했다고 한다면, 왕수인은 주희에 의해 마련된 지식론적 틀을 해체시키는 쪽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주희가 지식론을 독립시켜 보았던 것은 '이치'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던 그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치란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객관 사물을 궁구함으로써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주희는 이치에 이르는 통로를 이것만으로 한정한 것은 아니다. 그의 체계에서 이치는 이미 내 마음의 성품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주희는 '존덕성'과 '도문학'이라는 두 가지 통로를 다 승인하고 있다. 이 점은 주희뿐만 아니라 왕수인 등 여타의 유학자들도 다 승인하는 바이므로 결코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주희의 경우 이치가 객관 사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측면은 한결 실제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주자학에서는 객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해서 주자학이 객관 사물 그 자체에 탐구의 목표를 둔다는 말은 아니다. 주자학 역시 유학적 도덕주의의 반경 안에 있는 만큼, 이 때의 객관 사물에 대한 탐구라는 것은 결국 객관 사물 속에 드러나는 '이치'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주희가 제출한 지식론은 유학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섯째, 주자학은 이념성이 강조되는 유학의 역사 속에서도 더욱 강력한 이념성으로 무장되어 있는 전투적인 유학이다. 유학은 원래 스스로가 이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치는 주희 계열의 성리학에 이르면 훨씬 실제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며, 이치의 순결성도 더욱 강하게 주장된다. 주희 계열에서는 이치의 순결성에 대한 주장을 유학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학 내적인 것을 대상으로 강도 높게 말한다. 이미 말했듯이 주희는 격렬한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학설을 확정해 간 사람이다. 그의 논전은 주로 신유학 내부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따라서 불교나 도교에 대한 비판 외에도 육구연이나 진량 등에 대한 비판도 격렬히 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스스로의 학설과 입장을 절대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이념성 때문에 주희 이후의 주자학도 그 철학적 순결성을 크게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 점은 조선의 주자학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 마디로 주자학은 기존의 유학에 비해서 훨씬 체계화되고 이념화된 유학이며, 유학의 도덕주의를 적극적으로 강화시켜 낸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이치의 순결성과 절대성을 강도 높게 주장하다보니 인간의 따뜻한 숨결을 도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그 체계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 체계와 논리를 수호하려는 노력이 너무나 강해 시대와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오히려 상실하고 말았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도전건차, "주자학과 양명학", 김석근 외 옮김 (까치, 1986) 최근덕 외, "원대성리학" (포은사상연구원, 1992) 주주전, "강좌중국철학", 문재곤 외 옮김 (예문서원, 1993)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1994) 후외려, "송명이학사", 박완식 옮김 (이론과 실천, 1995)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통틀어
본뜻 : 사고자 하는 물건이 조금 남아 있을 때 '이거 통틀어 얼마예요?' 하는 말을 많이 쓴다. '통틀다'보다 '통틀어'라고 많이 쓰는데, '통을 탈탈 털어서'의 준말이 '통털어'라고 생각한 데서 온 결과인 듯싶다. 그러나 표준말은 엄연하게 '통틀어'이다 여기에서의 '통'은 '온통'의 뜻이며, '틀다'는 어떤 것을 한 끈에 죽 엮어 맨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어떤 물건이다 사물을 있는 대로 모두 합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보기글" -이 참외 통틀어 얼마에 주실래요? -이거 통틀어 단 돈 천 원만 내슈
퉁맞다
본뜻 : '퉁바리 맞다'에서 나온 말이다. '퉁바리'란 본래 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을 말한다. 남편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기회가 적었던 옛날에, 밥상 앞에 앉은 여자가 그간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하는데, 듣는 도중에 그 말이 못마땅한 남편이 밥상에 놓인 퉁바리를 집어던져 여자의 말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바뀐 뜻 : 말하는 도중에 핀잔을 듣거나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것을 말한다.
"보기글" -사장님 앞에서 겨울 휴가 얘기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퉁만 맞았네 -왜 그렇게 부어 있니? 오늘도 누구한테 퉁맞았니?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재판소가 설치되어 많은 사람이 단두대 아래에서 사라져갔다. 공포정치 10개월 동안 처형당한 사람은 모두 2,600여 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롤랑 부인뿐 아니라 콩도르세, 그리고 유명한 화학자인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도 끼어 있었다.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공포정치 아래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은 좀 의아한 일이다. 사실 라부아지에가 처형당한 것은 그가 과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금징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관세나 연초세, 주세 등을 지금처럼 국가가 직접 걷지 않았다. 국가는 이같은 일을 세금징수조합에 맡기고 대신 그들로부터 매년 일정 액수의 돈을 지불받았다. 세금징수인은 이를 통해 대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라부아지에는 1768년에 세금징수인이 되었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자고로 세금징수인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적은 없었다. 이들은 많은 세금을 걷는 데 혈안이 되었고, 또 왕이나 귀족과 결탁하여 세금을 올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니 이들이 누구보다도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혁명이 일어나자, 1791년에 이들 세금징수조합은 폐지되었고 조합재정을 청산하여 의회에 보고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세금징수인들이 이를 어기고 재정보고를 계속 기피하자 의원들은 이들을 체포하였다. 라부아지에를 포함해 체포된 세금징수업자들은 간단한 심문을 거친 다음 재판소로 넘겨졌다. 그들의 죄목은 여러 가지 착취와 횡령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손해를 입혔으며, 담배에 물을 섞었다는 죄목은 사실무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담배를 제조하려면 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들 대부분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라부아지에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중요한 실험이 완료될 수 있도록 판결을 얼마간 늦추어 달라고 호소했으나 재판부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거절의 이유가 바로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판을 계속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였다. 당시 수석재판관이었던 코피나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유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과학자들이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애석해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라그랑즈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비통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머리를 쳐 떨구는 데는 일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또 만들어 내려면 백 년의 세월로도 모자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혁명정부가 오로지 혁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공포정치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단두대로 보냈던 로베스피에르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라부아지에를 처형했던 코피나르도 그 예외가 아니었으니, 이를 역사의 아니러니라고 할까.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천년을 떠도는 사랑
낯선 땅에서 더욱 가까이 나는 지금 여행 중입니다. 낯선 땅을 헤매며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진정한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멀리 떠나 왔습니다. 나와는 다른 언어, 다른 모습, 다른 풍습의 낯선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며, 내가 가장 원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길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약간의 설레임과 두려움, 그리고 조금은 쓸쓸함을 느끼면서 자신을 번거로운 사회의 결속으로부터 해방시켜 고독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 여행 속에서 나는 도처에 산재해 있는 모험과 경이, 현실과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여행을 통하여 경험하는 고통과 불편, 새로운 것을 점했을 때의 신기로움, 무엇이나 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완전한`고독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회복하고 싶었고,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역사가 잠들어 있는 여러 고적들과 새로운 풍물들을 보면서 또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스치고 지나가면서 나의 시야를 넓히고, 세계의 광대하고 신비스런 갖가지 모습에 부딪치면서 내가 갇혀있던 작은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싶었습니다. 집요하게 당신에게 매달려 있는 나의 감정과 생활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기를, 아니 잊어버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느 만큼만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 이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서 규칙적으로 일에 얽매이고 남은 시간을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내게 허락된 이 여행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즐기고, 온갖 아름답고 신기한 것을 대하고 다니노라면, 오직 당신을 향해서만 달려가던 나의 감정, 나의 사고가 새로운 체험세계에 의하여 조금은 분산되고 엷어지리라 기대하면서 떠나왔습니다. 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물과 경험, 새로운 지식에 대하여 탐욕스러우리 만큼 호기심을 갖고 있는 내 본질의 일부가 이 여행을 통하여 더 많이 개화되고, 더 넓은 안목과 세계관을 갖게 됨으로써 한 개인에게로 치달아 집착하는 감정이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 떠나면서부터 나는 어쩐지 후회 비슷한 감정이 자꾸만 마음 속을 어둡게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감미롭고 황홀한 빛에 싸이는 듯한 나의 시간을 송두리째 파내어 버려도 괜찮을 것인가. 과연 나는 당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나의 아집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전처럼 자족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 이런 여러 가지의 상념들이 나의 발길을 무겁게 했고, 당신을 통하여 얻은 기쁨과 생명력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솔직한 감정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아예 단념하고 다른 생활을 찾아 충실을 기해야 한다는 이성이, 서로 대립되어 내 마음은 혼란의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이 여행을 통하여 나의 운명을 자연에 맡기고자 합니다. 아무리 당신과 헤어져 있더라도 내가 결코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그 확신에 따라서 나는 당신 곁으로 달려갈 것이며, 혹은 이 긴 여행을 통해서 내가 당신과의 인연의 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다면 나는 나의 예전의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갈 것입니다. `시간이 약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들을 믿어 보기로 하고, 일단 나는 당신으로부터 빈 공간에 떨어져서 다시 한번 자기성찰의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의 인생을 골똘히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금, 이 테이블의 건너편에 홀연히 당신이 와 앉는 듯한 환상이 역력히 스쳐 나는 잠시 몸을 떨었습니다.
아벨라르. 차를 타고 달릴 때도, 커피를 마실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우연히 길 모퉁이를 꺾어 돌 때도 갑자기 당신의 환영이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어떤 외국인이 검은 색안경을 쓰고 내게 말을 걸어 오면, 안경 속에 가리워진 그 외국인의 눈과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당신으로 착각되는 경험을 수없이 하면서 순간순간 나는 짙은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다정한 부부들이 똑같은 디자인의 T셔츠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보면 불현듯 당신과 저렇게 같은 무늬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욕심이 내 안에 치밀어 올라 스스로 아연해집니다. 끊임없이 나를 쫓아다니는 당신의 환영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나는 일부러 바쁜 일정을 짜 놓고 잠시라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을 피하려고 노력해 봅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밤이 오면 지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쓰러져 단잠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무리한 도보여행을 강행하기도 합니다. 이 여행 중에 나는 여행 이외의 일을 깡그리 잊고 이 무한한 자유와 완전한 고독을 즐기며 다시 시작될 내일의 내 인생에 대비하려 합니다. 내일의 내 인생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결정지어질 것인지 아직은 알수 없지만 나는 이 여행의 끝에 얻어질 내 미래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위하여 불안과 근심을 모두 보류한 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여행의 피로에 한껏 빠져 볼 생각입니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김옥균의 암살 (2/3)
역사를 읽으면서 편견의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특히 어떤 인물의 해석이나 평가에 편견이 작용하게 된다면 그들과 관련된 사건을 보는 시각도 편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김옥균이 친일의 거두었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은 일본정부가 사주를 했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 된다. 이 같은 편견의 결과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주도한 자주적인 개항의지를 모독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마침내 제나라의 역사를 비하하는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 전 어느 일간지의 편집국장을 지낸 이 나라 최고의 지식인이 '김옥균이야말로 일본제국의 앞잡이였다'고 열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허황해지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바로 그와 같은 편견이 식민지 사관보다 더한 해악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1백여 년 전의 인물을 거론하면서 건전한 역사해석을 그르칠 정도의 편견에 빠져든다면 우리 역사학계의 인물사적인 연구가 얼마나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었던가를 입증하는 것이 된다. 비록 망명에는 성공을 했으나, 일본땅에서의 김옥균은 두 가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첫 번째 고통은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들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옥균을 암살해야 하는 자객의 임무를 띠고 처음 도일한 사람은 장은규였고, 그 다음이 지운영 그리고 이일식, 또 그 다음이 홍종우, 권동수, 권재수 등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김옥균의 처단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고통은 사태가 이 지경에 되었음을 반증이나 하듯 일본 정부에서도 김옥균의 처리를 골칫거리로 여기면서 그를 냉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궁여지책이 자객 지운영을 추방, 귀국시킨다는 조건으로 김옥균에게도 퇴거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김옥균이 미국으로 가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여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지정한 기일까지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자, 또 한 번의 궁여지책으로 김옥균은 이세산에 있는 미쯔이 가문의 별장에서 연금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서도 두 번째로 정한 기일까지 여비 마련이 어렵게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하라 섬이라는 절해고도로 강제 추방을 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김옥균은 이에 대해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일개 망명 정치가의 힘으로, 더구나 일본 정부의 냉대를 받고 있는 처지로는 그들의 단호한 조처를 변경할 수가 없었다.
오가사하라 군도는 동경에서 태평양 남쪽으로 1천Km나 떨어져 있는데, 부도, 모도 등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 되어 있는 절해고도로, 요즘 취항하고 있는 초현대식 호화여객선으로도 편도에 28시간이 걸리는 아득히 먼 곳이었기에, 김옥균을 태운 당시의 돛단배는 무려 21일간을 항해하고서야 오가사하라 군도의 부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김옥균을 오가사하라 섬으로 유폐하면서 당시의 일본국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오가사하라 섬을 관장하는 가나가와 현 지사에게 보낸 비밀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 김옥균이 우리 영토 안에 체류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치안을 방해하고 또한 외교상 장애를 가져 올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 본 대신은 특별히 위임받은 권한에 따라 명치 19년 6월 11일부로 명령서를 발송하여 귀하에게 명령하니 김옥균으로 하여금 일정한 힘을 사용하는 것도 가하다. 김옥균에게는 속히 퇴거를 결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김옥균이 지정한 기간에 자력으로 우리 제국을 떠나지 않으므로 귀하가 본 대신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먼저 김옥균을 억류처분하는 것도 승낙한다. 본 대신은 이 시점에서 또다시 명령을 내리니 김옥균을 우리 제국 영토인 동경부영하 오가사하라 섬에 호송하도록 하며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동도를 떠날 수 없다는 취지를 김옥균에게 전달하고, 동경부당국에 인도할 것. 이 명령서에 의한 전기의 권한을 귀하에게 부여함.]
이 명령서는 일본국 내무대신의 명의로 된 비밀문서이며, 또 행정명령서다. 여기에 적힌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김옥균은 일본국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은 것을 고사하고 굴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김옥균은 '일본제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조선의 젊은 내셔널리스트임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면죄부
본시 로마 교회에는 일정한 선행을 쌓은 신도에게 교황의 권한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는 면죄의 제도가 있었다. 선행 가운데는 단식, 순례 등 실제 행동면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재물을 기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교회의 타락이 심해지자 단순히 돈을 긁어 모으는 수단으로서 면죄부라는 증서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상 빼에뜨로' 사원 건립의 자금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발행했으며 그 판매인을 각지에 파견했다. 전부터 교회의 타락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분연히 일어서서 면죄부의 판매를 반대하고 나섰으며 마침내 종교 개혁으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