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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8 호
단기 4340. 3. 5 (음력 01.1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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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 요즘 들어 종종 아프네요. 독서편지도 빼먹는 날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자기관리 잘 하시고 아프지 마세요. - 독서편지 구독하시는 분이 89분 이시네요. 많이 늘어났네요. 구독하시는 분들은 다들 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이겠죠? 고맙습니다. 항상 책을 놓지 마시고 주무실 때도 곁에 두고 주무세요. ^^
- 風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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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문학사상 신인상 공모
《문학사상》 신인상을 다음과 같이 제도를 개선하여, 보다 의욕적으로 이 나라 문학계의 주역으로 떠오를 신인의 참신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공모합니다. 작년부터 당선자에게는 상패 외에 100만 원의 상금을 지급하고, 월간 《문학사상》지를 통하여 기성작가로서 예우하며, 《문학사상》지에 수시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본지 이외에서 등단한 신인의 경우, 매우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최소 5년 이상의 활발한 작품 활동 경력이 인정되어야만, 작품 청탁을 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는 상·하반기 2회의 신인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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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부문 및 분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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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10편) |
2. 중ㆍ단편소설 2편(단편소설 100장 내외ㆍ중편소설 200장 내외) |
3. 평론(70장 내외)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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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 및 당선작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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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은 상반기 4월 30일, 하반기 마감은 10월 31일이며(마감일이 공휴일인 경우 익일 소인 유효), 당선작 발표는 본지 상반기 6월호, 하반기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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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방법 및 특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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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위원은 본사에서 위촉하고, 당선작 발표와 함께 공표합니다. - 당선작은 본지에 게재하고, 상패 및 상금으로 100만 원을 드립니다. - 당선된 작가는 기성작가로 인정하고, 본사는 집필 활동을 우선적으로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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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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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91번지 ㈜문학사상사 신인상 담당자 앞 (138-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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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유의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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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모시 겉봉투에 ‘신인상 응모작품’이라고 쓰고 응모부문을 명기 바랍니다. - 원고의 앞뒤에만 연락처를 쓰고, 응모자의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첨부 바랍니다. - 접수는 출력된 원고에 한하며, 전자우편이나 디스켓 접수는 받지 않습니다. - 응모작은 반환해드리지 않습니다. - 문학사상사 편집부(02-3401-8544)로 문의 바랍니다. - 타사에 중복 투고한 원고나 기성작가의 표절이 밝혀질 경우 당선 발표 후에도 취소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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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다이어먼드도 숯이나 석탄 같은 탄소의 응결체.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 다른 압력 아래 이루어졌다는것일 뿐. / 「클래식 크로스워드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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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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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도상무위이무불위.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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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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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일곱째 장
직역
도는 늘 함이 없으나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능히 그것을 지킨다면, 온갖 것이 장차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변화시키려고 바래서 조작을 한다면, 나는 장차 이름이 없는 통나무로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이 없는 통나무는 대저 욕망 또한 없다. 바램이 없는 것으로 고요하면, 천하가 장차 스스로 안정될 것이다.
해석
도는 자연스럽게 할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법도를 잘 지킨다면 온갖 것이 스스로 정화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오염시켰다. 그것은 자연의 법도에 인간이 반발을 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도에 따른다면 자연은 스스로 정화를 시킬 수 있다. 스스로 변화되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막고 있다. 노자가 살던 시대에는 권력이 왕에게 있었다. 그래서 제후와 제왕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정치 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다. 전 지구적 책임이 각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통나무로 때려눕힐 사람도 없다. 모두 통나무를 들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그 첫출발은 자기 자신이다. 욕망에 들 끌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천하가 스스로 안정이 된다. 서로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나서지 마라. 스스로 자기부터 변화한다면 천하는 자연히 안정이 된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전 지구적 각성이 필요할 때이다.
무위에 대해서는 덕경에서 자세히 논의하겠다.
이제 노자의 도경이 끝이 났다. 후회가 든다. 직역은 김용옥씨의 틀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해석은 독자적인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많은 부분 라즈니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다. 그들이 말한것중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들의 말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굳이 다른 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기 변명도 해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내식대로 썼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노자를 사랑한다면 자기 식대로 해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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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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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는 언제나 자연스러울 뿐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그러나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도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천하 만물은 장차 제 스스로 길러지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길러진 만물이 분수를 모르고 작위 하고자 한다면 나는 장차 이름 없는 박의 순수함으로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 이름 없는 도는 바로 자연 그 자체로서 아무런 욕망도 없게 마련이다. 만물이 욕심을 내지 않은 고요한 상태로 있게 되면 이 세상은 스스로 안정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
무위 이무불위 : 하는 바가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부정을 통하여 긍정을 이끌어 내는 노자의 역설적 수사법에는 고도의 세련됨이 있다. 화 : 길러 냄, 화육. 진지 : 억눌러서 안정케 하는 것. 무명지박 : 이름 없는 순수한 박, 박(통나무)은 과연 그대로이므로 도를 상징함.
해
도는 스스로 그러할 뿐 작위 함이 없다.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의 변화를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의 임금이 이 도를 체득하여 무위자연의 이법으로 만백성에 임한다면 이 세상은 저절로 잘 다스려져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세상 만백성이 무위의 다스림에 만족치 못하고 작위와 욕망으로 자기 확장을 꾀한다면 결국은 분쟁과 다툼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히면 안정을 얻지 못하고 쉽게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겉치레 적이고 외부 지향적인 욕망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원점으로 복귀하여야 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의 안정을 얻어 고요히 정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천하 만민이 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되면 임금의 무작위의 다스림도 효능을 보게 되어 그들의 생업은 저절로 안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다투어 가며 태평가를 부르게 된다. 무위자연의 상편 제 1장에서 37장까지 도경은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하편 제 38장에서 제 81장까지의 덕경으로 연장된다. 그러나 도경과 덕경은 형식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으며 내용 면에서는 별다르게 분리할 만한 특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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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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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도둑맞은 관덕동 석탑의 돌사자상 한 쌍
30여 년 전에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의 '삼층석탑'(현재 보물 제188호)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마멸이 심한 암수 한 쌍의 돌사자가 있다. 암놈의 크기는 높이가 52cm, 수놈은 35cm. 특히 암사자상에는 배밑 양편과 앞발 사이로 들어가 젖을 빨고 있는 세 마리의 새끼사자가 귀엽게 곁들여져 있는데, 이런 자연스런 사실표현의 어미와 새끼사자의 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내 유일의 진귀한 조각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양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일찍부터 일본인 전문가들도 경탄했었다. 1934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건축잡지)에 의성 관덕동 석탑에서 일찍이 네 마리의 돌사자상을 조사했던 일본인 전문가 후지시마가 다음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석탑에서) 가장 흥미있다고 말할 것은 상층기단 위의 네 귀퉁이에 놓여 있는 4개의 석사자이다. 마멸되긴 했으나 자세히 조사해보건대 암·수 두 쌍이다. 암사자는 겨드랑 밑으로 새끼사자를 넣고 젖을 빨게 하였다. 암사자를 곁들임은 중국에서도 송대 이상으로 오래된 것을 구하기 힘들며, 조선에서는 각 대를 통하여 그 예가 없고, 일본에서도 가마쿠라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발견할 수 없다. 동양에서 아사(새끼모양의 조각품)로 최고의 예가 된다."
문제는 이 일본인 전문가가 경탄해 마지않은 유물 평가에 있지 않다. 후지시마가 그런 얘기를 써서 발표한 지 5년 후인 1939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관덕동 삼층석탑을 분명히 장식하고 있던 그 두 쌍의 네 마리 돌사자 중 상태가 더 완전했던 것 같은 한 쌍을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후지시마의 앞의 글로 미루어 도둑맞은 한 쌍 중의 암사자도 역시 현재 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암사자처럼 젖을 빨고 있는 새끼들은 배 밑에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네 마리 돌사자 중 몹시 깨지고 마멸이 심한 한 마리만 남겨 놓고 두 차례에 걸쳐 세 마리를 약탈해 간 사실과 똑같은 악랄한 일본인 무법자의 소행이었다. 후지시마는 두 쌍(네 마리)의 돌사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을 때에 관덕동 삼층석탑을 조사했다. 그러나 일본인 무법자의 석탑 및 돌사자의 일괄약탈 및 반출기도는 그 전에 있었다. 후지시마도 그 사실을 적고 있다.
"탑 전체(돌사자 포함)가 1931년에 대구의 모씨(물론 일본인 골동품상이었거나 배후의 교사자)에게 팔려 해체가 착수되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단념하고 종전과 같이 다시 쌓아 올렸다고 한다."
해방 후 전문가들이 현지를 조사하고 주민들에게 들은 바로는, 대구에 살던 어떤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탑을 사서 모조리 해체한 후 탑재들을 하나씩 가마니로 싸서 의성역으로 실어 내갔을 때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인 무법자와 그 일당의 석탑 반출음모는 주민들의 살기등등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고, 그후 탑재들은 주민들에 의해 원위치로 되옮겨져 가서 예전대로 복원되었다. 1차 수난 때엔 돌사자들도 무사했었다. 그러나 이 사자들의 안전은 결국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39년 어느날, 두 번째로 악당들이 침입해 왔다. 새끼사자를 거느린 두 쌍의 돌사자 중 보존상태가 좋은 쪽의 한 쌍이 목표물이었다. 그들의 범행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후지시마가 '한국의 유일한 유물일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오랜 귀중한 조각품' 이라는 가치 평가와 함께 위치를 소개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들은 그 돌사자 약탈작전을 아주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뒤늦게 관덕동 삼층석탑을 고적·유물로 등록시키고(현재 보물 제188호), 한 쌍을 도둑맞고 한 쌍만 남은 돌사자를 현지의 보존이 어렵다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다. 1939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도난당한 한 쌍의 돌사자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고, 경주박물관에서 보호하고 있는 마멸이 심한 한 쌍만이 보물 제202호로 지정돼 있다.
[관덕동삼층석탑(보물 188호)]
[보물 202호 의성 관덕동 석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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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0장 고뇌와 병과 죽음
3. 병의 의미
인간의 현실적인 삶은 출생으로 시작하여 시체로 그 끝을 장식한다. 실상 삶 이전과 죽음 이후의 문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던져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는 삶으로서의 인간과 세계일 때라야만 의미를 간직할 뿐,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에 인간과 세계는 침묵 및 공허 속에 정지하여 있기 때문이다.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시간들이 어디까지나 삶에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는 오직 역사성 안에서만 인간의 삶에 또다른 의미를 제시해 줄 수 있다. 근원적인 고뇌로서의 제한성인 이곳과 지금은 실로 어디에서 가능한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말없이 들에 핀 한 송이 꽃이나 또는 아득한 피안의 세계에 홀로 있는 하느님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뿐만아니라 자기 반성으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개인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개인은 오직 기능 세계속에서 생존을 위한 보다 많은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란 개성을 결여하여 아무런 구분점도 가지지 않은 평균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성에 관한 의식마저도 결여되어 있다. 제한성은 이미 모순과 갈등을 의미한다. 이곳과 지금의 제한성은 한편으로는 영원 앞에서 또 한편으로는 허무앞에서 전율하여 갈등한다. 제한성은 인간의 삶에서 이미 갈등과 모순을 뜻하며 갈등 앞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기능적, 수단적 개인이란 비록 그가 인간이라고 불리워질지라도 전혀 자유의식과는 상관없이 일상적 습관 안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가 개인의 측면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과연 개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주체로서의 인격체로 고양시키고 순화시킬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늘 개인에 머물러 있는지가 문제이다. 만일 인간이 언제까지나 개인에 머물고 만다면 그러한 인간이 집단적으로 구성하는 사회는 짐승의 사회거나 아니면 기계들의 집단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유에 대한 의식을 결여하고 단순한 생존을 위한 이익만을 추수하는 차원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삶에서 자신을 의식의 세계로, 곧 자기 반성의 세계로 승화시킬 때 인간은 개인이라는 무의미한 환경으로부터 의미를 포함하는 인격체로서의 주체로 전환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생생한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물론 인간은 그저 환경에 불과한 개인으로 좌절하여 몰락할 수도 있고 개인으로부터 주체로 전환할 수도 있다. 개인이 주체로 승화되지 못하고 자연 환경으로 남아 있는다면 개인은 단지 기능만을 소유한 공허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전체적인 삶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의미를 개방시켜서 보여줄 수 있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일 뿐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만 인간의 근원적 고뇌인 시간 공간이, 다시 말해서 병이 세계 의미의 체험을 안겨다줄 수 있다.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반성함으로써 시간,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여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 의식이 스스로 제한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이미 제한성은 파괴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 안에서 시간 공간을 반성함으로써 무한성을 체험한다. 개인은 단지 심리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단순히 수단적인 존재에 그치므로 선택이라든가 자기 반성으로서의 자유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발적인 신앙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도 개인에게는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은 늘 주관의 딱딱한 껍질에 갇혀 있으므로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앎도 그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 만일 개인에게 자기 반성으로서의 앎, 예술적 창조 및 종교적 신앙인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외형적 습관에 불과한 지능적 반복과 흉내 및 이기적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만 자기 반성인 주관성이 가능하며 이 주관성은 병의 근원 성격을 해명하여 줄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왜냐하면 주관성은 모순과 갈등, 곧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속에서 그 의미를 묻고 답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유에 의하여 병의 원리를 묻고 그 원리를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결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관성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여 주관은 개인의 특정한 의식 상태를 말한다. 주관은 모순도 모르고 갈등도 모른다. 주관에게는 모든 것이 양적인 것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관에는 선택도 자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관은 개인으로서 오직 감각적 환경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주관은 습관적인 삶을 대변하는 개인으로서 자연 환경에 던져져 있으며 매일매일의 삶을 지나쳐갈 뿐이다.
주관성은 삶의 본질로서의 인간성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사유를 가리킨다. "모든 마음은 불타의 마음"이라든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일자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귀절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주체인 인간만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근거로서의 원리를 체험 속에서 밝히고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는 필연적 창조적 자유를 생명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인간만이 자기 반성에 의하여 삶을 환경에서 상황으로 그리고 다시금 상황에서 체험으로 지양시키고 승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병은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한낱 부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이중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 근원을 드러내고 세계 체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계체험은 자아와 삶 및 세계의 구성 그리고 확인이다. 병의 세계체험은 전체성으로서의 세계 의미를 개방한다. 세계 의미로서의 병은 지금까지 환자가 전혀 예기치 못했고 체험하지 못했던 원래의 사람이 지닌 참 모습을 개방하여 구성해주며 한자를 개인의 차원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준다. 그러므로 환자가 단지 건강해지려고만 욕구할 경우 반복하는 일상성이 지배하게 되고, 그와 반대로 환자가 병과 건강의 제한성을 반성하여 삶의 의미를 물을 때 지금까지 소외당하고 상실되었던 세계가 조화로운 새모습으로 환자에게 다가온다. 환자는 극단적 절망적인 병의 상황에서 병의 의미를 체험함으로써 병과 건강의 제한성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결단함으로써 세계 의미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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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시답잖다
본뜻 : '실답지 않다'에서 온 말로서 진실하거나 미덥지 않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보잘것 없어 마음에 차지 않는다.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아니꼽다
본뜻 : '눈꼴이 시다'는 뜻으로 쓰이는 아니꼽다는 본래 장을 나타내는 '안'이라는 말과, 굽은 것을 나타내는 '곱다'라는 말이 합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말 뜻대로 라면 '장이 뒤틀린다'는 뜻이다.
바뀐 뜻 : 비위가 뒤집혀 토할 듯하다는 말로서, 같잖은 짓이나 말 때문에 불쾌하다는 뜻이다.
안갚음
본뜻 : 남이 저에게 해를 주었을 때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행동을 앙갚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간혹 이것을 '안갚음'으로 잘못 쓰는 경우를 본다. '안갚음'은 다 자란 까마귀가 거동할 수 없는 늙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반포지효'와 같은 말이다. 이렇듯 '안갚음'과 '앙갚음'은 정반대의 뜻을 가진 말이므로 혼동해서 써서는 안된다.
바뀐뜻 :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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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레세페르
유럽의 절대주의 시대에 주요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중심이 되어 경제를 운영해 갔다. 정부는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활동을 직접 관장했다. 공장을 세우거나 무역을 직접 관리하는 것도 정부였다. 이러한 정책에 편승해서 상공인들이 돈이 벌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특권을 보장받았고, 독점상인화하면서 대부르주아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정책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관세나 수입제한 정책이 국내 생산업자들을 보호하려는 목표에서 나온 것이지만, 다는 한편에서 보면 상공인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점차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상공인들과 여전히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정부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레세페르(laissez-faire)'라는 자유방임의 경제이론이 제시되었다. '레세페르'는 프랑스어로 '그냥 내버려 두라'는 명령문이다. 정부가 여러 가지 손을 뻗어 간섭하기보다는 자유롭게 맡겨 두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세기 중농주의자였던 케네(Francois Quesnay, 1694-1774)가 주장한 말이다. 그는 국가의 통제와 간섭이 자연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 자유방임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의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제시한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였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에 발간된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자유방임주의를 표현했다. 보이는 손은 추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현명하다. 각 개인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방임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사회 전체의 복리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미 산업혁명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기업가들은 공장을 지어 새로 발명된 기계를 설치하고 물건을 대량 생산하면서 이윤추구에 들떠 있었다. 연구와 노동의 부를 낳았다. 모두 행복하고 자신에 넘쳐흘렀다. "국부론"은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그들의 열망을 대변한 스미스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면 자연히 조화가 이루어지고, 인류문명이 더욱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조차도 그 혜택을 입어 행복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우세하던 당시 분위기를 잘 드러낸 말이었다. 이제 왕권신수설로 무장하고 모든 경제 활동마저 정부가 통제하려던 절대주의 시대는 가고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는 자유주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정부나 교회가 간섭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롭게 그대로 두라. 프랑스의 케네가 주장한 '레세페르', 영국에서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은 모두 이 새로운 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기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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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눈물과 함께 나의 그리움이
아벨라르. 참 이상한 변화가 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일에는 무엇이나 아주 단순한 감정으로 몰입하게 되고, 또 자주 눈물을 흘리거나 서러워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여도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나 자신의 이런 변화에 스스로도 놀라서 나는 당황해집니다. 사랑이란 사람을 이렇게도 단순하게 만들고 따뜻하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도 곧잘 울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인가 봅니다.
나는 문득 작가 이효석의 편지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1907년 강원도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1942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이효석은 심미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작가로, 특히 그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낭만적이며 페미니스트였던 그는 많은 사랑의 편지를 썼을 것으로 짐작되나, 남아서 전해 오는 편지는 한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편의 편지를 통해서도 이효석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씨,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 연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그 섬세하고 잔잔한 자연의 묘사를 그의 사랑의 편지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어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수필을 읽는 듯합니다. 그렇게도 여리고 고운 이효석도 사랑의 열정에 몸부림치며 괴로와했던 것을 보면서, 사랑의 불가항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을. 가까워 오는 가을! 아름답게 빛나면서는 안타깝게 뼈를 찌르는 가을. 새어 드는 가을과 함께 그대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얼마나 나의 간장을 찌를까를 나는 겁내는 것이오. 물드는 나뭇잎도 요란한 벌레소리도 그대의 자태가 내 곁에 없고야 무슨 값있는 것이겠소. 나는 그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한 적은 한번도 없었소. 벌레소리 그친 찬 새벽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채 나는 필연코 울 것이오. 자칫하다가는 어린애 같이 엉엉 울 것이오. 이 큰 어린아이를 달래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법하오. 사랑은 만족을 모르는 바다와도 같다고 할까. 가령 나는 진달래꽃을 잘강잘강 씹듯이 그대를 먹어 버린다 하여도 오히려 차지 못할 것이며 사랑은 안타깝고 아름답고 슬픈 것. 아름다우니까 슬픈 것. 슬프리 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오, 아름다운 정을 못 잊어서지요. 사랑 앞에 목숨이란 다 무엇하자는 것일까. 욕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격이 일찍이 사랑의 감동을 넘을 때가 있었던가! 나는 사랑 때문이라면 이 몸이 타서 금시에 재가 되어 버린다 하여도 겁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원하고자 하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태우소서. 깨뜨리소서. 와싹 부셔 버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
- 이효석으로부터 XX에게
“나는 그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 한 적이 한번도 없었소”라는 구절은 작은 벌레소리나 바람소리, 꽃 한 송이에서까지도 연인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지극한 사모의 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여인은 곧 자연계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자이며, 그 앞에 굴복하여 종이 되어도 좋으며 그 앞에 불타서 재가 되어도 좋은 특권을 가진 자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완전한 특권을 조건없이 부여해 주고, 그 특권을 자기에게 행사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모든 일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하고 맡기는 심정과도 같으며, 엄마의 사랑을 혼자만 차지하고 싶어서 꾀병을 부리거나 투정하는 심정과도 같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떤 어른일지라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해지며 세속적인 공명이나 야심은 하잘것없이 생각되는가 봅니다. 아벨라르. 당신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당신께서 내가 어린 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효석의 편지에서도 “욕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격이 일찍 사랑의 감격을 넘을 때가 있었던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공명이 하잘것없어진다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불붙어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고 탈 수 없는 유일한 것만을 남겨 놓은 상태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입니까?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깨뜨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불타고 깨어져서 찬란하게 빛나는 축제일의 불꽃과 같을지도 모르지요. 길게 흘러서 더욱 아름다운 유성, 산산히 흩뿌려져서 하늘을 밝히는 불꽃의 현란함은 거의 슬픔에 가까운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너무도 행복한 순간에 있을 때, 또 너무도 벅찬 감격에 맞닥뜨려질 때 이유없이 슬픔과 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지요. 눈물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 끓어올라 가슴에 가득차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넘쳐 흐르게 됩니다. 마치 비가 와서 고이고 고여 더 이상 담겨 있을 수 없게 되면 홍수로 넘쳐나는 강물 같이,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넘쳐 눈물로 흐르는 것이지요. 눈물은 인체의 구석구석에 끼어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함께 밖으로 내보내어 몸도 마음도 동시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줍니다. 어떤 이는 연애를 하게 되면 자주 울게 되므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억압된 정신적 외상을 언어나 행위를 통해 외부에 배출함으로써 병증을 없애려는 정신적 요법의 한 형태`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에 의해서 명명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슴 아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적절하고 필요한 치료방법인 듯합니다. 만일 불에 지지듯이 타는 사랑의 열병을 울지도 못하고 견뎌야 한다면, 아마 미치거나 자살을 하거나 하는 극단적인 방법만이 그 사람을 구원하게 될 것이므로, 결국 얼마나 끔찍한 사태로 몰아가게 되겠습니까. 이효석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사랑의 편지 속에 눈물을 흘린다거나 운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고통스러운 병을 주시면서 눈물이라는 치료법도 함께 주신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배려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과 함께 언제나 눈물이라는 따뜻한 샘을 갖고 있는 자는 영원히 젊고 축복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어랜애 같이 엉엉 울 수` 있었던 이효석이었으므로,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사장시키지 않고, 한 작가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운다는 것은 감정이 고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바로 감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삭막한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만 사는 사람에 비하면, 언제나 손해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그러나 감동하는 순간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나 슬픔으로 그의 생명이 가득차 있는 순간이므로, 그는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그만 일에도 쉽게 감동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보면서 당신은 가끔 어린애 같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벨라르. 내가 이렇게도 여리고 순수한 심정으로 돌아온 것은 당신의 부드러움과 사랑에 온 생명으로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어서 자의식과 고집과 자존심으로 꽁꽁 뭉쳐 있던 나의 매듭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되어 버리고 풍부하고 민감한 감수성과 눈물로 내 몸 속을 가득히 채워 버린 듯합니다. 내게 눈물과 충만과 기쁨을 돌려주신 나의 아벨라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원히 울 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어린 아이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당신을 위하여,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나의 눈물이 결코 마르지 않기를, 눈물과 함께 나의 그리움이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의 눈물은 사랑의 증거이며, 가득찬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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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조선인 도공
아름답고 작은 어항인 구시키노에 가면 조선인 도공들이 상륙한 지점을 기념하는 돌비석이 서 있는데, 14대 심수관의 필치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경장 3년(1598) 겨울 머나 먼 풍토를 넘어 우리들의 개조 이땅에 상륙하다.
그 비석을 지나 섬의 언덕에 오르면 아름답고 푸른 구시키노의 남쪽바다를 건너다볼 수가 있다. 바로 그 해안을 시마비라하마라고 하는데, 여기에 조선인 도공을 비롯한 포로들을 태운 배가 도착하였다.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미노가와의 하구가 있다. 여기도 조선인 도공과 포로를 태운 배가 도착한 곳이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구시키노의 시마비라하마에 박평의와 그의 아들 정용을 비롯하여 43명의 남녀가 상륙을 했고, 가미노가와 하구에 김해를 비롯한 남녀 10명이, 그리고 구주의 남단을 돌아서 가고시마에 남녀 20명이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평의와 김해는 일본 사람들이 하늘처럼 떠받든 도공들이어서 지금까지 그 기록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특히 김해의 경우는 그 가계까지가 문서로 남아 있고, 박평의의 경우도 조선인 도공 최초로 쇼야 (촌장과 같은 지위)가 되어 사족의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반해, 심수관 씨의 선조인 심당길은 도공으로 잡혀 온 것이 아니라, 후일 박평의의 문하에서 수련하여 도공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며, 심수관 씨도 이 같은 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잡혀 왔던 김해는 구시키노에 도착한 지 3년 후인 1601년에 동족을 배반하고 호시야마라는 일본 성을 받았으며, 아이라 군 조오사우도에서 가마를 열고 당시의 사쓰마 번주인 시마스 요시히로(임진왜란 때 조선에 나왔던 왜장)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구시키노에 도착한 조선인 도공들이 최초로 도자기의 가마를 연 것은 도착한 다음해인 1599년이었고, 이때 처음으로 구워 낸 그릇은 검은색이었다. 그것은 백토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번주 시마스는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교젠쿠로라고 이름 지으면서 하나하나 검사할 만큼 대견히 여겼다. 그러면서도 북쪽 지방의 이리타(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서 주도된)에서 생산되는 백자가 한량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시마스는 박평의에게 묘지다이토를 명한다. 다시 말하면 성과 이름을 쓰고 칼을 찰 수 있는 사족계급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병사와 말을 내려서 백토를 찾을 것을 몸소 독려하고 나선다. 이 같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실제로 박평의 부자가 백토를 찾은 것은 1614년, 그러니까 일본땅에 잡혀온 지 실로 16년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사쓰마야키의 특징은 빛깔에 있다. 아주 흰색이 아니고 엷은 베이지색인데, 백토의 성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만의 색으로 자랑하고 있다. 이들 도공보다 먼저 가고시마의 본성 밑에 도착하여 사족 대우를 받고 있었던 주가선을 비롯한 역관들도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고려촌이며, 지금도 도처에 이들이 살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임진년의 왜란 때 역관을 지내다가 왜병과 더불어 철수한 사람들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조선땅에 남아 있었다면 동족들의 응징을 받으면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입증은 이들에게 그릇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없었는데도 본성 밑에서 살고 있으면서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국에 산재하고 있었던 각 번의 도시 구조를 보면 본성 밑에서(혹은 곁에서) 사는 무사들을 죠카시라고 했으며 이들의 신분이 무사중에서도 상위에 속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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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 강을 건너다
기원 전 50년, 로마의 원로원은 그 당시 갈리아 지사였던 '시저'를 해임하고 군대 해산을 명령했으나 '시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폼페이우스' 일당을 몰아내고 전 이태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해서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말은 어떤 일의 용단을 내릴 때 쓰인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와 흡사한 예를 찾자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은 이씨 조선 건국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까운 예로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너 온 혁명 주체들의 심경 또한 루비콘강을 건너는 '시저'의 심경과도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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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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