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33 호
단기 4340. 2. 13 (음력 12.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
|
문학소식 |
2007년도 샘터상 작품 공모
삶에서 건져 올린 진솔하고 따뜻한 글들을 기다립니다. 샘터가족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바랍니다.
●응모 부문
생활수기 부문(제28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체험담, 합격* 저축 수기, 감동의 투병기 등 많은 이에게 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인간 승리기.
동화 부문(제29회) 다른 매체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 동화.
시조 부문(제32회) 매년 ‘샘터상 시조 부문’ 입상작 발표 후 이듬해 4월호까지 매월 ‘샘터 시조’란에 실린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됨.
●생활 수기, 동화 부문의 작품 분량은 200자 원고지 20매 안팎, 응모 마감은 2007년 3월 31일. ●각 부문 당선자 및 입선자에게는 5월에 열리는 샘터상 시상식에서 상패와 상금을 드립니다. ●응모 부문,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반드시 기재하여 주십시오. ●보내신 원고는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접수 방법
-우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5 샘터 편집부 샘터상 담당자 앞 (우)110-809 (겉봉에 응모 부문 기재)
-샘터홈페이지 : 월간샘터>샘터상 게시판
|
|
|
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든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류머티즘과 사랑을 믿지 않는다. / M.V.E.E.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22장)
|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 시이성인포일, 위천하식. 불자견(현)고명 불자시고창, 불자벌고유공, 불자긍고장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고지소위곡즉전자 기허언재 성전이귀지.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스물둘째 장
직역
휘어지면 온전하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아지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를 껴안고,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아니하니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니 으뜸이 된다. 대어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더불어 다툴 자가 없다. 옛말에 굽으면 온전하여 진다고 한말이 어찌 허언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하니 그것으로 돌아가라.
해석
휘어지면 온전하다. 대세를 따르는 것이 몸을 보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 힘이 약하면 굽혀라. 복종하라. 그럼 목숨을 보존할 지니. 이것이 노자의 뜻인가. 자 다르게 해석을 해보자
강직된 사고를 가지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휘어짐은 유연함의 표현이다. 어린아이는 빨리 배운다. 그 이유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고집한 다면 그는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러나 어린아이는 마구 습득한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유연하기 때문이다. 유연하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지고 만다. 자신이기를 고집하지 않기에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을 보자 물은 어디에 담아도 자신이 그 틀에 변용이 된다. 그렇다고 물 그 자체가 바뀐 것인가.
산길을 가다가 열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미혹하다. 하나의 길이라면 편하게 갈텐데. 무엇이든지 너무 많으면 미혹해 지는 것이다.
성인은 하나를 껴안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정답은 도이다. 그럼 왜 도를 껴안는가. 이성이면 더 좋지 않은가. 껴안는다는 말은 체득한다. 도와 합일된다는 말이다. 그 도는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옳다고 우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생각해서 옳으면 됐지 남에게 자신이 옳다고 항변할 필요가 있는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렇게 항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아닌데도 나서서 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는 누구를 의식하고 있는가.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을 한다. 이것이 바로 총과 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맹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스스로 반성해서 옳으면 비록 천만인이라도 두렵지 않다. 이런 자세로 삶을 살기 바란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22.
유연한 나무는 꺾이지 않고 탄력성이 있어 도리어 안전할 수 있다. 구부리는 것은 장차 곧게 펴기 위함이다. 움푹 패인 속에는 물이 가득 찰 수 있고 옷은 헤어져야 새옷을 입게 된다. 숫자가 적으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쉽지만 수가 너무 많으면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결심이 서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만 도만을 지키고 있으므로 이 세상의 규범이 된다. 성인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존재는 도리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기 때문에 큰공을 이룩할 수 있고 자만을 모르기 때문에 그의 공로는 오래가는 것이다. 성인은 남들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의 그 무엇도 그와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말한 '휘어지면 안전하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온전하게 천하는 그에게로 귀속될 것이다.
주
왕: 굽히다, 곡과 같은 뜻. 와: 웅덩이, 도랑, 우묵이 패인 곳. 폐: 옷이 떨어지다, 옷이 헤어지다. 포일: 만물의 근원이요, 제일 원인인 도 하나만을 굳게 지켜 변함이 없는 것을 뜻함. 식: 규범, 모범, 본보기. 자벌: 자기의 능함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 상전이귀지: 참으로 온전하게 천하는 그에게로 귀속하게 될 것이다.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우리에게 오로지 도 하나만 지켜 남들의 모범이 될 것을 상조하고 있다. 갈림길이 많으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여지는 경우가 많고 사물이 많으면 쉽게 선택을 못할 경우가 있다. 성인은 도 하나만을 고수하여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또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거나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는 더욱 잘 드러나며 공덕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휘어지는 나무는 유연성이 있어 안전하고 구부러지는 자벌레는 장차 몸을 곧게 펴기 위함이다. 우묵하게 패인 곳이 있어야 물이 고일 수 있고 옷은 헤져야 새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남과 경쟁하여 이기겠다는 생각이나 앞선 존재가 되겠다고 애쓰지 않는다. 사람이 살다 보면 지는 것이 도리어 이기는 것이 되는 수가 많고 무능한 것이 유능한 것보다 유리한 경우도 있다. 구부러져 대들보가 될 수 없는 나무는 오랜 세월 재수명을 다 누릴 수 있으나 곧은 나무는 재목으로서의 쓰임새 때문에 목수에 의해 먼저 베이게 된다. 성인은 끈덕진 승리에의 집념이나 집요한 자기 주장을 할 줄 모른다. 모가 나게 처신하지 않는 그는 도무지 누구하고도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남과 다투지 않고 천하의 본보기 가 된다면 진실로 천하의 마음은 그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요릿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불국사 사리탑
1902년 8월 어느날, 경주의 불국사를 찾아온 일본인 고적전문가가 있었다. 당시 동격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였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이 땅의 옛 건물(고건축물)과 고적의 실태를 조사한다고 하였으나 실제 내막은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한반도 침략 계획에 필요한 입체적인 정보수집을 위해 일방작으로 강청한 각 분야 시찰ㆍ조사의 일환이었다. 행동과 예산에서 특권이 보장되었던 세키노는 그때 한국의 주요 고적지와 옛 건물을 매우 정확하게 조사ㆍ파악하고 돌아갔다. 개성 근처의 폐사지에서,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을 처음으로 조사ㆍ평가한 것도 그때였다. 세키노의 발길이 처음으로 경주에 닿았을 때의 불국사는 말할 수 없이 황폐된 상태였다. 지키는 중도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절안의 유물을 훔쳐다 파는 무뢰한은 한국인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던 시절이라, 비록 무너지고 깨지고 했을망정 신라 이후의 걸작 석조물들과 불상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키노는 그것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는 이때의 조사정보를 2년 후인 1904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당시 한국에 건너와 있던 한 일본인 무법자가 불국사 쪽으로 당장 약탈의 손을 뻗쳤다. 다음은 현재 불국사 대웅전 뒤쪽 비로전 앞의 자그마한 보호각 속에 들어 있는 사리탑(보물 제61호)이 그때 당했던 수난의 내력이다. 1902년에 한국의 고적과 고건축물을 처음으로 조사하러 왔을 때, 세키노는 그때 벌써 개성에 정착하고 있던 그의 동족인 한 일본인으로부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신세를 생각해서 세키노는 일본에서 출판한 그의 (한국건축조사보고) 한 권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선물은 결과적으로 개성의 그 자에게 한국에서 약탈할 만한 중요한 문화재의 정보를 제공한 격이 되고 말았다. 1906년의 일이었다. 세키노가 알려준 정보를 갖고 경주로 내려간 개성의 일본인은 불국사에 이르러 몇 명 되지도 않았던 사승들을 위협하고 약간의 돈을 집어준 후, 섬세하게 조각된 사리탑 하나를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즈음 도쿄에 있던 세키노는 우에노 공원께의 '정양헌'이란 요릿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도 일본인이었다. 같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약탈해 온 불국사 사리탑의 불법적인 처사를 고발하기는커녕 (국화)라는 잡지의 요청으로 해설을 썼다. 물론 배후의 범죄 행위엔 입을 다물고 있었다. 1909년 이후, 세키노는 재차 한국에 와서 고적조사를 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의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불국사에서 일본으로 반출해 간 사리탑을 되찾아다가 원위치에 놓도록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그 사리탑은 도쿄의 요릿집에서 이미 딴 데로 팔려나간 후,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몹시 마음에 걸렸었는지 그후 세키노는 사리탑의 행선지를 계속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20년. 드디어 그는 도쿄의 나가오라는 제약회사 사장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1933년 5월 말의 일이었다. 몇 다리를 거친 소유자였던 나가오가 그때 세키노에게 어떻게 설복당했는지, 7월 말에 가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불국사의 원위치로 사리탑을 깨끗이 반환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편 불국사의 다보탑 돌사자를 약탈해 간 자도 사리탑의 범행자인 개성의 그 일본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대해선 세키노도 별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1902년에 조사할 때엔 4구가 다 있었는데 1909년에 다시 와 보니 비교적 완전한 2구가 반출돼 있었다고 언급했을 뿐이었다( (조선의 석탑파), 1912∼1913년). 그렇다면 그 뒤에 다른 일본인이 남은 2구 중의 하나를 또 약탈해 간 것이 된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다보탑에서 잃은 3구의 돌사자는 석굴암의 오층소탑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본 안의 행선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
|
|
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6장 말의 뜻
4.세계 구성과 말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표현도 아니며 인간의 활동도 아니다." 이 말은 언어가 단지 형식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껍질이 아니라 동적으로 의미를 간직하고 전달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말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들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라는 표현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인간의 정의들을 모두 포함한다. 왜냐하면 말은 이미 생각 및 행동과 순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간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며 나아가서는세계를 구성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의 집에서 거주한다" 인간은 언어에 의해서 세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언어로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산다. 이 말은 인간이 언어로써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언어는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것을 "나무"라고 언어화시키며 또 어떤 것을 "꽃"이라고 언어화시킨다. 편의상 시 한 편을 예로 들어서 왜 언어가 존재의 집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이 시에서 눈, 날, 꽃자리, 봄, 나, 너 등이 모두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각각의 대상이 고유한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유한 틀은 다름 아닌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이다. 고유한 틀은 언어라는 재료에 의하여 한 층 더 정교하게 꾸며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그리운", "저기 저기 저" ... 등은 집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장식한다. 이상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언어에 의하여 세계를 구성한다. 일단 세계가 구성되면, 인간은 관계 속에서 구성된 세계의 정보를 교환하면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체험과 표현과 이해의 순환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대상을 앎으로 인하여 대상을 특정한 틀(곧 언어)에 넣어 표현하고 따라서 대상을 전체적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대상의 체험은 곧 세계 구성이고 이 세계 구성은 표현에 의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전달되어 의사 소통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언어의 사용이 부정확할 때 그리고 언어가 사고와 함께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때 #1세계 구성이 불완전하므로 인간의 자기 반성이 성취되지 못하고 #2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성립하지 못하므로 현실적인 갈등이 심각해진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에 의하여 조화로운 세계 구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간 주체의 자기 반성이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반성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에 의해서만 의미와 개성을 소유한 세계 구성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도무지
본뜻 : 도모지는 옛날 조선 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이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 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 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바뀐 뜻 : 끔찍한 형벌인 '도무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도무지'는 그 형벌만큼이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돈
본뜻 : '돈'은 칼을 뜻하는 '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말까지 '전'과 '도'는 화폐를 의미하는 뜻으로 나란히 쓰였고, 소리도 '도'와 '돈'으로 같이 쓰이다가 조선 시대에 한글이 창제된 후 '돈'으로 통일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학설로는 고려 시대에 '도'가 무게의 단위 '돈쭝'으로 변용 되어 '도'가 '돈'으로 와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밖에도 '돈'은 '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사회 정책상의 훈계가 포함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돈'은 한 사람이 많이 가지게 되면 칼의 화를 입기 때문에 그것을 훈계하기 위해 '돈'을 '도'라 하고 그것을 '돈'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고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명도전 같은 화폐가 칼모양으로 생긴 것이 이 학설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무튼 위의 세 학설 모두 '돈'이란 것이 쓰기에 따라서 사물을 자르고 재단하는 '칼'처럼 유용한 것인가 하면 생명을 죽이거나 상처 내는 '칼'처럼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는 공통된 전언을 담고 있다.
바뀐 뜻 : 상품 교환의 매개물로서 어떤 물건의 가치를 매기거나, 물건값을 치르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재산 축적의 지표로 삼기 위하여 금속이나 종이로 만들어져 사회에 유통되는 물건을 가리킨다.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한다
중세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장원과 영주, 그리고 농노이다. 중세는 본질적으로 자연경제와 농촌의 시대였다. 서기 4-5세기의 게르만족의 이동으로부터 9-10세기 이슬람, 노르만, 마자르족의 침입을 겪는 동안 로마제국 시기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동안 모든 이민족의 침입이 종식되고 유럽사회가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처음으로 전반적인 안정을 되찾자 새로운 활기가 돌면서 중세유럽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중세도시는 우선 상업 부활의 산물이었다. 대체로 주교가 있던 지역 또는 대영주의 성채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특히 교통이 좋은 곳으로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일시적인 거류지였던 도시가 점차 상인들의 거주지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피렌느의 말대로 중세도시는 바로 '상업의 발자국' 위에 생겨났다. 중세도시가 경제적인 면에서 중세적인 농업사회에 상업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의미한 것 이외에도 도시가 농촌에 미친 영향은 컸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주변 농촌에 거주하던 수공업자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상공업이 활기있게 발전하면서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점차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의 봉건적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와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는 영주권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도시민들은 자유와 자치권을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고, 힘으로 쟁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도시가 12세기 중엽까지는 자유와 자치권을 획득하였고, 그것은 특허장으로 확인되었다. 그 내용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분의 자유와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유였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지역에 저마다 영주가 있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영주권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도시는 일종의 '특권지역'이 되었다. 누구든지 도시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하면 그는 그 이전의 신분이 무엇이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제 도시 안에서는 장원 안에서 일상화되어 있던 영주, 농노의 관계가 통용되지 않았고, 시민은 곧 자유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가지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 참사회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가지는 자치제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시 내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법을 제정하고, 이에 복종하고 도시를 수호하는 동시에 상호 도울 것을 선서로써 서약하였다. 그리고 저마다 예외없이 도시의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수입에 따라 평등하게 도시의 여러 가지 비용을 부담했다. 또한 자기가 거주하는 도시를 자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니 그들의 도시에 대한 애착심은 오늘날의 애국심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치공동체로서의 중세도시는 중세시대의 독특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시가 농촌의 거주민 특히 인신의 자유가 없는 농노들에게 매력적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영주가 부당하게 대우하는 장원의 농노들은 집단적으로 장원을 탈출하기도 했을 것이다. 도망친 농노에 대해서는 영주에게 추적, 체포권이 있지만, 일단 도시에 와서 1년 1일만 잘 숨어 지내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중세도시들은 이러한 농촌의 이탈민들을 흡수해서 자체의 규모를 키워 갔다. 자유인이 되면 도시에서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물건을 만드는 직공이 될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는 즐거운 놀이도 있고, 돈 버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자유의 날개는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중세의 억압구조에서 벗어난 농노는 자유의 의미를 배웠을 것이다. 도시의 공기를 호흡하면서 자유의 의미를 점차 깊이있게 체득해 갔을 것이다.
|
|
|
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절망을 버리면 희망이 보인다.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인들 중에는 의외로 고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일수록 연예인으로서의 수명이 오래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V 탤런트 C도 그렇습니다. 귀공자 같은 얼굴을 가진 그가 무지막지하게 고생했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남미로 이민을 갔습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사업에 성공했고, C는 미국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 때 집에서 꼬박꼬박 송금돼 오던 생활비가 갑자기 끊겼습니다. 집안 사정이 일시적으로 악화된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그는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어 간신히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업이 잘못 되는 바람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들어가셨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어머니는 친척집에 있는 것도 하루이틀이라 눈치가 보여 이제는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있을 방 한 칸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여관방에라도 모실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잠은 공원 벤치나 공사판에 누워 신문을 이불 삼아 덮고 잤습니다. 돈이 조금 모이자 어머니를 여관방에 모신 후, 식사와 약을 사드시라고 돈을 드리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는 지쳐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습니다. 이담에 돈을 벌면 반드시 일정액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리라... 그러나 세월은 마냥 흐르고 아무런 대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생명이 붙어 있으니 악착같이 살아보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루는 누가 그에게 영어를 잘하니 개인지도 교사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낮에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한 어린아이를 상대로 과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때, 그 집의 주인 아저씨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갑자기 뚱딴지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네 탤런트 한번 해보지 않겠나?” 그가 웃으며 하지 않겠다고 하자 주인 아저씨는 다시, “돈 벌기 싫나?” 하고 물었습니다. 돈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그제서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주인 아저씨는 방송국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탤런트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사가 없는 단역을 맡았으나 차츰 주인공 역을 맡는 최고 인기 탤런트가 되었고, 미모의 인기 탤런트인 H양과도 결혼했습니다. 그는 지금, 어려웠던 시절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던 그 약속을 어김없이 이행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면 일정액을 떼어 없는 사람을 위해 쓰리라는 그 다짐을 말입니다. 그는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매달 일정액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겐 학원 강사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도 학원 강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바 없었습니다. 그는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진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1학년 때부터 운전수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형이 막대한 부동산을 은행 등에 잡혀서 아파트를 지었는데, 분양이 되지 않는 바람에 다 날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형은 부도를 내고 도망가고, 어머니는 사글셋방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줄 도구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어를 가르치면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가, 아무 학원이나 들어가서는 선생으로 써달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구멍가게 같은 학원에서 먹고 자면서 한 달에 용돈 20만 원을 받으며 서너 달을 지내다가, 그런 식으로는 어머니를 모실 수 없겠다는 생각에 더 큰 학원으로 옮겼습니다. 한 달에 5만 원 하는 사글셋방에 살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 얼굴에는 황달기까지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낮에 6시간을 가르치고 밤에는 다른 학원에서 또 몇 시간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부터 과외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반을 그만두고 새벽 5시부터 그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하다가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겠다는 판단하에 죽을 각오로 덤볐습니다. 그렇게 일한 지 2년 만에 어머니에게 7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사드리고, 다시 2년 후에는 서울에 3억 원대의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했습니다. 지금은 학원 선생으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끔, 그때 자신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지 않았다면 지금 거렁뱅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더 어렸을 적에 고생해 보지 않은 것이 한스럽네. 그러나 더 늙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다소 늦게나마 지독한 고생을 거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네. 나는 두 번 다시 편안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걸세.”
그렇습니다. 젊었을 때의 고생이 큰 자산이라는 말이 진리라는 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아집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아이들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또 부잣집 아이라고 해서 대학 등록금을 덤벙덤벙 대주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원에 가는 청년, 심지어 결혼한 성인들에게까지 등록금을 대주고 유학비를 대줍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대기업 회장의 자제들이 선진국에 나가 석,박사 학위를 받아서 돌아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요직에 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에 기름때를 묻혀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식 한 트럭은 한 소쿠리의 경험보다 못합니다. 수십 년 땅을 매고 살아온 농부가 던지는 한두 마디의 투박한 말이 어느 석학의 말보다 더 가슴 깊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박차고 올라온 탤런트 C나 내 친구 같은 사람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시인 연산군과 내시들의 얘기
인수대비
연산군은 성종대왕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조선왕조의 27왕 가운데서 성종대왕만한 성군도 흔치 않았다. 성종의 치세가 세종대왕의 그것과 비견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시대가 태평성대였기 때문이지만, 쿠데타(세조가 주도한 계유정란)의 상처가 치유되고 명실상부한 문민정부로 들어섰다는 점에서도 세종조와 유사하다. 성군의 적장자로 태평성대에 태어난 연산군이 포악무도한 난정의 주인공이 되자면 그럴만한 배경과 여건이 주어져야 한다. 아무 까닭 없이 그런 난정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바로 그 배경과 여건은 어머니 윤씨(성종의 초비)의 사사(사약을 내려서 죽이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어머님 윤씨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연산군이 폭군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가정을 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비의 폐출과 사사는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인수대비는 조선조의 여인답지 않게 한학에 통달하였고, 범어에도 범절을 하늘같이 소중히 하였다. "연려실기술"은 인수대비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수대비가 세조의 잠저 때부터 시부모를 섬기어 밤낮을 게을리하지 않더니 빈으로 책봉된 뒤에도 너무 부도를 삼가였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서 내렸다. 그녀는 천품이 엄정하여 왕손들을 기르되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덮어 주지 않고 곧 얼굴빛을 바로 하고 경계하였으므로 시부모는 농담으로 폭빈이라고 하였다. 효성으로 봉양하는 여가에 부녀의 무식함을 걱정하여 "열녀전", "여교명감", "소학" 등의 서책을 가져다 그 절실하고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모두 일곱 장으로 나누어 이름을 "내훈"이라 하고 국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상의(정품5직의 상궁) 조씨가 발을 썼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시부모가 며느리를 폭빈이라 하였다면 그녀의 성품이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할 일이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중전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지아비를 잃어야 했고, 그로 인해 빈궁의 자리를 내놓고 잠저로 돌아가 무려 12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왕실의 과부로 지내다가 둘째 아들 성종이 보위를 이어 가게 되자 중전의 자리를 거치지 않은 채 대비가 되어 다시 입궐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기사회생이었다. 열두 살 어린 임금을 성군으로 다듬기 위해 그녀는 남다른 학문과 칼날 같은 성품으로 독단도,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한으로 뒤엉켰던 지나간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자위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성종의 초비이자 연산군의 모후 윤씨는 상궁 출산이었으므로 국모로 간택되는 과정에서부터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미 수태한 몸이었으므로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 윤비인지라 그녀의 행동거지가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의 행동거지가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는데, 비상을 간직하는 등의 투총의 기미를 보이다가 어이없게도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되어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윤비를 폐서인으로 삼아서 축출하라는 인수대비의 엄명은 서릿발과도 같았다. 아무도 반대의 뜻을 개진 할 수가 없었다. 윤비는 사가에 쫓겨나서도 인수대비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정중신들은 원자(어린 연산군)의 모후임을 들어 용서를 청하였고, 때로는 양식과 의복을 내려서 편한 삶을 누리게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인수대비는 오히려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그때 연산군의 나이 네 살이었다.
인수대비는 원자에게 모후의 사사를 알리지 않기 위해 엄격한 교육으로 일관하게 하면서도 성종으로 하여금 '향후 백년 안에는 폐비의 일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엄명까지 내리게 하였다. 보령 유충한 원자는 유년기를 넘기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때 이미 어미 소를 따르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님을 그릴 만큼 사모의 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따라서 모후의 일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는 주변 분위기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것을 어찌 나무랄 수가 있으랴, 그러나 왕실과 조정으로서는 숨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면서 모후에게 사약이 내려진 근원을 캐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중신들은 선왕의 고명을 들어서 만류하였고, 인수대비는 친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폭빈의 위엄으로 어미를 찾는 손자를 가차없이 나무라고 나섰지만, 그 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연산군의 사모의 정에 불을 지르는 빌미가 되었다. 또 그것은 분노로 변해 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연산군은 모후의 처참했던 종말을 알게 되면서 어머님에게 내려지는 사약을 방치한 사림들에 대해 복수의 칼을 뽑아든다. 두 번에 걸친 사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죽어갔던가. 뿐만 아니라 모후의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부왕의 후궁들을 잡아들여 자루 속에 넣고, 그녀들 소생의 왕자들로 하여금 때려 죽이게 하는 무자비함도 거침없이 자행하였다. 인수대비는 병상에 누운 채 연산군의 광태를 전해 듣고 예전과 다름없이 진노부터 터뜨렸다. 부왕의 고명을 저버리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가슴팍을 향해 술상을 던지는 패덕을 저지른다. 이 입에 담기조차도 민망한 패륜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수대비는 병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손자가 할머니에게 가하는 폭력과 만나게 된다. 아무리 포악무도한 사람이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패덕을 강상과 윤기를 목숨보다 소중히 유교국가의 임금이 저질렀다면 그 비난의 도가 더 클 것임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어미 잃은 어린 손자를 훈도하면서도 손톱만큼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던 인수대비의 태산교악과도 같은 위엄이 어린 연산군의 가슴에 원한의 응어리를 심어 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주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
글터 → 이글저글 |
데카메론
수녀원의 원장님께서 정부의 팬츠를 두건으로 착각하여 쓰고 나와서는 설교하여 가라사대 "고기의 자극은 막을래야 막을 길이 없다." 음담패설이 아니라 이태리의 유명한 작가 '보카치오' (1313-1375)의 작품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 데카메론이란 '10일 이야기'의 뜻으로, 페스트를 피하여 피렌체 교외의 별장에 간 일곱 사람의 남자와 세 사람의 여자가 각자 하루에 한 가지씩 열흘 동안 이야기한 백 편의 이야기를 수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용은 귀족과 승려에 대한 반항 등 당시의 세태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대담한 남녀간의 성관계를 다루고 있다. 근대 소설의 기원이자 르네상스기를 통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