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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2 호
단기 4340. 2. 12 (음력 12.25)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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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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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든지 전에는 젊었을 때가 있지만 누구나 전부터 나이가 든 것은 아니다. / 아프리카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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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一章 (노자 - 도덕경 : 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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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공덕지용, 유도시종. 도지위물, 유황유홀.홀혜황혜, 기중유상. 황혜홀혜, 기중유물. 요혜명혜, 기중유정. 기정심진, 기중유신.자고급금, 기명불거, 이열중보. 오하이지중보지상재? 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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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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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한째 장
직역
빔의 덕은 포용이니, 오로지 도는 이것을 따른다. 도가 물로 되는 것은 오로지 홀하고 오로지 황하다. 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이미지가 있네. 황하도다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네. 깊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처음을 살필 수 있지. 내어찌 뭇처음의 모습을 알겠는가. 이것(도)으로 알 따름이다.
해석
도는 빔의 덕을 따른다. 도는 그 자체로 구분을 짖지 않다. 그럼 물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도가 물이 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홀과 황이라고 했다. 홀과 황은 비몽사몽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와 물은 칼로 벨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자 그럼 도가 어떻게 물이 되는 지 살펴보자. 그리고 도와 물의 관계는 어떠한가 보도록 하자. 물은 인간의 의식이 규정을 짖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의 의식이 사물을 규정짓는 것을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홀하고 황한 가운데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이 이미지가 발전하여 사물이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황하고 홀한 것이다. 이 이미지가 굳어져 사물이 된다. 이것이 일장에서 본 무명이 유명으로 넘어가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천지는 이미 있다. 자 보자 어린아이가 사물을 익히는 것은 맨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사물의 이미지를 먼저 머리 속에서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이미지가 뚜렷해지면서 하나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자 잠으로 돌아가 보자 잠속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흐릿한 사물을 보게 된다. 이것은 사물이 흐릿해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물을 구분해서 보는 작용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때가 홀황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개개의 사물을 뚜렷하게 구분 되어 가는 것이 황홀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물을 깊이 파고들어 가면 깊고 어둡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물은 도의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사물 가운데 정기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사물이면서 동시에 도이다. 이 사물의 도를 통해서 뭇 처음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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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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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큰 덕의 형상은 오직 도에서 나올 뿐이다. 도라는 것은 다만 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태를 포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서 사물의 본바탕이 있다. 포착할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그 곳에 사물의 형상이 들어 있다. 도는 아득하고 신비스러우며 어둡기만 하지만 그 안에는 정기가 스며 있다. 그 정기는 매우 순수하고 그 속에는 믿음성이 들어 있다. 아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 불멸의 도로부터 만물의 조상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조상 때의 상황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앞에서 언급한 도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주
공덕: 큰 덕, 공은 크다는 뜻임. 공을 공으로 보아 공덕을 공허한 덕으로 풀이하는 이도 있으며, 통한다 두루 미친다의 뜻으로 보아 널리 통하는 덕, 두루 미치는 덕 등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용: 형용, 태도, 움직이는 모습. 황홀: 제 14장의 홀황과 같은 뜻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어슴푸레한 상태. 형용을 분별해 인식할 수 없는 상태, 꿈을 꾸는 것 같은 아리송한 상태. 상: 모양, 모습, 형상. 요혜명혜: 깊고 아득하고 신비스럽고 어두운 모양. 정: 정기. 불거: 사라지지 않음, 도의 영구불멸성을 말함. 열: 열은 통과 동일한 의미로 거느리다, 통솔하다의 뜻으로 쓰임. 중보: 만물의 처음, 만물의 시작, 만물의 조상이란 의미임. 이차: 차는 도를 지칭한 것임.
해
이 장에서 노자는 도는 만물의 실체요, 그 작용과 현상으로 구체화된 것이 덕임을 설명하고 있다. 도는 흐릿하고 황홀하므로 그 본모습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형상이 있고 실질이 있다. 도는 아득하고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알 수는 없으나 그 가운데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매우 순수하며 또 믿음성이 있다. 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그 이름은 불멸이다. 우리는 도로부터 천지, 음양, 일월의 운행과 변화의 원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만물의 배후에서 만물을 주재하는 만물의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도의 작용 때문이다. 도는 이 모든 일을 무위자연의 법칙으로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덕과 윤리적 질서는 사실 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도와 덕은 동전의 양면처럼 표리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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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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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석굴암의 감불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작고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에 석굴암은 또 다른 석조물을 도난당했다. 굴대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에 하나씩 안치돼 있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을 훔쳐간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의 소행이었다. 석굴암이 일본인들에게 주목되기는 1907∼1908년의 일이었다. 어떤 일본인의 기록을 빌리면, "1907년께에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 는 말이 누가 발설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일본인 사이에 퍼졌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증언은 그때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석굴암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우연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우편배달부였다고 한다. 당시 우편국장은 일본인이었다. 그즈음의 석굴암은 석축의 둥근 천장 일부와 전실부가 무참히 허물어져 석굴 전체가 온통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중들은 의병 난리 이후 산 밑으로 모두 피신하여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에 실어가면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이 땅의 문화재를 찾아 안 가는 데 없이 헤매던 일본인 무법자들이 옳다구나 하고 침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석굴암에서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던 작은 감불좌상 둘만 훔친 것은 아니었다.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는데, 혹시 그 속에 복장유물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때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불국사에서도 석조물을 약탈했다. 다보탑의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넷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고 달아났던 것이다. 당시 불국사엔 몇 명 안되는 중들이 있었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소위 통감부 시기에 한국에 건너와서 경주군 주석서기로 있으면서 소네 통감의 불국사 및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기무라가 뒷날 이런 말을 쓰고 있다.
"나의 (경주군) 부임을 전후해서,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 주고 빼앗았다는 뜻)되어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돼 있는 석굴 불상(석굴암 감불) 2구와 불국사의 다보탑 사자 1대(2구, 정확히 3구)와 등롱(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 (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이 글로 미루어 기무라도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귀중한 유물을 약탈해 간 일본인 소행에 매우 분개하고, 그 행선지를 알아내려고 애쓴 것 같으나 소네 통감이 불법반출한 석굴암 오층소탑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기무라는 또 하나의 비화를 적고 있는데, 석굴암이 하마터면 모조리 해체되어 서울로 운반될 뻔했다는 얘기다. 소네 통감이 불편과 험난을 무릅쓰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의 놀라운 구조와 감동적인 불상조각들을 구경하고 오층소탑까지 빼돌린 후, 세키노가 현지를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그 역사적ㆍ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자, 통감부는 보수 및 보호방법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결론이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하자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즉각 경상관찰사를 통해 그 계획을 현지 군수에게 알리고, 소요경비의 견적서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계획으로는, 해체한 석굴암의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토함산에서 약 40리 내려온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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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6장 말의 뜻
3. 대화
사람은 말하는 존재이다. 동시에 사람은 생각하고 행위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말로 표현한다. 사람은 "나"의 생각과 행위를 "너"에게 말로 표현한다. 이때 말은 벌써 관계가 된다. "관계"로서의 말은 대화이다. 인간 사회에서 대화라는 관계의 의해 드러나는 현상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공감이다. 그것은 일체감이다. 또한 그것은 조화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표현하고 또 표현하려고 애쓴다. 곧 대화를 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 안에서 일체감 내지는 조화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체감은, 곧 조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고 하자. 만일 처음부터 끝까지 도음만계속하거나 아니면 미음만 계속한다면 그것은 소나타도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서로 전혀 상관없는 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다. 그것을 우리는 음악이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소화의 울림이다. 이 조화의 울림이 내 영혼의 들림에 일치할 때 나는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그저 피아노 소리만 듣거나 무작정 도취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의 본질이 "울림과 들림"의 음악성이라는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화의 본질 또한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다. 그러므로 "나"만을 고집할 경우이거나 또는 "너"만을 주장할 경우에는 대화의 형태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대화가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면 그것은 "소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한 송이 장미꽃이 있다고 하자. 잎과 줄기와 가시와 꽃이 건강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한 송이 장미꽃을 우리가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한 송이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그 본질을 생명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야말로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처럼 생명을 본질로 한다. 생명은 일체감이자 공감이다. 단지 형식에 불과하여 겉치레에만 그치는 말을 우리는 대화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한다. 벌레가 우는 것을 벌레 소리라 하며 기계가 돌아가면서 내는 음을 기계 소리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력있는 대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우리는 물질 문명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이 물질을 더욱 발달시키고 금전이 금전을 더욱 풍요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피아노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붓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실상 오늘날의 물질 문명 사회에서 모든 것은 기술로 전락된 느낌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을 위한 수단 내지는 기술이 된 느낌을 준다. 삶의 목적은 오늘날 과연 어디에 있으며삶의 의미는 또한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삶의 의미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체험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근거로 한 대화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로 대화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두번째 대화는 나와 너 사이의 말이다. 세번째로 대화는 "세계 원리"의 표현이다. 첫번째 의미의 대화는 일상적인 말이다. 이것은 "지껄임"이며 "지나침"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은 허위와 기만을 특징으로 가진다. 제아무리 조리가 있고 제아무리 질서 정연할지라도 어떤 이의 말이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면 그것은 결국 지껄임이요, 지나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동하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반성이다.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하여 나아가서 서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나와 너를 넘어선 사회나 세계의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연인들 사이의 말과 우리들의 말은 서로의 이해를 안겨다주고 긍정적이며 달콤하기는 해도 냉정하지가 못하다. 대화의 본질은 "세계 원리"의 표현에 있다. 세계 원리의 표현이란 간단히 말해서 삶의 자기 반성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이 가면을 벗으면 나와 너 사이의 말로 상승하며, 이것이 다시금 자기 반성에 도달할 때 우리는 세계 원리의 표현인 대화를 체험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원활한 대화에서 일체감을 소유할 수 있다. 원활한 대화란 조화로운 대화, 곧 생동하는 대화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에서 그리고 나와 너 사이의 말에서 가지는 우리의 의견은 흔히 잘못된 생각이기가 십상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계에서 우리는 삶과 세계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주관적인 내 세계 안에만, 아니면 주관적인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우리들의 세계" 안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자기 반성이 아무런 계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의견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자기 반성을 향한 문이 열린다. 다시 말해서 부분적 피상적인 생각이 자기 전개를 하여 내면성 전체성을 향하여 눈을 뜰 때 삶의 의미와 세계 의미가 드러난다. 만일 우리가 대화의 본질이 자기 반성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한 자기 반성을 향한 아무런 계기도 창조적으로 형성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무한한 수단으로서의 말에만 집착할 것이다. 곧 언제까지나 "지나침"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과 세계가 실로 모순에 가득 차 있음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세계 원리의 표현으로서의 대화는, 곧 자기 반성으로서의 대화는 늘 은폐되어 있고, 달변이나 능변, 곧 지껄임과 지나침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어떠한 근거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능할까? 왜 허위와 기만으로서의 달변과 능변이 대화의 행세를 버젓이 할 수 있는 것일까? 달변과 능변은 실로 이기심과 지배욕의 미화이다. 그것은 전체성과 조화를 보지 못하는 독단이다. 달변과 능변은 전혀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을 억지로 주관적인 틀에 이끌어들이려 한다. 그러기에 달변은 항상 내용보다는 겉치레를 더 아름답게 하기 마련이다. 달변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기 내면에서의 유희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일체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공허함"이다. 달변과 능변이 현실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화려한 때문이다. 달변과 능변이 현실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화려한 때문이다. 달변과 능변이 참다운 대하가 되기 위해서는 형식과 겉치레 대신 내용과 생명력과 양심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달변만이 좋은 의견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좋은 의견이란 참다운 사고이다. 사람의 존재 방식인 말은 대화로, 생각은 사고로 그리고 행위는 일로 나타난다. 이들은 각각 분리되지 않고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사고와 대화가 없는 일은 죽은 일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분업 사회이다. 기계적인 의미의 "분업"을 인간적인 의미로 전환시키는 분임제적 일로 순환시키는 곳에서 우리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분임제의 일은 생동하는 대화를 내용으로 가지므로 폐쇄된 사회를 개방된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대화는 사람의 인격체적인 자기 전개이다. 자기 전개가 있는 곳에서만 이해가가능하며 삶과 사회가 세계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대화에 의해서만 사람은 세계에 대한 일체감 및 공감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화는 "관계"로서의 인간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부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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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본뜻 : 대충은 한자 대총에서 나온 말이다. 대총은 일의 중요한 부분만 대강 긁어모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어떤 일에 대해서 꼼꼼하고 완벽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강만 추리는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댕기풀이
본뜻 : 신부의 댕기를 푼 신랑이 친구들에게 한턱 내는 일을 가리킨다.
바뀐 뜻 : 요즘의 댕기풀이는 반드시 신랑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랑, 신부 양쪽 다 결혼 후에 친구들에게 한턱 내는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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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뿔 없는 소
중세 유럽의 농민들은 일상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장원에서 살았다. 장원의 규모가 저마다 달라서 하나의 촌락이 하나의 장원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고, 큰 촌락의 경우에는 두 개의 장원이 되기도 했다. 장원은 중세 농민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터전이었다. 모든 장원에 영주가 상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원 안의 토지는 영주의 소유였다. 장원내의 경작지는 영주 직영지, 농민 보유지로 나뉘어졌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영주 직영지가 농민들의 부역으로 경작된다는 점이다. 이 부역은 평균해서 1주일에 3일 정도였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여서 일요일은 노동하지 않았으므로 1주일의 반은 영주의 직영지에 가서 일해야 했다. 장원내의 농민 모두가 부자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인신의 자유가 없는 농노였다. 신분적으로 부자유했던 농노는 자기가 사는 장원을 떠날 자유가 없었다. 그는 장원의 영주 직영지에 필요한 노동력의 일부로서 장원의 영주가 바뀌면 장원과 더불어 새로운 영주에게 예속되었다. 농노는 부자유한 신분을 인두세를 물었다. 다른 영주 소속의 농노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해당 영주에게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는 의미에서 혼인세를 물었다. 농민 보유지도 농민의 소유지가 아니라 영주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하여 농노에게 할당된 땅이었다. 따라서 농노는 보유지를 상속할 때 상속세를 물었으며 상속자가 없는 경우에 토지는 영주에게로 돌아갔다. 농노는 각종 잡역에 동원되고, 영주 자녀의 혼인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공납을 바쳐야만 했다. 농노는 이외에도 각종 영주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것은 영주가 단순히 토지소유자라는 경제적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질에 있어 경제 외적인 권리요 권한이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공권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영주권의 구체적 내용은 다양하다. 영주는 장원내에서 제분, 제빵, 포도압축 등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시설을 독점하고, 장원내의 주민들에게 이를 강제적으로 이용하게 하고,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원내의 제반 생산시설의 독점과 이의 사용을 강제할 권리는 도로, 교량, 항만의 부두시설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주권의 핵심은 영주재판권이었다. 영주는 재판권을 행사함으로써 농노를 부자유한 신분에 예속시키고, 그들을 장원의 노동력으로써 토지에 결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재판권에는 도망간 농노를 쫓아가서 잡아올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영주들은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함으로써 수입을 늘리기도 했다. "뿔 없는 소"라는 말은 강력한 영주권 아래 있는 농노들의 비참상을 잘 대변한 말이었다. 물론 고대의 노예들과 비교하면 그 지위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농노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상속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근대적 자유인에 비해 중세의 농노의 지위는 열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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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생쥐와 인간
그는 무기수였습니다. 흉악한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중에 실수로 사람까지 죽였던 그는, 교도소 감방에 갇힌 채 자신의 삶과 세상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친구 하나 없이, 어느 간수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말썽만 부리던 그는 독방에 갇혀서 짐승처럼 밥이나 축내며 세월을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바싹 말라빠진 자그만한 생쥐 한 마리가 변기통을 뱅뱅 돌더니 죄수 쪽으로 다가오려다가 겁이 나는지 느닷없이 쥐구멍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아쉬었습니다. 그 생쥐라도 방 안에 있었다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생쥐는 그 다음 날에 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녀석은 죄수에게 다가오지 않고 변기통만 몇 바퀴 돌더니 사라졌습니다. 죄수는 그 녀석을 데리고 놀고 싶어 배급된 밥을 다 먹지 않고 그것으로 녀석을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죄수는 공기돌만한 밥덩어리를 변기통과 자신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생쥐는 처음엔 상당시간 망설이다가 자신이 없었던지 쥐구멍으로 향하더니, 금방 다시 돌아와 밥덩어리를 낚아채 가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녀석은 매일 죄수로부터 밥덩어리를 받아서 먹었고, 나중에는 밥덩어리가 죄수의 손 위에까지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죄수와 생쥐는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죄수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쥐구멍에 숨어 있던 생쥐는 쪼르르 달려나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죄수는 다른 방으로 몇 변이나 옮겼지만, 그때마다 생쥐는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채 비틀거리면서 용케도 그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죄수는 다른 지방에 있는 교도소로 이감되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짧은 생쥐가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간수가 방문을 열자, 생쥐는 그의 몸에 붙어 있다가 쥐구멍으로 몸을 숨기고는 고개만 빼곡이 내밀었습니다. 생쥐와 죄수는 이별이 아쉬운 듯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받았습니다. 죄수는 한동안 그 생쥐가 그리웠지만 결국에는 잊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전 교도소에서 근무했었던 간수가 죄수가 있는 교도소로 전근해 왔습니다. 그는 죄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죄수가 이감되고 근 한 달간 비어 있던 그 독방을 우연히 열어보았는데, 쥐 한 마리가 굶어죽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수가 누워 있었던 자리에 말입니다. 죄수는 자신을 찾아서 온 교도소를 뒤졌을 그 생쥐가 가여워서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 기억조차 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비록 인간으로부터는 아니었지만, 그에겐 난생 처음 받아보는 참다운 사랑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미물도 마음을 열고 사랑해 주니, 그 역시 죽음을 아끼지 않은 사랑으로 보답해 준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자신도 여생을 그 생쥐처럼 남을 사랑하며 살리라고.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자 간수를 비롯해 다른 죄수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의 삶도 사랑하게 되어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죄수는 모범적인 수형생활 끝에 가석방되었고, 그 후 공부를 해서 훌륭한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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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시인 연산군과 내시들의 얘기
* 만약 사람이 착하지 않은 일을 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치면, 남이 비록 해치지 않아도 하늘이 죽인다. (장자)
시인의 감수성
연산군은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집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1년 6월 10일 조의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의 시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115p. 한문 생략) 위의 기사에 따르면 연산군의 자제시집은 불태워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천만다행으로 그의 실록인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등재되어 있어 그의 시적 재능을 살펴보는 데는 아무 불편함이 없다.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학문적인 바탕(독서의 범위라도 좋다)이 없으면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었다. 비록 연산군의 치세가 난정의 시대임이 분명하다고 해도 그가 시적인 상상력과 시적인 감수성으로 정무에 임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연산군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연산군 초기의 시는 편수로도 얼마 되지 않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지극히 평온하고 다정하여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것은 곧 연산군의 폭정이 내재된 정서와는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집정 중반부를 지나서 종반기에 들어서게 되면 갑자기 시의 편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담겨진 내용도 평상의 그것과 달라서 읽는 사람들을 몹시 불안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화자가 드러내 보이자 하는 내심은 숨기지 않고 있다.
사시철 아름다운 경치도 놀이만은 못한 것이니 부디 그윽한 대 밝은 가을 달을 구경하리. 바람 이는 강에 물결 타고 건너기 좋아 마오.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 주리.
얼마나 솔직한 심회를 토로하고 있는가. 연산군의 집정 후반기는 난정의 연속이었고, 종반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광태를 보았다. 그의 언행은 일치되지 않았고, 군왕의 체통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가감없이 시에 담았다. 연산군이 남긴 125편의 시 가운데서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쓰여진 것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과실을 시에 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시의 내용도 전반에는 자신의 파행을 솔직하게 적었고, 후반에 이르러서는,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 주리. 라고 자신의 종말을 처연한 심정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 예견은 정확한 것이어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섬으로 유배될 때 아무도 그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중종반정이 있기 며칠 전 연산군은 기생들과 풍악 사이를 내왕하면서 전혀 현실과 다른 환자의 상태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문득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탄식하였음도 서로 적어서 남기도 있다.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의 심저에 깔려 있었던 참으로 인간적인 심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이 시를 쓴지 두 달 뒤에 보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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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
희랍어 데마고기(demagogie. 민중 선동)의 약자. 데모스 (demos 민중, 일반국민)에서 유래된 말로 '선동적인 언론', '엉터리 선전' 등의 뜻.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을 사실무근한 선전으로 선동하며 자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고 선동하는 아지테이션(agitation)과 대조되는 말. 우리 나라의 정치 풍토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데마'로서도 모자라 '마타도어작전'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얘, 너 요즘 미스터 김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지?" "얘두, 그건 순 데마야" 하듯 가벼운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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