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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0 호
단기 4340. 2. 09 (음력 12.22)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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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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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나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다. 불행한 것은그런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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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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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절성기지, 민리백배, 절인기의, 민복효자, 절교기리, 도적무유. 차삼자 이위문, 부족. 고영유소속. 견(현)소포박, 소사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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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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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째 장
직역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려라, 백성들의 이익이 백배가 될 것이다. 어짐을 끊고 의로움을 버려라, 백성들이 다시 효와 자애로울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려라, 도적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꾸밈일 뿐이며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순박함을 보고 통나무를 끌어 안으니,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해석
현대에서 지식을 버리고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지식을 버리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노자는 지식과 성스러움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속됨과 무지 또한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노자 당대에는 이 둘은 평행선에 놓여지 있지 않았다. 성스러움만을 추구하고, 속됨은 발로 짓밟았다. 그래서 노자는 성스러움과 지식을 깍아 내린 것이다. 지혜를 버리라고 한다. 성스러움은 속됨의 상대적인 표현이다. 성스럽다는 것은 속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성과 속은 동전의 양면이다. 차별을 두지 마라.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자체에는 성과 속이 없다. 단지 인간의 의식이 차별을 둘뿐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저것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이것은 편견이다. 독사를 나쁘다고 하는가. 뱀은 뱀의 길을 갈 뿐이다. 해충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서 해충과 익충이 갈라진다. 그러나 벌레는 인간에게 좋게 되고 나쁘게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뿐이다. 차별을 가지지 마라.
어짐과 의로움은 앞에서 다루었다.
순박함과 통나무는 근원을 의미한다. 뒤에 나오겠지만 이 통나무를 재단 하면 가구가 된다. 그리고 쓰레기가 남는다. 우리는 가구를 문명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통나무들을 베어 낸다. 무수한 통나무들을 베어 낸다.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나무 의자를 들여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보아라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나무하나 만들지 못한다. 단지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 볼 뿐이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을 파괴한 정도와 비례한다. 그것이 진정한 발전인가. 통나무를 잘라서 나무 의자를 만든 것은 인간에게 이롭다고 생각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계 전체에서 볼 때에 그것은 발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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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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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주 능숙한 재주를 끊어 없애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배로 도리 것이다. 인의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들은 효와 자애로 되돌아 갈 것이다. 기교를 버리고 이익을 포기하면 도둑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 즉 탁월한 재주와 지혜, 어짊과 올바름, 기교와 이익을 아주 포기해 버리면 문화의 혜택이 모자라므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돌아갈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갓 베어 낸 원목 같은 소박함을 보여 주어서 거기에 귀속시키면 사심과 욕구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주
절: 끊다, 없애다. 성지: 탁월한 재주를 뜻함. 국가 통치의 제도와 규범을 마련하는 성인과 현자들의 지혜와 재능을 의미함. 기: 버리다, 포기하다. 민리: 백성의 이익. 교리: 교의 기교, 기술. 이는 재리, 매매 이익을 의미함. 문: 이 문에 대하여는 옛날부터 연구자간에 이견이 많음. 장식품, 장식, 문장 표현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문명, 문화, 문식 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필자는 문화의 혜택으로 번역하였다. 견소포박: 소는 아직 염색하지 않은 흰 비단을 말하며 여기서는 본래대로의 순수함을 뜻함.박은 갓 베어 낸 원목 즉 통나무를 뜻하며, 여기서는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사물의 원래의 모습을 의미함. 모두 도를 상징한 말임. 질소, 소박, 질박 등의 말은 노자의 가치관을 잘 대변하는 단어임. 박은 박으로 표기할 수 있다. 포박은 후세의 육조 시대에 포박 자를 저술하여 신선 사상을 선양한 갈홍의 호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허식과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알몸 그대로의 소박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주 탁월한 재주를 끊어 없애면 백성의 이익은 증대할 것이고, 인의를 버리면 백성은 효도와 자애로 돌아갈 것이며, 기교와 이익을 포기하면 도둑은 없게 된다고 노자는 그 특유의 역설적 수사를 구사하여 자신의 지론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성지, 인의 , 교리를 끊어 버리면 생활이 단조롭게 되어 백성들이 마음을 쏟을 대상을 잃게 된다. 이럴 때 물감을 들이지 않은 순수한 비단이나 산에서 갓 베어 낸 거친 통나무와 같은 본래의 순박함을 보여주어 거기에 그들의 마음이 귀속할 곳을 마련해 준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사심과 욕구는 감소하게 될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문명과 문화의 겉치레 속에 스스로가 키운 간지와 욕망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을 최고의 이상으로 내세우며 일방적, 편파적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자는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적 허구성에서 탈피하여 알몸 그대로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철인이었다. 노자의 반문화선언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시대의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과 유사함이 있다. 루소는 인류가 문명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무한하게 증대되는 욕망과 유한한 인간 능력 사이의 불균형으로 갈등을 겪게 됨을 지적하였다. 또한 예술과 학문은 모두 인간의 악덕에서 생긴다고 주장하며 부패, 문약의 병폐가 바로 문화가 가져다 준 해독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도 자연 상태를 야만 상태로 규정하여 자연에의 복귀보다는 현실 정치의 개선책(인민 주의설)쪽으로 관심사를 돌린 점에서 결국 노자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우주적 질서와 인간 윤리의 합치를 이상으로 삼는 우리 동양철학의 자연관과 자연을 주로 인간과 대립되는 객관적인 대상 내지는 물질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서구인의 자연관과는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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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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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현해탄을 넘나든 시련의 경천사탑
일제의 통감부 설치로부터 한일합방에 이르는 통분스런 시기(1905∼1910년)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허겁지겁 탐을 냈던 문화재는 고분속의 고려자기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독은 산간벽지의 옛 절과 절터에서 석탑·불상·범종, 기타 모든 불교미술품과 옛 책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확대되면서 한국 안의 모든 종류의 문화재가 상상을 넘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그때의 일본인 약탈자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고려자기의 최대의 장물아비였고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한국 통치의 첫 단계로 소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인 1906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이 하나 있었다. 다나카 당시 궁내대신(장관)이었다. 그는 이토가 한국 침탈의 기초작업을 완전히 다져놓은 한반도를 유유히 찾아온 기회에 사적인 야욕의 치밀한 해적행위를 저질렀다. 문화재 약탈이었다.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서해로 해서 도쿄의 다나카 대신댁 정원으로 운반하라."
다나카가 서울에서 직접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인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간 일단의 일본인들은 앞서와 같은 지시 명령을 앞세우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로 달려갔다. 여러 문헌 기록에 경천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 일본인들이 몰려 갔을 때엔 절간 건물이라곤 이미 하나도 없는 황량한 폐사지였다. 물론 한명의 중도 없었다. 다만 고려시대의 특이한 대리석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가 13m도 넘는 거대한 탑신마다 온통 섬세한 부조를 가진 걸작 석조유물이었다. 바로 다나카가 노린 탑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이 경천사 자리의 대리석탑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정보 출처는 1902년에 현지를 조사하고 사진까지 찍었던 세키노의 '조사보고' 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뒤에 덜미를 잡히게 한 것도 세키노의 그 조사기록이었다. 여하튼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허위의 주장과 공갈 및 총검의 시위로 인근 주민의 저항과 관할 군수의 항거를 묵살하며 석탑을 마구 해체·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야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렸다가 기차로 인천까지 운반했고, 다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의 반출 범행을 성공시켰다(초판에서 말한 서해안 영정포에서의 선적설은 잘못된 증언 얘기였다. 부록1 참조). 그것은 한국의 임금님을 판 치밀하고 완벽한 문화재 약탈작전이었다. 그러나 다나카 궁내대신의 이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은 금세 소문이 크게 나면서 양식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엄중하게 그 불법행위를 지적한 사람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시타케였다. 통감부의 3대 통감으로 이완용과 더불어 한일합방 조약을 성취시켰던 일제 육군대장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눌러 앉으면서 이 땅의 독립사상과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지만, 문화재의 경우에서만은 몇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한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으로서 본국 정부의 한 고위층이었던 다나카를 서슴지 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뜻밖에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 다나카 역시 만만찮은 권력자였다. 순순히 속죄하며 애써 탈취해 온 석탑을 되돌려 보낼 리가 없었다. 결국 데라우치는 그의 총독 재임 기간인 1915년까지 도쿄의 다나카 저택 정원에 들어가 있던 경천사 석탑을 반환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가 감정적으로 맞섰던 데라우치 총독이 본국 정부의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오면서 더욱 약세에 몰렸다. 데라우치 총독이 언제부터 다나카의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 사실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세키노가 1912년 8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5회에 걸쳐 (국화)라는 일본 잡지에 발표한 조사논문 (조선의 석탑파)에서 그 석탑의 행방을 궁금해 한 대목을 읽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주목하게 되고, 또 그 반출자의 신분도 확인한 후 참으로 조선을 위하는 듯한 정치적 제스처로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 한 것이 다나카를 상대로한 '경천사 석탑의 반환요구' 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노는 앞의 조사보고의 '폐경천사 대리석탑'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경천사는 경기도 풍덕군(개풍군의 옛 명칭) 부소산 속에 있었으나 터뿐이고 내가 명치 35년(1902년)에 조사할 때는 대리석 다층탑만이 남아 있었다. 이 탑이 그후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소재지는 알 수가 없다."
이어서 세키노는 이 경천사터의 대리석 다층탑은 고려 말기의 이채로운 걸작이라고 강조하면서 탑의 세부구조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글로 인해 다나카의 불법반출은 오래 숨겨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윽고 경천사 석탑의 반출자와 이전지는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불쾌한 압력과 일부 여론에 굴복하여 탑을 다시 내놓는 모욕을 좀처럼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몇 해 동안 배짱 좋게 버텼다. 데라우치의 후임으로 2대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부임 3년째 되던 1918년에 가서야 전임자 데라우치가 해결치 못했던 경천사 석탑의 반환문제와 과거의 전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를 시켜 그 자초지정을 듣는 한편, 꼭 다시 찾아와야 하는가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고적조사과의 책임자였던 오다(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으로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총독 앞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탑은 개성 남쪽 풍덕의 부소산 경천사 자리에 있던 것으로서 지금 개성(서울) 파고다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터 십삼층석탑(10층의 잘못 이해)과 똑같은 형식에 속하며, 그 건립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으로서 원각사터 탑은 이를 모조한 것임. 경천사가 폐사가 된 후 야산에 홀로 서 있던 것을 명치 42년(40년의 잘못, 1907년)께 당시 궁내대신 다나카 백작이 이를 나이치(일본 본토)로 운반하여 물의를 일으켰음. 그 바람에 포장도 풀지 않은 채 현재의 장소(도쿄의 다나카저댁 정원)에 보관 돼 있는 것으로 듣고 있음. 전 총독 때에 수차 반환해 오는 논의가 있었으나 지연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다나카 백작은 하등의 수속도 거침이없이 그것을 운반해 감으로써 어떤 구실로도 그의 사유물일 수는 없음. 조선의 습관을 따르면 절이 폐멸함과 동시에 (탑 같은 것은) 나라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며 오늘에 있어서는 국유로서 본부(총독부) 소관에 속하는 것임."(당시 총독부 조사서류철)
이 오다의 조사보고로 미루어 보아도 고종황제가 다나카에게 경천사 석탑을 하사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계획된 조작이었음이 입증된다.: 이홍직 교수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종의 하사 운운은 믿을 수 없는 일이며, 고종이 경천사탑을 알 까닭도 없었고 다나카 자신이 그것을 강청해 가져간 것은 분명하다."(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년)
다나카는 피할 수 없이 그를 고립시킨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계속적인 반환요구에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총독부에서 오다의 명확한 전말 보고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탑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포장을 풀고 보니 그것은 도저히 복원 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다. 일본인들이 원위치인 경천사 절터에서 서둘러가며 급히 해체할 때의 심한 상처와 그후 일본으로 운반될 때의 파괴가 가중된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오긴 했으나 곳곳이 온통 파괴된 경천사탑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다시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기를 40년. 오늘의 위치인 근정전 동쪽회랑 밖에 과거의 위관으로 보수, 복원 된 것은 1960년의 일이었다. 현재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경천사 십층석탑을 그때 성공적으로 보수 복원한 사람은 그 방면의 전문가로 제일인자였던 임천(당시 국립박물관 연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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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6장 말의 뜻
1.언어가 나타나는 현상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언어를 놓고 이야기할 경우 등잔은 일상적인 삶이요, 밑은 언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시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떤 질문자에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일상적인 삶을 우리는 등잔 빛처럼 환하게 밝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상적인 삶은 애매함에 물들어 있으며 몽롱한 안개에 휩싸여 있다. 돌이 지난 어린아이로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을 하며 지구사의 어떤 종족이든 언어를 가지고 있다. 확실히 언어는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단 언어 현상을 반성해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관하여 말했던 것과 똑같은 난점에 직면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아무도 언어에 관하여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떤 묻는 이에게 답하여 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들의 삶에서 언어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우리들은 #1일생 생활에서 마치 언어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며 행동하지만 #2실상 언어의 본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알려지지 않고 신뢰받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깊이 신뢰하고 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눌 수 있다. "너 오늘 그 철학 책읽었니?" "응, 조금 읽어보았는데 어떤 부분은 쉽고 이해도 잘되지만 어떤 부분은 공허한 내용만 있었어."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언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정학한 답을 제대로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상 생활에서 언어를 깊이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언어가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있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1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기호로서 #2사고 작용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3대상이나 사태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지 않은 것은 언어라고 말할 수 없다. 언어는 소리나는 말이나 눈으로 읽음으로써 머리로 생각하여 그 말이나 글이 어떤 대상이나 사태를 지칭하는지 알게 된다."외침, 휘파람, 나팔 부는 소리, 시끄러운 잡음 등은 전혀 언어가 아니며 자연음이 되울리는 소리와 앵무새의 소리흉내도 마찬가지로 언어가 아니다. 내가 듣거나 말하는 소리 속에서 대상과 의미에 대한 나의 의도를 완성할 경우에 비로소 언어가 존재한다. 내가 그처럼 소리 속에서 나와 떨어져 있는 대상을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언어의 근본 현상이다 내가 말하는 소리는 소리 이상일 뿐만 아니라 소리 형상이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은 언어가 바로 음의 형상이며 글의 형상임을 알 수 있다. 바람 소리나 비행기 소리, 고양이 울음 등은 대상이나 사태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고도 동반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보면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모든 글은 대상과 사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과 글에서 우리들은 대상의 의미를 찾는다. 왜냐하면 말과 글로 이루어진 언어는 대상과 감각과 사고의 관계에서 대상의 의미를 지칭하는 형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언어는 두 가지 관계, 곧 외적인 관계와 내적인 관계를 가진다. 언어의 외적인 관계는 감각이며 언어의 내적인 관계는 사고이다. 언어가 감각 및 사고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여기 한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흑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전문
이 시에서 우리들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라는 첫머리부터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끝 귀절까지 시각에 의존하여 읽는다.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 곧 사고의 의미를 넓게 풀이한다. 좁은 의미의 사고는 논리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생각은 논리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느낌과 상상과 합리적 이성적 사고까지 모두 포함한다. 감각과 사고가 맞부딪힐 때 언어가 구성되며 또한 거꾸로 언어에 의해서 감각과 사고가 맞부딪혀서 언어의 의미가 떠오른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금빛 게으른 울음" 등은 무의미한 기호가 아니라 생생한 대상의 모습과 그 모습에 대한 인간의 넘쳐흐르는 느낌이 담겨 있는 의미있는 언어로서의 글이다. 시골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철 발벗은 아내"라든가 "따가운 햇살", "흐릿한 불빛" 등의 의미를 가슴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는 감각과 사고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언어가 제아무리 풍부한 대상의의미를 담고 있으며 지칭한다고 할지라도 언어는 기호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사고에 의해서 기호를 구성하며 또 한편으로 언어라는 기호는 우리들이 사고를 구성한다. 편의상 다음의 시를 인용하여 언어와 사고의 순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다라 흐릅니다려. 김소월 <가는 길>
나의 생각은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라는 기호를 구성한다. 이 기호는 정지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를 다시금 구성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나의 사고는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라는 내용을 다시금 언어로 구성하게 된다. "앞 강물, 뒷 강물"로부터 "흘러도 연다라 흐릅니다려"까지를 보아도 언어와 사고가 순환적으로 상호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언어와 사고는 동일한 차원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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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달하다
본뜻 : 본래는 닦고 다듬질한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단단히 단속하거나 몹시 몰아대거나 나무라거나 하는 뜻으로널리 쓰인다.
단골집
본뜻 : 이 말은 우리 나라 무속 신앙에서 온 말로서 굿을 할 때마다 늘 정해 놓고 불러다 쓰는 무당을 당골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단골 손님'이니 '단골 장사'니 하는 말들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단골' '단굴'은 호남지방의 세습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바뀐 뜻 : 늘 정해 놓고 거래하는 집이나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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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사에서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전통적인 시대구분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라인강, 다뉴브강이라는 유럽중부의 자연 경계를 국경으로 하던 로마제국이 5세기 말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몰락하고, 게르만 부족국가들이 서로마제국의 각지를 점령하면서 게르만족의 시대, 즉 중세유럽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시대구분법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중세의 시작을 7, 8세기의 이슬람족의 침입으로 설명하려 한 학자가 바로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느(H. Pienne, 1862-1935)였다. 피렌느는 로마제국을 지중해 국가로 성격짓고, 지중해가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경제적 통일을 유지시켜 주는 보루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서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 수립된 게르만 부족국가들이 로마의 지배질서는 무너뜨렸지만, 로마의 문화,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로마의 경제체제, 특히 로마의 화폐 등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 게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도 로마문화는 게르만족을 압도하면서 그 골격을 유지했고, 지중해의 해상무역도 여전히 활발했던 것이다. 특히 5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의 프랑크왕국 메로빙 왕조를 보면 그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메로빙 왕조는 로마문화의 기반 위에서 성립된 국가였으며, 로마제국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어가 행정사무나 상업에서 사용되었고, 일반인들도 그것을 배워서 사용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경제적으로 보면 지중해 동부로 전해진 동방의 산물이 지중해를 통해서 배에 실려 마르세유로 운반되고, 거기서 내륙지방으로 수송되었다. 또한 로마시대의 주화인 금화 솔리두스가 그대로 유통되었다. 즉, 게르만족이 침입하고 부족국가들이 난무하는 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인 고대의 전통, 다시 말해 지중해적 통일성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종말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피렌느의 견해이다. 그러면 중세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피렌느가 제시한 것이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이다. 즉 이슬람의 성립과 팽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서양의 고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침입에도 살아남은 지중해 중심의 고대 질서는 이슬람의 흥기하고 팽창하고 과정에서 무너졌다고 피렌느는 보았다. 이슬람 세력의 씨를 뿌린 것은 마호메트였다.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 아래서 알라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고향인 메카에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신교를 믿던 당시 메카 시민들에게 유일신교를 전파한다고 박해를 받고 622년에 메디나로 탈출해서 교세를 확장했다(헤지라). 그런 지 10년도 못 되어 다시 메카를 점령했다. 그후 메카는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는데, 마호메트가 죽을 무렵에는 아라비아반도의 절반 가량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슬람 세력은 놀랄 정도로 빨리 팽창하였다. 7세기 중엽까지 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그 이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까지 진출하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아래쪽 해안을 타고 북부아프리카 전역을 점령, 8세기초에는 스페인까지 이르렀다(711). 이슬람은 다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입했으나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였던 찰스 마르텔에게 저지되어 더 이상 유럽대륙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부지중해 연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 리비아,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지중해인데 반 이상이 이슬람의 세력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크왕국은 더 이상 지중해를 해상무역로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서유럽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지중해 연안에 있던 무게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그 결과 프랑크왕국은 새로운 시대, 중세유럽 문명의 주도자가 된 것이다. 즉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한 지중해 중심의 전통적 질서의 붕괴를 중세유럽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전제가 된 것이다. 특히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지중해를 이슬람에게 내주는 대신에 프랑크왕국을 견고한 내륙국가로 다지는 정치, 사회, 문화 개혁을 시도했다. 샤를마뉴는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부흥을 이룩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이 샤를마뉴제국에서 이후 중세유럽의 주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나왔다. 피렌느에 따르면 카롤링거 왕조의 성립이야말로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이 무너지고 유럽 본토에서 게르만, 로마,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질서에 이슬람이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슬람이 지중해무역을 중단시켰으므로 중세유럽은 토지를 매개로 한 농업 문화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중세의 시작을 8세기로 보는 피렌느의 시대구분법은 중세유럽의 성립에 이슬람이 미친 중요한 영향을 환기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중세유럽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외부적인 요인, 즉 이슬람의 팽창으로 보는 것은 역사발전을 외부적 요인으로 돌리는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고전적인 시대구분법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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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테리, 아름다운 마라토너
테리 팍스는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0년이나 되었지만, 북미 대륙에서 아직도 진정한 영웅으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채 도전하여 마침내 거룩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거둔 인간 승리는 예전에 살았던 그 어떠한 위인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말입니다. 테리는 유난히 농구를 즐기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온통 장미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인지라 그는 열여덟 살 때 암에 걸렸고, 그 때문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브리티시 칼럼비아의 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인 1977년 3월, 그는 뇌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서 마냥 다가오는 죽음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캐나다 암협회’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암 연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절단된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달고 전장 5천3백 마일이나 되는 캐나다 국토를 뛰어서 관통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한 사람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물론 암협회는 테리의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그 제의에 코웃음을 쳤습니다. 부모님도 물론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테리는 하느님이 자신처럼 약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고 굳건히 믿었습니다. 테리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보장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전한 왼쪽 다리로 두 번 가볍게 뛴 후, 의족을 단 오른쪽 다리를 한 번 옮기는 독특한 주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초기에는 하루에 반 마일도 제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하루에 반 마일도 제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왕 죽을 거면 이렇게 달리다가 죽자는 각오로 덤벼드니 고통이 점점 사그라드는 것 같았습니다. 8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23마일을 거뜬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안쓰럽게 생각한 가족들은 거라지세일(Garage sale; 이사하거나 할 때 자기 집 차고에서 중고, 정리품 등을 염가로 판매하는 것)로 약간의 돈들 마련해 주었고, 한 동네에 사는 두서너 명의 경영인들도 성금을 약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라톤이 세상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습니다. 테리는 국토 관통 마라톤으로 1백만 달러를 모으겠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죽지만 과학자들이 그 돈으로 연구를 계속해서 훗날 더 많은 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확고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2일에 세인트 존스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절단된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물집이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금이 들어오기는커녕, 경찰당국에서는 교통에 방해가 된다면서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테리는 쓸쓸해지고 낙담이 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이렇게 달리다 보명 언젠가는 나의 뜻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조금은 있겠지, 하는 담담한 마음이었습니다. 퀘벡에 도달했을 때, 뜻하지 않게 미국 시애틀의 한 라디오 방송국이 그와의 인터뷰를 전파에 실어 내보냈습니다. 그런 후, 사람들이 갑자기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언론 기관들이 그의 뒤를 좇기 시작했고, 캐나다 TV 방송국에서는 앞을 다투어 테리의 주행을 매일 저녁 뉴스 시간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 시민들은 그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면 일손을 놓고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테리가 사막과 같은 캐나다의 황량한 벌판을 의족을 끌고 혼자서 외롭게 뛰어가는 모습은 가정에서 TV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리의 염증은 날로 심해지고 고통이 가중되었지만, 그는 그만두라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테리는 토론토에 도착했습니다. 몹시 따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1만여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수로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전국에서 성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9월 1일, 온타리오의 선더베이에 도착한 테리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면서 쓰러졌습니다. 급히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암이 폐에까지 번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리의 마라톤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가 달린 거리는 무려 총 3천3백39마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테리의 마라톤은 실패가 아닌 대성공이었습니다. 성금은 그가 목표했던 1백만 달러의 27배나 되는 2천7백만 달러나 모아졌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비몽사몽간에도 몹시 기뻐하면서 살다 가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1981년 6월 28일, 테리는 스물두 살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전국에 조기가 걸리고 국민들은 눈물을 뿌렸습니다. 피에르 트루도 수상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테리 팍스는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애도했습니다. 테리가 마라톤을 그만두어야 했던 선더베이에는 그가 달리는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이름은 캐나다와 미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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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동성애 그리고 여인들의 삶
동성애와 키스
조선조는 주자학을 숭상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의 평가는 윤리와 도덕을 척도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치도의 이념조차도 강상과 윤기를 으뜸으로 여겼다 그러나, 전해지는 관행이나 풍속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예컨대 궐 안의 상궁들과 무수리들은 서로 동성애를 하는 것으로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하는 정한을 달랬던 것이다. 문종 임금도 세자 시절에 지어미의 동성애로 시달림을 받았다. 그의 첫 빈궁은 투기가 심하여 폐출되었고, 두 번째로 맞이한 빈궁 봉씨는 동성애를 하다가 폐출되었다. 봉씨는 송쌍이라는 무수리 아이에게 동성연애를 강요하다가 세종비 소헌왕후에게 발각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소쌍의 자복은 다음과 같다.
빈궁마마께서 쇤네와 동침한 후에는 시비를 시켜서 이불을 개게하지 않고, 빈궁마마께서 손수 이불을 갰고 더러워진 금침은 남몰래 비자를 시켜서 빨았습니다.
소헌왕후는 동성끼리의 동침을 어떻게 하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소쌍은 대답은 이러하였다.
빈궁께서 강요하여 하는 수없이 반쯤 옷을 벗고 병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빈궁께서는 저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억지로 자리에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모양으로 희롱하였습니다. 진노한 소헌왕후는 마침내 빈궁 봉씨를 불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진상을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세종장헌대왕실록"은 놀랍게도 빈궁 봉씨의 실토를 가감없이 기록해 놓았다.
소쌍이 항상 단지를 사랑하고 좋아해서 밤에는 함께 잘 뿐만 아니라. 낮에도 서로 목을 껴안고 혀를 바꾸어 가며 빨았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조 여인들의 자유분방했던 사랑의 형식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회의 규범이 새롭게 다져지면서 여성들에게도 그에 합당한 새 규범이 강요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여성을 일정한 틀에 가두는 규범이 성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조의 관행이 자리잡게 되는 성종 6년,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는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여 몸소 "내훈"을 펴낸다.
혼례는 만세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다른 성을 취하여 결혼하는 것은 먼 것을 가까이하고 구별을 두터이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예물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며, 말을 옳은 말이 아니면 사용하지 아니하며 곧고 신뢰스럽게 고하는 것이다. 신뢰스러움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되며, 신뢰스러움은 부인의 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가지런히 짝지어진 다음에는 종신토록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편이 죽어도 아내는 개가를 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고금의 명저를 두루 섭렵하며 언행의 규범을 가르치고, 효친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혼인의 신성함과 부부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어머니의 의무에 이르는 갖가지 내용을 망라함으로써 "내훈"은 조선조 여성들의 종합 훈육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숙주도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부인은 군자의 짝이 되어 집안 일을 주장하여 다스리니 가도의 흥하고 폐하는 것은 다 부인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남자를 가르칠 줄은 알면서 딸 가르칠 줄은 모르니 잘못된 생각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조선조에서도 명문가에서는 여성교육을 도외시 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조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으므로 규범이나 규제가 무너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남녀칠세 불공석. 남자와 여자가 일곱 살이 되면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규범을 놓고 해석이 구구한 것은 엄격하기는 해도 애매한 규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의 참뜻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자리'위에 앉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옳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녀가 유별하다는 관행까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섹스 스캔들이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남녀간의 본능적인 욕정은 규범이나 규제로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조에 있었던 섹스 스캔들의 주역은 단연 감동과 어우동이었다. 섹스 스캔들과 같은 부도덕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적은 사관들이 등재를 꺼려했다는 기록까지 있고, 보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감동은 검한성 유구수의 딸로 태어나 평강현감 최중기의 아내가 되었다. 최중기가 무안군수가 되어 임지에 부임하면서 아내와 함께 갔으나, 감동은 병을 빙자하여 서울로 오르내리면서 스스로 창기라 자처하며 많은 사내들과 간음하였다. 그녀와 관계한 사내들이란 대개가 사대부들이라 마침내 헌부에서 이를 문제삼기에 이르자 세종대왕도 진노하였다. "왕조실록"은 그녀를 거쳐간 사내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기록하면서 그 사건으로 파직을 당했거나 하옥된 사람들이 명단을 세세히 밝혀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총재 정호문, 상호문, 이효랑, 해주판관 오만로, 도사 이곡, 호군 전유정을 비롯하여 장연첨절제사 박종지, 행사직 주진자, 간관 유승유, 길주판관 안위, 진해현감 김이정 등 수많은 관원들과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과 같은 명문가의 자제들도 끼여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곤장을 맞은 다음 파직되었고, 감동은 평생토록 지방 관아의 종으로 부처되었다. '남녀칠세 불공석'이라는 규범도 일률적으로 규제하기 어려웠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보다 더 크고 소란스러웠던 섹스 스캔들의 주역은 어우동일 것이다. 어우동은 성종조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서 종실 명문인 태강수 동에게 출가를 했던 탓으로 외명부 품계인 혜인으로 예우 받았다.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며느리였다. 어우동의 스캔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근친상간이 중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우동은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 기(정종대왕의 현손)와 간통을 하고서도 또다시 육촌 시아주버님인 방산수 난(세종대왕의 손자)과 통정을 했으니 참으로 끔찍한 불륜이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마음에 든 사내에게는 몸뚱이에 자신의 이름을 자청(문신)하기를 강요했다. 이리하여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청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게 되었고,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전해지는 기록과 "왕조실록"의 가사에 따르면 어우동과 관계한 사람들은 그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병조판서 어유소와 직제학 노공필도 거명되어 있고, 헌부의 도리 오종년과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사내 중의 한 사람이다. 어우동에게는 번좌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동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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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대모
천주교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의 보증인으로서 남자일 경우에는 대부를, 여자일 경우에는 대모를 세운다. 그리고 대부 혹은 대모는 세례를 받은 자 즉 대자 혹은 대녀가 세례 때 한 약속을 지키게 할 의무를 가진다. 또 세례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및 그의 대부, 대모 사이에는 세례에 의하여 영적 친척관계가 성립되며 이상 3자간의 결혼은 무효로 한다는 규정이 교회법에 의하여 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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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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