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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9 호
단기 4340. 2. 08 (음력 12.21)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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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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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나 다 즐겁게 해주려면 결국 아무도 즐겁게 해줄 수 없다. / 이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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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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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대도폐, 유인의, 혜지출, 유대위,육친불화, 유효자, 국가혼란, 유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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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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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째 장
직역
큰 도가 없어지니까 어짐과 의로움이 있게 되었다. 슬기로움이 생겨나니까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 하니까, 효도와 자애가 있게 되었다. 국가가 어지럽게 되니까 충신이 있게 되었다.
해석
거꾸로 가 보자. 이순신이 충신인가. 그때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성웅으로 불렸을까. 을지문덕이 명장인가. 그때 수나라의 침공이 없었다면 그는 명장이 되었을까. 나라가 어지러운 뒤에야 충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효를 왜 강조하는가.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자고 왜 강조를 하는가. 그것은 쓰레기 분리 수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효를 강조하는 것은 효가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즉 육친이 불화 하기 때문이다.
슬기로움은 여기서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가. 그것은 꾸밈의 의미이다. 우리는 한 두개의 가면을 가지고 산다. 싫어도 좋은 척, 화날 때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위선이다. 인의가 생긴 것은 큰 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의를 외치지 마라. 큰 도를 살리는 것이 더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럼 큰 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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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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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위자연의 큰 도가 없어지면 인의가 나오게 되고, 인간에게 지혜로움이 나오면서 큰 거짓도 있게 되었다. 또한 가족간에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도니 자애니 하는 것이 있게 되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충신이 있게 되었다.
주
대도: 무위자연의 도. 인의: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이며, 인의는 맹자에 의해 부각된 개념이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맹자 양혜왕상). 양계초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노자서가 전국 말엽에 쓰여진 저술 서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노자서가 노자를 비롯하여 도가 사상의 총집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설은 부분적으로만 수용해야 한다. 지혜: 혜지라고 된 판본도 있으나 왕필(226-249. 삼국 시대 위의 학자. 23세에 요절. 주역과 노자에 탁월한 주석을 남김)의 주를 참조하여 지혜로 정정하였음. 대위: 큰 거짓, 사수을 뜻함. 위를 회의 문자로 보면 인위, 작위의 뜻도 있으니 굉장한 작위의 의미로 보아도 됨. 육친: 부자, 형제, 부부. 효자: 효도와 자애.
해
노자 서에는 풍자와 역설적 표현으로 그 당시의 기성 사회에 대한 문명 비평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구절이 많다. 자연의 이법인 위대한 도가 올바르게 발언을 행하여지지 않으니 인의로 규제한다고 했고, 인간의 지혜가 나쁜 방면으로 늘어갈수록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고 했다. 효행이니 자애니 하는 덕목을 강조하는 것은 가족간의 화목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충신과 열녀의 활약상이 부각되는 것은 국가와 집안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자연의 대도가 원만히 행하여진다면 이와 같은 인위적인 노력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무위자연의 도가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군주와 백성들이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노자가 꿈꾸는 이상향인 것이다. 그의 반문명적 비평 정신은 위계질서와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유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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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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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19세기 말엽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 근대사를 완전히 짓밟고, 국토까지 빼앗았던 일제와 일본인들의 온갖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중의 한 영역인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약탈, 도굴,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불법반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제한된 일본인들 자신의 기록과 역시 제한된 국내의 목격담 혹은 증언들이 그 윤곽과 만행의 일변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빙산일각의 확실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과거 일제와 일본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수난이 어느 정도 극악한 상태였는지를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일제의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일본인 골동상과 호리꾼('호리'는 '도굴'의 일본말) 패거리가 부산과 인천항으로 줄지어 상륙하여 고려의 왕도인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닥치는 대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수백 년전부터 일본인들이 최고의 진품으로 여겨 오던 고려자기였다. 이 20세기초의 왜구들은 장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이 땅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백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수백 수천의 고려고분을 모조리 파헤치면서 그들이 목적한 각종 고려자기와 부장품을 노다지로 약탈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문화재 수난 초기의 최대의 만행이었다.
옛부터 한국에서는 어떤 무덤이라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파헤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윤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옛부터 내려오는 가장 심한 욕 가운데 '굴총할 놈' 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것은 못된 짓이었다. 그런데 '굴총할 놈' 의 정도가 아니라 '굴총하는 놈' 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줄지어 밀어닥쳤으니 천인이 공노할 노릇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침략과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세력을 따라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의 앞잡이들과 현지에서 눈뜬 일본인 흐리꾼, 곧 '굴총하는 왜놈' 들이 개성 일대의 고분 속에서 파낸 고려자기들은 일단 서울로 모아졌다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엔 벌써 서울에서도 이 고려자기의 도굴폼들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세력 있는 일본인 수집가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한 일본인의 기록은 당시 서울에서의 고려청자 수집가로 이미 소문나 있던 일본인으로 아유가이, 아가와 등의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개성 일원에서 같은 패거리의 일본인들이 도굴해 온 고려정자들을 산같이 쌓아놓고 서울의 일본인 수집가나 일본 본토로 그것들을 중개한 골동상으로는 곤도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지금의 충무로 입구 근처에 가게를 갖고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소위 보호정치의 초대 통감으로 온 한국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저희 천황과 기타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실어내간 무려 수천 점의 고려청자도 대개 곤도를 통해서 무더기로 입수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에서도 원흉의 역할을 했다. 그의 고려정자 대량 반출과 수집은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를 최악의 상태로 조장시켰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1906년에 서울에 건너왔던 일본인 가운데 미야케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이미 개성지방에서 일본인들이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자기들을 접촉 혹은 입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뒷날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전부터 나는 옛 도자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는데, 애써 한국까지 가게 된 것도 실은 한국의 옛 도자기의 친밀감에 이끌린 때문이었다."
이 미야케라는 사나이는 당시 한국에 몰려 와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던 일본인 무리들 속에선 그래도 양식이 있는 지식층이었다. 그도 결국은 고려자기 같은 한국 도굴품들을 현지에서 헐값으로 마음껏 입수해서 즐기려고 서울을 찾아온 일본인의 한 사람이긴 했으나 당시 그의 눈에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비쳤었던지 약 30년 후에 가서 과거의 죄스런 비화들을 비교적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다음은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 라는 표제로 된 미야케의 회고기에서 추린 일제침략과 한국문화재 수난의 초기 기록이다.
"(1906년 현재) 서울에는 곤도라는 일본인의 골동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는 다카하시라는 사나이가 가게는 따로 없이 고려자기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에게 팔곤 했다. 이 다카하시란 사나이는 본시 순사(경찰)로 오랫동안 개성 방면에 근무했었다는 관계로 개성 부근에서 도굴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혹은 직접 개성에 가서 모아 가지고 오곤 했다. 곤도의 골동가게에 들어오는 고려시대의 발굴품(도굴품)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가져 갔다. 그러자 재미를 붙인 누군가가(물론 일본인) 자꾸 시켰던지, 그후 가게에는 고려자기의 수가 날로 급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서울의 한국인 지식층 가운데 고려청자의 존재나 진가에 눈뜬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또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고려자기는 일본인들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 일본인들끼리만 사고 파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미야케는 다카하시에게서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는 박식한 한국인이 왔길래 앞에 있는 고려청자를 보였더니 '이건 대체 어디 것이냐?' 고 진귀해 하는지라.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미야케의 증언을 빌리면,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9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토 통감이 서울에서 고려자기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휩쓸어 가져 갔는지에 대해서도 미야케는 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무렵 닛타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토 통감의 연회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던 자인데, 그러다가 여관을 개업했었다.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이 여관에 나타나 닛타를 시켜 '얼마든지라도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몽땅 사자' 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서 저기까지 30점, 50점' 하는 식으로 선물하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몽땅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의 매품이 동이 난 적도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데 성공한 일제침략의 괴수이자,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졸개들을 시켜 이 땅에서 저질렀던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과 유적 파괴의 범죄 행위를 또다시 반복한 불법침입자의 두목이었다. 이토가 통감 재임 2∼3년 동안에 그를 믿고 무볍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청자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이게 되자 도굴사태는 절정기로 치닫게 되고 서울과 본토의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도이었다. 미야케는 자신도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앞의 회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이토 통감이 골동가게의 고려자기를 몽땅 사들이는 일이 있은 후), 그 경기에 자극되었는지 바야흐로 고려청자에 열광하는 시대가 출현하였고, 한때 그것(도굴과 장사)으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 명이란 얘기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도굴을 당한 개성, 강화도, 해주 방면의 대소 고분의 수는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난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역(임진왜란) 때에도 고려고분 몇 개를 발굴(도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일본)에 전해져 있는 '운학문청자' 같은 명품은 그때에 가져온 것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선조에 대한 공경심이 깊고 특히 분묘는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있어 꿈에라도 그것을 발굴하여 예전 일을 알려고 한다든지 혹은 옛 기물을 파내어 그것을 즐기려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없었다. 이 일(고려자기 도굴)은 춘추의 필법으로 말하면 일본인이 발굴(도굴)한 것이다."
일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쓰고 있으니 그 실제의 양상이 어떠했을까. 미야케는 "그러나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 얼마간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고 무지했던 그들은 총을 가진 해적 같은 일본인의 위협과 다소의 품삯에 매수되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로부터 가장 꺼리고 몹쓸 짓으로 알고 있던 '굴총' 짓을 시켜서 얻은 출토품으로 뒤에 가서 한껏 돈을 번 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청자를 포함한 고려고분의 매장 문화재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밑천 안 들이고 착취할 수 있는 보물들이었다. 본국에서 먹을 것 없어 맨손으로 돈 벌러 온 무식한 악당들이었던 일부 일본인들에겐 그것은 특히 눈을 까뒤집고 덤빌 만한 노다지 금광 같은 치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개성 일원의 지리와 정보에 익숙해지면서,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집가를 통한 판로가 갈수록 확대 보장되면서 만행의 도굴장소를 개성에서 강화도와 해주 쪽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모든 지역의 고려고분이 파헤쳐졌다. 일본인 호리꾼의 수효는 날로 늘어갔고 한국인 하수인 없이 직접 도굴을 감행하는 자도 많아졌다. 미야케도 그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하고 있다.
"고려자기 도굴이 최고조에 달한 때엔 일본인도 직접 참가했는지 모르지만,일본인은 대체로 뒤에 앉아 출토품을 사들여서는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호사가들 사이로 들고 다니며 이익을 취했다."
미야케 말고 또 다른 일본인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1930년대에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의 증언이다.
"(조선의 고분들이) 오늘과 같은 참상을 격게 된 것은 병합(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본인이 조선의 시골까지 들어가게 된 후의 일이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건너운 자들(일본인)이 황금의 사발이 묻혀 있다든지 정월 초하룻날에는 금닭이 무덤 속에서 운다든지 하는 전설이 있는 고분을 금광이라도 파는 심산으로 파고 다녔다. 곳에 따라서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일본인)까지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자가 있었다니 딱한 일이었다."((조선) 6월호, 1932년, 조선총독부 간행)
일본인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약탈해 온 고려자기의 대대적인 장물아비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편으로 친일매국의 앞잡이였던 이완용(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창덕궁의 고종 황제를 정신적으로 위로해 드린다고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창설하게 함으로써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들을 고가로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국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을 앞장서서 이토와 체결했던 매국노 이완용은 그때 이미 허수아비였고, 미술품과 유물 수집을 실제로 맡은 자는 이토의 지시를 받는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이었다. 결국 일제 통감부 시절에 한반도에 상륙해 있던 일본인 호리꾼과 골동상들은 한국땅에서 빈손으로 갈취하고 도굴한 고려자기들을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한국 왕실에 고가로 팔아 넣음으로써 이중의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일본인의 한 증언기록을 빌리면 한 개에 보통 5원, 비싸야 10원에서 20원 정도가 그 시절의 고려자기 값이었는데 당시 화제가 되었던 최고 기록은 창덕궁박물관에서 사들인'청자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 으로 정확히 950원이 지불되었다. 그런 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본인이 당시 서울에 얼마나 많았을까 능히 상상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것을 불법으로 파 온 그 자들에게 그런 식의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지불하도록 한 이중의 역적이 또한 당시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하고 있던 이완용 총리대신이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창덕궁 이왕가박물관(해방 후엔 덕수궁미술관으로 불리다가 1969년 5월에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됨) 컬렉션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앞서와 같은 경위로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들이었다. 이완용이 어지러운 국운에 처한 고종황제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박물관을 꾸미게 되었다지만, 거기에 어떤 물건들이 수집된다는 것을 임금으로선 알 리도 없었고 도 그 시기에 그런 일을 원했을 리도 없다. 그것은 이완용이 이토 통감의 문화적 음모에 맞장구친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종황제에게 생색을 내려고 한 자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되듯이 이토였기 때문이다. 본래 조각가로 1913년에 이땅에 건너와서 한국의 옛 도자기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가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에게 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이다.
"어느날 이태왕(고종황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구경을 하시게 되었을 때,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들어진 거요?' 하고 묻자, 이토 통감이 '이것은 이 나라의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하고 설명을 하니, 전하께서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거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토는 말을 못하고 침묵해버렸다. 알다시피 출토품(굴총해서 꺼낸 물건)이라는 설명은 그 경우 할 수가 없었으니까."(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결국, 고종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궁중에도 전래품이라곤 없던 고려청자를 처음 보고, "저런 것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고 의아해 했을 때 이토는 아마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결국 대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만일 그때에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보는 그 신기하게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왕릉을 포함한 귀인의 무덤들이 모두 굴총되어 나온 물건들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년 후에 가서 영영 나라를 빼앗기게 될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비애와 망국의 한을 통감했으리라.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한국혼 말살 및 국가 병합 음모를 확고히 굳히는 동안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수천 점 이상의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수집했었다. 그중에서 그는 일품 103점을 골라 저희 메이지천황에게 진상했고, 그 외에도 당시 일본의 권력사회와 귀족들에게 한 무더기씩 보내어 한국에서의 최대의 선물로 삼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다른 숱한 경로를 통한 도굴품의 대량 반출과 병행됨으로써 일본 본토의 상류층과 돈 있는 수집가들에게 고려자기 수집의 대유행을 일으켰다. 그때의 정황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가을에 도쿄에서 열렸던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를 들 수 있다. 여기 얇은 가죽과 비단으로 장정된 고급 카탈로그가 하나 있다. 표제는 '고려소', 곧 고려자기란 뜻이다. 앞의 경매전 때의 출판물인데, 서문에 이런 말의 씌어 있다.
"이 고려자기는 옛날에 외국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면 한국 안에서는 단 1점도 지상에서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모두 고분에서 파내고 있다." "고려자기의 미술상의 가치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일본)의 호사가들 사이에 애완돼 왔고 또 귀중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구워진 본고장의 참으로 정교한 물건은 아직도 세간(일본 사회)에 널리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에 고분 속에서 나온 고려청자와 백자들을 여기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물건들이 '나이치'(일본 본토)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이래(이 점은 주목할 만한 증언이다)의 일이다." "다음에 고려자기의 출토지를 보면, 특히 정교한 것들은 송도를 중심으로 하여 100여 리 안팎의 분묘에서 나오고 있고, 강화도의 고려 귀인묘에서도 나오고 있다. 해주 등지에서도 때때로 나온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오는 것들은 고려자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질이 좀 다르다."
이 서문의 필자는 일찍이 한국에 건너와서 고려자기 도굴을 진두 지휘한 자였거나 아니면 뒤에서 적극적으로 조종했던 악질적인 장물아비였던 듯, 당시의 실태와 정보에 너무나 환하다. 거기에 죄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비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이런 말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지금은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의) 어디라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만일 있는 물건(고분 속의 고려자기)이라면 반드시 출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필자는 또 저들이 고려자기를 도굴하면서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몇몇 한국인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과장시키면서 정작 저희 일본인들의 죄과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들은 모두 오랜 세월의 풍우 속에 꺼져버려 우리들(일본인) 눈에는 분별할 수가 없으나 한국인은 막대기(쇠꼬챙이)로 그것들을 찔러보고 그 속의 음향으로 감정을 하고 파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나 뻔뻔스런 말이 많으나 생략한다. 도판들을 살펴보면 5명의 일본 귀족과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21명의 수장가가 출품했던 약 120점의 각종 고려자기가 사진으로 확인되는데, 개중엔 현재 국내의 국보 혹은 보물급에 들어갈 일품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서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당시 서울에 있던 수집가 아유가이와 골동상 곤도를 비롯하여 시라이시 아카보시란 이름의 일본인들이 출품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의 고분 도굴과 고려자기 약탈행위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을 물러난 지 몇 달 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에 항거하는 안중근 의사에게 통렬히 사살되는 사건 같은 한국인의 분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대 통감으로 온 소네아라스케가 한국인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하여 다소 신경을 썼던 모양이지만 그도 엄중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굴욕의 한일합방 후에도 일제 총독부는 일본인의 도굴행위를 한동안 묵인해주었다. 미야케는 (그때의 기억)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발굴(도굴)이 성해짐에 따라 조선인들의 반감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금지시키려고 했을 무렵엔 벌써 수천 명이라는 사람(일본인)이 그 짓으로 생업을 하고 있어 별안간 금지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활 문제라서 총독부에서 정책상 서서히 금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당분간은 묵인하는 상태였다."
결국 일본인 도굴꾼들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그들의 식민지 정착과 생활기반이 확고해질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곳곳에서 분노한 한국인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가령 1916년에 강화도의 고려고분을 조사하러 갔던 이마니시 류는 뒤에 이런 말을 기록 하고 있다.
"수년 전에 한 일본인이 도굴하여 유물의 일부를 꺼냈는데, 폭도(분노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들에게 습격을 받고 도망쳤다고도 하고 혹은 무사히 도굴품을 갖고 갔다는 설도 있었다."
이마니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자고로 조선인은 그 조상의 묘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는데 악질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의 조상의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하였다."
총독부 초기 이후 조선의 고적조사와 각종 고분 발굴에 참가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도 과거의 죄스런 사실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의 학술조사) 고물 수집가(일본인 도굴꾼과 장물아비)들에 의한 유적의 파괴를 조장시킨 좋지 못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조선에서의 유적의 파괴, 특히 고분 도굴은 러일전쟁 후 고려청자가 부장되었던 개성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정(일본 연호, 한일합방 후) 연간에 들어와 경북 선산 부근을 주로 하는 낙동강 유역의 유적이 도굴되었고, 1923∼1924년에는 낙랑고분군이 또한 대규모의 도굴을 당하게 되었다."(우메하라 스에지, (한국고대문화), 해방 후 일본에서 집필)
한편 일찍부터 한국의 옛 도자기를 수집·연구한 전문가인 고야마 후지오는 1937년에 이런 증언기록을 남기고 있다.
"1911∼1912년께에는 고려자기의 수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러 당시 그것들의 도굴과 판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 수천 명에 달했었다고 하며, 그후 금령이 엄해져 한때 발굴(도굴)은 뜸해진 듯했으나 오늘날까지 고려고분의 도굴은 끊인 날이 없고, 그동안 출토시킨 고려 고도기의 수는 몇 십 몇 백만 점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고야마 후지오. 권22의 (고려의 고도기) )
여기서 고야마가 말하는 몇 십만 혹은 몇 백만 점이란 그만큼 엄청난 숫자였다는 뜻이겠으나 어쨌든 그 대다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학자 이홍직 교수는 현재 일본의 민간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자기만 약 2만 점으로 추산했지만(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 사실은 그 이상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가령 근년의 어느 일본인 관계전문가의 견해를 빌리면 통틀어 3∼4만 점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보다도 현재 국내의 모든 박물관 소장품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합쳐서 약 2만 점으로 칠 때, 배 혹은 그 이상을 지금도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거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추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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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5장 행복을 찾아서
5.양심
앞에서 나는 인간의 행동은 중용을 통하여 결핍을 충만으로, 곧 악을 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중용을 이루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인간은 무엇을 살아가는가? 인간은 스스로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면 인간의 의식이 최초로 전개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성숙하지 못한 의식에 최초로 등장하는 세계는 일상성이다. 일상성의 특징은 자기반성이 결여된 무의미한 반복이다. 일상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러께 아침 나는 밥을 먹었다. 매우 맛있게 먹었다. 어제 아침에도 나는 밥을먹었다. 감기 기운 때문에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이처럼 일상성이란 아직 자기 의식의 과정으로 지양되지 못한 삶의 상태이다. 일상성의 특징은 반복이며 그것은 "지껄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지껄임은 "지나침"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는 "나"의 내면이나 세계의 원리를 깊이 음미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지나치며" 살아가고 있다. 일상성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눈에 띄는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일상성은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일상성 속에서는 인간의 삶 전체가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적 의식과 행위가 가미된 음식이 아니라 단순한 "먹이"로서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반복하기 마련이므로 일상성이고 가능적일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심 역시 인간의 존재 방식 중 하나이다.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양심의 형태를 몇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상성 속에서 나타나는 양심 역시 피상적이며 반복적이어서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조금 훔친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 "나는 권력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소유물을 어느 정도 가져도 그것은 내 양심에 거슬리지 않는다", "나는 상인이므로 상품에 가능한 많은 이익을 붙여서 판다고 할지라고 내 양심에 위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내면적이고도 본질적인 품성으로 생각한다. 비록 "너는 양심도 없는 인간이다"라고 표현하는 경우일지라도 이 말은 양심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태도는 양심에 어긋난다"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양심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가정하여 "어떻든 내 양심은 떳떳하다", "양심에 심한 가책을 받는다"라는 말을 흔히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우리들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양심은 과연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는 것인가?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신념으로서 존재한다.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이 실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성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내가 차지하더라도 내 양심은 떳떳하다"라고 할 때의 양심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껍질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적 본질적인 양심이 아니라 자기 변명이자 합리화이며,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양심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양심은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든 실존적이든간에 "부름"이다. 일상성으로서의 부름은 지껄임이다. 지껄임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것으로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지껄임은 지나쳐가는 피상적인 소리임에 비하여 말은 인간과 인간의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적인 대화를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리 및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자기 변명 자기 합리화의 형태를 취하기 마련이다. 자기 변명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을 망각한 허위와 가면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스스로의 삶을 결단하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단하는 일은 인간을 인격체이게끔 하며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결국 "자유의 부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행위는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일상적인 양심은 한낱 자기변명이다. 자기 변명은 "자기"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며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고통을 피하고 망각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애매함" 속에 "던져진" 채로 "지껄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말의 언표된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양심은 불려진 것에 대하여 무엇을 부르는가? 엄밀히 말해서-아무 것도 부르지 않는다. 부름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며, 세계의 사건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아무 것도 설명할 것을 가지지 않는다. 적어도 부름은 불려진 자신 안에서 '자기 대화'를 개방하고자 한다."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 일상성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변명으로서 삶의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한다.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기 변명은 상대적이자 우연적이다. 우리들은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류 대학을 나왔고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내 장래는 탄탄하다"라고 지껄이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껄임과는 전혀 다르게 "나는 나이를 먹었고 지위가 높으니 나이 어린 자는 내 말을 들어야 하고 지위가 낮은 자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껄이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은 다시 한번 "과연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양심이실로 존재하는 것인가?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인 양심은 흔히 권위로 또는 경제적 부로 아니면 지식의 축적으로 대치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각 개인의 이기적인 편익을 위한 "동굴"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차원의 양심은 습관적인 신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한걸음 한걸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물을 때 지금까지의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으로 전환한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자기 변명과 작 합리화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고통과 고뇌 앞에서 서서히 무화하고 침묵으로 전환한다. 침묵이 가면을 쓸 때 자기 변명으로 변하며, 침묵이 허위로 물들 때 그것은 자기 합리화로 변한다.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절도범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수년 전에 잠깐 실수로 교도소에 들어갔다는 사실로 인하여 취직이 어려워지자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회가 나를 냉대하므로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작은 절도 행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껄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그러한 절도 행위가 위배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반성하여 자신의 조화로운 삶을 결단한다면, 그는 지금까지의 헛된 양심을 벗어 던지고 침묵에 직면할 것이다. 지껄임은 삶을 지나쳐버리게 하지만 침묵은 삶을 결단하게 해준다.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는 말의 참다운 의미는 바로 이 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 그것은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을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으로서의 양심으로 전환시켜주는 동적인 양심의 계기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아직 내면적인 양심을 개방시켜 주지는 않을지라고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전체적인 현실성으로 전환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의식은 매일매일을 지나쳐 버리는 의식이기를 그치고 스스로를 투시하는 자기 의식으로 전환할 때라야만 내면적인 양심의 힘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경악과 침묵의 힘이 없다면 지껄임은 무한히 반복하는 순환의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양심은 유일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침묵의 양식으로 말한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고 "애매함" 속에서 "던져진" 채로 지껄이지 않는다. 앞에서 몇 차례 말한 것처럼 지껄이는 것은 가면과 허위이며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더 이상 지껄이거나 소리지르지 않고 "말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응시하며 말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이상 가면과 허위가 아닌 존재, 자신의 결단에 의하여 행위하는 실존,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무화시키며 경악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이 아닌가? 그러나 존재 가능성은 아직도 개방된 존재가 아니다. 의식이 무에 직면하여 있을 때 의식은 곧존재 가능성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매일매일의 일상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발견할 때 의식은 곧 삶의 전체성 앞에 서게 된다. 존재 가능성에 직면한 의식은 갈등하는 양심이다. 양심은 이중성을 가지고 여전히 허위와 가면의 탈을 쓸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내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의 갈등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성과 "자신의 삶"의 갈등 속에서 양심은 지껄임을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른다. 이제 양심이 부르는 것이 내면적 자아이고, 조화로운 삶이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은 한 인간의 내면적 완성을 부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부르는 양심의 고뇌를 망각하기 위하여 때로는 종교적인 신을 갈구하고 대로는 생물학적인 본능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양심은 전능하신 신이 부여한 것이니 신의 말씀을 따르자"라든가 아니면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므로 양심이란 가장 기본적인 생물학적 충동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외침과 지껄임은 둘 다 똑같이 우연성 반복성 상대성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침묵으로서의 양심이 자신의 갈등을 의식할 때 "부름은 나로부터 나와서 나를 넘어서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바로 나를 향한 부름이다. 침묵 속에서의 부름은 나의 안과 나의 밖에 울려퍼지는, 삶 전체를 향한 부름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양심은 관심의 부름으로서 스스로 나타난다." 일상성과 내면적 양심 사이의 갈등은 곧 인간의 관심이다. 관심은 침묵 안에서 말한다. 관심은 "애매함" 속에 전락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지껄이는 일상적인 개인을 지시하며 나아가서 동시에 자유에 의하여 결단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하기도 한다. 양심의 이중성은 곧 관심의 이중성을 암시하여 준다. 그러므로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갈등이며 동시에 갈등은 "관심의 부름"이다. 만일 갈등이 전혀 없는 양심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결단하는 힘이며 그와 같은 힘은 언제나 갈등 앞에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은 애매함을 명백함으로 전락을 상승으로 그리고 호기심을 명상으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갈등과 모순의 극복은 오로지 갈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갈등이 없는 세계는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은 공상 속에서 그리고 인형과 기계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양심은 관심의 부름이자 갈등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양심은 항상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떳떳할 때나 떳떳하지 못할 때나 양심은 죄책감에 직면한다. 이른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수가를 거닐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다? 가벼운 바람 소리와 갈매기의 날카로운 울음을 듣는다. 대낮의 평화 시장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장사꾼들의 드높은 목소리를 듣는다. 눈 쌓인 겨울 해변을 산책하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파도 소리와 눈망울이 큰 연인의 다정한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호수가에서, 시장 골목에서 그리고 겨울 해변에서 내가 듣는 것이 과연 바람 소리, 장사꾼의 목소리, 파도 소리인가? 내가 가장 깊숙한 내면의 침묵으로 침잠할 때 나는 아무 것도 듣지 않는다. 호수가에서 시장에서 그리고 겨울 해변에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듣는다. 참다운 양심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부름"이며 "자기 자신의 들음"이다. 나 자신의 부름이나 나 자신을 제대로 부르지 못할 때 죄책감이 생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모씨는 제 분수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며 지껄이고 돌아다닌다" 라거나 "기모씨는 어떤 지위에 올랐다 하면 작은 지위라도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지위를 휘두른다"라거나 "박모양의 성적이 탁월한 것은 그녀가 시험 때마다 남몰래 부정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경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경험을 되살려볼 때 우리들 자신이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지껄일 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어떤 사태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수 있다. "사실과는 전혀 달리 나의 아버님은 괜찮은 회사의 사장님이시다"라거나 "내 조상은 양반이다"라고 말할 경우 다른 사람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태를 가면화하여 자기 변명을 함으로써 우리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양심과 죄책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치되는 것인가? 죄책감은 양심의 한 계기이다. 죄책감으로 인하여 양심은 스스로를 확인한다. 물론 일상성 안에서는 이와 같은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죄책감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반성 내지 판단력은 곧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나 자신의 부름을 내가 듣지 못할 경우 나 자신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의식의 힘이다. 죄책감은 양심의 본래성을 개방시켜 준다. 죄책감이 없다면 나의 존재는 무의미하여진다. 죄책감이 잠자는 일상성 안에서는 나와 너와 우리가 모두 평균인이며 1차원적인 존재이다. 1차원적인 인간은 본능적. 이기적이며 단지 사회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죄책감은 자신을 반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주체로서의 인간은 어느 곳에서 반성을 하는가? 주체로서의 인간은 공동 존재 안에서, 곧 인간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한다. 죄책감은 사회 속의 부속품이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인 주체로서의 인간 공동 존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죄책감은 세계 확인이요,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동시에 양심의 확인이다. 양심이 자기 자신의 부름이라면 죄책감은 자기 자신의 들음이다. 양심이 조화로운 삶 전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양심은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양심은 우선 지껄임으로서 양심 자체를 지양시키며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계기인 죄책감을 전개한다. 양심은 한편으로 자기 변명과 자기 기만을 극복하여 또 한편으로는 자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의무와 자율도 역시 양심 때문에 가능하다.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허무이다. 허무가 허무로 정지한 상태는 반복적인 매일매일의 삶이다. 허무의 양심은 자기 변명이자 자기 기만이다. 양심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실존적인 연관성에서 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인간의 주체성의 부름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나 자신의 부름이자 나 자신의 들음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부름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참다운 들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나 자신의 들음은 행복을 향한 인간의 행위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 나 자신의 들음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허무와 죽음만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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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
본뜻 : 시울은 원래 고깃배 가장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길게 타원형으로 찢어진 배의 가장자리 모양이 눈과 입 모양을 연상시켜 '눈시울' '입시울'이라 한 것이다.
바뀐 뜻 : '눈 시울'은 눈 가장자리를 따라 속눈썹이 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표현을 쓰는데,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나오려고 할 때는 눈 가장자리가 먼저 발갛게 되는 데서 온 말이다
늦깎이
본뜻 : 본래는 '늦게 머리 깎은 사람'을 일컫는 말로, 나이가 들어서 머리 깎고 중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본뜻으로도 쓰이지만 요즘은 세상 이치를 남보다 늦게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간혹 늦게 익은 과일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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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표시로써 싸워 이겨라!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겨우 극복한 로마제국은 서기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로 잠시 안정을 되찾고, 콘스탄티누스에 이르러 마지막 빛을 발한다. 특히 이 시기에 오면 로마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질시와 탄압을 받던 기독교가 국가의 공인을 받는다. 그러나 그에 앞서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대박해가 있었다. 발칸 반도 출신으로서 병사에서 출세하여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제국을 넷으로 나누고, 두명의 황제가 그 밑에 각각 한 사람의 부황제를 두는 4제통치를 시작했다. 이는 광대한 제국을 황제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한 데서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였다. 결국 4명의 황제들을 통해서 제국의 문제점을 수습해 가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행정개혁에 이어 군제개혁 그리고 재정개혁을 단행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기 303년에 전통적인 국가 제사의 부활을 통해서 로마제국내의 로마인의 일체성을 고무하려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 종교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기독교도들로 보자면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되기는 했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의 군인황제 시대가 오히려 박해가 누그러진 시기였다. 제국 초기부터 로마 당국의 탄압을 받아온 기독교로서는 그 이전 40여 년간의 평화가 가장 긴 평화였다. 짧으나마 이 기간 동안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마지막 탄압에 직면한 것이다. 이번의 박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했고,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종래의 박해 방식에 교회당의 파괴, 성서 성기물의 몰수 등이 새로 추가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대박해의 주모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니라 그의 부황제였던 갈레리우스였다고 한다. 그런데 311년 갈레리우스는 몸이 썩어들어가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마침내 박해중지 칙령을 내렸다. 그 내용을 보면 기독교 탄압 그리고 그것의 중지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기독교도들은 조상 전래의 신들을 버린 괘씸한 놈들이지만, 박해 때문에 자기네 신마저도 예배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사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신 없는 인간이 늘어나면 곤란하므로 그들의 제사를 허용하도록 한다. 기독교들은 자기네 신을 예배하고 국가의 안전과 황제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라." 종래의 신들과 함께 기독교도의 신도 황제나 국가를 위해서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박해 황제에 의해 인정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는 그 다음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취해졌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되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또 한 명의 황제인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센티우스와 다투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부황제였다.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가장 큰 적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다.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막센티우스의 본거지는 로마였다. 반면에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를 세력권으로 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이 막센티우스를 타도하기 위해 312년에 로마시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단지 4만 여 명만을 거느렸지만, 막센티우스의 병력은 그 2-3배에 이르렀다. 객관적으로는 아주 무모한 싸움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전기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기적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는 3월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리스어로 "이 표시로써 싸워 이겨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또 그리스어로 크리스트의 머리글자인 '카이, 로(X, 감마)'를 병사들의 갑옷에 새기라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의 계시대로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는 로마 북부에 있는 밀비아교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승리로 로마제국의 서부 전체를 장악했다.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를 서방의 황제로 지명했고, 즉위하자마자 동방에서도 기독교 박해를 중지시켰다. 마침내 313년에는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이 내렸다. 기독교는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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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미치코의 작은 부탁
한 번은 뉴욕에 사업차 들른 친구를 케네디 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지하철과 연계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 11시경이었습니다. “아녀으 하시무니까?” 큰 키에 말쑥한 차림의 동양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묻지 않아도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처럼 보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말을 할 줄 아십니까?” 나는 한국어로 물었지만, 그는 그 이상은 한국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어를 그런 대로 구사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맨해튼의 한 호텔에 예약이 되어 있는데 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하철은 느리고 택시를 타면 2,30달러면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으나, 그는 절약하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호텔은 아주 위험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지리도 모르면서 그 주변에서 얼씬거리다가는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구멍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나를 쫓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내가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강도짓을 하려는 것으로 알았던가 봅니다. 일본사람들은 겁이 좀 많은 편이니까요. “당신, 그런 식으로 거기 있다간 강도 만나 죽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일주일에 적어도 2명은 죽는단 말입니다.” 내가 그 친구에게 공갈을 섞어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들이며 토큰을 넣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즈오라면서 혼자서 여행을 왔다고 했습니다. 늦은 밤에, 그것도 지리도 모르면서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가려는 그의 배짱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어서, 친절하게도 호텔 안으로 따라 들어가 체크인까지 해주고는 새벽 2시경에야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잊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가량이 지났을 때, 가즈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애인과 같이 왔는데 한 달 동안 있을 거라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는 일본인 집에 방 하나를 구했다면서 애인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일본에도 저런 미인이 있나하고.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일한다는 그녀는 이름이 미치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일본 식당으로 초대했고, 그 답례로 우리도 그들을 아파트로 초대해 만두국을 대접했습니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외모와 달리 가즈오는 대학을 갓 나온 스물다섯 살이었고, 미치코는 그보다 한 살 아래였습니다. 가즈오는 넉살 좋게 나를 형이라 불렀고, 집사람은 미치코를 동생이라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러 곳을 구경하며 다녔습니다. 한 달 후에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뒤 몇 통의 전화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가량이 지났습니다. 미치코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혼자서 뉴욕에 왔는데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맨해튼 18가의 반슨노블 책방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취재차 가는 길에 나에게 할말이 있어서 일부러 뉴욕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일부러 왔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간단했습니다. “저와 가즈오는 헤어졌어요.” “언제?” “몇 달 되었어요.” “왜?” “그 사람이 너무 게을러서요.” “그것도 이유가 되나?” “저에게는 되고말고요. 그래서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요, 부지런한 오빠가 가즈오에게 부지런히 살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그가 부지런해지면 저는 그와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어요.” “내가 부지런하다고? 난 전혀 그렇지 않아. 내가 게으르다는 건 아내도 알고 하느님도 아셔.” “가즈오는 오빠가 부지런하다고 늘 말했는걸요.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나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내가 누구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충고를 하겠습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와 그녀는 커피숍 앞에서 손을 흔들고는 헤어졌습니다. 나는 미치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즈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뉴욕에 온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든지간에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 그런 부탁을 했겠지요. 나는 물론 국제전화 요금을 물어 가면서까지 구태여 가즈오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미치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2년인가 3년 후 어느 날 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가즈오였습니다. 그는 영어 잘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이전 전화번호를 대고 바뀐 번호를 알아냈다면서 의기양양해 했습니다. 그는 신혼 여행을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미치코 좀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난처한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자신의 아내는 미치코가 아니라 치주루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치주루는 미모로 보면 미치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수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론계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습니다. 맨해튼 거리를 치주루와 내 아내가 앞서 걷고, 나는 가즈오와 함께 뒤에서 걸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미치코는?” “지금도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한창 날리고 있습니다.” “미치코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미안해. 그 말을 자네에게 하지 않았어.” “무슨 부탁인데요?” “자네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부지런히 살라는 말을 해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가 부지런해지면 자네와의 관계를 재고해 볼 수 있다고.”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하고 삼켰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치코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후로는 나에게 전화도 편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치코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으로 한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만일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들은 어쩌면 결혼으로 맺어졌을지 모르고, 또한 나는 그들을 지금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늦은 밤에 가즈오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내가 왜 전화 한 통 해달라는 미치코의 부탁을 소홀히 했었는지... 치주루와 맺어지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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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동성애 그리고 여인들의 삶
*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리이다. 군자는 그러한 풍속이 있는 마을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 (문중자)
궁중 소설
조선조 시대의 문학에서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거나 묘사한 작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모두가 뚜렷한 목적의식에 의해 쓰여진 탓으로 삶의 본질을 그렸다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감내하고, 마침내 광명천지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등 인중의 미덕과 권선징악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조의 3대 궁중문학이자, 여성에 의해서 쓰여진 국문소설이라면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을 들 수가 있다. "계축일기"는 광해군에 의해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되었던 조선비 인목왕후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참담한 모습을 소상하게 적고 있으므로 인목왕후를 섬기던 측근 상궁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폐모를 자행한 광해군과 그 일당의 패덕을 극렬하게 비방하면서 상전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삶을 인종의 미덕이라는 관점에서 그려 놓고 있으며, "인현왕후전"도 숙종비 인현왕후에게 박해를 가하는 희빈 장씨의 잔혹한 투기를 세세히 그리면서 인현왕후가 겪어야 하는 회한의 삶과 희빈 장씨의 비극적인 종말을 대비해 놓고 있다. 이 또한 인현왕후를 측근에서 섬기던 상궁이 편파적으로 쓴 것이기에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의 시각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한중록"은 추존임금인 장조(사도세자)의 지어미로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가 사가의 조카들에게 보내는 편지투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이 역시 사도세자를 박해한 영조와 그 신하들의 광태, 그리고 정쟁의 실상을 낱낱이 적으면서도 자신이 겪었던 여인으로서의 회환을 처연한 필치로 적어서 남긴 것이다. 문장은 아름답고 묘사는 정교하며, 내용은 처절하지만, 모두가 왕실과 왕비의 주변을 그리면서 정쟁에서 빚어지는 특수한 갈등을 골격으로 하고 있는 까닭으로 조선조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을 살피기에는 크게 미흡할 수밖에 없다. 위의 세 소설과 성격을 달리하는 국문소설로서는 서포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인현왕후를 괴롭히는 희빈 장씨의 악덕은 반드시 응징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인 까닭으로 중국으로 무대를 옮겨서 중국의 여인들을 등장시켜 마치 중국의 이야기인 것처럼 꾸며 놓았다. 게다가 작자의 종손인 김춘택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된 탓에 중국소설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우리 고전의 내용이 위에 적은 것과 대동소이하다면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 시대의 보편적인 여인상과 만나기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조선 시대의 관행과 여성에게 관련된 관행과 풍습은 대체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형편이어서 역사 왜곡이라는 더 깊은 골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 잘못 이해되기 쉬운 관행과 풍속을 살펴 보기로 한다.
여인들의 이름
조선조를 살았던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이었다고 믿는 지식인들이 뜻밖으로 많지만,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상당한 지도층에 있는 여류가 수많은 여성 청중들 앞에서 '조선조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은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우매하게 살았던가를 여실하게 보여 주는 일이며, 우리 나라 여성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가 없고, 또 그것만으로도 남존여비의 사상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알고도 남는다'라는 식의 열변을 토하면서 청중들의 역사 왜곡을 부축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쥐꼬리풀', 할미꽃'과 같은 하찮은 잡초나 들꽃에도 이름을 지어 주었고, 바닷속에서 서식하는 '불가사리', '말미잘', 과 같은 미물에 까지 이름을 붙여 주면서 유독 자신의 여식에게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상식 밖의 역사 인식이야말로 자국의 역사를 비하하는 일이며, 더구나 그것이 남존여비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야말로 제 얼굴에 침뱉는 무지가 아닐 수 없다. 또 족보를 살펴보고 여자의 경우는 사위의 이름이 대신 적혀 있었다 하여 그것이 여성들에게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면 그야말로 식자우환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조의 여성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섹스 스캔들로 일세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감동과 어우동이 있고, 숙종의 총비로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여인이 장옥정(장희빈)이며, 연산군의 총비가 장녹수, 광해군의 총비에 개시가 있고, 윤원형의 애첩이 정난정이다. 또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은 성삼문의 어머니는 미치, 아내는 차산, 딸은 효옥이었다. 그리고 단종릉에 배향된 3중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아내는 봉비, 딸은 종산이었고, 17세기 동양 3국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문명을 떨쳤던 허난설헌의 이름이 초희가 아니던가. 이렇게 적어 가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조의 여인들에게 이름이 없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지식인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무지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조선조 여성(특히 반가의.)들에게는 이름이 아닌 다른 존칭이 많았다. 출가 전에는 아가, 아가씨 등으로 불리었고, 출가를 하게 되면 아씨, 마님, 노마님 등으로 되었으므로 이름이 불릴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대단히 존경을 받았다던가, 아니면 떠들썩한 화제를 뿌린 여성이 아니고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며, 족보에 딸 대신 사위의 이름을 적었던 것은 연혼을 소중히 하였던 당시에 사회분위기에 따라 사돈이 가문을 명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른바 백성에 해당하는 상민 출신의 여성들은 순수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쓰고 있었으나, 그것이 "왕조실록"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음가가 한문으로 고쳐 적힌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구슬'이라는 이름은 '구슬이(세종 5년 7월 6일 조)'로 적었고, '방울'이라는 이름은 '방올(세종 23년 9월 17일 조)'로 적고 있다. '보배'는 '보배'(세종 18년 7월 4일 조), 혹은 '보배(태종 10년 5월 1일 조)'로 적고 있는데, '보배'의 경우 '배'와 '배'가 혼용되고 있는 것은 음가를 옮겨 적는 사람들의 취향일 것이라고 보아진다. '장미(세종 2년 8월 14일 조)'라는 이름도 많이 나온다. 이 이름에도 착각의 여지가 많다. 장미꽃은 Rose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장미꽃을 연상할 때 그것이 서양의 꽃이라는 선입견으로 '장미'라는 말이 일본을 통하여 전래되어 온 것으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Rose를 장미라고 하지 않고 바라라는 제 나라 말을 쓴다. 물론 "장미배양법"이라는 책이 명치 8년에 간행된 바 있으나 이 경우는 개량장미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장미는 Rose의 번역어가 아니라 중국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조 여인의 이름에 '장미'가 많은 것이며, 이때의 장미는 Rose가 아닌 들장미에서 따온 이름이다. 들장미의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인 중국땅임에랴. 국화(태조 7년 10월 28일 조)나 매화(태종 3년 3월 4일 조)라는 이름도 '장미'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은 확증이 있음에도 '장미'라는 꽃이름이 일본을 통하여 전래되었다고 짐작하여 단정하였다면 얼마나 무지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구슬 방울 보배 장미 국화 매화 등으로 불리어진 조선조 서민 여성들의 이름은 순결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귀하게 얻은 자식에게 천한 이름을 지어서 부르면 병치레를 면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개똥이(세조 14년 9월 6일 조), 쇠똥이(같은 조), 말똥이(광해조), 기시례(광해군 5월 6월 조), 등의 이름도 있어서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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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클레스의 칼
희랍 전설에 나오는 말. 시칠리섬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 (BC430--367)의 신하에 '다모클레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항상 왕의 행복함을 부러워했는데, 하루는 왕이 그를 보고 '네가 못내 부러워하는 왕좌에 하루 동안 앉아 보아라' 하며 자기 옷을 입히고 훌륭한 음식을 먹여 주었다.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다모클레스'가 무심코 천장을 쳐다보니 바로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칼이 한 가닥 머리칼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본 '다모클레스'는 혼비백산하여 물러 나오고 말았다. 이는 곧 권력의 자리가 겉보기와 같이 편안하지 못하며 항상 위험과 직면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전 미국대통령 '케네디'가 그의 연설에서 핵무기를 가리켜 '인류에 있어서 다모클레스의 검'이라 한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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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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