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27 호
단기 4340. 2. 06 (음력 12.19)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
|
문학소식 |
만인보 물꼬 터준 고은 일기 공개
“앞을 잘라냈다. 길에서 누구를 만난 우연으로 한 시대의 풍경을 연다.”
고은(74) 시인이 ‘문학사상’ 2월호에 풍찬노숙의 시대를 기록한 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기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시인은 일기를 공개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변증법에 자신의 삶이나 문학세계를 담아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긴 과정이 쌓여 만들어지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시인은 앞서 ‘문학사상’ 권영민 주간과의 좌담을 통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한 시대의 풍경을 제공하고 싶다”며 일기를 지속적으로 연재할 뜻을 밝혔다. 첫 연재분은 1974년 3월20일∼4월21일까지 한 달 가량의 기록. 내면 풍경을 담은 글에서 동료 문인들과의 일화까지 다양한 글이 실렸다.
“3월20일. 어제 그대로 오늘도 대통령은 박정희다. 북쪽에서 수령은 김 아무개다. 정치가 문화의 연대기를 먼저 규정한다. 문화는 늦다.”
“3월21일. 윤극영을 찾아갔다. 그가 자주 만나자 했다. 이런 그의 말을 자주 묵살해 했다. 72세였다. 한때 나는 수유리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는 그의 집을 좋아했다. 거기서 그는 돈암동에 종점을 둔 시내 버스 몇 대를 운영하며 사르트르의 책을 읽고 있었다. 만주 시대 연애 얘기. 그때의 애인이 지금의 노처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과의 통쾌했던 교유도 드러낸다. “김현이 나더러 육친이라 했다. 나도 그더러 육친의 육친이라 했다. 우리가 부를 노래를 하나 짓자 했다. 웃음소리가 바람벽을 뚫었다. 셈족(族)의 인사법,은총이 내리시기를,은총이 내리시기를….”
문인간첩단 사건에 대한 기록도 있다. “3월26일. 문인간첩단사건 공판에 갔다. 낯선 곳이다. 이런 곳도 있는 게 세상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병원과 감옥과 공동묘지가 있다. 재판소도 있는 것이다. 2시간 동안 검사 심문이 있었다. 조작 즉 진실.”
“4월4일. 드디어 대통령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초법의 권력이다. 대학가 데모에 사형 무기,5년 이상의 처형이 가해진다고 명시했다. 대통령 키는 작은데 그 권력은 너무 크다. 총과 붓,붓과 총의 충돌로 붓이 죽어버리는 세대가 오는가.”
동료 문인들에게도 준엄한 잣대를 들이댄다. “3월28일. 아침에 구상의 여의도 아파트에 갔다. 그는 진정서 서명을 못 하겠다 한다. 이 박정희의 술친구…휴머니스트가 서명을 피하는구나. 그와 더불어 마신 수천 잔의 술이 거품이었구나. 이런저런 사정만 들었다…박목월은 거절했다. 육영수와 긴밀한 이 청와대 시인이야 거절이 적격이겠다.”
흥미진진한 연애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4월10일. 김남조가 좋은 여자가 있으니 중매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결혼? 내가 결혼? 아무튼 17일에 만나기로 해버렸다. 미지의 여인이라,미지라,미지는 유혹의 극치를 만들어준다.” “4월17일. 왜식집 향진에 가서 초밥을 먹었다. 둘은 가고 그 여자와 나만 남겨졌다…청진동 다방에서 9시까지 있었다. 살결이 희다. 눈알은 검푸르다. 언어는 정확하다.”
소설가 이병주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있다. “식민지 지주의 아들이 작가 자신이고 그의 문학은 거기서 떠나지 못한다. 차라리 이효석은 경성제대 내국친일파라는 토속으로 돌아가 메밀꽃 고향에 안주한 것인지 모른다. 같은 현해탄의 관부연락선이라도 임화의 그것은 왜 다른 운명일까. 이병주의 지식인 영웅주의가 술안주가 되었다.” 게다가 고은의 일기에 기록된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단평들은 오늘날 그의 대표작인 ‘만인보’의 물꼬였음을 어림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대목. “4월8일. 선우휘는1·4 후퇴때 대동강 철교 건너는 백의민족 피난 행렬을 살려내어 강을 건너게 한 전쟁 휴머니즘의 구현자이기도 하다. 진짜 대장부다. 얼굴이 길다. 기마민족의 피가 이어진 존재다. 그의 소설도 ‘인간’ 그 자신도 ‘인간’이다. ‘바람의 기록’은 곧 한국문학의 또다른 보고( 寶庫)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
|
|
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나 거의 다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지만, 한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 에이브러햄 링컨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16장)
|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부지상, 망작흉.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도내구. 몰신불태.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열 여섯째 장
직역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히 하라. 만물이 나란히 자라지만 나는 돌아감을 본다. 대저 물이 잘 자라는것 같지만 모두가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돌아갈 뿌리를 이름하여 고요함이라 한다. 이것을 명으로 돌아간다라고 한다. 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름하여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왕이 된다. 왕이 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 맞으면 도에 들어맞는다. 도에 들어맞으면 영원 할 수 있다. 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아니하다.
해석
내 해석의 한계를 느낀다.
앞의 첫 문장은 이 글의 총화이다. 비어 있음과 고요함. 이것이 만물의 뿌리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항상 비어 있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고요함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쫒아서 뛰다보면 주의의 경물을 보지 못한다. 총을 쏘아 본적이 있는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는 오직 표적만이 보인다. 그 주위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넓게 보기 위해서는 달리는 기차에서 내려 배를 내밀고 뒷짐을 지고 보아야 한다.
나무를 보면 하늘로 치솟는 부분만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늘로 치솟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깊이와 넖이로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결과를 보지만 노자는 그 근원을 본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나무가 크지 못하고, 곧 쓰러질 것임을 아는 것이다. 천하 만물의 뿌리는 고요함이다. 그 고요함을 일컬어 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명이라는 것은 밝음이다. 자연의 움직임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은 늘 그러하다. 이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이 밝음이다. 이 밝음은 인간 자신의 깨어 있음의 표현이다. 자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는 것이 밝음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잘 자라나는 나무의 윗부분만을 보고 우리는 그 나무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것은 영구 불변할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근본으로 돌아갈 뿐이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된다. 여기서 늘 그러함이란 고정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늘 그러함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만 변하지 않는다. 근원의 차원에서 보면 잘난것도 못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사상이 틀리고 얼굴 색이 틀리면 배척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매한 짓이다. 나무의 잎이 틀리다고 나무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짓을 우리는 아직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평등을 이야기 한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함을 알라.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모든 것이 평등함을 알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때 공평하게 된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면 천하가 그를 따른다. 이것이 하늘에 맞고 도에 맞는 것이다. 그러하면 내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은 것이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16.
하늘과 땅이 그 공간을 비우는 것이 극치 점에 이르고 고요한 상태를 지키는 것이 무르익으면 만물은 일제히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 살아 움직이는 만물이 다시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감을 본다. 싱싱하고 무성하게 자라는 것들도 결국은 각기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정)이라고 한다. 이것을 천명으로 돌아가는 것 즉 복명이라 한다. 천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영구 불변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불변의 법칙에 통달하는 것을 명찰이라고 한다. 이 영구 불변의 법칙을 알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면 불행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영원불변의 이법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의 그릇은 만물을 다 포용할 정도로 커진다. 만물을 어느 것이나 차별이 없이 포용함을 곧 공평함이야말로 진정한 왕도이다. 완도는 천리이며, 천리는 곧 도인 것이다. 도는 영원하다. 이 영원한 도를 간직하면 죽을 때까지 결코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주
치허극: 겨울이 되어 모든 생물의 활동이 멈춘 듯한 공허한 풍경을 묘사한 말임. 병작: 다 함께 생성 발동하여 변성하는 것. 복: 돌아가다, 복귀하다,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함. 이는 곧 하늘의 법칙이 왕복하고 순환하기 때문이다. 운운: 초목의 꽃과 입이 무성한 모양, 운운으로 기술한 판도 있음. 상: 영구 불변의 법칙, 제 1장의 비상도의 상과 동일한 의미임. 망작: 사리에 맞지 않은 경거망동을 뜻함. 용: 너그러움, 포용, 관용을 뜻함. 공: 공평무사하여 편벽함이 없는 것. 천: 천리, 하늘의 법칙. 몰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몰은 몰과 통함.
해
겨울이 오면 산천초목이 조악하여 쓸쓸하여 고요해진다. 빈 벌판은 커다란 구멍 같은 상태가 되며 적막하기만 하다. 이런 상태가 절정에 달하면 다시 봄이 찾아와 만물이 생기를 되찾게 되나 다시 고요함으로 복귀하는 생명의 순환을 되풀이한다. 노자는 항상 근원적 차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생명의 존엄성은 실체를 응시하므로 새삼 깨우칠 수 있고 유한성은 무한성을 자각함으로 더욱 그 자체의 일회성, 특수성을 깨닫게 된다. 천지 내의 모든 생명은 다 유한하고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배후에는 영원 불변의 도가 머물러 있다. 그것으로 인해 개체적인 사멸의 비애는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체의 일회성과 특수성은 도의 보편성, 영구성과 연결하여 생명의 순환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모든 개체는 결국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고 사는 것이 순환 과정이니 이것이 곧 자연의 영구 불변의 법칙이다. 이것을 모르고 경거망동하면 몸을 그르치게 된다. 이러한 법칙을 깨우친 사람은 만물을 차별 없이 포용하는 큰그릇이 된다. 청탁을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포용함을 공평함이라 한다. 이 공평함이 곧 왕도이며 하늘의 법칙이다. 이러한 자연의 상도를 체득하여 몸가짐을 단속한다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근원에의 복귀 사상을 서술하고 있는 노자의 이 장을 읽고 있으면 주역의 복괘(곤상,진하)가 연상된다. 복의 괘는 양기가 다시 돌아와 서서히 세력을 신장하는 괘이다.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다. 무리 없이 때에 순응하며(곤) 건전하게 작용하는 덕(진)을 갖추었으니, 나아가나 돌아오나 잘못됨이 없다. 벗들이 모여 와도 탈은 없을 것이다. 가던 길일을 칠일만에 돌아오니 번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양의 기운이 이제 벗어나게 된다. 적극적으로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이 괘는 겹겹이 쌓여 있는 음기 속에 한줄기 양기가 싹트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제 고난과 괴로움을 안겨 주었던 시절은 서서히 물러가고 번영과 발전을 약속하는 새봄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미약한 상태이므로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금물이다. 침착하고 신중하게 장래의 대계를 세워야 할 것이다. 복은 동지를 나타낸다. 동짓날은 지일이라 하여 이날부터 양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천지 자연은 가고 오는 순환 관계에 있다. 해는 서쪽으로 지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동쪽에서 또 다시 떠오르게 된다. 계절의 바뀜도, 나고 죽는 생사의 이치도, 모두 가고 오는 순환의 법칙인 것이다. 인생 사에도 성공 끝에 실패가 오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리에 달관한 사람은 그때 그때의 눈앞의 이해 득실에 구애됨이 없이 하늘의 법칙을 즐기며 근심하지 않는다. 겨울이 오면 또한 멀겠는가?(If winter comes, can spring de far behind? 셸리의 '서북부'에서)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1장 선각의 인맥
한국민속학의 정열적인 개척자 석남 송석하
우현 고유섭은 유형문화재를 연구대상으로 한 한국미술사의 개척자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무형문화재 쪽의 가면극과 그밖의 전통적인 민속의 조사·연구에 투신했던 또 한 사람의 정열적인 개척자가 있었다. 곧 석남 송석하였다. 두 사람은 1930년대에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민족문화재의 큰 두 갈래를 분할해 갖고 다같이 영예로운 개척자가 되었는데, 우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 민속학계는 석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1904년생의 동갑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민속학 분야에도 미술사의 위창 오세창처럼 조선 말엽에 눈떴던 존경할 만한 선각자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상현 이능화였다. 1889년에 서울에서 영어학당을 졸업하고 한성외국어학교의 프랑스어 교사, 한성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개화기에 국제적인 시야를 가졌던 상현은 한일합방 이후 위창 등과 민족정신의 계몽 및 선양에 힘쓰면서 종교와 민속에 관한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넓은 의미의 무형문화재와 민속학에 관계되는 것으로 (조선무속고)·(조선여속고)·(조선해어화사)(기생의 풍속사)·(조선제례고)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비록 위창의 (근역서화징)처럼 순한문으로 씌어진 것이긴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관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상현 같은 선각자를 배경으로 석남이 이 땅의 민속놀이와 그 원형을 조사·연구하고 또 보호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시키는 근대적인 민속학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고종황제 때에 시종무관을 지낸 경남 언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의 동경제국대학 상대에 유학, 상학을 전공하다가 민속학에 뜻을 두면서 이미 보장받았던 엘리트 코스를 집어치운 석남은 조선에 돌아오자 각지를 여행하면서 무서운 집념으로 살아 있는 민속의 기초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 그는, 도쿄의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와서 민족문화 연구에 착수했던 손진태(석남보다 4살 위, 한국전쟁 때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다가 납북), 고향 친구로 역시 와세다대학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 정인섭 등과 더불어 최초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하고, 집의 돈을 가져다 (조선민속)(1933년 1월에 1호 발행)이라는 역시 최초의 민속학 연구지를 발행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펴 나갔다. 집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돈이 있었다는 조건은 석남의 민족적인 포부와 이 땅의 민속학 개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제 고급 카메라와 노트가 든 가방을 메고 자유롭게 여러 지방을 답사하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무시되고 있던 독특한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각종 연중행사와 종교의식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풍속적인 민구와 예부터 내려오는 서민문화의 각종 민예품들도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 수집의 대상이었다. 살아 있는 민속의 형태를 조사·파악하는 현지 답사와 함께 석남은 옛문헌들을 뒤져 그것들의 연원과 유래를 찾아내는 학술적인 고찰에도 열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잡지에 민속학의 새로운 의미를 역설하고, 더 많은 관심인과 연구가를 기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했다. 그는 연구학자인 동시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조사한 자료와 지식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여러 동학자 및 대중과 관심을 같이하려고 했다. 사재로 '조선민속학회'를 이끌면서 석남은 사라져가는 이 땅의 민속놀이를 세상에 알려 재인식시키는 한편 그 보호에 힘쓰는 행사도 자주 꾸몄다. (조선일보)를 움직여 전국 각지의 농악대를 서울로 불러다 일대 경연대회를 여는가 하면 황해도의 '봉산탈춤' 을 처음으로 서울에 유치하여 '양주별산대놀이' 와 비교하는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봉산탈춤'은 석남을 가장 매혹시킨 민속놀이의 하나였다.
1930년대 중엽,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석남은 사리원(봉산군청 소재지)을 찾아가서 당시 조선인들의 군중적인 모임을 좀처럼 허락하려고 하지 않던 일본인 책임자를 설득시킨 후, '봉산탈춤' 의 전통적인 기능보유자들을 모아 7월 백중날(음력) 한바탕 놀게 하고는 그 진행과정과 대사를 촬영·기록하는 한편 방송국을 움직여 실황중계의 특별방송까지 시켰다. 또 그때 마침 백두산의 동물 생태를 조사하러 가던 스웨덴의 동물학자 베르그만을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봉산탈춤' 놀이를 무비카메라로 촬영케 함으로써 유럽에 이 땅의 고유한 민속놀이 하나를 소개하도록 했다고 한다(교수의 증언, (한국민속고) 서문에서). 앞의 이야기가 혹시 1934년 단오날에 '조선민속학회'와 경성제대 민속조사반이 사리원에서 특별히 '봉산탈춤' 을 실연시켰던 때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때엔 같이 참관하기로 했던 방송국과 신문사측이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석남은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속고)에 수록된 (사리원 민속무용에 대하여)에서 ). 조국이 해방을 맞은 뒤, 석남은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민속박물관을 발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의 집념을 협조해준 사람은 과거의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한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었다. 김관장은 당시 미군정청의 관계관을 움직여 국립민족박물관 간판을 서울 남산 밑에 있던 전의 총독부 소속 건물에 걸게 하고 석남이 관장으로 취임하는 데 협력했다. 이 민족박물관의 내용은 지난날 조선의 민예품에 심취했던 일본인 연구·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경북궁의 한 고건물을 빌려 개인적으로 창설했던 조선민족미술관의 컬렉션(도자기·민화·기타 민예품)에 석남 자신이 수집했던 민속 가면 등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이 민족박물관을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던 미속의 진작·조사·연구기관으로서의 민속박물관으로 발전시키려 했었다(1936년 1월 1일에 (동아일보) 지상에서 말한 공상계획).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1948년에 45세로 병사함으로써 그 새로운 포부는 좌절되고 말았다. 석남이 작고한 뒤, 국립민족박물관도 열의 있는 적절한 후계자가 없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정부기구 축소 조치로 폐쇄되고, 가면을 포함한 그의 민속애의 컬렉션은 야나기의 그것과 분별이 불가능하게 뒤섞여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석남의 또다른 컬렉션으로, 1949년에 서울 보성중고교(전형필 재단)에서 인수했던 진귀한 고서들도 한국전쟁 중 학교 도서관에서 무참히 피해를 받아 상당수가 사라져갔고, 다행히 살아남은 2,359책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현재 간송미술관)로 옮겨 보관돼 있다. 진작부터 학계가 알고 있던 귀중본 가운데 (삼국유사)의 잔본과 (매월당 시호)(필사본)는 인멸돼버렸고, 희귀한 계미자본(1403년에 주조된 최초의 조선 동활자 책)의 (동래선생교정 북사상절) 2책만이 기적적으로 수습되어 있다. 한편 석남이 (조선민속)을 비롯한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해 남긴 30여 편의 연구논문과 계몽적인 글들은 그가 타계한 지 12년 만인 1960년에 그의 매부되는 양재연 박사가 중심이 되어 (한국민속고)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
|
|
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5장 행복을 찾아서
3.의무와 자율
인간이라고 하는 낱말은 "사람들 사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이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삶을 영위하여 가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이란 한마디로 "관계존재"이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한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의 의무는 무엇인가? 학생의 의무는 물론 공부하는 것이다. 어떤 회사의 사무원이 있을 때 이 사무원의 의무는 사무를 충실히 보는 것이다. 학교라는 사회를 전제로 할 때 학생의 의무는 공부하는 것이지만 이 학생편에서 보면 공부하는 것은 동시에 이 학생의 자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무원의 편에서 볼 때 사무를 충실히 보는 것은 이 사무원의 자율이다. 의무는 사회 안에서 개인이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자율은 한 개인이 인격체로서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무와 자율은 똑같은 것으로서 어느 편에 서서 보는가에 따라서 의무라고 하기도 하고 자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율을 동반하지 않는 의무는 참다운 의무가 될 수 없으며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자율 역시 참다운 자율이 될 수 없다. 자율을 동반하지 않는 의무는 구속이다. 마찬가지로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자율은 방조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에게 "너는 하루에 꼬박 4시간씩 네 방에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너의 의무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명령이자 구속이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지 못한 과거의 콤플렉스를 어린 아이를 통하여 보상받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특정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일 국민학교 3학년 아이가 그러한 명령을 따른다면 그것은 또한 복종이자 맹목적인 굴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윤리적인 행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성적으로 반성되지 않은 명령이나 또는 실천은 맹목적이므로 그러한 명령이나 그 명령의 실천은 구속과 맹종에 불과하다. 사회 윤리적으로 볼 때 역사적 의식이 아직 제대로 꽃피지 못한 후진국 사회라든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우리들은 구속과 굴종이 마치 윤리적인 척도인 양 실행되고 있는사실을 접할 수 있다. 우간다, 필리핀,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곳에서는 어떤 개인이 마치 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과도 같은 행동을 하면서 국민들도 하여금 이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참다운 의무라고 믿게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국민의 자발성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생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에서는 특정한 당, 예컨대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국민의 자발적인 사고와 행동을 도외시하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인간의 자발성을 일깨우기 위한 말이다. 자발성은 자기 반성을 포함한다. 자기 반성이 결여된 의무란 헛된 의무이며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단지 이익 추구를 위하여 이용하기 위한 위장된 의무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인격체 및 주체로서 "이 일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가 마땅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스스로 결단하여 행위할 때 우리들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도 그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반성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구성하는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행위는 결핍으로부터 충만함으로 전환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 사회적 선이 보장될 수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넋두리
본뜻:본래는 무당이 죽은 이를 대신하여 하는 말이었다. 무당이 푸닥거리를 할 때 죽은 이의 혼을 불러내어 그의 하소연을 받아 얘기함으로써 죽은 이의 한을 풀어내는 의식을'넋두리'라 한다
바뀐 뜻:오늘날에 와서는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고 하소연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넓이뛰기
본뜻 : '넓이'라는 말은 면적이나 평면의 크기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넓이뛰기를 하려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한 번씩 뛰어서 그 면적을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통용되어 왔던 넓이뛰기는 얼마만큼 멀리 뛰었는가 하는 거리를 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확한 용어를 쓰려면 멀리뛰기라고 해야 한다. 요즘에는 운동계에서도 넓이뛰기 대신에 멀리뛰기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뀐 뜻:사전에서는 넓이뛰기를 '폭이 넓게 뛰기를 겨루는 경기'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그 정의 자체가 잘못된 것임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운동경기에서 '넓이뛰기'란 성립되지 않는 용어라 하겠다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가 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3년 남짓하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목수인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을 불렀다. 그런데 예수가 제자로 선택한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로 보자면 사회지도층에 사람들이 아니라, 어부, 세리 등 하층민에 속했다. 예수는 활동 초기에 유대교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각종 기적을 행하면서 갖가지 불치병 환자들, 예컨대 귀신들린자, 간질병자, 중풍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고,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로 5천 명을 먹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점점 불어갔다. 그는 갈릴리 지방을 무대로 해서 백성을 가르치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주로 구약성경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는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당시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는 점이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만일 백성들이 자신들의 말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자신들의 도덕적 권위가 실추되고, 그것을 곧 현실적, 사회적 상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말에서 헛점을 잡아 공격하려 했다. 그 공격의 주제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이 던진 세금에 관한 문제를 올무로 삼았다. 유대는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납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였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하고 예수를 추켜세운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당신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카이사르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당시 유대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세금 문제에 대한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즉 예수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을 비춤으로써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질문이었다. 이들이 나중에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고소할 때 죄목으로 삼아 말한 것이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카이사르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합니다." 라고 한 것을 보아 이 점은 분명해진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해 만일 예수가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는 의미가 되어서 로마법에 저촉된다. 그러나 또한 세금을 바치라 하면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결국 외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를 간파한 예수는 그들에게 은전을 보이라고 말하면서 그 은전에 누가 새겨져 있느냐고 되물었다. 당시 은전에는 로마황제인 카이사르 티베리우스의 상과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예수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재차 묻고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말하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누가복음 20:25)고 대답함으로써 반대파의 말문을 막았다. 또한 예수는 이 말로써 이후 기독교들의 정치관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제시했다. 신앙과 정치,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틀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가 하려는 일은 기존 국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 새로운 나라, 새로운 국민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그 국민은 현실적으로 각각 지상의 나라의 시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지켜야 했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로마 국가와 부딪칠 필요가 없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예수의 입을 통해 이 원칙은 다시 한번 천명되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해 국가의 질서와 권위에 복종하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졌다.
|
|
|
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엄마, 미안하지만 난 갈 수 없어
공부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문 고등학교와 명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물도 남에게 조금도 빠지지 않는 재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외국에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와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히 있었고, 또 학교측에서도 학위를 받아오면 자리를 줄 터이니 유학을 가라고 적극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극히 보수적인 부모가 그녀 혼자 먼 유학길에 오르는 것을 한사코 막았습니다. 결혼한 뒤에 남편의 뒤를 따라가 내조하면서 공부하는 것만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갑부 집안의, 역시 명문 대학을 나온 아주 잘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자가 유럽의 어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어, 두 사람은 그 나라로 떠났습니다. 남편이 학업을 시작하자 그녀도 공부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치를 보아하니 남편은 아내가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아내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는 남편을 따라와 공부하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등줄기에 식은담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보다는 남편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남편과는 다른 학문을 전공했지만, 넓게 보면 같은 사회 계열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학교에 간 사이에 그의 책을 펼쳐보곤 했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그런 공부에 쩔쩔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녀는 그 나라 말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남편이 다니는 학교 당국으로 자신의 성적증명서를 떼어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잘생긴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미리 전공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보지 못하도록 책을 주방의 그릇을 넣어두는 가구 같은 은밀한 곳에 숨기고는, 그가 집에 없을 때만 몰래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윽고 아들이 만 한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자신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공부를 하려는 속셈으로 자신과 결혼한 것이 아니냐면서 성질을 버럭 내고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말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2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석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열정을 그냥 삭일 수가 없었던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공하려 하는 학과의 교수를 만나 자신을 소개한 후, 공부하고 싶으니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교수는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 나라에 온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은데다 말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10년간 학교에 다닌 외국 학생보다 더 언어에 능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성적만 좋으면 자기 권한으로 입학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학교 당국에 이미 자신의 성적 증명서가 도착해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자, 교수는 곧바로 행정처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성적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교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당장 입학을 허용할 터이니 한 달 후에 시작되는 학기부터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 몰래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침대 및이나 소파 밑, 텔레비전 받침대 뒤에 숨겨놓고는 남편이 없을 때, 그리고 남편이 있는 밤에는 화장실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서 곧 유명해졌습니다. 학과에는 공부 잘하는 한국 학생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문이 남편의 귀에 들어갈까봐 두려웠습니다. 학교에서 남편 친구를 만나면 심심해서 아기를 데리고 산책나온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아기를 데리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1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벌써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지만 남편은 아직도 석사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남편이 학위를 받을 때까지 일단 공부를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남편이 리포트 타이핑하는 시간을 아끼도록 자신이 타이핑해 주겠다고 하고는 그 과정에서 내용을 수정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좋아하던 남편이 점점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그것도 그 나라 말을 잘 알 리 없는 아내가 리포트를 수정해 준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몰래 학교에서 공부했다면서 그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 바람에 코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존심이 몹시 상했는지 그 후로 심심하면 구타를 했습니다. 보다 못한 유학생들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그 남편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아내가 공부를 해 이담에 훌륭한 일을 하면 남편도 따라 좋은 것이 아니냐며, 선진국에서는 아내가 박사인데 남편은 고졸에 막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지 않느냐고 달랬습니다. 반 년 후, 남편도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한번 불붙은 폭력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3년 반 만에 겨우 졸업했는데 아내는 최고 성적으로, 그것도 1년 반 만에 졸업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박사 코스에서 당당하게 공부하겠다고 죽을 각오로 선언했습니다. 남편은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성질이 날 대로 난 그녀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두고 너무나 간단히 이혼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친정집으로 돌아왔고, 남편은 박사 과정을 밟아야 했으므로 그 나라에 남았습니다. 아들은 시댁에 와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아들이 보고 싶어 몰래 시댁 근처에서 맴돌다가 유치원버스에서 내리는 아들을 친정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들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면서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형사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유괴 혐의로 체포해 갔습니다. 그녀는 경찰서에서 이틀만에 나왔습니다. 이혼한 여자가 어린 아들이 보고 싶어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을 용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보고싶어서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셨습니다. 며칠 후, 전 남편이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아들을 만나려 하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하던 공부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는 항상 아들 곁에 있었습니다. 공부도 때려치웠고, 직장도 잡지 않았습니다. 집이 워낙 부유한 까닭에 먹고 사는 문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데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다시 그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무섭게, 자유스럽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볼까 몰래 공부했어도 단기간에 최고 성적으로 석사 과정을 마칠수 있었던 그녀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박사 과정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아 귀국했습니다. 남편은 4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아들의 뒤만 졸졸 쫓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 가 숨어 있다가 남편이 아들을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학교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들을 데리고 나와 먹을 것을 사주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들이 어떻게나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지 놀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편이고, 어휘력도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습니다. 아들은 아빠와 등산도 가고 바닷가에도 놀러간다고 했습니다. 만화 영화도 같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박사가 되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도 아빠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아들을 만났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한 법정 소송을 걸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사 학위 논문 주임교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개발도상국의 사회 현상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1년 동안 합류하여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물론 기뻤습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아들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슬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일단 교수에게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아들을 데리고 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의 여권을 준비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법적으로 남남이기 때문에 그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와 함께 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출국해야 할 날짜가 다가와 초조해 하고 있던 그녀에게 전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녀는 불안해 하며 그를 만났습니다. 남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아와 모교 총장을 하겠다던 포부를 가진, 그런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들의 여권과 미화 1만 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1년만 빌려줄 터이니 데리고 갔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전 남편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방에서 나갔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있는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외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운동장에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엄마... 미안하지만 난 갈 수 없어. 엄마는 내가 없어도 참을 수 있겠지만 아빠는 그렇지 못하거든.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빠는 예전부터... 아빠는 내가 어디로 갈까봐 매일 밤 내 손을 잡고 잠을 자. 할머니는 엄마 때문에... 아냐, 하여튼 난 가지 못해...” 그녀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말은 남편이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단호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우리 준호, 아주 착하구나. 그래, 엄마 혼자 갔다올게... 그 동안 아빠 많이 기쁘게 해드려, 응? 엄마가 돌아올 때 선물 많이 사올게... 너 게임기 좋아하지?"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녀석은 손을 흔들어 엄마에게 바이바이를 하면서 교문으로 향했습니다. 아빠가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압구정과 칠삭동이 한명회
사관의 증언
세조조 말기, 이시애가 함경도 일원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모반대역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으나, 이때도 자신의 결백함을 끝까지 입에 담질 않았다. 한명회가 세상일에 바둥거리지 않으면서도 숱한 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짚어 볼 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조마저 단명으로 끝나자 한명회는 성종 시대를 이끌어 내면서 또다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지만, 그의 경륜은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종사가 태평해지면 풍속이 문란해진다. 고금의 역사가 그러했기에 한명회는 학문의 장려와 도덕의 확립을 역설하게 된다. "성균관에 서적이 모자라니 경사를 많이 인쇄하고, 각을 세워서 보존하게 하소서." 성종은 기꺼이 한명회의 주청을 가납하였으나, 호조에서는 전적을 간행할 돈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었다. 이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한명회는 자신을 헌납하여 간행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사재를 털어 조정의 일을 구원했다 하여 당시의 사림들도 한명회를 칭송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적고 있다. 한명회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의 늙은 내시 정동과 뇌물을 주고받았다 하여 귀국 후 호된 비난과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 한명회가 다시 사신의 중책을 맡고 명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임금에게 물었다. "지난번 사신으로 가서 정동과 뇌물을 주고받았다 하여 호된 탄핵을 받은 사실이 있사온데, 이번에 또 명나라 사람들과 뇌물을 주고받아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어찌해야 하올지 이 점을 확실히 해 주소서." 신하된 처지로 이 같은 말을 임금에게 묻는 경우란 결코 쉽지가 않지만, 바로 이 점이 한명회의 솔직하고도 담대한 성품일 것이다. "그것은 경이 알아서 하시오." 성종의 비답은 이러했다. 한명회가 아니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문답일 것이고, 또 한명회에게만 내려질 수 있는 왕명일 것이다. 한명회가 정치 일선에서 활약한 33년 동안은 문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죽어 가던 시절이던가. 그 어려운 시절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번잡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한명회는 언제나 그 중심부에 있으면서 거뜬하게 난제를 풀어 냈던 경세가였다. 한명회의 리더십은 솔직하고 사심이 없는 데에 있었다. 그는 거느린 사람들을 비교적 혹독하게 다스리면서도 그 허물을 덮어 줄줄 알았다. 당대의 석학인 신숙주가 그의 사돈이었으며, 세종대왕의 부마인 윤사로가 또한 그의 사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두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장순왕후(예종비)와 공혜왕후(성종비)가 바로 그분들이다. 이러한 연혼에서도 한명회의 인품을 충분히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젠 한명회에 대한 편견을 지적할 차례다. 한명회를 거론한 사서는 많아도, 그를 비방한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사팔뜨기요, 희대의 간신이며 아첨꾼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 원인은 놀랍게도 사실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단종애사"라는 한 편의 소설에서 기인되었다. "단종애사"란 물론 춘원 이광수선생이 쓴 역사소설에 너무 깊이 빠져든 과오로 인해 무려 7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터무니없는 역사 인식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승자의 기록인 까닭으로 사실을 왜곡한 예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며 어느 특정인을 지나치게 미화한 예도 없지는 않을 것이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의 일반적인 행장을 등재하는 것으로 현자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그 기사에 이어서 반드시 '사관왈'이라는 논평의 기사를 등재하는 것으로 사실의 객관성을 높이고 있다. 참으로 현명한 기술방법이 아닐 수가 없다. "성종실록" 18년 11월 14일(한명회가 죽던 날) 조에도 한명회의 행적을 소상하게 적은 다음, 위에서 말한 '사관왈'이라는 이름으로 비평적인 기사를 함께 싣고 있다. 그 전문을 여기에 소개해 두고자 하는 것은 그가 까닭없이 매도되거나, 비하될 수 없는 인물임을 당대의 사관들이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 두려는 노파심 때문이다.
한명회는 젊어서 유학을 업으로 삼아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중순위에 속하여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내다가 권남과 더불어 망형우의 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알아줌을 만나, 대책(단종을 밀어낸 일)을 찬성하고 그 공이 제일을 차지하였으며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마음속에 국무를 잊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한 것 또한 많았다. 그러므로 권세가 매우 성하여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이 문에 가득하였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일시에 재상들이 그의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노비를 비롯한 보화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첨을 많이 두어 그 호부함이 일시에 떨치었다. 여러 번 사신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갔었는데, 늙은 내시 정동에게 아부하여 많이 가지고 가 뇌물로써 사사로이 황제에게 바쳤으나 부사가 이를 말리지 못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권세가 이미 떠나자 빈객이 이르지 않으니 수심에 잠긴 얼굴로 적막한 탄식을 하곤 했다. 비록 여러 번 간관이 논박하는 바라 있었으나 다른 뜻이 없었기에 그 훈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뉴턴의 사과
영국이 낳은 근대 이론 과학의 선구자 '뉴턴' (1643-1727)은 3대 발견 즉 빛의 분석,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으로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그중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전한다.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었는데 때마침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 이로 말미암아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인 '울스소프'로 돌아갔다. 그 후 고향에서 1년 반 가까이 지내는 동안 앞의 3대 발견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갈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안다'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 한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에게까지 미치는 지구의 중력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상상력의 비약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뉴턴'의 조카딸로부터 들어서 먼저 유럽 대륙에 퍼졌고 후에 영국으로 역수출되었다고 한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